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16. 임술민란 : 전국으로 번진 반봉건 투쟁의 불길
19세기, 격동하는 조선사회 :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1862년(철종 13) 2월 4일 경상도 단성민란에서 시작하여 연말의 전라도 남해민란을 전후로 막을 내렸던 전국적인 농민 봉기를 흔히 임술민란이라고 부른다.('1862년 농민항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실 19세기 조선사회는 '민란의 시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거의 매해마다 끊임없는 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곤 하였다. 임술민란과 갑오농민전쟁 사이에도 갖가지 민란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농민 봉기의 절정이라고 한다면 1862년에 일어난 농민항쟁은 이를 위한 전초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농민들은 이제 스스로 주체가 되어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 세우기 위해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사회 변동에 대하여 우선 알아보기로 하자.
18세기부터 지속되어온 향촌 지배 강화 정책은 조선 후기에 들어 납속제 실시에 따른 신분제의 붕괴, 경제 생활의 변화로 인한 농민의 계층 분화와 양반의 몰락, 그리고 이에 따른 상공업의 발달 등 사회전반에 걸쳐 기존의 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순조 즉위 이후 계속된 안동 김씨 등의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전통사회의 기존 질서가 크게 변질되었다. 16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당쟁은 처음엔 이념을 달리한 당파적인 성격을 띠었지만 후기로 올수록 정권 탈취를 위한 유혈 투쟁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당쟁이 유혈로 끝을 맺곤 하였지만 그것은 당쟁이 극대화된 하나의 형태였을 뿐이지 당쟁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었다. 어차피 정치에는 다른 이념과 견해를 가진 집단들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오히려 이질적인 당파가 국가의 발전을 위해 정반합적인 논의와 경쟁을 한다면 정치 행태는 그만큼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처럼 일정한 약속과 규칙에 따라 운영되는 정부가 아니라 자파의 실익을 중심으로 대의명분에 따라 흩어지고 모였으니 결국 힘의 우위에 있는 쪽이 상대방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병폐를 막기 위해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을 써서 각 파의 인물들을 고루 등용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거부한 세력이 있으니 바로 노론 벽파였다. 앞에 홍경래난에서 잠시 살펴보았지만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고 대왕대비 김씨의 수렴청정이 끝난 뒤에 김조순 등은 왕실의 외척으로 등장하여 자기 종친과 가문의 욕구 충족에 최우선을 두게 되었다. 그 결과 정치는 없고 사리사욕에 물든 무리들이 왕실에 득세하게 되었으니 이를 역사에서는 세도정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세도정치 자체에 대해 면밀히 분석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물론 '임술민란'과 관련해서는, 그러한 파행적인 통치체제로 말미암아 수많은 민란이 일어났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19세기 중엽까지의 세도정치는 바로 조선의 운명, 한국 역사의 향로를 크게 바꾸어 놓은 본질적인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경쟁 상대가 사라진 상태에서 일당독재는 온갖 부조리와 구조적 모순을 야기시킬 수밖에 없었다. 내적으로는 새로운 질서와 체제를 원하는 민중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고, 밖으로는 이미 번성한 제국주의의 동태 파악 등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무능력한 정부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보성은 반동적 체제에 반기를 들기 마련이며 이러한 흐름 가운데 임술민란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중엽까지의 세도정치에 대한 이해는 역사 발전의 논리 차원에서 필수적이다. 세도정치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통치 형태는 아니다. 세도정치 역시 나름대로 역사적 기원과 배경을 갖고 있다. 멀리는 숙종 때까지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 영조와 정조 때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내용이 중복되지만, 세도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18세기까지의 정치사를 다시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영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건은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단순히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불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붕당 정치의 틀이 굳어진 조선 중기에는 이른바 사색당파라는 것이 생겨 실리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숙종이 죽고 나자 경종과 연잉군(영조)을 둘러싸고 왕통을 누구를 통해 이을 것인가를 놓고 격렬한 정쟁이 벌어졌는데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이 연잉군을 따르는 노론파를 일대 숙청하여 정권의 안정을 바랬다.(신임사화) 그러나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죽고난 뒤 연잉군이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되었다. 영조는 세자 시절에 신하들간의 당쟁이 왕권을 좌우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탕평책을 구체화시켰다. 그렇다고 붕당간의 정쟁이 멈추지는 않았다. 정치 관료들은 계속해서 당파의 이익에 따라 움직였다. 영조의 즉위로 세력을 잡은 노론들은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였고 이에 따라 소외되어온 남인들이나 소론 사람들의 등용이 그만큼 힘들어졌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소론과 노론의 재대결이 불가피해졌고 그래서 일어난 것이 '이인좌의 반란'이었다.
노론은 왕을 중심으로 자기들의 세력권을 확장시키기 위해 계속적인 암투를 벌였다. 특히 사도세자와의 갈등은 점점 대립으로 나타났으며 비대해진 일부 노론 세력에 의해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까지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영조는 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기 시작하였고 이를 놓고 파벌 논쟁이 벌어졌다. 여기서 세자를 따르는 이들이 시파이며 그 반대파가 벽파였다. 그러나 결론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는 것으로 나고 말았다. 이때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던 어린 세손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조였다. 정조는 벽파들의 끊임없는 탄압과 암살 위협에 시달리다가 왕위에 오르자 홍국영을 통해 벽파의 핵심 인물들을 처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조는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영조의 탕평책을 확대하여 그때까지 거의 정계에서 소외되어온 남인 사람 등 신진 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에 노론 벽파는 정조와 남인 세력 등 반대파를 향해 계속 논쟁을 걸어왔다. 이들의 주요 무기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었다. 당시 남인들 중에는 천주교를 믿는 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노론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회였다. 노론 벽파들은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몰아부치면서 반대파 제거에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정조는 천주교인들을 대상으로 교화정책을 썼으며 어떤 경우에는 직접 천주교인을 풀어주는 적도 있었다.정조는 왕권 강화와 민생 복지를 위해 천주교를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갑자기 등창이라는 병을 얻어 급사하고 말았다.(정조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사와 야사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기로 한다.) 최고의 정적이었던 정조가 죽자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 정계는 노론 일색이 되었다. 이미 신유교난의 과정을 밟아 반대파를 제거한 노론들은 일당독재 체제의 기반을 다진 것이다. 19세기 세도정치는 김조순으로 시작된다. 1802년 그의 딸이 순조의 왕비가 되어 외척으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쥐게 된 것이다. 이상이 세도정치의 등장 배경에 대해 간추린 내용이다. 그런데 세도정치가 단순히 권력 싸움에서 승리하여 나타난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 왕실은 후기로 오면서 당쟁에 휘말려 왕권을 강화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따라서 임금은 군사지휘권을 가장 믿을 수 있다고 본 외척에게 맡겼고 호위대장 같은 중책도 역시 외척의 몫이었다. 이것은 왕명에 따른 것으로 공식적인 관례로 굳어졌다. 이렇게 세도정치의 뿌리인 외척 세력은 임금의 후원과 뜻에 따라 중앙 정계를 장악하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세도정치의 출현은 필연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령 김조순의 등장이 가문의 세력이 확장된 탓도 있지만 왕권에 불안을 느낀 순조가 김조순을 신임함으로써 더욱 세도정치의 토대가 굳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세도정치가 정당성을 얻는 것은 아니다. 임금의 뜻을 받들어 세도가가 민생을 돌보고 국가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면 일당독재라고 해도 그리 큰 비난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주변에 모여드는 인물들은 부와 출세에만 관심이 있어 외척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고, 나아가 매관매직 등의 부조리가 만연되어 지방 관리까지도 부패해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왕실의 부패로 인해 국가 기강은 해이해져 군주체제마저 위협을 받게 되어 통치권의 부재 현상까지 나타났다. 결국 흔히 말하는 19세기의 삼정 문란, 즉 임술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지방 관리들의 탐학은 가히 무정부적인 상태에서 빚어진 부패 현상이었던 것이다.
