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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27 호
단기 4341. 11. 12 (음력 10. 1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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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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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공감 정책 국민 아이디어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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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신문 2009 신춘문예
'기쁜 소식 밝은 세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평화방송ㆍ평화신문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청소년국과 함께 '2009 평화신문 신춘문예' 후보작을 공모합니다.
다가올 새해 신춘문예 공모도 예년과 같이 시ㆍ소설ㆍ창작동극ㆍ유아동화 4개 부문 공모를 시행함으로써 가톨릭 문학의 폭을 넓히고 가톨릭 아동문학의 저변을 넓히고자 합니다. 특히 창작동극 부문 응모작은 신앙을 주제로 주일학교 성극 무대에 올릴 수 있는 내용의 창작극이어야 합니다.
사랑과 평화, 정의라는 가톨릭 정신을 충실하게 반영한 문학작품을 찾아 이 땅의 문화 복음화에 작은 씨앗이 되고자 하는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신춘문예에 많이 응모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도 응모할 수 있습니다.
▣시(3편 이상) 상금 200만원
▣소설(200자 원고지 80장 안팎) 상금 400만원
▣창작동극(10~30분 분량) 상금 300만원
▣유아동화(200자 원고지 20~30장) 상금 300만원
◎접수마감 : 2008년 12월 19일(마감일 우편소인 유효)
◎보낼 곳 : 우편번호 100-031 서울시 중구 저동 1가 2의 3(삼일로 145) (재)평화방송 신문국 신춘문예 담당자 앞. 문의 : 02-2270-2509, 2515.
◎당선작 발표 : 2009년 1월 25일자 평화신문, 평화방송 TVㆍ라디오, 「가톨릭 디다케」 2월호
◎기타 : 1응모작은 다른 지면에 발표한 적이 없는 창작이어야 함 2성명(실명)ㆍ주민등록번호ㆍ주소ㆍ전화(휴대전화 포함) 번호를 명기할 것 3시ㆍ소설ㆍ유아동화 부문은 당선작이 없을 경우 가작을 낼 수 있으며, 창작동극 부문은 당선작 외에 가작을 여러 편 낼 수 있음 4전자우편 접수는 하지 않으며, 원고는 워드 프로세서(아래아한글)로 작성할 것 5창작동극ㆍ유아동화 부문 당선작과 응모작은 서울대교구 청소년국이 판권을 지니며, 평화신문과 함께 「가톨릭 디다케」에도 게재함 6시와 소설 부문 당선작 판권은 향후 3년간 본사에 귀속 8접수된 원고는 반환하지 않음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천주교 서울대교구 청소년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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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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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부족한 사람이 오해가 많은 사람보다 낫다.(아나톨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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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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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바, 샥
외래어
최근 몇 해 사이 자전거 타기가 유행한다. 소득 수준이 좋아지고 여가 생활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서, 산악자전거와 같은 고급 자전거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까닭이라는 이야기도 뒤따랐다. 그런데 기름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며 오르고 수출도 잘 안 되어 경제 여건이 나빠진 요즘도 자전거의 인기는 여전한 듯하다. 하지만 값비싼 자전거보다는 중저가 쪽으로 그 인기가 옮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자전거 동호인들이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샥’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자동차 관련 업계에서는 ‘쇼바’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쇼크업소버’(shock absorber) 곧 완충기를 이르는 말이다. 이것이 일본어에서 변형된 채로 들어온 게 ‘쇼바’라는 설이 있는데, 일본어 사전에는 ‘숏쿠 아부소바’(ショック アブソ-バ-) 또는 ‘아부소바’(アブソ-バ-)만이 올라 있어 그 설에 의심이 든다. 아마도 우리가 후자를 다시 한 번 변형시킨 결과가 아닐까 싶다.
한편, 자전거 동호인들은 완충기를 일컬어 ‘쇼크업소버’의 앞부분인 ‘쇼크’만을 따서 ‘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샥’과 마찬가지로 현대 일본어의 일상 어법에서는 ‘숏쿠 아부소바’ 대신에 ‘숏쿠’만을 쓰기도 한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런 어법이 아직 사전에는 오르지 않은 듯한데, 두 언어 사이의 이런 새로운 어법이 단순한 우연인지, 언어 운용법이 비슷한 까닭인지, 아니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서인지 궁금하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사
작명(作名)유감
아이의 이름을 지어 본 사람들은 그 일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회운동이나 사건 당사자 등에게 알맞은 이름을 붙이는 일도 역시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학교에서 폭력 사태가 자주 발생하면서 '자녀 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안심하고 학교에 보내기만 하면 자녀가 무사히 학교에 가서 안전하게 공부하고 돌아올 수 있을까요?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부모가 안심하고 보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이 전하려는 바는 '안전한 등·하굣길 만들기' '폭력 없는 학교 만들기' 등이었을 텐데 이름 때문에 이상한 운동이 돼버렸습니다. 대구 성서초등학교 어린이 다섯명이 개구리를 잡으러 갔다가 실종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후 타살된 것으로 밝혀져 가슴을 아프게 했던 그들을 지칭하는 말이 '개구리 소년'이었습니다. '개구리 잡으러 갔다가 실종된 소년들'을 이렇게 줄인 것입니다. 하지만 '개구리 소년'이라고 하면 '개구리를 닮은 소년'이나 '어린 개구리'가 연상됩니다. '위안부 할머니'도 자주 대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르는 것이 합당할까요? 그분들은 일제의 성폭력 피해자이며 현재 위안부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위안부'라고 불러야 하는지, 그리함으로써 아픈 가슴에 다시 한번 못질을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름은 한번 붙여지면 고치기 어려운 만큼 지을 때 조금 더 진지하고 신중하게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닭도리탕
조류독감의 영향으로 닭과 오리 고기 소비가 급격히 줄면서 양계 농가는 물론 관련 업계도 타격을 받고 있다. 익혀 먹으면 인체에 해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삼계탕·닭갈비·튀김(프라이)집 등 닭고기를 요리해 파는 업소들의 매출이 뚝 떨어져 울상이다. 닭고기 요리의 종류는 삼계탕·백숙·튀김·구이·볶음 등 다양하며, 그중에 '닭도리탕'이 있다. 식사로도 괜찮지만 얼큰한 맛 때문에 술 안주로 잘 어울려 즐겨 찾는 요리다. 그러나 '닭도리탕'은 일본어 '도리'가 들어간 말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본어로 '도리(鳥·とり)'는 새 또는 닭을 뜻한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이면 즐겨 하는 화투 놀이 '고스톱(go-stop)'의 약(約) 중에 '고도리'라는 것이 있는데, 이 역시 '도리'가 들어간 일본말이다. 화투짝 매조(한 마리)·흑싸리(한 마리)·공산(세 마리) 석 장에 모두 다섯 마리의 새가 그려져 있다고 해서 일본어로 '고도리(五鳥·ことり)'라 부른다. '도리'는 우리말의 ''이 일본으로 건너가 받침이 없는 일본어에서 '>리>도리'의 변화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어쨌든 일본어 '도리'와 결합한 '닭도리탕'은 '닭+닭(도리)+탕(湯)'이 되는 셈이어서 의미상으로도 겹말이다. 우리말 순화 용어는 '닭볶음탕'이다. 처음엔 어색하겠지만 자주 쓰다 보면 익숙해진다. 혹 요리 방식이 '볶음탕'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으면 우리말로 기막힌 이름을 한번 만들어 보시길.
