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15. 홍경래의 반란(평안도 농민전쟁) : 민란 시대를 연 농민항쟁
반란의 발생 배경
'홍경래의 반란'은 조선 후기 1811년(순조 11년)에 홍경래, 우군칙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농민 항쟁을 말한다. 이 반란은 181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약 5개월간에 걸쳐 일어났다.(이 난을 농민전쟁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19세기에 있었던 여러 농민항쟁과 구별짓기 위해 기존처럼 '홍경래의 반란'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홍경래의 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대의 정치사회적 배경을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특히 1801년에 있었던 신유교난을 전후로 전개된 보수 진영과 개혁 진영과의 치열한 정치적 경쟁에서부서 그 뿌리를 찾아봐야 한다.
18세기의 조선은 한마디로 말해서 봉건체제의 와해 조짐이 엿보이던 시대였다. 잘 알려져 있는 실학이 이 시기에 형성되어 정치와 경제 등 모든 부문에 걸쳐 개혁과 변혁을 주장하였지만 노론 벽파의 집요한 정치적 탄압 음모에 의해 현실에 별로 반영되지도 못한 채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신유교난이었다. 이 신유교난은 이미 경인 지역과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 퍼져 있는 천주교인들을 노론 벽파들이 '무부무군하는 사교 집단이요 반역자들'이라고 몰아부치면서 모두 몰살시키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낸 종교적 탄압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그러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엄청난 정치적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천주교는 주로 17세기 이후로 거의 백년 동안 정치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남인들을 중심으로 지식층에 먼저 전파되었다. 이미 16세기에도 천주교(당시에는 주로 천주학이라고 불렀다.)에 대한 지식인들의 연구는 있었지만 종교적 형식을 통해 정식으로 신자가 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서였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승훈이었다. 또한 다산 정약용 형제들과 이가환, 권철신 등 재야 남인 세력 사이에 천주교는 조심스럽게 퍼져나갔던 것이다. 문제는 정조의 정치적 입장에 있었다. 그는 선왕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써서 정약용을 중심으로 한 남인들을 대거 조정에 기용하였다. 거기에 천주교인들은 아니지만, 역시 소외 세력이었던 연암 박지원의 제자들인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등을 규장각 검서관에 임용하는 등 정조의 반대 세력인 노론 벽파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 세력을 중앙에 집결시켜 나갔던 것이다. 게다가 연암의 제자들이 대부분 서자 출신이라는 점에서 정조의 조치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에 심환지 등을 중심으로 한 노론 벽파는 기회가 생기는 대로 상소와 항의를 통해 남인 세력을 탄압하였다. 그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해 준 것이 천주교였던 것이다.
보수적인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던 노론 세력들은 남인들을 '임금과 조상을 부정하는 천주쟁이들'이라고 하면서 정치적 모략을 계속하였다. 실제로 천주교가 일반 백성들 사이에 전파된 이후에 각 지역에서 관할 군수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일이 속출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남인의 거두인 채제공을 중심으로 천주교에 대해 회유책과 교화정책을 펼쳤다. 노론 세력의 눈에는 이러한 정조의 태도가 남인을 비호한 것으로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800년, 개혁 의지가 분명했던 정조가 죽고난 뒤 그의 어린 아들이 11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순조이다. 이에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어 어린 임금은 사실상 아무런 실권을 가지지 못했다. 결국 정조가 급사하자, 노론 세력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유교난을 일으켜 남인 세력을 일대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후 1802년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거둔 후, 노론 세력의 전략가로 알려진 김조순이 자기의 딸을 순조의 비로 밀어넣고 이른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노론 일당 독재가 거의 60년 이상 지속되었다. 일당 독재체제하에서 올바른 정치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들은 이권과 권력을 독점하고 매관매직을 하는 등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면에서도 온갖 부조리를 일삼았다. 이른바 삼정 문란으로 농민들은 끊임없이 수탈을 당해야만 했다.
뒤에서 볼수 있듯이, '홍경래의 난'을 이끈 주도 세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대의 경제 구조와 신분의 변동 등을 살펴봐야 한다. 이것은 세도정치에 의해 야기된 제반 부조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여기서는 '홍경래의 난'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부분만 거론하기로 하고 19세기 전반에 일어난 사회 변화에 대해서는 임술민란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먼저 농업의 형태 변화를 보자.
18세기와 19세기 초에 들어서서 사회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변화는 17, 18세기에 시작된 사회 구조 변화의 연속이었다. 특히 중앙정부의 비호 아래 불법적인 토지 겸병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광범하게 진전되었으며 지주전호제가 양적으로 팽창되어 갔다. 또한 종래의 벼농사를 개량한 이앙법, 이모작 등으로 대표되는 농업 생산기술의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변화에 따라 단위 면적당 노동력이 대폭 감소되어 이른바 노동 집약적인 생산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농업 생산의 발달과 토지 겸병으로 인해 농토에서 불필요한 노동력이 불가피하게 농촌에서 축출되어 토지를 갖지 못한 농민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즉 농민층의 분해 현상이 심화되어 갔던 것이다. 농촌에서 소외된 농민들은 도시나 광산으로 흘러들어가 상업이나 광업, 또는 심할 경우엔 품팔이로 전락하거나 도시 빈민이 되어 막노동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일도 찾지 못할 경우엔 도적이 되거나 걸식 행각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무리들의 숫자도 꾸준히 늘어만 갔다.
여러 왕조실록에 따르면, 이 당시 유민의 수는 점차 증가하여 각 도별로 수만 명 또는 십만 명이 넘기도 했다. 정조 때 이미 전국적으로 산도적 무리가 극성을 부리게 된 것도 이러한 사회 변동의 산물인 셈이다. 이들이 어떠한 이유에 의해 방치됐던 간에 중앙정부는 통치력에 따라 이들유민들을 다스리려 했을 뿐 아무런 제도적 장치도 마련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세도정치에 대한 일반 민중들의 원성이 높아가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이와는 반대로 농업경영을 하는 농민의 수도 늘어났다. 이들은 선진적인 농업 기술에 대한 지식과 현장 경험을 겸비하여 봉건지주의 농지를 빌려 소작을 하되 앞에서 본 유민들을 고용하여 합리적인 경영을 통해 생산량을 극대화시켜 일정 배분량을 차지하였다. 그것으로 자기의 토지를 구한 뒤 다시 재투자하는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신적인 경영 방식을 운영할 줄 아는 부류가 생겨났던 것이다. 이들은 일반 생활에 필수적으로 쓰이는 특용 작물이나 시장성이 좋은 곡물을 재배하여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부의 축적으로 이들은 그 지역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으니 홍경래의 난에 참여한 지도층 가운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부농이 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장성을 안다는 것은 유통구조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말도 된다. 18세기 전후에 이미 상업은 전국적으로 발달하여 시장이 서는 곳이 점차 늘어갔으며 완전한 화폐경제는 아니지만 대체로 화폐에 의존하여 상품이 교환되고 있었다. 이러한 유통구조는 수요량과 공급량 모두 증가시키면서 상품 교환의 장소인 향시는 거의 모든 농촌 지역에 설치될 정도였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나 {증보문헌비고} 등에 따르면, 시장의 수가 전국에 걸쳐 천여 개가 넘어서서 활발한 유통망 구실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시전 체제를 위협하는 중요한 경제구조의 변화라고 볼 수 있는데, 홍경래의 난에 참여한 상인들 가운데 이러한 구조를 통해 대상인이 된 부류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이 축적된 부를 이용하여 난에 참여하게 된 것도 시전 체제를 비호하는 중앙정부에 대한 반발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의 정경 유착과 비견되는 금난전권(일종의 독점 보호 조치)이 시행되어 일반 상인들의 활동에 큰 제한을 주었던 것이다. 상권을 둘러싸고 중앙 정치인들의 후광을 받고 있던 특권상인(시전상인)들과 자립으로 커온 사상인 간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 치열했다는 것도 이 금난전권이 반증해주고 있는 셈이다.
