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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36 호
단기 4341. 11. 22 (음력 10. 2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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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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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매일 2009 신춘문예
광주매일신문이 2009년도 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합니다. 광주매일신문 신춘문예는 침체된 지역 문단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지난해부터 소설 분야만을 선택, 특화했습니다. 문학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패기, 광주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담아내십시오. 한국 문학의 중심으로 성장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참신하고 역량있는 신인들의 많은 참여 기대합니다. ▲공모부문 및 고료 단편소설(원고지 80매 안팎)^당선작 1편, 상패와 고료 300만원 ▲원고마감 : 2008년 12월 20일까지 도착분에 한함 ▲보낼곳 :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1-21 광주매일신문 편집국 문화여성부(062-650-2065∼7) ▲당선작 발표 : 2009년 1월1일자 ▲주의사항 응모작은 다른 지면에 발표되지 않은 순수작품이어야 함. 작품의 앞·뒤에 주소, 성명(필명일 경우 본명 명기), 나이, 전화번호 등 표기. 당선 후 표절 또는 중복 입상이 밝혀지면 당선을 취소함. 당선작 없는 가작의 경우 당선작의 반액을 지급함. 응모 작품은 반환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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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일보 제21회 신춘 무등문예
예비작가 여러분 지금 도전하세요
무등일보는 한국문학을 이끌어 나갈 참신하고 역량있는 신예작가를 찾습니다. 모집분야는 시·단편소설·동화 등 3개 분야입니다.
올해로 21회를 맞는 신춘 '무등문예'는 그동안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 예비작가들의 등용문으로, 지역문학의 전통을 잇는 작가 등용문으로 기여하는 한편 등단작가에는 문단 주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21세기 한국문단을 이끌어 나갈 패기와 의욕이 넘치는 신인들의 많은 응모 바랍니다.
공고 부문 및 당선 고료
▲시(3편 이상 매수 제한 없음)=100만원
▲단편소설(원고지 80매 안팎)=200만원
▲동화(원고지 30매 안팎)=100만원
◆원고마감=2008년 12월 20일(당일자 소인 유효)
◆보낼 곳=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동 1180번지(BYC빌딩 7층)
무등일보 신춘문예 담당자앞(우편번호 502-270)
◆당선작 발표=2009년 1월1일자 무등일보 지면
응모요령
1.응모작은 다른 지면에 발표되지 않은 순수창작품이어야 하며 정확한 주소와 전화번호 및 나이를 밝혀야 합니다.
2.응모작품은 일체 반환하지 않습니다.
3.표절이나 모사로 밝혀질 경우 당선을 취소합니다.
문의:무등일보 홈페이지(www.mdilbo.com)나 전화 062-606-7741·7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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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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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많이 용서하되 자신은 결코 용서하지 말라.(푸블릴리우스 시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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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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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짐승이름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이 물도곤 어려웨라/ 이 후론 배도 말도 말고 밭갈기만 하여라.(장만)
세상살이가 그리 쉽지 않음을 드러내는 옛사람의 시조다. 새해를 맞아 처음으로 양의 날(上未日)이 되면 전남 일부 어촌에서는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나가지 않는다. 양의 걸음걸이나 울음소리가 조금은 방정맞은 데가 있어서다. 제주 쪽에서는 미불복약(未不服藥)이라 하여 아픈 사람이 약을 복용하지 않는다는 풍속도 있다. 설령 약을 달여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 효험이 없다고 믿는다.
한편, 이날에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탈이 없다고 믿는 곳도 있다. 그것은 양의 외모와 성질이 온순하기에 그러하다. 여기엔 양이 갔던 길로만 되돌아오는 버릇도 한몫을 했겠다. 윷놀이에서 도·개·걸·윷·모 가운데 ‘걸’에 해당한다.
양은 무리를 지어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서로 암컷을 두고 싸움질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양은 평화를 상징하기도 하는데, 어쩌다 한번 싸움이 붙기 시작하면 뿔로 무섭게 공격한다. 이 때문에 양의 탈을 쓴 이리란 말이 생겨난 성싶다. 말하자면 각축(角逐)을 한다는 말이다.
갑골문으로 보면, 양(羊)은 형성글자로서 숫양을 앞에서 바라보고 그린 글자와 같다. 양은 소와 마찬가지로 신에게 제수로 바치던 때가 있었다. 죽지 않으려는 양(trago)을 잡아 신의 제단에 바쳐 비극의 말미암음이 되었던 것을.
정호완/대구대 교수·국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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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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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庭 - 박목월
뜰을 쓰는 대로 가랑잎이 비 오듯 했다.
마른 국화 향기는 차라리 섭섭한 것.
이, 쓸쓸한 뜰에 구름은 한가롭지 않다.
저, 어지러운 구름 그림자.
반생을 덧없이 보내고
나머지 한나절을 바람이 설렌다.
산에는 찬 그늘이 내리고
새들도 멀리 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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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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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 김재숙
하늘을 날던 학이 꽃으로 벙근 건가! 하늘에 놀던 선녀 떨구운 자락인가 구천(九天)을 맴돌아 피는 햇살 고운 꽃구름
부리처럼 다문 입을 못내 열어 웃는 얼굴 새 봄빛 듬뿍 안고 눈이 시린 순결한 볼 높다란 하늘 가르며 향기 흩는 종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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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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曲江 - 杜甫 - 1
一片花飛減却春 風飄萬點正愁人
꽃잎 한 장 날려 봄날은 가고 흩날리는 꽃보라에 시름만 깊어
且看欲盡花經眼 莫厭傷多酒入脣
꽃이야 피었다 금새 또 지는 것 병 많은 몸이라고 술 마시기 주저하랴
江上小堂巢翡翠 苑邊高塚臥麒麟
강 위 작은 정자엔 물총새 깃들고 커다란 무덤 앞 기린상은 누워있네
細推物理須行樂 何用浮名絆此身
누가 뭐라 해도 즐김이 옳은 것을 쓸데없는 뜬 이름에 몸을 매이리
曲江 - 杜甫 - 2
朝回日日典春衣하여 每日江頭盡醉歸라
조회에서 돌아오면 날마다 봄옷을 저당 잡혀, 매일 곡강 가에서 만취하여 돌아온다.
酒債尋常行處有하고 人生七十古來稀이라
몇푼 안되는 술빚은 가는 곳마다 있고, 잘살아야 인생 칠십년은 예부터 드문 일이라네.
穿花?蝶深深見하고 點水*청정款款飛라
호랑나비 꽃 사이를 숨바꼭질 하듯 날고, 물잠자리 강물 위를 스치며 유유히 난다.
傳語風光共流轉하여 暫時相賞莫相違옷을
봄 경치여 ! 우리 모두 잘도 어울려, 잠시나마 다툼없이 賞春의 기쁨 나누세나
曲江: 장안의 동남쪽 옛 한나라 궁실유원지 청정 : 잠자리 청, 잠자리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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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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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3 -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제3장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
욕망의 추구는 참된 인격의 형성을 방해하는가
욕망이란 과연 자기발전을 위한 동력인가 아니면 도덕성찰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욕망을 버린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 김세서리아(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성균관대 강사)
어느 마을의 시장에 사람의 마음을 찍는 사진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유명한 정치가를 찍었더니, 돈 다발이 찍혔습니다. 돈 많은 사장님을 찍었더니, 술과 여자가 찍혀 나왔습니다. 어떤 남자는 늑대가 찍혀 나오고 어떤 여자는 여우가 찍혀 나왔습니다.
