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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16 호
단기 4341. 10. 24 (음력 9. 2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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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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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소재 시나리오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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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푸른물 창작 이야기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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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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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진정한 재산은 그가 이 세상에서 행하는 선행인 것이다.(마호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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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글터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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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캉 내캉!
고장말
‘-캉’은 경상도 사람임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말씨의 하나로, 표준어 ‘-와/과’와 대응되는 말이다. “니캉 내캉 이런 발버둥을 치고 있는 꼴이 ….”(<홍어> 김주영) “이모캉 형수 아이들은 잘 있십니까.”(<토지> 박경리) “어제 누캉 같이 갔띠이노?”(<경북동남부방언사전> 정석호) ‘-캉’의 또다른 형태는 ‘-카’이다. “야 이늠아, 니카 나와 강원도 총석정으로 빨리 가자.”(<한국국비문학대계> 대구시편) “내카 사지 누카 살아?”(위 책 예천군편)
‘-카/캉’이 ‘-와/과’에 대응하는 경상도 사람들의 전형적인 말씨라고 한다면, ‘-광’은 제주 사람들의 전형적인 말씨다. “성광 아시광 꼭 닮았수다.” “당신 우리광 무슨 원수 이수꽈?” “하늘광 따흘 래라, 몬첨.”(하늘과 땅을 보라, 먼저)(<한국구비문학대계> 남제주군편)
‘-카/캉’이나 ‘-광’은 자음·모음 뒤에서 두루 쓰인다는 점이 ‘-와/과’와 다르다.(성광, 아시광, 아들캉, 이모캉) 또 ‘-카/캉/광’은 서로 연결되는 두 단어에 모두 쓰일 수 있다는 점에서 표준어 ‘-와/과’와 그 차이를 드러낸다. 가령, 표준어에서 ‘니과 내과 같이 살어’ 하는 것은 어색하지만, 경상·제주말에서는 ‘니캉 내캉/니광 내광 같이 살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카’는 ‘-과’가 ‘과>콰>카’와 같이 변하여 생겨난 말이며, ‘-광’은 ‘-과’에, ‘-캉’은 ‘-카’에 ‘ㅇ’이 덧붙어서 쓰인다.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곁불, 겻불
'모닥불 피워 놓고/마주 앉아서/우리들의 이야기는/끝이 없어라/인생은 연기 속에/재를 남기고/말없이 사라지는/모닥불 같은 것…' 인생에 대한 상념과 예감을 노래한 박인희의 '모닥불'중 일부다. '모닥불'처럼 만추(晩秋)의 서정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곁불'이 있다. 춥다 싶으면 장터 등에서 몇명이 모여 나눠 쬐는, 정감 있는 불이다. '무사는 얼어죽더라도 곁불을 쬐지 않는다'처럼 쓰이는 '곁불'을 '겻불'과 혼용하는 경우가 있으나 '곁불'이 바른 표현이다.
'겻불'은 벼·보리·조 따위를 찧고 난 껍질을 태울 때 나오는 미미한 불기운이다. '군중의 서슬이 겻불 사그라지듯 누그러졌다'에서 볼 수 있다. '곁불'의 '곁'과 뜻이 비슷한 단어로 '옆'이 있다. 그 쓰임새의 차이도 재밌다. '옆'은 사물의 오른쪽이나 왼쪽의 면 또는 그 근처를 말한다. 상대방은 생각도 없는데 요구하고 알려줌으로써 대접을 받는다는 뜻의 '옆 찔러 절 받기'와 '옆으로 눕다·옆을 살피다' 등이 있다.
이와 달리 '곁'은 '옆'보다 넓은 의미로 대상을 중심으로 한 근방이나 가까운 주변 모두를 나타낸다. '환자 곁을 지키다' '아이는 엄마 곁에 바짝 다가앉았다'등이 그 용례며,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할 수 있도록 속을 터준다는 뜻의 '곁을 주다', '전쟁 통에 단신 월남한 그에겐 가까운 곁이 없다'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심리적으로 같이 할 수 있는 대상을 지칭할 때도 '곁'이 사용된다.
부딪치다, 부딪히다, 부닥치다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 '부딪다''부딪치다''부딪히다'가 있다. 차이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받침도 'ㅈ'을 'ㄷ'으로 잘못 쓰는 경우가 있다. 본딧말이 '부딪다'이고, 센말이 '부딪치다'(보통 '부딪다'보다 많이 씀), 피동이 '부딪히다'이다. 즉 '부딪다'에 강세접미사 '치'가 들어간 것이 '부딪치다'이고, 피동접미사 '히'가 들어간 것이 '부딪히다'이다. 따라서 문장에서 행위의 주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 '부딪치다' 또는 '부딪히다'를 사용하면 된다.
'국회에서 여야가 부딪쳐 설전을 벌였다''트럭이 승용차와 부딪쳤다' '그 젊은 남녀는 지하철에서 시선을 부딪치며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등에서처럼 '부딪치다'는 행위의 주체가 동작을 일으키거나 관여하는 것이다.
'주가가 저항선에 부딪혀 더 이상 오르지 못했다' '경제가 난관에 부딪혔다' '술 취한 행인에게 부딪혀 넘어졌다' 등과 같이 '부딪히다'는 남의 행동(관여)에 의해 행해지는 동작이다.
비슷한 말로 '부닥치다'가 있다. '반대에 부닥쳤다' '한계에 부닥쳤다' 등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때 주로 쓰이는 단어로 '부딪히다'와 비슷한 뜻이지만, 근래에 나온 사전은 '버스와 택시가 부닥쳤다' '문을 나서다 손님과 부닥쳤다' 등에서처럼 '부딪치다'의 경우를 대신해 쓸 수도 있는 폭넓은 의미로 '부닥치다'를 풀이하고 있다.
'부딪치다' '부딪히다'의 구분이 잘 안 되거나, 받침이 'ㅈ'인지 'ㄷ'인지 아리송하면 그냥 '부닥치다'로 쓰는 것도 한 방법이다.
쪽집게, 짜깁기
얼마 전에 대학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수험생들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아직 대학에 따라선 논술고사가 남아 있고 심층 면접도 치러야 한다. 논술고사 출제 예상 문제들을 기가 막힐 정도로 콕 집어내 잘 설명해 주는 '쪽집게 논술 과외 강사'들의 과외비는 아마 부르는 게 값일 것이다. 이렇게 '어떤 사실을 정확하게 지적해 내거나 잘 알아맞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많은 사람이 '쪽집게' '쪽집개'라고 쓴다.