유민의 노동력이 집중된 업종 중 하나가 광업이다. 홍경래 지도부가 광산을 연다는 소문을 내어 군사를 모은 것도 이러한 사회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단면이기도 하다. 당시 광업은 대체로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운영되었다. 아직 광업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봉건적 정치인들은 오직 광업 때문에 농토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농업이 황폐해지고 있으며, 또한 이권 다툼 과정에서 범법 행위가 만연하고 있다는 점만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던 서북 지역에는 이미 공공연하게 금광 등 광업이 성행하고 있었다. 유민들은 생계 유지를 위해서는 닥치는 대로 품을 팔아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상품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화 현상이 촉진되었는데, 이에 따라 조선 중기까지의 봉건 지주와는 다른 서민 지주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주가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선진적인 농업 생산기술과 시장의 전국적인 확대라는 유통구조의 발달에 따라 차경지를 합리적인 경영 방식으로 운영, 확대를 통하여 상업적 농업을 하는 경영형 부농층이 형성되었다. 그런 한편에서는 다수의 소농민들이 유민으로 몰락하여 영세 빈농, 무토지 농민이 되거나 빈민으로 전락하여 토지에서 소외된 농민들이 급격하게 증가하여 지금의 도시 확장에 따른 현상과 비슷하게 임금노동자층이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결국 이 당시의 농민층 분해 현상으로 말미암아 다수의 농민들이 유민이나 빈민으로 전락하여 토지를 둘러싼 계층 변화가 심화되어 갔으며 반면에 일부 농민들은 선진 농업 기술과 상권에 대한 지식을 이용하여 부농, 서민 지주가 되는 등 농민들 사이에 신분적 양극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이다. 물론 수적으로 유민으로 전락한 농민들이 압도적이었지만 부농들이 지역 유지로 활동함으로써 사회 변동의 변수로 등장하게 된 셈이다. 상공업 분야에서는 상품경제의 전업화가 이루어져 중앙 정치인들의 비호를 받는 봉건적 특권 상인들에게 도전하는 사상인들의 활동이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개성 상인이나 의주 상인들은 대청 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는 등 상권 쟁탈전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이른바 자본가의 기반이 어느 정도 형성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여기서 신분 구조의 변화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여러 고을에 등장한 격문의 내용 중 신분 차별과 지역 감정에 대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을 단순히 서북인들을 선동하는 내용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봉건적인 신분질서의 구조에도 부를 통한 신분 상승의 확대에 의하여 양반의 증가와 평민, 천민의 감소, 몰락 양반의 증가라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양반 신분의 절대적인 권위도 무너져갔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는 19세기가 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봉건사회의 해체를 촉진시켰다. 특히 정치적으로 치열하였던 17, 18세기의 당쟁이 끝나고 안동 김씨 척족에 의한 일당 독재가 성립됨으로써 삼정 문란은 농민층 분해를 더욱 촉진시켰고, 특권 상인과 지방 상인간의 대립도 심화되었다. 더욱이 평안도 지방은 정부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대청 무역이 더욱 활발해져서 송상, 만상 가운데는 대상인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 18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견직물업, 유기 등 수공업 생산과 담배 등 상품 작물의 재배, 금은의 수요 급증으로 인한 광산 개발이 활발하였다. 그에 따라 양반지주, 상인층에 의한 고리대업의 성행으로 소농민의 몰락도 심화되었고 일부 농민층은 부를 축적하여 향촌의 향무층으로 진출하였으며 빈농, 유민들이 잠채 광업에 몰려들고 있었다.
이와같은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이 난은 홍경래, 우군칙, 김사용, 김창시 등로 대표되는 몰락 양반, {정감록} 등을 바탕으로 현실 변혁을 주장하는 유랑 지식인들과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새로이 성장한 향무 중의 부호 부민 등 부농, 서민 지주층과 사상인층의 물력 및 조직력이 결합되어 10여년 간 준비하여 발생한 것이다. 이들은 역노 출신으로 대청 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가산의 부호 이희저의 집이 있는 다복동을 거점으로 삼고, 각지의 부호 및 대상인들과 연계를 맺는 한편, 운산 촛대봉 밑에 광산을 열고 광산 노동자, 빈농, 유민 등을 임금제로 고용하여 봉기군의 주력부대로 삼았던 것이다.
반란의 준비, 전개 과정
홍경래의 난 이전에도 민란은 계속 있어 왔으나, 이처럼 오랜 시간을 두고 완벽에 가까운 사전 모의를 했던 봉기도 없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게 된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그만큼 여물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남양 홍씨인 홍경래(1780-1812)는 용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진사인 것으로 봐서 그의 가문은 양반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려서부터 외숙인 유학권에게 글을 배웠다. 홍경래 역시 다른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눈을 뜨기 전에는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에 뜻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 정부가 서북인들에 대해 차별을 두고 있었다. 이런 차별 정책 때문에 홍경래는 번번히 과거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미 18세기 실학자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지적했듯이 과거제도는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던 것이다. 박제가가 살았던 정조시대에도 그러했으니 정조 이후의 세도정치 때에는 그 비리가 더 심화되어 상태여서 매관매직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관서제인 정정부서]라는 글에는 서북인들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보여주는 구절이 있어 주목을 끈다.
글은 나라의 경계를 지키고 무예는 고을을 지키는 것입니다. 비록 하늘에 통하는 학문과 사람을 울리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시 벼슬에 나아갈 희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말을 배울 만한 나이에 이른 아이들은 이미 서북인들을 모욕하는 것부터 배워 이들을 천하다고 하며 항상 능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상시 때에도 자주 거만하게 '서인, 서인' 하면서 서인이라는 말을 그치지 아니하며 때로는 말하기를 '서북놈, 서북놈' 합니다.
