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3 -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제1장 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동양에는 왜 유일신의 종교가 없는가
동양인들은 동시에 유교, 불교, 도교의 신자라고 한다. 이 말은 동양의 사상들이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격을 같이한다는 의미를 가진 것이다.
김성기(중국문화대학 철학연구소 졸(문학 박사), 현재 성균관대 유학, 동양학부 조교수)
얼마 전 첨단 정보기기 회사 기공식에서 한복을 차려입은 외국인이 고사를 지내는 모습이 보도된 적이 있다. 한국의 종교적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장면이다. 한국과 동양에서는 유일신이 없다고들 한다. 절에 가면 부처님께 열심히 절하고 불공도 드려 합격을 기원하는가 하면 집에 가서는 조상신을 극진히 모시고 집안의 복을 빌기도 한다. 기독교 신자, 불교 신자도 점을 치고 사주와 관상을 보거나 각종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새로 건물을 짓거나 신규 사업을 벌일 때 터줏대감에게 큰절을 올리며 고사를 지낸다. 이처럼 한국인은 무수한 신을 잡다하게 섬긴다. 따라서 동양에서 절대신이나 유일신이 없다는 말은 설득력을 갖는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의 종교를 비교할 때 서양의 종교는 유일신 신앙으로, 동양의 종교는 자연신론이나 범신론으로 분류한다. 동양인들은 유교의 신자인 동시에 불교, 도교의 신자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사이에서 모순이나 충돌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유학의 관모를 쓰고, 도교의 옷을 입고, 불교의 신발을 신었다."라는 말을 한다. 또 삼교는 "동일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세 개의 길"이고, '꽃, 잎, 씨와 같이 모두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또 "도교의 단법, 불교의 유물 그리고 유교의 윤리는 궤를 같이한다."고 한다. 이런 말들은 모두 동양의 사상들이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격을 같이하고 있다는 말이며, 그 특징은 공통적으로 천지 자연에 신성함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세 신앙이라고 불리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셈(Sem)족의 자손들로써 몇 가지 공통점으로 가지고 있다. 가장 독특한 점은 동일한 하느님을 섬기고 있는데 그 신의 속성은 유일한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 자신 이외의 모든 존재를 창조한 하느님이다. 이 하느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으며 피조물이 창조주가 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동양에는 왜 유일신의 종교가 없을까?' 이 물음에는 동서양의 사유 형태에 대한 매우 중요한 차이가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동서양의 사유 차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이 물음의 의미를 명확히 밝혀 둘 필요가 있다.
유일신의 종교는 과연 없었는가
'왜 없었는가'란 물음은 우선 '없었다'는 사실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다. 또 그 물음 속에는 가치판단의 의미도 동시에 함축되어 있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서양의 종교학자. 심지어 철학자들도 종교에는 우열의 구분이 있다고 믿었다.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교리를 비교해 보면 종교의 우열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도교는 인간 이상의 힘을 믿기는 하지만 인간성 자체에 대한 윤리적인 존경심이 없기 때문에 유교보다 열등하고, 유교는 내세관이 없기 때문에 불교보다 열등하고, 불교는 창세주관이 없기 때문에 힌두교보다 열등하고, 힌두교는 인격신관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보다 열등하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일신이자 인격적 신을 전제로 하는 셈족의 세 형제 종교, 곧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양에는 왜 유일신의 종교가 없었는가?' 이런 식의 질문은 흔히 서양의 입장에서 동양의 가치들을 평가할 때 즐겨 쓰는 질문의 방식이다. 예를 들면 '동양에서는 왜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는가?' '동양에서는 왜 논리가 없었는가?' 심지어 20세기 중반까지도 논의된 '동양에는 왜 철학이 없었는가?'라는 질문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들은 모두 사실의 판단과 가치의 영역에서 서구 중심주의의 입장에서 나온 질문이거나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자기비하적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과연 동양에는 유일신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는가