된소리로 발음하는 언어습관에 이끌려 이렇게 쓰는 것 같은데 표준어는 '족집게'다. 일상 언어생활에서 일부 말은 된소리로 발음해야 말의 맛이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 소주를 '쏘주'로, 강술은 '깡술'로, 자장면은 '짜장면'으로, 강소주도 '깡소주'라고 해야 맛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소주''강술''자장면''강소주'가 표준어임은 두말 할 것 없다.
또 자주 틀리는 것으로 '짜집기'가 있다. '짜집기를 특히 잘 하는 세탁소나 옷 수선집을 알면 좀 얘기해 줄래?'에서처럼 '짜집기'가 바른말인 줄 아는 사람이 많다. '직물의 찢어진 곳을 본디대로 흠집 없이 잘 짜서 깁는 일'은 '짜집기'가 아니라 '짜깁기'가 표준어다. 여기서 '집다'는 '깁다'의 강원·경상·충청도 방언이다. '짜다+깁다'에서 온 말이므로 '짜깁기'가 바른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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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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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불만족 - 오토다게 히로타다
1. 행복한 아이 - 유아기, 초등학교 시절
신나는 체육시간
철봉도 할 수 있어요
선생님께서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체육’이라고 대답해 놀라게 해드린적이 있다. 그러나 사실이 그랬다. 부모님과 이런 대화를 했던 기억도 있다. 오토 엄마 혹시 말예요 손과발 가운데 어느 한쪽이 생겨난다면 전 어느 쪽을 선택할거라고 생각하세요? 엄마 글쎄 잘 모르겠는걸 어느쪽이니? 오토 발이요 엄마 왜? 손이 생기면 이것저것 뭐든지 할수 있을텐데....... 오토 손으로 하는일은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하지만 발만 있으면 다른 아이들과 함께 축구를 할수 있잖아요. 손이 없는탓에 주위사람들의 신세를 져야하는 경우가 많은 내가 손으로 하는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다고 하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그만큼 체육을 좋아했다. 나의 이런 생각과는 달리 다카기 선생님께선 체육시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계셨다. ‘무엇이건 하겠다’는 의욕은 좋지만 오토로서는 정말할수 없는것도 있다. 어떻게 하면 그 아이에게 상처 입히지 않고 견학을 시킬수 있을까. 그러나 선생님의 이런 갈등과는 상관 없이 나의 도전은 끝이 없었다. 준비운동으로 시작되는 체육시간 선생님이 나를 눈여겨 보신다. 나는 다른 아이들의 움직임에 맞춰 짧은 팔을 돌리거나 몸을 통통 튕겨올렸다. 이를 본 선생님께서는 ‘그래’ 모든것을 똑같이 할 필요는 없어 오토가 할수 있는 범위내에서 다른아이들과 어울릴수 있다면 된거야‘라고 결론을 내리셨다. 다른아이들이 운동장을 두 바퀴 돌때는 ’오토, 넌 저기 수돗까지 갔다 와!‘ 하셨고 높이뛰기를 할때는 ’다른 애들은 다 가로대를 올리지만 오토가 할때는 내린다. 그걸 멋지게 넘어봐‘ 라고 해주셨다. 그냥 앉아서 견학하는 것을 너무도 싫어했던 나에게는 정말 신나는 체육시간이었다. 이런 적도 있다. 철봉시간 선생님이나 나나 철봉은 도저히 무리라고 생가했다. 나는 아이들 틈에서 벗어나 철봉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는 친구들을 향해 파이팅을 외쳤다. 그때 내눈에 정글짐이 한눈 가득 들어왔다. ’앗 이 정글짐이 나한테는 정말 꼭맞는 철봉이 되잖아‘ 시험삼아 겨드랑이 밑으로 끼워본다. 끙! 하고 힘을 주니 내몸이 쑤욱 올라갔다. 저쪽을 보니 친구들이 철봉에 매달려 몸을 앞뒤로 내밀어 본다. 그러자 내몸이 기세 좋게 앞으로 쑤욱 나가더니 반동으로 다시 뒤쪽으로 밀려간다. 야! 나도 철봉을 할수 잇다.
통!통!통!
1월이되자 줄넘기 수업이 시작 되었다. 다카기 선생님은 어떻게 하면 내가 수업에 참여할수 있을지에 대해 연구 하셨다. 체육시간을 제일 좋아하던 나도 줄넘기가 시작되고 나서는 그만 우울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친구들이‘줄넘기 하자’며 다가왔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다. 어느날 선생님께서 부르시길래 가보았더니 친구들이 고무줄을 양쪽에서 잡고 돌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가운데에 날 세우고는 ‘자, 고무줄이 땅에 닿으면 체조할때처럼 뛰어 올라 보는거야’라고 말씀하셨다. 몇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만만치 않았다. 선생님도 거의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통!’ 타이밍에 맞춰 딱 한 번 뛰어오를수 있었다. 사실은 뛰어올랐다기보다는 어쩌다 간신히 들어올린 몸 아래를 고무줄이 지나갔다는 느끼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잘했어 정말 잘했어 바로 그거야 타이밍에 맞춰서 통!통! 그렇게 하면 하면 돼!라며 잔뜩 흥분해서 칭찬해 주셨다. 나는 머릿속으로 리듬있게 타이밍을 계산하면서 통!통!고무줄의 움직임과 호흡을 맞추었다. 한번이 두번.두번이 세번으로 늘어났다. 여기까지가 한계. 짧은 다리를 용수철삼아 온몸을 띄워 올려야하니 힘이 여간 많이 드는게 아니었다. 평소에는 선생님이 힘들지않냐고 물으시면 절대로 힘들지 않다고 대답하던 나였다. 그러나 줄넘기 연습을 한 후에는 영락없이 녹초가 되고 말았다. 연습을 하면 이렇게까지 발전하게 되는것인가? “선생님 저요 줄넘기를 스물세번이나 할수 있게 됐어요!” “그래애? 어디 한번 볼까?” “이야가 나와 마주서서 줄넘기 준비를 한다. ’하나둘셋!‘ 신호에 맞춰 고무줄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내가 호흡을 맞춰 뛰어올라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미야가 고무줄에 걸려도 실패다. 그래서 남 운동신경이 발달한 미야하고 짝을 이뤄 연습을 했던것이다. ’통,통,통,통‘ 피나는 연스브이 보람이었다. 미야와 난 호흡이 척착 맞앗다. ”우와 굉장하다 둘다 정말 연습을 많이 했구나 조금 더 연습해서 어디 서른번 까지 목표를 세워 볼까?“ 우리들은 다시 연습에 매달렸다. 한번 뛰고 쉬고 또 한번 뛰고는쉬어야하는 나 이렇게 느려터진 연습에도 불구하고 미야는 불평한마디 없이 잘 도와주었다. 드디어 서른네번 가장 최고 기록이었다. ”야 우리선생님께 가보자!“ 마음이 들떠서 덩덜아 미야도 자랑스러워했다. 다카기 선생님 앞에서 우리는 훈련성과를 제대로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긴장한 탓인지 스물아홉번밖에 하지 못햇다. 선생님께서는 ’정말 잘했다‘하며 온 얼굴에 주름이 잡히도록 활짝 웃어 주셨다. 나는 미야 덕분에 다른 아이들보다 수십배는 더 재미있게 줄넘기를 즐길수 있었다.
