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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38 호
단기 4341. 11. 24 (음력 10. 27)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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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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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매일신문 2009년 매일신춘문예
한국문학 빛낼 신예를 찾습니다 |
◆ 공모부문 및 원고료 |
부문 |
분량 |
고료 |
단편소설 |
70장 안팎 |
700만원 |
시 |
3편 이상 |
500만원 |
시조 |
3편 이상 |
300만원 |
동시 |
3편 이상 |
300만원 |
동화 |
30장 안팎 |
300만원 |
수필 |
12장 안팎(2편 이상) |
300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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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부문 당선작은 1편이 원칙이며,원고량은 200자 원고지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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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사는 2009년도 매일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합니다. 올해로 52주년 전통을 자랑하는 매일신춘문예는 그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많은 문인들을 배출한, 젊은 작가의 권위있는 등용문입니다. 각 부문별로 우리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참신한 예비 작가들의 많은 참여를 기대합니다. 매일신춘문예는 열정과 패기 그리고 감각이 넘치는 젊은 작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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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시·시조·동시·동화·수필 6개부문…12월10일 마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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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12월 10일(수) 오후 6시(우편발송 원고는 10일 도착분만 유효). |
▶보낼 곳: 대구시 중구 서성로 26 매일신문사 편집국 문화체육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 (우편번호 700-715/ 문의전화 053-251-1741~3) |
▶당선작 발표: 매일신문 2009년 1월 1일자 신년호 |
▶응모요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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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응모작은 미발표 창작품에 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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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원고를 다른 신춘문예에 중복 투고하거나 표절한 경우 또는 기성 문인의 동일 장르 응모의 경우에는 무효 처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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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첫장과 맨 뒷장에 응모부문과 주소, 본명, 나이, 연락처(자택전화·휴대전화)를 반드시 기입해 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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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봉투에는 붉은 글씨로 ‘신춘문예 응모작품’ 과 ‘응모부문’을 명기해 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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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원고(단편소설·동화·수필)는 200자 원고지로 환산해 원고 첫장에 매수를 기입 해 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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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 원고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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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세계일보 신춘문예 공모
세계일보가 2009년 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합니다. 참신한 형식과 빛나는 사유, 인간과 세상에 대한 곡진한 애정으로 한국문학의 새로운 미래를 밝혀주십시오. 많은 응모를 기대합니다.
◆공모 부문 및 고료
▲단편소설(200자 원고지 100장 안팎)=500만원
▲시(3편 이상)=300만원
▲문학평론(200자 원고지 70장 안팎)=300만원
◆마감:2008년 12월15일 월요일(당일 도착분까지만 유효, 방문 접수 가능)
◆당선작 발표:2009년 1월1일자 세계일보
◆보낼 곳: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 63-1 세계일보 편집국 문화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우편번호 140-740)
◆유의사항
▲겉봉에 붉은 글씨로 ‘신춘문예 ○○부문 응모작’임을 명기해 주십시오.
▲원고 겉장과 뒷장에 이름(필명일 경우 본명 명기)과 주소,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 원고 분량(200자 기준)을 반드시 써 주십시오.
▲과거에 어떤 매체에도 발표되지 않은 작품이어야 하고, 당선된 작품이라도 후일 표절로 밝혀지거나, 동일 작품이 다른 매체의 신춘문예에 중복 투고되어 동시 당선됐을 경우 당선을 취소합니다.
▲부문별 심사위원 명단은 당선작과 함께 발표합니다.
▲응모작품은 돌려드리지 않습니다.
◆문의:(02)2000-1261, http://munhak.segye.com 문단의 샛별을 기다립니다 단편소설·시·문학평론… 내달 15일 접수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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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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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아라. 그럼 너는 너 자신을 볼 수 있으리라.(버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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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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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개
사람이름
효정 옹주가 애를 낳고 산후증으로 숨지자 중종은 부마인 조의정을 잡아들이라 했다. 옹주의 계집종 ‘풍가이’(豊加伊)를 시앗으로 삼으면서 조의정이 옹주는 종처럼, ‘풍가이’는 옹주처럼 대접했다고 한다. 옹주를 깔보고 소박받게 하였으니 ‘풍가이’를 의금부로 보내 죄를 물으라 하였다. 이 시절 대궐에서 투기가 심했다고 한다. 임금 사위는 시앗을 두지 못하였으며 어길 때는 어미와 함께 곤장을 맞기도 하였다.
‘풍가이’는 ‘풍가·풍개’(豊加·豊介)라고도 하였다. ‘풍개’는 고장말로 자두다. 자두는 ‘오얏’, 고장 따라 ‘옹아’로도 부른다. 사람이름에는 ‘갈마·감·능금·도토리·동백·딜위(찔레)·수영·잣’ 따위 말도 쓰인다. 갈매나무 열매인 ‘갈매’는 짙은 쪽빛을 띠어 검푸른 색을 ‘갈매빛’이라 하며, ‘갈마동·갈마고개·갈매못/갈마무시’처럼 땅이름에도 들어 있다.
‘수영’은 여뀟과 여러해살이풀로, ‘승아/싱아’로도 불리며 ‘수영이·수영대·수영손이’라는 이름에도 쓰였다. ‘잣’이 든 이름에 ‘잣금이·잣녜·잣달이·잣덕이·잣동이·잣산이’도 있다. 이름에 보이는 ‘늣티’는 느티나무인 듯하다.
조선의 왕족은 ‘李’(오얏 이)씨이므로, 대한제국 땐 우표를 ‘풍개’ 꽃으로 꾸몄다. 더위 먹은 입맛 돌리는 데 시큼하고 달콤한 자두, 제격이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구비구비, 메꾸다
'나는 지리산의 아늑한 계곡에 묻히고 싶다. 실상사·천은사·화엄사, 그 곁을 스치는 섬진강 구비구비. 어느 바위엔가 털썩 주저앉아 흐르는 강물, 그 위를 떠도는 낙엽만이 내 친구다.' '역사의 구비마다 권력에 의해 거짓이 진실로, 진실이 거짓으로 뒤바뀌는 구석이 얼마나 많았느냐.'
'굽이'는 '휘어서 구부러진 곳'이나 '휘어서 구부러진 곳을 세는 단위'를 이를 때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사람이 '굽이'를 발음에 이끌려 자꾸 '구비'로 쓴다. '굽이굽이' '굽이치다''굽이돌다'를 '구비구비''구비치다''구비돌다'로 적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글 맞춤법 제19항은 '어간에 '이'나 '음/-ㅁ'이 붙어 명사로 된 것과 '이'나 '히'가 붙어 부사로 된 것은 그 어간의 원형을 밝혀 적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굽이'는 '굽다'에서 왔으므로 '굽이(굽+이)'로 적는 것이 옳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 잠든 딸의 얼굴을 어루만져 준 뒤 부엌으로 들어가 쪼그리고 앉은 채 찬밥으로 시장기를 메꾸다 보면 내가 정말 왜 이러고 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곤 했다.'
이 문장은 '메우다'를 '메꾸다'로 잘못 쓴 경우다. 구멍이나 빈 곳을 채운다는 뜻의 '메우다'는 '메다'에 사동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우'가 붙은 형태인데, '입맛을 돋우다'를 '입맛을 돋구다'로 잘못 쓰는 것처럼 '메우다'를 '메꾸다'로 거세게 발음하는 경향이 원인인 것 같다.
명란젓, 창란젓, 토하젓, 토화젓
발효식품인 '젓갈'은 여러 가지로 쓸모가 많다. 양념을 섞어서 직접 반찬으로 먹기도 하고, 김치를 담글 때나 다른 음식의 맛을 낼 때 쓰기도 한다. 담그는 재료에 따라 그 종류가 무려 1백40여 가지나 된다고 한다. 젓갈은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식품이지만 이름을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명태로 만드는 젓갈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알로 만든 것이 명란젓이다. 아가미로는 아감젓을 만들 수 있다. 또 한 가지 재료는 창자다. 이 젓갈을 흔히들 '창란젓'으로 부르지만 바른 용어가 아니다. 명태 창자를 이르는 말은 '창란'이 아니라 '창난'이다. 젓갈 이름도 당연히 '창난젓'이다. '명란젓'에 이끌려 '창란젓'이라 부르기 쉽지만 '알[卵]'이 아니므로 '창란'이라고 써서는 안 된다. 참조기 새끼로 담근 젓갈을 '황새기젓'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 또한 '황석어(黃石魚)젓'이 바른 용어다.
'생이'라는 민물새우로 만든 젓갈을 일러 '토화젓'이라고 하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새우 하(蝦)'자를 써서 '토하(土蝦)젓'이라고 해야 한다. '생이'는 새뱅잇과에 속하며 몸의 길이는 3cm 정도이고 몸의 빛깔은 갈색이다.
'꽃 화(花)'자를 쓴 '토화(土花)젓'은 굴의 일종인 미네굴로 담근 젓갈을 말한다. 바다새우로 만든 젓갈의 경우는 잡은 시기에 따라 오젓·육젓·추젓 등으로 나누는데 음력 유월께 잡은 새우로 담근 '육젓'이 가장 품질이 좋다고 한다.
옛부터, 옛스럽다
'감초는 해소·진통·소염·이뇨 작용이 있어 '옛부터' 한방에서 널리 사용됐다.' '시내의 전경은 평양이 왜 '옛부터' 도읍지로 정해졌는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인사동 카페에 가 보니 테이블에 호롱불을 밝히고 있고 문에 창호지를 발라 무척 '옛스러웠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채색이 모두 벗겨졌으나 '옛스러운' 옷장은 단아한 멋이 있다.'
흔히들 예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아주 오래 전부터'라는 뜻으로 '옛부터'를 쓰고, '옛것과 같은 맛이나 멋이 있다'라는 뜻으로 '옛스럽다'를 쓴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다. '예부터''예스럽다'로 써야 맞다. '옛'의 품사는 관형사다. 관형사는 '옛 모습''옛 생각'의 '옛'처럼 체언 앞에 놓여 그 체언의 내용을 자세히 꾸며주는 역할을 한다. 관형사 뒤에는 조사가 붙을 수 없다. '부터'는 조사다. 따라서 관형사 '옛' 뒤에는 올 수 없으므로 '옛부터'는 바른 형태가 아니다.
