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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31 호
단기 4341. 11. 17 (음력 10. 2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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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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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주 제2회 영주신춘문예
제2회 영주신춘문예, 전국 공모
인터넷 신문사상 전국 처음으로 공모하는 뉴스제주의 2009 신춘문예 마감일이 한달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각 장르별 문학 동인들로부터 응모에 따른 질의를 해오는 등 문단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창간 2주년을 맞는 뉴스제주의 '2009 신춘문예 전국 공모'는 문단의 역량있는 신인을 발굴 등단시키는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인터넷 신문으로는 전국 최초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모부문은 시, 시조, 수필등 3개부문이며, 시상은 3개부문에서 당선작 3편을 선정할 계획이다. 당선작에는 시, 또는 시조, 수필에 각 상패와 고료 100만원을 시상한다.
양대영 뉴스제주 사장은 "신춘문예공모는 그동안 뉴스제주를 사랑해 주신 독자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한 문화행사의 일환이다. 신춘문예 공모에 관심있는 애독자 및 문학 동인들의 많은 격려와 응모를 바란다"며 "2010년 제3회 신춘문예 공모시는 제주지역 문단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 보다 알찬 행사가 되도록 할 예정임"을 밝혔다.
한편, 제1회 영주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어떤 사랑에 대해"(이성이)는 창조문학신문사가 주최한 2008 전국 신춘문예 작품중 시부문 '왕중왕'으로 뽑혀 영주신춘문예의 위상을 한껏 드높인 바 있다.
▲공모분야 ; 시, 시조, 수필
▲시상 : 당선작 3편
(시상일자 : 당선작 발표시 발표)
▲응모기간 : 2008년 12월 9일까지 도착
▲발표 : 2009년 1월 1일
▲접수처 : 제주시 연동 280-15 삼무파크빌 뉴스제주 문화부
▲응모방법 : 등기우편
-응모 범위는 제주는 물론 인터넷망이 확보된 곳은 전국 어디서도 하며, 신춘문예 공모분야는 △시 △시조 △수필 등 3개부문으로, 응모작품별 분량은 시, 시조는 3편, 수필은 200자 원고지 20매 내외 분량의 3편이다. *****************************************************************************
경상일보 2009년도 신춘문예
단편소설, 시, 시조, 동화 4개 부문…12월10일 공모 마감
본사는 한국문학에 새바람을 일으킬 신인작가 발굴을 위해 2009년도 신춘문예를 공모합니다. 새로운 감수성과 치열한 문학정신으로 한국문학의 새 지평을 열 예비문인들의 많은 응모를 바랍니다.
▲ 공모부문 및 당선작 원고료 - 단편소설 : 70장안밖 500만원 - 시 : 3편이상 300만원 - 시조 : 3편이상 300만원 - 동화 : 30장안밖 300만원 ※ 200자 원고지 기준. 컴퓨터, 워드프로세서 원고는 반드시 A4용지로 출력
▲ 마감 : 2008년 12월 10일(당일 원고 도착분까지만 유효)
▲ 보낼 곳 : (우) 680-190 울산광역시 남구 무거동 299-10
경상일보 논설실 신춘문예 담당자
▲ 입상작 발표 : 2009년 1월 1일자 본보
▲ 유의사항
- 응모작품은 다른 신문·잡지 등에 발표되지 않은 순수창작물이어야 함.
- 같은 작품을 다른 신춘문예에 중복 투고하거나 표절 작품일 경우 심사에서 제외되며 입상 결정 후에도 당선 취소함.
- 원고 첫장과 맨 뒷장에 응모부문, 주소, 성명(필명일때는 본명 명기), 나 이, 연락처(일반전화, 휴대전화)를 반드시 명기할 것.
- 원고가 든 봉투에도 붉은 글씨로 '응모부문'과 함께 '신춘문예 응모작'이라고 명기할 것.
-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원고(단편소설, 동화)는 200자 원고지로 환산, 원고 첫 장에 매수를 기입할 것.
- 응모원고는 반환하지 않음.
▲ 문의 : 경상일보 논설실 신춘문예 담당자 052-22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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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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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깊지 못한 사람은 항상 입을 놀린다.(호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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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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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사람이름
남이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세조 때 병조판서가 되었다. 예종 즉위년(1468년) 시월, 남이는 역적으로 몰렸다. 장용대의 ‘진쟈근디·맹불생·이산’ 등이 남이와 한 무리가 되어 역적모의를 했다고 같은 부대의 ‘오마수’가 발고하였다. 맹불생을 잡아 묻자 자못 불지 않아 형을 가하니 불므로 목을 베었다. 진쟈근디 등 스물 남짓을 국문하였으나 오직 ‘보리·이산충’만 자복하였다.
밑말 ‘오마’가 든 이름에 ‘오마/오마이·오마동이·오마대·오마디·오마사·오마쇠’가 있고, 비슷한 이름에 ‘올마·올마대·올마디·올마지’도 있는데, ‘오마·올마’가 무슨 뜻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름접미사에 ‘-수’가 있다. ‘걸수·검수·난수·똥수·만수·말수·박수·손수·옥수’와 같은 사내이름에 쓰인다. 이름접미사 ‘-수’가 요즘에도 사내이름에 널리 쓰이는 것은 이러한 내림으로 보인다.
비슷한 이름접미사에 ‘-시’와 ‘-실’도 있다. ‘-시’는 주로 계집이름에 쓰이며, ‘막시·백시·복시·옥시·은시·학시’가 보인다. ‘-실’이 든 이름으로는 ‘검실이·넙실이·막실이·망실이·멍실이·몽실이·뭉실이·방실이·북실이’가 보인다.
훈구 세력에게 위협이 되던 남이·강순 등이 제거되었다. 예종은 신숙주·한명회를 비롯한 서른여덟 명에게 ‘익대공신’(翊戴功臣), 곧 ‘정성스럽게 모신 공신’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시간, 시각
현대인은 참 바쁘게 살아갑니다. 문명사회의 진보가 분·초를 다툴 만큼 빠르게 이뤄지다 보니 시간 관리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강조됩니다. 이것 저것 해야 할 것은 많은데 마음이 앞서면 되는 일 없이 스트레스만 가중되고 일의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이럴 때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한 뒤 하나 하나 추진해 가면 의외로 모든 것이 쉽게 잘 풀리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때(언제)'를 나타내는 말로 '시간'과 '시각'이란 용어를 가리지 않고 섞어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차이점을 거의 느낄 수 없지만 상황에 따라 구분해 써야 합니다.
'시각(時刻)'은 시간의 흐름에서 어느 한때를 가리킵니다. '해 뜨는 시각''대관령엔 이 시각 현재까지 폭설이 내리고 있다' '현재 시각이 5시30분을 가리키고 있다'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시각'에 공간 개념을 도입한다면 직선상의 어느 한 점으로 표시할 수 있지요. '점'이 '시각'이라면 무수한 점들의 모임인 '선'은 '시간'에 해당된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시간(時間)'은 '동안의 의미를 지닌 시각과 시각의 사이이자 그 집합체'를 말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은 돈이다' '성과엔 시간이 걸린다'에서 그 용례를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은 또한 무한히 계속되는 것이라는 데까지 사고의 폭을 넓히면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시간덩어리로 구성됐다는 재미난 결론에도 이릅니다.
