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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33 호
단기 4341. 11. 19 (음력 10. 22)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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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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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9 신춘문예
조선일보 신춘문예가 2009년 새해 첫날 아침을 위한 '문학 축제'를 준비합니다. 김유정·김동리·정비석·최인호·황석영 등 한국 문학사를 찬란하게 수놓은 작가들을 배출한 조선일보 신춘문예는 또다시 여러분의 도전을 기다립니다. 2009년 1월 1일 첫 신문에 당신의 이름을 올리고 그 주인공 대열에 합류하십시오.
◆8개 부문별 고료 : ▲시(3편 이상)=고료 500만원 ▲시조·동시(각 3편 이상)=고료 각 300만원씩 ▲단편소설(200자 원고지로 80장 안팎)=고료 700만원 ▲동화(25장 안팎)=고료 300만원 ▲희곡(80장 안팎)=고료 300만원 ▲문학평론·미술평론(각 70장 안팎)=고료 각 300만원씩
◆보내실 곳 : 우편번호 100-756 서울 중구 태평로1가 61번지 조선일보사 문화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
◆접수마감 : 2008년 12월 10일(수)까지 도착해야 합니다.
◆당선자 발표 : 2009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응모요령 : 원고는 A4 용지에 출력해 보내십시오. 접수 원고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표절로 밝혀지면 당선을 취소합니다. 겉봉투에 응모 부문, 작품 편수를 쓰고, 원고 끝에 이름·주소·전화번호를 적어주십시오.
◆문의 (02)724-5365, 5368, 5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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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농어촌 여성문예공모전 (사) 한국 농어촌 여성문학회에서는 농어촌 여성들의 정서함양과 문학적 소양을 개발하기 위한 문예공모전을 실시합니다. 자질있는 회원영입이 우선이며 우수한 농촌 여성문학인을 발굴하기 위함이 그 목적입니다.
응모 자격은 현 농어촌에 거주하여야하며 도시인일 경우 농업에 종사는 여성이어야 합니다. 사실과 다를 경우 당선이 취소될수도 있습니다. 수상자의 회원 활동은 필수입니다. 응모부문: 시 3편, 수필 2편 모집 기간: 2008년 12월 말일까지 발표: 2009년 1월 30일 농어촌 여성문학 홈페이지 시상 :대상 1명 30만원 금상2명각20만원은상3명각10만원씩이며 시상식은 한국 농어촌 여성문학작품집14집 출판 기념식및 총회인 2009년 2월 24일 에 있습니다. 응모처 http://fjbmh.ohpy.com/ 문예작품 모집방에 직접 올리시거나 kyk1085@hanmai.net 으로 보내시면 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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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함을 두려워 말라. 거짓 지식을 두려워하라.(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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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
언어예절
잘못으로 벌을 받는 것보다 욕을 듣거나 업신여김을 받았을 때 더 괴로운데,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뻔뻔하다거나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한다.
‘위선’(僞善), 또는 ‘위선자’라는 욕이 있다. 욕말 치고는 점잖은 편이다. 맞은편에 진실·위악이 있다. 너그럽게 보면 속마음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다.
제도·의례·관습 …들은 그 사회나 개인이 오랜 세월 어렵게 쌓고 다듬은 가치다. 여기도 꾸며서 굳힌 내용이 많긴 하지만, ‘아름다움’은 대체로 진실을 희생한 위에서 꽃을 피운다. 그러매 전통을 마냥 낡아서 깨뜨려야 할 허례허식으로 지목해서는 곤란하다.
요즘 역사·절제·예의를 팽개친 기발한 ‘작명’ 하나가 이땅 사람들을 어지럽힌다. ‘건국 60주년, 건국절’이 그것이다. 몇 해 전의 ‘제2 건국’은 그나마 ‘제2’라는 모자 덕분에 욕을 덜 먹었다. 그도 아닌 요즘의 ‘건국’은 아무리 잘 봐 줘도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좁히고 끊고 비튼 작명이다.
좋은 말도 격과 명분이 어울리지 않으면 웃음거리가 된다. 잘 쓰던 ‘광복절·정부수립’을 그대로 쓰느니만 못하다. 아니면 적어도 임시정부, 40여년의 항일 투쟁과 희생, 남쪽 단독정부에 뒤이은 북쪽 체제를 아우르는 배포와 명분을 갖춘 이름을 찾아야 마땅하다. 설익은 정부라도 정부는 정부다. 그런 데서 하는 일이 아이들처럼 억지로 떼를 부리는 ‘위악’ 같아서야.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소고기, 쇠고기
미국 발(發) 광우병 파동으로 쇠고기 소비가 현저히 줄었다고 한다. 소갈비집 등 고깃집뿐 아니라 해장국집마저 썰렁하다. 쇠고기와 관련된 업계나 업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애꿎은 한우 농가까지 피해를 보고 있다.
관련 보도에서 소고기/쇠고기, 소갈비/쇠갈비 등 언론 매체마다 표기가 달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궁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쇠고기'만 표준어로 인정하고, '소고기'는 사투리로 취급해 '소고기'를 오랫동안 쓰지 않았으나 1988년 개정(89년 시행)된 맞춤법에서는 둘 다 표준어로 인정했다. '쇠'는 '소의'의 준말이고, '소의 고기'가 '쇠고기'다. 고기는 소의 부속물이므로 '소의 고기'라 부르던 것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쇠고기'로 변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소고기'라고도 많이 쓰고 있는 점을 감안해 복수표준어로 인정했다. 그렇다고 '소'나 '쇠'를 아무 데나 똑같이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의 부속물인 경우에는 '쇠'와 '소'를 함께 사용할 수 있으나 그 밖에는 '소'만 쓰인다. 소의 부속물인 소갈비·소가죽·소기름·소머리·소뼈 등은 쇠갈비·쇠가죽·쇠기름·쇠머리·쇠뼈 등으로 함께 쓸 수 있으나, 부속물이 아닌 소달구지·소도둑은 쇠달구지·쇠도둑으로 쓸 수 없다. 소의 달구지, 소의 도둑이 아니라 소가 끄는 달구지, 소를 훔치는 도둑이란 뜻이므로 애당초 쇠달구지·쇠도둑은 성립하지 않는다.
핸드폰, 휴대전화
한국이 휴대전화 보급률 세계 1위라고 한다. 요즘은 시골 노인이나 중·고등학생까지 휴대전화가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며,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사 달라고 졸라 댄다. 이처럼 일상화하고 친근한 물건이지만 핸드폰·휴대폰·휴대전화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편한 대로 부르고 있어 용어의 정리가 필요한 것 같다.
우선 '핸드폰(hand phone)'은 제대로 된 영어 단어가 아니다. 정확하게는 '셀룰러폰(cellular phone)' 또는 '모바일폰(mobile phone)'이다. '셀룰러폰'(줄여서는 셀폰)은 미국식 표현이고, '모바일폰(모빌폰)'은 영국식 표현이다. 국제화 시대에 상황에 따라선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핸드폰'은 우리만 알아듣는 엉터리 영어이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사실을 반영해 우리말과 적당히 섞어 '휴대폰'이란 용어도 사용하고 있으나 어설프기는 마찬가지다. '가지고 다니는 전화'라는 뜻으로 '휴대전화'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속도의 시대, 축약의 시대에 '휴대전화'가 '핸드폰' '휴대폰'보다 한 글자 길기는 하나 올바른 우리말 사용이라는 당위성에서 앞선다. 간혹 신문의 제목 등에서 좁은 공간 때문에 불가피하게 '휴대전화'를 '휴대폰'이라 줄여 쓰는 경우가 있으나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핸드폰'이란 용어는 아예 버려야 한다. 꼭 영어를 쓰고 싶으면 '셀룰러폰' 등으로 하면 된다.