동양에는 인격성을 갖춘 유일신이 없었다는 것이 사실일까? 보편적인 종교사의 관점에서 볼 때 동양에서도 서양과 거의 같은 개념의 유일신 관념이 있었다는 견해가 있고, 반대로 동양에는 유일신의 개념이 없었다는 입장이 있다. 특히 중국 상고대의 왕조인 하, 은, 주의 경우에는 서양과 거의 유사한 보편적 종교사의 흐름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주장이 최근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하나라의 종교는 토테미즘,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의 자연신론적 다신교의 형태였고, 은나라와 주나라의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인격신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갑골문, 금문, 시경, 서경 등의 자료에 의하면 은나라의 숭배대상이었던 신은 제 또는 상제라고 하였고, 은나라 다음 왕조인 주나라의 신은 천이었다. 이 '제'와 '천'은 의지를 가진 인격적 존재로 길흉화복을 주재하는 유일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은나라의 상제는 그 권위가 막강한 인격신인데, 그가 통괄하는 범위는 비, 바람, 구름, 우뢰와 도시건설, 전쟁, 인간사의 길흉, 군왕의 길흉, 농경과 수확 등 모든 것에 미칠 정도였다. 당시 상제에게 점을 칠 때에는 거북의 등에 점칠 내용을 새겼다고 하는데 이것이 갑골문이다. 갑골 복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문의하기를, 왕이 파나라를 정복하려는데 상제께서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파나라를 정복하지 말까요?" "8월, 7일째 되는 날 점을 쳐서 다음과 같이 문의하기를, 왕이 이곳에다 읍을 만들려고 하는데 상제께서 윤허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여기에 도읍을 세우지 말아야 할까요?" "1월, 45일째 되는 날 점을 쳐서 쟁이라는 사람이 묻기를, 상제께서 내게 가뭄을 내리시겠습니까, 내리지 않으시겠습니까?"
또 은나라 다음의 왕조인 주나라 초기의 사료로서는 그 역사적 가치가 고증된 "서경"의 제편과 "시경"의 내용을 들 수 있다. 이 두 자료에 나타난 당시의 천과 상제 관념 역시 여전히 인격천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주초의 경전에 따르면 천은 모든 백성을 낳고, 천명을 내려 정권의 흥망을 결정하고, 죄악을 징벌하는 인격신이며 주재자적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유일신에 가까운 성격을 지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양적 사유에서 유일신이 아예 없었다는 것은 옳은 사실에 입각한 결론이 아니다. 보편적 종교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동양의 경우도 샤머니즘과 애니미즘 그리고 토테미즘의 초기 종교 형태를 공유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후 은나라와 주나라의 중기까지는 서양과 같은 유일신의 개념이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일신'에서 '자연신'으로 전환의 길
동양의 사유에도 종교사적 의미에서 유일신에 가까운 상제나 천이 있었다는 사실은 '없었다'가 아니라 차라리 전환되었다는 것을 뜻함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환되었던 것인가? 중국 역사상 최고의 격동기로 기록되는 춘추 시대에는 온갖 사상가들이 일어나 상고대의 사상을 재해석하는데, 이를 제자 백가 사상의 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기에는 상고대의 상제, 천, 신 등의 인격적, 초월적 존재 위주의 사유에서 벗어나 인간을 위주로 하는 인식의 변화가 일어난다. 백성이 신의 주인이라는 사상이 나오는가 하면, 요괴스런 일은 인간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사상, 길흉은 사람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지 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상, 그리고 제사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사상 등을 제시한 여러 개혁가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자산은 드디어 "하늘의 도는 멀고 사람의 도는 가깝다."는 혁신적 사상을 탄생시킨다. 이러한 서주 말 동주 초에 걸친 사상의 동요는 '하늘을 원망하는 시'라는 장르까지 나올 정도로 천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극에 달하게 한다.