'삼정 문란'은 그 폐해가 극에 달하여 지배체제 자체가 붕괴될 조짐이었다. 모든 부세를 지방의 수령, 이서, 향임 등에게 일임한 탓에 농민들에 대한 수탈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특히 돈으로 관직을 산 관리들은 그 대가를 민중들에게 바라고 탐학을 일삼았다. 그래서 삼정을 통한 수탈의 극대화는 수령과 농민 사이에 적대 관계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주와도 계급적인 대립을 하게 되었다. 역대 이래로 농민 수탈의 목적은 탐관오리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근대적인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부과되는 세금은 곧바로 착취와 억압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자연 재해까지 겹치면 농촌은 그야말로 초토화의 길로 치닫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무엇보다도 철종대(임술민란이 일어난 1862년 다음 해에 철종은 죽었다.)에는 오랜 세도정치 탓에 왕권이 극히 약화되어 지방 행정에 대한 중앙 간섭이 너무나 미약하였다. 국가는 국가대로 재민 진휼 등을 위한 재정 지출이 증가하여 매년 적자를 면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농촌 피폐화의 가장 큰 원인은 지방 관리들의 수탈과 지주들의 착취 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더이상 생계를 지탱할 수 없는 농민은 유랑민으로 떠돌거나 빈민으로 전락하여 이에 항의하기 위해 무력 항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임술민란을 삼정의 문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흔히 삼정란이라고도 부른다. 그중에서도 특히 농민을 위한 복지정책이라고 볼 수 있는 환곡의 문란과 관리의 토색질 등이 가장 농민들을 괴롭히는 부조리였다.
원래 환곡(환정)은 고려 때 시행된 흑창나 의창 비슷한 기능을 가진 제도였다. 즉, 환정은 보릿고개라고도 부르는 춘궁기에 농민들에게 식량과 종자를 대여해 주었다가 추수 후에 이를 회수하여 기본적인 식량 문제와 농업 재생산성을 제고하는 한편 묵은 곡식인 군자곡을 새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일석이조의 구빈 제도였다. 그러나 근세에 가까이 올수록 환곡은 재정 강화의 수단으로 바뀌어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고 난 뒤 환곡을 요구하는 농민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중앙정부는 이것을 궁핍해진 재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아 갚아야 할 곡식의 양을 세 배 이상으로 늘려나갔다. 이렇게 되자 지방 관리들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기 시작하여 18세기 말엽에는 여러 형태의 환곡 제도가 자리잡게 되었다. 관리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위해 강제로 원곡을 떠맡기는 경우까지 생겼다.(이를 억배라고 부른다.) 가령 예를 들자면, 임술민란이 있기 직전 지방 관리들은 원곡조차 갚기 힘들 만한 양을 강제로 빌려주고 이를 이용하여 농민들을 착취하였다. 심지어는 원곡에 모래나 쭉정이, 겨를 섞는 경우까지도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외지에서 헐값으로 미곡을 사들여 이를 농민들에게 강제로 빌려주고 엄청난 이자를 부여해 고가로 징수함으로써 수확의 대부분이 관리의 손에 들어가고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더 심한 경우에는 원곡의 양을 속이거나 전량을 전부 억배하여 여기서 생기는 이익을 챙겼다. 원래 환곡은 저장되어 있는 전체 원곡의 절반만 할 수 있었다.
전정은 토지로부터 받는 각종 세금을 말한다. 원래 전정은 1결마다 전세가 4두, 대동미가 12두, 균역법 실시 이후에 받게 된 결작의 양이 2두, 여기에 훈련도감 소속 삼수병의 급료 지급을 위한 삼수미 1두 2승 등 모두 합쳐봐야 20두 정도였다. 이 양은 일반적으로 수확량의 10분의 1이 되지 않는 적은 것이었다. 그런데 수령과 향리들은 여기에다가 인정미, 선가미, 민군미 등 40여 가지가 넘는 갖가지 명목의 부가세를 징수하여 1결당 징수하는 양이 적게는 50에서 많게는 100이 넘어갔다. 관리들의 착취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심지어는 놀고 있는 땅에도 세를 부과하거나 도결(지방관리가 공전이나 군포를 사취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결세를 정액 이상 받아내는 것)을 통하여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갖가지 방법으로 세를 거두어가니 농민들은 부채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초근목피로 간신히 목숨을 연명해 가거나 고향을 버리게 되었다. 군정이라는 것은 16세에서 60세에 해당되는 남자들에게 군포 1필을 징수하는 제도를 말한다. 18세기 말에 시행된 균역법 이전에는 2필이었다. 군포 1필은 쌀 6두에 해당된다. 그러나 실제로 따지고 보면 군역이 면제된 양반의 몫까지 나머지 농민들이 이를 부담해야만 했다. 국가는 재정 강화 일환책으로 지역마다 일정한 군포액을 할당해주어 관아에서는 이를 채우기 위해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부여하고(백골징포) 젖먹이 아이에게도 책임량을 할당하였으며(황구첨정), 심지어는 나이까지 바꾸어 60세 이상의 남자에게도 부과하는 부정을 저질렀다. 이런 탐학에 시달려 견디다 못해 도망을 치면 그 해당량을 친척이나 이웃에 부과하였다. 이런 연유로 자산을 모은 일부 농민들은 돈을 주고 양반을 사서 군정의 폐해를 피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19세기 양반의 수가 급증한 이유 중 하나이다. 결국 소작농 등 빈농들만 관리들의 집중적인 착취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농민들을 착취한 것은 관리들만이 아니었다. 이른바 토호들은 향촌민들을 무단적으로 토색하거나 심지어는 관청과 협작하여 부세 운영에 관여하면서 농민들을 사적으로 수탈하였다. 1862년에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 항쟁의 원인이 수령, 이서의 탐학뿐만 아니라 토호들의 사적 착취에도 있었다. 물론 토호들 중에는 민란을 주동한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주로 수령과 개인적 마찰을 일으켜 농민들을 강제로 모아 저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로 민란은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다. 토호들은 대체로 과거를 등진 명문거족의 후예들이기도 했지만, 이중에는 평민이나 이서층이 경제적 성장을 토대로 호족적인 세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토호가 된 경우도 허다했다. 따라서 토호들은 당연히 대표적인 기득권층이 되었고 이들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향촌민들을 착취함으로써 수령이나 향리와 버금가는 권세를 휘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국가 기강이 문란해져 수령 등 지방관들의 탐학과 이서 등 중간 관리들의 농간, 그리고 토호의 토색질이 횡행하여 이 틈바구니에서 농민들과 일부 부민요호들은 착취 대상으로 전락해갔던 것이다.