어거지, 억지
우리 속담에 '콩을 보고 팥이라고 우긴다'는 말이 있다. 이는 사실과 다른 주장을 막무가내로 내세운다는 뜻으로, 억지스럽게 고집을 부리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렇게 말이 되지도 않는 것을 맞는다고 우기거나 잘 안 될 일을 무리하게 기어이 해내려고 고집을 피울 때 '어거지'란 말을 자주 쓴다. '독재자의 공통된 속성은 남에게 강하고 자신한테는 약하다는 점이다.
독재자는 쉽게 말하면 남한테 어거지를 쓰는 사람인데, 성장환경이나 어떤 부분에서 결핍된 것이 많은 사람, 열등감이 많은 사람이 독재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대영 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은 자국의 문화재는 힘을 이용해 다시 찾아오지만, 자국이 보유한 타국의 문화재는 어거지 논리로 반환해 주지 않습니다. 강대국의 힘을 이용해 국제법에 입김을 넣고 자국에 유리하게 적용시킵니다.' '1등에 당첨된 로또 복권을 자기가 분실한 것이라면서 어거지 쓴 그 아줌마는 어떻게 됐나요?'
이처럼 '어거지'란 말이 일상생활에서 상당히 많이 쓰이지만 표준어가 아니다. '억지'라고 해야 맞다. '억지'보다 느낌이 작은 말로는 '악지'가 있다. '어거지'보다는 '억지'가 발음이 더 세고 고집스러움도 더한 듯싶다. '억지 춘향이'를 '어거지 춘향이'라고 해 보자. 뭔가 좀 약한 느낌이 들며 어색하지 않은가. 때로는 억지를 부리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억지보다는 순리를 따르는 것이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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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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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고향 - 윤동주
고향에 돌아온 날 방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璪)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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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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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 김용진
1 초목이 살래살래 반갑다는 그 길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요리조리 굽은 길 마음엔 가득 찬 초목들 무슨 얘기 하자는지
2 돌멩이 모여 살던 쭉 벋은 그 길에서 양옆으로 줄을 지어 유호가던 버드나무 도랑엔 흐르는 물이 물방개와 가자하고
3 시원스레 가슴 드러낸 더 넓은 몸뚱아리 계절이 가는 줄 모른 채 속도만 더 높이고 인생은 길을 따라서 사는 거라네. 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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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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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노라 닫지 말며 못 가노라 쉬지 마라
부디 긋지 말고 촌음을 아껴 쓰라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감만 못하리라
-김천택(金天澤), 《해동가요》
잘 나간다고 방심하여 너무 나대지 마라. 툭 터진 평지에서도 튀어나온 돌부리가 발목을 잡아챈다. 일이 뜻대로 안 풀린다고 손놓고 쉬어서도 안 된다. 생각지 않은 데서 일은 풀리게 마련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득한 마음이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경망함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서둘지 말고 쉬지도 않고, 아까운 시간 아깝게 쓸 일이다. 가다 말면 애초에 아니 감만 못하다 했다. 한 우물을 파라. 여기 저기 집적거리지 말고, 이곳 저곳 기웃거릴 것 없다.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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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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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3 -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제2장 인간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인가
동양사상은 인간중심의 사상이며 인간에 대한 기본적 관점이기도 하다. 인, 겸애, 자비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의미하고 있다.
이해영(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안동대 교수)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누구나 머릿속으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이며 이를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는 사랑의 내용과 실천방법 문제에 이르면,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인지 막연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보기 위해 우리는 옛 사람들의 생각을 되새겨 봄직도 하다. 동양사상은 '인간중심'의 사상이며 그래서 인간의 본질이나 인간의 삶에 관한 내용이 많다. 그런데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 하는 것에 대한 동양사상의 여러 견해들을 꿰뚫고 있는 기본적 관점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사상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유가의 인, 묵가의 겸애, 불가의 자비를 통하여 검토해 보자.
유가의 인
아직도 우리는 유가사상은 봉건적이고 보수적이며 명분에 사로잡힌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가의 근본이념은 바람직한 인간의 삶은 어떠한 것인가,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인가에 있다. 유가를 창시한 공자 사상의 핵심은 인이다. 공자는 인을 통하여 개인은 도덕적으로 자기완성을 이루고 인간사회는 도덕적으로 완성되어 인간의 바람직한 삶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공자의 관심은 사람, 그 중에서도 인간의 바람직한 삶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용"에서는 인을 '사람'이라 했고, "맹자"에서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으며, "논어"에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다운 사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인의 본래 뜻인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 하는 것이 공자의 관심이었다면 사람을 사랑하여 사람답게 사는 것은 공자가 생각한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길이었다.
인은 글자의 뜻으로 보자면 두 이자와 사람인자를 합해 놓은 것이므로 곧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인간의 관계는 서로 믿고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여야 한다. 그런데 인간관계는 상호성을 지니지만 모든 관계는 나와의 관계이므로 자신이 남을 사랑하거나 남에게 사랑받는 일이 모두 바로 자신의 일이다. 내 자신의 일이요, 내가 관계의 중심이 되므로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인은 인간의 도덕적 자각에 기초하고 있다. 인은 바로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며 자신의 삶에 대한 성실함과 경건함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 성실함과 경건함으로 나타난다. 공자는 인간의 자각과 실천의 자율성을 강조하였지만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의 자각과 실천의 자율성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남과 나의 관계를 통하여 함께 나아갈 길을 구하는 것일 때, 공자가 구하는 사람다움의 길은 바로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의지가 된다. 공자는 구도에 대한 정열과 구세에 대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으며 일생을 그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공자가 보기에는 사람다움의 길은 삶의 과정속에서 개개인이 나아가야 할 길이며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함께 나아가야 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유가의 인의 가르침이요,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길이었다.