또 '-스럽다'는 '복스럽다' '자랑스럽다'처럼 일부 명사 뒤에 붙어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다. 따라서 관형사인 '옛' 다음에는 붙을 수 없으므로 '옛스럽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반면 '예'는 '아주 먼 과거'를 의미하는 명사다. 명사 다음에는 조사나 접미사가 올 수 있으므로 조사인 '부터'나 접미사인 '-스럽다'를 붙여 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예부터'와 '예스럽다'가 바른 형태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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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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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 김소월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嶺) 넘어 가려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리 돌아서서 육십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년 정분을 못 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삼수갑산 가는 길은 고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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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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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 불 지피다 - 김정희
섬돌에 묻어 둔 불씨 빠지직 불 지폈다 언 가슴 녹인 불꽃으로 피어난 맨드라미꽃 오지랖 데인 흔적을 주홍 글씨 새기며
몇 번을 까무러쳐도 끓어오르는 더운 피 내림굿 손대 잡고 날고 싶은 나비 꿈은 선무당 신들린 춤사위 바라춤을 추느니
귀뚜리 밤을 울어 풀잎도 잠 못 든 새벽 혼을 실은 낮 달은 빈 하늘에 떠돌고 아, 여기 불타는 집 한 채 지상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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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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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두렷하여
달이 두렷하여 벽공에 걸렸으니 만고풍상에 떨어짐직 하다마는 지금 취객을 위하여 장조금준 하노매
<지은이> 이덕형(李德馨)1561~1613.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선조 13년 나이 갓스물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항복(李恒福)·이정립(李廷立)등과 함께 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서른 살에는 이미 벼슬이 예조참관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임진란 수습에 힘써 영의정에 올라, 호성(扈聖) · 선무(宣武)공신이 되었다. 어렸을 때는 이항복과 특히 절친하여 기발한 장난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글씨를 잘 썼다.
<말 뜻> 두렷하여 : 둥글어서. '밝다'는 뜻도 들어 있다. 벽공(碧空) : 맑고 높은 푸른 하늘. 만고풍상(萬古風霜) : 비바람 · 서리 등을 겪은 오랜 세월. 장조금준(長照金樽)하노매 : 아름다운 술통을 오래도록 비추어 주는구나!
<감 상> 휘영청 밝은 달이 높푸른 하늘에 둥그렇게 걸려 있구나. 비바람 겪어오는 오랜 세월 동안에 어쩌면 떨어짐직도 하건마는, 그래 도 떨어지지 않고 언제나 하늘 위에 높이 떠서 오늘까지 술취한 나그네를 위하여 이렇게 이 좋은 술통을, 이 흥겨운 자리를 훤하게 비추어 주는구나!
달 아래에서 베풀어지는 술자리는 한결 흥이 솟는 법, 그것이 허물없는 친구와의 것이라면 더더욱 흥겨운 것이지 않겠는가.그래서 술을 좋아하는 이태백은 달까지도 좋아하였는가 보다. 다음의 시조가 그것을 말해 준다.
"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와 놀던 달아/ 이백이 기경비상천 후(騎鯨飛上天後)이니 놀과 놀러 밝았는다/ 내 역시 풍월지호사(風月之豪士)이라 날과 놔이 어떠니(작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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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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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3 -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제3장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
예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가
오늘날 기존의 예는 거의 부정되고 있으나 새로운 예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들이 새로운 예를 만들어 가야 한다. - 조남호(서울대 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서울시립대 강사)
섭공이 공자에게 말하였다. "우리 무리에 몸을 정직하게 행동하는 자가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고발하였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무리의 정직한 자는 이와 다르다.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숨겨 주고, 자식이 아버지를 위해 숨겨 주니, 정직함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논어" 자로편)
"초나라에 직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치니, 그것을 관리에게 알려 주었다. 초나라 재상이 말하였다. '그를 죽여라!' 임금에게 진실하나 아버지에게는 비뚤은 것이라고 여기서 그를 죄주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임금에게 정직한 신하는 아버지의 못된 자식인 셈이다. (그러나) 재상이 직궁을 죽이자, 초나라의 불법적인 행위를 군주가 들을 수 없게 되었다."("한비자" 오두편)
이 두 예문은 아들이 아버지가 양을 훔친 것을 고발한 사건에 대하여 서로 다른 평가를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법률이 중요한가 하는 것이 논쟁점인데, 전자를 가족적인 관계라고 한다면 후자는 사회 또는 국가와의 관계이다. 그리고 전자를 중시하는 쪽이 유가라면 후자를 중시하는 쪽은 법가이다. 가족관계와 국가관계의 충돌은 과거의 동양 사회 뿐만 아니라, 현재의 서양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 현대의 과학을 불신하는 유나버머는 사람이 과학자들에게 폭탄을 배달하자 그의 어머니가 그를 고발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양을 훔친 것보다 더욱 죄가 무거운 사건이다. 국가 전체로 볼 때, 가족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은 온갖 부조리의 온상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가 자식을 고발할 수 있는 것인가 또한 문제가 된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가족이라는 틀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가족을 굴레로 생각하는 사고도 있다. 가족, 특히 가부장의 권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성을 찾으려는 젊은 세대가 바로 그들인데, 이들은 전적으로 예를 무시한다. 이러한 쪽은 도가이다. 그리고 가족 관계를 중심으로 개인과 국가에 모두 적용되는 원리를 찾고자 한 것이 유가인데, 이 원리가 바로 예이다. 따라서 예는 개인주의와 국가(법)라는 양 극단을 배제한 채, 그 사이의 스펙트럼 속에 있는 것이다. 예를 둘러싼 도가, 법가, 유가의 논의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예를 중심으로 비판하는 쪽과 긍정하는 쪽을 살펴보고, 예의 현대적 적용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예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
1)도가
예라고 하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전통시대의 예는 자질구레한 것까지 규정하는 측면이 있다. 아무 옷이나 입어서는 안 되고 정장을 입어야 된다든지, 절을 몇 번 해야 된다든지, 음식을 먹을 때는 조용하게 먹어야 된다든지 하는 측면 등은 예의 까다로운 측면들이다. 특히 남자보다 여자의 경우는 더욱더 예를 불편하게 여긴다. 전통시대에는 여자로서의 권리보다는 의무를 예라고 하는 틀로 규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조신한 여자는 바지보다는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 하는 우리 시대의 암묵적인 경향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물론 남자의 경우는 바지만 입게 되어 있는데, 이것도 어찌 보면 남성 차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전통시대의 예 자체가 이미 차별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현상적인 차별을 그대로 옹호하고 있다. 차별화된 세계에 대한 형식적인 표현이 예이다. 차별화된 세계 속에서, 가장 차별을 덜 받는 사람들이 예를 주창하고 있고, 그 사람들이야말로 예를 옹호할 것이다. 따라서 예를 비판하는 쪽에서 보면, 대체적으로 예는 남성 또는 지배자를 옹호하려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예는 단순한 이데올로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례적인 행동의 규제를 통해서 인간의 신체까지도 구속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푸코가 주장하는 '신체 길들이기'도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했다. 그는 한 사회의 지배질서가 얼마나 효율적인가는 그 질서가 얼마나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가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푸코가 제시한 예는 근대의 군대나 감옥 등이다. 군대나 감옥에서 인간의 일상행동을 감시하고 규격화함으로써 근대가 요구하는 생산적인 능력을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체 길들이기는 근대 뿐만 아니라 전근대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 전통시대 여성들을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말투에서부터 행동거지까지 사회적으로 통제를 받았다. 말은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워야 하는 등등이 그 예이다. 신체의 형식화를 통한 모범의 설정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예를 통한 신체 길들이기는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예를 옹호하려는 사고는 권력지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가가 보기에 유가의 예에 대한 자율성이란 권력지향성을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예를 강조하면 결과적으로 다양성보다는 획일성을 요구하게 된다. 차별을 인정하는 체계가 다양성으로 연결되지 않고, 획일화로 연결되는 것이다. 현재에도 교복이라는 유니폼이 바로 이것을 잘 대변하고 있는데,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힘으로써 학생다움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교복은 교사가 학생을 쉽게 지도할 수 있다는 기능적인 면을 드러내고 있지만, 학생측에서 볼 때 교복은 인간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옷에 대한 자유조차고 박탈한 것이다. 이러한 예의 획일화가 초래하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선진시대 노장 사상이 누누이 지적하고 있다. 장자의 "오리 다리가 짧다고 늘리지 말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는 명언은 이것을 잘 말해 준다. 각각의 존재는 자신의 개성에 따라 맞게 살아야지, 예라고 하는 틀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이 말의 뜻이다. 도가가 개인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를 부정한다고 해서 예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에는 권력지향적인 성격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생활에서의 절차적인 성격도 있다. 이러한 성격의 예가 바로 사회의 기준이나 질서이다. 이 기준이나 질서를 무시한다면 각자는 자신의 생활을 영위할 수는 있지만, 사회라는 조직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곧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2)법가
요사이 신문을 보면 비리 공직자가 너무나 많다. 부정부패 척결이 매번 정부 시책의 중요한 입버릇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것을 근절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우리 사회에 정성과 뇌물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차리는 것이 곧 뇌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뇌물을 준 사람은 촌지나 떡값이라고 주장하지만 촌지나 떡값의 기준이 애매모호하다. 그 기준은 적용하는 사람 마음대로 되기 십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부정부패의 악순환을 끊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미국에는 국회위원에게 10달러 이상의 선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법률이 있다. 선물이라는 예가 법에 의해 제약되는 것이다. 예는 사람의 신분, 나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따라서 예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다. 그리고 예는 주로 비강제적, 관습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효율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리고 예를 어긴 사람에 대해 제재할 방법이 없다. 유가에서는 예에 자율성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법가가 보기에 현실적으로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자율성은 쉽게 무너지고 만다. 따라서 법가는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고 강력한 법의 강제야말로 인간의 욕망을 다스릴 수 있다고 보았다.