과거 시험에서 몇번의 고배를 마시고 난 뒤에야 홍경래는 당대의 제도적 모순에 눈뜨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아예 과거를 포기하였다. 그리고 그는 전국을 떠돌며 유랑 생활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홍경래가 가까이 한 것은 주로 풍수였다. 그는 유랑을 하면서 지사로 자처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이 당시 풍수는 홍경래처럼 소외된 지식층 사이에서는 생활의 한 방편으로 유행하고 있었다. 부도 권력도 갖지 못한 양반층이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는 유학에서 천시하고 있던 풍수라도 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객지 생활을 하던 홍경래는 평앙도 가산군에 있는 청룡사라는 절에서 서자 출신인 우군칙을 만나게 된다. 그는 홍경래보다는 다섯 살 아래였으나 놀라운 학식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장차 엄청난 봉기를 준비하는 뿌리가 되었다. 둘은 가까워지면서 서로 뜻이 맞아 현실의 모순과 미래에 대하여 깊은 토론을 하였다. 서로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현실에 대한 불만 토로는 변혁 의지로 바뀌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구체적인 사전 모의 착수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봉기를 위해서는 자금과 군사력이 모두 필요하다는 합의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들은 먼저 평안도 내의 향무층에서도 경영형 부농층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지역 실력자들과 제휴하는 것이야말로 봉기의 승패를 가늠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것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군사력 면에서는 장사들을 포섭해 나갔다. 특히 자금 마련을 위해서 상인들을 포섭해나갔다. 사상인들은 중앙정부에 대해 평소 불만이 많은 계층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개성 상인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봉기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
두 사람의 활동은 처음부터 매우 조직적이었다. 과거 공부를 해본 경력이 있는 홍경래는 주로 지식층을 담당하였으며 일찍이 상인들을 잘 알고 지내던 우군칙이 자금 담당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두 사람의 포섭 대상이 되었던 인물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이희저였다. 그는 가산군에 살고 있던 이속이었는데 도내에서 알아주는 거부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희저를 끌어들이기 위해 몇 가지 술책을 썼다. 우선 우군칙의 아내를 이희저의 처에게 접근케 하여 손금을 봐주면서, 얼마 안 있으면 크게 대길할 운수를 지녔다고 운을 떼게 하였다. 그런 후 우군칙이 지사라고 하면서 이희저에게 나타나 그의 부친 묘자리를 봐주며 대지라고 칭찬하면서 조상 덕을 입어 곧 크게 될 것이라고 귀뜸을 해주었다. 그 다음엔 홍경래가 도사복을 입고 야밤에 몰래 이희저를 찾아가 자기의 계획을 토로하면서 동지로 삼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이희저는 봉기의 재정 기반을 마련해준 핵심 인물이 되었다. 두 사람이 특별히 공을 들여 이희저를 끌어들인 데에는 그가 거부라는 점도 있지만 풍수에 밝은 그들이 이희저가 살고 있던 가산.박천의 다복동을 근거지로 삼기 위함도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다복동은 대정강의 하류에 위치한 분지이다. 이곳은 청천강 이북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이면서 동시에 평양과 의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게다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쉽게 발각되지도 않으며 다복동 앞에 있는 삼각주의 나루인 진두를 통해 다복동으로 들어오면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양산박과 같은 비밀 아지트가 되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이와 같이 지역 실력자들을 하나 하나 포섭해 나갔다. 홍경래는 그 일환으로서 서울에 있는 김재찬에게도 접근하였다. 그는 평안도 관찰사를 지낸 적도 있으며 1805년 우의정 임명을 거절하였다가 황해도에서 유배 생활도 한 인물이었다. 좌의정을 지낸 고위 관직 출신이었지만 당시의 세도정치에 대한 불만이 깊었다. 홍경래가 김재찬을 찾아간 것은 거사의 기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김재찬에게 부탁하여 평안감영에서 공납금 이천 냥을 빌리는 데 성공, 유용하게 거사 준비금으로 썼다. 두 사람은 이에 그치지 않고 정주의 부호 김약하, 의주의 인삼상인 임상옥, 그리고 여러 개성 상인들을 차례로 거사에 끌어들였다. 우군칙은 운산 촛대봉에 광산을 연다는 소문을 퍼뜨려 모군 작업에 착수하였다. 우군칙은 일정 크기의 구덩이를 파놓은 다음 장정들에게 뛰어 건너게 하여 그 힘을 시험하고 새끼줄을 높게 달아놓고 뛰어넘게 하여 순발력을 점검하였다.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게는 돈과 옷감을 나누어 주고 이들을 열 명 1조로 만들어 각각 마을에 잠입케 한 뒤 봉기가 있을 때 내응하도록 사전 지시를 내렸다. 이렇게 하여 홍경래와 우군칙, 그리고 우군칙의 제자 김사용을 중심으로 평안도 일대의 지역 실력자들과 지방 관속들, 그리고 지식인들과 유민계층에 걸친 광범위한 봉기 세력을 주도면밀하게 조직해 나갔던 것이다.
봉기가 있기 두 달 전인 1811년 10월부터 각지의 인물들이 비밀 아지트인 다복동으로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홍경래와 우군칙은 사회 신분과 능력에 따라 모군과 군량 등 봉기에 필요한 것을 세분하여 책임을 부여하였다. 거병일은 같은 해 12월 20일로 잡았다. 홍경래는 평서대원수라고 자칭하였다. 그러나 봉기군의 대거 이동은 쉽사리 사람들의 눈에 띄게 마련이었다. 이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선천부사 김익순(김삿갓의 할아버지)은 눈치채고 조사해 본 결과 봉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이에 반란군측도 거사일을 이틀 앞당겨 12월 18일로 수정하였다. 봉기군은 크게 2군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북진군과 남진군이 그것이다. 이렇게 봉기군을 양분한 이유는, 반란군의 최종 목적이 서울 탈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남진군이 담당하고 후위를 북진군이 맡음으로써 완벽하게 중앙정부를 점령하려 했던 것이다. 북진군은 우군칙의 제자인 김사용을 대장으로 하고 선봉장에 이제초, 모사 담당에 김창시 등을 비롯하여 김희연 이성항 등이 참모 역할을 하였다. 남진군은 홍경래를 중심으로 홍총각이 선봉장을 맡고 모사에 우군칙, 후군장에 윤후검 등이 임명되었다. 반란군들은 출병에 앞서 김창시가 쓴 격문을 숙연한 자세로 듣고 있었다.
평서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우리 관서의 부로 자제와 공사천민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시오. 무릇 관서는 기자의 옛 성이 있고 단군의 옛 터전이어서 특출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문물이 빛난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나라를 다시 세웠으며 또한 정묘호란 때에는 양무공이 충성을 다하여 적군을 물리쳤다. 이와 더불어 돈암 선우협(조선시대의 성리학자로 평양 출신이며 관서공자라고 불렀다.)의 학식과 월포 홍경우의 재주도 이 서쪽 땅에서 났는데도 조정에서는 서토를 똥무더기로 여기고 있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인사들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놈'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하니 서토에 살고 있는 자들로서 어찌 원통하고 억울하지 않겠는가. 막상 난을 당했을 때에는 서토 사람들의 힘에 의존하고 또 과거를 볼 적에도 서토의 글을 빌렸으니 400년 역사 속에서 서쪽 사람들이 조정을 저버린 적이 있는가? 지금 나이 어린 왕이 위에 있어서 권세있는 간신배들이 극성을 부려 김모(김조순) 박모(박종경)의 무리들이 나라의 권력을 쥐고 흔들어서,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려 겨울에도 번개가 일고 지진이 나서 살별과 우박과 태풍이 없는 해가 없으며 이로 인해 큰 흉년이 들어 굶어 부황든 무리가 길에 널려 늙은이와 어린이의 시체가 산골짜기를 메우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 세상을 다스릴 성인(<정감록>의 정씨를 딴 정제민을 뜻함)이 청북 홍의도에서 탄생하셨으니 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워 다섯 살 때에 이미 신령한 스님을 따라 중국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장성해서는 강계사군여연에 머무른 뒤 5년이 지나 황명의 세신유족을 거느리게 되었으니, 마침내 철기 10만으로 부정 부패를 척결할 뜻을 세우셨다. 그러나 이곳 관서땅은 성인께서 나신 고향이어서 차마 다치게 할 수 없어서 먼저 관서의 호걸들에게 기병할 것을 명하여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였으니 의로운 뜻이 일어난 곳이 바로 참 임금을 기다린 명소가 아니겠는가. 이에 격문을 띄워 먼저 각 지역에 알리노니 절대로 요동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시오. 만약 어리석게도 반항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천으로 밟아 씨도 남기지 않을 것이니 마땅히 협조하여 거사에 동조함이 옳을 것이다.
