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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41 호
단기 4341. 11. 27 (음력 10. 3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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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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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 공모
● 주최 : 서울디지털대학교(SDU)
● 주관 : SDU 문예창작학, 문학 계간 『시작』, 문학 월간 『에세이 플러스』
서울디지털대학교는 21세기 한국문학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신인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제3회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을 공모합니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갈 참신한 상상력을 기다리며, 독자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접수기간 : 2008년 12월 1일 ~ 2009년 1월 30일
● 보낼 곳 : writing@sdu.ac.kr
● 입상작 발표 : 2009년 2월 20일 서울디지털대학교 홈페이지
● 유의사항 이미 발표된 작품이나 표절로 밝혀진 작품은 입상 결정 후에도 취소됩니다. 원고 첫 장에 주소, 성명(필명일 때는 본명을 필히 기입), 연락처(전화번호) 등을 반드시 써야 합니다. - 원고는 한글 또는 워드로 작성하여 파일로 첨부하여야 합니다. - 응모작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 공모부문 - 시 : 5편 이상 - 생활기록문(수필, 수기) : 2편 내외
● 공모대상 : 문단에 등단하지 않은 전 국민
● 당선 상금 및 특전 - 당선작 : 각 부문 이백만원, 『시작』(시), 『에세이 플러스』(생활기록문)에 작품 게재, 등단시인 및 등단 수필가로 인정 - 가 작 : 각 부문 일백만원, 『시작』(시), 『에세이 플러스』(생활기록문)에 작품 게재, 등단시인 및 등단 수필가 인정 여부 작품 심사 후 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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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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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은 결심은 가장 유용한 지식이다.(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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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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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란대두
고장말
‘-이란대두’는 표준어 ‘-이라도’와 대응하는 충남 쪽 말이다. “쌀 둬 되라두 헤야 즘신 때꺼정이란대두 먹구 아침을 먹더란대두 쌀 한 되는 더 허야 먹을 것 아닝가베?”(<한국구비문학대계> 충남편)
‘-이란대두’는 조사 ‘-이라도’의 ‘이라’와 ‘-는데도’의 ‘ㄴ데도’가 합친 말로 보인다.(-이란데도>이란대도>이란대두) ‘-이랜대두’나 ‘-이란두’가 쓰이기도 하는데, ‘-이란두/이랜대두’보다 ‘-이란대두’가 훨씬 널리 쓰인다. “조석 한끼란두 대접헐 수가 읎어.”(위 책) “어터게랜대두 밤이랜대두 방향을 증하구(정하고) 오야겄다.”(위 책) ‘-이랜대두’는 강원 횡성 지역에서도 그 쓰임이 확인된다. “즈이는 종이고 그 집에는 정승이랜대두 아들이 지금 죽어가니 그집 아들 때민에 대신 장가간다고 논 몇 섬지기 주어.”(위 책, 강원 횡성편)
‘-란대두’(란대도)는 어미 ‘-라도’와 같은 기능을 한다. ‘-이란대두/란두/랜대두’가 조사로는 충남과 강원 일부에서만 쓰이지만, 어미로는 충북이나 경북 쪽에서도 그 쓰임이 발견된다. “아버님을 생각해서란대두 조금이란대두 서운케 생각할 필요 없다구.”(위 책, 충남편) “저녁을 먹구 아무리 생각을 하더란대도 자구 가선 안 되겠단 말여.”(위 책, 충북편) “저 우에 갖다올 챔이니께 이 바우 밑에서 무슨 소리가 난드란대도 바우를 건디리만 안 댄다.”(위 책, 경북편)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아니오, 아니요
'물음에 '예''아니오'로 답하시오'와 '물음에 '예''아니요'로 답하시오' 중 어느 것이 맞을까? 알쏭달쏭한 분이 많을 것이다. 답부터 말하자면 '아니요'가 옳다. 글에서 '아니오'와 '아니요'를 구분해 써야 할 상황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대답하는 말인 '예'와 짝을 이루는 경우인데, 이때는 '아니요'가 맞다. 친구가 '숙제 다 했니?'라고 묻는다면 '응' 또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질문을 윗사람이 했다면 대답은 '예'또는 '아니요'로 바뀐다. 이때의 '아니요'는 감탄사 '아니'에 존대를 나타내는 보조사 '요'가 붙은 것이다. 감탄사에 종결어미 '-오'가 붙을 수는 없으므로 이 경우 '아니오'로 쓸 수 없다.
둘째는 문장 속에서 연결하는 역할을 할 때다. '어렸을 때부터 옆집에서 살아온 우리는 친구가 아니요, 형제랍니다.'이처럼 글을 이어주는 상황에는 '아니요'를 써야 한다. 여기서의 '아니요'는 형용사 '아니다'의 어간 '아니-'에 연결어미 '-요'가 붙은 것이다. 이때는 문장을 끝내는 것이 아니므로 종결어미 '-오'를 써서 '아니오'로 하면 안 된다.
셋째는 설명하거나 물으면서 문장을 끝맺는 경우다. 예를 들면 '판다는 곰이 아니오' '이미 늦은 것 아니오?'같은 것들이다. 이때의 '아니오'는 형용사 '아니다'의 어간 '아니-'에 종결어미 '-오'가 붙은 것이다. 정리하면 '응/아니'의 존대어나 연결에는 '아니요'를 쓰고, 문장을 끝맺을 때는 '아니오'를 쓰면 된다.
빨강색, 빨간색, 빨강
올해도 어김없이 남도엔 동백꽃 바람이 불고 있다. 하얀 눈 위에 '빨강색'꽃송이를 통째로 떨어뜨리는 겨울꽃, 동백의 자태는 언제 보아도 의연하다.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피고 지기를 거듭하는 동백꽃은 초록빛 잎사귀와 '빨강색'꽃잎, '노랑색'꽃술이 선명한 대비를 이뤄 정열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겨우내 남도의 섬에만 머물러 있던 동백꽃은 입춘을 시작으로 육지에까지 꽃망울을 터뜨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동백꽃이 피는 곳은 해남 땅끝에서 뱃길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보길도다. 한겨울에 꽃을 피워 봄에 지는 보길도 동백이야말로 진정한 동백(冬柏)꽃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보이는 '빨강색, 노랑색'은 '빨간색, 노란색' 혹은 '빨강, 노랑'으로 하는 게 좋다. '빨강, 노랑'자체가 색을 표현하는 단어인데, 굳이 그 뒤에 '-색'을 넣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단어의 중복이다. '파랑색, 검정색, 하양색' 등도 마찬가지로 '파랑, 검정, 하양' 또는 '파란색, 검은색, 하얀색'으로 해야 한다. 한편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은 지난해 10월 기본색 이름을 '빨강, 주황, 노랑, 연두, 초록, 청록, 파랑, 남색, 보라, 자주, 분홍, 갈색(이상 유채색)과 하양, 회색, 검정(이상 무채색)으로 정하고, 색 수식어는 기존의 '빨강 띤 주황, 녹색 띤 연두'처럼 '~ 띤'으로 하던 것을 '빨간 주황, 초록빛 연두'처럼 '~ㄴ'형으로 쓰거나 단음절형 '~빛'으로 체계화하며, 관용적으로 쓰던'핑크, 브라운, 브론즈색'등을 '분홍, 갈색, 청동색'등 우리말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세일, 리베이트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경기는 언제쯤 회복될지 알 수 없다. 기업들은 나름대로 경기를 진작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장기 불황에 소비 위축까지 겹쳐 곳곳에 '세일'이란 문구가 붙어 있다. '상품 몇% 세일'뿐만 아니라 '수험생 50% 세일' '신입생 50% 세일' 등의 문구도 보인다. 세일(sale)은 원래 '상품을 팔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위의 문구는 '수험생 50%를 팝니다' '신입생 50%를 팝니다'라는 뜻이 되는 셈이다. 물론 의도는 '수험생이나 신입생에게 값을 50% 깎아준다'는 의미다. '바겐 세일(bargain sale)'이나 '디스카운트 세일(discount sale)'의 뜻으로 '세일'을 워낙 많이 쓰다 보니 국어사전에까지 이 단어가 올라 있다. 그러나 '싸게 판다'는 의미를 정확히 전달할 수 없으므로 '세일' 대신 '할인판매'로 쓰는 것이 좋겠다.
이처럼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해 잘못 사용하는 외래어 중에는 '리베이트(rebate)'도 있다. 예를 들면 '10억원의 대출 리베이트를 받은 혐의로 전·현직 행장 세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건설 업체에서 500만원의 리베이트를 받아 챙긴 혐의로 현직 구청장을 구속했다'처럼 쓴다. 그러나 리베이트는 물건을 판 뒤에 산 사람에게 사례금이나 보상금 형식으로 돌려주는 일정 비율의 돈을 뜻하며, 정당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문장에서는 '뇌물'이란 말을 쓰는 것이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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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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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 곽재구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달콤한 잠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 중 눈빛 초롱하고 허리통 굵은 몇 올을 끌어다 눈에 생채기가 날 만큼 부벼댑니다 지난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강둑에 매인 채 출렁이고 작은 물새 두 마리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갑니다 사랑하는 이여 설령 당신이 이 나루터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습니다 설레이는 물살처럼 내 마음 설레이고 또 설레입니다.