마라톤 호위대
줄넘기 재미에 푹 빠져 지내던 그즈음에 학교에서 ‘마라톤 카드’란 것을 나누어 주었다. 운동장을 한바퀴 돌때마다 도쿄에서 하코네 까지 지도가 그려진 카드에 철도역을 하나씩 색칠해가는 아침 마라통이었다. 다카기 선생님은 나를 어떤식으로 참가시키면 좋을까 사흘정도 고민하던 끝에 이런제안을 반 아이들 앞에 내놓으셨다. “다른 사람은 한 바퀴 돌면 기차역 하나를 색칠할수 있지만 오토가 한 바퀴를 돌면 기차역 네개를 칠할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좋아요-” “오토,우리 열심히 해보자.” “네 저도 열심히 뛰겠습니다.” 말하자면 선생님께서 고안해 내신 ‘오토의 룰’인 셈이다. 이정도면 나도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마라톤을 해도 색칠하는 진도에 크게 뒤질 이유가 없다. 기운이 바짝 났다. 다음날 부터 하코네를 향한 여행길에 나섰다. 아침 등교시간이 빠르면 빠를수록 달리기할 시간을 많이 번다. 집을 나설 준비를 하면서 ‘빨리요 빨리요, 빨리요’하며 어머니를 재촉했다. 그러나 다카기 선생님의 고민은 정작 따로 있었다. 나는 평소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에는 가까이 가지 않는다. 위험에 대비하는 민감한 성격 때문이다. 아무리 덥고 목이 말라도 수돗가에 아이들이 북적거리면 절대로 가지 않고 그냥 꾹 참고 있을 정도로 철저했다. 그런데 마라톤은 여러 겹 줄을 서서 달린다. 엉덩이를 끌어 당기며 간신히 달려야 하기 때문에 선생님은 내가 학생들에게 걷어차이지나 않을까 걱정 하셨던 것이다.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6학년 형들이 함게 달려주기로 했던 것이다. 함게 달린다고는 하지만 조깅도 되지 않을정도로 형편 없이 느린속도. 그래서 순번을 정해서 자신의 마라톤 코스를 끝내고는 다시 내게로 돌아와 대열을 만들어 주었다. 다른 아이들이 잘못해서 나를 걷어차지 않도록 전우좌우에서 6학년 형들이 지켜 주었던 것이다. 그날 따라 웬눈이 그리도 많이 내렸는지 운동장 여기저기에 눈이 녹아 질퍽 거렸다. ‘엉덩이가 젖으면 안되잖아’ 형들은 나를 덥석 들어다가 마른 땅으로 옮겨주곤 했다. 마치 달리는 ‘호위팀 같았다. 다카기 선생님은 이런 모습을 보며 정말 흐뭇해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한바퀴 돌 때마다 철도역 네 개‘를 제안 하시면서 ’달리기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반발하지 않을까‘ 걱정 하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년간을 함계 생활하면서 모두가 나를 이해해 주었고 ’오토가 뭘 힘들어 하는지 이해만 해주면 뭐든지 우리하고 똑같이 할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카기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배웠는지도 모른다. ’오토의 룰‘을 처음 만들어 낸 것은 우리 반 아이들이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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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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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졌다는 편지 - 장석남
1
이 세상에서 살구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복숭아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꽃이 만들던 그 섭섭한 그늘 자리엔 야휜 햇살이 들다가 만다고 쓰고
꽃 진 자리마다엔 또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살구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복숭아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그러니까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써야 할까
내 마음속에서 진 꽃자리엔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달이 뜨면 누군가 아이를 갖겠구나 혼자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고 그대로 써야 할까
2
꽃 진 자리에 나는 한 꽃 진 사람을 보내어 내게 편지를 쓰게 하네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잘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그 바람에 뺨을 기대보기도 한다고
나는 오지도않는 그 편지를 오래도록 앉아서 꽃 진 자리마다 애기들 눈동자를 읽듯 읽어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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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한국사 |
우리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 이이화
제3부 나라를 열다
5. 철제 무기로 위만이 집권하다
왜 조선은 연나라에 졌을까
조선왕은 대동강가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겨야 햇던 나라의 운명과 부하들이 연나라 군사에게 밀리고 주민들이 쫓겨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모든 시련이 연나라 군사들이 들고 있는 시꺼먼 쇳덩어리 무기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 철기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조선의 철기문화는 어떤 경로로 들어오고 보급되었을까? 이 의문을 푸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으나 대체로 다음의 세 단계를 거쳐 유입되었다고 보고 있다.
첫번째 단계는 청동기의 경우처럼 시베리아 계통의 철기가 서기전 7세기에서 5세기경에 유입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계통의 유물은 함경도지방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이 철기는 연철과 선철 제품으로 확인되고 있다. 두번째 단계는 중국의 전국시대 철기문화가 서기전 3세기전에서 2세기경에 유입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연나라나 제나라와 잦은 교류를 가지면서 자연스레 보급되었다는 것이다. 이 계통의 유물은 청천강 이북지방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으나 그 아랫지방에서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옛 조선의 영역에서만 발굴되고 있는 것이다. 평북 영변과 요령성 무순, 평북 위원 등지에서 나온 유물에는 호미, 괭이, 낫, 반달칼, 자귀 따위의 농기구와 창, 화살촉 따위의 무기가 섞여 있다. 중국의 화폐였던 명도전이 함께 나오는 경우도 있어서 중국 유입을 확인시켜준다. 여기에는 선철 제품 외에 강철제품도 있다. 세번째 단계는 서기전 1세기경으로 내려온다. 대동강 유역의 분묘에서 한 대의 철기 제품이 대량으로 나왔는데 대부분 창, 도끼, 장검 같은 무기류였다. 이는 바로 한나라의 침략이 있는 뒤 만든 분묘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어 충청도, 경상도 일대로 널리 퍼져나갔다. 곧 이때에 이르러 한반도 전역에 걸쳐 철기문화가 보급된 것이다. 이 제품들은 강철이었다.