격문 낭독이 끝나고 홍경래의 결속을 다지는 연설도 마친 후에 마침내 봉기군은 횃불을 높이 쳐들고 선천으로 진격하였다. 남진군은 가산 삼교에 도착하였다. 그런 와중에서 홍총각에 잡힌 이곳 군수 정시는 봉기군 앞에 끌려 나와 맞아 죽었다. 결국 남진군은 무혈 입성하여 관아의 병기를 수습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김익순은 18일 아침 농민들이 떼를 지어 도주하는 것을 보고 난동의 기미가 보인다고 파악하여 농민 가운데 몇을 잡아들여 문초하였다. 그런 가운데 봉기군의 핵심으로 보이는 인물들을 파악하였으나 체포에는 실패하였다. 이미 봉기군은 정예 부대를 구성하고 각처로 진군할 때였다. 북진군의 핵심인 김사용은 군사를 이끌고 곽산으로 향하였다. 이곳 군수는 벽장 속에 숨어 있다가 잡혀 옥에 갇히는 꼴을 당하였고 그의 아우는 반항하다가 봉기군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김사용은 이어 능한산성을 점령하고 임해진을 공략한 뒤에는 요충지인 정주성으로 향하였다. 정주성은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성이었다. 그러나 내응 세력이 있었기에 입성은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18일 아침, 상아현에서 집사 이침은 이미 목사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난리에 대비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과 민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성내의 주민들은 난리를 피해 대부분 피난을 간 상태였다. 그는 사전에 조직해놓은 내응 세력을 모으기 위해 그런 술책을 썼던 것이다. 이침만이 아니라 이런 내응 세력을 결집한 관리는 좌수 김이천, 칙고도감 홍하진 등이었다. 이들의 움직임이 봉기군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목사 이근주는 향교로 도망을 쳤다. 그러나 이침 등이 향교로 쳐들어가 목사를 끌어낸 뒤 인부를 빼앗은 뒤 쫓아버렸다. 이렇게 되니 김사용의 군대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정주성에 입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가 19일 정오 무렵이었다.
김사용은 입성 즉시 정주성 내의 지식층들을 모두 봉기군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이들 계층을 분석해보면, 좌수, 풍헌, 별감 등의 향임과 별장, 천총 등의 군임 등 중간층 이상의 실력자들이 대거 봉기군에 동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경영형 부농이거나 중소 부농층에 해당되는 인물들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북진군은 확고한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 셈이다. 이렇게 정주성이 정비되어 갈 때인 20일 동이 틀 무렵, 남진군은 가산을 지나 이미 박천읍에 도달해 있었다. 남진군은 도원수 홍경래가 총지휘를 하고 선봉장 홍총각이 전위를 맡은 상태에서 읍내로 돌진하였다. 여기에서도 전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점령할 수 있었다. 군수는 이미 어디론가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봉기군은 군수를 찾아내기 위하여 군수의 노모를 일부러 감금하였다. 그러자 군수는 서운사라는 절에 숨어 있다가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뜻하지 않은 사고가 나고 말았다. 이 사고는 앞으로 전개될 점령 작전에 막대한 차질을 일으키게 될 불운의 사고였다.
박천을 점령한 남진군은 영변을 친 뒤 이어 안주를 공략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의견이 엇갈려 분쟁이 일어났다. 안주 병영의 집사 김대린과 이인배 등은 영변보다는 안주를 먼저 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하며 나섰다. 이들은 홍경래를 설득하기 위해 수차례 건의하였다. 망설이던 홍경래는 이들의 뜻을 못이겨 작전 변경을 하려했으나 이번에는 우군칙이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며 나섰다. 이렇게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은 우군칙의 주장대로 작전을 펼치자고 홍경래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되자 김대린, 이인배 등은 자기들의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봉기가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봉기에 동참한 것 자체를 후회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모의 끝에 실패로 끝나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바에 지금 당장 홍경래의 목을 베고 자수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김대린 등은 밤에 몰래 홍경래의 숙소로 찾아들었다. 김대린이 홍경래에게 칼을 휘둘렀으나 홍경래는 민첩하게 칼날을 피했다. 칼은 전립을 치고 이마를 스치는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새 홍경래의 이마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당황한 홍경래는 소리를 질러 부하들을 불렀다. 홍경래의 급박한 소리에 우군칙과 보초를 서고 있던 봉기군들이 달려왔다. 우군칙은 김대린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김대린은 암살이 실패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그 자리에서 자기의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이인배는 봉기군들의 칼을 맞고 죽었다.
이 암살미수 사건으로 홍경래는 전열을 수습하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모든 작전을 취소하고 21일에 일단 거점인 다복동으로 회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봉기군에게는 진격 일정에 결정적인 차질을 주고 말았다. 속전속결로 진격을 하여 관군이 재정비할 틈을 주지 말아야 하는데, 남진군의 후퇴로 이에 속도를 맞추기 위하여 북진군마저 정주에서 나흘 동안이나 더 머물러야만 했다. 그만큼 북진군은 다음 공략지인 의주성 점령 시기를 놓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다복동으로 돌아와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남진군은 24일 밤이 되어서야 홍총각의 선봉부대가 박천 송림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뒤를 따라 홍경래와 우군칙의 부대가 26일에 송림리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북진군도 24일에 비로소 정주를 떠나 선천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홍경래 암살미수 사건으로 빚어진 나흘간의 공백이 봉기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편 안주성에서는 19일 아침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지자 군대 기강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에 목사 조종영은 명령에 따르지 않는 군졸 3명의 목을 치어 효수하고 성문을 굳게 닫았다. 또한 봉기군이 후퇴하여 내분을 수습하는 동안에 안주성의 관군 역시 전열을 가다듬어 내응 세력이 봉기군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약속된 시간에 봉기군이 도착하지 않자 안에서 봉기군을 돕기로 약속한 진사 김명의도 자기의 신분 노출을 꺼리며 약속을 저버렸다. 그래서 안주성은 앞으로 벌어질 봉기군과의 싸움에서 관군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던 것이다. 봉기군에게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된 것은 이뿐이 아니었다. 영변에서 부사 오연상은 소문으로만 반란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12월 20일, 전열을 수습한 안주 병영에서 급히 전해온 비밀문서를 통하여 박천에 봉기군이 집결해 있다는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하고는 크게 놀라 군대를 요처에 배치하고 군졸을 더 증강시켜 무기를 나누어주어 성문을 지키게 하는 등 봉기군의 공격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고는 탐문에 뛰어난 군졸 하나를 성 밖으로 내보내 정보를 입수케 한 결과, 피난민 가운데 봉기군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12월 22일 운산 군수 한상묵과 개천군 염백관이 군사를 이끌고 영변으로 와서는 첩자가 있다는 정보를 다시 전해주었다. 부사 오연상은 정보가 분명하다고 판단, 가산과 박천에서 온 피난민들은 전부 성 밖으로 쫓아내었다. 그런 가운데 내응자 색출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은밀한 수사로 무려 19명의 내응자가 체포, 사형당하거나 옥에 갖히게 되었다. 숫적으로나 군장비 모두에서 열세인 봉기군의 작전은 언제나 내응자가 안에서 성문을 열어주어 안과 밖에서 동시에 관군을 공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응자가 거의 잡히는 바람에 영변 공략에 실패하고 말았다. 암살미수 사건이 터져 후퇴하는 그 나흘이라는 시간동안 봉기군에게 불리한 일들만 벌어졌던 것이다. 반대로 관군은 군 기강을 바로 잡고 공격에 대비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을 갖출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얻게 되었다.