* 곽재구 * 1954 광주광역시 출생 전남대 국문과 졸업 1981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사평역에서>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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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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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여, 잘 가라 - 유재건
일 보에 일배처럼 한 발 앞도 저린 날들 비 내리고 바람 불고 때론 햇살 분분하고 미로의 그 길이지만 두려움 반 흥분 반
반성 뒤에 밝아오는 지혜 하나 솎아내고 같은 날 같은 모습 두 번은 아니오는 지난한 일상이라도 돌아보면 별이 되는
하루의 문을 닫고 헤적이 채색하면 화톳불의 저 불씨들 게 눈처럼 슴벅이는 잘 가라 나의 밤이여 아침의 밑불 되어
미지의 보따리를 내일 또 풀기 위해 노곤한 근육들을 안마하는 강한 추론 뜨거운 함성을 위해 가슴의 말을 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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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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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 문집 1
史記 張良傳
天授奇謀託異神 秦皇驚倒項分身
타고난 奇謀를 신에게 가탁한 것 秦始皇은 넘어지고 항우는 목 잘렸네
可知無欲能超世 不似韓彭一網塵
욕심없는 그게 바로 세속을 벗었으니 한 그물에 싸인 저 한신 팽월 같을손가
장량(張良): 자는 子房. 한패공을 도와 천하를 평정, 留侯로 봉해짐 이신(異神): 비교(?橋) 아래서 黃石公에게 兵書를 전수받은 사실 초세(超世): 장량이 벼슬과 녹을 마다하고 적송자를 따라 노닐기를 자원한 사실을 말함 한팽(韓彭): 한패공의 명장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을 지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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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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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3 -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제4장 인류의 미래는 발전 가능한가
유교 전통과 자본주의는 화해할 수 있는가
유교와 자본주의는 각 문화 속에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요소가 자랄 수 있었던 환경을 짚어 보는 자세이다. - 유동환(고려대 철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현재 고려대 강사)
우리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를 보나 역사책을 보나 근대 이전까지는 동양의 문명이 서양보다 훨씬 앞섰다고 배워 왔다. 그런데 어째서 근대 이래로 동양과 서양의 경쟁에서 동양은 언제나 연전연패를 당했던 것일까? 철갑선고 대포와 공장 굴뚝으로 상징되는 서양 자본주의의 위력 앞에 어째서 그렇게까지 무기력할 수밖에 없을까? 서양에서 자본주의가 탄생할 수 있도록 만든 요소는 무엇인가? 또 동양은 어째서 현대 자본주의를 자발적으로 발생시키지 못 했는가? 그리고 최근 동아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은 무엇 때문인가? 어쨌든 동양의 상한 자존심을 곧추 세워 주는 일들이 현대에 와서 일어나고 있다. 동양이라 그저 손잡고 이끌어서 계몽해야 하거나 지배해도 좋은 대상이라고 생각하던 콧대 높은 서양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바로 일본이라는 큰 용이 앞서 날아오르고, 그 뒤를 따라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라는 네 마리 용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공교롭게도 이들 지역은 모두 과거 중국 문화, 특히 근대화를 가로막은 봉건사상이라고 지탄받아 왔던 유교의 영향력이 무척이나 강했던 지역이다. 이들 지역의 자본주의 발전은 서양인들이 공공연히 품고 있던 생각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다름 아닌 자신들에게만 고유한 기독교라는 흙 속에서만 싹틀 수 있다고 믿었던 자본주의가 기독교가 아닌 유교라는 흙 속에서도 싹트고 훌륭하게 자라나 열매 맺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오만함을 되돌아보기 시작하였다.
이제 우리는 제각기 다른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유교와 자본주의가 과연 화해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고 서양의 문화가 동양에 옮겨 심어졌을 때, 두 문화는 어떤 방식으로 적응해 왔는지 보기로 하자. 먼저 자본주의와 유교의 결혼에 제일 먼저 관심을 표시한 사람들은 경제현상을 직접 분석하던 파란 눈의 서양 경제학자들이었다. 두 가지 입장이 있는데 첫 번째 입장은 이 지역의 두드러진 정치제도나 경제제도 같은 사회 구조적인 특징에서 경제 발전의 직접적인 이유를 찾았던 '구조적 해석' 방법이다. 대표자로 로이 호프하인즈와 캔트 캘더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동아시아의 안정적인 일당 통치체제, 행정관리들의 지도력, 강한 민족주의와 같은 정치, 경제적 조건들을 발전의 요인으로 꼽고 있다. 두 번째 입장은 이러한 외적인 정치, 경제 구조가 직접적인 요소가 아니라, 그 구조 깊은 곳에 깔려 있는 특정한 문화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문화적 해석' 방법이다. 대표자인 칸은 동아시아가 대부분 '유가 후기 문화' 지역에 속해 있어 유교적인 교육을 널리 받은 지식인들이 많다는 점을 들고 있다. 또한 버거는 '현대화'란 서양식 현대화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동양식 현대화도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사대부와 관리가 갖고 있던 고상한 윤리로서의 유교가 아닌 일반 백성들의 세속화된 노동윤리로서의 유교를 구분하고, 후자가 높은 노동 생산력을 낳았다고 보았다.
그런데 바로 두 번째의 '문화적 해석' 방법은 동양 학자들에게 그야말로 복음으로 들려왔다. 지금까지 낡은 봉건사상으로서 근대화 실패의 주범으로 숨죽이고 있었던 유교 전통이 현대 자본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자 동양의 학자들은 이를 발판으로 한 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환경오염이나 성도덕의 타락 등 현대 서양문명의 병폐를 유교의 부흥을 통해서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제기된 주장이 바로 '유교부흥론'이고 '유교자본주의'이다. 이제부터 과거, 동양으로 상징되는 유교와 현대, 서양을 대표하는 자본주의가 절대로 조화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막스 베버, 두 요소가 잘 조화해서 새로운 문화로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교자본주의자들의 주장을 비교해 보기로 하자.
유교와 자본주의는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
동양의 유교와 서양의 자본주의는 절대로 조화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독일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를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서양이 어떻게 자본주의를 먼저 발전시켰는가'를 해명하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 경제적, 사회적 요인 뿐만 아니라 문화적 요인도 한몫을 하였다고 보았다. 그는 대표작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서양 자본주의 문화의 특징으로 전문적인 직업의식과 그러한 직업의식의 배후에서 그 직업노동에 몸바치도록 하는 합리적인 삶의 방식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합리적인 삶의 방식은 포르테스탄티즘, 즉 신교의 윤리 속에 들어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중세의 기독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라고 할 정도로 현세 속의 돈벌기를 매우 비천한 것으로 보았다. 당연히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일이 가장 고귀한 일이었고,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 땀흘리는 것은 천박한 일이었다. 교회는 농사짓는 수많은 농노들에게 불완전하고 천박한 세속의 일보다는 천국의 향해 회개하고 기도하도록 설교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상업이나 공업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캘빈주의자를 비롯한 청교도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노동이란 '신의 영광을 현세 속에서 드러나게 하는 행위'라고 규정하였다. 베버는 캘빈주의를 중심으로 한 금욕적인 신교윤리에서 근대자본주의 정신의 뿌리인 합리성을 이끌어 냈다. 그가 보기에 캘빈주의자를 비롯한 청교도들은 현세 속에서 사회적 노동을 할 때 '신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지향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노동의 신성함을 긍정하고, 이는 돈벌기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다시 말해 신의 이름으로 부자의 죄의식을 벗어나게 되었고 정반대로 부자가 되는 것이 신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 되었다. 자본주의의 장애물이었던 중세 기독교가 근대적인 신교로 바뀌면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논리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설명방법은 앞에서 보았던 '문화적 해석'의 원조를 보는 듯하다. 그는 이렇게 신교의 윤리를 통해서 서양 자본주의의 발전을 설명하는 것처럼, 똑같은 방법을 그대로 중국에 적용하였다. 그리하여 '왜 중국에서는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없었는가'를 따지는 문제로 나아갔으며 그 연구의 결과물이 바로 "유교와 도교"였다. 그가 보기에 중국에서 서양의 신교와 맞설 수 있는 사상을 찾는다면 당연히 유교이다. 베버는 중국이 서양과 다른 지배구조로 매우 일찍이 발전한 제도로서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도를 들고 있다. 중국은 서양의 봉건제처럼 교회와 왕과 기사들이 반독립적인 상태로 있었던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고 보았다. 중국은 진시황 이래로 일찍이 황제를 꼭지점으로 하는 거대한 행정조직을 세웠고, 그 구성원들이 바로 유교를 학습한 사대부 관리들이었다. 이들은 세분화된 직업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교양으로서 유학의 경전을 공부하는 것을 최고로 여겼지, 개별 직업기술을 익히는 것은 천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선비, 농민, 기술자, 장사치라는 '사농공상'의 신분제가 수천 년에 걸쳐 유지되었다. 결국 서양처럼 전문적인 직업관이나 노동관은 나타날 수 없었다. 또한 유학자들은 근대 서양인들이 가졌던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나 자연과학에 대한 열정보다는 과거시험을 통해서 관료조직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만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유교사상에는 합리성이나 자연과학적 사유가 결여되었다. 또한 요순 임금이나 공자 등 성인과 같은 인간에 의한 통치에 의존하여 자연법과 형식적인 법률논리가 결여되어 법치가 시행되지 못하였다. 베버는 이러한 문제점들로 인하여 노동과 직업의 전문화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거대한 관료조직은 근대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 되었다고 보았다.
베버는 또 중국의 대표적인 민중종교라고 할 수 있는 도교도 같은 방법으로 분석하였다. 도교에는 자본주의 경제이론의 바탕이 되어 온 자유방임주의와 비슷한 사고방식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도교적 자유방임주의는 자유로운 이윤 추구를 가능하게 해 주는 자유경쟁이나 능동적 직업윤리로 연결되지 못하고 종교적이고 명상적인 신비주의로 빠져 버렸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그는 동양의 기본사상인 유교나 도교에는 자본주의를 뒷받침할 요소가 결코 나타날 수 없다고 단정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베버의 주장을 보면서 우리는 그의 논리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베버는 사실 유교의 사상 내용 자체를 분석하기보다는 유교가 동양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문제삼은 것이다. 둘째, 베버는 자신의 기독교에 대하 이해를 바탕으로 유교를 보았다. 셋째, 베버는 자신이 자본주의와 신교의 분석하던 틀을 그대로 중국에 대입하여 신교의 자리에 유교를 넣어 비교하였다. 이 같은 시각은 앞서 살핀 기독교적 시각의 문제와 함께 베버가 유럽 중심주의의 시각에 서 있음을 보여 주는 점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베버는 자기 학설의 보편성을 얻기 위해서 신교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이라는 구도에 신교 대신 유교를 넣어서 비교한 것이다. 실제로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의 우선적 타도대상으로 전통주의를 꼽는다. 그렇다면 중국에서의 타도대상인 전통주의는 당연히 유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분석에 앞서 이미 결론을 내렸던 셈이다.
유교와 자본주의는 찰떡궁합이다
이제 적극적으로 유교와 자본주의의 결혼을 추진했던 사람들을 만나 보자. 흔히 '유교자본주의' 또는 '유교부흥론'으로 구분되는 학자들 가운데 대표자로 중국계인 칭중잉, 뚜웨이밍 등과 일본의 시마다 겐지 그리고 한국의 김일곤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앞에서 설명한 '문화적 해석' 방법은 문화를 일차적인 요소로 보고, 정치와 경제의 구조를 이차적인 요소로 보고 있다. 이에 반해서 유교자본론자들은 유교를 중심으로 하여 문화로 모든 것을 해석해버리는 문화일원론에 치우쳐 있다는 점에서 다른 견해인 것이다. 또한 그들은 유교 전통의 계승과 발전, 더 나아가 완전한 부흥을 공공연히 부르짖는다. 사실의 분석에서 당위의 주장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동안 유교와 자본주의의 결혼을 결사 반대했던 막스 베버가 천하의 원수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봇물 터지듯 쏟아 내었다. 더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환경문제, 성범죄, 인간소외 등 현대 서양문명의 병리현상들을 죄다 서양의 물질문명에 따른 결과로 돌리면서 유교와 동양이라는 처방만이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제 유교자본론자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자. 화교 학자로 하버드 대학 교수인 뚜웨이밍은 지구상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만이 문명의 길이 아니라 동아시아 공업문명이라는 또 하나의 독자적인 길이 있으며 이를 제3공업문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지역의 특징으로 유교적인 사회문화를 들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동안 서양 학자들이 동양의 낙후함을 비판할 때 등장하는 유교와 우리가 살려내야 할 유교는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봉건적이고 정치적인 유교인 '유교 중국'과 유가의 참다운 도덕 정신인 '유가 전통'을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유교 중국은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유가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화교 학자인 칭중잉은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은 과학기술이 발전 때문이 아니라, 유교에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유가 윤리 가운데 화해의 원리인 '인'과 도덕의 원칙인 '의'가 이미 현대 일본의 공업사회 구조에 흡수되어 성공적인 기업 관리제도를 마들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유가 윤리와 공업화 사회가 결합하여 윤리적인 사회를 다시 건설하는 것이 지식인의 신성한 의무라고 보았다.