충돌, 추돌
우리나라의 자동차 보유 대수가 2003년 12월 현재 1천5백만대에 이르며 그 중 승용차가 70%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국민의 생활수준이 나아졌다는 점에서 좋기는 한데 교통사고 23만1천건에 사망자 7천90명. 하루 평균 19.4명이 유명을 달리한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립니다.
교통사고가 나면 흔히 신문 사회면에 '추돌사고로 인한 고속도로 정체' '차량 충돌로 인명 피해 커' 등의 표현이 보이곤 합니다. '충돌'과 '추돌'. 둘 다 부딪힘을 뜻하는 것인데 구분해 쓰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자동차가 마주 오던 트럭과 충돌했다' '시위대와 경찰의 격렬한 충돌로 많은 사람이 다쳤다' '활자 세대와 인터넷 세대의 문화 충돌을 완충시키는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충돌'은 물리적 환경이든 정신적 환경이든 간에 서로 날카롭게 부딪치는 현상을 말합니다. '충돌 사고'는 정면에서 부딪치는 것을 이르는 경우가 많지만 부딪치는 방향이 문제가 되지 않을 때 주로 사용합니다.
이에 반해 '추돌'은 자동차나 기차 따위가 '뒤에서'들이받는 것을 말합니다. '급정차한 버스 때문에 차들이 추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갑자기 뛰어든 노루에 놀라 정지한 자동차 때문에 일어난 5중 추돌 사고' 등에서처럼 '추돌 사고'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사고의 원인 제공자가 맨 앞차이긴 하나 다중 추돌로 인한 파장을 생각할 때 모두가 선도차 운전자라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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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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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사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러데 또 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에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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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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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꽃 - 황명륜
山村 그 銀빛 노을 피리 잡던 아이들
생각마다 떠 올리는 가난도 情이었다
그 하늘 고개 마다에 피어나는 무지개.
그날의 숲 속에는 발자욱만 도란도란
三. 四月 긴긴 날에 쑥이 되어 앉았더라
할머님 생전의 모습....... 자욱한 안개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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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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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奎報, <寒食> ( 동국이상국전집 권 3, 고율시)
龍騰騈脅君하고 蛇死焚骸土라 갈비뼈 붙은 임금 용처럼 오르고, 해골 불태운 선비 뱀처럼 죽었다.
冷食慰其魂하여 九泉蒙底利라 찬밥으로 그 혼 위로한들 구천에서 무슨 이로움이 있으랴 !
갈비뼈가 붙은 임금은 晉 文公이고, 타죽은 선비는 介子推이다. 진문공이 개자추 등과 망명했다가 돌아와 왕이 된 후에 개자추에만 상을 내리지 않자, 龍蛇之歌를 지어 용은 문공에, 뱀은 자신에 비유하여 부르며 綿山에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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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지혜, 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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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100가지 지혜 - A. 갤리언
제1장 삶은 달걀에서 나온 병아리
탑속에 갇힌 솔로몬의 공주
솔로몬 왕에게는 아주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솔로몬은 자기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공주에게 과연 어떤 사람이 배필로 짝지어 질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어느 날 밤, 별자리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신랑될 사람은 이 나라 안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란 점괘가 나왔다. 사랑하는 딸이 가난한 남자와 결혼할 것이라는 것에 기분이 상한 왕은 바다 한가운데의 외딴 섬에 높은 탑안에 공주를 살도록 했다. 그것도 모자라 이스라엘의 장로 중 칠십 명을 뽑아 공주의 호위하게 했다. 그리고 물과 먹을 것을 충분히 넣어 준 다음, 출입문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봉해 버렸다. 외부 사람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자, 이렇게 철저하게 봉쇄를 해놓았으니 하나님이라도 손쓸 도리가 없으실 테지."
솔로몬은 그렇게 생각하고 안심을 했다. 어느 날 밤, 누더기를 걸친 한 젊은이가 길을 잃고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쉴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의 눈에 풀밭에 소의 해골이 널려있는 것이 보였다. 젊은이는 조금이라도 몸을 따뜻하게 할 생각으로 소의 갈비뼈 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뉘었다. 그 젊은이가 갈비뼈 안에서 잠든 무렵 어디선가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와서 이 젊은이가 든 소의 뼈를 잡아채어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성의 탑 꼭대기에 떨어뜨려 놓고 가버렸다. 그 탑은 바로 공주가 거처하는 탑이었다. 소의 갈비뼈가 놓여 있는 탑의 지붕은 바로 공주의 방 지붕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일찍 잠이 깬 공주는 여느 때처럼 지붕 위를 쳐다보다가 젊은이를 발견했다.