구도의 길은 인의 길이며 사람이 가야 할 길이다. 그러나 공자는 인이 무엇이다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논어"에서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효제는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 "얼굴빛을 꾸미고 말을 교묘하게 하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이 적다." 등등 짤막짤막한 말로서 인의 실현양태를 다양하게 묘사하였다. 이는 현실생활 속에서 어떤 행동이 어진 행동인지, 또 어진 사람이란 어떤 인간상인지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즉 인이 무엇이다가 아니라 어진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딱딱한 이론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현실생활에서 각성과 실천을 끌어 내는 교훈이었다. 가장 바람직한 인간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는 부모와 자식, 형과 아우 등의 가족관계이다. 그래서 공자는 육친에 대한 사랑의 감정, 즉 효제를 지극히 강조하였다. 효제란 인간이 지니는 가장 근원적이고 자연스러운 정감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정감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그 사랑의 실천은 자연스럽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확대되어 모든 사람에 대한 자연스러운 사랑으로 나아갈 때 인이라고 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은 완성되는 것이고 사람다운 사회도 일어지는 것이다. 공자는 그래서 효와 제가 사람을 사랑하는 근본이라고 한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사랑 실천의 확대방법을 공자는 충과 서라고 한다. 충은 글자의 뜻으로 보면 바르다는 의미를 지닌 가운데 중자 아래에 마음 심자를 둔 것이므로 바른 마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충은 내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을 버려야만 이루어지는 경지이다. 이는 바로 나 자신에 대한 경건한 태도이며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서는 같을 여자 아래에 마음 심자를 쓴 것이다. 즉 남의 마음과 같아지는 것이다. 내가 배고픈데 저 사람은 얼마나 배고플까, 내가 힘든데 저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이처럼 내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내가 바른 마음을 갖고 있을 때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야만 나와 너의 관계가 바로 서고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 즉 사람다움의 실천, 사랑의 실천은 충서의 실천이다. 충서의 실천이란 내면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다하는 일이고 밖으로는 남과의 관계에서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적극적 실천방안으로는 자신이 서고 싶으면 먼저 남을 세워 주고 자신이 뜻을 이루고 싶으면 남의 뜻을 이루도록 해 주는 것이다. 맹자는 공자를 성인으로 숭상하고 인을 인의로 확대 해석하였다. 맹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도덕 실천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인간은 천부적으로 남이 위태롭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선량한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선량한 본성은 사랑, 정의감, 예의, 지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인간의 본질은 선하다는 맹자의 성선설은 공자의 인간에 대한 신뢰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의 선한 행위, 사랑의 행위는 내면의 각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선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맹자의 주장은 인간의 도덕적 각성 가능성을 이론적 근거로 마련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그 후의 유가들은 맹자가 공자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어받은 것으로 보아 맹자 학설을 계승하였다. 특히 송대의 성리학자들은 맹자의 성선설을 자신들의 인간론으로 받아들여 맹자를 공자의 정통 계승자의 위치에 자리매김하였다. 동시에 공자의 인을 실천적 측면에서만 이해하지 않고 인간이 고유하게 지닌 사랑의 원리요, 마음의 덕이라고 이론적으로 규정하였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누려야 하는 것은 인류의 이상이다. 유가에서 주장하는 인, 즉 인간에 대한 사랑이란 인간다운 삶을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고 인간의 관계를 아름답게 맺어 주는 끈이다. 그러므로 인간 사랑에 대한 도덕적 각성과 그 실천은 시대를 초월하여 필요한 것이다.
묵가의 겸애
묵가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구호는 겸애교리이다. 겸애교리는 묵가의 기본이념으로 유가의 인과 같은 위상을 지닌다. 묵가 사상의 창시자 묵자는 공자의 학문을 배운 일이 있다고 한다. 묵자는 유가의 인의 근본적인 정신인 인간 사랑을 받아들여 그들 집단의 특성에 맞추어 해석하고 변형하여 겸애교리라고 표현하였다. 묵가가 겸애를 주장한 것은 당시의 사회가 혼란한 원인이 인간이 인간을 이기적이고 차별적으로 대하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묵가는 차별적인 사랑인 별애를 버리고 평등하게 사람을 사랑하는 겸애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묵자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못살게 굴고, 많은 수를 가지고 작은 수를 괴롭히며, 귀한 자리에 있는 자가 천한 자리에 있는 자를 함부로 대하며, 교활한 자가 어리석은 자를 이용해먹는 것은 모두 차별적인 사랑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 모든 것을 겸애로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자는 뜻을 지닌 겸애는 안으로는 정치적인 평등을 요구하는 의미를 지니며 서로 이익을 나누어 갖자는 뜻인 교리는 경제적인 평등을 요구하는 의미를 지닌다. 물론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겸애가 이루어지면 교리는 저절로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묵자의 겸애사상은 그들 집단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묵가 집단은 당시의 신분사회에서 차별받는 낮은 신분에 속하였다. 그들 집단이 주로 했던 일은 약자를 위하여 성을 지켜 주는 일이었다고 한다. 성을 지키는 전쟁에서 어느 한쪽이라도 무너지면 다 같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으로 아끼고 돕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같은 극한 상황에서 동고동락하던 체험을 보편화한 것이 겸애라는 주장이다. 묵자는 겸애란 자기를 위하듯 남을 위하고 내 부모를 위하듯 남의 부모를 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남도 나와 내 부모를 자기를 위하듯 하고, 자기 부모를 위하듯 하여 사랑과 이익으로 보답할 것이라 하였다. 묵자는 자기를 위하듯 남을 위하고 자기 나라를 위하듯 남의 나라를 위한다면 온 세상이 이로워져서 결국 그 이익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묵가의 겸애를 공리적 사랑이라고 한다. 사실 묵자의 이런 생각은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이성에 호소한 것이다. 본래 인간의 감정은 자기중심적이다. 따라서 감정에 기초한다면 남보다는 나를, 남의 부모보다는 내 부모를, 남의 자식보다는 내 자식을, 남의 나라보다는 내 나라를 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묵자는 그 같은 차별적인 사랑이 스스로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 이기적인 태도는 늘 강자에게만 유리한 조건을 이루어 사회 혼란을 가져오므로 결국에는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묵가는 사랑이란 나와 다른 사람을 바르게 관계지어 주는 것으로 차별 없이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긴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뜻에서 묵가는 겸애를 '남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현존을 바탕으로 남을 이해하는 것이므로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는 것으로 규정되는 유가의 서와 표면적으로 동일한 면이 있다. 그러나 유가가 내재적 도덕성인 '인'의 전개방법으로서 '서'를 말했다면, 묵가의 겸애는 반대급부적인 효과를 예상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한 개인이나 집단이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그 대상에게 이익을 주었다고 해서 그 대상도 반드시 사랑하고 이익을 주는 방법으로 보답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란 원래 자연적인 친애의 감정에서 출발한다. 유가가 효제를 중시하였던 것은 효제가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인의 실천에 기본이 된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가의 겸애교리는 항상 상대방의 보답을 예상하고 기대하므로 결국 겸애의 실제적 대상은 반대급부로서 자기에게 사랑을 베풀거나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되는 어떤 구체적 대상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겸애를 신분적 차별을 뛰어넘는 평등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무조건적이고 무차별적인 사랑이라고 보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묵가는 상호 평등의 사랑인 겸애는 상호 이익 보장인 교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공리적으로 설명한다. 