일본의 경우 대표적인 유교자본론자인 모리지마는 "영국의 자본주의를 신교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면 일본의 자본주의는 유교자본주의라고 할 만하다."라고 말하였다. 또 시마다 겐지는 "신교와 돈벌이의 결합이 가능하다면 성리학의 금욕주의와 돈벌이도 결합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일본의 경제문화에 등장하는 종신고용제나 노사가 조화된 기업문화 등은 개인주의에 기초한 서양의 자본주의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이는 유교에서 근원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경제학자 김일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개발도상국의 경제 개발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이유를 찾다가 그 이유가 바로 각 나라의 문화의 차이에 원인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특히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특징을 경제 발전과 연결하여 설명하면서 유교의 긍정적인 기능을 현대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유교의 종화의식과 가족에서 출발한 확대가문주의 같은 윤리의식을 기초로 하는 집단문화를 보존하는 동시에 효율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경제문화를 발전시키자고 하였다. 결국 그는 경제문제의 궁극점에는 공동체의식과 같은 문화의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이상에서처럼 유교가 현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는 주장이 현실적인 경제 부흥과 함께 설득력을 얻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개인주의에 기초해서 자유롭게 직장을 바꾸는 서양식 직업의식보다는 공동체윤리에 뿌리내리고 평생토록 한 직장에 충실한 종신고용제와 같은 동양식 직업의식이 훨씬 더 좋은 것이며, 또 자유방임적인 경제문화보다는 정치와 행정이 경제를 앞서 나가면서 이끌어 주는 독점적인 경제문화가 더 긍정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매우 당위적으로 들린다. 어떻게 유교 전통 속에서 자본주의와 맞는 요소들을 찾아 내겠는가? 유교적인 것이라면 아무것이나 부흥하면 되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묵묵부답이다. 다만 전통이란 창고 속에서 꺼내 올 뿐이다. 그러면 어떤 전통이든 현대 속에서 만병통치약이 될 수 있다는 견해가 된다.
유교와 자본주의, 전통과 현대의 대화를 위하여
우리는 앞에서 유교와 자본주의의 결혼을 반대하는 입장과 찬성하는 입장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동양을 부정하는 막스 베버의 방법이나 그 논리를 비판하며 동양을 옹호하는 유교자본론자들의 논리나 모두 똑같이 문화를 중심에 놓고 사회, 경제 현상을 분석한다는 점이다. 또한 똑같은 방법을 적용하였는데 막스 베버의 경우에는 유교가 자본주의 발전에 부정적인 기능을 한 것으로 설명된 반면에 '문화적 해석' 방법이나 유교자본론자들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기능을 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차이점은 '신교 윤리'의 대체물로서 베버에 의해 배척당하였던 동양의 문화 요소인 '유교 윤리'가 설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유교자본주의론은 베버 이론에 대한 계승과 확장이라는 측면과 아울러 비판과 반박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곧 유교 윤리와 동아시아 경제 발전 사이의 인과관계를 찾아보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베버의 역사적 가설에 대한 계승과 확장이며, 베버가 부정하였던 유교로부터 근대 자본주의 경제 발전을 설명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비판과 반박이 되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유교자본론자들은 베버를 가지고 베버를 공격한 셈이다. 더 심한 것은 그들 가운데 일부는 막스 베버를 닮아 외눈박이가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베버가 문화 이외에 정치, 경제적 조건들도 함께 검토하여 역사 발전을 다양한 원인을 통해서 살펴보려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애써 눈감아 버리고 있다. 그들이 구사한 문화 일원론적인 해석방식은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유학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 문화만이 특수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이며, 또 다른 의미에서 중화민족의 국수주의적 주장이 되기 쉬운 주장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유교와 자본주의가 만날 수 있다. 또는 없다의 결론에 있지 않다. 동양의 전통 속에서 유교를 가져오고, 서양 문화 속에서 자본주의를 가져오기만 하면 문제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유교나 자본주의는 둘 다 동양문화와 서양문화 속의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저마다 그 요소사 자랄 수 있는 역사적, 사회적 환경이 있었다는 점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꽃을 꺾어다가 다른 흙에다가 꽂기만 하면 그대로 꽃이 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 꽃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꽃의 뿌리까지 잘 보살펴야 한다. 또한 원래 있던 토양과 비슷한 토양을 만들기 위해서 흙을 조금씩 바꿔나가야 한다. 또 오랜 시간 기다리면서 기후를 맞춰주고 돌봐 주어야 그 꽃이 성공적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역사와 사회를 배경으로 태어난 문화적 요소를 옮겨다가 성공적으로 화해시키려면 그 둘이 자라 온 환경과 새로운 환경을 맞춰 주는 기나긴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문화의 수입은 일방적인 것이었고, 화해할 시간이나 토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무작정의 강제결혼 과정이었다. 이제는 드러난 경제 발전의 현실에 힘입어 무조건 전통만 부활하면 된다는 유교자본주의의 방식도, 동양에서 무슨 자본주의냐며 무조건 서양문화를 수입하면 된다는 식의 방식도 뛰어넘어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할 차례이다.
참고 문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논전사분과, "현대중국의 모색", 동녘, 1992.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논전사분과, "현대신유학연구", 동녘, 1994. M.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1988. M. 베버, "유교와 도교", 문예출판사, 1990. R. 호프하인즈 외, "동아시아의 도전", 을유문화사, 1984. 김일곤, "유교문화권의 질서와 경제", 한국경제신문사, 1985. 김필년, "자본주의는 왜 서양문명에서 발전했는가", 범양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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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4. 운명을 점치는 스님
운명을 점치는 스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인생이란 긴 여정을 살다보면 다양한 형태의 고민을 하고 크든 작든 어려움과 고통을 겪는다. 아무리 학식이 높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라 해도 한 가지 고민쯤은 안고 살아가게 마련인 것이다. 고민이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애써 고민만 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힘만으론 어쩔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때로 불가사의한 힘에 의존하고 싶어한다.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일수록 누군가의 힘에 기대어 미리 해결책을 구하고 싶어한다. 무속인을 찾게 되는 것도 실은 작게나마 위안을 삼고 싶은 마음에서이고 또 다가올 불확실한 미래를 미리 알아 대처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이처럼 가장 위대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가장 나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스님이라 해서 세상사 어려운 문제들과 고민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 생각은 스님이라면 남의 운명을 미리 짚어낼 수 있고 또 불가항력의 힘을 지닌 사람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당연히 그래햐 한다고 믿고 있기도 하다.
“저분은 퍽 영험한 스님이래!” “그래? 그렇다면 큰스님이시겠네?”
이렇게 말하는 신도들이 더러 있다. ‘영험한 스님’을 ‘큰스님’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스님을 일종의 ‘점쟁이’로 취급하는 일면이 있는 위험천만한 종교관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간혹 스님을 따라다니며 공부하는 신도들 중에는 불법에 어긋나게 무속인이나 진배 없이 점도 봐주고 육갑을 잘 짚어 돈을 버는 이들이 더러 있다. 또 절에서 신도들을 많이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으로 인간의 미래를 화두로 삼기도 하는 모양이다. 안타까운 현실은 스님들 중에도 간혹 이같이 점술을 해서 대중에게 그릇된 인식을 심어 주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불교는 미래를 점치거나 앞날을 미리 예견하는 종교가 결코 아니며 스님 또한 점술가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불교란 부처님의 대자대비의 사랑을 깨달아 이 땅을 정토로 가꾸고자 하는 믿음을 실천하는 종교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 법이므로 이 마음만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불교이며 신앙인의 올바른 마음가짐이다. 한번은 택시를 탔는데 기사분이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정월 초순 무렵이었다.
“스님, 제가 특별히 요금을 받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요금을 안 받으시면 제가 곤란하지요. 그런데 청이란 게 뭡니까?” “지금 제가 이렇게 택시일을 하고 있지만요, 이 일이 해보니 참말 힘이 듭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이 들지만 그보다는 자식들 대학까지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앞날이 캄캄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요즘엔 밤잠을 설칠 때가 더러 있구요. 그래서 언젠가는 이 일을 그만두고 무슨 장사라도 할까 생각중인데....” 이렇게 한참 신세 타령을 하던 기사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스님! 저 올해 신수점 좀 봐주시겠습니까?”
아하, 내게 청이란 게 바로 올해 신수점을 봐달라는 것였구나. 나는 예상치 않은 청을 받고 적지않이 당황했다. 점괘를 짚는다는 것은 역학을 말하는데, 나는 역학 공부를 전혀 해본 적이 없을 뿐더러 육갑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불교와 역학과는 엄연히 경계가 다른 분야건만 자칫 오해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일이 많다. 스님이라면 당연히 육갑을 짚을 줄 알아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기사분은 내 앞에서 자신의 신상을 세세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올해로 40세이니 00년 생이지요. 0월 0일 0시에 태어났습니다.... 제 사주가 어떻습니까? 잘 봐주십시오.” “....”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모른다고 잘라서 말하면 되겠지만, 그러자니 이 기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 같고....
“믿는 바대로 열심히 하시면 다 잘 되실 겁니다, 기사님.” “그런 게 아니라요, 스님.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시지요. 부탁입니다!” 이쯤 되면 나로서도 더 이상 할말이 없다. 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실은..., 제가 사주를 볼 줄 모릅니다.” “아니, 스님은 유명한 분이지 않습니까. 며칠 전 제가 TV에서도 뵈었고 신문에서도 뵌 적이 있는데..., 유명한 스님이 정말 그런 것도 모르십니까?” “....”
그 기사분은 백미러를 통해 몹시 의심스런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제가 매스컴에 나왔다면 분명 사형수 구명운동이나 소년, 소녀 가장을 돕는 일로 해서 나왔겠지요. 불행히도 난 사주를 볼 줄 모르고 또 전혀 알지도 못합니다. 이거 기사님께 죄송해서 어쩌지요....”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사님도 자신의 기대가 무너졌는지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모든 것은 마음이 결정하는 법입니다. 어떤 어렵고 괴로운 현실도 마음을 어떻게 갖고 잘 쓰느냐에 따라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쓴 독도 기쁘게 먹는다면 그것이 약으로 쓰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운명도 마찬가지여서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게지요.”
그 기사분을 위로하고 싶다는 마음에 생각나는 대로 이런저런 얘기들을 들려 주었다. 그리고 택시는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무런 말없이 핸들을 잡고 운전하던 기사분이 나를 내려 주면서 백미러로 다시 한 번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인사 대신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혹시..., TV에 나오신 그 스님이 정말 맞습니까?”