갈매기살, 제비추리, 토시살
고깃집의 차림표에 적힌 갈매기살·제비추리가 혹 갈매기·제비 고기가 아닌가 의아해 하거나,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궁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갈매기살'은 돼지고기의 '가로막살'에서 온 말이다. '가로막'은 배와 가슴 사이에 가로놓인 근육질의 막으로, 한자어로는 횡격막(橫膈膜)이라 한다. '갈매기살'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면 우선 '가로막'에 접미사 '-이'가 붙어 '가로막이'가 되고, 다시 'ㅣ'모음 역행동화를 일으켜 '가로맥이'로 바뀐다. 이를 소리대로 적으면 '가로매기'가 되고, 'ㅗ'가 탈락하면서 'ㄹ'이 앞 글자의 받침으로 옮겨져 '갈매기'가 됐다. 신발 안쪽 바닥에 까는 얇은 가죽(안창)처럼 생겼다고 해서 '가로막살'을 '안창살(안창고기)'이라고도 한다. 보통 돼지고기는 '갈매기살', 쇠고기는 '안창살(안창고기)'로 구분해 부른다.
'제비추리'는 갈비 안쪽 흉추(가슴등뼈)의 몸통을 따라 길게 붙어 있는 띠 모양의 근육 살을 말한다. 갈비에 붙은 이 고기를 손으로 잡아 추리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제비추리'와 혼동하기 쉬운 단어로 '제비초리'가 있다. 사람의 뒤통수나 앞이마에 뾰족이 내민 머리털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비의 꼬리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갈비 안쪽에 붙은 고기 중엔 '토시살'도 있는데, 한복을 입을 때 추위를 막기 위해 팔뚝에 끼던 '토시' 모양을 하고 있다. 갈비를 부위별로 자세히 나눈 명칭인 이들 갈매기살(안창고기)·제비추리·토시살은 사투리로 생각하기 쉬우나 모두 표준어다.
먹거리, 먹을거리
1인당 하루 쌀 소비량이 두 공기도 채 안 된다고 한다. 먹을거리가 풍부해지고 식생활이 변화한 탓이다. '먹을거리'는 '먹을 수 있는 온갖 것'을 가리키며, 각 나라 고유의 먹을거리는 하나의 문화로 세계적 경쟁력을 갖기도 한다. 그래서 '먹을거리 문화' 또는 '먹거리 문화'라는 말도 쓴다.
그러나 '먹거리'라는 단어의 사용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과거 사전에는 대부분 '먹을거리' '먹거리'가 복수 표준어로 올라 있는 데 비해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연구원·1999년)은 '먹을거리'만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리'가 다른 말과 결합할 때는 '명사+거리' 또는 '동사의 관형형(-ㄹ/-을)+거리' 형태로 이뤄진다. 즉 국거리·일거리 또는 볼거리·땔거리 등의 형태가 된다. 따라서 '먹다' 동사의 어간 '먹'과 '-거리'가 결합한 '먹거리'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먹거리'를 인정하는 쪽은 '먹거리'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써온 말이며, 한자어인 음식·식품 등의 단어에 억눌려 잊어버릴 뻔한 값진 우리말을 되찾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거리'가 붙은 말은 아니지만 동사의 어간과 명사가 결합한 합성명사의 예로 덮밥·먹성·밉상 등을 들기도 한다. 이런 이유 등으로 '먹거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먹을거리'만 표준어로 인정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학교 문법은 '먹을거리'를 따라야 하겠지만, '먹거리' 또한 나름의 논리로 사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단어를 버려야 하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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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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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사랑 -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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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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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 조근호
한지로 창을 바르니 달빛이 난을 친다.
은은한 달빛 향에 시름은 잠이 들고
바람도 마실갔는가 방안 가득 쌓이는 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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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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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준에 가득한 술을 - 정두경
금준에 가득한 술을 슬카장 거후르고 취한 후 긴 노래에 즐거움이 그지없다 어즈버 석양이 진타 마라 달이 조차 오노매
<지은이> 정두경(鄭斗卿)1597~1673. 자는 군평(君平), 호는 동명자(東溟子). 이항복의 문인으로, 나이 14세에 별시에 급제하였고, 약관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참판 · 제학에 이르렀다. 병자년에 '비어절무 십조'를 들어 상소 하기도 하였다. 문장이 호방하고 풍자적이었다.
<말뜻> 금준(金樽) : 금항아리. 술단지를 미화한 말이다. 슬카장 : 실컷, 마음껏. 거후르고 : 술잔을 기울여 마시고. 오늘날에도 되살려 쓸 만한 옛말이다. 어즈버 : 아! 시조 종장 첫머리에 많이 쓰이는 감탄사이다. 진(盡)타 마라 : 다 지나간다고 걱정하지 말라. 오노매 : '오노매라'를 줄인 형태. '~노매라'는 감탄형 종결어미 '~는구나!'
<감상> 지은이가, 학자이며 시평가인 홍만종의 집에서 친구들과 담론의 꽃을 피우는 자리에서 불렀다고 한다.
금항아리에 가득한 술을 뜻이 통하는 친구들과 함께 실컷 마시고, 취한 뒤에 담소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노니, 즐거움이 한이 없다. 아! 해가 다 져 간다고 아쉬워하지 마라. 동쪽 하늘에 달이 돋아오니, 밤을 도와 마시면 더욱 좋지 아니한가.
뜻 맞는 친구와의 술자리는 이렇게도 즐거운 것, 인생의 즐거움이란 별 것이 아니다. 술 있고, 벗 있고, 달만 있으면 그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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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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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3 -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제1장 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인간과 자연은 하나로 볼 수 있는가
인간과 자연이 같은가 다른가를 묻는 질문은 어쩌면 어리석은 것일 수도 있다. 왜냐 하면 편견과 오만을 버리고 자연을 바라본다면 인간도 수많은 자연 생물속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전호근(성균관대 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성균관대 강사)
동양철학에서 나타나는 세계관은 서양의 그것 못지 않게 다양하다. 하지만 예외에 속하는 몇몇 철학자들을 제외하며 그 속에는 일관된 흐름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천인합일로 표현되는,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사유 형태의 전개이다. 멀리는 신화적 세계관에서 시작하여 고대의 제자백가사상, 중세적 질서의 정당성을 대변했던 주자학은 물론이고, 가까이로는 근세의 양명학에 이르기까지 동양사상의 기저에는 자연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의식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른바 동양의 사상가라면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자연과 인간을 아우를 수 있는 통일적인 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태도야말로 동양적 세계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 이와 같은 사유가 일반화될 수 있었던 원인은 동양인들이 마주했던 자연과 서양인들의 그것이 구체적으로 뚜렷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무시할 수 없다. 이를테면 서양문명의 발상지라 할 나일 강은 주기적으로 범람함으로써 일정 기간 동안은 비옥한 토지를 제공해 준다. 또 그리스 문명을 탄생시켰던 지중해의 기후는 온난할 뿐만 아니라 극심한 변화도 드물었다. 하지만 중국 문명의 발상지인 황하의 범람은 일정한 주기가 없다. 더욱이 대륙의 내부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은 모든 것을 황색으로 물들이고 수시로 한발이라는 대재앙을 몰고 온다. 곧 서양인들이 마주한 자연은 인간이 쉽게 대처하고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온순했던 반면, 동양의 자연은 인간의 저항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변화가 심했기 때문에 자연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거나 자연을 이용하려는 의지보다는 오히려 거부할 수 없는 섭리로 인식하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인간 중심적 사고보다 자연 중심적 사고가 일반화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곧 동양에서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식의 오만함 따위는 보편화되기 어려운 명제일 수밖에 없다.