-정채봉, '내 가슴 속 램프'중에서
돈, 술, 성욕....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욕망을 만나며, 그 중 더러는 충족되기도 하고, 또 더러는 좌절되기도 한다. 과거의 많은 성현들은 우리에게 욕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보다는 욕망에 대한 집착은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것으로, 사람은 욕망을 채움으로써가 아니라 욕망을 버림으로써 인간다워질 수 있음을 말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변의 많은 이야기들이 내포하는 '욕망을 과도하게 추구할 경우 벌을 받게 된다.'는 교훈적 메시지가 그리 낯설지 않다. 이는 우리가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욕망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늘 교육받고 또 자기를 억제하는 방식으로 생활하는 것에 잘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우리 모두는 욕망이 자기 몸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는 데 방해가 된다고 인정하는 것에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다. 때문에 인간의 욕망이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다가가면 없어지는 것이며, 그래서 그것을 좇는 삶이란 허망한 삶이라고 하거나 또는 욕망의 추구는 인간이 바람직하게 사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라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 속에서 생활에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는 것, 자기 발전의 추동력이 되는 것 또한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난치병에 걸린 환자에게 삶에 대한 욕망이 없으면 치료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은, 욕망이 꿈이 되고 목적이 됨을 보여 준다. 먹고 싶은 욕망에서 좀더 나은 맛을 개발하게 되고, 알고자 하는 욕망에서 학문의 발전이 이루어진다. 또한 자신을 완전한 주체로 세우고자 하는 욕망에서 욕망의 충족은 오히려 자기 발전의 힘이 된다. 비록 욕망하는 대상을 얻고 난 후에 여전히 남는 허망함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얻으려는 과정에서 자기 삶을 조금씩 상승시켜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욕망한다는 행위는 끊임없이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낳고 객체에 대립하고 있는 주체를 구성한다. 이는 욕망이 항상 '나는 무엇을 욕망한다.'는 것의 형태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욕망은 분명 나를 나로 있게 하는, 그리고 인간을 고양시키며 인간을 인간이게 형성시키는 발전적 추동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들 속에서 우리는 욕망이란 것이 과연 자기 발전을 위한 동력인가? 아니면 도덕 성찰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 욕망을 버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등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욕망과 도덕의 관계에 대한 유가철학의 쟁점들
욕망이 인간다운 삶을 방해하기도 하고 또 자신의 삶을 고양시키는 것이기도 하다는 논의로부터 우리는 단순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욕망을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으로 구분지어 볼 수 있다. 여느 도덕 철학에서와 같이 유가철학에서도 욕망은 도덕적 문제를 거론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이제 유가철학에서 욕망에 관한 담론들을 고찰하는 방법을 통해 욕망과 도덕 간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전체 유가철학사를 통해 볼 때 욕망에 관한 담론은 때로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때로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이해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같은 욕망에 대해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일까? 아니면 욕망의 범주를 서로 다르게 상정하고 있는 것일까? 유가철학에서 욕망에 관한 담론을 구성하는 기준들은 대체로 몸과 마음에 관한 이해, 공과 사의 문제 등과 연관되어 있다. 유가철학에서 몸과 마음의 관계, 그리고 도덕과 욕망의 관계 설정은 시대나 사상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는데, 그것은 크게 다음의 두 범주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마음이 몸을 주재한다는 전통 유가철학의 입장이다. 이러한 관계의 형성은 사에 대한 공의 절대적 우위라는 사고와 연관되어 있었다. 즉 사적인 욕망의 발생은 나의 몸과 연관하여 생겨나며, 때문에 사적인 욕망을 만들어 내는 몸은 공동체의 안녕을 위협하는 악으로 흐를 위험이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사고에서는 대체로 욕망(몸)이 도덕과 대비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도덕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욕망은 되도록 적어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마음이 몸을 주재한다는 유가의 전통적 사고에 동의하면서도 몸의 중요성이 마음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서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주목받게 되고 따라서 개체, 주체에 대한 문제들이 몸과 연관되는 방식으로 설명된다. 이렇게 몸을 긍정하는 이해방식은 몸에서 생겨나는 욕망 그 자체가 악이 되거나 또는 도덕적인 몸을 이루는 것과 대치되지 않는다.
1)공동체 질서를 위협하는 나쁜 욕망 물리치기 : 욕망을 되도록 적게 하는 것이 도덕적 몸을 이루는 방법이다.
전통 유교사회에서는 개체를 중시하거나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의식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등의 관계가 중요한 문제로 나타나며, 이때에 나의 몸은 개체로서의 존재로 인정되지 않는다. 부모님이 물려 주신 몸을 잘 보존하는 것이 효의 근본이라는 유가적 효의 논리는 나의 몸이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이다. 따라서 전통적 유가철학의 이념 속에서 사적인 욕망이란 공동체의 삶의 조화를 위협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몸이 지향하는 사욕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기도 하고, 욕망을 되도록 적게 하는 것이 인간의 선한 본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임을 말하기도 한다. 유가철학에서는 공적 영역을 절대적 우위로 상정하는 속에서도 사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생리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에 대해 전면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욕이나 금욕주의가 아닌 과욕, 절욕을 강조한다. 하지만 더욱 근원적인 본질을 도덕적인 것에 두기 때문에 결국 생리적, 감각적 욕망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인간의 생물학적 몸과 욕망은 '사적인 것'과 연관되면, 따라서 인간의 욕망은 절제해야 되거나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몸과 욕망을 좀더 밀접한 관계로 파악하면서 그것을 도덕적인 것과 명확하게 구분하여 설명한다. 따라서 인간의 몸으로 인해 사사로운 욕망이 생기게 되고 그것은 도와 함께 합치하기 어렵다고 하거나, 사람에게 몸이 있음으로써 눈, 코, 귀, 입이 사욕에 연루되어 예에 위배되고 인을 해치게 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렇게 몸과 욕망을 연관짓고, 도와는 대치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에는 몸이 산출하는 욕망을 억압하는 성향이 다분히 내포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성리학적 구도에서는 배고플 때 먹는 것이나 옷 입는 것 자체는 인정하지만 좀더 맛있는 것을 찾는다거나 고운 베옷 또는 고급 털옷을 찾는 것과 같은 일은 인욕(사욕)이 된다. 성욕에 관한 문제에서는 이러한 관념이 더욱 심화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굶어죽는 일보다 절개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나 과부의 재가 금지 등이 주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사회구조가 비교적 단순한 사회에서는 인간의 욕망의 종류도 단순하게 나타나며 따라서 이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점차 사회 발전이 가속화되고 사회가 복잡하게 변해감에 따라 인간의 욕망구조는 다양해지고 주체, 개체에 대한 인식도 싹트게 된다. 이러한 속에서 현실적으로 없앨 수 없는 욕망을 없애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설득력을 확보할 수 없으며, 위선이 될 수밖에 없다.
2)좋은 욕망 길들이기 : 욕망을 인정하는 것은 전체에 매몰된 '나(주체)'를 찾는 길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 잃어버린 나의 얼굴아......" 우리 안에 매몰되어 있는 나의 존재를 꼬집은, 꽤 오래 전에 유행했던 가요의 한 대목이다. 실제로 우리는 내 부모, 내 형제보다는 우리 부모, 우리 형제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우리라는 '관계 안에서의 나'의 존재가 '개별적인 나'의 존재보다 더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관계 속의 나는 개별적으로 고립된 나를 만들어 내지 않음으로써 원자화된 개인을 창출시키지 않는다는 장점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의 존재란 있지 않고 그래서 내가 주체적 삶을 살 수 없다는 비극적 결말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이러한 점을 주목하고 인간의 주체성, 개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변화가 유교 안에서 인식됨에 따라 '윤리적 관계'(삼강오륜), '공동체'가 절대적으로 우선시되는 논의로부터 개인적인 욕망, 행복에 관한 논의로의 전이가 서서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사회의 악을 제거하려는 일련의 노력들은 그러한 사회악의 발생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간의 몸, 욕망, 도덕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창출되었다. 따라서 맛있는 것을 추구하고, 좋은 소리를 탐하고, 편안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는 측면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식욕이나 성욕 같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데 일단 동의하면서도 되도록 욕망은 버려야 할 것으로 상정하는 전통적 입장과는 달리, 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자기 몸의 안녕을 위해서 욕망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욕망 추구는 긍정적인 시각에서 검토되었다. 곧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유기적 강령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기는 하지만 몸을 단련하여 도덕적 몸을 이루는 것 이외에 자기 몸을 편안하게 할 것을 말하면서 몸의 생리적 욕망에 대해 적극 인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고 속에서는 욕망의 대상이 어떤 것이든 자기 주체성과 연계되고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자아를 실현하는 욕망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옷 입고 밥 먹는 일 자체가 윤리적인 것이 되기도 하고, 자기 창고에 곡식을 쌓아두는 것이나 자기 학문의 진취를 위해 공부하는 것 등 그 자체가 도덕적이고 인간의 본래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 순수한 것이 된다. 때문에 자기의 구체적 상황을 반영하는 욕망의 문제를 떠나 강상, 윤리의식 등에 사로잡히는 것은 오히려 위선이며, 인간의 욕망에서 나오는 것은 생명의 보존과 성장에 관한 일이 아닌 것이 없다. 이러한 속에서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유지하기 위한 제반 노력이 불가피하게 요청되며, 인간의 욕망은 이 같은 노력의 구체적 표현이 된다.