민중적 자치기구 향회 : 임술민란의 조직 기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임술민란의 도화선은 삼정 문란, 즉 지방 관리들의 탐학과 토호들의 토색질에 있다. 특히 지방관과 이서층의 탐학과 농간이 매우 심하였다. 단성에서 시작하여 남해민란까지의 반란 동기가 거의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임술민란의 원인을 지속적인 관리들의 탐학에서 찾는다고 봤을 때 언뜻 보면 갑작스럽게 일어난 반란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하기 쉽다. 고려시대 이래로 계속된 농민 반란의 양태 가운데 우발적으로 일어난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임술민란이 일어나기 전후의 농민들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단순히 감정에 의존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이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조직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자치적인 구조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향회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향회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1862년 일년 내내 전국적인 봉기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향회는 원래 조선시대 양반들의 지방 지배기구로 설치되었다. 즉 향회는 관청의 보조기구로서 지방사회의 교화에 앞장서면서 수령들과 이서들의 통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유교에 입각한 신분 질서를 안정시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통치적 성격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주로 향안이라는 양반이나 재지사족들의 명단에 이름이 수록되어 있는 구성원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들을 향원이라고 불렀다. 설치 당시에도 지역에 따라 그 특성이 조금씩 달랐지만 대체로 향회에서는 향임 선출과 사족간의 단결, 이서층의 임면 등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지방 양반들은 향회를 통해 사족의 공동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수령을 견제하면서 이서층을 통제하였다. 다시 말해서 향약은 지방 사족들의 군 통제 기관이었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중앙의 통제가 부정적일 경우에는 향회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방 발전에 기여한 점도 있다. 그러나 향회는 어디까지나 신분을 전제로 한 기득권층의 주도 모임이었기 때문에 일반 민중들의 의견은 그리 크게 반영되지 않았다.
그런데 18세기에 들어서서 사민 체제의 와해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양반 계층에 분화 현상이 일어나 일반 민중들의 몫이 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향회는 사족 중심에서 이향층으로 옮겨 가게 되어 이서의 임면도 이서층 자신들이 결정하게 되었고 향임은 수령이 임면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향층의 정체가 무엇이냐이다. 18세기 중엽을 전후로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여 자영농으로서 부농층이 되는 자들도 생겨났으며 또한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양인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축적된 부를 이용하여 양반 신분을 돈으로 사거나 신분이 상승되어 사족을 대신하여 지방의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의 출신이 일반 양인이거나 천민이었기 때문에 중앙에 진출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만큼 민중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들을 당시 요호부민층이라고 불렀다. 19세기에 들어 수령들의 탐학이 본격화되면서 향회는 수령을 견제하고 통제하는 기구로 성장하게 된다. 이전의 향회는 대체로 수령들의 들러리 구실밖에 하지 못했다. 삼정의 문란은 단순히 일반 농민 계층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고 일부 요호들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요호의 성격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임술민란에는 일부 요호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이것은 수령들이 재력이 있는 자가 있으면 향임을 강제로 떠맡기고 이에 대한 대가로 거액을 요구하는 등 토색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또한 구휼을 명목으로 막대한 양의 곡식을 착취해가 요호들은 중앙의 통치체제에 깊은 불만을 갖게 되었다.
수령들은 원만한 부세 수취를 위해 향회의 모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따라 일반 평민들의 참여도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향회는 수령들이 제시하는 수취에 관한 안건을 의논, 결정하여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수정 사항을 제시하는 등 적극적인 의미에서 민중 중심의지방자치기구로 자리잡아 나갔다. 삼정이 문란해지면서 지방민들은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이들이 파견한 수령들에 대해 심한 불신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지방민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신변과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각성을 하였고, 향회는 이러한 '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지방의회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더이상 민중은 수탈 대상이 아니라는 자각하에 무너져가는 봉건적 지배질서에 대항하여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뜻에서 향회의 모임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지방별로 향회의 활동이 활발해진 이유는 대대로 내려오는 계나 두레, 품앗이 등 공동체 사상이 농촌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향회를 중심으로 대동 단결의 필요성을 절감한 나머지 수동적이고 체제순응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수령들의 실정을 비판하고 착취의 부당성을 관청에 항의하는 등 대등한 입장에서 향회를 운영하게 되었다. 당시 수령들은 이러한 향회의 능동적인 대처에 불만을 가졌다. 악질적인 관리들은 이마저 부정하고 계속 탐학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향회는 부당한 안건이 생기면 통문을 돌리고 회의를 소집하여 이를 토의하여 의견을 결집한 다음 수령에게 소를 내고 그래도 안되면 감사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즉 향회는 일단 사안의 부당성이 나타나면 적법적인 절차에 따라 항의하는 형식을 밟아나갔던 것이다.