법가에서는 예가 불평등할 뿐만 아니라 기준도 없기 때문에 국가를 다스리는 원리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법가에서는 예의 기능을 완전히 부정하고 법을 내세운다. 그런데 이러한 법가식의 예에 대한 부정은, 법 만능주의로 빠질 염려가 있다. 교화보다는 처벌이 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법만 정비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법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윤리적 주체성이 없을 때, 그 법은 쓸모없는 제도에 불과하다. 법은 인간의 외면적인 태도만을 문제삼지 인간의 내면적인 측면을 문제삼지 않기 때문이다.
예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
예라는 글자는 분석하면, 귀신과 제물이 그릇에 담겨 있는 모양으로 되어 있다. 귀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종교적인 절차로 예를 쓴 듯하다. 그리고 예는 제한된 신분에만 적용되었다. "형벌은 대부 이상 올라가지 않고, 예는 서인 이하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종교적인 절차로서의 예는 점차 시대가 흘러가면서 도덕적인 의미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적용대상도 주로 지배계층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되던 것이 인간 일반의 광범위한 영역에 걸치는 규범으로 확장되었다. 예가 보편성을 획득한 것이다. 핑가레트라는 학자는 예를 단순히 조잡한 행위양식을 가진 사람들을 길들인 관습적인 행위가 아니라, '신비한 힘'(magic power)이라고 말한다. 예는 각각의 사회적인 구성원들로 하여금 사회와 일체감을 갖도록 하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아마도 서양 사회에서는 이러한 능력이 신비하게 보였는가보다. 사실 서양 사회는 법이라고 하는 틀로 각각의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고 있다. 법이 외재적인 구속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 반해서 예, 특히 일상적인 의례는 그것을 수행하는 속에 신명나는 것이 있고, 그 속에서 적극적인 힘이 발휘된다고 하다. 그리하여 예는 단순하게 보수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는 방식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베버가 동양을 '마술의 정원'(magic garden)이라고 규정한 것에서 바로 동양의 '마술'에 대한 재발견이 아닌가 한다. 그는 개인과 사회의 연결이라는 서양 사회의 문제점을 공자의 예에서 풀어 보고자 했던 듯하다. 예는 감정(내용)과 의식(형식)으로 되어 있다. 감정으로서는 예는 남을 공경하고 남에게 사양하는 마음이며, 의식으로서의 예는 절차를 규정하는 세세한 규정들이다. 공경하고 사양하는 마음이 없이 정해진 절차를 진행한다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고, 절차 없이 공경하는 마음만 그대로 수행한다면 촌스러움만 있을 것이지만, 예는 매너리즘과 촌스러움의 중용일 것이다. 예는 개인의 감정과 의식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서를 뜻하기도 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동물과의 차별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예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며, 그 기준과 질서야말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이다. 동물에게도 그 집단을 이끄는 질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본능에 불과하다. 전통시대에 예를 어긴 사람은 개돼지만도 못하다는 취급을 받았다. 사람, 아니 동물 이하의 취급을 받은 것이다.
질서로서의 예는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이상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예에 대해 갑갑해하기보다는 편안히 여겨야 한다. 70세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더라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공자의 말은 바로 그 뜻이다. 공자는 법도, 즉 예가 자유로운 경지임을 알았던 것이다. 옛날 선비들이 오뉴월에도 대님을 풀지 않고, 비가 오더라도 뛰어가지 않고, 추워도 곁불을 쬐지 않는 것은 지금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전통시대에는 바로 이것이 예에 입각한 행동이었다. 이들에게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편안했으며, 예를 지키는 것이 곧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는 곧 이들에게는 진리였던 것이다. 성경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는 표현이 있는데, 진리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 자유이기 때문이다. 자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예에서 벗어나는 것도 자유(freedom, 객관적 측면)이지만, 예를 실천하는 것도 자유(liberty, 주관적 측면)이다. 이들에게 예는 소극적인 자유가 아니라 적극적인 자유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엄격하게 주장하는 예의기준이라고 하는 것도 엄밀한 의미에서 근거는 없다. 제자가 3년상에 대해 일년상을 주장하자 공자는 네가 편한대로 하라고 하면서 '자식이 태어나서 3년이 지난 뒤에야 부모의 품을 벗어나게 되기'("논어" 양화편) 때문에, 자식은 부모의 상에 3년상을 해야 된다고 말한다. 공자는 아마도 논리적인 측면보다는 정감적인 측면에서 예의 근거를 설명하는 것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러한 측면은 뇌물과 선물의 차이를 자신의 마음 속에서 찾는 공자의 모습에도 잘 나타나 있다. 공자는 "내가 임금에게 예를 다했는데, 남들은 나를 보고 아첨한다 하더라."("논어" 팔일)라고 했다. 예와 아첨은 곧 남이 보아서는 알 수 없고 자신만이 안다는 것이며, 뇌물과 정성을 다한 선물도 자신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갖느냐에 따라 판가름된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정성을 다한 선물과 뇌물의 차이가 엄청나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종이 한 장 차이이다. 공자는 뇌물의 기준을 법적으로 규정하기보다는 뇌물과 정성을 구별할 줄 아는 주체적인 인간상 확립에 목적을 두고 있다. 자기 자신이 확고한 기준에 서 있을 때, 비로소 뇌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좋은 전통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유가의 예는 법가의 법과 도가의 개인주의라는 양 극단 속에 서 있는데, 극단적인 것을 배제하고 중용을 취하는 정신이 예 속에 있다. 그리고 그 예는 각각의 개인이 놓인 정감적인 상황을 중요시 한다. 그러나 유가는 그것의 객관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반성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 예는 그 사회의 질서이기 때문에 그 질서를 지키면 되었지, 그것의 정당성을 문제삼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예를 행하는 것이 일상적인 매너리즘에 빠질 공산이 크며, 매너리즘에 빠진 예는 내용이 없는 형식일 뿐이다. 예의 형식화야말로 그 사회 질서를 고착화시키는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새로운 예의 정립
최근에 고인이 된 모 그룹 회장이 자신의 유해를 화장시키라고 유언한 것이 엄청난 사회적 감동을 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사건이었는데, 매장이 일반화된 나라에서 화장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문제는 일부 식자들이 제기할 뿐 남의 일로 치부해 버렸다. 이것은 곧 우리 사회에 합리적인 장례 문화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어디 장례 문화뿐이겠는가? 돌잔치나 회갑을 뷔페 식당에서 하고, 결혼식은 결혼식장에서, 장례식은 영안실에서 하고 있다. 이러한 행사장은 어로지 자본의 이윤 추구만이 있을 뿐이고, 인간적인 정은 빠져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불합리한 일들은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너무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곧 우리에게 일상생활을 지도하는 예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예는 거의 부정되고 새로운 예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마련한 관혼상제는 인생의 마디를 넘어갈 때 절차를 통하여 그 마디를 쉽게 넘어가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태어나고 어른이 되고 죽고 제사지냄은 인생의 큰 마디이다. 이 마디마디를 우리 조상들은 바로 개인의 실존적인 고민이라는 형식적인 담론보다는 인간적인 정서를 함께 나누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통이 지금 우리에게는 없고 남아 있는 것은 허례허식일 뿐이다. 허례허식은 내용은 없고 형식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지금의 의례가 허례허식임을 자각하지 못한다. 지식인들조차도 문제점은 느끼고 있지만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 하고 있다. 전통적인 의례를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왜냐 하면 전통적인 의례는 대부분 가사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는 행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사를 가정에서 치른다고 한다면 가사 노동력에 의존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고, 그런 행사를 치를 만한 공간도 넓지 않다. 그런데다 아직 새로운 의례는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의례를 대충 편한 대로 거행하여 넘어가자는 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의례가 나올 때이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의례라고 하는 것이 옛날식의 '가정 의례 준칙'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관 주도로 이루어진데다 실정에도 맞지 않아, 아무도 지키지 않는 준칙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전통시대의 예는 권력에 의한 다스림의 도구라는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 예를 다시 재정립하자는 주장을 하면 그것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있다. 이러한 목소리야말로 반성적인 사고를 거부하는 것이며 민주적인 대화를 무시하는 것이다. 민주적인 대화란 바로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새로운 예는 법과 개성의 문제를 아울러 고민해야 한다. 그러한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역사적인 사고이다. 이러한 고려 속에서 우리들이 새로운 예를 만들어 가야하는 것이며, 그 예는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양식을 재정의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예의 실천은 어떻게 보면 국가나 사회의 큰 틀에 따라서 저절로 맞추어지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것을 담당하는 사람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이 없는 이념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참고 문헌
H. 핑가레트, "공자의 철학", 서광사, 1993. B. 슈월츠, "중국 고대 사상의 세계", 살림,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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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4. 운명을 점치는 스님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부를 가진 사람인가, 혹은 권세가 있는 사람인가.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가진 게 많다 해도 지킬 것이 많으면 근심 걱정이 많은 게 인간사이다. 권력 또한 한갓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이란 어디 있는 것일까. 야운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삼도의 고통 위에는 탐욕이 첫째가 되고 육도의 문 가운데는 보시를 행하는 것이 머리가 되느니라. 아끼고 탐하면 착한 길을 막게 되고 자비를 베풀면 악한 길을 막으리라. 만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비록 곤란 궁핍한 처지에 있더라도 아끼지 말라. 올 때도 한 물이 없이 왔고, 갈 때 또한 빈손으로 가리니 자기 재물에 그리는 뜻이 없어야 하거늘, 하물며 남의 물건에 어찌 마음을 둘 수 있으리. 만 가지를 가져도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고 오직 업만 따를 뿐이니 삼 일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가 되고 백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로다.