인간과 자연은 어떤 점에서 같은가
'인간과 자연이 같은가 다른가' 하는 질문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을 묻는 정말 어리석은 질문일 수도 있다. 왜냐 하면 위가 모든 편견과 오만을 버리고 자연과 인간을 바라본다면 인간이란 수많은 자연 사물 속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간은 자연 속의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생성, 유지, 소멸이라는 필연적인 과정을 동일하게 거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짐승들처럼 생리적인 대사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며 일정한 수명을 가진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자연 속에 부속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연이 제공하는 각종 재화를 이용해서 생존하는 존재인 것이다. 곧 인간은 자연에 의존하는 존재이다. 자연 속의 사물들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다. 만약 그런 사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잠시도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의 차이는 크지 않다. 오히려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작용은 자연 속에서도 일어난다. 따라서 인간을 자연과 구분되는 대등한 존재로 인식하거나 우주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이상한 관점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런 입장은 노자와 장자를 비롯한 도가의 철학자들에게서 가장 적절히 드러난다. 그들은 자연을 완전한 존재로, 인간을 불완전하며 자연 속에 부속된 존재로 생각했으며 일체의 인위적인 행위를 배제하는 무위자연의 태도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유가의 철학자들도 이와 비슷한 입자이다. 유가의 경전인 "맹자"나 "중용"에서는 '성실한 것은 자연의 본질이고 인간은 성실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또 "주역"에서도 "자연의 운행은 건실하다. 군자는 이것을 보고 자신의 도덕성을 끊임없이 연마한다."고 했다. 자연의 운행은 어김이 없다는 점에서 성실하며 인간은 그런 자연의 성실성을 본받아 자신의 도덕성을 밝혀 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맹자"에서는 '인간의 내면 속에는 완전 무결한 본성이 있고 그 본성은 자연이 부여한 것'이라고 논의를 펼치고 있다. 자연의 본질이 인간에게도 갖추어져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유가의 철학자들은 자연을 인간 도덕의 근거로 보며 인간은 자연과 대등한 존재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근거는 인간과 자연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동일성을 선험적으로 규정한 명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도가와 유가의 철학자들이 동일한 관점에서 자연을 완전한 존재라고 여긴 것은 아니다. 유가의 철학자들은 자연 속에서 일정한 운행법칙을 찾아내고 그 부분에 가치를 둔다. 이를테면, "음을 억누르고 양을 선양시킨다."는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 위협으로 작용하는 객관적인 자연현상은 자연의 실조현상으로 여겨지고 부자연으로 규정된다. 곧 유가는 인간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자연의 도덕적 완전성을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다. 따라서 유가의 경우는 완전한 자연주의는 아니며 인간 중심주의가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도가의 경우는 모든 인간적 가치를 배제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을 기준으로 자연의 비인격성을 재단하지 않는다. 자연의 비인격성을 그 자체로서 완전한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인 셈이다. "천지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만물을 지푸라기로 여긴다."는 노자의 말에서처럼 자연은 인간에게 특별히 우호적이지 않다는 명제를 제기함으로써 개 한 마리 죽는 것이나 사람 죽는 것이나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입장은 송대에 형성된 주자학적 사유에 의해서 거의 완전하게 통합된다.
인간과 자연은 어떤 점에서 다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행위한다. 이는 자연 속의 다른 존재들과는 다르다. 그 중에서도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노동을 통해서 자연의 사물을 변형시키는 점은 다른 동물이나 사물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인간만의 특징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과 대립된 존재이면서 자연을 자신의 욕망에 적절한 방향으로 변형하는 적극적인 존재이다. 이를테면 인간은 농작물을 재배하고 짐승을 길들임으로써 자연이 제한적으로 제공하는 물질적 풍요를 증진시킨다. 또 의료기술을 발전시킴으로서 자연이 제한한 수명을 넘어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고 각종 질병을 극복하기도 한다. 동양의 철학자 중에서 이러한 점을 충분히 강조했던 사람은 묵자와 순자였다. 묵자는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파악한다. 곧 자연 속의 다른 동물들은 자연상태 그대로의 음식물을 먹으면서 자신의 존재로 보존할 수 있지만 인간만은 자연을 변형, 가공함으로써 생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묵자의 이러한 입장은 자연의 완전성을 부정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에게 자연은 여전히 경이와 외경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자에 이르면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일신된다. 순자는 무엇보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의 힘은 소만 못하고 빠르기는 말에 미치지 못하는데 도리어 소와 말이 인간에게 부림을 당하는 것은 인간이 사회조직을 구성하여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고 정복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파악된다. 예를 들어 인간은 댐을 쌓아 물길을 바꾸기도 하며 사막을 농경지로 개간하기도 한다. 이것은 자연 속에 원래부터 주어져 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물리적인 수단을 개발하고 조직적으로 대처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아울러 그는 인간과 자연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이며 양자간에는 어떤 유기적 연관도 없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행위의 도덕적 정당성 여부도 따라 자연이 변화하는 일은 없다고 주장한다. 자연의 운행은 일정한 법칙을 따른다. 따라서 요임금이 성군이라는 이유로 정상적으로 운행되거나 걸임금이 폭군이라고 해서 그릇된 방향으로 운행되는 일은 없다. 그는 그 근거로 요임금 때에도 7년 동안의 홍수가 있었고 걸임금 때에도 8년 동안의 풍년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은 더 이상 신성하거나 외경의 대상이 아닐 뿐더러 인간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 줄 수 있는 의지적 존재도 아니다. 따라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해서 비가 오는 일은 결코 없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기우제를 지냈더니 비가 왔다."고 하자 그는 "그것은 기우제를 지내지 않았는데 비가 온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인간이 비가 오길 바라든 바리지 않든 비는 올 때가 되면 온다고 본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추운 겨울이나 뜨거운 여름을 싫어한다고 해서 자연이 계절의 순환을 바꾸는 일도 없다. 따라서 추운 것이 싫다면 옷을 두껍게 입거나 불을 피울 일이지 자연을 대상으로 기도하는 일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울러 순자는 인간이 자연의 운행법칙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정상에서 벗어나는 자연의 변화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자연의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입장은 한 대의 철학자 왕충에 의해서 "착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벌을 내린다."는 복선화음론을 거부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하든 자연이 인간의 행위를 기준으로 자신의 운행을 바꾸지 않는다는 점에서 순자의 사상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들은 인간이 자연의 변화를 두려워하며 기도하는 것보다는 재화를 충분히 축적해서 자연이 가해오는 각종 재해에 대처하는 것이 훨씬 올바른 태도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가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을 정복해야 한다는 제천명, 용천과 같은 명제를 제기한 것은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순자나 왕충은 천인합일이 아니라 천인분리를 오히려 인간에게 유익한 태도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자연과 인간은 서로 일치되는 면보다는 오히려 서로 배치되는 측면이 많다고 보고 자연과 인간을 대립적인 존재로 파악한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이와 같은 관념은 동양철학의 주된 흐름으로 정착되지는 못했다. 동양철학의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는 유가나 도가, 또 불교에서도 한결같이 인간과 자연의 일치를 추구하며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보는 관점과 삶의 태도
자연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은 결국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는 질문과 같다. 또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에 대한 논의이기도 하며 아울러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바람직한 삶의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는가는 결국 어떤 태도로 자연을 바라보느냐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연의 법칙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느냐보다는 도리어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얼마나 올바르냐이다. 곧 사실 여부를 정확하게 구명하는 것보다 추구하는 가치의 정당성 여부가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자연을 차별적으로 인식하는 입장에 서는 이들은 인류의 문명을 인간이 자연의 도전에 응전해 나가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자연의 힘과 인간의 힘을 모순, 충돌하는 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인간은 자연 속의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힘의 우위에 따라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옳다는 인간 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지닌다. 이 같은 목적을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객관적인 자연의 법칙을 탐구함으로써 자연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효율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사고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데카르트식의 합리주의와 뉴턴의 물리학으로 구체화되고 증기기관의 발명과 산업혁명을 통해 극대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과학기술문명은 이와 같은 인간 중심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자연을 개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은 초고속 정보통신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을 수 있게 했으며 새로운 형태의 주거지를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식량을 생산함으로써 인류를 기근에서 탈출시켰다. 이와 같은 이점은 분명 인간과 자연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자연 지배의 정당성을 의심치 않는 자연관을 토대로 발전한 과학기술문명이 가져다 준 혜택이다.