다양한 인간의 상호관계가 이처럼 오직 공리의 관계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묵가 집단의 현실적인 인간관계를 추상화하고 보편화하여 내린 결론일 것이다. 하지만 묵가의 겸애교리가 공리적 타산에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묵가는 겸애, 즉 상호 평등한 사랑을 통하여 사회적 연대를 구상하고 교리를 통하여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구상한다. 묵가는 "힘이 있는 사람은 열심히 남을 도와야 하고 재물이 있는 사람은 힘써 남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고 도가 있는 사람은 가르침을 베풀어야 한다." "함께 노동하고 서로 나누어 갖고 서로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겸애의 구체적 대상은 그 범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겸애는 이상을 같이하는 동지적 결합의 성격을 지닌 집단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그 집단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사랑을 목적으로 남을 사랑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집단의식을 모든 인간관계에 확장하여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당위로서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 하면 '남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나와 남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심정적 차원에서는 부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고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묵가는 하늘의 뜻을 끌어 왔다. 하늘의 뜻이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에 사람들 모두 하늘의 뜻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묵자가 자신의 겸애교리 사상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고 실현시킬 목적으로 빌려 온 것일 뿐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자비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부처의 사랑을 말한다. 자비는 부처의 사랑이기 때문에 단순히 인간에 대한 사랑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생명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자비는 산스크리트어에서 그 뜻을 찾을 수 있다. '자'는 중생을 자비롭게 사랑하고 아울러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을 말하고, '비'는 중세의 고통을 같이 느끼고 중생을 연민으로 대하고 아울러 그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을 말한다. 자비를 요즈음의 용어로 쉽게 풀어 말하면, '자'는 대가나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는 사랑, 즉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자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가짐과 같은 것이며 '비'는 다른 사람이 힘들거나 괴로운 것을 보고 연민을 느끼는 감정이다. 연민을 느낄 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현실적으로 도와 주며 또한 그가 바로 서서 살아가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한 불쌍한 아이에게 연민을 느껴 그 아이를 입양했다 하자. 그 아이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고 학교를 보내 주고 하는 것으로 자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자비는 그 아이에게 제대로 삶을 살아가도록 삶의 올바른 가치를 알려 주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부처의 본질에는 깨달음의 지혜와 사랑의 실천인 자비 두 요소가 있다. 그러므로 자비는 깨달음과는 다른 성격의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진정한 자비는 깨달음이 수반되어야 한다. 진정한 자비는 추호의 조건도 없고 추호의 의식도 없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맡는 것이다. 그러므로 큰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이 수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비는 추구해야 할 가치가 된다. 용어 자체로 말하면 불교에서는 사랑을 자비라 표현하지 사랑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사랑을 미움과 마찬가지로 본다. 사랑은 모든 사물에 대한 탐욕스러운 그리움과 집착이다. 사랑은 미움의 또 다른 한 면, 즉 사랑과 미움은 하나의 양 측면인 것이다. 사랑에는 친족에 대한 사랑, 다른 사람에 대한 우정, 특정한 사람에 대한 애정 등이 있다. 그런데 인간의 이러한 사랑들은 모두 자기중심적이다. 이러한 사랑들은 고뇌를 낳는다.
부처는 자비의 마음이 지니는 덕을 닦고 그것을 자주 반복하여 실천함으로써 완전히 몸에 익혀야 한다고 하였다. 자비는 실천이기 때문에 몸에 익혀야 한다고 하였다. 자비는 실천이기 때문에 몸에 익혀 자기 것으로 해야 한다. 사실 자애로운 마음은 쉽고도 어렵다. 자애로운 마음의 토대는 인간의 본성 속에 있다. 내 자식이 사랑스럽다, 내 부모가 소중하다, 형제가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 나 자신도 슬퍼서 눈물이 흐른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그러므로 쉽다. 사랑하고 측은해하는 이 마음이 널리 전 인류에게, 나아가 목숨이 있는 모든 것으로 넓어져 가는 그것이 자비이다. 그런데 자비를 확대해 나가고자 하면 여러 가지 번뇌가 그것을 방해한다. 이기심이 그렇고, 탐욕의 마음이 그렇다. 노여움이나 악의도 그것을 막는다. 패거리 심리도 그것을 막고, 편협한 애국심도 그것을 막는다. 그래서 어렵다. 이 방해하는 것들을 하나씩 소멸시키면서 스스로를 연마해 나가야 비로소 끝없는 자비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번뇌와 애착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적이나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자비의 마음씀을 가능케 한다. 자비의 실천 안에서는 더 이상 배타적인 경지가 없다.
자비의 마음가짐은 마치 어머니가 그 외아들을 목숨과 같이 소중히 하듯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무한히 사랑하는 마음가짐이다. 자비는 무한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의 실천을 모든 존재에게 두루 펴 나가기 위한 노력이다. 모든 존재에게 사랑의 관심을 진지하게 갖는다는 것은 바로 좁은 자기에게서 해방되어 자기 자신을 바르게 인식하는 과정이며 최고의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지름길이다. 자비는 자신과 남을 구별하지 않는다. 자아를 무한히 확장하여 자신을 점점 더 많은 살아 있는 존재와 동일시해 나간다. 사랑의 실천인 자비와 깨달음의 지혜는 동등한 것이다.
참고 문헌
"불광대사전", 불광출판사. E. 콘즈, "한글세대를 위한 불교", 세계사, 199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5. 김교빈, 이현구, "동양철학에세이", 동녘, 1993.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삶과 철학",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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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3. 택시 기사 시아버지가 최고라구요?
지하철을 타라니요
얼마 전, 어느 재벌 기업인이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대에 이르는 로비 자금을 정치인들에게 뇌물로 준 사실이 드러나 세상을 잠시 떠들썩하게 했다. 부정한 돈을 받아 챙겨 검찰에 구속된 정치인들의 면면을 보니 참으로 뻔뻔하기 이를데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준 기업인도 문제이긴 하나, 부정한 돈임을 알면서도 받아 자신의 배를 불린 배짱 좋은 정치인들이 이 나라 국정을 이끌어가는 선량들이라고 하니 마음이 답답해질 뿐이다. 하긴 이것이 어제 오늘만의 일이던가. 정경유착이 우리 사회의 오래된 관행이라 하면 이는 빙산의 일각처럼 불거져나온 그저 한 부분에 불과한 일일 것이다. 누가 얼마를 받고, 누구는 얼마를 챙기고 하는 돈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그 큰 거액의 암거래가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수많은 서민들의 마음을 얼마나 슬프게 할까, 생각하니 마음이 퍽 언짢았다. 그즈음, 택시 안에서 우연히 어느 기사분을 만났다. 서울 가야병원 앞까지 가자며 택시를 탔는데 선량하게 생긴 50대의 그 기사분은,
"스님, 그쪽이 도로가 막혀서 좀 늦을 것 같은데, 지하철을 이용하시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건 분명 승차거부는 아닌데.... 그토록 택시를 자주 타고 다녔지만 기사가 지하철을 이용하라는 말은 처음이었다. 나는 조금 의아해 하면서
"제가 알고 있으니 기사님, 그냥 가십시다."하고 말했더니 그는 알겠노라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차 안에 올라 그에게 말을 건넸다. "기사님은 부자이신가 봅니다. 손님인 저더러 택시 대신 지하철을 이용하라니요, 남들한테도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내 경험으로 볼 때, 찾아가는 길이 낯설어 길을 헤매다가 택시를 타게 될 때가 있다. 그런데 바로 코 앞임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 차에 대워선 태연하게 기본 요금을 받는 약삭빠른 기사도 있었다. 그럴 때 내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다. 물론 돈이 아까워서는 아니다. 걸어서 조금 가라고 하면 될 텐데, 굳이 차에 태워 4,50미터 정도만 가서 내리게 하는 것은 왠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도 일종의 비 양심적인 행동이 아닐까. 그런데 이 기사는 참으로 엉뚱한 사람이 아닌가. 호기심이 발동하자 그에게 자꾸만 말을 걸고 싶었다.