영변의 내응 세력이 거의 색출되어 중요한 후방 기지로 점쳐놓았던 영변 탈환에 실패한 남진군은 관군을 등에 지고 안주성 공략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남진군은 일단 박천에 주둔하면서 안주성 공략 작전을 면밀히 세우는 한편 태천을 공격하자고 결정하였다. 태천은 이미 담당 현감이 성을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에 점령은 시간 문제였기 때문이다. 남진군의 일부 병력은 태천 남창에 별다른 저항없이 도착하여 곡식을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25일 밤에는 읍안으로 들어갔다. 내응자인 좌수 김윤해와 변대익이라는 자들이 봉기군을 맞이하였다. 한편, 김사용이 이끄는 북진군은 남진군과 보조를 맞추어 24일 선천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곽산을 출발한 북진군은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진 뒤에야 선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천부사 김익순은 이미 봉기 소식에 접한 후 측근과 군졸 몇 명만 데리고 검산산성으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여기서도 역시 최봉관, 유문제 등과 같은 내응자들이 봉기군의 입성을 맞이하였다. 김익순이 검산산성으로 숨었다는 것을 안 김사용은 아장을 그 성으로 보내 격서를 김익순에게 전달, 회유 협박하였다. 이에 김익순은 아장 편을 통해 항복문서를 보내왔다. 다음날인 25일에 김익순은 새끼로 목을 매고 항복하였다. 그는 곧 옥에 갇혔다. 이렇듯이 봉기군은 어디를 가나 그 성의 최고 책임자를 끝까지 추격하여 항복을 받거나 처형시키는 등 철저하게 점령군으로서 행세하려 하였다. 이것은 자신들이 단순한 반란군이 아니라 성을 정복한 새로운 통치자라는 인상을 백성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조치였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일이 그 다음 단계에 있었다.
김사용은 김익순이 순순히 항복을 하자 옥에서 풀어주고 식량 등을 보내 회유한 뒤 전립과 군복을 입혀 마음대로 성을 출입케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봉기군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남진군은 태천과 박천을 완전히 점령지로 삼은 뒤에는 당초 목표였던 안주성 공략에 부심하고 있었다. 지도부도 개편하여 선봉장은 그대로 홍총각이 맡고 후군장이나 좌우익장 등은 소폭 새로 임명하였다. 성을 타고 넘을 운제를 만드는 등 공략에 필요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남진군은 28일에 출발하여 송림에 진을 쳤다. 이에 북진군은 같은 날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구성으로, 그리고 나머지 부대는 철산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구성으로 향한 부대는 황주 출신의 신덕관이 맡았고, 철산으로 쳐들어갈 부대는 김사용이 직접 지휘를 맡았다. 철산에서는 이미 좌수 정대성 등 내응자들이 성을 점령하고 부사 이장겸의 항복문서를 받아내고 있었다. 그는 울면서 문서를 쓰고는 인부를 내어주었다. 이 항서와 인부를 정대성은 홍경래에게 바쳤다. 결국 북진군은 이곳에서도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남진군, 북진군으로 나뉘어진 봉기군은 거병한 지 약 열흘 만에 관군의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 곽산, 정주, 선천, 철산 등 서해안 일대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봉기군의 작전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각지의 내응 세력들의 적극적인 가담이 주요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내응 세력은 주로 좌수, 별감, 풍헌 등 향임과 별장, 천총, 파총, 별무사 등 무임 중의 부호들이었다. 이들은 부농이나 사상인들로서 평소 정부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사람들이었다. 만일 홍경래 암살미수 사건이 없었다면 더 많은 내응 세력이 가담하여 짧은 시일 안에 평안도 일대를 거의 장악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같이 봉기군이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는 동안에 중앙정부는 뭘하고 있었을까. 중앙정부는 봉기가 일어난 날에 떠도는 소문으로만 봉기에 대해 듣고 있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12월 20일에야 평안병사 이해우의 급한 밀서를 받고 구체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봤을 때 중앙정부는 난이 있고 난 이틀 후에야 비로소 객관적인 정보에 접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날 홍경래 암살미수 사건으로 공략이 늦춰진 안주성은 아직 건재하다는 보고를 받고는 일단 안심하였다. 그러나 순식간에 가산, 박천, 정주 등 여러 지역이 이미 점령당했다는 보고에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정부는 서북 지역의 명령 계통에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사태 수습에 나섰다. 우선 신홍주를 정주목사로 임명하는 등 지휘 계통을 정비하고 군대 파견을 논의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는 정경행이라는 인물을 곽산군수로 발령하였는데, 정경행은 봉기군의 내응자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앙정부는 정확한 정보가 없어 작전에 애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겨우 하루 지나 신홍주를 다시 영변부사로 임명하는 등 수습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모로 혼란을 빚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앙정부도 차츰 전열을 가다듬어 나갔다. 24일 긴급회의를 연 결과 금위영에 봉기군과 대적할 순무영을 설치, 원정군을 조직하였다. 이에 양서순무사에 이요헌을 임명하고 순조는 그에게 전시중 왕명을 대행할 수 있다는 상방검을 하사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조직 정비 과정에서도 중앙정부는 중간 참모들의 임명을 번복하는 등 대비책에 경황이 없었다. 그만큼 봉기군의 거병은 기습적인 것이었으며 치밀한 계획에 의해 발생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중앙정부는 아직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임금의 친위 세력인 순무영의 군사를 출전시키기에 앞서 체면을 생각하여 일기군을 먼저 출정시켰다. 그런데 일기군의 간부인 좌별장 김처한이 죽기를 무릅쓰고 출정을 거부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어명을 어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결국 김처한은 군문효수되었고 그 자리를 중군 박기풍으로 메꿨다. 이때가 이미 봉기군이 가산, 정주 등 주요 7개 지역을 점령한 27일 전후였다. 이에 여러 대신들은 순조에게 상소문을 올려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워 주었다.