‘자경문’의 이 말씀처럼, 만 가지 재물이 있다 해도 갈 때는 빈손으로 떠나는 것이 인생사이다. 아무리 재물을 탐하고 소유한들 고작 백 년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거늘 아귀다툼을 한들 무엇하겠느냐는 이 말씀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는 진정한 행복론이 아닐까 싶다. 야운 스님의 말씀처럼 가난한 이에게 아끼지 않고 베푸는 마음. 남에게 작은 선행을 하는 마음들, 이 마음이야말로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남을 돕는다는 일이 말은 쉽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기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지금은 형편이 어려워서요.... 그렇지만 조금 더 잘살게 되면 그때 저도 남을 돕겠습니다.” “좀더 나이가 들고 여유가 생긴 다음에 열심히 자선사업을 하고 싶은 게 제 꿈입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비록 넉넉하거나 여유가 없어도 남을 돕고자 하는 갸륵한 마음들이 있다. 천 년의 보배가 되는 복을 스스로 지어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부산 사직동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에는 곰탕집 하나 있다. 그저 여느집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음식점이라 늘 근처를 지나다니면서도 무심코 지나쳤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곳에 들러 식사하는 도중 메뉴판 옆에 작은 광고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매월 25일 오전 9시부터 낮 12시까지 60세 이상 노인 분들께 무료로 식사대접을 해드립니다.’ 마침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지나가 길래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주인장, 저기 쓰여 있는 대로 매달 한 번씩 노인들께 점심 공양을 하시는지요?” “예, 저희는 그저 노인 분들께 점심 식사 한 번 대접하는 것뿐인 데요. 그런데 혹시.... 삼중스님이 아니십니까?”
나를 알아본 여자 분은 주인의 여동생이라고 했는데, 별로 대단한 일이 못 된다며 겸손해 하는 것이 아닌가.
“당신들, 참 좋은 일을 하고 계시는 군요!”
나는 감탄하면서 진심으로 그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스님, 저도 실은 불교신자인데.... 요즘 식당일이 바빠서 자주 절에 가지 못하고 있어 죄송한 마음입니다. 기왕 이렇게 저희 집에 오셨으니 법문 좀 들려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오히려 내게 미안해 하면서 공손한 말씨로 청했다.
“내 법문 몇 마디 들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절에 가서 부처님 앞에 백 번 절을 하는 것보다도 이처럼 노인들에게 따뜻한 점심 한 끼 대접하는 것을 부처님은 천 배, 만 배 더 좋아하실 겁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야말로 분명히 저보다 더 크고 훌륭한 법문을 하고 계시니 오히려 제가 법문을 들어야 할 입장이지요.”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데, 스님이 이토록 칭찬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칭찬을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입으로만 칭찬을 하는 나 자신이 왠지 부끄러웠다. 남을 칭찬했으면 나도 무슨 일인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25일 노인들 대접하는 그날, 나도 와서 거들어 드리리다.”라고 말했다. 대단하게 큰일이야 못하겠지만 이 곳을 찾아오신 노인 분들에게 단돈 1만 원씩이라도 용돈을 드리고 싶었다. 대략 2백 명이 오신다고 하니 2백만 원 정도는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하루하루 바쁘게 사는 입장이다 보니 25일에 시간을 낼 수 있을 지 우선 걱정이 앞섰다. 수첩을 보니 그 날은 모처에서 강연하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기왕 마음먹은 일, 이렇게 된 이상 그 쪽에 사정을 하고 약속을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부산 동부지청 사무국장도 2.5톤 분량의 옷가지 등 물품을 흔쾌히 기증하기로 약속해 주셨다. 그 역시 내가 하는 일을 잘 이해하고 돕는 자비로운 사람이다. 이렇게 해서 일은 더욱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25일 당일, 곰탕집은 맥고모자를 쓰신 할아버지와 모시적삼을 입고 온 할머니들로 가득 찼다. 연세가 많아서 걷기에도 불편한 어려운 노인들이 찾아와 곰탕 한 그릇 대접에 그렇게도 좋아라 맛나게 드시는 모습을 보니 나 역시 흐믓한 마음이었다. 나는 식사를 마치신 노인 분들께 준비한 용돈과 물품을 나누어 드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어렵게 여기 오신 대부분의 어르신들께서는 나이가 들어 경제적으로 힘들고 또 어렵게 사시는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눈물나게 어렵고 또 자식마저 외면해서 외롭고 가난하게 사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다른 누구보다 더 열심히 양심적으로 착하게 사셨던 증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을 속이지 않고 선하게 사셨기에 지금 어렵게 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이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생에는 반드시 이생에서 지은 바대로 좋은 복을 받게 되실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가난하지만 고생하며 열심히 사신 여러분들의 다음 생은 반드시 밝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러자 않아 계시는 노인 분들이 함박웃음을 가득 피우고 박수를 보냈다. 모처럼 즐거워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기뻤다. 모 신문에서도 기자분이 한 분 나와 그의 선행을 취재해 갔다. 내가 만났던 여자분의 오빠인 이곳 곰탕집 젊은 사장 신종일 씨는 어린 시절 꽤 고생한 사람이었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니, 대학을 중퇴하고 어렵사리 정육점에서 일하며 시간과 돈을 아끼느라 점심을 굶거나, 라면, 어묵으로 때우며 돈을 모아 마련한 것이 이 '궁중사리 곰탕집'이라고 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노인들에게 이렇듯 점심 한 끼라도 베푸는 그 마음이 실로 아름답게 생각됐다. 그날 그도 기뻤던지 내 앞에 앉더니, "스님, 저도 워낙 고생하면서 살아 남들을 잘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 여유가 생기고 보니 저도 이젠 마음을 활짝 열고서 남들에게 좋은 일을 더 많이 해야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좋은 일은 하겠다는 그의 마음이 퍽 대견하게 생각되긴 했지만 그 말을 듣자 솔직히 말해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나 역시 평생 남들을 위한 일을 해 온 터이지만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한결같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가끔 매스컴의 힘을 빌리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더러 남들의 비웃음과 오해를 받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또 간혹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이 잇는데, 이런 일에 묶여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조언을 해주었다.
"당신이 제대로 남을 도우려 한다면 마음을 반쯤 만 여십시오. 그래야만 당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뜻대로 할 수 있고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모두들 당신에게 도움을 얻고자 손을 내민다면 당신은 그나마 일궈 놓은 이 식당 하나도 제대로 지켜갈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평생 남을 도우며 살기 원한다면 마음의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할 것입니다."
내 말이 어찌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나의 체험에서 나온 진심어린 충고였다. 그도 내 말을 마음 깊이 수긍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이 넉넉하다고 할 수 없는 처지임에도 노인들께 따뜻한 점심 한 끼라도 대접하고 싶어하는 그의 얼굴은 환하고 아름다웠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가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됐다. 얼마 전 나는 고등학생인 소녀 가장 정은이를 그에게 소개해 주었다. 나는 곰탕집 사장의 따뜻한 마음과 정성이 정은이가 튼실한 열매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갈수록 인심이 흉흉하고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타인에게 마음과 물질을 베푸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작은 마음들이 모여 사람과 사람의 틈새를 메우고 우리 사회가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튼실한 기둥을 이루는 것이리라.
이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찬 사바세계라 하지만 내겐 지옥과 극락이 따로 없다. 이처럼 스스로 복을 지어가는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이곳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살맛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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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6.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 '천자의 죄를 얻을까 두려워 말머리를 돌린다'
천자에게 죄를 범해서는 안된다. 지금 말머리를 돌리지 않는다면 국가와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하기 힘들다.'이것은 1388년(우왕 14) 명나라에 대항하여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였던 이성계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할 때 내건 명분이다.
역사상 대부분의 쿠데타나 혁명은 모두 나름대로 일정한 명분을 내세우기 마련이다. 위화도 회군 역시 이러한 명분 아래 자행된 것이며 이후 이씨 조선이 성립되어 오백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권을 유지하게 된다. 한번의 혁명에 의해 왕권이 이렇게 계속 유지된 탓에 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는 간단하지 않다. 우선 가장 힘든 것은 사료 선택에 문제가 있다. 대체로 학계에서 회군의 전후 사정에 대해 말할 때 인용하는 사료는 <고려사>이다. 그러나 이 사료는 태조인 이성계가 죽고난 뒤 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학자들에 의해 쓰여졌고 또한 후대왕의 지휘 아래 편찬되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그 여부를 가리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뿐 아니라 태조 이래로 조선이 기울어질 때까지 모든 왕들이 그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이성계의 조선 건국과 관련된 기타 사료들 역시 건국에 대한 정통성 확립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큰 난점이다. 또한 조선의 역사는 근대와 현대로 바로 이어지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했다가는 역사적 왜곡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그러나 회군 자체에 대한 사건 나열식 접근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기반을 살펴보고 대내외의 정세를 판단하여 사료 가운데 진실에 가까운 것을 선별한다면 어느 정도는 위화도 회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의문점이 가는 것은 당시 최영 등 막강한 군부 집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가 회군에 성공했는지 여부이다. 물론 회군 자체가 이성계가 강력한 추진 세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반증해주는 셈이지만 그가 뛰어난 군 지휘자로 성장하기까지에는 매우 혼란했던 당시의 동북아 정세가 반영되어 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 주둔한 이유가 원래 명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요동 정벌이라는 점을 상기해 볼 때, 국제 관계의 변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명나라 성립과 원나라의 몰락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던 1388년 전후의 정세, 넓게 잡자면 14세기 중엽의 동북아 정세에 일대 개편이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멀리 동유럽까지 차지하고 있던 원나라의 몰락은 동북아의 국제 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이런 관계로 명과 원 교체기에 고려 내부에서는 친원파와친명파간의 정치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원나라는 전성기였던 13세기 중엽 이후 1세기 동안에도 끊임없이 일어난 폭동과 반란에 시달렸다. 원나라는 워낙 방대한 지역을 점령한 대제국으로 자리잡은 탓에 모든 곳을 중앙에서 일일이 통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중국 본토와 몽골 일대를 총괄하는 지역을 본국으로 설정하고, 나머지는 변방으로 구분하여 '한'이라는 봉건영주에게 일임하여 분할 통치하였다. 바로 이러한 분할 통치가 원이 무너지는 화근이 되었다. 원나라는 노예사회에서 신분을 등급으로 표시하듯이 통치 지역에 속한 여러 종족들에 대해 심한 인종차별 정책을 썼다. 모든 종족들을 4등급으로 나누어 몽골족은 1등급에 두고 나머지를 셋으로 나누어 지배, 착취하였던 것이다. 특히 원나라는 양자강 이남에 속하는 남중국의 중국족을 4등급으로 규정하여 가장 심한 차별과 착취를 하였다. 이렇게 인종차별 정책을 쓰자 착취당하는 종족들은 중앙정부에 대해 계속된 항거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에 원나라는 반란과 폭동을 진압하여 정권을 유지하려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으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원나라 정부는 수도를 중심으로 하여 군사 이동과 공물 수납 등을 원활히 하기 위해 사방 팔방으로 대도로망을 구축해 놓았지만 통치 지역이 워낙 방대하여 이러한 조치만으로는 저항 세력을 견제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원나라의 통치 기능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중엽 순종 때부터였다. 그는 라마교의 광신도여서 자기 만족을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여 사찰을 짓고 공양을 드리는 등 국고를 탕진하였다. 또한 방탕한 생활을 일삼아 이를 위해 온갖 명목을 내세워 각 지역에 대해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였다. 이렇게 되자 사방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중국에서 일어난 주원장의 세력이다. 종족 가운데 4등급으로 분류되어 가장 심한 억압과 착취를 당한 남중국의 농민들은 주원장의 휘하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반란 초기 주원장은 농민군의 대장이었지만 차츰 세력권이 커지자 1368년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명'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명나라가 성립된 것이다.