욕망의 절제와 도덕적 주체 형성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분명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원동력임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때로는 부질없는 것처럼 보여지는 욕망-예컨대 새처럼 날고 싶다거나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등의 욕망-을 통해서 비행기를 발명하기도 하고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생명체의 복제를 가능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갖는 기본적인 욕망에서부터 자아 실현을 위한 좀 더 사회화된 욕망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는 분명 인간의 삶을 고양시키는 그 무엇이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욕망이 도덕적 문제로 설정되는 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 동안에 도덕군자들이 억눌러야 한다고 그리도 절실히 외쳤던 것은 무엇일까?
식욕이나 성욕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그리고 인류를 번식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것이다. 때문에 도덕철학자들도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은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단순히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인간 생명과 직결된 욕망 이외에도 명예욕이나 성취욕, 소유욕 같은 욕망이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어떤 의미로는 기본적인 식욕, 성욕보다도 더 중요하게 인식된다. 따라서 아무리 배고픈 거지라도 밥통을 발로 차거나 밥을 던져 주는 행위에 대해서는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 이는 욕망이 바로 자의식, 자기 주체성 등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며, 이 때문에 욕망의 문제는 자기를 도덕적 주체로 세우는 문제와 직결된다. 그런데 욕망의 문제가 도덕의 문제로 되는 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들이 성취욕, 명예욕, 소유욕에 편입된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나의 욕망을 충족하는 문제와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타인의 욕망을 억압해야 하는 상황, 이 때문에 욕망은 도덕철학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여기에서 욕망은 억압되거나 절제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된다.
기본적인 욕망으로 우리는 흔히 식욕과 성욕을 거론한다. 그런데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제과점 앞을 지나다 맛있는 빵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유리창을 깨고 그 빵을 꺼내거나 멋지게 차려입은 여성이 지나간다고 해서 그 여자를 성희롱 또는 성폭행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욕망의 과도한 추구가 공동체 삶의 안녕과 조화를 깨뜨리는 위험요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욕망이 타인의 삶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의 삶만을 지향하는 경우를 경계하고, 개인의 욕망을 정당한 것으로 존립시키기 위해서 타인의 삶에 대한 존중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욕망이 경계되어야 하고 절제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생명을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것과도 직접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밥을 잔뜩 먹고 그대로 누워 버리고 싶은 욕망, 당근, 시금치는 먹기 싫고 초콜릿, 아이스크림만 먹고 싶은 아이의 욕망, 이러한 나의 욕망을 무한히 추구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정말 인류가 추구하는 근본적인 유토피아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저런 욕망을 조절하지 않은 채 먹고 싶은 대로 먹는다거나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목으로 과음하거나 담배를 많이 피우거나 하는 방식으로는 나의 생명을 결코 건강하게 보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는 자기 욕망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를 통해 자기의 건강을 지키도록 적당한 양의 음식 섭취와 적당한 양의 운동을 하도록 했다.
공동체의 안녕을 도모하고 나의 삶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개인의 욕망은 적당하게 절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욕망 절제의 필요성이나 욕망을 절제하기 위한 어려움은 자기 내에서의 싸움으로 전개된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문제의 설정은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 선에서 거론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지배하는 선에서 설정된다. 즉 도덕적 몸의 완성은 금욕주의와 같이 욕망을 제거하는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잘 절제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욕망을 절제한다는 것은 즐기지 않는다거나 되도록 적게 즐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욕망의 절제를 배워야 하는 까닭은 적은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이 가지지 못했을 때 적은 것을 가지고도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을 절제한다는 것은 되도록 욕망을 덜 추구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많이 추구하는 속에서 공동체의 삶과의 조화를 생각하는 것이며, 이러한 삶 속에서 나는 주체가 된다.
욕망을 추구하는 것의 목적은 배부르면 토해 내서 허기를 산출하거나 목마르지 않으면 짠 간장을 먹어서라도 갈증을 만들어 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끝을 모르는 욕망의 추구는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욕망을 통제하는 방식이 일률적으로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것은 절제가 아니라 금욕이며, 자제가 아니라 무능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절제란 자신에 대한 욕망의 작업이며, 인간의 도덕적 삶을 위한 필수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이러한 한에서 욕망을 절제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에 대하 배려'라고 말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한 욕망을 통제하고 조절하고 그것들의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나를 주체로 만드는 것이며 나의 참된 인격을 형성하는 길이다.
참고 문헌
M. 푸코, "성의 역사", 나남출판, 1990. 김교빈, 이현구, "동양철학에세이", 동ㅋ, 1993. "시대와 철학", 제15호, 1997. 이현구 외, "박물관에서 꺼내 온 철학 이야기", 우리교육,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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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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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4. 운명을 점치는 스님
이쯤 되면 나로서도 더 이상 할말이 없다. 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실은.... 제가 사주를 볼 줄 모릅니다.” “아니, 스님은 유명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며칠 전 제가 TV에서도 뵈었고, 신문에서도 뵌 적이 있는데.... 유명한 스님이 정말 그런 것도 모르십니까?” “....” “그렇다면 왜 신문 지상이나 TV에 나오시는 겁니까?” 그 기사 분은 백미러를 통해 몹시 의심스런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서 가장 많이 버는 기사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지난 여름. 동화사에 볼일이 있어서 동대구역에 내렸을 때였다. 막 택시를 타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저, 누구시더라?” “학교에서 뵈었습니다.” 학교란 말은 교도소 재소자들에게만 통하는 ‘감방’을 의미하는 은어다. 나는 잠시 주춤했다.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가 말을 이었다. “삼중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저, 동화사에 가는 중인데....” “그럼 스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미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완강하게 내 팔을 잡아 끌었다. 그의 한쪽 팔을 보니 문신과 흉터 자국이 선연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는 택시 영업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멀리서 나를 알아보고 달려온 것 같았다.
“스님, 요금이 얼마인지 아시지요?” “글쎄요....”
역에서 동화사까지는 먼 거리라. 택시들은 대부분 미터기를 꺽지 않고 협정된 요금으로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내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 짐작했던지 그는,
“삼중 스님께는 제가 1만8천원만 받겠습니다. 조금 싸게 해드리는 겁니다.”라고 말하면서 싱긋 웃어 보였다. 나는 솔직히 말해 약간 긴장이 됐다. 30년 가까지 교도소에 드나들면서 많은 이들이 그 곳에 들어온 사정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지켜 보아 온 사람이다. 교도소가 사회와 격리된 장소라곤 하나 그 곳도 사람이 사는 곳 이긴 매한가지다. 그 곳도 염연하게 질서가 있고 온정이 있다. 또 죄를 지어 교도소에 들어왔다고는 하나 참혹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인간적으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선량한 사람도 많다. 사회에서 큰 죄를 지었지만 그 안에서 좋은 말씀을 듣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참회하고 깊이 반성하면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러나 막상 복역을 마치고 나면 갈 곳이 마땅치 않아 방황하게 되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가 떠나고,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 줄 가정조차 이미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있는 일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교도소안에서 다졌던 결심과 희망은 어느새 잿빛이 되고 살아갈 의욕마저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일자리를 기대하며 나를 찾아오는 이들도 종종 있다. 그러한 그들의 가슴 속에 자리 한 실의와 실망, 또 현실에 대한 분노는 그 얼마나 클 것인가. 나로선 힘이 다하는 한 그들을 돕고 싶지만 이는 마음뿐, 아쉽게도 별다른 도움조차 주지 못하는 때가 많다. 때론 내 자신이 이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하고 적잖게 마음을 다친 적이 있기도 하다. 이들의 어려운 입장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연민의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 내 마음이 그처럼 활짝 열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이란 사랑에 웃기도 하지만 그러한 사랑 때문에 그만큼 괴로워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운전석 앞을 보니 엄마와 아이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내가 유심히 쳐다보자,
“스님, 제 아내와 딸입니다. 예쁘지요?”하고 그가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순진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요, 폭력 전과로 15년 동안 일곱 번씩이나 학교에 들락거린 사람이랍니다. 허나 이젠 마음 고쳐 먹고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힘들 때마다 저 사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름이 어느새 사라지고 새 힘이 솟구친답니다.”