철기는 연철, 강철, 선철로 나뉘는데 이는 탄소의 비율에 따른 것이다. 청동기 주물 제작에 필요한 온도는 800도 안팎인데 무쇠도 이 온도에서 녹는다. 여기에 200도 정도의 온도를 더 높여서 뽑아낸 것이 연철이다. 연철은 불순물이 채 녹지않아서 순도가 낮으며, 단단하고 실용적인 철기를 만들어낼 수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무쇠를 1200도 이상의 열을 가해 녹이면 액체 상태로 되면서 탄소 함량이 높아지는데 이를 선철이라고 한다. 선철은 도끼나 망치 같은 주조 하는 도구를 만들 때는 알맞으나 칼이나 창 같은 무기를 만들 때는 탄력이 떨어져 적당하지 않다. 칼을 만드는 무쇠는 15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연철에 탄소를 가하거나 선철에서 탄소를 없애는 과정을 거쳐 만든다. 이것이 강철이다. 위에서 말한 세 단계의 유입 시기에도 이런 과정의 기술적 수준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 이후 철기문화가 단계적으로 보급되고 기술 수준도 높아졌으나 결정적인 시기는 서기전 2세기 끝무렵인 한무제 연간이었다. 한무제는 철기문화 보급에 국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 힘입어 한나라의 침략 후 한반도에도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강철 제품이 보편화되었다.
쇳덩어리 때문에
철기문화는 기술의 발전 속도나 보급 과정이 청동기문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이는 강력한 지배권력의 개입과 장려에 힘입은 탓이다. 또 철기는 시대적인 배경으로 인하여 무기 위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농기구나 생활도구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이것도 청동기문화와 다른 점이다. 조선왕의 고민과 열정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하루아침이 무쇠로 만든 날카롭고 단단한 무기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조선의 준왕은 무쇠 무기로 무장한 위만에게 조선의 왕자리를 넘겨주었지만, 위만의 손자 우거왕은 더욱 세련된 무쇠 무기를 지닌 한무제의 군사들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근대에 들어와 서구의 제국주의가 대포를 앞세우고 식민지를 확대해나간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거대한 이웃 중국은 춘추전국시대 이후 한나라 때까지 수백년 동안 서로 땅덩이를 빼앗고 빼앗기는 전쟁을 거듭했다. 이때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평온한 시대에 병이나 굶어서 죽는 숫자와는 비교가 안되었다. 오랜 진통을 겪은 후 진시황은 서기전 221년 마침내 중국을 통일했다. 그때 통일 중국의 영역은 지금의 중국 본토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진시황이 통일했을 때의 중국 인구는 1천만 명쯤으로 추정된다. 살아남은 사람이 많았을까, 죽은 사람이 많았을까? 여러 나라들 중에서 조선과 가장 가까운 연나라와 제나라가 제일 늦게 멸망당했다. 진나라에 쫓겨 연과 제에 망명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말할 것도 없이 육지로는 요동을 거쳐 흉노 땅이나 조선 쪽으로 도망했고, 바다로는 발해나 황해를 보트 피플의 상태로 떠돌다가 요동반도나 항해도 쪽에 닿았을 것이다. 이제 조선 땅은 조용할 수 없게 되었다.
진시황은 중국의 변두리 네 지방에 퍼져 있는 이른바 오랑캐들이 거슬렸다. 오랑캐 족속들이 중국 내지에 와서 활개치며 집단을 이루고 사는 꼴이 싫었다. 진시황은 남쪽의 묘족과 만족, 산동지방의 동이족을 분산시켜 중국 마을에 편호시켰다. 이를테면 대량으로 분산 이주시킨 것이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라는 민족 또는 종족 차별주의가 싹텄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뒤 수도 함양 일대에 아방궁 따위 거대힌 역사를 시작했다. 특히 만리장성의 수축에는 엄청난 물량이 투입되었다. 만리장성의 동쪽 부분은 산해관과 요동으로 뻗어간다. 이쪽은 분명히 조선을 염두에 둔 것이다. 전국의 장정들이 장성 공사장이나 함양으로 끌려왔다. 장정들은 일하면서 죽어갔다. 피역하려는 풍조가 전국을 휩쓸었다. 사람들은 무리를 이루어 남쪽이나 동쪽으로 도망쳤다. 진나라 건국 후 두 번째로 대규모의 도망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후한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진한의 노인들이 말하기를 진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심한 부역을 피하여 한나라에 오자 마한이 동쪽 지역을 떼어주어 살게 하였다 한다. 진한 사람들은 국을 방이라 부르며 활을 호라 하고 도둑을 구라하고 술잔 돌리며 마시는 것을 상이라 하고 서로 무리 부르는 것을 도라 하는 등 진나라 말과 흡사하기 때문에 진한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연나라나 제나라 사람들이 아닌 진나라 사람들이 도망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도망자들은 북쪽의 조선만이 아니라 그 아래쪽인 진한에까지 진출했다. 그래서 진한의 말은 진나라 사람들의 영향를 받았다. 사실 진의 통일이 있기 전인 전국시대만 하더라도 중국의 언어와 문자는 지역에 따라 상당히 달랐다. 한자의 모양은 거의 이자형이었는데 이를 이사가 소전체로 통일한 것이다. 망명자들은 문화 수준도 열등하고 또 함부로 거들먹거렸는지 "중국의 풍속을 어지럽히고 동이의 풍속까지 나빠지게 하였다" 는 기록도 있다. 자신들 나라의 예절도 안 지키면서 조선의 풍속도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의 비왕은 망명자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었고, 진한도 마찬가지로 이들을 우대했다. 비왕은 진나라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정략적으로 겉으로는 진나라에 복속하는 체하였으나 끝내 조회에는 나가지 않아 뒷날 사가들의 칭송을 들었다.
진시황은 계속 집적대기는 했으나 끝내 조선 정벌은 단행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기질을 지닌 한나라 무제에게 과업을 넘겨주어 100여 년 뒤에나 조선 정벌을 단행하게 된다. 진시황이 죽고 난 뒤 중국은 곧바로 내란에 휩싸였다. 진승, 항량같은 지도자들이 민심의 동향을 살피고 진의 폭정에 저항해 농민군을 동원했다. 기회 포착에 날쌘 유방이 이 틈을 타서 한나라를 세우고 제위에 올랐다. 이때의 사정을 위략은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비왕의 아들 준이 왕위에 오른 지 20여 년에 진승, 항량이 일어나서 천하가 어지러웠다.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차츰 준에게로 도망하였는데, 준이 이들을 서방에 배치하였다."