이것은 임술민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앞에서 임술민란이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향회의 선진적인 활동은 임술민란 직전까지도 계속되었다. 즉 민중들은 무조건 무력으로만 사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수령들의 탐학을 견제하려는 노력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향회의 근대적인 성격이 갖는 의미는 이렇다. 우선 19세기 민중들은 빈번히 소장을 제시할 정도로 권리 의식이 상당 수준까지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합법적인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항의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는 뜻도 된다. 이것은 나중에 볼 갑오농민전쟁의 폭발지인 고부의 농민들 사이에서도 엿볼 수 있는 실례이다. 따라서 향회는 근대적인 의미의 지방자치기구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당시 봉건 질서가 와해되어가는 속에서 민중들은 불안한 조선사회에 향회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들의 개혁 의지를 수령들이 모두 받아들일 리는 만무였다. 요호를 중심으로 한 농민들은 합법적인 항의의 한계를 느끼고 드디어 무력으로 신질서를 세우기 위해 봉기를 계획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임술민란은 일정한 조직도 없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물론 70여 회에 걸친 민란 모두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진행된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임술민란이 합법적인 저항을 거친 후에 일어난 불가피한 봉기였다는 점이다.
임술민란의 전체 개요 : 전국으로 퍼진 반봉건 투쟁의 불길
1862년 2월 4일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된 농민항쟁은 다음 해 초까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등 삼남지방과 황해도, 함경도, 경기도 광주와 제주도로 이어졌다. 중요 항쟁 횟수만 따져봐도 무려 72차에 걸쳐 일어났다.(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을 기준으로 파악한 것이다. 추측하건대, 이 숫자보다 더 많은 민란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농민항쟁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먼저 합법적인 방법으로 부세의 부당성을 알린 다음 그것이 불가능해질 때 무력 봉기로서 의사 표시를 하여 관청을 점령, 해당 관리들에게 삼정 문란에 대해 심문한 뒤 쫓아내고 이서 등을 처단한 다음 제도적 개혁을 보장받은 뒤에 해산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각 지역 농민봉기는 한번 발생하면 2-7일간 계속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성주, 상부, 거창, 창원 등에서는 두 차례, 그리고 제주도에서는 무려 세 차례에 걸쳐 봉기가 이루어진 곳도 있었다. 또 항쟁이 3-5월의 춘궁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동기가 그들의 생존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5월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이 달만 해도 전라도 고산과 부안, 경상도 상주, 충청도 공주 등 20여 개 지역 이상에서 농민 항쟁이 발생하였다. 또한 각 지역별 항쟁 지도부를 보면, 단성, 인동, 장흥은 전관료, 개령은 반민이었고, 나머지 지역은 모두 농민이었음을 볼 수 있다. 항쟁에 참여한 숫자는 진주, 성주, 제주도가 수만 명이었고 나머지 지역은 대체로 수천 명이었다고 하니 대규모 운동임에 틀림없다.
봉기한 농민들의 요구 조건은 한결같이 지배계층의 경제적 수탈, 즉 도결이나 통환같은 환곡의 폐단은 물론이고 삼정 혁파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항쟁을 주도하는 동안에 처벌 대상으로 삼은 대상은 탐학을 일삼는 지방 관리와 특권을 누리는 양반, 관리와 협작하여 토색질하던 토호들, 그리고 심지어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부당한 거래를 해온 상인, 고리대금업자 등이었다. 시위대는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주변에서 농민들을 결집시킨 다음 시위를 하면서 중앙으로 나아가 관아를 습격, 파괴하고 그 삼정에 관련된 문부를 불태웠으며 곡식 창고를 탈취하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 시위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반증해주는 행동 양상이다. 또 이서나 양반, 토호의 집을 때려부수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곡식이나 재물을 빼앗았으며, 혹은 인신과 병부를 탈취하여 감옥을 깨고 죄수를 풀어준 지역도 있었다. 그 가해 상황을 종합해보면, 중간에서 이익을 챙기던 이서들이 수십 명 살해되었고, 부상자는 수백 명이고 가옥이 불타거나 약탈당한 수는 1,000호가 넘으며 피해 액수는 100만 냥 이상이었다고 한다. 항쟁의 형태가 홍경래의 반란처럼 정규군과 같은 무장 봉기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앙정부에서는 군대를 파견하는 대신 긴급 대책으로 안핵사와 선무사를 급파하여 민란의 진상을 조사하고 사태를 수습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안핵사를 파견한 곳은 진주에 부호군 박규수, 개령에 안동부사 윤태경, 제주도에 부호군 이건필, 익산에 부호군 이정현, 함흥에 행호군 이삼현 등이고 나머지는 그 도의 관찰사에 지시하여 민란의 원인과 진행 과정, 그리고 주동자 색출과 함께 수습책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와 더불어 중앙정부는 이삼현을 영남선무사, 조구하를 호남선무사로 임명하여 현지로 내려보내 안핵사와 함께 사후 수습을 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상 조사 끝에 주동자에 대해 처벌한 내용을 살펴보면, 농민군 가운데 효수 35명, 정배 57명, 기타가 70여 명이었다. 한편 항쟁이 발생한 지역의 수령은 그 책임을 물어 파직되거나 유배당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5월 들어 항쟁이 더욱 극성을 부리자 중앙정부에서는 박규수의 개혁안이나 기타 관료들의 강력한 건의를 참작하여 민란에 대한 근본 대책을 세우게 되었다. 철종은 특명을 내려 정원용, 김흥근 등 고위급 관료들로 구성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그해 5월 25일부터 윤8월 19일까지 4개월 동안 <삼정이정절목> 41개조를 제정하여 반포,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 개혁안의 골자는, 분급과 이자의 수취를 통하여 재정을 조달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부족한 재정을 토지 1결에 2냥씩을 부과하여 충당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군정이나 전정이 부분적으로만 개정된 것에 비하면 상당히 진일보한 내용이었다. 이것을 파환귀결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업무가 비변사로 넘어간 뒤인 10월 29일에는 이러한 새 정책을 정지시키고 다시 옛 삼정제도로 되돌아감에 따라 사회개혁 추진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경상도 창원, 황해도 황주, 충정도 청안등지에서 항쟁이 끊임없이 이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근본적인 치유 없이 임시 대책으로 마무리된 대농민 정책으로 말미암아 사회적 모순이 누적되어 고종 때에도 매년 산발적인 민란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70여 개 지역 이상에서 일어난 농민항쟁 모두를 다룰 수는 없다. 오히려 이중에서 한 곳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1862년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란의 원인과 진행 과정, 역사적 의의와 한계점 등을 밝혀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진행되었던 진주농민항쟁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임술민란의 성격과 의의를 부각시켜 보고자 한다.
진주농민항쟁 : 1862년 농민항쟁의 도화선
진주농민항쟁은 합법적인 부세제도 개혁 요구, 도결과 통환에 대한 무력 봉기, 그리고 해산의 순서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전형적인 임술민란이었다. 진주 일대 지역적 특색에 대해 <택리지>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네 고을 풍경이 합쳐져서 영강이 되고 진주읍 남쪽을 돌아 낙동강에 들어간다. 진주는 지리산 동쪽에 있는 큰 고을이며, 장수와 정승이 될 만한 인재가 많이 나왔다. 땅이 기름지고 또 강과 산의 경개가 있으므로 사대부는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며, 제택과 정자 꾸미기를 좋아하여, 비록 벼슬은 못했으나 한유하는 공자라는 명칭이 있다.