주원장은 원나라가 점차 쇠퇴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내친 김에 중국 전역을 통일한다는 전략에 따라 북으로 진격하여 승승장구 끝에 마침내 수도인 북경을 점령하고 원나라 정부를 북쪽 몽골 지역으로 내몰았다. 이렇게 축출된 원나라를 당시 고려에서는 북원이라고 불렀다. 주원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 지역을 넘보았다. 그런데 바로 이곳과 인접한 곳에 고려가 있었으니 명나라와 고려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물론 고려가 명나라에게 단순히 사대정책을 써서 압록강 이북 지역에 대해 포기를 했다면 두 나라 사이에는 아무런 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고려는 원나라가 몰락해가자 고구려의 옛 영토에 대한 수복운동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이성계의 등장, 그의 혁혁한 전공
원나라의 몰락은 고려 정계 개편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삼별초의 항쟁이 실패한 이후로 원나라의 내정 간섭에 시달리던 고려는 다시 국권을 회복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원명 교체기에 고려를 통치한 왕은 공민왕(1351-1374)이었다. 그는 순종 즉위 후 원나라의 통치 기반이 문란해지고 주원장의 등장으로 중국 전역이 일대 혼란에 빠지자 이를 국권 회복의 호기로 여기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먼저 친원파의 거두인 기씨 일족에 대한 숙청 작업에 착수하였다. 당시 기씨 일족의 대표는 기철이었는데, 그의 누이가 원나라 왕실의 제2 황후가 되었고 그 소생이 책봉되어 소종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은 평장정사가 되는 등 고위 관직을 차지하고 또한 자기의 딸을 원의 왕실에 바쳐 고려 왕권을 위협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몰락으로 기씨 일족의 친원 행각은 공민왕과 최영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에 몰려 처형당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공민왕은 원나라가 초기 고려를 속국으로 삼을 때 일본 정벌을 구실로 내세워 개경에 설치한 내정 간섭 기관인 정동행성을 철폐시켰다. 또한 원나라의 연호 사용 금지령을 내리고, 백성들에게는 원나라식 변발을 금하는 등 일대 개혁을 단행하였다.
무엇보다도 공민왕의 국권 회복운동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북진정책이다. 앞서 보았듯이 고려는 개국 이래로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의 옛 영토수복운동을 펼쳐왔다. 그러나 국제 관계의 다변성과 내부 혼란으로 그 운동의 맥이 끊어진 상태였다. 공민왕의 북진정책은 이러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직접적으로는 북쪽에 주둔하고 있는 원나라의 잔류 세력을 처단하지 않으면 언제 남침을 감행할지 모르기 때문에 원의 세력이 약화되었을 때 이를 방비하려는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봤을 때 공민왕의 북진정책은 국권 회복이라는 정치적 목적과 삼국 통일 이래로 끊어진 국운 회복이라는 민족적 사명 의식이 동시에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356년, 공민왕은 우선 원정군을 조직하여 압록강 너머에 있는 원나라의 주요 거점지를 공격하였다. 또한 화령부(영흥)에 설치되어 있던 쌍성총관부를 쳐서 그 일대를 수복하였다. 그런데 이 지역이 바로 이성계의 출생지였다. 이미 그 당시 함경도 일대에서 자체 세력을 키우고 있던 그의 아버지 이자춘과 이성계는 군대를 일으켜 고려 원정군과 합세하였다. 두 사람은 원나라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성계의 선조인 이안사는 원나라가 지배하던 여진족의 터전인 남경(간도 지방)에 정착하여 원나라의 지방관이 되었다. 이안사는 차츰 이 지역에서 기반을 잡게 되어 그의 아들 행리와 손자 춘 등은 대를 이어 두만강 일대와 덕원 지방의 천호로서 원나라의 관리가 되었다. 이자춘 역시 원나라의 총관부가 설치된 쌍성의 천호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성계의 가문은 오랜 시간을 두고 쌍성 일대에서 세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원정군이 총관부를 칠 때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고려 정부는 이성계 부자의 공을 인정하여 나중에 벼슬을 내리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이성계는 역사의 무대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1361년 이성계는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라는 관직을 얻어 함경도 일대에서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이후 이성계는 정식으로 고려 정부에 등용되어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한편 쌍성총관부를 빼앗긴 북원 정부는 요양성으로 도망하여 그곳을 차지하고 있던 나하추(납합출)에게 고려를 칠 것을 요청하였다. 나하추는 원래 원나라의 유신이었는데 고려 말에 심양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장악하여 주로 여진족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나하추는 주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고려 침범을 다소 늦추었다. 중국 유랑민으로 이루어진 홍건적이 강성해져 고려 북방 지역을 침범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하추는 남침을 감행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하추는 홍건적과 고려의 싸움을 주시하여 고려의 힘이 약화되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하추 군대와 고려의 전투가 벌어진 때는 1362년에 와서였다. 이해 2월 나하추의 군대는 지금의 함경남도에 속한 삼살(북청)과 홀면(홍원) 일대를 침범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동북면도지휘사 정휘가 나가 여러번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고려 정부는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여 나하추 군대를 격퇴하라고 명령하였다.
같은 해 7월, 나하추 주력 부대는 홍원 달단동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의 군대는 수만 명에 달했다. 나하추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휘하 지휘관에게 선봉부대 천여 명을 주어 이성계의 군대와 맞서게 하였다. 두 군대는 덕산동 원평에서 접전을 벌였는데 이성계의 군대가 첫 승리를 얻게 되었다. 이성계의 군대는 도망가는 나하추의 선봉 부대를 뒤쫓아가 거의 섬멸시켰다. 이에 격분한 나하추는 덕산동으로 옮겨 전열을 수습하고 전의를 다졌다. 그러나 이성계는 먼저 야음을 틈타 나하추의 주력 부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나하추는 다시 달단동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성계는 집요하게 이를 추적하여 달단동에서 나하추를 격퇴하고 다시 함흥 벌방 지대에서 잔병들을 섬멸하니 나하추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자기 본거지로 도망갔다. 이후에도 동북 지방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여진인들의 반란이 있었으나 이때마다 이성계는 반란을 진압하여 큰 공을 세웠다. 나하추 격퇴와 여진족 반란을 수습한 이성계는 고려 정부의 신임을 얻어 점차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고려 정부가 이성계를 나하추 정벌에 나서게 했던 것은 그전에 이미 다른 전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하추의 침범이 있기 전 해인 1361년에 홍건적의 2차 대규모 침략이 있었다. 이 해 11월, 고려 정부는 서울인 개경을 내주고 지금의 안동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군은 이듬해인 1362년 1월에 총동원령을 내려 개경을 포위하여 수복 작전을 펼쳤는데, 이성계는 이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건적을 쳐서 고려군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1361년에 있었던 독로강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가 있는 상태였다. 이런 연유로 고려 정부는 이성계가 군인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하추 격퇴에 그를 기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하추의 몰락은 뒷날 명나라가 요동 일대에 대한 공략을 구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나하추는 고려 군대와 싸워 진 뒤에 세력이 약화되어 결국 명나라에 투항하였고, 명나라 입장에서는 동북 지방 진출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던 걸림돌을 제거하게 되어 적극적으로 요동 공략에 나섰다. 이렇게 하여 고려 정부는 어느 정도 압록강 일대 수복에 성공하였으나 외침은 여기에서 끊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이성계의 활동도 더욱 분주해졌다.
앞에서 보았듯이 기철의 누이동생은 원나라 순종의 황후가 되어 있었다. 기황후는 고려에서 자기 일족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공민왕에게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원나라에는 고려 출신으로 관직을 얻어 살고 있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최유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고려 내부에서 친원파가 몰락해가고 있다는 말에 초조해 하다가 기황후가 공민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묘한 술책을 썼다. 그는 기황후를 찾아가, 아직 고려에는 내응 세력(대표로는 김용이라는 자가 있었다.)이 있고 게다가 원나라에 충선왕의 아들인 덕흥군(그는 일찍이 중이 되어 원나라에 도망와 있었다.)이 살아있으니 순종의 명에 따라 그를 고려의 새 왕으로 삼아 공민왕을 처단하자고 설득하였다. 기황후는 이를 흔쾌히 승락하여 순종의 허락을 받아내게 되었다. 1364년(공민왕 13년)에 순종은 공민왕을 폐한다고 공포하면서 덕흥군을 새 왕으로 지명하였다. 또한 최유를 정승, 김용을 판삼사사에 임명하는 등 기황후의 청원대로 고려 정부에 대한 내정 간섭을 자행하였다. 순종은 덕흥군 일파에게 요양에 있는 군사를 내주어 고려로 향하게 하였다. 공민왕은 이에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일단 사신을 보내 순종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중간에서 최유가 서신과 예물을 가로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설사 그 서신이 순종에게 도착하였다고 하여도 기황후의 모략으로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 뻔하다.