진나라 말기에 연과 제의 백성만이 아니라 북경 서쪽의 내지에 있는 조의 백성까지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준왕은 아버지 비왕의 정책을 충실히 계승하여 이들에게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서쪽지방에 살 터전을 마련히주었다. 이것이 나중에 화근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뒤 중국의 정세는 급변했다. 유방은 산적 출신으로 의심이 아주 많아서 제위에 오른 뒤 유능한 신하를 하나하나 제거했다. 일급 공로장인 한신도 없애버렸다. 한신은 죽으면서 '토사구팽'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연나라 왕 노관은 한신이 제거되는 모습을 보고 몸을 떨었다. 노관은 유방과 한 마을에서 자란 죽마고우였다. 유방은 한의 제실을 튼튼하게 하려고 왕자리를 모두 유씨에게만 주었다. 그중에 연나라 왕 노관을 포함해 예외가 셋 있었다. 노관은 아무리 죽마고우라지만 유방을 믿을 수 없었다. 노관은 유방의 지시를 받고 한에 맞서 일어나 반역자를 토벌하면서 반역자들과 서로 짜고 지구전을 벌였다. 이 사실이 탄로나 유방이 그를 문책하려 하자 재빨리 흉노로 도망했다. 뒤이어 연나라의 망명자들이 흉노와 조선으로 분주히 발길을 돌렸다. 후한서에 이런 기록이 있다.
"조선후 준이 스스로를 왕이라 일컬었는데 한나라 초기에 큰 난리가 일어났을 때 화를 피해 조선으로 도망한 연. 제. 조나라 사람의 수가 수만이었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준을 격파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숫자까지 기록되어 있다. 진나라 때보다 더 많은 인원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대이동을 한 것이다. 만약 이들이 모두 서쪽 국경지대에 모여 살았다면 단순한 세력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 대부준이 평양에 진출했다면 여간 소란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의 망명자들을 두고 단순한 정치적 망명이 아니었고 또 중국 사람들만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천관우는, 연.제.조에서 도망온 백성들을 동이계를 주축으로 한 유민으로 보고 있다. 연과 제는 동이의 주요 분포지였고 진시황의 편호정책이 실시된 지 불과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조나라가 동이계였다는 설도 있다. 유민들의 대부분이 동이계였다면 조국으로 돌아온 셈이 된다. 위만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위 기록에는 위만이 망명하여 왕위를 빼았은 사실까지 적혀 있다. 위만, 그의 이름은 우리 고대 역사에 빼놓지 않고 등장한다. 위만은 노관의 부하로서 중요 직책을 맡았던 장수로 보인다. 그는 왜 노관을 따라가지 않고 조선으로 도망쳤을까? 그만한 내력이 있을 것이다.
호랑이가 주인을 물다
위만은 혼자 도망친 것이 아니라 무리 1천여 명을 끌어모아 귀순을 가장했다. 이로 보면 그는 큰 수완가이며 능력이 있었다. 그는 또 조선의 풍속인 상투를 틀고 조선 옷을 입고 나왔다. 이런 차림새로 나오면 조선 사람과 위화감도 없었을 것이고 동화의 뜻을 나타낸 곳으로 볼 수도 있다. 그와 그의 무리는 패수(지금의 압록강)를 건너 평양으로 진출했다. 그들은 조선의 조선의 준왕을 만나 귀순의 뜻을 알리고 새로운 임무를 맡겨달라고 빌었다. 준왕은 진나라 세력에 밀려 평양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귀순자들을 서쪽 중국과의 국경지대에 배치하여 국경수비대의 임무를 맡겼다. 준왕은 위만의 기세와 많은 무리들, 그리고 우수한 철제 무기를 보고 힘이 솟아났을 것이다. 위만은 "서쪽 변방에 살게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들을 거두어 조선의 울타리가 되겠다" 고 준왕을 설득 했다. 준왕은 그를 신임하여 박사로 삼고 책임자의 징표를 내려주었으며, 100리의 땅을 떼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위만은 국경수비대의 책임자가 되었다. 패수 근방의 국경지대에서 그의 활약은 대단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많은 망명자들을 거느리고 또 새로 도망해오는 자들을 귀순시켜 훈련을 시키고 방비를 튼튼히 했다. 그 숫자는 처음보다 훨씬 늘어났고 힘도 더욱 커졌다.
호랑이를 잘 길러놓으면 끝내 주인을 잡아먹는 것이 정해진 법칙이다. 위만의 음모는 별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그는 부하를 보내 준왕을 속였다. 아, 대왕이시여, 다급합니다. 저 무도한 한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나누어 쳐들어옵니다. 우리가 목숨을 바쳐 왕궁에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 위만은 준왕의 허락을 받아내고 거리낌없이 왕검성으로 들어와 준왕을 몰아냈다. 음모에 있어서 준왕은 위만을 따라 가지 못했다. 준왕은 너무 위만을 믿었다. 준왕은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왕검성을 내준는 대신 겨우 목숨을 건져 남쪽으로 달아났다. 결국 우수한 철제 무기가 준왕과 조선을 끝내 파멸로 몰고간 것이다. 이제 조선은 위만의 손에 들어갔다. '위만조선'이 된 것이다. 위만은 왕이 되고도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바구지 않았으며 도읍도 옮기지 않았다. 행정조직도 중국식으로 개편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다. 이 문제를 두고 그의 출신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중국의 역사책은 한결같이 그를 연나라 사람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위만은 조선 사람으로 노예소유자 계급 출신이라고도 하고 요동에 거주하던 동이족 계통었다고도 한다. 이병도는 뒤의 주장의 근거로 다음 몇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연나라 동쪽지대의 주민은 예맥계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위만 역시 그럴 가능성이 크다. 이 일대의 주민은 거의 조선과 같은 동이족 출신이므로 그도 그 무리의 하나일 수 있다. 둘째, 위만이 망명했을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인 복장으로 들어왔다고 한결같이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흉노와 퉁구스는 변발을 했고 동호는 삭발을 하였던 풍속에 비해 상투는 조선의 특수한 풍습이었다. 이는 특히 위만의 차림에 민족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셋째, 준왕이 처음부터 그에게 국경 수비를 맡길 만큼 신임한 것을 단순하게 보면 안된다. 그가 중국 사람이라면 큰 직책을 쉽게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에 위만이 왕 된 뒤에도 나라이름을 조선이라고 그대로 쓴 것과 관제가 중국과 다르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그의 망명이 노관의 모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였다. 어디까지나 그의 자의에 따라 망명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가 원래 진한 땅이었던 개평현에 살았다는 기록에 따라 그가 모은 무리들도 진한 사람들이거나 이곳에 살던 진변 사람들일 것이라고도 했다. 개평현은 진개가 조선과 연나라의 경계선으로 삼았던 곳이니 위만의 무리는 조선이 평양으로 옮겨올 때 그대로 눌러살던 동이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애써 위만이 동이족이라고 강조할 필요는 없다. 