이런 경우는 비단 택시 안에서만 겪는 일이 아니다. 언젠가 길을 가다가 한무리의 여대생을 만난 적이 있었다. 약속한 사람과 만나기 위해 근처 다방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여대생들 중 몇 명이 뭐라고 저희들끼리 수군대더니 달려와 인사를 했다.
“삼중 스님이 맞으시지요?”
그러더니 나를 따라서 우르르 다방에 들어왔다. 조금 일찍 온 탓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좀전에 따라들어온 여러 명의 여대생들이 내게 다가와서 잠시 앞에 앉아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맞은편 의자에 앉은 여학생 한 명이 거침없이 물었다.
“스님, 여쭙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요.... 제게 지금 사귀는 남자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하고 결혼을 하게 될지 좀 봐주세요.” 내가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옆에서 또 다른 학생이, “삼중 스님, 실은 제 부모님이 암으로 누워계신데 언제까지 사시게 될까요. 오래 사실까요?”하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내게 희망을 갖고 물어오는 이들에게 ‘나는 모른다.’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면 저들이 얼마나 실망을 할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가진 그 문제들은 앞으로 잘 풀리게 될 것입니다. 단지 마음을 어떻게 굳게 먹고 살아가느냐 하는 점이 그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지요. 마음쓰기에 따라 좋은 것도 나쁘게 변할 수 있고, 나쁜 것도 좋은 쪽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만 가슴에 새기신다면 모두 잘 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이번에 멍청해진 것은 그 여대생들 쪽이었다. 마침 내가 만나기로 한 사람이 다방 안으로 들어오길래 다행히 이쯤에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20년 전쯤 되었나 보다. 당시 사형수였던 양동수의 구명운동이 이루어져서 신문 지상이 떠들썩했던 무렵이었다. 00일간 신문에서도 이 사건을 톱기사로 대대적으로 실어주었다. 나 역시 끝까지 해낼 수 있어서 기쁨이 컸지만 그보다는 내게 용기를 주고 도와주신 여러분들이 주위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즈음 어느 여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스님, 저는 지금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생각다 못해 이렇게 스님께 편지를 띄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종가집으로 시집을 와서 10년이 넘도록 딸만 다섯을 두었으나, 이 집에서는 꼭 대를 이을 아들이 하나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들을 못 낳는 저를 이제는 내쫓으려고 하는데 이를 어찌해야 하겠는지요? 아무리 불공을 드리고 온갖 정성을 다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젠 오직 스님만이 불쌍한 저를 구해 주실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죽음을 앞둔 사형수를 살려내신 분이 아니십니까. 부디 제게도 아들 하나만 점지하게 해주십시오....
사람들로부터 자주 편지를 받는데, 내게 보내오는 사연들 대부분은 자신의 고민이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들이다. 자잘한 가정사나 부부관계, 시부모와의 갈등 문제, 혹은 자녀의 진학이나 사업 문제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괴로움을 호소하면서 해결해 달라는 내용이 많다. 또 그들 중에는 자신이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사업자금 3천만 원만 빌려 달라고 부탁해 오는 이도 있었다. 이런 갖가지 사연들을 읽어 내려가다보면, 인생이란 이러한 연속된 문제들과의 영원한 싸움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통과 고민을 해결해 가는 과정이 바로 인생,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아들 하나를 간절히 원하는 이 가엾은 여인에게 나는 답장을 띄울 수 없었다. 가슴 아픈 사연이긴 하지만 나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내가 도통한 달인이나 위력 있는 도사도 아니요, 나 역시 범부의 고민과 고통을 지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니 마음 한편으론 씁쓸함이 고여왔다.
불교는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우리 민족과 그 역사를 같이 해왔다. 그래서 사상 체계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우리나라 어느 곳을 가든 으레 사찰이 있게 마련이며 불국사와 석굴암, 팔만대장경이라는 자랑스런 문화 유산을 이어받고 있다. 이 모두 수천 년간 불교와 함께 한 우리 민족의 흔적들이요, 위대한 정신의 궤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한국불교의 현실은 어떠한가. 다른 종교보다 훨씬 많은 신도수를 자랑하고 있기는 하나 그 활동면에서는 타종교보다 미약하기 그지없다. 불교가 적극적인 실천의 종교임에도 신도들은 사회 활동에 그다지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경향이 보인다. 또 신도들 중에는 기복신앙이나 자기위안의 방편으로 치우치고 있는 이들도 많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여러 점에서 미미한 활동을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는 무엇보다 나 자신을 비롯한 종교인들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기에 스님이 점괘를 보는 점술가라는 그릇된 인식과 오해를 받기도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불교는 하나의 진리요, 사상의 체계이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어렵고, 깊이 들어갈수록 심오한 진리의 세계가 불교이다. 마음의 수양으로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의 마음을 구하는 믿음의 종교인 것이다. 내가 머무는 자비사 신도들 중에도 이렇게 묻는 이들이 더러 있다. ‘곧 이사를 가야 하는데 어느 방향이 좋겠는지요?’ 혹은 ‘자식이 결혼을 하는데 어느 날자가 좋을까요?’ 나로선 알 도리가 없는 일이다. 이쯤 되면 미리 역학을 배워두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기도 한다. 저들 질문에 속시원한 답변을 못해 주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남을 기쁘게 해주지 못하니 이 또한 내 아픔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지금부터라도 육갑을 배우고 역학을 배워볼까. 사주 관상을 배워볼까니? 그러고 보니 참말로 무더운 여름 한가운데에 와 있다. 날씨 탓인가. 생각이 엉둥한 방향으로 치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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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9. 중종반정 : 훈구파의 집권과 사림파의 재등장
얼핏 보면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폭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뿌리는 세조 때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산군 때 일어난 대표적인 2대 사화인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가운데 무오사화의 주동 인물은 유자광인데, 그는 세조의 친애를 받던 인물이다. 그는 '이시애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현장으로 달려가 당시 반란군의 동태와 현황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세조에게 보고하여 그의 눈에 들기 시작하였다. 그후 세조가 살아있는 동안에 어느 정도 중앙에 자기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 때에는 남이, 강순을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여 공신이 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조선 중기 정치사의 뿌리는 단종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뿌려놓은 씨앗에서 배태된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참사인데, 이 사초의 내용이 의제를 죽인 중국의 황우를 단종과 세조에 빗대어 쓴 것이므로 세조의 유혈 쿠데타가 조선 중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중종반정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남이의 죽음이 있었던 8대 임금 예종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종대에 형성된 훈구파와 사림파간의 갈등 경과도 중종반정의 정치사적 배경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남이 장군의 죽음 : 구세력과 신세력의 충돌
이시애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던 장군들의 이름중에 남이가 들어 있었다는 것을 앞에서 보았다. 남이는 세조의 신뢰를 받던 무신이었다. 그는 일찍이 포천과 영평 등에서 들끓던 도적떼를 토벌한 공을 인정받았으며, 이시애 군대를 치기 위해 조직된 원정군에 대장으로 임명받아 구성군 이준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는 무신으로서 갖추어야 할 용맹과 지략을 겸비하여 이시애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몫을 한 명장이었다. 반란이 평정된 후 그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올랐고 의산군으로 책봉되었다. 그뒤에도 남이는 여진족 토벌에도 앞장섰으며 이러한 여러 공로로 호조판서에 이르기도 하였다. 1468년에는 병조판서에 올랐으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한 직후 강희맹 한계희 등 훈구 세력들이 예종을 부추켜 그가 병조판서를 맡을 자질이 안된다고 주장, 결국 남이는 해직되고 겸사복장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겸사복은 궁중 친위대의 하나로서 왕을 호위하고 궁내의 경비를 담당하였는데 잡일이 많고 고된 훈련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 친위대를 담당하는 대장은 한 명이 아니라 3인이었다고 하니 남이의 지위가 얼마나 격하되었는지 알 수 있다.
남이의 해직은 단순한 모함이 아니었다. 이시애의 반란을 평정하면서 등장한 신세력인 구성군이나 강순 등을 구세력이 축출되면서 남이 역시 제거 대상이 되었던 것이므로 정치적 알력의 희생물이 된 셈이다. 세조의 쿠데타를 도와 왕권에 버금가는 권력을 거머쥐고 있던 훈구 세력은 새롭게 등장한 신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을 고위 관직에서 추방시켰던 것이다. 세조도 그러했지만 그를 도와 유혈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훈구 세력들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특히 무신들에 대한 경계가 심했다. 훈구 세력은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남이가 점점 고위 관직에 오르자 이를 경계하기에 이르렀고 세조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중앙에서 제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남이가 살아있는 한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무력으로 잡은 권력을 언제 다시 무력으로 빼앗길지 모른다는 경계심에 사로잡혀 남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였다. 그러던중 남이 등 신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잡게 되었다.
병조판서직에서 해임된 후 남이는 숙직을 서면서 허탈한 심정을 달래며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고대로부터 혜성이 나타나면 나라에 큰 이변이 일어난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남이도 마찬가지였다. 남이는 무심코 혜성을 본 소감을 말하였다. "혜성이 나타난 걸 보니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로구나."그런데 이 말을 엿듣고 있는 자가 있었다. 바로 유자광이었다. 그는 곧바로 예종에게 달려가 남이가 무심코 내뱉은 말을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뜻으로 모함하였다. 예종은 평소 남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유자광의 말을 곧이 들은 예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역모 혐의로 체포하였다. 예종 앞으로 잡혀온 남이를 두고 여러 증인들의 진술이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유자광이 나섰다. 그는 남이가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열릴 징조라고 말했다고 하면서 거사하여 역모하려 했다고 증언하였다. 남이에 대한 불리한 증언은 계속되었다. 그의 측근인 순장 민서는 남이가 여진족에 대한 방비 대책을 논하는 자리에서 혜성의 출현은 간신들이 득세하여 변이 일어날 징조라고 하면서 자신이 당할 일이 두렵다고 말했다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그 간신의 대표로 한명회를 지목하였다고 부언하였다. 결정적인 증언을 한 사람은 남이와 같은 겸사복 소속인 문효량이었다. 그는 여진족 출신이었다. 문효량은 남이와 강순이 임금과 한명회 등을 제거하고 구성군 등도 몰아내어 왕권을 잡으려 했다고 진술하였다. 더이상 남이로서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이 사건으로 남이와 강순을 비롯하여 수십 명이 죽음을 당하거나 강등 조치되었다. 흔히 '남이의 옥사'라고 부르는 이 사건에 대한 시각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실제로 남이가 역모를 계획했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순전히 유자광의 모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후자는 주로 {연려실기술}을 비롯한 야사를 통해 전해오고 있다. 전자에 따르면, 그는 병조판서에서 강등된 후 이에 불만을 품고 역모를 꿈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남이의 역모 실제성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그보다는 이 사건의 발단이 신구 세력간의 알력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유자광의 고발이 모함이건 아니건간에 이 사건 이면에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훈구 세력과 세조 때부터 성장한 무신 중심의 신세력 사이에 계속되어온 보이지 않는 대립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이 위와 같은 상황으로 구체화된 것일 뿐이다. 뒤에 유자광이 무오사화의 주동 인물이 된 것으로 보아 그는 구세력에 붙기 위해 남이를 희생물로 삼았다고도 볼 수 있는데, 어쨌든 '남이의 옥사'는 한명회 등 세조의 친위 세력들의 위기 의식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그러나 왕권을 좌지우지할 만큼 성장한 훈구 세력들은 점차 보수적 성향이 짙어져 성종대에 가서는 신세력인 사림파의 강력한 견제를 받게 된다.