"누구시길래 이런 곳에 계신가요?" "저는 유태 백성으로 앗크라라고 합니다.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커다란 독수리가 나를 이곳에 물어다 놓았습니다."
젊은 남자를 오랜간만에 보게 된 공주는 젊은이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목욕을 하게 하고 새옷으로 갈아입게 했다. 그러자 앗크라는 몰라볼 정도로 미남이 되었다. 게다가 이 젊은이는 지혜롭고 경전에 통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 후 공주는 그만 이 젊은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 날 공주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저와 결혼해 주신다면 제게 축복이 될 겁니다. 저에게 축복을 주실 마음이 없으십니까?" "그건 제가 바라던 바였습니다. 허락만 해 주신다면 제게도 크나큰 축복이 됩니다."
젊은이는 그 자리에서 자기 손가락을 물었다. 그리고는 피를 내어 결혼을 약속하는 글을 썼다.
"주님, 이제 우리는 결혼을 약속하였습니다. 저희들을 축복해 주시고, 우리 사랑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젊은이와 공주는 잠자리를 같이 했다. 이윽고 공주는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 공주를 돌보고 있던 장로들은 공주의 몸에 이상한 기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저... 공주님, 혹시 아기를 잉태한 것이 아니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공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자 신하들은 모두 놀랐다.
"도대체 어떻게 공주가 아기를 잉태하게 되었더란 말인가!"
신하들은 솔로몬의 노여움을 각오하고,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공주의 소식을 알렸다. 사랑하는 딸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솔로몬은 배를 대령시켜 공주가 있는 섬으로 갔다. 그리고는 공주를 불러 자초지정을 물어 보았다.
"하나님께서 얼마 전에 제가 있는 이곳으로 젊은이 한 사람을 보내주셨어요. 그 사람은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한없이 온유하고 재능도 많습니다. 게다가 성경에도 조예가 깊습니다."
공주의 말을 들은 솔로몬은 그 젊은이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이윽고 그 젊은이가 대왕 앞에 나섰다. 대왕은 우선 그의 씩씩한 외모에 호감이 간지라 젊은이에게 이것저것 말을 시켜 보다가 그의 부모와 가족에 관한 것, 그리고 고향을 묻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을 들으니 일찍이 대왕이 별점을 보았을 때 공주의 배필이 되기로 했던 그 남자임이 밝혀졌다. 왕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다시 한번 감탄하여 주님을 칭송하였다.
솔로몬의 유혹을 이긴 여인
솔로몬이 성전에 건축하기 위해 세계 곳곳의 여러 나라 왕과 제후들에게 사신을 보내어 건축분야에 뛰어난 기술자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능력과 일의 양에 비례해서 그에 상응하는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어떤 나라에 매우 훌륭한 기술자가 있었는데, 그는 아무리 좋은 대우를 해줄지라도 예루살렘에는 가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이유인즉, 그에겐 아름다운 아내가 있는데 혹시 자기가 집을 비운 사이에 나쁜 놈이 아내를 넘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아내를 혼자 두고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땅의 영주는 그 기술자를 특별히 불러 예루살렘에 가줄 것을 부탁했다.
"솔로몬 왕이 처음으로 부탁을 하는 건데 나로서는 이 부탁을 거절할 처지가 못되네. 솔로몬의 권세는 이 세상에서 으뜸이네. 자네가 성전 건축에 협력해 주시를 난 진심으로 바라네."
그 기술자는 영주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그만 승낙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막상 집으로 돌아와 아내의 아름다운 모습을 대하자 다시 걱정이 되기 시작하고 왜 승낙을 했는지 몹시 후회가 되었다. 아내는 남편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는 그 이유를 물었다. 이윽고 남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그의 아내는 걱정하지 말라며 남편을 위로했다.
"저 때문에 라면 아무 염려 마세요. 전 당신의 아내로서 언제까지나 몸을 단정히 지키고 있겠습니다. 영주님과 약속을 하셨다면 지키는 게 도리가 아닌가요?"
아내의 위로에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은 기술자는 그날 하루를 꼬박 아내와 지새고는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예루살렘에 갈 행장을 갖추었다. 아내는 떠나는 남편에게 삼가루를 들어있는 유리상자를 주었다.
"이 작은 상자를 항상 당신 곁에 두세요. 안에 삼가루들 사이에 불끼가 있는 석탄덩어리를 넣어두었습니다. 삼가루에 불을 붙지 않는 동안은 저의 몸이 정결한 상태이니 마음을 놓으십시오."
기술자는 부인이 준 유리상자를 몸에 지니고는 길을 나섰다. 이윽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는 정성을 다하여 성전 건축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대왕은 그 기술자의 목에 매달려 있는 작은 유리 상자를 보게 되었다. 대왕은 궁금해서 무엇이냐고 물었고, 기술자는 그 자초지정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 왕은 용모가 수려한 젊은이 두 사람을 불러서는 기술자의 고향에 가서 그의 아내를 유혹해보라고 시켰다. 왕명을 받은 두 젊은이는 기술자의 고향으로 갔다. 그리고 기술자의 집에 찾아가 하룻밤 잠자리를 구했다. 기술자의 아내는 두 미남자를 상냥하고 친절하게 잘 접대해 주었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그녀는 그 둘을 침실로 안내하여 편히 잠을 잘 수 있도록 하였다. 두 젊은이는 침대에 눕는 척하다가 장인의 아내를 유혹하기 위해 침실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장인의 아내가 젊은이들이 흑심을 품지 못하도록 침실 문을 바깥에서 잠궈 버렸던 것이다. 한편 솔로몬은 매일 기술자의 목에 매달린 상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두 미남자를 보낸 지 꽤 여러 날이 지났건만 그 상자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바심에 못견디게 된 솔로몬은 자신이 직접 그 여인을 유혹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변장을 하고 두 신하만을 데리고 장인의 집을 찾았다.
"저, 실례합니다. 지나가는 과객이올시다."