공자에게도 천명과 천의 초월적, 인격적 성격은 점차 약해지고 각 인간의 내면적 덕이 중요시 된다. 인간은 점차 가치의 근원으로서 천, 상제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도가의 경우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천, 제를 해석하여 새로운 '천지'란 범주를 만든다. 노자에 의해서 천은 이제 지의 상대적 개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종래의 상제나 천 대신에 도, 자연, 천지의 개념으로 전환된 것이다. 노자는 "무는 천지의 시작에 대한 이름이요, 유는 만물의 어미네 대한 이름이다. 천하만물은 유에서 생기고, 유는 무에서 생긴다."고 하였다. 순자는 장자를 "자연에 가려서 인간을 알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그에게서도 '천지'는 철학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천지는 무한하므로 무한한 천지의 관점에서 볼 때 우주는 시작도 없는 끝도 없다고 한다. 장자에서도 상제 등 인격적 조물주의 관념은 소멸되었고, 그 자리에는 천지가 대신 자리잡게 된다. 장자 철학의 핵심은 자연, 천지에 있다. 천지는 시작도 끝도 없고, 공간적으로는 무한하다. 조물주는 상제가 아니라 도이며, 만물은 스스로 변화하고 무목적의 성질을 가진다. 공자의 뒤를 이어 "맹자"와 "역전"과 "중용"이 성립되는 전국시대(일부분은 한초)에 이르면 유가에서도 '천'이라는 고대 인격신의 의미가 자연이란 의미의 천지라는 용어로 된다.
"주역"은 동양적 사유의 특색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경전으로 늘 첫손에 꼽혀 왔다. "주역"은 점을 치기 위한 용도로 쓰인 '경'과 훗날 철학적 해석이 가해진 '전', 즉 '십익'으로 구성되어 있다. 춘추 시대까지 역은 주로 점서의 용도로 쓰였고, 전국 말기에 이르기까지 유가의 대표적 철학 사상서였다. 그런데 이 '십익'은 유가 사상가들이 당대의 사상적 도전을 수용하여 이를 융합해 낸 결과로 본다. 즉 전국 후기에 제자백가들은 서로 영향을 미치고 하나의 사상적 융합을 꾀하게 되는데,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유가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 바로 이 '십익'이라는 것이다. 이 "역전"의 천 관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천'이 '지'의 상대적 개념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즉 천이 주재적, 인격적 신의 의미에서 전환하여 천지 우주를 뜻하게 된다. '계사전'을 비롯한 십익의 곳곳에서는 천과 지가 주역의 주요한 두 범주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역의 의미는 천지와 동일하다." "역의 원리는 천지와 서로 유사하다." "역의 상징은 천지보다 더 큰 것이 없다."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주역에서의 천지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며, 만물의 생명이 이 천지의 교감에 따라 생성되고 발육, 성장하는 것이다.
"중용"에서도 대체로 '천도' '천지의 도' '천' '지' 등의 개념으로 표현되는 천지 자연을 강조한다. 이것 역시 이전의 이분법적인 천, 제 등의 상제 개념이 우주 자연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도가의 노자나 장자는 말할 것도 없고 선진 유가의 "중용"과 "역전"에 이르면 '천'은 이전의 인격적 의미의 신 개념을 떠나 '지'의 상대적 개념으로 자리잡으면서 우주를 해석하는 주요한 두 범주로 등장하게 된다. 이리하여 동양적 사유는 천지 속의 모든 만물, 즉 산, 강, 비바람, 초목, 심지어는 돌과 물까지도 포함되는 자연의 신비로움에서 초월의 의미를 찾아내는 자연신론적 특징을 갖게 된다. 이 사상은 훗날 천인합일 또는 물아일체의 사상으로 발전되는데 종적으로 보면 하늘과 인간이 합일되어 있고, 횡적으로 보면 주체와 객체를 이루는 대상세계와 주체가 하나이다. 따라서 동양인의 사고에는 신이라는 일신론적 개념이 근본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우주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운동과 변화라는 자연적인 법칙을 따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초자연적 지배자나 창조주라는 개념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왕양명은 천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인은 천지만물을 일체로 여기는 자이니, 그는 천하를 한집안 같이 생각하고 중국을 한 사람같이 본다. 만약 형체 때문에 간격이 생겨 너와 나를 분리시키는 것은 소인이다. 사람의 양지는 풀, 나무, 기와, 돌의 양지이니, 만약 풀, 나무, 기와, 돌이 사람의 영지가 없다면 풀, 나무, 기와, 돌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천지만물을 일체로 여기는 사상을 니담은 그의 책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유기체적 세계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특징을 '제정자가 없이 질서잡힌 의지들의 조화'라고 하였다. 이는 창조주로서 유일신을 전제하지 않는 동양의 자연관이 지닌 특징을 잘 지적한 말이다. 결론적으로 동아시아적 사유에서는 상제나 천의 인격적 의미는 점차 전환되어 자연이란 범주로 귀속되어 갔다. 그리고 자연(천)과 인간을 하나의 화해적, 유기적 통일체로 파악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은 하나'라는 천인합일의 사상이 나오게 된다.