"전 40평이나 되는 아파트가 한 채 있고, 착한 마누라에 게다가 아들 녀석도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으니, 스님 말씀대로 저야말로 부자가 아닙니까? 열심히 택시 기사 노릇해서 번 제 돈으로 얻은 것이기에 떳떳합니다." 그는 만족스럽게 활짝 웃었다. "저는 이처럼 택시 영업을 하고 있지만 남들에게는 되도록 버스를 타고 다니라고 말하지요. 아니면 전철을 이용하라고도 하고요." "아니,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택시 영업을 하시면서 택시를 타지 말라고 하시다니요?" "남들도 한푼이라도 아껴야 잘 사는 게 아닙니까? 열심히 벌고 열심히 저축해야지요."
그는 남들에게 구두쇠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흉을 듣기는 했지만, 열심히 절약하고 저축한 결과 넓은 아파트를 장만하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열심히 돈을 벌기는 하지만 한 가지 원칙만을 항상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첫째, 부모에게 돈을 타서 쓰는 어린 학생은 그 학생을 위해서라도 되도록 태우지 않는다. 그리고 둘째, 손님에게는 가능한 한 지하철 앞에 세워 드린다. "참 훌륭하십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감탄했다. "그런데 한번은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지요. 일전에 내가 미아리 방향으로 가는 손님을 내운 적이 있었습니다. 저로선 손님이 학생이기에 지하철이 이용하는 것이 더 낫겠다 싶어 안국역 지하철 바로 앞에 차를 세웠지요. 그랬더니 얼마 있다가 '승차 거부'를 했다고 딱지가 날아온 겁니다. 졸지에 승차 거부한 못된 기사라는 낙인이 찍혀 버린 거지요." 속상했지만 어쩔 도리 없이 그는 2십만 원 벌금을 물고 열흘 간 면허 정지를 받았다고 했다. 선한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 자칫 잘못 이해되는 세상 인심이 억울하긴 했지만 어디 가서 항변할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허허, 남들이 들으면 엉터리 택시 기사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그처럼 근면하고 절약정신을 실천하는 당신을 부처님께서는 분명 칭찬하실 게 분명합니다."
나는 그를 위로하는 마음이 되어 이렇게 말하며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 주었다.
어는 산중에 노스님이 계셨더랬다. 그런데 하루는 동자승과 함께 배추를 씻던 중 잘못으로 배추 잎사귀 하나가 물에 씻겨 떠내려갔다. 이를 본 노스님은 그것을 잡으려 하다가 헐레헐레 십 리나 되는 긴 계곡물을 따라 내려가게 되었다. 스님이 허둥지둥 무엇을 찾으려는지 애쓰고 있자니, 마침 그 옆을 자나던 마을 사람 하나가 이 모양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
"스님, 거기서 무얼 하십니까?" "뭔가 잃어버린 게 있어 이러고 있네."
얼마 후 스님은 웃으면서 한쪽 손을 번쩍 치켜 들어올렸다.
"바로 이것 때문일세."
그 스님의 손에는 떠내려온 씻다만 배추 잎사귀 하나가 들려 있었다.
불가에서는 식사를 할 때 음식을 남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기가 먹을 양만큼 알맞게 덜어서 먹고 가져간 음식은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워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심지어 스님들은 바리때에 행여 밥풀 하나라도 남길세라 물로 말끔히 부셔서 먹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쌀 한 톨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절약하는 마음이다. 이 우주에 있는 한 방울의 물도, 단 한 톨의 곡식도 귀중한 수고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누구든 함부로 버릴 권리가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씻겨 내려간 배춧잎 한 장을 찾기 위해 십 리 계곡을 따라 내려간 스님 얘기는 다소 과장이 섞인 얘기라고 생각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함부로 버리는 음식물 찌꺼기 때문에 골모리를 앓고 있는 요즘, 한번쯤 새겨볼 만한 얘기가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이웃나라 일본에도 이에 못지않게 모범을 보인 훌륭한 스님이 많이 계셨다. 그 중 데키스이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이 데키스이 스님이 젊은 시절 기산 스님을 모시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기산 스님이 목욕을 하고 남은 물을 보자 무심코 땅에 버렸다. 그러자 이를 본 기산 스님이 엄히 꾸짖었다.
"이보게 스님, 왜 그 아까운 물을 그냥 버리시오? 목말라 하는 저 나무에라도 주어야 하지 않소! 이 절 안에 있는 물은 한 방울이라도 함부로 버릴 권리가 없다는 것을 왜 모르시오!"
이 말에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그때부터 자신의 이름도 '한 방울의 물'이란 뜻의 이름인 데키스이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약한다는 것이 때론 인색하다는 의미로 잘못 오해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절약이라는 것은 아껴 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절약하는 사람은 검소하게 살고 자신의 돈을 아끼면서도 남을 돕는 일에 적극적일 수 있다. 반면 인색한 사람은 남들에게 베푸는 마음이 부족한 사람을 의미한다. 인색한 사람들은 어려운 이웃을 보아도 도와줄 줄 모른다. 오직 소유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베푸는 즐거움과 행복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탈무드'에 보면 사람의 유형은 대체로 네 가지로 나뉘어진다고 한다. 첫째, 내것은 내것이고 네것은 네것이라는 유형으로 보통 다수의 일반적이 사람이다. 둘째, 내것은 네것이고 네것은 내것이라는 유형으로 이는 변태적인 사람이다. 셋째, 내것도 네것이고 네것은 물론 네것이라는 유형인데 이러한 사람은 거의 드문 편으로 정의감이 강한 사람으로 말할 수 있다. 넷째, 내것은 내것이고 네것 역시 내것이라는 유형, 이는 가장 나쁜 사람이다. 이처럼 소유에 대한 네 가지 태도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전혀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내가 만난 이 택시 기사분은 이 중 어디에 속할까? 아물도 세번째에 해당하는 정의감 있는 사람은 아닌지. 그는 간혹 오해를 받아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삶이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나 혼자만 절약하고 잘 사는 것보다는 모두 함께 노력하고 나누려는 이 기사의 갸륵한 마음이야말로 우리 모두 본받을 만한 점이라고 생각했다.