그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면서도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그대로 쓰고 도읍을 옮기지 않고 행정조직도 그대로 유지한 것은 기존의 조선을 뒤엎어버리고서는 통치가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존의 지배조직과 주민의 정서를 그대로 유지 답습하는 것이 새 왕조의 통치에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했다면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이것이 순리이다. 그가 동이족 또는 조선의 후예여서 민족의식을 가지고 조선을 유지했다고 보는 것은 오늘날의 민족주의적 잣대로 재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여기에는 중국 사람에게 나라가 넘어갔다는 사실을 수치로 여기는 의식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위만이 새 왕조를 세운 시기는 서기전 194년이었다. 유방이 죽고 그의 아들 혜제가 왕위에 앉은 때였다. 이때 한나라는 평온을 찾고 내치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런 정세 탓이었는지, 수완이 뛰어나서인지, 아니면 그가 사용한 무쇠 무기가 위력을 발휘해서였는지 위만의 활약은 대단했다. 진나라에서는 요동을 차지한 뒤 곧바로 이곳에 요동외요를 두어 방비했다. 곧 군사초소를 두고 군대를 상주시켰다. 한나라 때에는 이곳을 요동군으로 삼고 태수를 두어 변방의 군사와 외교 책임을 맡겼다. 위만과 요동태수는 협정을 맺었다. 위만이 한나라의 외신이 되어 요동지역 바깥의 오랑캐들이 변방을 도둑질하지 못하도록 막고, 오랑캐의 군장들이 천자를 알현하려 하면 막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기에는 "이 때문에 위만이 군사와 병기와 재물을 얻었다" 고 기록하였다. 위만이 요구한 조건이니 위의 내용말고는 자세히 적지 않았다. 그러나 외신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분위기로나 병기, 재물따위의 기록으로 보아 상당한 요구 조건이 관철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보면 이때까지도 위만은 물론 동쪽의 다른 나라 군주들도 한나라에 대해 신하로 일컫지 않았고 조공도 하지 않았다. 요동태수는 혜제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한나라는 동쪽의 평화를 위해 타협을 했다. 한나라는 다른 나라들과도 유화책을 쓰며 평화를 추구했는데 이는 너무 오래 전쟁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중계무역권을 틀어쥐고
위만은 이제 한나라의 침략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놓고 우수한 무기와 군대로 이웃의 작은 고을을 하나하나 쳐서 아울러나갔다. 동쪽과 남쪽의 작은 나라들을 모두 복속시켜 영역이 수천 리로 뻗었다. 위만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정복활동을 벌인 군주로 꼽힌다. 그는 오랜 전통을 지닌 조선의 지배세력과 주민을 그대로 끌어안고 진과 한의 망명자들을 부하로 부렸다. 거기다가 강철로 만든 생산도구와 무기를 가지고 한나라의 원조까지 받아가며 정복전쟁을 벌였다. 이때 조선의 체제는 꽤 탄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쪽의 한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특히 그가 몰아낸 준왕이 왕위에 있는 마한도 침략하지 않고 방임했다. 위만이 세우고 넓혀간 조선을 후기조선으로 부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후기조선은 한나라의 구속을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추구했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은 할아버지의 약속과는 달리 한나라의 망명자들을 유인해 나라의 힘을 키웠는데, 그 숫자가 대단히 많았다. 이는 어찌 보면 할아버지의 정책을 답습한 것일 수도 있다.
'우거'라는 왕이름도 중국식이 아니다. 우거의 어원을 따져 분석해보면 이 말은 씨족의 생활공동체 혹은 생활공동체 연합의 우두머리 직책 또는 사람의 뜻을 지닌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 우거왕은 위만의 손자로 세습군주이기는 했으나 이때까지도 조선 고유의 용어를 왕의 이름으로 썼다. 우거왕은 한의 천자에게 알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막고 있었다. 작은 나라들은 조선의 압박을 심하게 받았거나 아니면 시기하여 천자에게 여러모로 고자질을 했을 것이다. 조선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위의 여러 변방들이 한나라와 교역하는 것을 매개하여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였다. 그래서 다른 주변국의 조공길을 막았다. 이에 한나라에서 조선에 압력을 넣자, 우거왕은 북쪽의 흉노와 군사적 제휴나 연대를 모색했다.
사정이 이쯤 되자 한으로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한나라는 사신 섭하를 보냈다. 섭하는 우거왕을 만나 천자의 명을 내세우며 회유하였다. 우거왕은 천자의 명을 완강히 거절했다. 교활한 섭하는 우거왕을 쉽게 다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섭하가 돌아갈 때 우거왕은 신하 장을 딸려 정중히 전송하도록 하였다. 이때 섭하는 계책을 썼다. 그는 국경인 압록강에 이르러 돌아가려는 장을 가로막고 마부를 시켜 찔러 죽이게 했다. 섭하는 재빨리 요동의 요새 안으로 달려들어가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공을 자랑하는 글을 올렸다. 그 당시 한의 천자는 무제였다. 무제는 조선을 미워한 나머지 실정도 살피지 않고 섭하의 공을 기려 요동의 동부도위로 삼았다. 태수 밑에서 군사 책임을 맡는 벼슬이었다. 우거왕의 기질로 보아 이 일를 그냥 넘길 사람이 아니었다. 우거왕은 군사를 동원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조선의 군사들은 요동으로 쳐들어가 섭하를 단칼에 쳐죽였다. 이 사건은 무제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그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결국 무제의 대대적인 조선 침략이 단행되었다. 큰일은 언제나 작은 빌미에서 시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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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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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2.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세상에 공짜가 아디 있나요
오후 10시쯤, 차량이 붐비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늦은 시간대인 만큼 빈 택시로 다니는 차들은 거의 없었다. 택시가 한남동을 지날 때였다. 누군가, “미아리 더블!”하고 소리치며 차를 세웠다. 차에 오른 손님은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 손님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고개를 숙이면서 차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다른 게 아니라 출렁, 하는 그녀의 터져나올 듯한 허연 젖가슴에 그만 눈길이 가 닿은 것이다. 그런데.
“아저씨, 나 멋있어요?” 그녀는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듯, 부끄러움조차 없이 이렇게 말하며 내 옆자리로 앉는 것이다. 당황해서 얼굴에 모닥불 담아부은 듯한 내가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슬쩍 곁눈으로 보니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듯한 노 브라, 게다가 그녀는 풍만한 가슴선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깊게 파인 웃옷 차림이었다.
“ 네, 멋있습니다.”