나는 잠시 사람을 믿지 못하고 경계하는 마음을 가졌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런 내 마음을 그가 눈치챈다면 얼마나 언짢고 실망을 할까 생각하니 갑자기 그에게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운전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약 2년 됐습니다” “대단하십니다. 그래, 어떻게 이 일을 하시게 됐습니까?” “취직을 하려고 해도 전과자를 누가 받아 주기나 해야지요. 스님도 아시다피시 이 사회란 것이 한 번 전과자가 되면 괜히 경계를 하고 사람을 자꾸 의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예 취직은 포기하고 이 길로 들어섰지요. 아무튼 남의 눈치 안 봐 좋고, 수고한 만틈 정직하게 보수가 돌아오니 좋고.... 그래서 이 일을 하게 된 겁니다. 처음에는 그저 임시방편으로 하게 되었는데 하다보니 일이 좋아지더군요.”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저보다는 못난 남편을 믿고 기다려준 제 아내가 더 고생하고 살았지요. 교도소를 마치 제집처럼 드나들었으니까요>.” “교도소에 들어온 사람들을 보면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새롭게 살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지요. 그러나 막상 사회에 복귀하면 또다시 범죄의 유혹에 빠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악순환을 보며 늘 안타깝게 생각해 왔습니다.” “스님,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건 이 사회가 받아 주지 않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마음을 다지고 결심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먹고살아야 하는데, 일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또 지를 짓게 되고 마는 거지요. 저 역시 수없이 체험한 일입니다.” “그럼 먹고 살만은 합니까? 이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닌데....” “한 달에 3백은 족히 법니다.”
순간 나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3백만 원이라! 이는 일반 개인 택시도 벌수 없는 큰 액수가 아닌가. 영업용 회사택시의 경우 한 달 월급 5,6십만 원에다 약간의 수당이 더 붙어 1백만 원 가량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여느 기사의 세 배가 되는 액수인 것이다.
“정말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분명 이 대한민국에서 돈을 제일 많이 버는 택시 기사일 거요! 그 비결이 뭡니까. 나도 좀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그가 흰 이를 드러내면서 활짝 웃었다. “스님, 비결이 분명 잇지요. 가르쳐 드릴까요?”하더니, 잠시 있다가 말을 이었다. “택시 기사는 첫째, 잠이 없어야 합니다. 졸다가 까딱하면 사고 나기 십상이니까요. 둘째, 체력이 좋아야 합니다. 운전이라는 게 겉보긴 쉬워도 계속 한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힘이 많이 드는 노동이 아닙니까. 잘 먹기도 해야 하지만 저는 선천적으로 기본적인 체력이 있어서 그래도 낫습니다." “그럼 세 번째는 뭡니까?”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점은 운전을 좋아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된 이 일을 견디기 어렵지요.” 나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운전이지만 이 일은 끈기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지요. 전 남들 쉴 때도 쉬지 않고 운전을 하지요. 일주일에 단 두 시간 밖에 쉬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지나치리만큼 열심히 일하시는 겁니까? 적당히 쉬면서 해도 될 텐데.” “빚을 갚아야지요. 15년간 감옥에 들락거린 저 때문에 몸도 마음도 무척 고생했던 제 아내를 위해서 입니다.”
나는 놀라웠다. 그 동안 자신을 위해 기다려 준 아내에게 빚을 갚고 또한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이처럼 열심히 뛰는 사람이 있다니! 그가 새삼스럽게 우러러 보였다.
“대단히 훌륭하십니다. 이처럼 성실하게 사시니 말입니다.” “전 오히려 스님에게 고맙고 또 늘 손님들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하고 삽니다. 제 차를 타는 손님은 저를 도와주시는 분이니 그분들에게 늘 감사하면서 살아야지요. 스님 말씀대로 저도 이 일에서 꼭 성공하고 싶습니다.” “암요, 부디 성공하셔야지요.”
사회에 나와서 잘 적응해 열심히 사는 그의 모습이 퍽 미덥게 여겨졌다. 내가 교도소에서 강연을 할 때 재소자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사회에 나가 성공하려는 마음을 가져 달라는 것이다. 사회에서 무언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그 다음엔 성공하겠다고 하는 의지를 지녀야 또다시 죄를 짓지 않고 교도소로 되돌아오는 일이 없다고 강조해서 얘기한다. 그러나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 소외된 이들이 예전처럼 다시 사회에 적응한다는 것을 결코 쉽지 않을 일이다.
“그간 어려운 고비가 무척 많았겠습니다. 안 보았지만 충분히 상상이 갑니다. 그래도 이처럼 잘 극복하고 사시니, 내 마음이 퍽 기쁩니다.” “스님, 언젠가 ‘일체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마음 한번 바꾸고 나니 사는 게 참말 즐겁습니다. 진작에 이랬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요!” “그래서 저는 매일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폭력으로 얼룩진 거짓 인생이었지만 앞으로 사는 것은 진짜 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예전의 저처럼 폭력이나 휘두르고 십게 살려고 하는 젊은이들이 손임으로 타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전 반드시 충고를 해줍니다. 저처럼 함부로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말라구요.” “한 번 죄를 짓기는 쉬워도 거기서 빠져 나오려면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한 법이지요.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압니다.”
그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생각났다.
‘사람들 앞에서 죄를 행하였을지라도, 뒤에 그치고 침범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세상을 밝히니, 달에서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동대구역에서 우연히 만났던 사람, 달리는 차 안에서 나눈 잠시의 대화였지만 나는 그를 잊을 수 없다. 그는 마치 구름이 흩어지고 나면 나타나는 밝은 달처럼 나의 마음을 감동하게 했고, 주위의 이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 오늘도 변함 없이 대구 시내 거리에서 손님을 태우고 어디론가 열심히 달리고 있을 씩씩하고 건강한 그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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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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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4. 무신정권시대의 민란 : 군사정권 타도와 신분 해방을 위하여 (2/2)
명학소민의 반란(1176년) : 신분해방에서
정부타도로서북지방에서 시작된 민란은 점점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특히 조위총의 반란이 진행되는 동안에 이에 자극을 받은 중부지방의 여러 곳에서 민중 봉기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 마침내 공주를 중심으로 농민들과 천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망이.망소이가 일으킨 반란이다.(이 반란은 조위총의 반란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176년 1월에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반란이 당시 특수행정구역이었던 소를 배경으로 해서 일어났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따라서 공주 명학소민의 반란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고려 지방제도의 하나인 소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소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는 설과 다음은 고려시대에 와서 만들어진 지방제도라는 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소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외로 해도 될 듯하다. 중요한 것은 소의 기능이 지배 수단의 일환이었으며 이것이 무신정권의 폭압적 상황에서 붕괴의 조짐을 보였다는 점이다. 즉 소는 다른 지방제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심하게 수탈 대상이 되었던 것이며 그만큼 소에 속한 백성들의 반발심은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소가 갖고 있었던 가장 큰 기능은 특수 공물 담당이었다. 여기서 생산된 공물은 생산자와는 전혀 상관없이 상층부에 유입되었고 그 공물의 양 역시 중앙정부나 관리들이 요구하는 대로 조정되었다. 고려 지방제도의 핵심은 현에 있다. 이는 주로 지방의 동족이 집단을 이루고 사는 풍습에 따라 신분과 계층을 고려하여 편성한 것이다. 결국 이에 편성되지 못한 지역은 지배 수단의 일환으로서 소로 따로 분리되어 관할받게 되었다. 고려사회의 지방제도는 신분 질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소는 향이나 부곡과는 달리 관리자의 면에서 큰 차이점이 있다. 조세를 거둘 때 향이나 부곡이 지방 관청의 관리를 받았다면 소는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는 특수 공물을 담당하였는데, 특수 공물은 말그대로 일정한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것이었다. 자연경제의 토대에서 소가 갖고 있는 기능은 이처럼 막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국가의 직접 관리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중앙의 통치 기반이 허약했던 고려 정치구조를 그대로 나타내는 실례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소가 수탈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반 농민들과는 달리 이곳 천민들은 특수 공물의 생산을 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사회가 농경을 주산업을 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농민들은 특산물을 포로 대신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처럼 되어 있었다. <고려사>에 포와 특산물을 어떻게 비교하여 그 양을 상응시키느냐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대체로 특산물은 소의 몫으로 돌아갔다. 또한 공물은 여진족 등 외국에 바치는 데 사용됐기 때문에 대외 관계 유지를 위해서 정부는 소를 더욱 수탈하게 되었다. 이렇게 소는 대내외적인 구조 속에서 발전의 계기를 갖지 못하고 오직 정권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점점 전락해가고 있었다. 명학소민의 반란은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고 신분해방을 위한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명학소민의 봉기는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1차 봉기는 1176년 정월에, 2차 봉기는 다음 해인 1177년 2월에 각각 있었다. 그렇다면 이 반란은 어째서 두 번에 걸쳐 나누어 일어났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봉기 전개 과정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첫번째 봉기는 1176년(명종 6)에 일어났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망이, 망소이 두 형제는 무리를 불러 모아 스스로 산행병마사라고 일컫고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정부는 채원부 등을 보내 회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 반란은 규모가 매우 커져 나중에는 주위 일대를 거의 점령하였는데 한때 덕산, 여주, 진천, 청주, 아산 등지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봉기가 다른 민란들처럼 지방 관리의 수탈에 대한 직접적인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소는 국가가 직접 관장하는 곳이었다. 공주가 함락되자 중앙에서 사람을 파견한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반란은 우발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짜놓은 치밀한 작전 계획에 따라 일어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봉기가 사전 계획에 따라 확장되었는지 살펴보자.