부정한 돈, 고약한 악취가 나는 돈이 오가는 이 사회 다른 한쪽에서는 이처럼 떳떳하고 근면하게 벌어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사는 이러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이끌어가는 숨은 공로자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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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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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2. 묘청의 반란 : 총체적 난국을 주도하기 위한 대전
인종의 서경(평양)천도론
'이자겸의 반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건국한 지 200여 년 만에 왕실은 외척을 중심으로 한 문벌귀족에게 실질적인 왕권을 빼앗겨 나중에는 역성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 왕권이 극도로 미약해졌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당대의 인종도 뼈저리게 실감했을 것이다. 이자겸의 반란이 평정된 후 다음 해에 인종은 서경을 돌아보면서 15조항의 유신정교를 선포하였는데, 이것은 그동안 유명무실해진 왕권을 회복하려는 인종의 의지가 내포된 조치였다. 또한 인종의 서경 방문은 개경의 궁궐이 완전히 초토화되어 잿더미로 변해버린 지경에서 새로운 곳에 천도할 결심을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미 태조나 광종 등 오랜 시간 동안 국가의 수도로 거론되어 왔던 서경을 인종이 염두해 둔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즉 인종은 천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게다가 당시 유행했던 풍수설은 인종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묘청의 반란은 이러한 시대적, 역사적 필연성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인종이 천도를 꿈꾸었던 이유는 단순히 이자겸의 반란을 겪었기 때문이 아니다. 당시 개경을 중심으로 한 문벌귀족들은 변란이 진행되는 동안 하급 관료나 군장 세력과는 달리 왕권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줄 만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토지와 많은 노비 등 풍부한 경제적 기반을 누리고 있던 이들은 타성에 젖어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유교 정치이념을 표방하여 평소 충의 윤리를 강조하던 귀족세력이 막상 사태가 급박해지자 소극적인 태도로 나왔을 때 인종은 심한 배신감에 시달렸다. 인종이 서경을 방문하여 서경 세력의 대표격인 묘청와 정지상 등과 가까워져 그들의 도움으로 척준경을 제거하게 된 것도 이러한 정치적 변동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서경천도론의 대두는 단순히 인종의 심리적인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들의 기득권과 계급적 입장만을 지키려는 개경 세력의 부패와 부조리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다가 서경 천도가 당시 유행하고 있던 풍수설에서 그 이론적인 근거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인 관심 대상으로 부각되어, 당시로서는 이자겸의 몰락과 함께 서경은 새로운 매력을 지닌 수도 후보지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결국 서경천도론은 왕실과 개경귀족 간의 대립과 갈등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북진정책 대 사대정책
1126년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은 일단 진압되었으나, 인종 때의 국내외 정세는 매우 불안하였다.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으로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해이해져서 수도 내의 분위기는 흉흉해졌으며 밖으로는 여진족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져 고려에 대하여 외교적인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고려가 어려움을 겪게된 것은 수도인 개경의 지덕이 쇠약한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나라를 중흥하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려면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자겸의 반란이 있기 전 해인 1125년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요(거란족)를 멸망시킨 다음 고려를 넘보기 시작하였다. 이 해 5월에 고려 사신이 금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금은 고려의 국서 내용이 불경하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이는 고려를 복속시키려는 사전책이었다. 금나라는 점점 고려를 협박하여 속국의 위치를 지키라고 다그쳐왔고, 고려 정부에서는 이를 놓고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이때는 이자겸이 세력을 잡고 있었기에 일부 관료들이 금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지만 이자겸은 그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금나라에 사대하자고 주장하였다. 물론 당시 고려의 군사력으로서는 금나라를 이길 가능성이 없었지만 이보다 이자겸은 자기의 세력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이러한 굴욕적인 정책으로 결정지었다. 이러한 사대적인 정책은 이자겸이 몰락한 이후에도 개경 세력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이에 반대하고 나선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묘청이었다.
'묘청의 난'은 그 주동 인물의 신분이 승려였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한국 역사상 승려의 신분으로 난을 일으킨 경우는 거의 드물기 때문이다. 일개 승려가 어떻게 난을 일으킬 수 있었는지 알아보기 전에 먼저 묘청 개인의 신상 파악부터 해볼 필요가 있다. 묘청은 언제 태어났는지 역사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사망 연도가 1135년, 인종 13년이라는 것이 확인될 뿐이다. 그는 고려 중기의 승려로서 서경(평양) 사람이라고 하는데 속성이나 본관은 알 수 없다. 뒤에 이름을 정심이라고 고쳤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경위도 알 수 없다. 승려의 신분이면서도 그는 도교에 매우 심취되어 있었으며 그 방면에 박식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그의 여러 행적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풍수지리와 도참 사상도 익혀 이를 바탕으로 서경 천도를 주장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1128년(인종 6년)에 같은 서경 사람인 정지상과백수한, 김안, 문공인 등의 지지를 받아 서경천도론을 처음 제기하였다.
당시 고려 사회에는 신라 말기 이래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어서 묘청 등의 주장은 큰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곧 인종의 총애와 함께 백수한 정지상 등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인종은 1127년 이후 서경에 자주 방문하였으며 묘청의 건의에 따라 서경의 가장 좋은 명당인 임원역(평남 대동군 부산면 신궁동)에 대화궁을 짓게까지 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경 천도는 곧 실현될 듯이 보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 안에는 서경 천도 계획에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대화궁을 지으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금나라도 저절로 항복할 것이며 그밖에도 많은 나라가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장담하였으나, 준공 뒤에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대화궁 근처 30여 군데에 벼락이 떨어지고, 인종의 서경 방문 도중 갑작스러운 폭풍우로 수많은 인마가 죽는 등 불상사가 잇달아 일어났다. 이에 묘청 일파를 배척하는 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김부식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마침내 인종은 서경 방문을 단념, 이와 동시에 서경 천도 계획도 그만두게 되었다. 당초에 묘청 일파의 정치적 목표는 이자겸의 난 직후에 불안해진 국내외 정세를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교묘하게 이용하여 부패하고 무기력한 개경 귀족 대신 서경 천도를 성공시켜 서경인 중심의 새 정권을 세우고자 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금국정벌론 등 자주적 기백과 내정 혁신의 의욕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인심을 현혹시키는 얕은 속임수가 발각되고 재앙이 자주 생겨 점점 중앙에서 묘청의 천도 계획을 배척하는 여론이 고조되어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경천도 운동이 실패하자 묘청 일파는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은 1135년 정월에 서경의 조광, 유참 등과 함께 반기를 들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들은 물론 그밖에 개경인으로서 서경에 와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이와 함께 자비령 이북의 길을 차단하고 서북면 안에 있는 모든 고을의 군대를 서경에 집결하게 하고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라고 하였다. 이에 중앙정부에서는 김부식을 평서원수로 임명, 그에게 반란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출정하기 전에 묘청의 일파로서 개경에 있던 백수한, 정지상, 김안 등을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고, 좌.우.중 3군을 거느리고 평산역, 관산역 등을 거쳐 성천에 이르렀다. 거기서 반역자를 처단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여러 성에 보내어 다시 3군을 지휘하여 연주를 거쳐 안북대도호부(안주安州)에 다다랐다. 그 과정에서 많은 성들이 중앙정부군에 호응, 협력하게 되어 정세는 정부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김부식은 7, 8차례에 걸쳐 서경에 사람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권유하였다. 이에 반란군의 실권자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는 묘청, 유담, 유호(유담의 아들)의 목을 베어 바치는 조건으로 항복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실제로 이들의 목을 베어 윤첨 등에게 주어 개경으로 보냈으나, 개경 정부에서는 오히려 윤첨 등을 옥에 가두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안 조광 등은 항복하여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이에 서경 반란군은 개경 정부의 어떠한 회유나 교섭 제의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조광은 인종이 보낸 김부, 내시 황문상을 죽였으며 김부식이 보낸 녹사 이덕경도 죽였다. 이로써 반란군의 굳은 결의를 엿볼 수 있다. 이와 함께 반란군은 정부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선요문에서 다경루까지 강을 따라 성을 쌓았다. 이 성은 1,730칸이었으며 그 사이에 여섯 문을 만들어 놓았다. 정부군은 서경성 바로 밑에까지 진격, 중.좌.우.전.후의 5군으로 나누어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으나, 반란군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크게 고전하였다. 이처럼 반란군은 조광이 저항을 다짐한 이래 1년 넘도록 완강하게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성 안의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마침내 1136년 2월, 정부군은 총공격을 감행, 서경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패배를 자인한 조광을 비롯한 반란군 지도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하여 묘청이 시작한 반란은 조광 때에 이르러 막을 내렸다.