즉, 진주는 일찌기 농업이 발전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곡식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만큼 19세기에 들어 탐관들과 지주들의 수탈이 극성을 부릴 수 있는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는 것을 또한 반증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지방 수령.지주들과 농민 사이에 자주 대립 현상이 빚어진 것도 진주가 갖고 있는 지역적 특성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주 농민들의 평화적인 요구는 이미 185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해 6월에 진주 농민들은 바쁜 일손을 놓고 단체로 서울로 올라와 비변사에 결렴(토지를 대상으로 세금을 징수)의 부당성을 개혁해 달라는 내용의 소장을 제출하였다. 이미 1840년대부터 환곡에 의한 부조리는 극에 달하였다. 이때 환곡이 대부분 분실되어 읍의 재정조차 마련할 길이 없었다. 물론 이것은 관리들의 횡령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이에 진주목에서는 1855년부터 분실된 환곡을 채우기 위해 농지에 일정한 세를 부과하여 징수하였는데 농민들이 비변사에 정식으로 항의하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1855년부터 1859년까지 약 4년 동안 이미 183,900냥을 수탈당하였다고 농민들은 주장하였다.(정부의 기록에는 125,008냥이라고 되어 있다. 어느 것이 맞든지간에 서울까지 올라가 항의할 정도로 수탈이 매우 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환곡의 폐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수령의 입장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분실된 환곡을 보충해야만 했다. 진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861년 겨울에 홍병원이 부임해 오면서 분실된 환곡을 조사하여 횡령의 장본인인 서리들을 처벌하는 한편 기존 방식대로 부족분을 채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횡령을 주도한 인물은 전직 수령들이었다. 1862년에 이르러 진주목의 환곡 4만여 석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실시한 것이 도결과 통환이다. 이때가 1861년 12월이었다. 도결이란, 토지에 세를 부과하는 것을 말하며 결렴과 유사한 용어다. 통환이란, 세금을 통호에 강제적으로 부과한다는 뜻이다. 이때 부과된 양이, 도결의 경우 10만여 냥이고 통환은 6만여 냥이었다. 도결은 홍병원이 향회의 지도자들을 회유 협박하여 결정되었고, 백낙신은 도결이 결정되자 이를 모방하여 덩달아 통환을 강제로 실행했던 것이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농민들은 새로 부임한 진주 목사 홍병원보다는 백낙신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진주항쟁의 직접적인 동기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백낙신의 착취에서 찾고 있다. 그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1861년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나중에 조사한 결과, 백낙신은 부임한 지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무려 쌀 1만 5천 석(돈으로 환산하며 거의 5만냥에 육박한다.)을 수탈하는 등 6개 조목에 걸쳐 엄청난 비리를 저질렀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횡령을 하고도 분실된 환곡의 양을 채우기 위하여 도결로도 모자라 통환까지 실시, 일시에 분납, 상납하라고 다그쳤다. 백낙신은 세도정치 당시 성행한 탐관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그는 이미 전라좌수사로 있으면서 부정 때문에 처벌당한 일이 있었다.)
도결과 통환이 동시에 부과되자, 환곡을 비롯하여 각종 조세의 부당한 징수, 지주들의 착취에 시달려 이미 파탄지경에 이른 농민들은 극도로 격분하여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농민들이 바로 무력 봉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1861년 12월 도결이 결정되자 진주목과 경상감영을 찾아가 이의를 제기하고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평화적 요구는 묵살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백낙신이 조작한 통환이 실행되자 농민들은 더이상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제도 개혁을 이룰 수 없음을 간파하고 무력 항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수십 년간 쌓인 원한이 일시에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항쟁의 진행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이것을 주도한 인물들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진주에서 서남쪽으로 30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곡동에 유계춘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이미 비변사에 소장을 내는 등 평화적인 방법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세의 부당성을 항의하는 농민 시위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는 도결과 통환이 강제로 실시되자 기존의 합법적인 방식에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무력 항의를 계획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신분은 원래 양반이었지만 가문이 몰락하여 한 뙈기의 땅도 갖지 못한 농민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주거지도 불안하여 진주항쟁이 일어나기 10여 년전에 진주목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양반 집에서 태어났지만 농업에 종사하면서 점차 사회 모순에 눈뜨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계열은 진주 지역의 사족이자 홍문관 교리를 지낸 적이 있는 이명윤의 6촌이었다. 따라서 신분상으로는 이계춘과 마찬가지로 양반 출신이다. 그러나 그는 글자를 전혀 모르는 문맹이었다고 한다. 그는 초군 (산에 오르면 땔감 나무를 줏고 논에 나가면 농사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빈농들을 말한다.)의 일원이었는데, 비교적 나이가 많고 통솔력이 있어 우두머리에 속하는 좌상의 지위에 있었다. 그는 초군을 이끌면서 빈농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유계춘과 모의 때 이를 항쟁에 반영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좌상으로서 초군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밖에 김수만은 장교 출신이었으며 이귀재는 의령에 살다 고향을 떠나 진주까지 흘러들어온 유망 농민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계춘, 이계열, 김수만, 이귀재 등이 주동이 되어 항쟁 계획을 짜나갔던 것이다. 이들은 본격적인 모의에 들어가기 전에도 비공식적으로 만나 도결과 통환의 부당성에 대해 토론하였을 것이다.
서로 의견 접근을 보면서 박수익의 외방객실, 사노 검동의 집, 그리고 박숙연의 집 등을 전전하면서 본격적인 항쟁 계획을 세워나갔다. 우선 기존에 해왔던 대로 먼저 민의를 수렴할 필요성을 느낀 주동자들은 통문을 돌려 향회를 열자고 결정하였다. 마침내 이들은 1862년 1월 29일 통문을 돌려 도결과 통환을 철회시키기 위해 2월 6일 수곡장시에서 집회를 갖자고 촉구하였다. 1월 30일에는 산기촌에 사는 검동의 집에서 모여 수곡집회 운영에 대한 방안을 강구하였다. 이 자리에는 중앙관직을 지낸 바 있는 사족 이명윤도 참가하였다. 이렇게 도결과 통환의 부당성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노비에서 양반에 이르기까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19세기 해체되어가는 신분제의 한 단면이다. 이 즈음에 가서리의 정원팔과 청암의 강천녀 등은 유계춘에게 같이 시위에 동참하자고 편지를 보냈지만 유계춘은 이를 거절하였다. 할 수 없이 가서리 농민들은 읍으로 들어가 집단 등소하였다. 그러나 거절당한 것은 뻔한 결과였다. 이러한 점을 유계춘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별도의 계획을 벌써 머릿속에 그려놓은 상태였다.