명학소민들이 제일 먼저 점령한 곳은 공주였다. 그 당시 공주를 지키는 관군의 수는 천오백 명 정도였다. 그런데 명학소민들 가운데 봉기에 가담할 수 있는 남자의 수는 기껏해 천 명을 웃도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들은 정규 훈련을 받은 주둔군을 함락시켰다. 명학소민들은 군사 훈련이나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정규군을 물리쳤다. 이에 추리해보면 1)기습전을 펼친 것은 물론이고 2)사전에 조직을 이루놓았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후에 삼천 명이 넘은 중앙군을 물리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또한 그 숫자에도 문제가 있다. 남자 천 명 가운데 실제적으로 봉기에 가담할 수 있는 숫자는 더 적어 수백 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반란은 사전에 세워놓은 철저한 계획에 따라 주위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성공하였다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또한 망이 등이 자칭한 '산행병마사'에서 '산행'이 갖고 있는 뜻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밝혔듯이 12세기를 전후하여 권세가들이 대토지를 소유하는 등 농민들에 대한 수탈이 한층 강화되자 떠도는 농민들이 많아져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산으로 들어가 도적이 되었다. 망이 등이 난을 일으킨 공주 지역 역시 비옥한 땅이므로 이에 대한 지방관들이나 권세가들의 수탈이 매우 심했을 것이다. 즉, 생산력이 높은 만큼 수탈도 강화되어 유랑민들이 급증했다는 말이다. 이들이 산행이라는 말을 붙인 것도 어찌 보면 이런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 중앙정부는 조위총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망이.망소이의 난이 터지자 정부는 어쩔 수 없이 회유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채원부와 박상수를 보내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반란군이 이들의 말을 들을 리 만무였다. 그러자 정부는 정황재와 장박인에게 장사(고려 무신시대 때 자주 등장하게 되는데, 여러 의미가 있지만 지금으로 치자면 용병과 같은 성격이 강하다.) 3,000명을 주어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1개월도 견디지 못하고 반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에 반란군은 자신감을 갖고 공주를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중앙정부는 남북으로 반란에 시달리게 되자 명학소민들의 반란을 무마하기 위하여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켰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일 뿐만 아니라 기존의 정책에 크게 위배되는 조치였다. 일반적으로 향.부곡.소가 현으로 승격되는 지역은 유공자의 출신지이거나 권세가들의 고향일 경우였다. 이러한 관례를 깨고 천민들의 반란을 무마하기 위해 소를 현으로 승격시켰다는 것은 그만큼 정부가 위기 의식을 느낀 탓이었다. 이와 더불어 반란군들은 무력으로 부당한 제도 개선을 요구하면 국가도 양보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의식 고양은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여러 민란의 원동력이 되었다. 천민들조차 사회 제도를 자신들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개혁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명학소가 충순현으로 승격되자 오히려 공주 지역 일대의 농민들이 명학소민들의 반란에 대거 동조하였다.
망이 등은 정부의 조처가 기만책인지 아니면 실질적으로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개혁 조치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또한 반란군에 농민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면서 그동안 쌓였던 지방관들에 대한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봉기를 중지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에 반란군은 예산현을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감무를 잡아 살해하였다. 승기를 잡은 반란군은 충주까지 밀고들어가 점령하였다. 충주는 곡창 지대였기 때문에 반란군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회유책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판단한 중앙정부는 즉시 대장군 정세유와 이부를 남적처치병마사(당시에 개경 아래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군을 남적, 북부 지역의 반란군을 북적이라고 불렀다.)에 임명하여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들어갔다. 대규모의 토벌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에 접한 망이 등은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다고 판단, 1177년 1월에 정부에 대해 화해를 요청하였다. 망이 등은 귀향과 식량 보장 등을 내세워 정부측과 강화를 맺었다. 정부도이를 받아들여 곡식을 주어 반란군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였다. 이때가 겨울이었기 때문에 곡식이 매우 귀해서 이러한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명학소민의 1차 봉기는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농민들이 이 반란에 대거 참여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앞서 반란이 일어난 다음에 '감무'를 잡아죽였다고 했다. 즉 봉기의 원인이 이 감무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앙정부는 오랫동안 여진족과 전쟁을 벌이면서 막대한 인력과 군비를 손실당하게 되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후방 지역에 감무라는 직책을 가진 자를 파견하여 전쟁에 필요한 물자 공급에 쓸 조세 수납과 민호 징발을 직접 관장하였다. 이곳을 군수 물자 보급지로 삼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이 지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가야산의 앞 뒤에 있는 열 고을을 함께 내포라 한다. 지세가 한 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년과 병자년 두 차례의 난리에도 여기에는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다.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가야산 일대는 예로부터 물자가 풍족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감무는 특별 임무를 띠고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감무는 특별 임무를 빙자하여 가렴주구를 일삼았고 심지어는 지방 호족들과도 마찰을 빚게 되었다. 이렇게 중첩된 착취를 당하던 농민들은 망이 등의 반란에 대거 참여하였고 호족들 가운데 반무신정권적인 성향을 지닌 자들도 이에 동조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손청이었다. 명학소민의 반란이 일어나자 주위 농민들이 합세한 것은 물론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도 규모는 작지만 민란이 일어났다. <고려사>에서 중부 이남 지역, 즉 삼남 지방에서 봉기한 반란군을 대체로 '남적'이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가운데 명학소민의 반란군과 관련이 깊은 또 하나의 반란군이 있었다. 그것은 손청이 이끄는 군대였다. 손청은 망이 등이 정부와 화약을 맺기 한 달 전인 1176년 12월에 스스로 병마사라고 하면서 반란을 주도하였다. 그런데 손청이 망이의 반란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에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적어도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은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산현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고 했는데 정부 입장에서 볼 때는 마치 연합 작전을 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서산과 공주는 모두 충청도의 요충지이고 곡창지대이기 때문에 정부는 반란군이 두 패로 나누어 난을 일으킨 것으로 파악했을지도 모른다. 정세유와 이부를 각각 병마사에 임명하여 2군으로 나눈 것도 이러한 점을 고려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리고 명학소민의 반란이 일자 일부 하급 문신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일었다. 이들은 고위 관직을 사칭하여 망이 등에게 서신을 보내 반란군을 자신들의 정권욕에 이용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챈 망이 등은 서신을 갖고 온 사자를 잡아 정부에 넘겨버렸다. 이것은 망이 등이 더 이상 정부군과 소모전을 갖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오였다. 정부는 망이가 귀향하는 시간 동안에 명학소에 있는 처와 모를 인질로 잡아두었다. 이뿐 아니라 명학소에 토벌군을 보냈다. 이렇게 해서 명학소민의 2차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망이 등이 고향에 돌아와 보니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앙정부는 이들이 귀향하는 시간을 벌어 다시 토벌군을 보내어 그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는 등 공격해 왔던 것이다. 이에 망이 등은 격분하여 2차 봉기를 일으켰다. 이때가 1177년 2월이었다.