김종직의 조의제문 : 무오사화
조선의 문물제도를 확립한 왕은 성종이었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고 숭상하여 세종 이래로 두번째로 문화 정책에 심혈을 기울였다. 성종은{경국대전}을 수차례에 걸쳐 개정하여 완성하였고 {재전속록}을 완성하여 법제를 마련하는 등 개국 이래로 산재해 있는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무엇보다도 성종은 신진 세력을 대거 중앙에 진출시켜 개혁 정치를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 철학을 읽을 수 있다. 당시 중앙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을 흔히 훈구파라고 부르는데, 대표적인 인물들로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 양성지, 서거정, 이극돈, 강희맹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세조가 왕위를 찬탈할 때 주역으로 떠오른 공신들은 대토지를 소유하여 경제적 기반을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주요 권력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이 탓도 있겠지만 이들은 보수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한명회의 경우만 봐도 세조, 예종을 거쳐 성종대 중기(그는 성종 18년인 1487년에 사망하였다.)에까지 생존하면서 자기의 딸을 성종과 결혼시키는 등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어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왕의 외척으로서 성종의 개혁 정치에 큰 걸림돌이 되었으며, 이에 성종은 새로운 인물들을 물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필연적인 정치 현실에 따라 역사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한 신진 세력을 사림파라고 부르는 것이다.
훈구파가 주로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면 사림파는 영남 지방을 주요 무대로 삼아 활동하였다. 사림파의 거두는 김종직이었다. 그는 고려 말의 문신 길재의 사상을 이어받아 의리와 수신 치인을 중시하는 성리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등 도학의 발전에 중추적인 구실을 하였다. 그의 제자들로는 김굉필, 김일손, 유호인, 조위 등이 있으며 김굉필의 제자 가운데는 중종 때 활동한 조광조가 있다. 성종은 김종직을 포함해서 그의 제자들을 등용하여 당시 거대한 세력으로 자리잡은 훈구파들을 견제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사림파들은 의리와 명분을 중요하게 여겨 왕위를 찬탈한 세조 덕분에 권력을 장악한 훈구파들의 부정과 비리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사림파는 훈구파를 세조가 저지른 불의에 가담하여 권세를 잡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에만 급급하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훈구파는 사림파를 제거할 뜻을 품었으나 성종의 중도적인 정치노선으로 별다른 사건을 일으킬 수 없었다. 양파간의 정쟁이 본격화된 것은 연산군 때에 와서였다. 성종이 죽고 난 뒤 다음 해인 1495년부터 영의정 노사신의 건의에 따라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편찬 도중인 1498년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사관으로서 여러 사초를 점검하던중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평소 세조의 찬탈을 반역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김일손은 단종과 세조의 관계를 중국의 의제를 죽인 황우에 빗대어 제문을 쓴 김종직의 글을 실록에 편입시키기 위해 실록청에 제출하였다. 이러한 김일손의 행동은 세조의 즉위와 이로 인해 배출된 공신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서 훈구파에 대한 간접적인 비난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김일손은 훈구파인 이극돈이 성종의 국상 때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향을 바치며 근신하기는커녕 기생과 놀아났다는 사초도 제출하였다. 이것은 훈구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당시 이극돈은 당상관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김일손의 자료를 검토하던중 위의 두 가지 사초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극돈은 즉시 총재관 어세겸에게 사실을 고하였으나 별 반응이 없자 유자광에게 달려갔다. 두 사람은 모두 사림파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던 터라 금방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무오사화의 주동 인물중 한 사람인 유자광은 김종직이 살아 있을 적에 그의 문하에 들기도 했다. 그러나 김종직은 유자광이 남이 등을 모함하여 그 공으로 출세했다고 믿고 매우 못마땅해 했다. 의리를 중요시 여기던 김종직의 눈에 유자광은 협잡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런 판단을 갖고 있던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유자광의 시가 현판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분개한 나머지 떼어내어 소각시키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해 앙심을 품게 되었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김종직이 죽자 글을 지어 이를 슬퍼하기도 하였다. 유자광의 원한은 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이로 인해 사림파 전체를 증오하게 되었고, 이런 가운데 이극돈의 정보는 불에 석유를 붓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다른 훈구파인 노사신, 윤필상 등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는 바로 연산군을 찾아갔다. 그들은 연산군에게 김종직의 글을 설명하면서 세조를 비난하는 것은 바로 임금을 부정하는 대역무도의 죄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관련자들을 모두 엄히 다스릴 것을 요청하였다. 관련자는 결국 사림파의 인물들을 말하는 것이다. 성종의 정실 소생인 중종이 태어나기 전에 연산군은 세자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왕으로서 자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종이 죽자 바로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은 정치는 뒤로 하고 방탕한 생활로 소일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을 사림파들이 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사림파들은 연산군에게 행동을 자제해 줄 것을 연일 촉구하였고 이로 인해 연산군은 '내가 자유의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두 학사배들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그들을 멀리하였다. 이러던 차에 유자광의 보고를 듣고는 그들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연산군은 내심 좋아하였다. 드디어 피비린내 나는 일대 숙청이 벌어졌다. 우선 연산군은 사림파의 죄를 조종한 것은 김종직이라고 하여 그의 무덤을 파서 목을 베게 하였다.(일명 부관참시라고 한다.) 그리고 사림파의 핵심 인물들인 김일손, 권오복, 이목 등을 잡아들여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었다. 이밖에 사림파 소속 관료들을 대거 체포하였고 이 과정에서 중앙 관직에 있지도 않은 수백 명의 사림파 인물들까지도 화를 입게 되었다. 한편 연산군은 이극돈, 노사신 등 훈구파 사람들에 대해서도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빨리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하였다. 연산군의 성격이 얼마나 포악한가를 여실히 볼 수 있는 사건이다. 이 사화로 말미암아 중앙에 진출한 주요 사림파 인물들이 거의 제거당하게 되었고 반면 훈구파는 더 기승을 부렸다. 유자광은 이 일로 지위가 더욱 확고해져 강력한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유흥비 마련 과정에서 일어나다 : 갑자사화
연산군의 방탕은 끝이 없어 국고를 거의 자기의 연락에 쓸 정도였다. 연산군은 자신의 즐거움을 더욱 채우기 위해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공물의 양을 늘리는 한편 훈구파들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을 계획까지 세웠다. 이러한 연산군의 개인적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 갑자사화이다. 이때가 1504년, 연산군 집권 10년째 되는 해였다. 물론 직접적인 원인은,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폐비가 된 다음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내용이 담긴 임사홍의 밀고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면에는 연산군이 토지 등을 몰수하려 하자 이에 대한 대응 방식에 따라 궁중파와 부중파로 나뉘어진 훈구파 신하들 사이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부중파 신하들은 연산군에게 절약할 것을 건의하는 등 자신들이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하여 안간힘을 썼다. 그런 반면 궁중파 사람들은 오히려 연산군의 방탕을 조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훈구파 내의 조신들은 둘로 나뉘어 반목 대립하였던 것이다. 이때 궁중파에 속하는 임사홍은 계책을 세우는 데 고심하다가 폐비 윤씨 사건을 머리에 떠올렸다. 포악한 성격을 가진 연산군에게 친모의 죽음을 알리면 그는 걷잡을 수 없이 대숙청을 벌일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임사홍은 연산군비인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손을 잡고 옥사를 결행하였다. 임사홍의 말을 들은 연산군은 격분하여 당시 관련된 자들이면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처형하였다. 이때 해당자 가족이나 동족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좌하여 처형하였다. 이미 사망한 한명회, 어세겸 등에 대해서는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하였다. 연산군의 망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임사홍의 말을 따라 잔류하고 있던 사림파들 대부분을 제거하였다. 이로써 김종직 이후 중앙에 진출한 사림파는 거의 몰살하기에 이르렀고 연산군의 폭정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전사를 배경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났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사화에 대한 시각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사화가 직접적으로는 개인적 원한이나 임금의 욕망에서 비롯된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 이면에는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간의 이념적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모든 당쟁이나 파벌 싸움을 개인적인 감정의 발로로 못박는다면 이것은 곧 식민주의사관과 별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정한론을 세우면서 조선이 자주성이 없는 민족이므로 조선을 병합하여 올바른 국가를 성립시켜 주겠다는 논리를 펼쳤다. 정한론의 기본 논리는 이러한 역사관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 관학자들은 조선의 정치사를 단지 개인적 원한에서 비롯된 싸움으로 일관되어 있다고 보고 이 때문에 무정부 상태에 이르른 것이라는 시각을 정립해 놓았었다. 이러한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면 조선 역사를 왜곡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사화에 대한 판단은 더욱 조심스럽게 해야 할 것이다.