반면에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을 강조하고 인간을 자연 속에 부속된 존재라고 파악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인간을 자연의 주인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은 영원하고 인간은 잠시 왔다 가는 손님에 지나지 않는다고 파악한다. 그 때문에 자연을 사적 소유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으며 인간의 욕망에 맞게 함부로 자연을 개조하지도 않는다. 자연과 인간을 모순, 대립하는 관계로 보지 않고 공존, 공생하는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을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고 여겼던 이들의 입장이 논리적인 근거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입증되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연과 화해하고 공존하려는 태도가 지니고 있는 장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거리를 달리는 수많은 자동차의 행렬, 자고 일어나면 새롭게 들어서는 각종 건물들, 산을 깎아내리는 불도저와 수천만 평의 새로운 농경지를 만들어 내는 간척사업, 심지어 우주로 발을 내딛거나 불치의 병을 차례차례 정복해 나가는 의료기술의 발전 등 인류는 과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이는 것은 틀림없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자연의 횡포에 굴복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인간은 자연을 넘어서는 존재라는 점에서, 또 인간도 자연 속의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존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입장은 어느 정도 정당성을 지닌다. 만약 지금 당장 과학기술을 포기한다면 인간은 생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존 유지 차원의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과도한 욕망 충족은 자연에 대한 착취 정도를 넘어서 파괴에 가까운 결과를 낳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런 자연의 파괴가 인간 자신의 생존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각종 공해물질로 오염된 공기는 당장 숨쉬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안겨주고 썩은 물을 마실 수밖에 없으며 다이옥신을 비롯한 환경호르몬이 인류의 존립을 뿌리째 위협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각종 기상이변이 일어나고 아마존 유역의 삼림을 개발함에 따라 지구의 허파가 파괴되는 비극적 현실에 직면해 있다. 물론 이 결과에 대해 모두 인간 중심주의적 발생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위협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재앙이라는 점에서 이전까지 자연이 인간에게 끼친 위협과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따라서 인간을 위해서라도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발전시킨 과학기술문명을 볼 때 인간이라는 동물이 다른 동물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힙을 가진 존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힘은 단지 지적 우월성에 지나지 않고 그런 지적 우월성은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우연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도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입증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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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3. 택시 기사 시아버지가 최고라구요?
인욕에 대하여
30년 간 사고 한 번 없었다는 모범택시 기사분에게 물어보았다. “모범운전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바보가 되는 것이지요.” 나이 지긋한 그 기사분은 간단 명료하게 대답했다.
이 기사분의 말처럼 바보가 되는 것, 이는 어쩌면 삶에 있어 가장 지혜로운 해답이 될 수도 있다. 요즘처럼 서로들 잘났다고 우기고 으르렁대고 싸우는 세상에서 바보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누구나 바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착한 사람은 자신을 착하다고 내세우지 않고 똑똑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똑똑하다고 말로 드러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정말 바보라면 바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법이다. 몰라서 바보가 아니라 알면서도 바보 천치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진정한 바보는 누가 뭐라 하든, 누가 손가락질하든,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한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해서, 바보가 되지 못해서 벌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많다.
언젠가 신문에서 본 일이다. 사소한 부부싸움을 하다가 홧김에 집에 불을 질러 아홉 가구가 사는 연립주택이 일순간에 잿더미로 변한 사건이 있었다. 자신은 물론 그 안에 세들어 살던 이웃 사람 4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또 여러 명이 중태에 빠졌다고 한다. 많은 재산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어이없게도 남의 귀중한 인명마저 순식간에 앗아간 사건이었다. 조금만 양보하고 조금만 참았더라면 됐을 것을, 순간의 분노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자기 집 앞에 세원둔 차 때문에 싸움이 시작돼 이웃끼리 욕설이 오가다 나중에는 서로 치고받는 싸움으로 번져 법정 구속이 되는 일도 우리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물론 주차난이 심각하기는 하나 조금 참고 조금만 양보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해결이 가능한 문제인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 모두 바보가 되지 못해서 너무 똑똑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가 아니겠는가. 우리 속담에 `하루를 참으면 백 날이 편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중아함경”에도 나온다. `다툼으로써 다툼을 그치려 하면 필경 그치지 못한다. 오직 참아야 능히 다툼을 그치느니라.` 그렇다. 다툼을 그치려면 오직 참는 길밖에는 없다. 그러나 참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많은 인내와 마음의 수행이 필요하다.
부끄러운 내 이야길 하나 고백해야겠다. 몇 년 전, 사월 초파일을 앞두고 경북 포항에 있는 보경사로 방생법회를 간 적이 있었다. 부처님의 자비를 몸으로 실천하자는 의식의 하나로 매년 시행된 연례 행사였는데, 그날은 신도 중에서 특히 거동이 불편한 나이 많으신 노인분들도 많이 참여하셨으므로 전세 버스를 한 대 빌리기로 했다. 이처럼 많은 신도들을 모시고 맑고 청량한 바깥 공기를 마시게 되니 자연 내 마음도 즐거웠다. `스님, 좋은 말씀 좀 해주시지요.`하고 달리는 버스 안에서 신도들이 청했다. 마침 사월 초파일이고 하니 무슨 법문을 해야 할 지 잠시 궁리하다가 나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 얘기를 그분들에게 들려 주었다.
아득한 과거세에 부처님은 인욕선인으로 산중에서 참는 수행을 하고 계셨다. 하루는 가리왕이라는 극악무도한 폭군이 궁년들과 더불어 부처님 계신 산중으로 사냥을 나왔다. 그런데 산중을 헤매던 중 마침 수려하게 생긴 한 선인이 굴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행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왕은 의아해서 선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대는 무엇하는 사람인가?” “나는 인욕을 닦는 수행자입니다.” 선인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인욕은 어떻게 닦는가?” “인욕이란 좋은 일이나 나븐 일이나 다 참는 것입니다.”