서경천도론은 북진정책의 산물이었다
이상이 정사를 참조하여 간단히 추린 묘청의 반란 내역이다. 일반적으로 묘청난이 갖고 있는 특징을 논할 때 1)왕권에 도전하지 않은 점 2)국호, 연호를 정하면서 왕을 새로 옹위하지 않은 점 3)그들 스스로 왕에게 거사 소식을 전달한 점 등을 들고 있다. 일찍이 묘청난에 대해 정밀한 분석을 해놓은 사학자는 신채호이다. 신채호는 이 묘청의 난을 낭불 양가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하고, 이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여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하였다. 여기서는 신채호의 견해에 대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묘청의 난이 진압된 뒤 고려 사회는 표면상 평온을 되찾았으나, 그 반란이 고려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우선 서경의 권력 구조상의 지위가 크게 격하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 권력 구조의 균형도 깨졌다. 즉, 서경 세력은 개경의 문신 귀족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여 왔었는데, 서경 세력의 쇠퇴로 개경 귀족세력이 독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문신 귀족세력은 더욱 득세하게 되어 왕권마저 능멸하는 풍조가 널리 퍼졌다. 따라서 당시 문신 귀족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적, 사회경제적인 모순과 폐단은 뒤에 일어난 무신정변위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얼핏 보면 묘청의 난이 황당무계한 풍수지리설에 근거로 한 광신에서 비롯된 듯한 인상을 받기 쉽다. 그러나 그 이면을 파헤쳐 보면 이 반란이 엄청난 정치적, 사상적 대립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묘청의 난은 우선 옛고구려 강역 수복운동(이하 수복운동이라고 줄여 부르기로 한다.)의 전통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 멸망 이후, 그리고 신라 말기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끊임없이 전개되어온 수복운동은 고려가 개국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려가 중국을 염두에 두고 한반도에만 활동 영역을 국한시킨 것 같지만 고려초 여러 왕들은 기회만 닿으면 옛강역을 되찾기에 부심한 흔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려를 흔히 신라를 이은 후계자로 보기도 하지만 이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것에 비유하여 고려가 후삼국을 통합하여 단일 왕조를 이루었기에 그런 역사적 평가를 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 사이에는 건국 이념 차원에서 커다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신라는 애초부터 한반도의 중북부 이남에 민족 활동 영역을 국한시킨 것은 둘째치고 민족적인 경륜이 없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백제, 고구려 두 강국의 침공을 당해낼 수 없어서 자주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문무왕대까지는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 두 강국을 패망시켰다. 이에 백제, 고구려의 유민들이 끊임없이 당나라에 대항하자 신라는 뒤늦게나마 이러한 항쟁을 이용하여 대동강 이남의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는 신라와 당이 애초부터 맺은 공약이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신라는 대동강 이남의 백제 땅과 고구려의 남쪽 영토를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였고 그 이상의 국토 확대라든가 평양 이북의 고구려 옛땅을 수복하는 데에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더군다나 수도의 위치도 한반도의 중심지가 아닌 경주에 그대로 두어 강제 통합에 의한 민족적 갈등을 해소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만일 신라가 진정 민족적 화합을 원했다면 과감하게 옛백제의 땅에 천도한다든가 하는 가시적 조치를 취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경주에 연연했다는 것은 결국 신라는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백제나 고구려를 단지 점령지로만 이해하였다는 점과, 별다른 개혁 의지도 없이 통치 기반을 지키기에 급급했다는 점을 뜻한다. 그러니 자연히 신라 왕조의 정치적 이념은 대동강을 넘을 수가 없었던 것이며 실제로 신라가 멸망하기까지 역사 기록에서도 신라가 그러한 이념을 세우려고 노력했던 흔적을 별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고려는 이런 점에서 신라와 상당히 다른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통일 전부터 고구려를 위해 신라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한 바 있다. 이것은 궁예의 영향이 컸다는 점도 뜻하는 것이지만 그가 송악을 중심으로 한 지방 세력으로 있을 때부터 중앙 정부인 신라 왕실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아울러 나타내는 말이다. 그가 궁예와 쉽게 결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동질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이 당대의 민심이었다는 것을 왕건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그가 궁예를 몰아내고 세력을 거머쥐었지만 궁예의 사상만은 인정하여 그의 측근 사람들을 과감히 기용한 것도 왕건이 단순히 임시방편으로 그러한 주장을 펼친 것이 아님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왕건은 새 나라의 국호를 궁예가 고구려의 후예라고 자처하면서 명명했던 '고려'로 정했다는 것은 위의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국가의 태조가 된 왕건은 막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고려말의 문신인 익제 이제현의 말에 따르면, 왕건은 후삼국 통일 전부터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서경)을 비롯해서 북쪽 국경지대를 자주 돌아보았다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왕건이 삼국 통합 과정에서 상실한 고구려의 고강을 되찾으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왕건은 건국 초기부터 한반도 통일에만 연연하지 않았다고 익제는 평가하고 있다.