27일 전후하여 봉기군의 소식은 이미 서울 등 경기도나 황해도 일대에 쫙 퍼져 있었다. 봉기군이 곧 남하하여 서울을 점령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러자 난을 피하기 위해 양반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 가운데 남쪽으로 피난하는 사람이 차츰 늘어만 갔다. 또한 중앙정부의 통치가 소홀한 틈을 타서 도적들이 부잣집을 터는 등 인심이 흉흉해졌다. 중앙정부의 우유부단한 조치에 안타까움을 느낀 일부 대신들은 이러한 내용을 담아 순조에게 상소하였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인 28일에 평안감사의 보고가 들어왔다. 평양을 중심으로 원 모양의 방어진을 구축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보고서였다. 이에 박기풍이 이끄는 순무영의 중앙군을 급파하여 29일에는 개성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봉기군과 관군 사이의 피할 수 없는 대접전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평안감사의 보고서가 도착한 28일은 말그대로 폭풍전야였던 셈이다. 관군과 봉기군의 본격적인 접전은 29일에 있었던 송림전투로 그 불꽃을 당기게 되었다. 물론 안주 병영을 중심으로 한 관군과 봉기군 사이의 전투는 예상대로 중앙군이 도착하기 전에 벌어졌다.
송림, 곽산전투
관군은 첩자를 보내어 28일부터 송림에 머물고 있던 남진군의 병력과 동향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관군의 병력 수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누가 먼저 선제 공격을 하느냐였다. 관군 지도부는 봉기군의 성격상 곧 공격해올 것으로 판단하고 군대를 셋으로 편성하여 29일 아침 송림을 향하여 세 갈래 방향에서 진격하였다. 이에 관군의 동태를 파악한 남진군도 역시 3군으로 나뉘어 관군과 접전을 벌였다. 전투 초기에는 남진군이 월등하여 관군이 밀리는 형세였다. 평안병사 이해우는 백상루에 서서 중앙 주력부대가 밀리는 것을 보고 즉시 곽산 전군수에게 병사 천여 명을 주어 남진군의 후위를 치게 했다. 이른바 양동작전이었다. 이해우의 작전은 적중했다. 남진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홍총각은 말머리를 돌려 후방 지원에 나섰다. 관군이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군의 좌영장 윤옥열은 도망치는 군사들을 향하여 칼을 휘두르면서 전진하게 만들었다. 죽음 아니면 승리뿐이라는 뜻이었다. 이에 관군은 다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남진군을 공격하였다. 활과 총알이 난무하고 관군의 북소리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남진군의 기병 몇이 말에서 떨어지자 일반 병사들은 차츰 뒷걸음쳤다. 남진군의 1차 방어선이 무너져갔다. 곧 남진군은 무기를 버리고 사방으로 도망쳤다. 승기를 잡은 관군은 도망가는 남진군을 쫓아가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관군은 그 길로 봉기군의 주둔지인 송림까지 쳐들어갔다. 관군은 보이는 막사마다 불을 지르는 등 남진군을 끝까지 추격하였다. 관군의 칼에 죽은 남진군의 시체가 수백 명에 달하였고 생포된 자는 그리 많지 않아 수십 명에 불과했다. 생포보다는 살육에 더 주안점을 둔 셈이었다.
관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본부에 해당하는 가산 다복동까지 진격하여 근거지를 불태워 버렸다. 관군들은 봉기군의 본부만이 아니라 민가에도 쳐들어가 불을 지르고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상을 일삼았다. 추측컨대 관군 지휘부는 승기를 잡을 경우 남김없이 살육하라는 명령을 내린 듯하다. 일개 군졸들이 함부로 민간인을 죽인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관군은 초토화전술로 봉기군을 밀어부쳤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초토화전술은 '홍경래의 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관군들은 이후에도 계속 민가에까지 들어가 일반 백성들을 살육하게 되는데, 이런 대량 학살을 피해 농민들이 봉기군의 마지막 거점이 된 정주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송림전투에서 패한 남진군이 정주성으로 들어갈 때에도 일반 농민들은 식솔을 거느리고 성안으로 도피해갔던 것이다. 송림전투의 패배는 봉기군으로서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이 전투의 패배 요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진군은 관군의 정확한 병력을 파악하지 못한 채 평야 지대에서 전투를 벌인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비등한 수로 관군과 접전을 벌인 것도 물론이지만 한겨울에 활과 조총으로 무장한 관군을 은폐할 곳이 없는 평지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화약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든 꼴이 된 셈이다. 처음에 홍총각의 진두 지휘로 승기를 잡을 뻔 하였지만 이해우의 양동작전으로 남진군은 걸어다니는 표적이 된 것이다. 둘째, 홍총각은 무리하게 정면 돌파만을 생각하였다. 남진군의 3군 대부분이 중앙 돌파에 동원되어 관군의 우익군과 접전을 벌여 결국은 좌익군을 소홀히 여겨 허를 찔린 것이다. 관군은 정규 훈련을 받은 정예군이다. 정예군은 언제든지 전술을 바꿀 수 있는 군사 지식을 갖추고 있다. 일정한 방향에서만 공격해오는 남진군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은 관군으로서는 수월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진군의 지도부는 평지에 있었기 때문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가질 수 없었다. 이른바 국지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홍총각은 나름대로는 전면 승부를 걸었던 것이지만 이와 반대로 이해우는 백상루에서 관군과 남진군 모두의 동태를 거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무만을 보는 자와 숲 전체를 조망하는 자 사이의 차이점이기도 했다.