폭군 폐위를 위하여 : 중종 반정(1506년)
한마디로 말해서 중종 반정은 조선 10대 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을 말한다. 그리고 중종반정의 가장 큰 원인은 연산군의 학정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렇다면 우선 앞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반정의 직접적인 원인과 전개 과정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연산군은 1498년 훈구파의 부추김을 받아 평소 걸림돌이 되었던 사림파를 무오사화로 한 차례 제거함으로써 외척과 훈구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 사화로 정치적 우세를 더욱 확고히 굳힌 훈구파는 연산군을 이용하여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닦아나가는 등 권귀화의 경향을 현저하게 보였다. 그런데 연산군은 외척 중심의 궁중 세력을 새로이 등장시켜 이번에는 훈구파의 경제 기반을 탈취하기 위하여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사림파도 피해를 보게 되었다. 연산군이 훈구파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했던 것은 왕권에 대한 불안을 느껴서인지도 모른다. 물론 갑자사화가 크게 확대된 것은, 연산군이 자기 생모가 폐비가 되고 사약을 받았다는 데에 감정적으로 격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왕실을 위협해오는 훈구파와 새롭게 부상하는 신진 세력인 사림파를 동시에 제거하자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차례의 사화가 거듭되는 동안에 연산군의 학정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었다. {연산군일기} 등에 나오는 그의 폭정에 대한 예를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연산군은 우선 자신의 실정에 대해 간언하는 것을 싫어하여 비위가 상하면 죽여버리거나 관직 박탈, 또는 유배를 보냈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중종반정을 일으킨 대부분의 핵심 인물들이 연산군에게 건의를 하다가 미움을 받아 피해를 입은 자들이었다. 또한 그는 경연과 대제학 제도를 폐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창덕궁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성균관을 자신의 놀이터로 만들어 버렸고, 장악원을 개칭한 연방원을 원각사에 두어 거기를 기생들의 모임 장소로 지정하였다. 이뿐 아니라 전국에 채청.채홍사를 보내어 미녀를 선발(이를 운평이라 하였다.), 그중에서 뽑힌 기녀를 흥청이라 하여 300명을 궁중에 기거시키면서 쾌락의 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연산군은 매우 사냥을 즐겨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는 사냥을 즐기기 위하여 도성 밖 30리의 민가를 철거하는 폭정을 휘둘러 점차 민심을 잃어갔다. 이러한 연산군의 병적인 행동을 비방하는 한글 투서 등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그러자 연산군은 언문 때문에 왕을 욕하게 된 것이라고 격분하면서 {언문구결} 등 한글 관계 서적 등을 불태우면서 한글 사용을 금지하였다. 연산군의 사치와 방탕은 극에 달하여 심지어는 내연에 나온 사대부의 부녀자를 농락하는 추태까지 부렸다. 이러한 지경이라면 올바른 정치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었다. 정치는 거의 왕의 손을 떠나 내시 김자원에게 맡겨진 상태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사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연산군의 학정은 혼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왕이 아무리 폭정이나 학정을 일삼아도 그 배후에는 이를 방관하거나 조종하는 무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들이 바로 신수근을 중심으로 한 외척들이었다. 여기서 당시 왕실을 둘러싸고 궁중파, 훈구파, 사림파 등 세 파로 갈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사림파의 경우 중앙에서 거의 밀려나 있는 상태라 그 힘은 미약하였지만 언제든지 다시 중앙에 진출하여 왕도정치를 구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사림파는 연산군을 폐위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이 미약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세력은 훈구파 뿐이었다. 중종반정을 일으킨 핵심 인물들과 상황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부사용 성희안과 지중추부사 박원종 등은 당시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의 호응을 얻고, 연산군의 신임을 받고 있던 신윤무, 박문영, 장정 등의 지지를 받아 1506년 9월 연산군이 장단의 석벽으로 유람하는 기회를 노려 반정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돌연 연산군이 행차를 취소하는 바람에 거사도 중지될 위기에 처하였다. 이때 전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 이과 등이 거사를 일으킨다는 격문이 서울에 전해지자 서둘러 예정대로 무사들을 훈련원에 모으고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를 알리는 한편, 신수근, 수영 형제와 임사홍 등을 죽임으로써 반정을 시도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들이 순전히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국가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순수한 의미에서 반정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반정을 주도한 인물 대부분이 연산군에게 피해를 본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권력에서 소외된 자들이 다시 중앙 진출을 노린 쿠데타가 아니었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반정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이 당시 처해 있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반정을 맨앞에서 이끈 성희안에 대해서 알아보자. 성희안은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이 많은 자문을 구할 정도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종사관이나 형조참판의 자리를 거쳐 1504년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그런데 연산군이 망원정이라는 곳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평소 연산군의 방탕적인 생활에 불만을 갖고 있던 성희안은 분을 못이겨 풍자적이고 훈계적인 시를 지어 올렸다. 이에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무관의 말단직인 부사용이라는 관직으로 좌천되었다. 부사용은 종9품에 해당되는 무직이었다. 사실 이때를 전후하여 연산군의 폭정과 타락은 날로 더해가 민심이 흉흉해지는 등 정치적인 불안이 감돌고 있었다. 이에 그는 박원종과 모의하고 당시 명망가로 알려져 있던 유순종을 끌어들이는 한편, 신윤무, 박영문, 홍경주 등에게 군대를 동원시켜 진성대군을 옹립, 반정을 일으켰던 것이다. 성희안이 제일 먼저 모의를 나눈 대상은 박원종이었다. 박원종은 원래 연산군이 신임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연산군의 특명으로 동부승지, 좌승지 등을 거치면서 주로 재정 문제에 대해 왕에게 간언하였다. 그러나 결국 옳은 말을 하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150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그후 다시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506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다시 연산군의 미움을 사 파직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성희안과 쉽게 뜻을 같이할 수 있다. 거사를 앞두고 박원종 등은 신수근을 찾아간 적이 있다. 신수근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연산군비 신씨의 오빠로서, 임사홍과 결탁하여 갑자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는 외척이라는 특혜를 입어 좌의정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박원종 등이 그를 찾아간 것은 순전히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옹립하려는 진성대군은 바로 신수근의 사위였던 것이다. 그들은 신수근에게 누이와 딸 중 누구를 더 중히 여기느냐고 눈치채지 못하게 돌려서 물었다. 그러자 신수근은 화를 벌떡 내며 비록 지금 임금이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그를 믿고 살면 된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박원종 등은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 만일을 위해 반정을 일으킨 후 제일 먼저 신윤무 등을 시켜 수각교에서 신수근을 살해하였다. 또한 그의 아우인 신수겸, 수영도 제거되었으며, 임사홍은 아버지와 함께 살해당하였다.
당시 인망이 높은 인물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유순정은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인물이었다. 그는 활을 잘 쏘아서 무인 중에서도 그를 따를 자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문무를 겸비한 탓에 그는 전라도 지방에 침투한 왜구 토벌작전에도 참여하였으며 이시애의 반란 때 공을 세운 허종의 막료가 되어 평안도평사를 지낸 적도 있다. 연산군이 즉위한 해에 사헌부헌납이라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는 이때 임사홍의 잔악한 행동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여진족 정벌에 참가하였으며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후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연산군이 평안도 지역에 밤사냥을 간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순정은 밤사냥은 위험하다는 말을 하며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자 임사홍이 이를 빌미삼아 그를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앞서 그가 임사홍을 비난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 일로 유순정은 연산군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었고 성희안과 박원종의 뜻을 받아들여 급기야는 중종반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언제 자신도 궁중 세력에게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중종반정에 참여한 무신들 가운데 선두에 서서 활동한 인물은 신윤무였다. 그는 연산군 때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고 군자시부정에 오를 정도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연산군의 폭정에 점차 불만을 갖게 되어 궁중 사정 등 내외 동향을 성희안, 박원종 등에게 자세히 알려주어 중종반정이 일어날 수 있는 기본 여건을 만들어주었다. 반정이 있던 날 신윤무는 임사홍, 신수근, 신수영 등을 죽이는 등 거사에 앞장섰다. 장정 역시 무신이었다. 그는 대마도치위관, 하동군수 등 여러 내외직을 거친 후 1504년 창성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장녹수가 부당한 방법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은 사실을 알고 다시 농토를 원래의 주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 일로 파직당하고 말았다. 장정은 연산군의 학정이 극에 달하자 반정에 가담하여 군대를 동원하는 책임을 맡았다. 거사중에는 진성대군의 사저를 호위하였다.
전라도의 유배지에서 거사격문을 보낸 인물은 이과와 유빈이었다. 우선 이과는 1503년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연산군이 후원에서 활을 쏘며 노는 것을 논한 것이 화근이 되어 갑자사화 때 전라도로 귀양갔다. 1506년 유배지에서 유빈, 김준손 등과 같이 군사를 일으켜 진성대군을 추대하려고 모의하였으나 서울에서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를 중지하였다고 한다. 유빈은 함경도절제사를 지내고 형조참판까지 올랐으나 갑자사화 때 모함에 걸려 전라도로 유배당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봤을 때 반정에 직접 참여했거나 거사를 계획한 인물들은 연산군과 그를 비호하는 궁중파로 인해 정도의 차이만 있지, 모두 피해를 입은 자들이었다. 물론 내건 명분은 연산군의 학정을 바로잡는 데 있었지만 이들은 정치를 개혁하거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반정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조광조가 등장한 이후 다시 재개된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정쟁을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정변에 성공한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친어머니인 대비를 경복궁에서 찾아가 만나 연산군을 폐하고 강화교동에 안치시켜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9월 2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진성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가 바로 조선 11대 왕인 중종이다.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반정은 일단락되었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이 거사 주동 인물들이 연산군 때 일정한 관직과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훈구 세력들이기 때문에 다시 정권은 훈구파에게 넘어간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사림파와의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종반정의 의미와 {연산군일기}
중종반정으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연산군이 폐위되고 정상적인 왕권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는 것 뿐이다. 훈구파의 재집권으로 말미암아 이전부터 문제되어온 정치 체제의 모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기대하기 어려워졌으며, 이에 따라 사림파가 재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중종반정은 기득권 상실의 위기에 처한 훈구파들이 정권을 재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였다고 볼 수 있다. 객관적으로 봐서 중종반정 자체는 커다란 역사적인 변혁을 가져온 혁명은 아니었다. 중종반정의 역사적 자리매김은 반정 이후의 상황을 검토해본 후에야 가능하다.
여기서 연산군이 폭군이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반정의 구실이었다. 흔히 쿠데타 세력은 자신들의 거사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앞선 왕을 격하시키기 마련이다. 따라서 연산군도 어느 정도로 폭군이었는지 그 실체는 사실상 알수 없다. 다만 당시 살았던 여러 인물들의 행적을 추격해 볼 때 연산군이 문제가 많은 왕이었음은 사실이라고 보지만 <연산군일기>에 나타나 있는 모든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연산군의 학정과 폭정을 말할 때 가장 핵심이 되는 자료로 거론되는 것은 역시 <연산군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일기가 완성되기까지 상황을 보면 중종반정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시각을 갖게 된다. <연산군일기> 편찬은 중종이 즉위한 직후인 1506년 11월에 시작하여 1509년 9월에 완성되었다. 이 일기가 완성되기까지에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선 편찬관 임명을 둘러싸고 처음에 임명된 자들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인물들이라고 해서 곧 교체되어 편찬 책임자에는 중종반정을 주도했던 성희안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편찬자들도 대폭 개편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일기> 편찬의 어려움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 때 사관이 왕과 대신들의 회의나 경연에 참석하지 못하는 예가 허다했다. 따라서 사관의 기록에 대해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또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라는 사초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무오사화 때문에 사관들이 해를 입을까봐 사초를 제출하기를 두려워했으며, 편찬자들도 후환이 무서워 그 직을 회피하는 사례가 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완성된 것이 <연산군일기>였다. 따라서 <연산군일기> 편찬에 참조할 자료들이 매우 희귀했다는 뜻이다. 사론 역시 다른 실록에 비해 매우 적어 25개 정도만이 실려 있다는 점만 봐도 이 일기가 얼마나 부실하게 만들어졌는가를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보면, 연산군 4년 이전에는 주로 대간들의 상소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고 갑자사화 이후 10년까지는 대간의 상소와 왕의 전교가 각각 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말년까지는 주로 무오, 갑자사화에 관련된 내용과 연산군의 학정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연산군의 시문과 이에 화답하는 신하들의 시도 실려 있기는 하지만 명나라나 여진족 등 대외 관계에 대해서는 그 기록이 부실한 편이다.