그 장인의 아내는 듣던대로 아름답고 정숙해 보였다. 이윽고 여인이 저녁상을 차려 내왔는데 상이 무척 훌륭했다. 영리한 그녀는 손님이 다름 아닌 솔로몬왕 임을 이미 눈치챘던 것이다. 여인은 각기 다른 색깔로 칠해진 계란들을 식탁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드시옵소서. 대왕이시여." "뭐라고! 지금 나를 대왕이라 부르셨소?" "손님의 눈빛은 제왕의 위엄으로 번득이고 있습니다. 손님한테서 풍겨 나오는 현명함과 거룩함을 감히 몰라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솔로몬은 이 여인의 영특함에 놀라 한동안 할 말을 잊었다. 여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대왕님, 이 계란을 한 개씩 드시면서 그 맛을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대왕은 노란색, 빨간색 색깔대로 하나씩 들어 맛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껍질 색은 저마다 다르지만 맛은 전부 한가지구나." "여자라고 하는 것은 이 계란과 같습니다. 얼굴이 예쁘고 미운 그런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그 속은 다 똑같습니다. 왕께서 저 때문에 이런 먼 길을 오셨다면 헛수고 하신 듯 합니다. 저는 왕을 섬기고 있는 여자이므로 왕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를 취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자로 높이 이름이 나신 왕이시므로 이 세상의 모든 욕망은 덧없고 욕된 것이란 것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솔로몬은 여인의 조리 있고 사리에 맞는 말을 듣고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장난이 심하였구나. 나의 생각이 짧아 너의 마음을 어지럽혔다면 미안하다. 너의 지조 있고 덕성스러움에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솔로몬은 그녀에게 누이가 되어 달라고 말하고 값비싼 선물을 주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왕은 이 자랑스러운 여인의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고는 말했다.
"그대는 집에 돌아가도 좋다. 그토록 좋은 여인을 아내로 맞은 그대에게 축복이 있기를."
솔로몬은 다른 사람보다 열 배나 많은 보수와 상금을 기술자에게 선물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정숙한 여인 덕분에 왕으로부터 상금을 받고 칭찬을 들은 기술자는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아내를 더욱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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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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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3. 택시 기사 시아버지가 최고라구요?
언젠가 김포 공항에서 있었던 일이다. 택시를 탔는데, 우연히 앞에 놓인 면허증을 보니 `호주`국적이었다.
“기사님,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취득한 면허증이 아니군요?”
그러자 나이 지긋한 그 기사분은 미소를 띠며, “호주에서 영사 생활을 20년간 하다가 우리나라에 돌아왔습니다. 와서 보니 취직이라기보다는 이렇게 운전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그 기사분의 사고방식으론 당연한 것이겠지만, 체면을 무엇보다도 앞세우는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무척 당당해 보이는 그 기사분의 표정을 보니 나 역시 마음이 편해졌다.
인연
내가 개운사에서 주지를 하던 때이니 벌써 20년 전 일이다. 개운사의 단풍이 곱던 어느 해 가을, 하루는 명주 스님이 나를 찾아왔다. 당시 명주 스님은 서른 여덟 젊은 나이에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도반으로, 서울에서 명문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었다. 죽기 2개월 전, 멀리서 나를 찾아온 그 스님의 얼굴에는 죽을 을 기다리는 사람치고는 믿기 어렵게 평온하고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일찌감치 저녁 공양을 물리고 나서 그와 나 두사람은 모처럼 호젓하게 마주앉았다. 병색이 짙기는 해도 여전히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명주스님을 보니 이제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마을 한구석에 아프게 스며들었다. 당시 그는 월정사에서 수행하고 있던 터이라 나는 월정사 큰스님의 안부와 여러가지 궁금한 지인들의 소식을 물었다.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누던 도중 그가 불숙 말을 꺼냈다.
“사실 제가 이렇게 삼중 스님을 찾아온 이유는 죽기 전 한 가지 간곡한 청이 있어서입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나는 의하해 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조용히 말했다.
“이제 이승에서 제게 남은 시간은 고작 2개월입니다. 본래 생이란 없는 것, 죽음 또한 매미가 허물을 벗듯 구차한 육신을 벗고 가는 것이 아닌지요. 이제 저에겐 삶에 대한 미련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허나 제가 이승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생전에 가고 싶었던 이 땅의 사찰들을 두루 돌아다니며 잠시 스님과 함께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스님, 부디 제게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죽기 전에 명산대찰을 순례하고 싶다는 이 생에서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생사를 초월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수행하는 불제자 이기는 하나 예정된 죽음 앞에 서자 홀연 떠나기 전 이렇게 이승을 정리하고픈 게 간곡한 그의 바람이었다. 일종의 성지순례라고나 할까. 내 아무리 바쁜 일정이 있다한들 마다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단풍 고운 개운사를 뒤로 한 채 우리 두사람은 기약 없는 여행길에 올랐다. 명주 스님의 건강이 염려스러웠기에 버스 대신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우선 법보 종찰인 가야산 해인사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나서 옛 신라 고도인 경주의 불국사, 그리고 해 뜨기 전 새벽 석굴암으로 행했다. 불,보살,천.나한 등 마흔 분이 모셔진 석굴암은 언제나 그 장중함과 고요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신비와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아름다운 자태로 서 계셨다. 침묵 속에서 천 년의 세월을 지켜온 그 아름다운 모습! 우리는 말을 잊은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참으로 무상한 것이 인생이군요. 그래도 이처럼 부처님의 불법을 따르다가 가는 것이 큰 행복이 아닐까요?’ 나와 마주친 명주 스님의 눈빛은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통도사에서 하룻밤, 그리고 황악산 자락에 있는 직지사, 속리산 법주사를 거쳐 문경 대승사에 닿았다. 며칠 간 쉬임없이 다녔기에 여독으로 인해 몹시 피곤이 쏟아졌다. 그런데 대승사 너른 선방에 명주 스님은 갑자기 큰 대자로 누우면서,
“아, 좋다. 참 좋다! 스님, 내 예서 한 번 누운 것으로 한 철을 살다간 것으로 하겠습니다. 나는 다음 생에 태어나도 반드시 스님이 되어 꼭 이곳에서 수행에 정진하고 싶습니다.”라며 감탄을 했다. 대승사 맑은 기운 감도는 도량이 무척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대승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 마지막 밤을 지내고 나서 강원도 홍천 수타사로 가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계획없이, 발길 닿는대로, 내키는 대로 떠나기로 작정한 여행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우연히 도명 스님이 일행에 합류했다. 성격이 활달한 도명스님의 어머니는 우리가 가기로 한 수타사의 주지로 계셨다. 셋이 여관에 모이자 이야기꽃이 만발하느라 자연 취침 시간이 늦어져 한밤중이 돼서야 모두 자리에 눕게 됐다. 명주 스님만이 통증이 심해진 탓인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
“스님 이상한데요. 아무래도 옆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명주 스님이 우리 두사람을 흔들어 깨웠다. 자정이 훨씬 지난 한밤중. 돌연 자리에서 일어난 우리 세사람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분명 옆방에서 흐느끼는 여자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취한 남자 음성이 들리더니 이번에는 갑자기 여자의 비명소리가 또 들려왔다.