그러자 의심 많은 왕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높이 빼들었다.
“네가 과연 이 고통까지야 참을 수 있겠느냐?”
왕은 선인의 살을 칼로 베어냈다. 그러자 선인은 아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것을 참아내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욕선인의 거룩한 마음씨에 감동한 제석천왕이 가리왕을 벌주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이에 왕은 혼비백산해서 달아나고 제석천왕은 약을 발라서 인욕선인의 몸을 낫게 해주었다. 극악한 가리왕이 살점을 베어내도 흔들림 없이 참는 수행을 하던 분, 바로 이분이 바로 나중에 부처가 되신 분이다. 불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인토, 즉 사바세계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 세상이 마치 고통과의 전투장과도 같기 때문이다. 전투장에서 총과 칼이 필요하듯 우리에게는 부처님 말씀이 곧 무기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이 오백생의 인욕을 통해 부처가 되셨듯이 참고 견디는 인욕이야말로 우리가 이생에서 지녀야 할 가장 훌륭한 무기인 것이다.
대강 이러한 내용이었다. 신도들 중 몇 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만에 드디어 우리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보경사는 주차장 입구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우리 모두 주차장에서 내려 수킬로나 되는 길을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나이 드신 분들에게 너무 무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분들을 인솔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나는 버스 기사분에게 절 앞까지 가달라고 부탁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런데 매표소에 이르자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
“이곳은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거동이 어려운 노인분들이 많아서요. 좀 부탁합니다.”
내가 사정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규칙상 어긋나므로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분들을 멀리서 모시고 왔는데 사정을 이해해 달라며 통사정을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지간히 고집불통인 매표소 직원이었다. 마침내 나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단숨에 근처 관리공단으로 뛰어들어갔다.
“아니, 삼중 스님이 여기 웬일이십니까?”
다행히 그곳 직원이 나를 알아보고는 붉으락푸르락 하는 내 얼굴을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그 매표소 직원이 대체 누구요, 이렇게 융통성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소? 내 당장 대검총장에게 얘기해서 형사처벌을 하든지 해야겠소.”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지만 형사처벌이라뇨? 대체 왜 그렇게 성을 내시는 겁니까?”
나는 화를 내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한참 듣더니,
“스님, 그쪽도 잘못이 없진 않지만 직무에 충실하다 보니 발생한 실수 같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화를 내시며 말씀하는 것은 좀 심하신데요.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무안해졌다. 아무리 화가 났기로 순간적으로 내뱉은 말을 주워담기엔 너무나 큰 실언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조금 전까지 부처님의 인욕을 설하면서 신도들에게 뭐라 했던가, 참으라, 또 참으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방생법회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서도 나는 내내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조차 들 수 없었다. 간혹 재소자들을 만나서 교화하거나 근로자들을 상대로 강연을 할 때 나는 참으라, 두 번, 세 번 참으라고 강조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도 이처럼 나약하고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마음을 가진 존재인 것을!
“인욕이야말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악을 품지 않는 까닭에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건강할 수 있으며, 참는 사람은 악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부처가 되느니라.” '사십이장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예로부터 인욕행이 없이 성현이 된 이는 아무도 없다. 인욕행이란 그만큼 힘든 것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분이 계시지만 특히 인욕의 대 성인이라 불리는 일본의 백은 선사는 살아 있는 부처로 추앙될 만큼 뛰어난 인욕행을 실천하신 분이셨다. 백은 스님의 이야기이다.
백은 스님이 거처하던 송음사라는 절 근처에는 두부 가게를 하는 독실한 신자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 부부에게는 시집 안 간 딸이 하나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점점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부부가 놀라서 다그치자 딸은 부모님이 가장 존경하는 백은 스님의 아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부모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실망감과 노여움에 그만 그 길로 백은 스님을 찾아갔다.
“아니, 스님 이럴 수 있는 겁니까? 내 그토록 존경하고 믿던 스님께서 감히 내 딸을 건드리다니요? 이제 내 딸을 마쳐 놓았으니 당신이 책임을 지셔야겠소!”
그러나 백은 스님은 묵묵히 앉아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처녀가 아이를 가졌으니 이를 알게 된 동네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하고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얼마 후 딸은 아이를 낳았고,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백은 스님에게 가서 욕설을 퍼붓고는 아이를 떠맡겼다. 그러자 백은 스님은 아무런 변명이나 대꾸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받아 안았다. 처녀가 낳은 아이를 절에 데려다 놓자 소문은 더 커지고 백은 스님을 존경하여 따르던 신도들마저 점차 스님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업은 스님이 동네 우물가에서 아낙네들에게 젖을 구걸하는 모양을 보게되자 사람들은 스님을 외면하며 손가락질했다. 1년이 지난 후, 일이 이렇게 돼가는 모양을 바라보던 딸은 고민 끝에 마침내 부모님께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이의 진짜 아버지는 스님이 아니라 동네 총각이었던 것이다. 딸의 얘기를 듣고 난 부모는 처음보다 더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거 큰일났구나. 이런 죄업이 어디 있단 말인가!”
부부는 즉시 스님에게 달려가 지난날을 백배 사죄하고 아이를 돌려 주십사 청했다. 그러자 백은 스님은 부모의 말을 듣더니 처음과 마찬가지로 묵묵히 아이가 놀고 있는 곳을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는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 얼굴에는 남을 용서한다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조차 없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사람들은 백은 스님을 더욱 존경하게 되고 추앙하기에 이르렀다.