<연산군일기>의 편찬 과정과 그 내용을 살피는 것이 그가 후세에 의해 조작된 폭군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그를 평가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매우 제한되어 있으며 따라서 중종반정 자체에 대한 판단도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즉 중종반정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중요한 것은, 연산군이 폭군이기 때문에 이를 폐위시키기 위해 반정이 일어났다고 평면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 이면에 어떠한 정치적 흐름이 있었는가를 정확히 읽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연산군에 대한 객관적 자료가 부실한 상황에서 연산군 당시의 정치 동향을 정확히 읽는 것이 힘들다면 그 초점을 중종반정 이후로 돌려야한다는 뜻이며, 그렇기 때문에 중종반정이 폭군인 연산군을 몰아냈다는 점만 가지고 그 역사적 의미를 함부로 상승시켜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반정 이후, 조광조의 등장과 몰락 : 기묘사화 전후 상황
왕위에 오른 중종(1506-1544)이 추구한 정책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왕도정치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연산군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이 약화됨에 따라서 그 주위에 외척과 훈구파를 중심으로 한 문벌세가들이 왕실을 좌지우지하여 국가 기강이 문란해졌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훈구파를 이용하여 왕위에 오른 것은 시대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당시 개혁파라 할 수 있는 사림파는 중앙에서 완전히 배제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의탁하여 반정을 일으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중종은 일단 훈구파의 세력을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중종은 일단 왕위에 오르자 유교적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당시 사림파의 거두인 조광조를 과감하게 중앙 관직에 등용시켰다. 중종은 성종이 보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당시 사림들을 대거 기용한 것을 본받아 반정을 주도하여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훈구파를 약화시키기 위해 사림파 인물들을 등용했던 것이다. 당시 조광조는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인물이다. 그는 벌써 20대 초반에 사림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 때문에 조광조는 갑자사화 때 이배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그는 정권이 바뀐 뒤 1510년 29세의 나이로 진사 회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정계에 진출한 뒤 뛰어난 학문과 인격으로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515년, 조광조는 성균관 유생 200인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랐다. 이를 계기로 중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게된 조광조는 마침내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막강한 실력 행사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언로의 활성화, 향촌의 상호부조 장려로 서민들의 복리 증진, 미신 타파 등을 건의하면서 특히 현량과를 설치하여 세로운 인재들을 과감히 기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인물'은 당연히 사림파의 청년들이었다. 이에 따라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려 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으며 여기서 훈구파와 사림파가 다시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현량과라는 제도를 신설함으로써 사림파 인물들이 대거 중앙에 등용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현량과는 한마디로 말해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을 특채 형식으로 판단하여 뽑는 제도이다. 즉, 기존의 사장 중심으로 뽑아 부조리가 많던 과거제도를 과감히 개혁하여 인재를 임금이 필요한 인물 중심으로 뽑았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조광조의 천거가 크게 작용했다. 현량과로 등용된 인물들은 대체로 30대 소장들이거나 20대 청년들이었다. 이들이 왕도정치를 주장하며 현량과를 통하여 중앙 관직에 계속 오르자 훈구파는 상대적으로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현량과 폐지 문제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 세력간의 대립과 반목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며 사림파의 혁신정치에 반감을 가진 훈구파들이 이들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일어난 것이 기묘사화이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것은, 양대 세력의 싸움은 단순한 정파 다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고려 이래로 장려된 사장을 중시하는 것이 훈구파(그래서 사장파라고도 부른다.)이고 청렴결백과 원리원칙에 입각한 도학을 추구하는 것이 사림파라는 점에서 사상적인 대립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이때 벌어진 양 세력의 알력은 이념적 차이를 바탕으로 하여 정권 장악을 놓고 일대 격돌이 벌어진 면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조광조 일파는 세력이 커짐에 따라 반정에 참여했던 중신들조차 탄핵을 받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훈구파들의 불만이 폭발하게 된 것은 이른바 '반정공신 위훈삭제사건' 때문이었다.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 등은 반정공신에 올라 있는 신하들 가운데 자격이 없는 자도 포함되어 있으니 공신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에 중종은 한번 정한 것이니 다시 수정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조광조가 강청하는 바람에 중종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전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이나 공신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었다. 이것은 공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과분한 토지나 노비를 몰수하여 사대부의 기풍을 바로잡는다는 취지 아래 내려진 조치였다. 그 이면에는 구세력에 대한 신진 세력의 정면 도전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급진적인 정책이 훈구파를 크게 자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조광조 일파를 모략할 준비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 일에는 사림파에게 소인배로 지목된 남곤과 공신 자격을 박탈당한 심정 등이 중심이 되었다. 두 사람은 한때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은 바 있는 희빈 홍씨의 아버지인 홍경주와 뜻을 같이 하여 수시로 중종을 찾아가 "온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말해 조광조가 왕권을 넘보고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하였다. 또한 이들은 중종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교묘한 수단을 동원하였다. 아무도 몰래 궁중에 있는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주초는 趙의 파자)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 그 문자의 흔적을 중종에게 갖다 바쳤다. 도참사상을 역이용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를 본 중종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조광조에 대해 진짜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홍경주는 상소하기를, 조광조 등이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차지를 독차지하고 있다고 하면서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어지럽혔으니 이를 엄히 다스려 달라고 하였다. 이러한 계속된 조작에 따라 조광조 등은 옥에 갖히게 되었고, 성균관 유생 1천여 명이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의 무죄를 호소하였지만 결국 조광조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이렇게 해서 사림파의 기세는 다시 꺾였다. 이후 사림들은 중앙 진출보다는 지방에서 학문 탐구와 후진 양성에 더 힘쓰게 되었으며, 이로써 서원 전성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한편, 기묘사화에 성공한 훈구파는 다시 서로 세력을 장악하기 위해 유혈 투쟁을 벌였으며 이러한 것이 뿌리가 되어 명종 때까지도 정치권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중종반정 이후의 상황을 살펴볼 때 중종반정은 새로운 개혁을 모색하기 위해 훈구파의 힘을 일시적으로 빌린 친위 쿠데타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중종을 추대한 훈구파는 학정을 일삼던 연산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지만 이것을 역이용한 중종은 사림들을 대거 기용하여 개혁정치를 구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의 급진주의 정책이 두터운 문벌세가들의 벽을 뚫기에는 시기상조였는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조광조의 왕도정치는 후일 조선 정치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사상에는 실학적인 개념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어 위민사상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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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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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둘째 묶음 : 아름다운 순간들
책을 읽는 기쁨. 1
독서 일기에서
1 "아름다운 나를 다시 읽어 주세요." "새로운 나를 어서 읽어 주세요."
조그만 서가에 꽂힌 나의 책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 먼저 말을 건네오네.
"그래, 알았어. 미안해." "내가 돌보지 않아 답답하지?" 보채는 책들에게 대답하며 나도 마음이 급해진다.
모든 일 비켜두고 책 속으로 길을 떠나면 내 눈이 밝아진다. 기쁨이 일어선다.
2 어려서부터 늘상 '책벌레'라는 별명이 따라다니고 때로는 어른들의 책까지 앞당겨 본다 하여 꾸중도 많이 들었던 내가 처음에 수녀원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일 중의 하나는 규칙적인 생활로 인해 아무 때나 책을 읽을 수 없는 것, 내 마음대로 책을 골라 볼 수 없는 것, 그리고 원하는 만큼 책을 소유할 수 없는 것 등이었다. 이젠 아무리 많은 책들이 생겨도 내게 꼭 필요한 것 외엔 다 도서실로 보내고도 갈등을 느끼지 않을 만큼 자유로워진 셈이지만, 이상하게도 가을이 되면 책 욕심이 고개를 들어 도서실의 책들을 다 내방에 틀어 놓고 시를 쓰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웃어보기도 한다. 서가라 이름하기엔 극히 작은 나의 책장에는 <성서> <논어> <도덕경> 외에도 타고르의 <기탄잘리>, 롱펠로우의 <애반젤린>, 박목월님과 김현승님을 비롯한 여러 시인의 시집들, 린드버그의 <바다의 선물>, 정채봉의 <그대 뒷모습>,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피천득의 <수필>, 그리고 몇권의 동시집, 신화집, 우화집, 그 밖의 종교서적들과 몇권의 논문집이 있다. 침대 밑에도, 베개 밑에도 나는 늘 내가 읽고 보는 책들을 넣어두곤 하는데 좋은 책들이 숨쉬는 이 방이 나에겐 늘 명상의 쉼터이며, 기쁨의 보석을 캐는 보물섬이다.
3 오늘은 권영상님의 동시집 <밥풀>을 읽었다. 그의 동시들은 늘 몇번을 되풀이해 읽을 만큼 매력이 있다. 이 시집 안엔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의 <단추구멍>이란 시를 다시 읽어본다.
단추가 떨어져나간 뒤에야 처음으로 단추구멍을 봤다 매일 거울 앞에 서서 옷을 입으면서도 단추 뒤에 감추어지는 단추구멍을 본 적이 없는데 단추가 떨어져나간 옷을 입고 돌아온 때에야 처음으로 단추구멍을 봤다. 늘 단추 뒤에 가리어만 살아 부끄럼을 잘 타는 단추구멍 그 빈 단추구멍 하나가 아무일 없이 다니던 이 길을 이토록 부끄럽게 할 줄이야.
4 오하시 시즈꼬, 일본의 <생활수첩> 발행인이라고 소개된 이 작가의 <아침 햇살로 다가오는 행복>이란 책을 단숨에 다 읽었다. '여성들이 누릴 수 있는 작은 기쁨 글 모음'이란 부제가 인상적인 이 책에는 120가지나 되는 우리 주변의 밝고 산뜻한 이야기들이 물방울 무늬처럼 퍼져 있다. 날씨, 음식, 옷 대화, 선물, 편지 등등 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것들 모두가 다 좋은 글감이며 나눔의 대상이 되는 소중한 것임을 작가는 짤막한 글들을 통해서 일깨워주고 있다.
5 시도 아름답지만 소설을 읽으면 다양한 세계와 인간의 모습을 잘도 엮어내는 작가들의 솜씨에 감탄하며 한없이 빠져들게 된다. 때로는 '괜히 읽었다'는 후회와 함께 마음에 짙은 그림자를 남기는 것들도 있지만 어떤 소설은 우리 마음을 아름답게 정화시켜 주고, 내면적인 생활에 도움을 준다. 오늘은 서울에서 아름 엄마가 보내준 이상문학상 수상작과 그 밖의 작품집을 읽었는데 양귀자의 <숨은 꽃>중이 몇구절은 잊혀지지 않는다.