“괜찮을까요?”
이런 여관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고 그냥 넘기기엔 아무래도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심상치 않은 점이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여자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모양이었다.
“이거 안 되겠는데요. 아무래도 저 여자가 곤경에 빠진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평소 의협심 강한 도명 스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셋은 자다말고 일어나 머리를 맞대었다. 혹시 괜한 남의 일에 쓸데없이 걱정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기도 했다. 그런데 조금 있자니 누가 다급하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보니 스무 살쯤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가 서 있었다.
“스님, 절 좀 구해 주세요.”
남자가 잠이 든 틈을 이용해 빠져나온 것이다. 옆방에서 흐니끼던 바로 그 여자였다. 더 이상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바야흐로 한밤중, 여자를 앞세우고 세 사람은 도망치듯 뒷문을 통해 몰래 여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길로 택시를 타고 수타사로 직행했음은 물론이다. 아슬아슬하기도 했던 그 일은 마치 액션 영화에서나 봄직한 한장면 같다고나 해야 할까. 아무튼 택시 안에서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야말로 가련하고 불상한 인생 여정이었다. 그녀는 가난 대문에 어린 나이에 서울에 올라와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집 아저씨에게 그만 몸을 빼았기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해 집을 나와 버린 것이다. 달리 갈 곳도 없는 그녀가 순진하게도 남의 꾀임에 빠져 술집에 팔려온 첫날, 우연히 우리를 여관에서 만나 것이다.
“그런데요, 전날 밤 참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제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 스님 세 분이 구해 주시는 거예요. 알고보니 바로 스님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꿈이었던가 봐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비로소 안심이 되는지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자신을 부디 스님으로 만들어 달라고 사정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수타사에 이르렀다. 그리고 도명 스님의 어머니인 주지께 그녀의 소원대로 스님으로 받아들여 주십사 간곡하게 청을 드렸다. 사실 누구든 마음대로 중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에도 절법이 있고 계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사람의 간곡한 청이 효력을 발휘했던지, 처음에는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시던 주지 스님도 끝내 허락하고야 말았다.
“삼중 스님, 고맙습니다. 이는 아마도 부처님의 뜻인가 봅니다. 나는 이제 죽지만 그 대신수타사에 한 여승이 들어왔으니 말입니다.”
명주 스님의 고마워하던 그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게 울려온다. 그 여인은 비구니가 되어 열심히 수행 정진하였으며 그 이후 모든 이들의 감탄을 받는 스님으로 변모하였다. 그 여인을 절에 맡겨 놓은 지 몇달이 지나 지나던 길에 궁금해서 들러보니 주지 스님은 이렇게 그녀를 칭찬했다.
“저 사람은 타고난 스님 같습니다. 앉아 있는 뒷모습이 한 10년 승려 생활을 한 사람 같으니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참으로 흐뭇했다. 명주 스님 말처럼 자신은 이승을 떠나가고 이제 그 자리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새 스님이 들어온 것이다. 이는 어쩌면 부처님의 깊은 뜻이었을까? 생은 인연에 의해 맺어지며 인과의 법칙에 따라 귀결되는 법이다. 명주스님은 갔지만 그 자리에는 우연처럼 한 비구니가 그 뒤를 잇고 있음이 내게는 실로 오묘한 부처님의 뜻으로만 여겨진다. 인연이란 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불가항력의 힘에 의지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지나는 바람결에 무심히 상월종사의 오도송 하나가 들려온다.
모든 부처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고 또한 열반에 들지 않았네. 나고 죽는 것이 본래 없으니 찼다가 빈 것이 한 바퀴 달이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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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처가살이와 시집살이의 이중주
요즈음은 남자가 결혼할 때 '장가간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장가든다'고 흔히 표현했다. '든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어떤 것에 소속된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 속언에 처를 취하는 일을 장가든다라고 하니 장가는 처가를 말함이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처갓집으로 장가를 '들어가는'형세다. 왜 그러한 말이 생겨났을까. 우리 문화의 혼례사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은행에 갔다가 우연히 여성잡지를 들추어보니, '신세대의 결혼풍습도'에 관한 글이 있었다. 거기서는 시대 못지 않게 처갓집에 의존하는 경향을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풍습'이라며 신기한 듯 소개하고 있었다. 기사를 쓴 여기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새로운 풍습'으로 보였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처갓집과 변소는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1980년대 이래로 처갓집 근처에 집을 구하거나 아예 들어가 사는 경우도 생겨났다. '신 처가실이 풍습'이라고나 할까. 신처가살이 풍습은 결코 새롭거나 별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구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이 누려온 혼례풍습은 처가살이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조선 후기의 고단한 역사를 20세기 말기에 청산하면서 민족 고유의 처가살이로 되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조로 되돌아가 보자.