남진군이 송림전투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에 접한 북진군 지도부는 마지막으로 정주 이북 지역을 지켜야만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북진군의 김사용은 해가 바뀐 1812년 1월 1일 이후에 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는 먼저 용천을 1차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용골산성을 먼저 공격해야만 했다. 용골산성은 예로부터 험준하고 쉽게 외침을 받지 않는 곳이어서 요충지로 유명하였다. 김사용은 이런 현실을 감안하여 산성 맞은 편 산에 올라가 군사들에게 소리를 지르게 하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군대의 수가 엄청난 것처럼 보이는 등 위장 전술을 썼다. 그리고 성 안에 있는 군졸들의 부모 등 가족들을 동원하여 울면서 군졸들의 이름을 크게 부르게 하였다. 갑자기 용골산성 주변이 마치 집단 초상이라도 난 것처럼 울음 소리로 가득했다. 그러자 성을 지키던 군졸들 대부분이 도망가고 이에 부사 권수도 사태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의주로 야밤 도주하였다. 김사용의 사면초가 전법이 먹힌 셈이다. 결국 북진군은 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용천읍에 입성하게 되었다. 입성한 김사용은 남진군의 패배를 감안하여 더 많은 군사를 모을 필요성을 느꼈다. 이제부터 관군과 전면전을 하려면 막강한 군사력이 없이는 봉기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김사용은 우선 진사급에 해당하는 향반층들에게 군관첩을 주어 종사관으로 임명, 봉기군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도록 포섭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지역 중간 실력자들이기 때문에 그 밑에 있는 이임이나 면임들을 동원하여 군사를 모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봉기군 지도부는 하층 농민들의 자발적인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물론 일반 농민들의 의식이 아직 그런 수준까지 이르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향반층을 통하지 않고서는 군대를 키울 수 없을 만큼 봉기군을 구성하고 있는 계층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관군의 무자비한 학살에 반발하여 정주성으로 들어간 농민들이나 그 주변 농민들은 적극적으로 항거에 참여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정주성전투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향반층들 역시 봉기군이 유리할 때에는 농민들을 이끌고 봉기에 참여하지만 일단 불리한 정세가 되면 농민들을 이끌고 관군에 투항하는 자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던 김사용은 향반층들에게 각별히 신경을 썼던 것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문제점이 봉기군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1월 8일 관군은 북진군이 정주의 남진군과 합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후원장 이영식과 우영장 오치수에게 이천여 명의 군사를 주어 곽산을 치게 하였다. 곽산에 주둔하고 있던 북진군 군수 박성신은 군사들에게 먹을 것을 주며 위로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술을 먹고 노래를 부르는 등 긴장을 풀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관군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관군은 사방에서 함성을 지르며 기습 공격을 하였다. 북진군의 패배는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었다. 곽산의 북진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관군은 도망치는 북진군사들을 쫓아가 닥치는 대로 목을 베었다. 수백 명의 시체가 순식간에 산과 들에 즐비했다. 생포된 자는 겨우 몇 명에 불과했다. 박성신은 혼비백산하여 선천으로 도망쳐 관군의 공격을 지도부에 알렸다. 이에 지도부는 북진군의 이제초에게 기병과 일반 군사 천여 명을 주어 곽산으로 급히 보냈다. 이번에는 사태가 거꾸로 되었다. 곽산에 주둔하던 봉기군을 꺾고 승리에 도취해 있던 이영식 등의 관군은 이제초의 기습작전에 걸려 패주하고 말았다. 윤욱열의 관군이 곽산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이제초의 부대가 점령한 뒤였다. 숨돌릴 틈도 없는 전투가 반복되었다. 이번에는 다시 윤욱열의 부대가 봉기군이 전열을 수습하기 전에 사송야에서 선제 공격을 펼쳤다. 북진군은 얼마 싸워보지도 못하고 윤욱열의 과감한 공격에 밀려 도망을 쳤다. 다시 산과 들에는 봉기군의 시체가 수백 구 뒹굴기 시작했다. 결국 엎치락뒤치락 하던 곽산전투는 관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송림전투에 이은 봉기군의 두번째 대패였다. 이 전투에서 봉기군은 북진군의 주력부대 대부분을 잃은 셈이다. 게다가 이제초마저 사로잡힌 뒤 처형당하여 봉기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도저히 회복할 길이 없었다. 잔류병들은 간신히 관군들의 감시를 뚫고 정주성으로 하나 둘 모여들었다.
곽산전투 이후 봉기군은 패배를 거듭하였다. 용골산성은 물론이고 서림성 등도 곧 관군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사태는 봉기군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가고 있었다. 서림성이 함락됐다는 보고를 받은 김사용은 동림성에 머물고 있었다. 김사용은 멀지 않아 봉기군이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정주성 뿐이었다. 김사용은 중대 결단을 내렸다. 그는 군사들을 모두 불러모아 모든 창고를 열어 갖고 갈 수 있는 양을 챙겨 가라고 하면서 해산 명령을 내렸다. 김사용은 군사들에게 정주성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에 맡기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야밤을 틈타 정주성으로 탈출하였다. 이로써 북진군도 거의 붕괴된 셈이다.
마지막 항전지, 정주성
정주성은 봉기군의 마지막 보루였다. '홍경래의 난'은 이 정주성에서 막을 내리게 된다. 곽산전투가 있기 며칠 전부터 각지의 봉기군은 정주성으로 모여들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파악한 관군 지휘부는 각군에게 명령을 내려 정주성을 중심으로 진을 치도록 하였다. 관군이 정주성 주변에 모여들자 봉기군은 성밖 인가의 곡식을 모아들이는 한편 민가에 불을 질러 관군이 거점으로 삼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농민들 대부분은 성 안으로 들어갔다. 봉기군은 청야전술을 펼친 것이다. 1월 5일 아침, 곽산군수 이영식은 2초(약 240명) 군사를 이끌고 정주성 서문 밖에 진을 치는 한편 4초(약 480명)를 2군으로 나누어 북문 밖에 매복시켰다. 뿐만 아니라 동문과 남문 밖에도 다른 지휘관이 이끄는 군사들이 진을 쳤다. 정주성은 말그대로 완전히 포위된 것이다. 성을 점령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성문을 돌파하는 것이다. 그것을 폭파시키거나 태워버린다면 성을 점령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관건은 성문을 어떻게 통과하느냐에 있었다. 그래서 관군은 먼저 동문을 집중 공격하였다. 방패를 머리 위로 한 군사들이 성문을 태우려고 접근전을 펼쳤다. 성 위에서는 관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시환을 쏘아댔다. 관군은 더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군은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도망쳤다. 비록 큰 전투는 아니었지만 정주성에서 가진 첫 전투는 봉기군의 승리였다. 이후에도 몇 차례 성문을 공격하였지만 역시 실패하였다.