초월 상실의 시대는 무슨 의미인가
그렇다면 자연신을 섬기는 동양의 종교와 유일신을 섬기는 서양의 계시종교를 비교하는 것은 아직도 유효한 것일까? 여기에는 여전히 유일신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입장과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입장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특히 무의미하다는 입장은, 위의 두 신관의 모형이 제출된 배경에는 헤겔 이래로 형성된 19세기의 동아시아관, 특히 '초월의 부재' '유일신의 부재'란 동양 종교에 대한 평가가 깔려 있으므로, 유일신을 기반으로 하는 계시종교의 우위를 전제로 한 비교의 틀이라 볼 수 있다면 21세기를 바라보는 오늘날에는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혀 다른 문명의 새 패러다임의 등장에 유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오늘날 서양의 종교계가 대면하고 있는 문제상황을 직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후현대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오늘날 서양의 '유일신'과 '초월'에 대응하는 동양적 사유의 의미를 물을 것이 아니라 서양의 '탈초월', 즉 유일신관이 의미를 상실해 가는 데 대한 동양적 사유의 참 의미를 묻는 것이 시의적절한 비교의 시각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오늘날 서양의 종교계가 맞고 있는 시대적 상황어는 한마디로 '신의 부재'와 '초월의 상실'그리고 '세속화'이다. 오늘날 서양에서 탈초월의 징후는 철학, 종교계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서양의 종교, 신학에서 신이나 초월적 관념이 급격한 해체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빚어진 문화적 충격은 서양의 문화에 다방면으로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신이 있다면 어떻게 이럴 수 가 있을까? 이때의 시대적 상징어는 '신의 부재'였다. 이에 따라 몇몇 선구적 기독교 신학자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시대적 상황어가 되어 버린 '신의 부재'에 대한 답변과 함께, 그래도 인간은 신의 보호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설득하려 하였다. 더구나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서양인의 정신적 공황은 극도에 달하게 된다. 유명한 철학자인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모든 문화는 그 비판까지도 포함해서 한낱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라며 서양문명에 대해 극도의 비판을 하였다. 이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이후 형성된 문화적 기후, 즉 전통적인 기독교는 세계대전을 사전에 막지도 못했으며, 전후시대의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지도 못했다고 평가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에 일군의 신학자 등은 하느님의 초월성이나 불안, 절망, 죄와 같은 종래의 주제가 전후의 세계상황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신학적 관심을 저 세상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에서 이 세상의 일이나 사건으로 전환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시대가 초월이나 유일신의 지위가 흔들리는 시대임을 알아 보았다. 이러한 시대상황은 1920년대 변증신학, 위기신학 이후 불트만(R.Bultmann)의 '성서의 비신화화론', 본회퍼(D.Bonhoeffer)의 '기독교의 비종교화' '기독교의 비종교적 해석'등에서 선구적 '탈초월의 조짐'을 드러냈고, 1960년대 이후 이들의 업적은 '신의 죽음의 신학' '종교의 세속화론' 등의 토론으로 이어짐으로써 서양의 종교사상과 문화 전반에 걸쳐 커다란 충격을 전해 주게 되었다. 이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만병통치약으로서의 신이나 작업가설로서의 신 등 서양적 유일신 개념의 무의미함을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서양에 종교상황은 한마디로 '세속화(secularization)와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로 요약할 수 있다. 동서양의 종교를 비교할 때 우열의 잣대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던 '유일신'은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서양에서 세속화의 결과 유일신의 지위만 흔들린 것이 아니라 자연마저도 극도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연에서 신성성을 앗아갔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늘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으며 자연을 고향으로 삼아 거기서 인간의 체취를 느끼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하면서 살아왔다. 특히 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연을 신성시하였으며, 자연의 배후에서 경외감과 숭배감을 자아내는 어떤 성스러운 힘과 생명력을 감지하곤 했던 것이다. 