2천 년의 역사를 지닌 서류부가혼
혼인하기로 언약하면 여자집에서는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짓는데 이것을 사위집이라고 부른다. 남자는 저녁에 여자집에 찾아와서 문 밖에서 자기 이름을 대고 꿇어앉아 절하면서 여자집에 묵을 것을 재삼 청한다. 이때 여자의 부모가 청을 들어주면 그는 사위집에서 유숙한다. 한편으로 돈과 천을 준비하는데, 아이를 낳아 성장하면 그제서야 처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일명 서류부가혼이라고 하는 고구려의 혼례풍습은 남자가 여자집에 들어가 사는 것을 전제로 하였으며, 아예 사위집을 지어놓았을 정도다. 모권제의 발전으로 남자는 여자에게 장가를 들게 되었고 여자의 지배권은 강화되었다. 고구려의 '장가들기' 풍습은 고대사회에만 이루어지던 유풍이었을까. 13세기 초, 당대의 문인 이규보는 장인을 애도하는 제문에서 "처가에 의거하게 되니 처부모의 은혜가 친부모와 같다"고 하였다. 또 13세기 초 태부소경 자리에 있었던 정국검이 사위 두 사람에게 악당을 잡아 관청에 넘기도록 했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등장한다. 사위가 그만큼 늘 곁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거의 2세기 뒤인 1415년 <태종실록>권 29에서는 고려의 혼인풍습을 이렇게 말한다.
"고려 시대의 옛 풍습에 따르면 혼인의례가 남귀여가하고 아들과 손자까지도 외가에서 낳아 그들이 거기서 성장하게 되므로, 외가 친척을 더욱 은혜롭게 생각한다."
남귀여가란 남자가 여자집에 들어가 사는 것을 뜻한다. 조선 시대는 어땠을까. 조선 초기 <세종실록)권 40에서도, "우리 나라에서는 처가살이를 하기 때문에 한 어미의 자손들이 한집에 같이 살게 되니 서로 친애하는 풍속이 대단히 성하다"고 하였다. 또한 "남자가 처가살이를 함으로 조카가 아자비를 자기 아버지로 삼고, 또 아자비는 조카를 자기 친자식과 같이 여기니 이것은 전적으로 처가에 은혜를 입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의 개국을 주도한 신유학파는 가족제도 전반에 걸쳐 개혁을 추진하여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으려고 했다. 그들에게는 남자가 장가는 '드는' 풍습은 천륜의 도를 거스르는 행위로 보였다. 그들은 <주자가례>의 친영제도를 도입할 것을 강력하게 희망했다. 그렇다면 친영이란 무엇일까. 친영은 남자가 처갓집에서 사는 일없이 신부가 남자집으로 시집살이를 오는 것이다. 처가살이혼에 대응한 시집살이혼의 시작이 친영제도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보편화된 혼례규범집인 <사례편람>에 잘 드러난다. <사례편람>은 혼례 과정을 의혼, 납채, 납폐 그리고 친영의 네 단계로 나누었다. 의혼이란 중매를 시켜서 양쪽 집을 오가면서 허락을 받아내는 과정이다. 납채는 신랑집에서 청혼을 하고 신부집에서 허혼하는 절차다. 우리 나라 관행에서는 이것을 납폐로 대신하였다. 납폐는 신랑집에서 납폐서를 써서 사자에게 주어 신부집에 보내면 신부집에서는 이것을 받고 주인이 북향하여 재배한다. 그리고 음식, 술과 폐백으로 사례한 다음에 답장을 써준다. 마지막 절차가 혼례식을 실제로 거행하는 친영이다. 친영을 보면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드는 식의 '있을 수 없는 수치'는 면하게끔 되어 있다.
1407년 태종은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파격적인 혼례를 거행한다. 세자로 하여금 김한로의 딸을 친영의 예로 맞아들이게 한다. 세종 역시 왕세자의 친영을 결의하고 의식절차를 정하였는데 이를 둘러싸고 궁정에서는 격론이 벌어진다. 온건파들은 국왕이 친영을 솔선수범해서 자연스럽게 백성이 따르게 하자는 주장을 폈고, 급진론자들은 무조건 친영을 강행하자고 했다. 온건파는 무엇보다도 풍습이란 일조일석에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친영 반대 의견을 제기한 김종서는, "우리 나라 풍속에 남자가 여자집으로 장가드는 일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여자가 남자집으로 시집간다면 몸종.의복.가장집물을 모조리 여자가 장만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꺼려 한다. 남자집에서도 가정이 빈한한 자는 신부를 맞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남자집에서도 꺼려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이 어린 처녀를 시집보내는 것이 가능하기도 하거니와 예의범절을 몰라서 실패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친영을 주장하는 이들은 친척간의 남녀 상간이 많은 원인을 처가살이혼에서 찾기도 하였다. 이유야 여러 가지를 댈 수 있겠지만, 가부장사회에서는 남자가 장가를 '들어간다'는 사실 자체가 큰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이미 15세기 초에 처가살이혼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영문제는 15세기 말-16세기 초에 다시금 불거져 나온다. 당시 친영 지지론자들은, "친영의 예는 훌륭한 제도이며 그 뜻이 아름답다. 그런데 사대부들이 아직도 낡은 습속에 매달리고 이것을 거행하지 않는다. 법을 세우지 않고서는 능히 실행되지 않을 것이니 사법기관으로 하여금 규찰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할까"(<증보문헌비고>)라는 강경책을 내놓는다. 또 부부의 도가 무너지고 천도를 역행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의정 정광필 등은 "남귀여가 풍속은 폐단이 없지 않으나 풍속이란 스스로 변하는 것이지 위에서 강제할 것은 못된다"는 이유로 입법 시행을 반대한다. 삼국 시대 이래로 내려온 민속을 갑자기 바꾸는 데 반대했으며 고유한 민속의 지속성을 지지하였다.