망이 등은 우선 인근에 있는 가야사라는 절을 공격하였다. 사찰이 공격 대상이 된 것은 당시 불교가 권세가들과 밀착하여 온갖 특혜를 누리면서 노비를 거느리고 토지 겸병을 일삼는 등 타락의 극치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망이 등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손청 등도 비슷한시기에 다시 봉기했을 것이다. 손청은 이때 주로 충청남도 북부 지역을 공략해 나갔다. 반란군은 정부에 속았다는 데 분노한 나머지 1차 때보다 더 격렬하게 정부군과 싸움을 벌였다. 그 탓인지 1차 때는 충주까지 점령하는 데 몇 달이 걸리던 것이 2차 때에는 불과 열흘도 안 되어 충청북도 진천까지 점령하였다. 그렇다면 반란군은 계속 북상하여 개경에 이르려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은 사실이었다. 같은 해 3월에 홍경원이라는 사찰을 점령, 불을 지르고 승려 10여 명을죽인 다음 주지승을 살려주는 대신 협박하여 서울 정부에 편지를 전하라고 다그쳤다. 그 편지 내용은 이렇다.
"이미 우리 고향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또 수령을 두어 무마하고서는 곧 그 길로 군대를 보내어 토벌하고 우리의 모친과 처를 잡아가두니 그 뜻이 어디 있느뇨.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결단코 항복하여 포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요, 반드시 서울에 가서 분풀이를 하고야 말것이다."
실로 비장한 각오가 담긴 편지 내용이다. 망이 등은 사실상 중앙정부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반란군들은 더이상 정부를 믿을 수 없게 되었으며 나아가 정부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즉 반란군의 봉기는 이제 신분해방에서 정부타도로 그 성격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것이 2차 봉기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승승장구를 달리던 반란군은 급기야 북부 일부를 뺀 충청남북도 전지역과 경기도 일부까지도 점령하게 되었다. <고려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남적이 아주(아산)를 함락시켰다. 이때에 청주목 내의 군현들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고 오직 청주만이 점령당하지 않았을 뿐이다."
선전포고를 한 반란군은 기세를 몰아 서울을 점령할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1018년에 정부는 전국을 네 개의 도호와 8개의 목으로 나누었다. 청주는 이 8개 목 가운데 하나였다. 이 일대가 모두 반란군에 의해 장악되었다면 그 차지한 고을 수는 무려 60개에 가깝다는 뜻이다. 이제 정부와 반란군은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여야만 했다. 반란군의 기세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강경책만이 반란군을 평정할 수 있다고 판단, 이해 5월에 충순현을 다시 명학소로 원위치시켰다. 이것은 반란군에 대한 최후 통첩이었다. 토벌군은 먼저 손청, 이광(미륵산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망이 등과 함께 북진을 도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군대를 3군으로 나누어 파견했다는 것은 이들과 망이의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본다.) 등이 이끄는 반란군을 먼저 공격하여 이들을 잡아 죽였다.
갑자기 지원부대를 상실한 망이 등의 반란군은 삼면에서 쳐들어오는 토벌군을 당하지 못해 2개월도 견디지 못하다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망이와 망소이는 생포되어 청주 감옥에 갇혔다. 이로써 1년 육개월 동안이나 지속된 명학소민의 반란은 막을 내렸다. 명학소민의 반란은 농민과 천민이 연합하여 일어났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만큼 당시 사회적 모순이 극대화되어 신분해방과 더불어 정부의 정통성 결여를 비판하면서 정부타도를 외쳤던 것이다. 이 반란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뒤에 일어나는 전국적인 민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후대에 와 천민 집단인 소가 소멸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김사미.효심의 반란(1193년) : 신라부흥운동을 표방한 반란
명종과 신종대의 30년간 지속된 민란은 다양한 성격을 갖고 진행되었다. 천민이나 농민들이 사회 모순과 중앙정부 타도를 외치며 봉기를 하는가 하면 다분히 이념적인 구호를 내세우며 봉기를 한 적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김사미.효심의 반란이다. 이 반란 역시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민중들이 압제와 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 반란은 다른 민란과는 달리 복잡미묘한 내막을 갖고 있다. 당시 경주를 동경이라고 불렀다.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성행한 민란 봉기는 이제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에서도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김사미.효심의 반란은 처음부터 이곳의 민란을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반란을 꾀한 1193년에서 밑으로 거슬러 내려가 3년 전인 1190년 전후에 경주 시내에서 이미 민란이 일어났다. 이때의 민란은 그 저항이매우 완강해서 걷잡을 수 없이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가 나중에는 조직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사미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는 사료의 부재로 알 길이 없다. 그가 농민이거나 아니면 몰락한 가문의 자손이라는 지적도 추측에 의한 것일 뿐이다. 김사미는 지금의 경상도 청도에 있는 운문산을 근거지로 삼고 군소 집단으로 흩어져 있는 반란 세력을 규합, 봉기하였다. 효심은 초전(울산)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운문산과 초전은 지리상 인접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쉽게 연합할 수 있었다. 이들이 봉기하자 중앙정부는 대장군 전존걸을 책임자로 임명하고 장군으로는 이지순, 이공정, 김척후, 김경부, 노식 등을 보내어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이중 이지순은 당시 집권자였던 이의민의 아들이었다. 8월에 양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결과는 전존걸이 이끄는 토벌군의 대패였다. 이뿐 아니라 모든 전투나 전황이 대체로 토벌군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갔다. 이에 대해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의민은 일찌기 꿈을 꾸었는데 두 겨드랑이 사이에서 붉은 무지개가 뻗어나왔다. 그는 이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또 옛날 참언에 '용손(왕손을 말한다.)이 12대로 끝나면 다시 십팔자가 있겠다'라는 말을 듣고 '십팔자'가 바로 '이'자이므로 이를 근거로 인군이 되어보려는 생각을 품었다. 욕심도 덜부리고 비루한 것도 덜하면서 명사들을 등용하여 헛된 명예를 노리었다. 스스로 경주 출신이라고 하면서 은밀히 신라를 부흥할 뜻을 갖게 되었다. 그는 적 사미, 효심 등과 내통하였고 적들도 또한 많은 재물을 그에게 보내었다. 지순도 또한 욕심이 한없는 자였으므로 적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듣고 이를 얻어내어보려고 몰래 적과 교통하였다.(중략) 이로 말미암아 군중의 동정은 번번이 누설되어 여러번 패하기까지 하였다. 존걸은 일찍이 지혜와 용맹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이에 이르러 분노하여 '만일 법으로 지순을 다스린다면 그 아비(이의민)가 나를 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면 적은 더욱 기세가 오를 터이니 그 책임이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라고 하였다. 기양현에 이르러 그는 독약을 먹고 죽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이의민 부자는 김사미.효심과 내통하였다는 뜻이다. 내통은 주로 장군으로 내려간 이지순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경주 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이들과 쉽게 줄이 닿을 수 있었다고 본다. 내통에 따라 군사 정보가 사전에 새어나가 토벌군은 패할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의민은 자기 연고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신라 부흥'을 표방하면서 실질적으로 왕위에 오르려 했다는 것이 <고려사>의 시각이다. 이의민은 아버지가 소금장수이고 어머니가 절의 노비였던 천민 출신이었다. 그러한 그가 경주 이씨라는 본관에 연연하여 '신라 부흥'을 외쳤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그러나 그의 성격이나 일생을 살펴보면 충분히 왕권을 넘볼 수는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신라 부흥' 운운은 지역 세력을 규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가 실제로 옛 신라의 영광을 복원하기 위하여 김사미 등과 손을 잡았던 것은 아니었다. 김사미나 효심도 이의민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와 또는 그의 아들과 내통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김사미는 일단 전세를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하여 최대한 두 사람을 이용하려 했다는 뜻이다. 집권 세력이 내통을 원할 만큼 당시 반란군의 형세가 막강했다는 뜻도 되지만 이보다는 당시 민중들의 의식이 집권층을 역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고양되어 있었다는 점이 더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토벌군은 패배를 거듭하였고 게다가 전존걸이 자살하자 일단 서울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왕실에서는 이의민과 이지순 등이 적과 내통했다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들을 처벌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또한 전존걸의 자살로 이지순 등과 반란군 사이의 관계는 상당히 약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해 11월 중앙정부는 2차 토벌군을 구성하였다. 이 군대는 1차 때보다 한층 강화되었다. 최고 책임자에 대하여 대장군보다 지위가 높은 상장군 최인을 남로착적병마사로 삼았고 장군 고용지를 도지병마사에 임명하는 등 흐트러진 전열을 수습하였다. 정부는 본격적인 대토벌 작전에 나선 것이다. 정부의 작전은 유효하여 연말을 고비로 승세를 잡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194년 2월에 김사미는 자수하고 말았다. 그러나 김사미는 즉시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대장은 효심뿐이었다. 효심은 사기가 떨어진 반란군을 수습하여 토벌군에 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전투가 벌어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밀양 '저전촌전투'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죽은 반란군의 수만 7,000여 명이 넘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반란군의 수가 원래 수만 명이 넘었다고 하였으니 이 전투에서 반란군은 상당한 군사력을 잃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가 1194년 4월이었다. 이 전투를 고비로 여름에는 거의 전투가 없다가 8월을 고비로 다시 반란군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반란군의 가족들이 혹독한 처분을 받는 등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자 반란군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정부는 순응하는 자에게는 상을 내려 회유책을 쓰는 한편, 9월에 이르러 경주 일대에 계엄령을 내리는 등 강경책을 병행하였다. 결국 같은 해 12월에 효심마저 고용지에게 체포당하여 토벌군이 서울로 회군함으로써 경주를 중심으로 시작한 민란은 4년, 김사미.효심의 반란은 2년 만에 평정되고 말았다. 김사미.효심의 반란군이 지녔던 특징은 그 규모가 정규군과 맞먹을 정도였다는 점이다. 숫자만도 수만 명이었고 이들이 사용했던 무기들이 거의 관군과 버금가는 대등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반란군의 군사력이 상승했다는 뜻이며 전략과 전술면에서도 정규군에 뒤지지 않았다는 것도 또한 알 수 있다.