그녀의 부모가 잘못을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지만 백은 스님에게는 남을 용서한다는 감정의 흔적조차 없었다. 그러한 마음이 없다는 것은 무심의 경지임을 뜻한다. 곧 이 무심의 경지를 향하여 마음을 닦은 백은 스님의 인욕을 잘 드러낸 일화이다. 수양이 잘 된 마음에는 능히 참지 못할 것이 없다고 했다. 화난 마음을 누르는 것, 이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수행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도 날마다 인욕 바라밀을 닦아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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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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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1.신라 말기의 반란 : 궁예의 반란 등 호족들의 신국가 건설 투쟁
궁예의 반란
이상에서 봤을 때 김헌창의 난이 왕실 찬탈전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본다면 장보고는 당시 민중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부패한 중앙정부에 대항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전대의 반란을 배경으로 후삼국 시대가 열린 것이며 궁예 역시 신라 말기의 극심한 혼란 가운데 등장한 호족이었던 것이다. 후고구려의 건국자인 궁예가 태어난 해는 불분명하다. 그의 성은 김씨라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신라 제 47대 헌안왕이고,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궁녀였다. 일설에는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헌안왕의 핏줄이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지만, 어느 설을 따르더라도 그가 왕족 출신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적자가 아닌 서자로 태어났다는 데에 있었다. 서자라는 차등적인 위치에 있었기에 그의 운명은 정권 다툼의 소용돌이에 말려 왕실에서 배제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의 탄생 설화를 살펴보면, 5월 5일에 외가에서 출생하였다고 했는데 일관이 말하기를, 단오날에 태어난 데다가 나면서부터 이가 나고 또한 이상한 빛까지 나타내므로, 장차 국가에 막대한 해를 입힐 인물이라고 왕에게 고하였다. 왕은 이를 믿고 죽일 것을 명하자 사자가 그 집에 가서 강보에 싸인 아이를 빼앗아 다락 밑으로 던졌다. 이때 유모가 다락밑에 숨어 있다가 아이를 받았는데 그만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는, 그가 신라 왕족이었으나 왕실의 격렬한 정권 싸움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그뒤 유모의 손에서 남의 눈을 피해 자라게 된 궁예는 후에 세달사라는 절에 출가하여 선종이라는 법명까지도 얻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세달사라는 절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세달사는 고려 중기에는 흥교사라고 개칭되었다. 정확한 소재지는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대화산이다. 나중에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숭유억불 정책을 쓸 정도로 삼국시대 이래로 불교는 정치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궁예가 자칭 미륵불이라고 부른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세달사 역시 여러 지방 호족들과 정치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성장기를 보낸 추방된 왕자 궁예는 후에 세력을 확장할 때 이 일대 호족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토대를 자연스럽게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중앙 권력에서 밀려난 호족들은 궁예가 한때 왕자의 신분이었음을 알고서는 쉽게 호응했던 것이다. 당시의 신라 왕실은 극도로 쇠약해져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대두하였다. 거듭되는 흉년으로 인하여 국고가 탕진되어 889년(진성여왕 3년)에 과도하게 세금을 독촉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농민들이 유랑민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들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도적떼로 둔갑하고 말았다.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기훤과 양길이 있었는데 성인이 된 궁예는 891년에 기훤의 부하로 들어가 뜻을 키우려 하였으나 기훤이 자신을 냉대하자, 이듬해인 892년에는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양길은 궁예의 출신 성분을 알고는 그를 환대하였다. 그의 신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뒤 궁예는 양길의 군사를 나누어 받아 원주, 치악산, 석남사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예천) 내성(영월) 울오(평창)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하고 894년에는 명주에 이르렀다. 이때 그 무리가 3,500명이나 되었다고 여러 역사 기록들이 전하고 있다.
궁예는 어느 정도 자기 세력이 확정되자 이들을 14대로 편성하여 자기 세력 기반으로 삼았고, 추종자들은 그를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장군이라는 명칭은 단순히 군사적 지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사회로 치자면 일정한 지역을 다스리는 최고 권력자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궁예는 양길의 도움을 발판으로 삼아 어느새 새로운 인물로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저족(인제), 생주(화천), 철원 등을 점령하자, 군세가 매우 강성해져 인근 지역의 무리들 가운데는 스스로 항복하여 궁예의 부하가 되려는 호족들도 생겨날 정도였다. 이에 궁예는 기반 세력이 다져지자 양길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어나갔다. 896년 경 임진강 연안을 공격하여 개성에 있던 왕건 부자의 투항을 받고 승령(지금의 장단 북쪽, 토산 남쪽), 임강(장단)과 지금의 개풍군 풍덕 주변 등의 여러 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이듬해에는 공암(양평) 금포(김포) 형구(강화) 등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궁예의 세력권 남쪽인 국원(충주) 등 30여 성을 취한 양길이 궁예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여 오히려 패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불과 몇년 동안에 파죽지세로 궁예가 세력권을 형성할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첫째는 지방 호족들의 자발적인 참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 본 세달사가 위치한 영월에는 궁예의 외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탄생 설화가 말그대로 설화라면 그는 노비 출신의 유모의품에서 자라났다기 보다는 몰락한 진골귀족인 그의 외가집에서 성장하였다는 주장이 더 타당성이 있다. 외가는 왕권 계승 싸움이 계속되자궁예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는 열 살이 조금 넘은 궁예를 절에 출가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절을 중심으로 김헌창의 아버지인 김주원계의 세력 근거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삼국사기} 등 여러 사료들을 검토해 볼 때 금방 알 수 있다. 또한 중앙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여러 호족들이 김헌창의 반란 실패 이후 영월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다는 것도 사료에 나타나 있다. 즉 궁예가 군사를 일으키자 그동안 정부에 대해 쌓인 불만을 일시에 터뜨려 왕족 출신인 궁예를 지지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일은 명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명주는 김주원이 권력 중심부에서 밀려난 후 좌천된 곳이기도 하다. 김주원계는 이곳을 중심으로 지방 호족들을 자기 세력으로 삼았고 궁예의 등장으로 이들은 반정부 투쟁을 벌일 태세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청주에서도 궁예는 막강한 지지 세력을 갖게 되었다. 청주에서도 역시 명주나 영월 지방처럼 중앙에서 밀려난 호족들이 궁예를 중심으로 다시 군사를 정비하고 반정부 대열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층부의 호응만으로는 후고구려 건국을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김헌창의 경우와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민심을 빨리 알아차렸다. 토지의 독점으로 파탄에 빠진 일반 민중들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심어주기 위해서 궁예가 내세운 정치 이데올로기는 옛고구려의 강역을 수복하는 일이었다.
삼국시대의 신라는 당나라라는 외세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애초부터 신라는 백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당나라는 오래 전부터 넘본 고구려 땅을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차지하고 대신 당나라에게 고구려의 대부분 지역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연합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두 나라 사이에 일종의 밀약이 오갔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종전 후 신라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쪽 고구려 땅은 당나라가,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차지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이것은 당태종과 신라 문무왕 사이의 공식적인 언약이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신라는 단순히 백제와 고구려 일부를 흡수 통합한 것에 불과했다. 통합 당시 신라는 자국만의 힘이 아닌 외세를 끌어들이는 역사적 과오를 범함으로써 두고두고 민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궁예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가 옛고구려의 강역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내세웠을 때 민중들은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정통성을 상실한 국운을 다시 세우자고 민중들은 궁예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민중들은 단순히 궁예의 구호에 호응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라 왕실에 대한 전면 부정이 극대화되어 고구려 부흥 운동의 차원까지 나아갔던 것에 불과하다. 민중들이 궁예를 지지했던 이유는 중앙정부의 수탈이 심화되어 이에 저항하기 위해 궁예를 중심으로 뭉쳤던 것이다. 호족과 농민 사이에 신라 왕실에 대한 불신이 공감대를 형성한 셈이다.