방금 외국잡지에서 튀어나온 듯 체격 좋은 글래머..., 게다가 미모도 썩 괜찮은 여자 손님을 옆자리에 앉히고 가는 내 기분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조금 가지니 그녀는 또,
“아저씨, 정말 나 멋있어요?” 다시 한 번 확인이라도 하듯 묻는 것이다. 나는 그만 멋쩍어서 싱긋 웃으며, “네, 정말 멋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또 만족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자신에 찬 웃음을 흘리는 것이다. 정체가 묘연한(?) 이 손님을 태운 차가 경동시장 부근을 지날 때였다. 시장 안은 모두 파장한 뒤였고, 근처 상가들도 대부분 불빛이 꺼져 버린 터라 이곳은 마치 어둠이 짙은 장막을 한겹 씌워 놓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내 오른쪽 손을 잡더니 불쑥 자신의 가슴 속으로 집어넣었다. 갑자기 물컹, 하는 이물질의 촉감이 만져졌다. 느닷없이 당한 일이었다. 세상에, 이런 난처한 경우가! 순간, 전깃줄에 감전이라도 된 듯 오른쪽 손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그녀는 이제 내게 교태어린 눈길마저 던지고 있었다. 무엇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잠시 후 나는 정신을 가다듬어 손을 빼냈다. 차는 목적지인 미아리에 다다랐다. 그녀는 샐쭉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아무런 말도 없이 팔랑거리며 앞쪽으로 걸아가는 것이었다.
“아가씨, 요금 줘야지!” 당황해서 클랙슨을 빵빵 누르니, 그제야 뒤를 돌아본 그녀가 차 옆으로 다가왔다. “아니, 그냥가면 어떡해? 요금을 줘야지요!” 의아하다는 듯한 얼굴로 당당하게 내뱉은 그녀의 대답은 이러했다. “아저씨, 그러면 내건 공짜예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난 택시 기사는 잠시 너털웃음을 웃었다.
“스님, 세상에 이런 불한당 같은 아가씨가 또 있나 싶더라구요. 몇 년 전이니까, 그땐 제가 아직 총각이었을 적의 일이지요.” “저런..., 그래서 결국 요금을 받지 못했겠구려. 애써 생고생만 했습니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말했죠, 당신이 더블 요금 준다고 했지 않느냐, 나는 편도만 왔으니 이건 내가 손해다. 편도 요금을 내든지 아니면 다시 차에서 타고서 더블 요금값을 치러야 되지 않겠느냐, 라구요.”
그래서 아가씨가 택시에 다시 오는 순간, 기사는 이때다 싶어 문을 잠가 버렸다. 단단히 혼쭐을 내줘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는,
“아가씨가 돈이 없어서 그랬다면 내가 사정을 봐서 차라리 안 받을 수도 있어. 그런데 이건 나를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잖아? 아가씨는 상습범인 것 같으니 아무래도 경찰서로 가야겠어.”라고 단호히 말하면서 부근 파출소 근처로 차를 몰았다. 설마 그럴리야, 괜히 해본 소리겠지 하고 방심하던 그녀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벌써 바로 눈앞에 파출소 현판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저씨, 잘못했어요. 이 돈은 드릴 테니 제발 내려 주세요.”
그제서야 이 당돌한(?) 아가씨는 두 손을 싹싹 빌면서 요금 2천5백 원을 내미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 되겠던지 다시 5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며 더불 요금을 드릴 테니 제발..., 하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나도 마음이 수그러드는 척,
“그렇다면 내 한번 봐주겠는데, 우선 조건이 하나 있어.”라고 말했다. 그녀의 겁먹은 두 눈이 나를 바라봤다. “여기서 내려 줄 테니, 그 다음은 뒤를 돌아보지 말고 뛰어가야 돼. 만약 한 번이라도 뒤를 돌아볼 경우엔 난 아가씨를 저기 파출소에 대리고 들어가는 거야. 아시겠어?”
고개를 끄덕이면서 차에서 내린 그녀는 쏜살 같은 속도로 달아나 금세 가뭇없이 자취를 감춰 버렸다.
“택시를 몰다보니 이런 일이 허다하지요. 다행히 그 아가씨한테서 요금을 받긴 했지만..., 스님 어째 기분은 썩 좋지 않더라구요. 여자가 제아무리 예쁘면 뭘합니까? 박색이라도 마음이 예뻐야 진짜 미인이지요.” 젊은 기사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농사를 잘못 지으면 1년을 망치지만, 아내를 잘못 얻으면 1백 년을 망친다는 말이 있질 않소. 본디 여자이건 남자이건 마음이 우선인 게요, 잘 알고 계시겠지만 말입니다.” “제 주위에도 이런 경우가 많지요. 점심때 식당에서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글쎄, 별의별 일을 다 겪고, 또 손님에게 당하는 경우도 숱하답니다. 제 친구 얘기를 하나 더 들어보시겠습니까?”
“어느 미모의 여자 손님이 제 친구 Y의 택시에 올랐죠. 이 친구가 보기에도 몸매가 늘씬하고 이목구비가 빠지지 않게 생긴 여자였다는군요. 그런데 방향이 시내를 벗어나 교외로 빠지는 장거리를 가자고 하더래요. 어느덧 호젓한 코스로 접어들면서 이 여자의 유혹이 시작됐지요. 자꾸 한숨을 쉬다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기도 하다가 자신의 신세가 어쩜 이렇게 외로울 수 있는가 이야기를 꺼내더래요. 이 친구가 겉으로 보기에도 짙은 화장을 하지 않아선지 화려하다 싶지도 않고 오히려 정숙해 보이는 느낌이더라구 해요. 그녀는 묻지도 않는 자신의 신상을 털어놓기 시작하더랍니다. 전에 남편이 있었는데 교통사고로 죽자 이렇게 짝 잃은 외기러기처럼 살고 있다, 돈이 있으면 무얼하느냐, 쓰고 싶은 의욕도 없다.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달래 줄 이성친구라도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성실하고 순진한 이 친구는 차츰 그 여자에게 위로해 주고 싶다는 동정심이 일기 시작하더라는군요. 결국 그날 어찌어찌 하다가 그 미모의 여인의 유혹에 빠져 깊은 관계를 갖게 되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죠. 그런데 그때, 갑자기 웬 남자가 문을 열고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 멱살을 잡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자신은 그녀의 남편이라고 말하면서 강간죄로 너희 둘을 고소하겠다고 협박하더라는 거예요. 이 친구, 그들이 서로 짜고 계획적으로 꾸민 일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된 거죠. 그들은 상습범이었던 모양입니다. 미모의 그녀는 남자들을 등쳐먹고 살아가는 꽃뱀이었구요. 이 친구 무슨 망신입니까. 게다가 구속이라도 되는 날이면 개인택시 면허가 취소될 판이었지요. 물론 가정도 엉망이 되구요. 울며 겨자먹기로 오히려 그들에게 사정 사정해서 결국 합의금으로 4백만 원이나 주고서야 그 일은 결론을 맺었지요.”