이렇게 되자 무력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공민왕은 덕흥군의 부대가 남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안우경, 이구수, 이수, 이인임, 정찬 등을 시켜 방비에 나섰다. 양군은 점차적으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제일 먼저 전투가 벌어진 곳은 의주였다. 이 성을 지키고 있던 자는 안우경이었다. 압록강을 건넌 최유의 부대 일만여 명은 처음엔 열세에 놓여 패색이 짙었지만 지원군이 없다는 것을 안 최유는 다시 공략하여 안우경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에 안우경은 안주로 도망갔다. 의주가 함락됐다는 보고에 접한 고려 정부는 최영을 급파하여 도망가는 군사들의 목을 베어 죽이는 등 안주를 중심으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또한 이성계에게 정예 군사 천여 명을 주어 합동작전을 펴게 하였다. 최영과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고려군은 정주에 주둔하여 덕흥군의 부대 동정을 살폈다. 이미 적군은 달천까지 남하한 상태였다. 다음날 덕흥군의 부대는 셋으로 나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에 고려군도 셋으로 나뉘어 중앙은 이성계가 맡도록 했다. 이성계는 적장 몇 명을 활로 쏘아 말에서 떨어뜨리는 등 중앙 돌파에 성공하여 덕흥군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덕흥군의 부대는 고려군의 전술에 말려 거의 섬멸당하고 덕흥군은 간신히 원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공민왕은 다시 왕권을 잡게 되었고 이성계는 또 한번 큰 공을 세운 결과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이 있기 전까지 이성계의 활동은 끊이지 않았다. 마치 이성계는 전쟁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가는 곳마다 승리를 얻어냈다. 명나라의 성립으로 북으로 쫓겨간 기회를 이용하여 만주 지역을 점령할 계획을 세운 공민왕의 명에 따라 이성계는 1369년과 1370년에 걸쳐 동녕부를 공격하였다. 또한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우왕 때에는 이성계는 활동 영역을 남부 지방까지 넓혀 나갔다. 그는 왜구와의 싸움에도 나섰던 것이다. 일본은 원나라의 침범을 받던 14세기 전후로 하여 정치적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일본을 지배하고 있던 호죠 정권이 무너지자 정권을 잡기 위한 내란이 벌어졌는데 아시까가라는 사무라이가 등장하여 막부를 세워 호죠 정권의 빈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내분을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치부의 수단으로 일본 봉건영주들은 인접 국가에 대한 침탈을 일삼기 시작했다. 여기에 오사까, 사까이 등을 중심으로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 집단들이 군대를 세워 가세하였다. 당시 고려는 이러한 일본 영주들이나 상인집단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1376년에는 충청도 공주가 함락될 정도로 왜구의 침범은 약탈질에서 벗어나 중앙정부를 위협할 정도였다. 고려는 지방군을 새로 개편하여 왜구와 대처하게 하였다. 이때 이성계도 남하하여 왜구 토벌에 앞장섰다. 이성계는 1377년(우왕 3)을 전후하여 국내에서 창궐하고 있던 왜구를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크게 물리쳤고 1380년에는 아기바투가 이끄는 왜구를 운봉에서 섬멸하였다. 이때의 전투를 흔히 황산대첩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왜구가 기승을 부릴 때 등장한 것이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과 화통이었다. 바다에서 기선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고려는 수군을 창설한 뒤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과 화통을 응용하여 포를 쏘아 왜구의 선박을 물리칠 수 있었다.)
1382년에 여진인 호바투가 동북면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자 이성계는 다시 북으로 올라가 이를 격퇴하였고 1385년엔 함주로 쳐들어온 왜구를 섬멸시키는 공을 세웠다. 이렇게 하여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때부터 '위화도 회군'이 있던 1388년에 이르기까지 삼십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한 이성계는 드디어 수문하시중이라는 고위 관직에 올라 최영과 버금가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그의 전기에 관련된 기록이 대체로 {고려사}와 {동국병감}에 기록되어 있는데, 후세 관료 지식인들이 이씨 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하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그가 고려말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렇게 북진정책이나 왜구 섬멸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그가 왜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고 말았을까.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전투를 승리로 이끈 그의 전적으로 봐서는 도저히 납득하기가 어려운 대목이다. 이제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회군 직전의 '명과 고려의 관계'와 '고려말 정치경제적 상황'을 상호 관련시켜 종합적인 판단을 내려야할 것 같다.
'위화도 회군' 직전의 국내외 정세
사실 이성계가 활동하던 14세기 중엽의 국내 정치, 경제 상황은 매우 복잡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한반도에 위치한 관계로 정책 수립에 반드시 인접 국가나 종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관계로 국제 관계의 변화에 따라 관료 정치인들의 행각도 여러 편차를 보였다. 지금 흔히 사용하는 '동북아 정세'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이미 고조선 이래로 복잡성을 띤 주변 정세를 집약한 용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역사상 각 시대의 정치 변동은 늘 주변 정세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왔다. 고려 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되기 전에도 화친책과 강경책으로 나누어졌듯이 원명 교체기였던 14세기 중엽 이후에는 친원파와 친명파로 파벌이 형성되었다. 또한 같은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온건과 강경으로 다시 세분화되는 것은 어느 나라 역사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이때의 국내 정치 관료들 사이의 내분은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근대화 이후의 정치가 자본과 맞물려 있다면 근대 이전의 정치는, 특히 중세 시대에는 토지 문제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고려 시대의 민란이나, 조선 시대에 있었던 대부분의 민란은 바로 이 토지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대토지 확대로 빚어진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역대 왕들은 여러 형태의 토지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왕족과 귀족(또는 양반)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한도 내에서 단행된 것이기 때문에 생산의 주체인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소유나 권한이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부분적으로 자영농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이들은 다른 부문에서 수탈을 당하기 일쑤였다. 고려 말기는 이러한 경제적, 계급적 모순이 극대화된 때였다. 918년 건국된 고려는 11세기를 기점으로 전성기를 이루다가 12세기 중엽에 이르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여 정중부의 난으로 비롯된 무신정권을 거치고 원나라의 속국이 되면서 중앙 통제 기능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토지의 겸병이었다. 토지 겸병은 주로 귀족들과 기성관료, 그리고 사원과 지방 토호들에 의해 횡행되었다. 이로 인해 농민 계층은 급격히 분해되어 대지주들의 수탈에 시달려야만 했다. 피해를 보는 것은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사전의 확대로 상대적으로 공전이 점차 감소되어 나중에는 신진관료들에게 줄 토지와 녹봉마저 모자랄 형편이었다. 이러한 대토지 확대 현상(당시 권세가들은 농장식으로 경영하였다.)는 특히 무신정권과 원나라 내정 간섭기에 보편화되어 전면적인 개혁이 없이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비교하자면, 조선 후기인 19세기에 삼정의 문란으로 매년 민란이 일어날 정도로 국가와 농촌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면, 고려 말에는 대농장의 횡포로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협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개혁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던 계층은 역시 신진관료들이다. 고려 말 성리학에 사상적 기반을 둔 신진 세력들은 기존 관료 계층처럼 특권이나 음서제도를 통해 등용하지 않고 정식으로 과거 시험을 통해 나왔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경제적 기반이 미약한 지방 소외 계층들이었다. 이들은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권세가들의 토지 겸병과 침탈에 피해를 입었다.
물론 공민왕은 이러한 경제적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승려 신돈을 기용하여 일대 개혁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공민왕은 1366년, 신돈의 제의에 따라 '전민변정도감'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세신대족 등 대지주가 차지한 토지와 노비들을 본래의 주인에게 반환해주는 정책을 단행하였다. 또한 대지주들에 의해 양민 신분에서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에게도 본래의 신분을 찾도록 해주었다.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반기를 든 것은 당연히 대지주 등 기득권 세력들이었다. 이때 친원파의 핵심인 기씨 일족이 소탕된 뒤였으나 그것으로 매국적 행각을 벌인 모든 계층들이 와해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 뿌리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신돈이 반역 음모를 꾸민다고 중상하여 1371년에 그를 처형하였다. 이렇게 하여 전민변정 정책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때 정도전 등 일부 신흥사대부들이 개혁에 참여하였지만 힘이 미미하여 정치 세력으로 자리잡지는 못하였다. 신돈이 제거된 후 다시 보수 세력들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인임, 염홍방, 임견미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친원파에 속해 있었다.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한 친원파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 토지 겸병에 박차를 가하고 세력 확장에만 힘쓰는 등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이인임 등이 친원적인 주장을 펼친 것은 명나라를 반대하여 국운을 바로세우고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적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들의 개인적인 야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북원이 몰락해가고 명나라의 세력이 한반도 북방 지역까지 미칠 조짐이 보이자 이인임 등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명나라와 처음으로 외교 문제로 부닺힌 것은 역시 영토 문제였다. 명나라는 제주도가 원나라의 점령지이기 때문에 자기들의 땅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명나라는 원나라의 점령지였던 곳을 다시 차지하여 중국을 통일한다는 내용의 구호를 앞세워 영토 확장의 명목으로 삼고 있었다. 위화도 회군의 불씨가 된 요동 침범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어쨌든 명나라는 1374년에 고려에게 제주도를 내놓으라고 위협하였다. 삼별초의 항쟁으로 유명한 이 섬은 당시 원나라의 침공 이후 그들의 말 목장이 되어 몽골 목부들이 아직 잔재하여 있었다. 이들은 본국이 몰락해가자 제주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최영이 이끄는 수만 명의 토벌군이 나서 반란을 평정하였다. 그러자 명나라는 고려에게 말 오만 필을 바치라고 협박하였다. 고려는 강대해진 명나라와 아직은 섣불리 접전을 벌일 수는 없다고 판단, 제주도에서 얻은 말 가운데 일부를 명나라에게 주기로 하였다. 명나라의 사신은 이미 개경에 와 있었다. 사신은 거만한 태도로 일의 진척이 늦어진다고 다그치는 등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이에 격분한 고려의 호송관이 압록강을 건너서 명나라 사신을 죽이고 북원으로 도망쳤다. 이 사건을 빌미로 명나라는 더욱 고려에 대해 강경 태도를 견지하였고 두 나라 사이에 전운이 감돌게 되었다.