2월 2일, 박숙연의 집에서 다시 주동 인물들이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유계춘은 이날 새벽에 이명윤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철시를 하자는 주장이 담긴 한글 통문을 읍내에 붙였다. 이는 한문을 잘 모르는 소상인이나 일반 농민들을 위함이었다. 철시는 바로 집단 봉기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에 이명윤의 유계춘과 마찰을 일으켰다. 그는 유계춘이 다시 쓴 통문을 보고는 크게 놀라며 그에게 소리쳤다.
"이것이 무슨 짓이오.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이오. 나중에 크게 화를 당하게 될테니 빨리 불태우시오. 그리고 다시는 이와 같은 해괴한 짓은 아예 하지 마시오."
그러자 유계춘은 자신의 뜻을 전혀 꺾지 않았다.
"오늘 새벽에 이미 사람을 보내서 읍의 장시에 걸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읍의 장날입니다. 읍내 사람들은 모두 볼 것입니다. 또한 죽어도 내가 죽는 것이고 살아도 내가 사는 것인데 교리 어른과 무슨 상관이 있어서 이처럼 엄하게 꾸짖습니까?"
이명윤은 유계춘과는 달리 가급적이면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방법 내에서 도결과 통환의 철폐를 주장하려 하였다. 그러나 유계춘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이러한 방법의 한계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정면 대응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온건과 변혁의 차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명윤이 유계춘과 결별을 선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는 내가 잠깐이라도 앉아 있을 곳이 못 되는구만."
이렇게 화를 내며 이명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갔다. 그러나 이명윤은 완전히 농민들과 관계를 끊지는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보기로 하자. 어쨌든 모임의 방향을 결정한 유계춘 등은 통문을 여러 장 베껴 쓴 뒤 이것을 읍내 곳곳에 추가로 붙이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초군 좌상인 이계열은 초군을 결집시키기 위해 유계춘에게 한글 가사체로 된 회문을 작성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초군들은 평소 집단으로 모여다녔기 때문에 자체 조직을 갖추고 있어서 동원하기가 매우 수월하였다. 게다가 이계열이 좌상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글로써 이들의 항쟁 의식을 고취시킨다면 더 많은 초군들이 참여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유계춘 등은 보다 많은 농민들이 참여할수록 그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다고 판단한 끝에 인력 동원과 행동 계획까지도 면밀하게 세워나갔던 것이다. 이들의 행동은 관청에서는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단지 관에서는 처음 붙인 집회 공고 통문만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2월 4일 단성에서 민란이 먼저 발생하자 이에 자신감을 얻은 유계춘 등은 인력 동원에 주력하면서 집회 준비를 빈틈없이 해나갔다.
2월 6일, 예정대로 수곡장시에서 집회가 열렸다. 집회는 주로 각 고을에서 뽑은 30여 명의 대표자들이 중심이 되고, 나머지 농민들은 이들을 둘러선 채 회의 진행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참가자들은 한결같이 이대로 도결과 통환이 강제적으로 실행된다면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다는 점에 공동 인식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처 방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먼저 경상감영에 직접 호소하자는 의견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이와 반면 유계춘은 읍에 들어가 관청 앞에서 직접 시위를 벌이자고 하였다. 온건책과 강경책의 대립이었다. 대표자들은 대체로 적법한 절차에 따라 항의하자는 데 찬동하였다. 이는 주로 요호부민들이나 향촌 지배층들의 주장이었다. 이는 계급적 입장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있던 유계춘은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며 단결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지금 여기 모인 여러분들이 한마음으로 힘을 모은 후에야 읍폐를 고칠 수 있소. 내가 당장 개를 잡아서 맹세하고자 하니 여러분들도 각기 입술에 피를 바르고 맹세하겠소?"
그러나 다른 대표자들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잠시 좌중을 둘러보던 유계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연히 통문 한 장만 낭비했구료. 이 따위로 해서 어떻게 일을 성취할 수 있겠소."짧게 말을 마친 유계춘은 집회장을 빠져나갔다. 뜻을 같이 하던 자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수곡집회에서는 결국 온건책으로 결정났다. 이에 의송을 보내기 위해 강화영, 장진기 등을 장두로 뽑아 경상감영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2월 7일 유계춘이 병영에 연금되고 말았다. 통문이 붙고 농민들이 자체적으로 집회를 여는 등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이를 사전에 무마하기 위하여 유계춘을 주동자로 지목하여 잡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병영에서는 농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를 고문으로 다스리거나 죄인 취급하지는 않았다. 유계춘만 잡고 있으면 농민들의 저항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판단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계춘이 잡힌 지 며칠 뒤에 무력 봉기가 일어났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계춘이 체포된 것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나타난 현상도 아니었다. 이 봉기는 이미 유계춘 등이 사전에 계획해놓은 일정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2월 4일에 일어난 단성농민항쟁의 영향도 매우 컸을 것이다.
수곡집회의 결정에 불만을 가진 농민들은 주로 초군을 중심으로 한 빈농들이었다. 이들은 수청가라는 곳에서 따로 모임을 갖고 무력 봉기하자고 결정하였다. 어쩌면 유계춘 이계열 등은 수곡집회의 결정이 온건책으로 날 것을 예상하고 미리 모임을 따로 가질 것을 계획해 놓았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일반 농민들과는 달리 나름대로 조직력을 갖고 있던 초군을 움직인다면 무력으로 봉기를 일으키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판단을 갖고 있었다. 전에 초군 회문을 돌릴 때부터 벌써 무력봉기는 예정되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농민 결집이 가능했던 것은 요호부민층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요호들 모두가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요호들 사이에도 관청과 결탁하여 토색질을 일삼는 부류도 있었다. 즉 요호도 진보적인 부류와 보수적인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다. 항쟁이 심화되면서 농민들은 요호들의 집을 불사르기도 하는데 이때 대상이 된 부류는 평소 착취를 일삼던 부류들이었다. 고을의 지도층들이 대거 집회에 참석함으로써 인원 동원이 한결 수월하였고, 이것은 계급적 입장을 떠나 농민이나 요호 모두 같은 피해자라는 입장에서 도결과 통환를 철폐시켜야 한다는 데 공동 인식한 결과였다.