그저 웃고 넘기기엔 어딘가 씁쓸한 뒷맛이 남는 이야기였다. 어미소의 커다란 배가 부러운 개구리가 욕심것 숨을 들이마셔 배를 부풀리다 터지고 말았다는 우화가 있다. 우리 인간도 지혜와 진리를 알지 못하는 한 이 개구리처럼 어리석고 몽매할 뿐인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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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꽃삽 - 이해인
첫째 묶음 : 고독을 위한 의자
밭 가까이 살며
오늘은 아침식사를 끝내고 부랴부랴 밭에 나가 쑥갓꽃, 감자꽃, 그리고 주변에 있는 강아지풀, 토끼풀, 달개비꽃 등을 한묶음 꺾어들고 오랜만에 병실을 방문했다. 평소에 소박한 들꽃을 사랑하는 글라라 수녀님은 커다란 호박잎 한 개를 받침으로 깔고 작은 컵 위에 꽃꽂이를 하는 나에게 "오늘은 내 생일이나 마찬가지야" 하며 기뻐하셨다. "아아, 이 사랑스런 생명들. 말로는 표현을 못하겠어. 어쩌면 좋지?" 모든 아픔도 다 잊은 듯이 그 분의 감탄은 끝날 줄을 몰랐다.
"수녀님 오늘은 이 꽃들과 실컷 즐기세요" 라는 인사를 남기고 나는 또 십여 년을 병석에 계신 엘리사벳 수녀님께 꽃을 들고 갔다. 그랬더니 "난 이 나이가 되도록 감자꽃을 못 보았는데 어쩌면 이리 곱지? 이 도툼한 꽃술 모양 좀 봐" 하며 불편한 몸을 반쯤 일으키셨다. 진정으로 놀라워하시던 그 분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밭에서 얻은 조그만 꽃들 덕분에 나는 커다란 기쁨을 두 분 수녀님께 안겨드린 셈이다. 정원에 핀 장미, 글라디올러스, 수국, 다알리아처럼 눈에 잘 띄는 여름꽃들에게만 눈길을 돌렸던 게 후회스러울 만큼 노란 쑥갓꽃과 흰빛, 보라빛의 감자꽃들은 소박하고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풍겨주었다. 내가 밭 가까이에 살지 않았다면 이러한 꽃들의 아름다움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나의 방이 밭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 것도 새삼 감사하였다.
사실 나는 바다가 잘 보이는 방에 사는 수녀님들을 은근히 부러워해서 가까운 길을 두고도 바다가 보이는 쪽 복도를 일부러 돌아다닌 적도 꽤 많았다. 그쪽 방에 사는 수녀님들은 해 뜨는 바다, 해 지는 바다, 달빛이 넘실대는 바다의 아름다움을 내게 보여주고 싶어했고, 방을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해 오기도 했다. 그러나 벌써 2년째 밭 가까이 살고 나니 어느새 그 밭과 정이 들어서 나는 더 이상 다른 수녀님들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바다가 보고 싶을 때 옥상에 올라가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다도 아름답지만 밭도 아름답다. 바다는 멀리 있지만 밭은 가까이 있다. 바다는 물의 시지만 밭은 흙의 시이다. 비온 뒤 밭에 나가면 발이 폭폭 빠지도록 젖어 있는 흙냄새가 눈물나도록 정다웠다. 흙은 늘 편안하고, 따스했다. 흙을 만지면 더없이 맑고 단순한 어린이의 마음이 되는 것 같았다. 밭에 줄지어 선 채소들은 모두 푸른 새 옷을 지어 입고 엄마를 부르며 노래하는 아이들의 모습 같았다. 나도 늘 밭처럼 살고 싶다는 소망을 새롭히며 어느 날 이렇게 읊어보았다.
상추, 쑥갓, 파, 마늘 무, 배추, 당근, 오이
밭이 키워낸 싱싱한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면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새로움, 놀라움 고마움의 빛
나도 부드럽고 너그럽게 살고 싶네 따뜻하게 열려 있고 싶네 엄마 같은 밭처럼
-나의 시 <밭노래1>
요즘도 새벽에 눈을 뜨면 창문을 활짝 열고 밭을 바라보는 것으로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성당으로 향하기 전, 밭에 가득한 희망의 채소 가족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것은 나의 큰 기쁨이다. 하얀 나비떼가 날고, 때로는 새들과 꿩 일가족이 모이를 찾으려고 나들이 오기도 하는 우리 밭에선 계절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나고 성장하며 필요한 양식을 제공한다. 우리 밭에서 키워낸 오이. 홍당무, 상추, 아욱 등을 먹을 때는 간절한 감사기도가 몇번이고 절로 새어나왔다. 밭 가까이 살면서부터 나는 하늘을 더 자주 보게 되었다. 비가 안 와도 걱정, 너무 와도 걱정인 농부의 안타까운 마음을 좀더 깊이 헤아릴 줄도 알게 되었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밭의 겸허함과 참을성, 인간의 노력에 정직하게 응답해 주는 그의 성실성와 개방성을 좀더 구체적으로 관찰하는 가운데 나의 삶도 구체적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기를 매일 기도한다.
늘 열려 있고, 무한한 가능성을 안고 누워 있는 밭. 그러나 누군가 씨를 뿌리지 않으면 그대로 죽어 있을 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밭. 매일 다시 시작하는 나의 삶도 어쩌면 새로운 밭과 같은 것이 아닐까. 밭에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매일 살 수 있어야겠다. 매일이라는 나의 밭에 나는 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여러 종류의 씨를 뿌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익한 명상의 씨를 더 많이 뿌리는 날고 있으리라. 아름다운 말의 씨를 뿌릴 때가 있는가 하면 가시돋힌 말의 씨를 뿌릴 때도 있으며, 봉사적인 행동으로 사랑의 씨를 뿌리는 날이 있는가 하면 이기적인 행동으로 무관심의 씨를 뿌린 채 하루를 마감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매일 어떤 씨를 뿌리느냐에 따라서 내 삶의 밭 모양도 달라지는 것일게다.
오늘 아침 미사 때에는 복음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다. 어떤 사람이 씨앗을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밟히기만 했고,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져 말라버렸고,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열매 맺지 못했고,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잘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었다는 이야기이다.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루가 8,15)"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따라 더욱 새롭게 마음에 새겨진다.
그러고 보면 내 마음도 하나의 밭이다. 좋은 땅도 잘 가꾸어야만 더 좋은 땅이 되는 것처럼 내 마음 밭도 성실과 인내로 잘 일구어야만 진리를 깨우칠 수 있다. 좋은 땅은 기후의 악조건 속에서도 좋은 소출을 내주는 것처럼 나도 모진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마음의 땅을 갈고 닦아야겠다. 신의 말씀과 사랑, 그리고 이웃을 통해 뿌려지는 그 분의 소중한 뜻이 내 마음의 밭에서 곱게 틔워 열매 맺을 수 있도록.....
<1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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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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