혼례사 전문가 박혜인 교수(계명대)는 친영강행론 입장을 예속과 예제를 혼동한 것으로 본다. 서류부가혼을 주자가례의 친영 예로 바꾸자는 것인데, 이것은 혼속을 혼제로 이끌고자 하는 지배층의 생각일 뿐이다. 친영 지지론자들은 우리의 전래 서류부가혼 풍습이 대단히 뿌리 깉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익(1682-1763년)도 <성호사설>에서 "백년 전만 하여도 아직 처가살이혼 풍속이 숭상되었다"고 하였다. 이익이 살던 시기로부터 백년 전이면 16세기경이다. 사대부들의 희망대로 민중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국가정책적으로 친영을 의도하였지만 민중의 생활에서는 처가살이혼 풍습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논쟁사가 아닐까.
처가살이와 시집살이의 대타협인 반친영
그런데 처가살이혼은 좋은 점만 있었을까. 양반 부호집에서는 몇 명이나 되는 사위가 한 울타리 안에서 살며 매우 호화롭게 생활할 수 있었던 반면에 가난한 층에서는 신랑 친구들이 무리를 지어 신부집에 찾아가서 주식을 강요하는 남침 풍습이 유행하기까지 했다. 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서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폐습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함을 들여갈 때 신랑 친구들이 때로는 행패에 가까운 무리수를 범하는 폐습도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전통에서 이어진 것이 아닐까. 또한 몇 년씩 계속되는 처가살이 동안 빈번하게 왕래할 때마다 드는 선물비, 향연비, 게다가 사위의 의식비는 여자집에 큰 부담이었다. 인습을 어길 수 없어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처가살이를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처가살이혼의 개혁안과 친영 강행론은 계속 평행선을 달리기만 했을까. 양자의 대다협과 절충이 반친영으로 일단락 된다. 남자가 여자집으로 가서 3일만 자고 오는, 3일 친영이 16세기 후반 서울지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백성들은 처지에 따라서 2일 친영, 3일 친영 등 머무는 기간을 다양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그 반친영이란 것도 처가살이혼 유풍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반친영이란 것도 남자가 여자집에 체류하는 기간을 3일 이내로 단축하였을 뿐이지 결혼하자마자 여자를 데려오는 풍습은 아니었다. 처갓집에 여자를 그대로 두고 남자가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아기를 처갓집에서 낳아서 기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타협의 산물인 반친영조차 민중에게 널리 보급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들어오면서 가부장제적 봉건질서는 더욱 확고해졌고 모계제의 유습이었던 처가살이혼도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3일 나들이 풍습은 여전히 남아서 일제 시대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처가살이혼은 '데릴사위' 풍습에도 그 잔영을 남겼다. 일찍이 <동국통감>에 고려 충혜왕 4년 원나라 어사대에 보낸 소에 이르길, "아마도 신랑으로 하여금 신부를 데려가게 해야 할 터인데도 그 풍속은 신부를 내놓지 않으니 마치 진나라의 데릴사위 풍습과 같다......" 운운하였다. 처가살이혼과 데릴사위제가 비슷하다고 느낀 것이다. 가난한 집의 남자가 여자집에 들어가서 머슴을 겸하며 노동력을 제공하여 사위가 되는 데릴사위 풍습은 상당 기간 존속하였다. 비록 형식은 바뀌었을지라도 지금도 데릴사위 제도는 이어지고 있다. 모계사회의 처가살이혼 풍습이 데릴사위혼에 일부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21세기, 신처가살이혼 풍습의 만개
처가살이가 되돌아오고 있다. 처가살이의 반대말이었던 시집살이가 줄어들고 처가살이의 유풍이 널리 퍼지고 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아내를 취한다고 하지 않고 장가를 든다고 한다. 이것은 양이 음을 좇는 것이니 남녀의 예의를 크게 잃는다"고 하였다. 양이 음을 좇는, '불알 달린 사내로서 할 짓이 아니라'고 했던 처가살이가 지금 만개하고 있다.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를 맞이하는 지금 나는 우리 문화의 급격한 변모를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처가살이혼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시집살이혼이 쇠퇴해 모권제로 이행할 것이라고. 조선 후기의 성리학적 질서는 어떤 의도에서였건간에 시집살이혼을 국가적으로 요구하였고, 그 폐단은 여자의 혹독한 시집살이로 귀착되었다. 단순하게 맞벌이부부의 등장, 탁아시설 미비 등을 이유로 들어 20세기 말에 새롭게 시작된 처가살이 풍조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본다. 마치 유전인자처럼 오랜 세월 잠복해 온 처가살이 풍습이 다시 때를 만나 되살아나는 것은 아닐까. 남자들이여! 그렇게 놀랄 것은 없다. 시집살이혼은 문화적 헤게모니를 차지한 기간이 고작 3백여 년에 지나지 않음을 생각해 보라.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만을 기준으로 친다고 하더라도 고구려 이래로 어언 2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 민족 고유의 혼례방식은 처가살이혼이지 않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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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첫째 묶음 : 고독을 위한 의자
낙엽은 나에게
늦가을, 산 위에 올라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깊이 사랑할수록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며 사라지는 나뭇잎들 춤추며 사라지는 무희들의 마지막 공연을 보듯이 조금은 서운한 마음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봅니다 매일 조금씩 떨어져가는 나의 시간들을 지켜보듯이-
-나의 시 <가을편지>에서
며칠 전엔 꽤 오랜만에 산에 올라 큰 바위 꼭대기에 앉아 바람에 불려 떨어지는 수많은 나뭇잎들을 바라보는 명상의 시간들을 가졌었다. 무에 그리 바쁜지 계절따라 변하는 자연의 모습을 좀더 깊이 마음에 새겨두지 못한 채 이내 다른 일에 몰두해야 하는 것이 새삼 안타깝게 느껴졌다.