한편 고려 정계에서는 이인임 등의 친원파에 대한 일대 숙청 작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조반이라는 지주의 땅을 염홍방의 가신인 이광이 강제로 빼앗았는데, 이에 격분한 조반은 이광을 죽이고 그의 집에 불을 지른 데서 시작되었다. 염홍방은 조반을 반역자로 몰아 옥에 가두었다. 이즈음에 명나라가 고려에 말을 공물로 바치라는 협박을 할 때였다. 처음에는 친원파의 세력에 밀려 미약한 왕권만을 유지하고 있던 우왕(1374-1388)은 최영에게 국내외 문제를 논의하였고 최영은 왕명에 따라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였다. 이때가 1388년이었다. 이후 수탈체제를 반대해온 최영,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 등이 세력을 잡게 되었고 최영은 수상격인 문하시중이 되었고 이성계는 그 밑인 수문하시중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같은 이념을 갖고 친원 세력을 제거한 것은 아니었다. 최영이나 정몽주 등은 고려를 부흥시키고 국토 수복을 하여 기존 체제 내에서 개혁을 주장하였고, 이성계나 정도전은 혁명을 통해 구조적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명분을 지니고 있었다. 최영과 이성계 두 사람은 이인임 등 대농장 소유자들에 대해서는 똑같은 입장을 취했으나 토지 개혁 문제에 있어서는 최영은 다소 온건적이었고 이성계는 급진적이라는 차이점이 있었다. 그것은 연령의 차이에서 비롯된 면도 있지만 최영은 고려 자체를 유지하면서 개혁을 단행하려 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화도 회군 이전을 볼 때 역사 기록에는 두 파벌간에 정치적 분쟁이 될 만한 사건이 보이지 않는 점으로 봐서 이미 두 계열은 동상이몽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위화도 회군은 순간적인 판단에 따라 일어난 쿠데타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말해둘 수 있다. 조선 건국의 공신인 정도전은 9년간의 유랑 생활 끝에 1383년에 동북면 지휘사로 있던 이성계를 직접 찾아간 일이 있다. 이 두 사람은 과연 만나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확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급진적인 변혁에 대해서 논의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성계가 회군 당시 내세운 주장을 분석해보면 그 윤곽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분기점, 위화도 회군
명나라는 영토 확장을 위해 만주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 지역을 넘보기 시작하였다. 1388년 2월, 명나라는 중원을 어느 정도 정비한 다음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겠다고 고려에게 위협하였다. 제주도를 자기들의 땅이라고 우길 때와 같은 명분을 내세워, 이 땅이 원나라 당시에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원이 몰락한 후에는 당연히 명나라가 소유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장하였다. 이미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명나라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는 등으로 매우 긴장된 상태였는데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도사의 관할 아래 두겠다고 통고한 뒤 같은 해 3월에 관리들을 강계에 들여보내자 고려 정부는 이에 크게 반발하였다. 결국 명나라의 전초 기지인 요동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최영을 중심으로 쏟아져 나왔으며 곧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는 바로 고려를 예속시키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당시 고려는 왜구의 잦은 침입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중세사회에서, 그리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군대를 일괄적으로 통솔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고려 정부는 후방의 소홀함을 견지하기 위해 최영을 팔도의 도통사로 임명하여 그에게 모든 군대를 통솔하는 권한을 주었다. 이때가 같은 해 4월이었다. 이에 따라 상대방이 명나라라는 강국인 만큼 상당한 군사력을 갖출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각도에서 군사를 징집, 육만 명에 이르는 원정군을 모으게 되었다. 또한 후방 대비를 위해 세자와 여러 비들을 한양산성으로 옮기고 찬성사 우현보를 시켜 개경을 지키게 한 뒤 우왕과 최영은 서해도로 가 요동 정벌의 태세를 갖추었다.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한 우왕은 창성부원군 조민수를 좌군도통사로 삼아 서경도원수 심덕부, 서경부원수 이무, 양광도도원수 왕안덕 등을 그 휘하에 배속시키고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좌, 우군을 편성하였다. 최영을 중심으로 군대를 둘로 나누어 편성한 셈이다. 그중의 한 부대를 이성계가 총지휘했으니 이성계의 정치적, 군사적 지위가 얼마나 상승되어 있었는가를 엿볼 수 있고, 이성계와 최영은 군사력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1388년 5월,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좌.우군은 10만 대군을 자칭하면서 평양을 출발하여 위화도에 주둔하게 되었다. 위화도는 의주의 압록강 하류에 있는 섬이다. 그런데 이성계의 부대는 장마로 압록강 물이 엄청나게 불어난 것을 알고 도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여기서 이성계는 그 유명한 사불가론을 우왕에게 상소하여 요동 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게 된다. 그 요점은 이러하다.({고려사}에는 출정 전부터 이성계가 이에 대해 주장한 것으로 나와 있다. 또한 계속하여 이성계는 요동 정벌의 불가능성을 상소하였다.)
1)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다. 2)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하다. 3)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는 왜구가 침범할 것이다. 4)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져 무기로 쓸 수 없으며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
그러나 평양에 머무르면서 독전하고 있던 우왕과 문하시중 최영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요동 정벌을 실행에 옮겨야만 했다. 이성계에게 강을 건너라는 어명이 떨어진 것이다. 이성계는 강을 건너든지 아니면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리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회군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개경으로 진격한 이성계 등은 최영의 군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사로잡은 뒤 그를 고봉현으로 유배보내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내고 창왕을 왕위에 앉혔다. 이상이 위화도 회군의 과정을 간단히 추린 내용이다. 그런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그가 내세운 사불가론이 정당한 것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 점은 이성계의 쿠데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대목마다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사불가론 : 정당한 주장인가, 쿠데타의 구실인가
먼저 이성계가 첫번째로 내세운 이소역대, 다시 말해서 조선은 명나라를 칠 수 없다는 다분히 사대적인 명분을 살펴보자.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성계는 북방 지역은 물론 남부 지역에서도 놀라운 전과를 세웠다. 그의 전공만을 살펴본다면 이성계는 당연히 압록강을 건너 요동 정벌에 호응했어야 했다. 그런데 돌연히 명나라를 대국이라 칭하면서 천자의 죄를 얻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말머리를 남으로 돌렸다. 게다가 이성계가 회군 전에 명나라 정부와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더욱 납득이 안가는 이유는, 오랜 수대에 걸친 왕조를 거치면서 원나라의 내정 간섭에 시달려오던 고려가 그 고리를 끊고 간신히 자주권을 회복하고 구강을 수복할 절호의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친명 사대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성계의 회군이 이미 사전에 준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성계가 여러 전과를 올리면서 중앙 관직에 진출하면서 가깝게 지낸 인물들은 앞에서 잠시 언급한 신진관료들이다. 뒷날 조선 건국 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정도전을 비롯하여 조준, 윤소종 등의 인물들과 이성계 사이에 급진 개혁이나 혁명에 대한 논의가 심도있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 신진관료들은 엘리트 계층이지만 세신대족에 비하면 지방 소지주에 불과하여 기득권 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닦아온 신진 세력들은 고려 말기의 사회를 보는 시각이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이들은 유학적 이상국가 실현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이상국가는 안으로는 민본사상과 왕도정치 구현에 있지만 밖으로는 중국을 유교의 종주국으로 여겨 처음부터 필연적으로 사대주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성리학의 기본 이념인 질서의 개념이 구체화된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신분에 의한 질서, 중국과 주변국 사이의 질서를 매우 중요시 여기고 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이성계도 역시 성리학에 심취하게 되면서 명나라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바뀌어 갔을 것이며 따라서 요동 정벌은 그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국운 회복운동보다 유교적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목적이었다. 나중에 조선을 건국하면서 숭유억불 정책을 내세운 것을 봐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이렇게 봤을 때 이성계가 첫번째 내세운 이소역대의 명분은 단순히 쿠데타의 구실이라기보다는 사상적 결실이며,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주장이었다. 그에게는 내부 혁명이 더 중요했다. 조선 왕조의 사대주의는 이렇게 해서 국책으로 지속되었던 것이다.
두번째로 내세운 불가론은,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출병 당시 시점이 5월이므로 분명히 농촌 일손이 한창 바쁠 때임은 틀림없다. 군사를 일반 농민 가운데 징집하여 채웠던 실정으로 봤을 때 일면 그의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이미 전에 농번기에도 군대는 여러 차례 동원되었다. 국가의 존립이 촌각에 달렸을 때 중세사회에서 군대를 징집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만일 이런 병폐를 없애려면 지금처럼 일정한 규정하에 전문적인 군대를 키웠어야 했다. 그런데 조선 왕조에서도 이런 점은 전혀 시정되지 않아 일반 농민들은 여전히 부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것은 봉건적 질서를 유지하는 전근대적인 국가가 갖는 시대적인 한계점이기도 했다. 또한 이성계의 군사들은 그의 오랜 전적으로 비추어 볼 때 사병적인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승리를 얻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전공이 가능했던 원인은 이성계가 지휘관으로서 뛰어난 점은 물론이고 군사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위화도에 머무는 동안 도망가는 군사들이나 병들어 쓰러지는 군사들이 속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전체 전력 면에서 얼마나 타격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이성계는 가을에는 군량미 공급이 수월하니 좀더 기다리자고 건의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성계는 요동 정벌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정벌 시기에 대해 반론을 제시한 셈이다. 이렇게 봤을 때 이성계의 진짜 의중을 알기가 쉽지 않다. 결국 위화도 회군 전후의 정세를 판단해볼 때 이성계는 전부터 급진적인 변혁을 꿈꾸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는 외세와 싸우는 일보다는 우선 국내 개혁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였고, 이에 요동 정벌론이 대두되었을 때 4불가론을 내세워 반대했던 것이다. 이성계가 일단 출정 명령에 복종하여 위화도에 머문 것은 변혁의 주도권을 잡을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세번째로 이성계가 내세운 왜구 침입에 대한 우려는 당시 이미 고려 수군이 창설된 뒤이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또한 지방군 전체가 이 원정군에 동원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왜구에 대처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오랜 전쟁 경험을 갖고 있는 최영 등이 이러한 상황을 소홀히 여겼을 리는 만무하다. 만일 요동 정벌을 빠른 시일 안에 마친다면 다시 원정군을 개편하여 왜구 토벌에 나서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이 점은 당시 다른 부대의 진격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위화도 회군이 있기 전에 니성에서 중앙정부에 올린 보고에 따르면, 이성계와 좌도 도통사 조민수의 군대가 출정했다는 소식에 접한 요동 주둔군은 이미 명나라 군대 정벌에 나섰으니 만일 원정군이 도착하여 도강을 한다면 분명히 승리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환성 원수 홍인규, 강계 원수 이의 등이 먼저 요동에 진격하여 일전을 벌이고 있었고 요동민들은 고려군 환영 준비까지 마쳤다고 하였다. 이렇게 봤을 때 요동 정벌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막강한 홍건적 등을 물리친 이성계가 만일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쳤다면그의 전적으로 보아 명나라는 퇴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봤을 때 세번째 불가론 역시 회군의 변명에 지나지 않다.