- 버리겠다면서 다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고, '이게 아닌데'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욕심을 포기하지 않는 이 질긴 모순을 나는 차마 바로 볼 수가 없다 - 라든가, - 작은 꽃, 작은 눈물 그런 것들로 무찌르기에 이 세계는 너무나 거대하다 - 라든가, - 사는 일이 가장 먼저란 말이오... 사는 일에 비하면 나머지는 다 하찮고 하찮은 것이라 이 말입니다. - 등의 말들은 내 가슴에 박혀 떠나질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양귀자 씨가 그의 <원미동 사람들>이란 소설에서 이웃의 삶과 모습을 묘사했듯이 나도 내가 사는 수도원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나 소설로 엮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하다가 접어두었다. 나는 아직 나의 삶을 묵묵히 익혀두어야 할 단계에 있으므로.
6 읽으려고 따로 포개둔 책들 중에 오늘은 <파라독스 중국 우화>를 펴들었더니 예융례라는 분이 쓴 <붉은 꽃과 푸른 잎>이라는 짧은 우화가 유난히 향기를 더해 준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칭찬의 말을 많이 듣는 어떤 고운 꽃 한 송이가 어느 날 자만심에 빠져 바람의 힘을 빌려 가지에서 뛰어내리지만 얼마 못 가서 이내 시들어버렸고, 사람들은 이 꽃을 쓰레기통에 팽개쳐버리고 만다. 다른 꽃들은 푸른 잎을 떠나지 못했는데 이는 말없는 푸른 잎이 지양분을 공급해 주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더 붉고 아름답고 향기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 꽃은 곱지만 푸른 잎이 없다면 어찌 고와질 수 있었겠는가?'라는 말로 끝이 나는 이 이야기를 읽고 나는 몇 년 전 어느 암자에서 본 달맞이 꽃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꽃들을 받쳐주기 위해서 일제히 소리를 내며 피어오르던 수많은 잎새와 꽃받침들을 보면서 나는 그 숨은 힘의 아름다움에 얼마나 놀라워했던가.
수도원에 오래 살다 보면 숨어서 푸른 잎의 몫을 하는 이들을 많이 만나게 되고, 이분들 이야말로 그 한결같은 성실성과 인내, 밑바탕적인 겸손으로 수도원 밖에까지 향기를 날리는 사라들임에 알게 된다.
나와 함께 수련을 받은 ㅎ수녀님은 나보다 두 살 위인데 워낙 말수가 적고 큰 키에 피부는 가무잡잡한 편이어서 우리는 그를 '월남 아저씨'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와 나는 남들의 눈에 띌 만큼 유난스런 사이는 아니지만, 내게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언제라도 달려가서 도움을 청하거나 부탁을 할 수 있는 만만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20여 년을 가까이 지내면서도 나는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특히 남에 대해서는 더욱더 이러쿵저러쿵 비난이나 불평의 말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재미없으리만치 묵묵하고, 좋은 말조차 아끼는 듯 늘상 듣는 쪽에 있고, 받아들이는 쪽에 있으므로 나는 그 앞에서 자연히 말을 많이 하게 되고, 푸념도 자주 늘어놓는 편이다. 그래도 그는 이래라, 저래라 충고하는 법도 없고, 빙그레 웃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어떤 모임에서 돌아가며 말을 할 때도 그의 말은 가장 짧고 단순하고 겸허하다. 자기 자신에게 견디기 어려운 일이 생겨도 '기도해 달라'는 말뿐 자세한 내용 설명이 없는 그는 늘 가장 수수하고 평범한 자리, 수고는 많이 하면서도 잊혀지기 쉬운 자리에 기쁘게 머무는 듯하다.
다른 사람 같으면 몇번씩 소임을 바꾸고도 남았을 20여 년의 세월에도 그는 임상병리사로서 현미경 앞에 앉아 있는 병원 일만 계속하고 있다. '너무 한가지 일에 오래 하는 게 지루하지 않아요?'라고 어쩌다 내가 물어도 미소만 하는 사람. 말을 안해도 냉소적이거나 근엄한 분위기가 아닌 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침묵이 나는 좋다. 얼마 전 내가 병원에 가서 진찰받을 때도 그가 옆에 있으니 든든하고, 내가 머무는 곳의 옆방들이 며칠 간 비어 혼자 자는 것이 어려웠을 때도 그가 옆방에 와 머무니 마음이 놓였다. 내가 그를 필요로 할 때마다 그는 늘 조용히 다가와서 힘이 되어주었으나 나는 한번도 제대로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 같다. 오늘 '붉은 꽃과 푸른 잎'의 우화를 읽다가 문득 생각난 ㄱ수녀님, 그는 중종 나로부터 잊혀지면서도 그 서운함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다가와서 모나고 뾰족한 모양의 나를 둥글고 느긋한 사랑으로 받쳐준 고마운 사람이었음을 오늘 새로이 깨닫는다. 내일은 그에게 내가 읽은 우화를 이야기하며 '수녀님은 제게 푸른 잎 같은 분이세요'라고 해볼까? 그는 또 말없이 웃기만 하겠지.
나도 스스로의 힘만 믿고 바람을 타는 꽃잎처럼 되지 말고, 잎새에 의지하여 제자리를 잘 지키는 꽃잎이 되면 좋으련만, 누군가를 받쳐주는 푸른 잎새 같은 사람이 되면 더욱 좋으련만. 이 나이가 되도록 나는 철없고 깊이 없는 꽃잎의 삶을 산다고 생각되어 부끄러울 따름이다.
<1993>
책을 읽는 기쁨. 2
독서 일기에서
1 책을 많이 읽은 날은 색유리가 아름다운 성당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다. 책 속에 수 놓여진 여러 빛깔의 사색이 나를 황홀케 하면 나는 종일토록 즐거워 절로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고전을 읽은 날은 나의 내면에서 은은한 풍금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고, 현대 작품들을 읽은 날은 경쾌한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2 좋은 책에서는 좋은 향기가 나고, 좋은 책을 읽은 사람에게도 그 향기가 스며들어 옆사람까지도 행복하게 한다.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모두 이 향기에 취하는 특권을 누려야 하리라. 아무리 바빠도 책을 읽은 기쁨을 꾸준히 키워나가야만 우리는 속이 꽉 찬 사람이 될 수 있다 .언제나 책과 함께 떠나는 여행으로 삶이 풍요로울 수 있음에 감사하자. 책에서 받은 감동으로 울 수 잇는 마음이 있음을 고마워하자. 책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느 한 구절로 내 삶의 태도가 예전과 달라진 수 있음을 늘 새롭게 기대하며 살자.
3 '이 시대에 와서는 진리가 하도 모호하고 거짓이 굳어져버려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알 수가 없을 정도다' '나는 그리스도교를 진짜라고 믿다가 틀리기보다는 틀리고 나서 그것이 진짜임을 발견하는 편이 더 무서울 것 같다'고 말했던 파스칼. 오늘은 도서실에서 파스칼의 책들을 빌려왔다. 단숨에 이해하긴 어렵지만 그의 <팡세> <소품집> 등은 읽을 때마다 새롭다. 그의 글도 글이지만 위대한 수학자, 물리학자이면서도 의심 없이 하느님을 믿고 열렬히 사랑했던 그의 삶을 나는 사랑한다. 그가 39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더 많은 책들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을텐데...
4 책에서 만난 좋은 구절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타이프를 쳐두거나 컴퓨터에 입력해 두는 편리한 방법이 있겠으나 독서 카드나 노트에 직접 써 놓는 정성스러운 방법이 있겠으나 독서 카드나 노트에 직접 써 놓는 정성스러운 방법이 가장 좋다고 생각된다. 여성, 행복, 예술, 신앙 등등 여러 주제로 내가 분류해서 발췌해 둔 독서 카드들은 이미 10년이 지나 빛깔이 바랜 것도 많지만 소중하게 여겨진다. 요즘은 나도 게을러져서 책의 좋은 내용들을 쉽게 복사할 때가 많지만 길지 않은 문장들은 되도록 노트에 적어두곤 한다.
'참된 신앙은 어느 요일엔 어떤 음식을 먹고, 어느 요일엔 교회에 가서 어떤 기도를 드리는가 함을 아는 데 있지 않다. 항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좋은 삶을 영위하며 항시 자기가 삶에서 기대하는 것을 이웃에게 베푸는 데 있다'는 톨스토이의 말에 크게 별표를 해두었던 나의 지난날의 모습이 보인다.
5 '단 한 번의 비가 와도 풀들은 푸르름이 몇배나 더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보다 좋은 사상을 받으면 우리의 앞날이 희망은 빛나며, 만일, 우리가 항상 현재에 살며 적은 양의 이슬을 받아도 그 영향을 남김없이 나타내는 풀잎같이, 우리가 당면하는 모든 우연지사에 대처한다면 그리고 지나간 기회를 놓쳐버린 잘못을 보상하기 위해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는 축복을 받을 것읻. 우리는 봄이 왔는데도 겨울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헨리 소로우의 실제생활 보고서인 <숲속의 생활>을 읽으면 고독 속에 빛나는 그 사색의 깊이에 놀라게 되고, 구도자적인 삶의 아름다움에 이끌리게 된다.
작가처럼 2년 2개월까진 아니더라도 우리 역시 삶의 어느 기간을 어느 고독한 장소에서 홀로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6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을 통해 내가 더욱 좋아하게 된 영국의 수필가 챨스 램. 오늘은 <회복기의 환자>라는 그의 수필을 읽고 깊이 공감했다. '병이 들었을 때 인간은 그 스스로에게 자아의 폭을 얼마나 크게 확장 시키는가! 환자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존재가 된다. 집안 구석 구석 내려 앉은 정적과 무서운 침묵 속에서 그는 당당하게 누워서 자기의 주권을 즐기고 있다. 환자는 얼마나 마음대로 변덕을 부릴 수 있는가!' 그의 글에는 항상 따뜻한 정감과 유머가 들어 있다.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이야길 전해 듣는 것만 같은 램의 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7 내가 여학교에 다닐 때 열심히 책을 빌려 읽던 책방 골목길이 지금도 가끔 꿈에 보인다. 빌리는 값도 쌌지만 주인아저씨의 친절한 미소가 좋아 자주 드나들었던 그 책방. 국내외의 많은 명작들은 대개 그때 빌려 읽었고, 책을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기에 더 열심히 읽었다. 무엇이든지 너무 풍부하고 보장되어 있으면 사람은 금방 게을러지고 갈망도 그만큼 줄어드는 것 같다.
8 오늘은 오랜만에 광안리 바닷가에 산책을 나갔는데 방학 때라 그런지 많은 젊은이들로 붐볐다. 근래에 와서 많이도 들어선 해변 일대의 까페, 레스토랑, 노래방들 사이에 조그만 서점 하나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책방부터 찾고, 틈만 있으면 책을 읽고, 만남에서의 화제도 책 읽은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그런 날들을 꿈꾸어본다. '책을 펴자. 미래를 열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올해는 특별히 책의 해라며 홍보도 많이 하지만 책을 읽어야 할 중요성만 강조할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실제로 책을 많이 읽고 사랑해서 책을 읽는 기쁨에 사로잡힌 책의 해가 되면 좋겠다.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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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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