진무청에 연금되어 있던 유계춘은 2월 13일 제사를 핑계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인 2월 14일에 철시 운동을 시작으로 무력 봉기가 일어났다. 아마 관청에서는 무력 봉기의 가능성을 거의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온건파가 항쟁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 분담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곡집회에서 결정난 대로 2월 7일에 장두들은 병영을 찾아가 소장을 제출하였다. 물론 관에서는 즉각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 관에서는 무력 봉기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였을 것이다. 전처럼 이렇게 항의하다가 제 풀에 꺾일 것이라고 방심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2월 14일부터 유계춘, 이계열 등이 주동이 되어 무력 시위가 진행되었다. 축곡의 서쪽에 위치한 마동, 원동의 농민들이 먼저 수곡시장을 습격하여 세력을 확장해나가고 백곡 등의 농민들은 삼장, 시천 등의 농민들을 규합하였다. 이들은 다시 연합하여 마침내 덕산시장을 점령하였다. 덕산에서는 도결 결정에 동조한 훈장 이윤서의 집을 불살라버렸다. 이는 도결과 통환에 대해 반대한다는 분명한 의사 표시였다. 병영에서는 도결을 실행할 때 훈장 등 마을 유지들을 동원하였는데 이윤서 역시 이러한 일에 앞장서서 농민들을 착취했던 것이다.
초군을 중심으로 시위대가 형성되자, 농민들은 거리로 나와 이들을 대환영하면서 식사를 제공하는 등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오랫동안 쌓인 원한을 풀 수 있다는 기대감에 농민들은 시위대를 적극 지지하였다. 덕산시장에 결집한 시위대는 덕천강을 따라 진주읍을 향해 행진, 18일에는 진주읍 외각에 도달하였다. 농민들이 시위대를 형성하고 무력 항쟁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경상감영에서는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2월 17일에 전령을 읍내 각지에 보내 통환을 금하고 이전처럼 결부에 따른 환곡 분배를 실시할 것이니 농민들은 각 동리로 돌아가라고 당부하였다. 당시 감사는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된 상태에서 농민들의 원성을 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원래 계획에는 역할 분담이 논의되지 않았지만 결과를 놓고 볼 때 온건파와 강경파의 각자 행동이 결국 양동적인 구실을 하여 주도권을 농민들이 잡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농민들은 뒤늦은 감사의 조치에 쉽게 응할 리가 없었다. 이럴수록 시위대의 사기는 높아만 갔다. 2월 18일 오전에 흰 수건을 머리에 쓰고 손에 몽둥이를 든 농민 수천 명이 진주읍과 진주성에서 서쪽으로 5리쯤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는 "도결과 통환을 혁파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에 진주목사 홍병원은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해결 방안을 모색하였다. 자칫 시위대와 무력으로 충돌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진주 전지역으로 번져나갈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이명윤을 통해 회유하여 일단 시위대를 해산시켜야 겠다고 하였다. 또한 이명윤이 농민들과 가깝게 지낸다는 것을 알고 이 일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였다.(이미 이명윤은 배후조종자라는 소문도 나돌고 있었다.) 홍병원은 이명윤에게 급히 편지를 보내 농민들을 설득해서 해산시켜 줄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편지를 받은 이명윤은 서둘러 읍내로 들어갔다. 그는 목사를 만나 그의 요구를 확인하고 시위대로 향하였다. 시위대는 이명윤의 말을 듣고 도결과 통환을 철폐시킨다는 완문(일종의 최종 결재 서류, 또는 각서)을 내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벌써 수차례 속은 경험이 있는 농민들이기 때문에 관청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기에 이런 요구를 한 것이다. 시위대의 요구를 갖고 다시 목사를 만난 이명윤은 그대로 전달하였다. 목사는 할수없이 완문을 써서 이명윤에게 건네주었고 이명윤은 이것을 시위대에게 갖다주었다. 완문을 본 시위대는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였다. 일단 농민들의 승리였다. 이명윤을 칭송하면서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항쟁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시위대는 중간 관리자들의 착취가 계속되는 한 도결과 통환이 철폐된다 해도 이전과 달라질 것이 별로 없다고 보고 대열을 수습한 뒤 유계춘이 지었다는 노래를 합창하며 진주읍으로 진격하였다. 그 도중에 시위대는 진주목의 이방이나 호방 등 평소 착취를 일삼던 관리들이나 토색질을 일삼던 보수적 요호들의 집을 불태워버렸다. 이뿐 아니라 이서 등 하급 관리는 물론이고 부당한 방법으로 물건을 팔아 이득을 챙겨온 개성상인, 수금하러 내려온 고리대금업자 등 농민들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이면 가차없이 그 집을 부수고 재물을 빼앗았다. 그러면서 경상병영의 통환 철폐도 요구하였다.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시위대는 2월 19일 아침 진주목 객사 앞에서 환곡 문란에 대한 해명과 병영 통환 철폐를 요구하는 농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이미 시위대의 숫자는 수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당시 진주 전체 인구를 봤을 때 이 숫자는 대단한 것이었다. 눈덩이처럼 사태가 악화되자 병마사 백낙신은 자기의 권세를 믿고 자진하여 농민들 앞에 나섰다. 물론 가급적이면 회유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뒤에 주동자들을 처벌할 계획을 갖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탐관 백낙신이 나서자 농민들은 쌓였던 불만을 일시에 터뜨렸다. 사방에서 그를 욕하는 소리가 난무하였다. 그러자 백낙신은 중영 소속 서리로서 횡령 등 탐학을 일삼던 김희순을 지목하여 앞으로 끌어내 곤장을 쳐서 죽였다. 그는 백낙신 대신 재물이 된 것이다. 그래도 시위대가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병영 통환을 계속 요구하자 서둘러 완문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시위대의 원망은 이미 백낙신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시위대는 환곡을 포함한 삼정 전체의 문란에 대해 백낙신을 추궁하였다. 그러면서 시위대는 병영 이방 권준범과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사이에 진주 이방 김윤두는 도주하고 말았다. 그 역시 평소 농민들을 착취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시위대는 백낙신을 겹겹이 에워싸고 위압적인 자세로 그의 탐학과 서리들의 부정 행위를 추궁하였다. 그는 일부나마 자기가 저지른 죄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이 되어도 시위대가 풀어주지 않아 백낙신은 길가에서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날이 밝아 2월 20일이 되었다. 이날 시위대는 도망간 서리들을 잡기 위해 추적하는 한편, 진주목사 홍병원이 있는 본부로 향하였다. 그는 농민대회에 출장할 것을 거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리들을 옹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위대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시위대는 그의 방안에까지 뛰어들어가 농민들 앞에 설 것을 강요하였다. 목사는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할수없이 방을 나와 가마를 타고 농민들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이미 완문을 쓴 뒤이기 때문에 백낙신과 함께 삼정 문란과 서리들의 죄에 대해 추궁을 받은 후 다시 가마를 타고 본부로 돌아갔고 백낙신도 역시 시위대의 손에서 풀려났다. 한편, 이날 시위대는 추격 끝에 이방 김윤두를 잡아 죽였다.