만적의 반란(1198년) : 최초로 일어난 순수 천민반란
최충헌의 집권 시기를 전후하여 천민들이 주도하여 반란을 일으킨 경우는 허다했다. 명학소민의 반란 역시 망이.망소이라는 천민이 주도하여 일어난 예이지만 이때는 농민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농민-천민의 연합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어떻게 보면 농민들의 반란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적의 반란은 순전히 노비들이 중심이 되어 터졌다는 의미에서 순수한 천민들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만적의 난에 대해서는 <고려사> [최충헌전]에 그 진행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 우선 그 내막을 알아보자.
[신종 원년(1198년)에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을 비롯하여 미조이, 연복, 성복, 소삼, 효삼 등이 개경 북산(송악산으로 추정됨)으로 나무하러 갔다가 공사 노예들을 모아 놓고 모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인년 이래 고관 대작이 천민 노예에서 많이 일어났다. 대장이나 정승이 본래 종자가 있겠는가! 시기만 만나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도 어찌 채찍 아래에서 뼈빠지게 천역만 하겠느냐!"]
이런 울분을 토해놓은 사람은 아마 만적이었을 것이다. 모여 있던 노비들은 만적의 선동에 찬성하게 되었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란을 일으킬 것인가 논의한 끝에 일단 개경 내에 있는 모든 노비들을 결집시키자고 결정하였다. <고려사>에 '누런 종이 수천 매를 오려 정자를 새겨서 표식'으로 삼았다고 나와 있는데, 이 앞에는 세력 결집을 위해 동분서주한 주동 인물들의 활동 상황이 생략되어 있는 셈이다. <고려사>를 쓴 주체가 지배층인 관계로 자세한 내막에 대해 적기를 꺼려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찬동 세력을 규합한 주동 인물들은 드디어 거사일을 정하고 세밀한 봉기 계획을 설정하였다.
"우리들은 흥국사 보랑에서 구정에 이르는 사이에서 일시에 집결하여 북치며 고함치면 궁내의 환관들이 반드시 이에 응할 것이다. 궁노들은 안에서 숙청할 자들을 숙청할 것인즉 우리들은 성중에서 봉기하여 먼저 최충헌 등을 죽이고 이어 각자는 자기 주인 놈을 때려 죽일 것이고 이어 노비문서를 불태워 버리자! 이렇게 되면 어떤 공경, 장상이라도 우리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원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만적 등이 봉기하게 되면 궁내의 환관들이나 궁노들이 내응하여 지배계급을 일시에 물리친다는 것이 주요 일정임을 알 수 있다. 즉 만적 등은 궁밖의 사노비들만이 아니라 궁내의 소외 집단들과도 연계하여 난을 일으킬 계획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만적의 반란이 얼마나 치밀한 계획하에 준비되었는지 엿볼 수 있다. 드디어 거사일이 되어서 노비들은 약속된 장소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불과 수백 명만이 모이게 되었다. 주동 인물들은 예정대로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다가 우선 더 많은 노비들이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고 다시 거사일을 조정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결집 장소를 보재사라는 사찰로 정하고는 '일의 비밀을 보장 못하면 성사하지 못하니 누설치 않도록 조심하라'고 서로 당부하였다. 그러나 거사일을 연기한 것이 결정적인 실수가 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율학박사 한충유의 노비 중에 순정이라는 자가 있었다. 아마 순정도 처음부터 만적 등이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거사 장소에 나가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귀가하면서 갈등을 한 모양이었다. 처음 거사가 연기되자 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처음부터 불순한 생각을 가지고 모임에 참여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고려사>에 따르면, 그는 한충유에게 모든 사실을 밀고하였다. 놀란 한충유는 즉시 만적 등의 역모 내용을 최충헌에게 알렸고 이에 따라 만적을 비롯하여 백여 명의 주동 인물들이 대거 체포당하게 되었다.
노비들의 반란이라는 점에 격분한 최충헌은 주동 인물 백여 명을 모두 강물에 생매장시켜 버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봉기 계획을 누설한 순정에게는 백금(은) 80냥을 상으로 주고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게 하였다. 그는 백여 명의 목숨과 자신의 출세를 맞바꾼 셈이었다. 미수에 그친 만적의 난은 이것으로 평정되었고, 최충헌은 봉기에 참여할 예정이었던 노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고는 주동 인물 백여 명만 처형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만적의 반란은 분명 손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완전히 계획 단계에서 끝나버린 미수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미수에 그친 이 봉기를 왜 주요한 사건으로 치는 것일까. 봉건적 성격이 강한 고려 사회는 귀족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귀족들이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천민들을 무상으로 이용해야만 했다. 바꾸어 말해서 지배계급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수탈 대상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고 무신정권 전까지는 계급간의 분명한 구분하에 사회 질서는 유지될 수 있었다. 왕권이 약화되고 문벌귀족들이 득세하면서 사노비들은 권문세가들의 사병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자겸의 반란에서 볼 수 있듯이, 이자겸은 사노비들을 시켜 농민들을 착취하거나 반대 세력을 견제하였다. 또한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에는 이의민 같은 천민 출신들이 무신들에게 동조, 출세의 길을 닦기도 하였다. 만적의 반란 초기 단계에서 '경인년 이래 고관 대작이 천민 노예에서 많이 일어났다'는 말이 나온 것은 천민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신분 상승의식과 사회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노비들은 권세가들의 도구에 불과했지만 그들 스스로 자각하여 신분 상승을 꾀하고 심지어는 관리로 임명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런 사회적 변화에 따라 노비를 비롯한 천민들은 신분 질서가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자신들의 힘으로 억압의 신분에서 해방되기를 갈구하는 단계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러한 여망이 표출된 여러 반란 가운데 대표적인 경우를 만적의 반란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반란의 경우 최충헌 정권을 타도할 것을 계획하였지만 이들 노비들이 수권 능력이 있어서 정권을 노렸다고는 보기 힘들다. 단지 신분 해방을 위해서는 지배층을 와해시켜야만 한다는 고양된 정치의식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비록 만적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천민들의 봉기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200년에는 진주에서 공사노예들이 모여 반란을 일으켜 고을 아전들의 집 50여 채를 불태우고 관리들을 죽인 일이 벌어졌으며, 1203년에는 개경의 노비들이 나무하러 산으로 올라가 전투 연습을 하다가 발각되어 50여 명이 처형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밖에도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킨 경우는 부지기수였다. 무신정권 이후 붕괴된 신분 질서에 상응하여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려 했던 만적의 반란은 신분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다. 다시 말해서 이후 일어난 천민들의 반란과 더불어 만적의 반란은 고려사회의 신분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한 천민들의 반란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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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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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둘째 묶음 : 아름다운 순간들
아름다운 순간들. 3
16 생일을 맞는 이에게 주려고 오늘은 분꽃씨를 따서 고운 봉지에 담아두었다. 우리가 서로 꽃씨를 선물로 주고받고, 꽃이 피고 나면 그 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음은 얼마나 아름답고 기쁜 일인지!