익제의 평가가 왕건 개인에게만 국한되고 있지만 사실은 당시의 문무 대신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이런 여망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만일 민중들의 여망이 없었다면 왕건도 그러한 뜻을 표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당시의 민중들은 신라의 삼국 통합이 얼마나 민족적으로 역사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는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민심에 의해 역사가 움직인다는 것을 여실히 볼 수 있는 단적인 예인 것이다. 그래서 왕건은 신라의 영토를 넘어서서 대동강 이북, 즉 압록강 지역을 일단 수복의 일차 목표로 삼았던 것도 당대 백성들의 염원을 반영한 증거인 것이다. 고려 태조는 건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고구려의 고도 평양은 이미 황폐한 지 오래고 여진족들이 거기에 드나들어 변경의 백성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으니 그 방비를 철저히 해야겠다'고 명하였다. 또한 황해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백성들을 평양에 이주시켜 부흥을 꾀하는 한편 평양을 대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충신들을 보내 군사력을 키우는 등 북방 정책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아직 후삼국이 통일되기도 훨씬 전이었다. 아직 후백제와 신라와의 싸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러한 과감한 정책을 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바로 왕건은 백성들의 여망대로 고구려의 옛땅을 수복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뒤이어 왕건은 평양성을 쌓고 평양도호부를 다시 서경으로 승격시킨 뒤, 몇 년 뒤에는 중앙정부와 대등하게 서경의 관제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수복운동은 고려 태조 이후의 역대 왕들에게 이어졌다. <고려사>에 따르면, 왕건은 신하들에게 통일이 이루어지면 평양에 도읍하겠다는 계획까지도 밝혔다. 이러한 계획은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고려 3대 왕인 정종은 태조의 뜻을 이어 947년에 서경 왕성을 쌓은 뒤에 서경 천도계획을 세워 궁궐 조성 등 사전 작업을 착수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종은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죽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를 이은 광종은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로 개칭하여 평양을 대등한 위치로 격상시켰다. 이렇게 볼 때 서경을 중시한 역대 왕들의 노력은 민중들의 뜻을 반영함과 동시에 그 사기를 진작시키고 나아가 북방 개척의 중심지를 서경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수복운동이 있었기에 성종 때에 있었던 그 유명한 '서희의 담판'이 가능했던 것이다. 서희는 거란족과의 담판에서,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이며 또한 역대 이래로 평양을 도읍지로 삼았기 때문에 이곳은 고려의 땅이라고 강변하였다. 서희의 말은 단순히 논리적 비약이 아니라 계속된 수복운동의 결과인 셈이다. 서희의 담판으로 차지하게 된 압록강 지역은 그후 윤관이 9성을 개척함에 따라 고려의 땅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으로 9성은 반납되었고 강경해진 여진족은 금이라는 나라를 세워 고려를 위협하였던 것이다.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만주 일대에서 융성했던 발해가 거란에 의해 패망했을 때 고려 정부는 이들 유민을 동족으로 여겨 받아들이면서 거란과는 일절의 국교도 끊었다는 점이다. 이는 고려가 발해를 동일 민족국가로 여겼다는 것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고려는 발해의 패망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고려 태조는 발해가 망한 뒤 친척의 나라인 발해가 거란에게 패망되었으니 그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하면서, 후진의 왕에게 함께 거란을 공격하자는 뜻을 전해달라고 중국 서성에서 온 한 승려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이상에서 볼 때 고려는 계속해서 수복운동의 차원에서 평양을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묘청의 서경천도론이 단순히 그가 표방한 풍수지리설에만 의거하여 일어났다고 본다면 편견을 낳을 우려가 많다. <고려사>에서 묘청을 요역이라고 부른 것도 계산된 정치적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묘청의 난은 내부적으로 볼 때 서경 세력과 개경 세력간의 왕을 둘러싼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권력과 부를 유지하려는 개경 세력의 부패와 부조리는 결국 왕권 자체마저 위협을 받을 정도로 극대화되어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요구하게 되었다. 태조 이래로 천도의 대상이 되었던 서경 세력은 부패한 개경 세력을 척결하고 개혁 정치를 펼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개경을 중심으로 한 문벌귀족들이 정권을 재장악함으로써 고려의 국운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신들의 반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묘청난에 참여한 농민들의 투쟁을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된다. 김부식의 군대가 서경을 포위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반항한 이들은 바로 농민들이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묘청의 난이 농민 항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당시 기득권 세력인 개경의 문벌귀족들에 의해 자행된 구조적 모순이 얼마나 극심했던가를 반증하는 셈이다. 묘청난이 갖고 있는 한계점은 너무 지나치게 도참사상과 풍수설에 이념의 근거를 두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당대에는 큰 장점이기도 했지만 이것이 반대 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하여 지지 기반을 크게 약화시켰다. 또한 민중적 지지를 확대해 나가지 못한 점도 아울러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일반 농민들이 아직 계급적 인식을 갖지 못한 시대적 한계이기도 하다. 결국 묘청의 난이 실패한 후 고려는 다시 왕권이 미약해져 문벌귀족들이 득세하게 되어 새로운 개혁을 바라는 민중들의 요구를 수렴하지 못한 채 내리막길로 치달았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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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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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둘째 묶음: 아름다운 순간들
창을 사랑하며
1 '창을 사랑하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도 부를 수 있는 시간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김현승 시인의 <창>이란 시를 나는 종종 창에 기대어 읊어본다. 내가 수녀원에 와서 제일 처음 쓴 시의 몇구절도 다시 읊어본다.
'창은 움직이는 것들을 불러세우고 서서히 길을 연다 꿈꾸게 한다 기쁨을 데려다 꽃피워주는 창은 고운 새 키우는 숲 창 밖의 숲마을은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밝아오는 고향 갑자기 꽃밭이 되어 나를 부르러 오면 나는 작아서 행복한 여왕이 된다 창은 나의 창은 오늘도 자꾸 피리를 분다 끝없이 나를 데리고 간다'
글로 다 적어두진 못했지만 창을 통해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꿈꾸고 생각했던가, 창은 늘 많은 상상을 가능케 한다.
2 멋진 그림이 새겨진 색유리창도 아름답지만 아무 장식이나 무늬가 없는 투명한 유리창도 아름답다. 이른 새벽 성당에 앉아 서서히 밝아오는 햇빛과 나뭇잎의 초록으로 빛나는 창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는 고마움과 기쁨이여.
3 창이 있음으로 아픈 이들도 병석에서 사계절의 변화를 바라볼 수 있고, 창이 있음을 나도 매일 식당에서까지 산을 내다볼 수 있으며, 멀리 있는 바다를 가까이 끌어다 가슴에 담을 수도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해질 무렵, 마음을 비우고 창가에 서면 혼자라도 쓸쓸하지 않다. 창가에서 바라보는 하늘의 별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루 중의 어느 시간을 우리는 창가에서 기도하며, 누군가의 맑은 창으로 열려야 하리라.
4 비 오는 날. 바람 부는 날, 유리창은 묘한 소리를 내며 창 밖의 세계로 나를 초대한다. 누군가 문 밖에서 울고 있음을 깨우쳐준다. 흰 눈 펑펑 쏟아지는 겨울날, 창은 눈꽃 성에꽃 가득 긴 모습으로 나를 아름다운 동화의 나라도 데려간다. 눈나라의 하느님을 만나게 한다.
5 버스나 기차를 탔을 때, 어쩌다 창가에 앉게 되면 여행이 더욱 즐거워진다. 차창으로 보이는 산, 들, 강, 집, 사람들 모두가 새롭고 반갑고 정답다. 살아 있는 사람만이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즐거워할 수 있음도 더욱 새롭게 느껴본다.
6 오늘은 창가에서 한 장의 엽서를 쓴다.
-이 세상에 없는 벗 요한에게
어려서부터 유리창이 많은 집에 살고 싶은 꿈을 나는 수녀원에 와서 이루었지요. 창을 통해 나에겐 날마다 새 하늘 새 땅이 열렸답니다.
좁은 감방에서 넓은 창문을 그리워하는 그대의 편지를 받던 날, 나는 유리창 대신 푸른 시를 적어보냈고, 사형수인 그대는 기쁨의 창 하나를 마음에 달았다고 했습니다. '죽어서도 기도만은 멈추지 않겠다'고, 내게 늘 핏빛 짙은 사랑을 고백하던 그대는 이제 마지막 흰 옷을 입고 창문이 필요 없는 나라로 떠나고 말았지만, 창가에 서면 그대의 목쉰 소리가 가까이 들려옵니다.
오늘도 창을 통해 하늘과 햇빛과 바람을 그리워하는 그대의 남은 동료들을 기억하며 내 마음의 창을 오래오래 열어둡니다. 그대가 그토록 애송하던 나의 시 <장미의 기도>를 5월의 하늘로 띄어올립니다. 장미의 계절에 먼나라로 떠난 그대를 기억하며-.
피게 하소서, 주님 당신이 주신 땅에 가시덤불 헤치며 피 흘리는 당신을 닮게 하소서 내 뾰족한 가시들이 남에게 큰 아픔 되지 않게 하시며 나를 위한 고뇌 속에 성숙하는 기쁨을 알게 하소서 ... 오직 당신 한분 위해 마음 가다듬은 슬기를 깨우치게 하소서 죽어서 다시 피는 목숨이게 하소서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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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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