목사와 병마사를 풀어준 시위대는 여러 조로 편성되어 각지의 공격 목표를 설정하고 이후 다시 진주성으로 회군할 것을 결정하고는 오후에 인근 각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때를 고비로 초기부터 항쟁에 참여하였던 진보적 요호들은 대체로 탈락하고 순전히 농민들이 항쟁을 주도하게되었다. 시위대는 주로 서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에서 결집하였기 때문에 20일 이후에는 주로 남쪽과 동쪽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각지에 진출한 시위대는 농민들을 착취해온 토호, 양반, 보수적 요호들을 대상으로 그동안 쌓인 원성을 터뜨렸다. 이렇게 진주 지역 일대를 모두 장악한 시위대는 1)지역 최고책임자의 죄를 추궁하여 완문을 받아내고 2)착취를 일삼던 중하직 관리나 토호, 보수적 요호들을 처벌하는 성과를 이루고 2월 23일에 자진 해산하였다. 2월 14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약 열흘간 진행된 진주농민항쟁은 일단 여기서 막을 내렸다. 이 기간 동안만도 진주읍의 가옥 파괴가 70호, 22개 면의 가옥 파괴가 56호로 모두 126의 가옥이 파괴되었다고 하니 항쟁이 얼마나 격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만큼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셈이다.
항쟁이 종식된 후 중앙정부는 박규수(연암 박지원의 손자)을 안핵사로 내려보내 사건의 진말을 밝히고 관련자를 처벌할 것을 명하였다. 박규수를 보내는 자리에서 철종은 가급적이면 농민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고, 민란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소상히 알아내어 이에 대한 대처 방안을 올리라고 지시하였다. 진주에 내려온 박규수는 진상 조사 끝에 민란의 원인이 지방 관리들의 탐학에 있다고 보고 삼정 문란을 혁파하고 제도를 개선할 것을 중앙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철종의 지시대로 처벌자를 최소한으로 줄여 비변사와 노론 일당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처형 대상을 유계춘, 이귀재, 김수만 등 3명으로 축소하고 나머지는 중형과 가벼운 형벌을 내려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반대파 사람들은 처형 대상을 2급까지 확대하라고 다그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여러 사정이 생겨 박규수는 중앙에 보고를 늦게 하였다. 이에 대해 박규수를 반대하던 관료들이 그를 비난하면서 관직을 삭탈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뒤에 박규수가 서울로 돌아갔을 때 반대파의 모함에 걸려 결국 파직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본인이나 중앙에서 안핵사의 일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진주항쟁을 기점으로 민란이 전국적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규수가 진주로 내려간 3월에만도 함양과 성주, 그리고 전라도 익산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중앙은 사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박규수가 사태 수습을 지연시킴으로써 민란이 다른 지역으로 더 확대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실제로 다른 곳에 파견된 안핵사들이 박규수의 사건 처리 결과에 초미의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박규수는 비변사나 신임 진주목사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처벌자를 최소화시켰다. 이렇게 중앙에서는 민란의 반역성만을 부각시킬 뿐이어서 그 근본적인 원인을 치유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물론 나중에 백낙신은 중앙으로 압송되어 유배를 가게 되지만, 본질적인 제도 개혁이 뒤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민란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민란의 양상이 국가 기강마저 흔들 정도로 확대되자, 중앙에서는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민심 수습에 나섰지만 이것 역시 얼마 못가 세도가들의 농간에 의해 임시방편적인 수단으로 전락, 사실상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임술민란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성
전국적으로 일어난 임술민란은 중앙정부가 보수화되고 지방 통치가 약화되었을 때 발생했다는 점에서 고려 무신정권 때 일어난 각종 민란과 유사한 면이 많다. 그러나 임술민란은 봉건체제 자체가 와해되어가는 시점에서 터졌다는 데에서 고려시대의 민란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신분제의 붕괴와 함께 새롭게 등장한 요호부민들이나 상공업과 광업, 수공업의 발달로 중간 계층이 두터워짐에 따라 농민 계층이 분화되어 갔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도 뒤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 변동에 따라 19세기 초반부터 소외된 계층이 생겨 계급간 대립이 심화된 상태에서 삼정 문란 등 제도적인 모순이 가중되어 수탈 대상은 사회의 빈민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전체의 모순은 궁극적으로 세도정치의 부패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1860년대 전후 조선의 주변국가인 중국과 일본은 벌써 서구 열강과 각종 조약을 맺고 근대화 추진을 놓고 진통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을 진단하고 이에 대처할 만한 정책을 제시할 능력도 뜻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고 봉건성을 극복하고 자주국가를 건설할 정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군주체제에 입각하여 성리학적 이념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단순히 통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던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임술민란이 일어나기까지도 사회 제도 개선에 대해 별다른 정책을 수립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임술민란은 봉건체제를 유지하면서 부와 권력을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지배층에 대해 반기를 든 농민항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임술민란은 일반적인 주장처럼 삼정 문란과 양반, 토호들의 착취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임술민란이, 한국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 이제는 봉건성을 벗어나 근대 자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시급한 과제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민중적 항쟁이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임술민란이 봉건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왕권에 도전하는 차원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지역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항쟁에 참여한 농민들은 대체로 부세제도나 환곡을 중심으로 한 삼정의 폐해를 제거하는 수준에서 만족하고 있다. 그래서 타도의 대상을 탐관들이나 양반, 토호, 보수적 요호부민으로 삼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즉 농민들은 사회 모순이 중앙정부나 세도정권에서 비롯되었다는 의식을 객관화시키고 이에 따른 항쟁의 질과 폭을 넓히지 못했다는 점에서, 임술민란이 지니고 있는 시대적, 의식적 한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전국의 민란을 조직으로 이끌어낼 만한 지도부를 갖지 못했던 것도 임술민란이 갖는 한계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정부에서 삼정 개혁안을 제시했을 때 민란이 소강 상태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당시 농민들이 봉건체제에 대해 현상적인 인식 수준에 머물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술민란은 봉건성에 젖어 있던 지배층에게 위기 의식을 심어주는 한편 봉건적 질서로는 더이상 민중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으며, 나아가 봉건체제의 와해를 한층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임술민란의 의의와 한계점은, 1894년에 일어난 갑오농민전쟁처럼 민중 운동이 본격적인 반봉건, 반침략 투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