899년(효공왕 3년)에 송악군 일대를 점령한 궁예는 왕건을 보내어 양주, 견주를 복속하고, 그 다음 해에도 광주, 춘주, 당성(화성군 남양 일대), 청주, 괴양(괴산) 등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이북의 한강 유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 공으로 왕건에게 아찬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 901년에 송악(개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후고구려라고 국호를 정하였다. 또한 자신이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누차 강조하였다. 그는 실제로 대동강을 넘어 평양까지 쳐올라가 정복하였으며 공공연하게 북쪽 고구려의 옛땅을 수복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고 하였다. 그 해 7월 청주인 1천 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을 서울로 정하고 상주 등 30여 현을 차지하게 되자 공주장군 홍기가 투항하여 왔다. 905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긴 궁예는 연호인 무태를 성책으로 고쳤다. 이즈음에 평양 성주 금용이 투항하여 옴으로써 평양 일대의 지역도 차지하게 되었다. 그뒤 궁예는 세력이 강성해졌음을 믿고 신라를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신라를 멸도라 부르게 하였다. 911년에 연호를 다시 수덕만세라 고치고, 국호를 태봉이라 하였다. 이때 왕건은 해로를 타고 내려가 금성(후에 나주라 불렀다.)을 정복하였는데,이후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옛백제 지역에서 일어난 견훤을 위협하기도 했다. 913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라 고쳤다. 이 무렵 궁예는 폭군이 되었고, 그를 반대하고 왕건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현재 남아 있는 사료들은 전하고 있다.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918년에 궁예의 폭정에 반대하여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일어나 그를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왕위에서 쫓겨난 궁예는 변장을 하고 도망가다가 부양(평강)에서피살당함으써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궁예는 단순히 후고구려를 세운 뒤 정권 유지에 급급하여 폭군으로 변한 뒤 왕건을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축출된 것일까. 그러나 그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또한 정사를 사실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가 폭군으로 변했다는 결정적인 근거나 계기, 그리고 그 과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궁예에 대한 평가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통치자
후삼국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호족들의 대거 등장과 더불어 농민들의 항쟁이 만연되었기 때문이다. 김헌창의 반란 등이 단순히 왕위 쟁탈전에 불과하여 민중들의 호응을 별로 받지 못했던 반면, 구조적 모순이 극대화되면서 호족과 농민들은 신라 왕조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는 것은 앞에서도 살펴본 바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궁예는 891년에 양길의 휘하에서 자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운 뒤 918년에 이르기까지 약 28년 동안 통치하다가 멸망하였다. 그러나 궁예의 통치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고려사> 등 종래의 사료들은 대체로 폭군적인 면을 부각시켜 부정적인 평가로 일관하고 있다. 즉, 궁예는 원래 성격이 포악하고 의심이 많아 915년에 올바른 정치를 건의하는 부인 강씨와 그 소생의 두 아들을 죽여버린 일도 있다고 한다. 그뒤 궁예는 자기 자리에 불안감을 가져 의심이 더욱 많아지고 성급해져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독심술을 터득하였다는 이유로 신하들을 위협, 살해하였다는 것이다. 왕건 역시 궁예로부터 두 마음을 품고 있다는 혐의를 받아 결국 궁예와 왕건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왕건 일파는 궁예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면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원정하여 금성(나주) 등지를 정벌하였다고 한다.
고대나 중세 때 정변이 일어날 경우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왕조의 변화를 예고하는 도참 설화가 떠도는 것이다. 궁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민심을 잃은 궁예에 대해 그의 멸망을 예언하는 도참 설화가 각처에 만연하게 되었다. 철원에 사는 상인 왕창근이라는 자가 한 백발 노인을 통해 거울을 사서 걸어 놓았더니, 거울에 시구가 나타났다. 그 내용을 분석해보니 궁예의 멸망과 왕건의 등장을 예언하고 있었다. 또한 궁예는 매우 미신적으로 불교를 신봉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고 머리에는 금책을 쓰고 방포를 입고다녔다. 궁예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두 아들을 청광보살, 신광보살이라 불러 마치 자기 가족은 모두 해탈한 부처처럼 자처했던 것이다. 밖에 행차할 때에는 항상 백마를 타고 비단으로 말머리와 꼬리를 장식하였으며,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깃발과 향과 꽃 등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였고 비구승 2백여 명은 범패를 부르고 염불하면서 뒤를 따랐다고 한다. 가히 교주의 모습을 상상케하는 대목이다. 또한 그는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지었는데 그 말이 요망하여 모두 불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궁예가 지었다는 불경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사>에 의하면, 궁예는 어느 정도 세력 기반을 닦자 국내를 통합하기도 전에 갑자기 혹독한 폭정으로 민중을 다스렸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민중을 수탈하여 그를 따르는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국토는 황폐해졌는데도 자신이 머무는 왕궁만은 매우 웅장하게지었다. 또 법도나 제도는 지키지 않고 노역은 끊일 사이가 없어 점차 원망과 비난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궁예에 대한 평가를 당시의 형편을 그대로 알려주는 자료로써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도적의 무리로 편성된 궁예의 지배 세력은 그 성격을 바꿀 시간도 없이 패망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도적이 성행한 이유는 신라 왕실의 부당한 세금 징수와 호족들의 토지 겸병으로 유랑하는 농민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예의 무리는농민군적인 성격이 강했다. 또한 다른 지방 호족과 같이 자신의 세력 기반을 가지지 못하고 도적의 무리로서 출발한 궁예의 세력 기반에는 분명한 한계성이 있다는 지적도 앞서 본 바와 같이 잘못된 시각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초기 활동 당시부터 각 지역 호족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세달사나 영월을 중심으로 궁예는 확고한 세력 기반을 갖출 수 있었다.
출생 과정부터 이미 신라 정부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궁예는 신라에 대한 강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901년 부석사에 갔을 때 신라왕의 초상화를 보고 이를 칼로 쳐서 없앴다고 한다. 이러한 반신라적 성향은 반정부적 무리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고, 토지를 빼앗겨 유랑하다가 도적으로 몰락한 무리들이 궁예의 세력 밑으로 모여든 것은 궁예와 마찬가지로 반신라적인 성향이 강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즉, 궁예를 중심으로 민중 세력이 형성됨으로써 신라 고대사회가 해체되는 속도가 한층 빨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신라의 반민중성에 대항한 궁예의 등장으로 민중 세력의 결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궁예의 국가 통치 능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에 대한 역사 기록 가운데 일부는 사실이라고 전제했을 때, 국가를 운영하거나 질서를 회복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없었으므로 토지 겸병 등 토지제도나 수취제도를 개선하지 못한 면도 있었다. 즉, 경륜 부족으로 그는 조금씩 포악한 왕으로 변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또 나라를 세운 뒤에도 연호와 국호를 자주 고쳤다고 하는 것은, 한 나라를 이끌어갈 정치 이념이 뚜렷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는 지적도 타당하다. 이러한 지적은 앞서 말한 현실 개혁을 단행하지 못한 궁예의 실정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점차 호족 세력을 결집해 내면서 뚜렷한 유교적 정치 이념과 선종 승려 및 6두품 지식인층까지 포섭하였던 왕건이 전면에 부상하게 된 결과를 가져왔다. 즉, 지배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담보해 주면서도 일면 현실 개혁을 추진하여 민중들의 불만을 무마할 수 있는 강력한 왕을 원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궁예에게는 통치 이념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