지난 봄에 내가 선물로 받아 뿌린 나팔꽃씨에서 꽃잎이 비로드처럼 부드러운 붉은 꽃, 보라색 꽃이 끊임없이 피어올라 날마다 새로운 아침을 열고 있다.
17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우리나라 산천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다. 여행은 역시 기차 여행이 제일 좋은 것 같다. '...나는 가고 있다. 모든 고요한 시골 지방들을 통과하며...' '신이여, 나를 여기까지 싣고 온 이 기차를 축복하소서'라고 노래했던 조이스 킬머의 시구가 문득 떠오르던 날, 그러고 보니 나는 수없이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나를 싣고 다닌 기차에 대해 별로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 같아 기차역에서 내리며 조금 부끄러웠다.
18 오늘은 ㅂ수녀님을 따라 잠시 자갈치 시장엘 다녀왔다. 오랜만에 나가서 본 억센 사투리의 생선장수 아줌마들, 아직 바다를 그리워하는 듯 펄펄 살아 뛰는 많은 종류의 생선들, 장을 보러 나온 이들의 건강한 웃음과 목소리들에서 내가 느끼는 삶의 진한 향기와 진지함 같은 것.
나처럼 너무 고요한 수도원 분위기 속에서만 살다보면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흘리는 뜨거운 땀과 눈물, 깊디깊은 고뇌를 잊어버리고 '자기' 안으로만 감겨가는 달팽이 같은 삶을 살기 쉽다. 그러기에 가끔은 일부러라도 시장터에 나가보고, 만원전철을 타보며 인간의 냄새를 가까이 맡음으로써 '세상을 떠났지만, 세상을 위한 기도를 결코 잊지 않는' 수도자로서의 몫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19 목소리도 무척 아름답지만 생긴 모습 또한 아름다운 미국의 소프라노 가수 캐스린 배틀의 독창회를 비디오 영상으로 보았는데, 그의 노래하는 표정, 걸음걸이, 청중에게 답하는 웃음과 인사법 등이 너무도 훌륭했다. 노래마다에 혼이 살아 숨쉬는 것 같은 그의 음성과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되어 며칠 동안 내내 그의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많은 이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의 숨은 노력, 숨은 아픔도 떠올려 보았다. 아름다움의 힘, 아름다움의 여운, 아름다움의 공유.
우리가 미처 눈이 뜨이지 못해 발견 못하는, 묻혀 있는 아름다움도 세상엔 너무 많은 것 같다. 이기심과 욕심을 덜어내고 조금만 더 여유를 지니면 아주 작은 것에서도 아름다움과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을텐데...
20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분다. 조카 향이가 어느 날 적어 보낸 바람에 대한 고운 생각을 다시 읽어본다.
<모양도 없고, 냄새도 없고, 색깔도 없으니 분명 '없는' 것인데, 우리는 바람이 존재함을 안다. 마주한 친구의 얼굴 사이로, 빛나는 노을 사이로, 해 뜨는 아침 사이로... 바람은 우리들 세계의 공간이란 공간은 모두 메꾸며 빈자리에서 빈자리로 날아다닌다. 바람소리를 들으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우리의 마음은 아름다운 애수에 흠뻑 젖는다. 때로는 나뭇가지를 잡아흔들며, 때로는 텅빈 운동장을 돌며, 바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이 아름다운 바람을 볼 수 있으려면 오히려 눈을 감아야 함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다.>
21 소설가 ㅂ선생님의 어린 손녀인 지상이가 엄마, 이모와 같이 우리 수녀원에 놀러왔는데, 유난히 바다를 좋아하는 만 네 살 된 어린 소녀와 대화가 되어 기뻤다. 내가 아끼는 커다란 소라 껍질을 주며 파도소리가 들리느냐고 했더니 너무 잘 들린다던 그 애의 맑은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번 여름, 큰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7명의 젊은 수녀들을 생각하며 '난 요새 파도가 미워졌어'하고 말했더니 '응, 그래? 난 파도가 좋은데, 안 미운데...'하며 밝게 웃던 아이, 어린이의 천진함 앞에선 누구라도 착한 마음이 될 수밖에 없다.
기도 일기.1 - 새해를 맞으며
1 아침에 까치를 보면 더욱 반갑다. 새들은 우리집이 좋은지 사계절 내내 날아와서 우리의 기도 소리를 엿듣기도 하고, 우리가 일하는 옆에 앉아 놀기도 하고, 종종걸음으로 먹을 것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배가 볼록하게 나오고 꼬리가 깉 까치들은 언제 보아도 즐겁고, 검은 옷에 흰 수건을 쓴 수련 수녀들의 모습이 떠올라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2 이번 성탄에 그라우의 미사곡을 부르기 위해 연습을 꽤 많이 했다. 남성의 목소리가 빠진 여성들만의 3부 합창은 그 나름대로 청아하고 담백한 아름다움이 있다. 합창 연습을 할 때처럼 또 한해를 살자. 음이 틀리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로, 다른 파트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의 음을 내는 분별과 확신으로, 혼자만의 목소리가 너무 튀어나오지 않게 유의하면서 기죽지 말고 떳떳하게 화음을 이루도록 애쓰는 자세로 매일을 살자.
3 요즘은 꿈속에서도 길을 떠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부쩍 많이 보게 된다. 그러나 길의 방향도, 동행자도, 꼭 지녀야 할 물건들도 잃어버려 당황하고 안타까울 때가 많은데, 때로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릴 때가 있어 놀라곤 한다. 올 한해도 나를 찾는 여행을, 사랑 때문에 지치지 않는 내면의 여행을 계속해야겠다.
4 새로운 시간이여, 어서 오세요. 누군가에게 정성껏 선물을 포장해서 리본을 달 때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나는 그대를 기다립니다. 누군가에게 한 송이 꽃을 건네줄 때처럼 환히 열려진 설레임으로 그대를 맞이합니다. 그대가 연주하는 플롯 곡을 들으며 항상 새롭게 태어나는 이 기쁨을 나는 행복이라 부릅니다.
5 새해엔 연하장 대신 장미를 보내신다구요? 복을 빈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너무 자주 하면 향기가 사라질 것 같아 꽃봉오리 속에 숨겨온 그 마음을 읽습니다. 가시를 지닌 장미처럼 삶의 모든 아픔 속에서도 고운 꽃을 피워내라는 한 송이의 기도와 격려로 그대의 꽃 선물을 받아들입니다.
6 살아 있기에 늘 문이 열려 있는 애 마음의 집엔 늘 손님이 많아 행복하다. 슬픔, 기쁨, 절망, 희망, 고뇌, 환히... 아침부터 밤까지 나는 이들을 편애 없이 다루는 엄마 같기도 하고, 때로는 이들이 나를 가르치는 교사 같기도 하다. 한시도 비울 수 없는 내 마음의 집에 오늘도 향기로운 차 한잔 달여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내 마음의 집.
7 어떤 이의 한 마디 말이 내 기분을 언짢게 한다고 해서 즉시 민감한 반응을 보이거나, 이로 인해 하루 종일 우울해 있거나 다른 이에게 감정 표현을 너무 쉽게 하는 것 등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된다.
'내 자신에 대해 말할수록 더욱 덕성을 잃게 된다는 것은 진실이다. 비록 가장 순결한 듯이 모이는 말일지라도 말 속에서 허영이 튀어나오는 수가 있다. 사람들과 동료들과 웃어른들 사이에서 자신에 대한 말은 많이 하지 않는 게 좋다. 말을 하게 된다면 꼭 필요한고 알맞은 이야기만 해야 한다.'
20세기의 성자라 불리는 고 요한 23세 교황의 <영혼의 일기>에 나오는 이 구절을 깊이 새겨듣자.
8 올해도 하얀 눈 속에 제일 먼저 매화가 피겠지, 눈 속에 피어 더욱 귀해 보이는 꽃, '웃음도 눈물도 너무 헤프지 않게!' 꽃도 피우기 전에 매화나무는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9 오랜만에 내리는 눈에게 나도 오랜만에 말해야지.
"산천에, 내 마음에 희게희게 쌓이렴.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이 되렴, 이유를 묻지 말고 그냥그냥 내리는 환한 축복이 되렴. 아이가 되어 눈밭에 뒹굴고 싶은 내 마음에도 하얀 레이스를 달아 주렴. 모든 것을 용서하는 사랑이 되렴."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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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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