인간의 생존과 삶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하늘과 땅, 태양과 달, 물과 대지, 동물과 식물, 산과 강 등이 모두 그들에게는 신비한 생명력으로 충만해 있는 살아 있는 존재로 느껴졌으며, 자연은 어머니요 스승이요 신을 만나고 체험하는 신성한 곳이었다. 그들은 자연을 향해 열려 있었으며 자연은 그들의 삶에 깊이 관여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자연을 탈성화하고 자연에서 거룩함을 제거하였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인간과 자연, 인간과 만물의 격리와 파멸의 전주곡이 된 '탈성화'는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도대체 이런 신성함과 경외로움과 숭배의 대상이었던 자연을 누가 탈성화하고 거룩함을 제거하였는가? 자연의 탈성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 문명에 의해서이고 산업화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결부되어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문제인 환경위기를 산출하게 된 것이다. 이 환경위기를 야기한 근본적인 원흉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문명이 이념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기계론적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이 새삼 확인되고 강화된 것은 근대의 뉴턴과 데카르트에 의해서였다. 뉴턴은 우주를 정태적이고 폐쇄적인 동력학 체계로 보고 요소요소로 환원될 수 있는 하나의 커다란 기계로 파악했다. 자연을 죽은 대상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자연을 대하는 서양인들의 태도는 대단히 공격적이고 정복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종교는 신을 잃고 자연을 잃었다는 것이다. 현대가 탈종교상황이라는 것도 결국 종교적 신관과 자연관이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과 삶에서 찾는 신성의 동양적 특성
근대 이후 서양의 종교적 상황은 초월의 부재, 신의 부재, 유일신의 의미 상실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연에서조차 신성을 빼앗았다. 이러한 종교적 상황 아래서 종교학자나 신학자들은 바람직한 새 종교형태를 모색하게 되었다.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대안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연역적 대안, 둘째는 환원적 대안, 셋째는 귀납적 대안이다. 연역적 대안은 현대적 상황어인 '세속화'와의 대결에서 종교전통의 권위를 재규명하는 것이다. 서양의 종교로 말하면 다시 '하느님의 말씀'의 위대한 권위를 회복하고 유일신인 하느님의 말씀과 그 전파가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재확인하자는 것이다. 환원적 대안은 세속화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신의 말씀이나 권위를 더욱 세속화하여 하느님의 말씀 대신에 현대적 가치, 즉 인간들의 말로 대치함으로써 세속적 상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귀납적 대안은 종교적 발언들의 출발을 경험에 두자는 것이다. 이것은 세속화 시대에 종교의 의미를 완전히 무시하자는 환원적 방법도 거부하고 하느님의 말씀의 권위를 강화하자는 대안 또는 거부하는 태도이다. 연역적 대안은 권위를 다시 강조해 확고한 신앙심을 심어 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현대인들에게 갈수록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환원적 방법은 세속성의 수용이란 점에서 현대인들에게 설득력은 강할지 모르지만 약점은 종교의 의미 전부를 폐기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피터 버거는 제3의 대안, 즉 초월의 귀납적 접근만이 궁극적으로 타당할 뿐만 아니라 유일한 대안이란 결론을 내린다. 이런 논의는 종교의 의미를 유일신, 초월, 계시 등에서 찾지 않고 삶과 삶,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속에서 새롭게 찾아보려는 시도이다.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바른 이론이나 교리체계보다는 바른 실천임을 자각하자는 종교 다원주의의 기본 취지도 이와 맥락을 같이하다. 동양사상은 본래 유일신이나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고 천지자연의 운행과 하나가 되려는 수행의 과정을 중시하여 궁극적으로는 천인합일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헌대 종교학자인 피터 버거가 말하는 초월의 귀납적 모델과 가장 잘 부하보디는 것인지도 모르며, 이것이 현대 종교사적 전환기에 동양의 사유가 대안으로 떠오르는 이유이다.
'동양에는 왜 유일신의 종교가 없는가?' 이제 이 질문은 '신의 일식'이라고도 불리는 현대의 종교적 상황에서 동양의 종교가 갖는 의미를 차분히 되돌아보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참고 문헌
한국불교환경교육원 엮음, "동양사상과 환경문제", 모색, 1996. 이정복 편저, "현대 철학과 신학", 종로서적, 1987. 폴 F. 니터,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한국신학연구소, 1994. 길희성 외, "환경과 종교", 민음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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