<고려사> 등 사료에 나타난 궁예에 대한 평가는 우선 그가 포악한 왕이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그가 내세운 미륵불 사상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미륵불 사상은 무엇인가. 대체로 관음보살을 중시하는 불교는 해탈 등 자기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이것이 극대화되면 지배 계층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 의식을 약화시킬 수 있는 구실을 하게 된다. 그러나 미륵불 사상은 도탄에 빠진 현실을 구하기 위해 미래불인 미륵이 이 땅에 온다는, 사회 개혁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따라서 최고권력자가 이러한 개혁 사상을 주장했다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비록 궁예는 왕건처럼 견실한 정치적 이념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는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직까지도 그가 왜 난폭한 짓을 자행하게 되었는지 그 동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또한 왕건의 고려 건국이 합리화되기 위해서는 궁예가 완전한 폭군으로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음을 감안할 때 궁예에 대한 평가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정리하자면, 궁예는 지나치게 종교를 강조하는 등 이상주의적 이념을 내세워 왕권 강화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개혁을 추진할 만한 지식인층을 확보하지 못했고, 또한 그의 왕권 강화에 반발한 일부 호족들이 왕건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궁예는 축출당하고 말았다. 따라서 그가 원래부터 성격이 난폭하여 폭군이 되었다는 단순한 시각은 교정되어야 한다. 궁예가 고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지인 한강 유역을 먼저 차지한 정책이나 자기를 지지하는 호족들에게 관직을 주는 등 행정체제를 정비해나갔으며, 이러한 궁예의 뛰어난 통솔력에 끌린 호족들이 사방에서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는 것은 궁예의 긍정적인 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궁예는 이상주의적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구체적인 현실 개혁을 단행하지 못하였으며, 왕권 강화 과정에서 그의 이념을 반대하는 왕건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 그룹과 대립하다가 그들의 세력에 밀려 축출당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대립 과정에서 궁예는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폭정을 일삼았다고 이해한다면 그의 난폭한 행동에 대해 좀더 구조적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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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첫째 묶음 : 고독을 위한 의자
이별의 층계에서
'층계' '계단' '층층대' '사다리'라는 단어를 들으면 내 마음엔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활기가 솟는다. 어린 시절 나는 유리창과 층계가 많고 정원이 아름다운 집에서 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었는데 수녀원에 와서 그 꿈을 이룬 셈이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 무언가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은 어떤 기대와 호기심 때문일까? 공원이나 산책길에서도 어쩌다 층계를 마주치면 문득 오르고 싶어진다. 전철역이나 기차역에서도 에스컬레이터보다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생각하면서 오를 수 있는 돌계단을 나는 더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우리 수녀원 성당으로 오르는 라일락 언덕길과 채마밭 사이엔 아주 오래된 돌층계가 있는데 난 날마다 이 길을 즐겨 다니며 층계에 낀 이끼, 떨어진 나뭇잎과 솔방울, 도토리, 다람쥐, 바람소리 등 모든 것과 정들여오면서 어느새 수십년이 흘렸다. 수녀원 안에서 아침, 저녁을 오르내리는 층계는 또 얼마나 많은가. 층계를 통해 우리는 기도하고, 밥을 먹고, 일을 하러 다닌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층계를 오르내리는 것과 같은 일상의 움직임과 직결되어 있음을 느낄 때가 많다. 몸이 불편해 난간을 짚고 겨우 층계를 오르내리거나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고 평평한 길로 돌아서 다녀야 하는 분들을 어쩌다 만나게 되면 층계를 오르내릴 수 있는 나의 건강에 대해서도 새로운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항아리가 100개도 넘는 우리 장독대 옆 좁은 돌계단을 올라가면 산, 하늘, 바다가 잘 보이는 넓은 옥상이 있는데 나는 자주 그곳에 올라가 해와 달과 별, 구름과 노을을 바라보곤 한다. 그 아담하고 앙징스런 돌계단을 오를 때면 문득 하늘로 오르는 한 마리의 자유의 새가 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지금껏 내가 걸어온 삶의 길, 삶의 층계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이별했을까. 층계는 만남과 기쁨과 기다림의 설레임이 가득한 장소, 때로는 이별의 슬픔이 깔린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층계는 아름다움과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으로 내게 다가온다. 지금보다는 훨씬 엄격했던 수련수녀 시절, 나를 만나러 왔던 가족, 친지들은 수도원의 층계 아래 내려가 그들의 세계로 다른 문을 밀고 들어서곤 했다. 문이 닫힌다고 사랑의 마음까지 닫히는 것은 아니건만 그 시절엔 무조건 인간적인 이별이 아쉽고 서럽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님의 시구에서처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는' 쓸쓸한 심정을 어쩌지 못하면서도 나는 이제 제법 여러 유형의 이별에 익숙해졌고, 이별의 아픔을 기도 안에서 승화시키는 방법도 나름대로 길들여왔다.
내가 좋아하는 쇼팽의 이별곡 같은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내 기억의 층계에는 지금 문득 두 사람의 그리운 얼굴이 떠오른다. 한사람은 내가 여섯 살 때 헤어진 나의 아버지이고, 또 한 사람은 이번 여름 동해 바닷가에서 3명의 신자를 구하고 탈진해서 숨지신 배문한 신부님이시다.
어려서 유난히 아버지를 따랐던 나는 아버지가 퇴근하시는 해질녘의 시간에 맞추어 집 밖에서 항상 기다리곤 했다. 어린아이가 내려가기엔 너무 길고 가파른 층계였기에 나 늘 층계 꼭대기에서 한 손엔 나에게 줄 과자를 들고 천천히 올라오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설래는 기분으로 지켜보곤 했다. 지금도 모나카나 찹쌀떡을 보면 꼭 아버지 생각이 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 가을 어느 날, 아버지는 늘 오르던 집 앞의 그 층계를 끝내 오르지 못한 채 납치당하셨고, 눈물 바다를 이루었던 가족들 사이에서 함께 울음을 떠뜨렸던 내게 그것은 처음으로 다가온 이별의 큰 슬픔의 아픔이었다. 40년이 넘은 지금도 난 길고 긴 기다림으 층계 끝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삶은 어쩌면 짧은 만남 끝의 긴 이별을 견디어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하면서......
지난 5월 나는 처음으로 보랏빛 등꽃이 아름답게 핀 수원 가톨릭대학을 방문했는데 학장 배 신부님은 바쁘신 가운데도 친히 학교를 안내해 주시고, 좋은 글 많이 쓰라며 바다 빛의 만년필도 한 개 선물로 건네주었다. 내가 층층이 신부님을 따라오르던 신학교의 그 많은 계단들이 눈에 선하고, 문득 뒤돌아보며 빙그레 웃으시던 그 조용한 미소를 잊을 수 없다. 신부님은 이제 더 높은 계단을 올라 천국의 안내자가 되신걸까. 6월에 나는 마지막으로 유머와 따뜻함이 넘치는 신부님의 엽서를 받았고, 8월 어느날 뜻밖의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날 바닷가에 동행했던 신자들과 회갑 미사를 봉헌하면서 신부님은 세상엔 감사할 줄 모르는 이들도 많으니 여기 모인 10명이라도 매일 10번씩 의무적으로 감사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당부하셨다고 한다. 또 동료 교수들이 마련한 조촐한 회갑연에선 '남들은 현실 보다 꿈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나는 꿈보다 현실이 더 아름답다'는 의미있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한다. 그 누구보다도 겸손하고 온유한 인품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신부님을 위해 추도시를 쓰고 장례미사에 참석하면서도 나는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고 잠시 정원으로 산책을 나가신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 분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여전히 가까운 분으로 여겨지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삶과 성 베네딕도가 수도자들에게 제시한 겸손의 12단계에까지 다 이르셨기에 부르심을 받고 사랑과 겸손의 모습으로 떠나신 것이라 믿고 싶다.
나 역시 그 어느 날 내 삶의 층계길을 다 오르고 나면 아직도 소식을 몰라 안타까운 내 사랑하는 아버지와, 이웃 위해 목숨 바친 존경하는 신부님, 바위처럼 묵묵하고 든든한 신부님의 모습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나는 아직 이승에서 만남과 이별과 기다림의 층계를 더 기쁘고 참을성 있게 오르내리는 연습을 해야 하리다.
<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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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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