11월은 교회력에 따라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위령성월이므로 어느 때보다도 자주 묘지 방문을 한다. 우리 수녀원 묘지엔 지금 열 분의 수녀님들이 누워계신데 어떤 분은 병으로, 어떤 분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 들꽃으로 장식된 조그만 비석에는 고인들의 출생일, 서원일, 임종일이 새겨져있다. 뒷산 묘지를 방문할 때마다 '나도 언젠가는 땅속에 묻히게 되겠구나'하는 느낌이 더욱 절실해진다. 해마다 가을이면 나는 묘지 주변의 고운 낙엽들을 주워다 그 위에 짧은 시나 성구를 써서 카드를 만들기도 하고, 수업시간에도 낙엽을 소재로 카드나 책갈피나 편지지를 만들어 오라는 숙제를 내준다. 이러한 나를 누가 소녀 취향적인 취미라고 웃을진 몰라도 내겐 한 장의 낙엽도 소중한 묵상 자표가 되어주기에 내가 지닌 시집들 속엔 갖가지 모양의 낙엽들이 수두룩하다.
낙엽은 나에게 살아 있는 고마움을 새롭게 해주고, 주어진 시간들을 얼마나 알뜰하게 써야 할지 깨우쳐준다, 같은 분량의 시간인데도 어느 날은 하찮은 일조차 사랑으로 했다는 생각이 들만큼 알차게 시간을 보냈는가 하면 또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무얼했나 싶을 만큼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다는 자책감에 휩싸일 때도 있다. 큰병도 없이 시름시름 앓아 눕던 시간들, 피곤한 것을 핑계 삼아 중요한 기도의 일과에 소홀했던 시간들, 쓸데없는 말을 하거나 남을 미워하고, 원망했던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서 잠을 설치며 조바심 칠 때가 많았건만 여전히 나는 실패를 거듭하니 딱한 노릇이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전신이 마비되어 13년째 누워 지내면서도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세 개의 손가락으로 점역에 몰두하여 맹인들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임종욱이란 청년의 그 시간 시간들, 극심한 불구의 처지에 있으면서도 밝은 모습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수를 놓고, 뜨개질을 하며 기도생활 또한 철저히 하는 서정슬과 김소령이란 처녀들을 생각하면 나는 더욱 부끄러운 마음이 된다. 온 몸이 성한 사람으로서 나태의 늪에 빠져 시간을 낭비한다면 참으로 죄스러운 일임을 나는 이들의 정성어린 편지를 받을 때마다 거듭 절감하게 된다.
낙엽은 나에게 날마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매일 잠자리에 들 때면 나는 죽음의 예행연습이라 생각하고 감사와 기도와 함께 눈을 감는다. 그러면 근심 걱정으로 복잡했던 마음도 단순해지고, 맑고 평온하게 가라앉는다. 이승의 큰 가지 끝에서 내가 한창 낙엽으로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일까 헤아려보며 나의 물건이며 대인관계 등 아직 정리되지 못한 부분들을 성찰해 본다.
항상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이의 모습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몇 달 전에 아직은 건강한 편이신 나의 노모를 방문했을 때 그 분은 문득 "얘, 내가 죽으면 애들이 갑자기 당황할까 봐 우선 시신을 덮을 홑이불과 잘 드는 가위 하나 준비했단다. 다들 알아서 잘해 줄테지만 그래도..." 하시며 쓸쓸히 웃으시는데 가슴이 찡했다. 성서와 묵주를 잠시도 놓지 않으시며 오직 기도에만 전념하시는 그 분의 모습이 눈에 선할 때면 틈틈이 내게 보내주신 털옷, 꽃골무, 편지, 낙엽들이 더욱 정겹고 소중하다.
우리 수녀원엔 종종 나의 노모를 연상케 하는 팔순의 수녀님이 한 분 계신데 한번은 내가 밤에 우연히 그 방에 들어갔더니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에 그것 좀 꺼줄 사람을 보내달라고 성모님께 기도하시는 중에 내가 들어왔노라며 반색을 하셨다.
60년 가까이 수도생활을 하신 그 분의 모습에선 늘 청빈의 나무 향기가 난다. 어린 시절 부친이 선물로 준 낡은 나무묵주와 기도서 외엔 가진 것이 없는 요세파 수녀님은 자신을 '오직 하나님만 믿고 바라는 그러나 이젠 걷지도 못하는 바보'라고 표현하신다.
수십년 동안 주로 집안일이나 농장일을 맡아했으나 늘 기쁨과 충성으로 임했고, 살아오면서 불평이나 험담을 안하려고 최대한 노력하다 보니 침묵과 절친한 사이가 됐노라고 스스로 고백하시는 그분에게서 나는 성지의 모습을 본다. 손녀뻘이나 되는 까마득한 후배에게도 늘 먼저 인사하시며 깍듯이 존칭어를 쓰시는 그 분의 겸손은 변함이 없으시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우울한 사건들을 얘기하며 기도를 부탁하면 이내 눈물을 글썽이시는 수녀님은 누가 소식을 전한 바 없는데도 요즘은 북한 땅의 억압받고 있는 우리 동포들을 위한 기도를 자주 바친다고 말씀하신다. 때로는 조금 불한해 하시며 누군가 옆에 있어주길 바라는 눈치여서 들어가면 미안한 듯이 빨리 일터에 나가보라고 우리를 앞질러 염려하시는 수녀님은 간혹 정신이 흐려질 때도 있으시고 어린 수녀들의 이름을 못 외우는 게 딱하지만 이젠 정말 어쩔 수가 없노라며 어질게 웃으시는 수녀님은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곤 하신다. 당신의 거친 손을 꼭 나무껍질 같다고 하시는 그 분도 이제 얼마 안 남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시간들을 순명의 수도자답게, 그러나 아프고 고독하게 정리하고 계실 것이다. 나는 오늘 그 분께 빨간 단풍나무 한 가지를 갖다드렸다. 그 분이 걸어오신 삶의 빛깔과 모양이 왠지 조용히 불타는 단풍 한 그루 나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나 요세파 수녀님처럼 나도 늘 단순하고 겸허한 자세로 오늘도 살고 또 마지막 날을 예비해야겠다.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애 삶의 나무에서 날마다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좀더 의식하고 살아야겠다.
<페이터의 산문>에 인용된 호머의 시구를 떠올리며 내가 주운 한 장 낙엽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 가을 바람이 땅에 낡은 잎을 부리면 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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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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