그런데 이즈음 관군 내에는 적잖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추위가 심한 서북 지역에서 봉기군과 싸우느라 일반 군사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쌓여갔다. 장교들은 그래도 온돌방을 차지하고 잠을 잤지만 일개 병졸들은 얼어붙은 땅 위에 막사를 치고 칼잠을 자야만 했다. 계급 차별이 심해 군사들은 전의를 상실할 정도였다. 게다가 전투 대상이 외세도 아닌 같은 민족이다 보니 전투를 할수록 명분에 대한 자신감도 상실했을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불만을 일반 민가에 들어가 횡포를 부리며 풀었다. 군사들은 봉기군을 잡는다는 명목을 내세워 아무 집에나 들어가 약탈을 일삼고 심지어는 반항하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살상하였다. 심한 경우에는 이를 말리는 상급자에게도 칼을 휘두르는 자도 생겨났다. 추위와 오랜 전투에 관군들은 난폭한 도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정주성전투가 진행되는 동안에 성 주변 주민들이 성 안의 봉기군에게 적극 협조하게 된 것이다. 또한 농민들이 성 안으로 들어간 이유가 관군들의 무자비한 살육을 피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관군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했다. 봉기군은 이러한 농민들로 인해 다시 군사력을 증강시킬 수 있었다. 정주성의 봉기군은 완전히 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인해 농민군이 되어 있었다. '홍경래의 난'을 농민전쟁으로 부를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바로 이것이다. 이 난의 성격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정주성전투는 1월 초에 시작하여 봉기군이 완전 섬멸당하는 4월 19일까지 거의 세 달 보름 동안 진행되었다. 하나의 성이, 그것도 정규군도 아닌 민간인으로 구성된 농민군이 이처럼 오래도록 버틴 것은 역사상 그리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정주성전투의 과정을 모두 정리할 필요는 없다. 일진일퇴하는 전투의 연속이었기에 그 주요 고비만 소개해보기로 한다. 봉기군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3월 22일 전후였다. 이날 전투에서 봉기군은 포수까지 동원된 관군에 밀려 수십 명의 사망자와 90명에 가까운 인원이 관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기록에 따르면 이 날 전투 후에 성 안에는 유가족들의 울음 소리가 성안에 가득했다고 한다. 게다가 성 안의 식량이 점차 바닥을 보이게 되었다. 우물이 여러 개 있어 물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워낙 많은 수가 성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사방이 포위된 상태에서 식량을 보급하여 연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군사들에게 하루에 절미 한 되씩 주던 것을 절반으로 줄일 수밖에 없었고 소나 돼지 등 가축뿐만이 아니라 전투에 쓰는 말까지도 거의 잡아먹어 10여 필도 안 남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성 주변을 대낮같이 밝게 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충전시키던 횃불에 쓸 장작조차 모자라 집을 부수기도 하였다. 일반민들은 궁여지책으로 술을 만들어 팔거나 죽을 쑤어 군사들에게 파는 형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시 홍경래 암살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이침의 배신이었다. 이침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정주성에 봉기군이 입성할 때 내응자 역할을 하던 이 성에 사는 집사였다. 그런데 전세가 봉기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침은 목숨이 위태롭다고 판단하여 관군에게 투항하기 위하여 서문 안에서 홍경래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로 끝났다. 이 사건으로 이침과 연루된 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사태를 수습한 홍경래는 성내의 인구를 줄여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수백 명의 노인과 아녀자들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이러한 조치는 암살미수 사건으로 뒤숭숭해진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이러한 성내의 움직임을 감지한 관군은 봉기군이 매우 취약해져 있다고 판단하고 4월이 되면서 본격적인 대공세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봉기군도 다시 관군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더 많은 횃불을 밝히고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하였다. 예상과는 달리 봉기군의 저항이 거세자 관군이 일단 후퇴한 뒤 성 주변에서 지대가 높은 곳을 골라 그 위에 흙을 쌓아 성 높이와 비슷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이것은 관군의 양동작전이었다. 흙을 쌓기로 한 곳은 동북각이라는 곳이었는데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반대편인 북장대 쪽 성 밑을 파고 들어갈 작정이었다. 이를 위해 관군은 시간을 벌기 위하여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봉기군은 이러한 관군의 공격도 물리쳤다. 그러나 이것은 연막전술이었다. 관군은 이미 4월 3일 경부터 성 밑을 파헤치고 있었던 것이다. 관군의 마지막 공략 작전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성벽 폭파 작전이었다. 성벽만 없다면 얼마 남지 않은 성내의 봉기군을 쳐부순다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보름 이상 땅을 판 관군은 드디어 18일 밤에 엄청난 양의 화약을 땅에 묻었다. 이때 동원된 인부들이 광산 노동자들이었다고 하니, 봉기군의 초기 구성원이 광산 노동자라는 것을 상기할 때 상반된 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날이 밝았다. 4월 19일 새벽, 관군은 묻어둔 화약에 불을 당겼다. 순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북장대 쪽 성벽이 일시에 무너져 앉았다. 성루에 있던 봉기군들은 비명을 지르며 돌무더기 속으로 떨어져 압사하고 말았다. 성 한 쪽이 완전히 뚫린 셈이었다. 그 다음 과정은 뻔했다. 홍경래는 전투 중에 죽고 성안에 있던 체포된 대부분의 장정들은 4일 후인 23일에 처형당하였다. 그 수가 무려 1,917명이라고 한다.(그러나 이것은 당시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더 많은 봉기군들이 살육당했다고 한다.) 남진군의 선봉장으로 활약하던 홍총각도 체포된 뒤 처형됐으며, 우군칙, 이희저 등은 도주하여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1811년 12월 18일에 시작된 홍경래의 난은 4개월 만에 대량 처형으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홍경래난의 특성과 역사적 의의
한마디로 말해서 홍경래난은 저항지식인, 장사, 부농, 상인층, 향임층, 농민, 천민 등 각 계층이 모두 참여한 전쟁이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으로 중간 계층이 형성되고, 이들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반발하여 농민들을 봉기군으로 결집시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분명 반란을 주도한 것은 소외된 양반들이나 상인, 향임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 계획이 가능했던 것은 계급 대립이 첨예화되고 봉건체제의 부패성과 모순이 폭발 직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시애의 반란'이나 미수로 끝난 '정여립의 반란'에서도 보았듯이 저항지식인들과 민중 사이에 사회적 모순에 대한 합의점을 찾게 될 경우 그것은 쉽게 봉기로 이어질 수 있다. 지식인 등 주도층은 민중의 호응을 얻음으로써 반란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아직 자생적인 조직력을 갖기에 미흡한 농민들은 지식인층의 진보적 이념에 따라 자신들의 요구를 표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홍경래난이 급속도로 청천강 이북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상호 보완성이 내재된 상태에서 사전에 짜놓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움직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홍경래난이 지니고 있는 특성 가운데 하나는, 중간 계층의 참여이다. 상인자본이 발달되어 있던 평안도 지방에는 대상인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많은 부를 축적하면서 일면으로는 사회적 모순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되는 부류들이 생겨났다. 이것이 바로 서구에서 말하는 중산층 형성의 시초라고는 볼 수 없지만 봉건체제가 와해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신세력들임은 틀림없다. 따라서 홍경래난은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는 데서 더 큰 특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지역 차별에 대한 감정이 일면 작용하고 있지만 이것은 시간이 갈수록 많은 농민, 천민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반정부적인 요소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질적 토대는 자본주의의 맹아가 형성됨으로써 고양된 사회의식을 갖게 된 지식인, 중간층의 이해와 맞아떨어져 모든 계층이 봉기에 참여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홍경래난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봉기 지휘부는 농민들을 모을 때 향임 등 그 지방 관속들에게 의존하였다. 역으로 말하면 아직 지도부가 봉건적인 의식을 벗어나지 못해 농민들을 직접 결집시킬 수 있는 이념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즉, 당시 삼정 문란으로 피폐화된 농촌경제를 살리기 위한 토지개혁이나 제도개혁 등과 같은 반봉건적이고 선진적인 구호를 내걸어 '굶주린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음으로써 체제 변혁을 목표로 거사를 추진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적, 계층적인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며, 아직은 조직적인 반체제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변혁 운동은 갑신정변과 갑오농민전쟁에 와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홍경래난은 이후에 일어난 민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813년에 제주도에서 민란이 발생하였으며, 1815년 경기도 용인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웅길은 홍경래난을 본받아 그 고을을 점령하고 교두보로 삼은 다음 서울을 공략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1816년 평안도 성천에서는 학상이라는 자가 거사하여 홍경래의 남은 부대라고 자칭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1826년 청주에서 김치규는 홍경래가 살아 있다는 풍문을 퍼뜨리면서 반란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봤을 때 홍경래난은 '민란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지식인층의 선동으로 참여했던 민중들은 이제 스스로 주체가 되어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임술년(1862년)에 일어난 전국전인 농민 반란이다. 이제 민중은 본격적으로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로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