네번쩨 불가론인 습기에 활을 사용할 수 없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우려가 많다는 주장 역시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뛰어난 용병술을 지닌 이성계에게 이런 문제는 사실 큰 장애 요소가 아니었다. 오랜 전투 경험을 가진 그로서 우기가 아니라 혹독한 추위가 내습하는 한겨울에도 그는 군사를 지휘한 사람이다. 물론 원정 도중에 도망치는 군사가 생기고 실제로 병에 걸리기도 하였지만 당시로서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일이었다. 오히려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 탈영을 방지하고 위생에 주의를 주어 환자 발생률을 줄여 나가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면 원정에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볼 때, 이 네번째 불가론 역시 회군의 구실인 셈이다. 더욱이 이성계는 이런 내용을 상소함으로써 자기 군사들로부터 더욱 굳은 신임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장터로 나가기 꺼려하는 것이 모든 군인들의 생리라고 봤을 때 그는 이것을 일종의 회군을 성공리에 마치기 위한 세력 규합으로 이용한 것이라는 판단도 가능하다.
결국 네 가지 불가론 가운데 이성계가 실질적인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첫번째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것 역시 사대주의적 발상이라는 점에서 비난을 면키 어렵다. 그러나 이성계는 나름대로 계산이 서있었다. 그는 우선 세력 장악이 급선무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세를 견지할 만한 이념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고 사실 조선 왕조가 성립된 뒤에 이성계는 명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안정적인 국가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이성계의 사대주의는 분명 하나의 정책 차원에서 나온 이념이다. 그러나 이 사대주의는 16세기를 지나면서 껍질만 남은 대의명분으로만 남아 기득권을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위화도 회군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그만큼 과소 평가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사실 고려 말기는 개인 소유의 대농장 확대로 농촌 경제는 파탄 지경에 있었다. 봉건적 국가에서 토지 자체가 국가적 운영이 불가능해지면 그러한 모순은 모든 계층에 확산되어 국가 기강이 흔들리고 결국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이 심화될수록 민중들이 당하는 고통도 한층 깊어져 사회 전반에 동요 세력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고려 말기에는 민중들의 적극적인 저항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의지가 신흥사대부들이나 이성계를 비롯한 신흥 무장들에게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안고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 것이지, 우발적으로 발생한 행위는 아니었다.
이후 과전법을 실시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단행하지만 지금의 복지정책과 같은 농민 위주의 정책을 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봉건적 사회가 갖는 시대적 한계점이지만, 또한 이것이 붕괴되면서 근대화의 길이 열린다는 점에서, 즉 한국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볼 때 조선 건국은 나름대로 봉건질서가 한층 발전되는 전환적인 의미가 있다 하겠다. 결국 위화도 회군은 외세와의 전쟁이나 영토 확장보다는 국가 혁명을 더욱 중시한 신진 세력들의 의지가 반영되어 일어났던 사건이었으며 이로써 한국 역사는 큰 전환점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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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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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둘째 묶음 : 아름다운 순간들
사랑하는 빵을 먹으며 - 피정 일기 중에서
1 사랑하는 제자 세 명을 데리고 타볼산에 오르셨던 주님,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암시하시며 제자들에게 당시의 그 '영광스런 변모'에 대해 침묵을 요구하신 주님, 매일 새벽 밀떡 속에서 변화되시어 제게 오시는 당신의 그 '거룩한 변모'를 체험하면서도 타볼산의 그 제자들처럼 좀 더 뜨겁게 감동할 줄 모르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고 영광의 기쁨에 취했던 그 제자들처럼 저도 당신을 따르는 데 있어 늘 좋은 것 기쁜 것, 영광스러운 것만 선택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고 싶어하는 자인 것 같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선택한다는 것은 당신의 고통까지 선택하는 것이라는 점을 더 깊이 깨우치고 알아듣게 도와주소서.
2 요즘은 새벽에 눈을 뜰 때마다 또 한 번의 부활 축제를 맞이하는 듯 새롭고 기쁜 마음이 됩니다. 성당에서 묵상중에 듣는 시계바늘 재깍이는 소리조차도 생명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삶이란 일회적인 것이며, 한 번 가버린 순간들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놀라운지요. 살아 있는 시간들을 정말 함부로 낭비해서는 안되겠기에 마음이 다급해지기도 합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자신만의 성 안에 갇혀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우쳐주시는 주님, 타볼산에서 제자들이 당신께 엎드려 절한 것처럼 저도 당신께 엎드려 절하겠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저의 구원자이심을 굳게 믿습니다. 세상 끝날 때까지 당신이 함께해주시기에, 그리고 사랑의 성령을 계속 보내주시기에 감히 저같은 '작은 자'도 당신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한몫을 다할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저 또한 당신의 사랑받던 그 제자들처럼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고 전하며 당신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를 노래하렵니다. 살아 있는 동안 매일의 생활에서 저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 기쁨과 평화와 인내, 온유와 겸손과 선행의 증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3 사랑하는 주님, 오늘은 당신 가슴에 기대어 당신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도 요한처럼 저도 당신 곁에 바싹 다가앉아서 당신의 그 모습을 살펴보렵니다. 당신이 지난 날 제게 베풀어주신 무한한 은총과 사랑을 다시 기억하며, 붉은 포도주가 넘쳐흐르는 저의 술잔에 말로는 다 표현 못할 저의 참회의 마음을 눈물로 담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번번히 당신을 배반하고도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발뺌만 하려드는 뻔뻔함을. 당신의 그 깊은 말씀을 절반도 채 못 알아듣고 동문서답하는 이 죄인을 용서하십시오. 오늘은 "주님,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주십시오"라고 당신께 청을 드린 사도 베드로처럼 저도 당신께 제 때묻은 손과 발과 머리를 드리오니 씻어주소서.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주님, 당신이 씻어주신 깨끗한 손으로 저는 당신의 거룩한 두 발을 씻어드리게 하소서, 떠나시는 당신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왜 이리 없습니까. 왜 이리 무력한 자로 남아 있어야 합니까.
"정말 잘 들어두어라." 늘 애절하게 하시는 그 말씀을 잘 듣고 살지 못했음이 오늘은 뼈에 사무치는 서러움으로 저를 아프게 합니다. 제게 주신 극진한 사랑을 돌려받지 못하고 번번히 상처만 받으신 사랑의 주님, 당신이 떼어 주신 사랑의 빵을 먹으며 당신이 저를 위해 행하신 숱한 일과 놀라운 기적들을 생각했습니다. 빵처럼 제 마음에 부풀어오르는 당신의 큰 사랑을 느꼈습니다. 하오나 주님, 당신은 대게 누구십니까? 누구시길래 그토록 큰 사랑으로 저를 늘 이렇듯 당황하게 하십니까? 당신이 너무 큰 사랑을 베풀어주실수록 저는 더욱 사랑에서 멀리 있는 듯한 작은 자의 외로움을 맛봅니다. 오, 주님, 오늘은 당신이 베푸신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날, 저의 이런 마음을 기도로 바치오니 받아주소서. 사랑이 부족해서 가난한 저이오나 저의 전 존재를 봉헌하오니 받아주소서.
4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듯이 지금은 제 마음의 성으로 조용히 들어오시는 주님, 아무래도 전 당신이 오시는 길에 깔아드릴 것이 마땅치 않아 부끄럽습니다만, 못나고 초라한 제 마음 그대로를 깔아드리렵니다. 오늘 당신의 눈은 제게 잃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따라와. 난 네가 필요해. 고통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네게 견딜 힘을 주겠다"라고.
주님, 오늘은 몹시 고단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또 새 힘을 주셨기에 감사드립니다.
5 풍랑을 잔잔히 하신 나의 주님, 제 스스로 감당키 어려운 풍랑이 제 마음의 바다에 뜬 믿음의 배를 파산시키려 할 때, 당신이 그 풍랑을 가라앉혀주소서, 그러면 제가 살겠나이다.
가까이 오시는 당신을 제가 알아뵙지 못하고 겁을 먹고 있을 때,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이렇게 말씀하여 주소서, 그러면 제가 마음놓고 삶의 거친 파도위를 걸어가겠나이다.
종종 한적한 곳으로 피해 몸을 숨기시고 기도하신 주님, 제가 사람들과 일 사이에서 마음의 시달림을 받을 때"잠시 나와 함께 외딴 곳으로 가자"고 말씀하여 주소서, 그러면 제가 다른 일 제쳐두고 당신과 함께 기도의 산으로 오르겠나이다.
6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금 곧 이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이 것이 가장 진실한 저의 기도임을 다시 알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당신을 믿습니다," 그저 상투적으로 이렇게 밖에는 기도할 줄 몰랐던 제가 메마름이 슬퍼져서 오늘은 실컷 울었습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남은 날들을 오직 이렇게만 기도하게 하옵소서. 저는 이제사 비로소 사랑이신 당신을 사랑으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말 속엔 끊임없는 감사와 찬미의 기쁨도, 마르지 않는 참회의 눈물도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루의 첫 시작과 마지막 기도는 오직 이것으로 충분하게 하옵소서.
<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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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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