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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10 호
단기 4341. 10. 13 (음력 9. 1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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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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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문장21 신인작품상 공모
종합문예지 계간「文章21」은 1939년 창간된 문장지의 정신을 이어받아 21세기 한국 문학의 한 획을 긋는 종합문예지로 출범을 했습니다. 본지는 실험정신과 역량 있는 신인을 다음과 같이 모집하고 있습니다. 연 4회(2, 5, 7, 10월 말) 원고를 마감하여 심사하오니 많은 응모 바랍니다.
1. 모집 부문
- 시·시조 : 5편 이상 - 단편소설 : 1편 이상(200자 원고지 80장 안팎) - 수필 : 2편 이상(200자 원고지 15장 안팎) - 희곡 : 1편 이상(단막극 80장 안팎) - 평론 : 1편 이상(200자 원고지 80장 안팎) - 아동문학 : 동시 5편 이상 동화 2편 이상(200자 원고지 15~30장)
2. 응모 요령
- 당선 작가는 1회의 당선으로 기성문인으로 대우한다. - 우편 접수 시에는 원고 또는 A4용지 출력 후 사진을 동봉해야 한다. - 이메일 접수 시에는 원고와 사진을 첨부 파일로 송부해야 한다. - 응모작품은 반드시 미발표 작품이여야 하며 반환하지 않는다. - 응모작품의 별도 표지에 성명 및 연락처(주소, 전화번호)를 명기한다.
3. 보낼 곳
( 608 -041 ) 부산광역시 남구 문현1동 119-51 문장21 편집부 E-mail : mun21-1@hanmail.net
문의 : TEL / FAX : 051-646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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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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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만을 즐기고 있을 때는 태만함을 느끼지 못한다.(가스가 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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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글터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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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언어예절
무심코 무책임과 잘못을 부추기는 말이 더러 있다. 처지가 몹시 곤궁할 때, 억지로 애쓸 때나 그런 형편을 나타낼 때 흔히 “어떻게든, 어떻게 해서든, 어떻게 해서라도 …”를 들먹인다.
이를 직접 쓰면 단정·명령하는 말이 되는데, 목적을 이루기만 하면 된다는 목적·결과 지상주의가 실린 말이다. 수단·방법·방식, 곧 과정은 상관하지 않는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반드시” 하라는 말이니, 무법·살인도 용인한다는 얘기다.
달리는 들추는 대상의 궁핍한 형편을 나타낼 때도 흔히 쓴다. 어려움·행동·상황을 짚고 풍자하기에 걸맞기는 하나 이 역시 싸잡아 강조하는 맛을 준다. 정확하고 사려 깊은 표현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말이 많이 쓰인 데는 일본말도 한몫을 했다는 견해도 있다.(도데모·どう-でも, 난토카·도니카·なんとか·どうにか) 그러나 우리말에도 참과 거짓, 경위를 톺지 않고 말을 뒤집거나 뭉개는 말(아무튼·하여튼·여하튼·어떻든·좌우간, 좋든싫든 …)이 적잖은 걸 보면 마냥 그 탓은 아닐 터이다.
어떻게 해서든 권력의 끝자락이라도 잡아라/ 당선인이 직접 조사받는 모양새를 어떻게든 희석시키려는 의도/ 총선에서 어떻게 해서든 살아보려는 몰염치한 몸부림/ 어떻게 해서든 테러를 막겠다며 벌인 전쟁/ 어떻게 해서라도 특목고에 자녀를 입학시키려는 학부모/ 어떻게 해서든 경제만 잘하면 된다고?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자리 매김
외래어 아닌 외국어가 홍수를 이루고 있는 국어의 현실에서 우리 것을 살려 쓰려는 움직임을 만나면 참 반갑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자주 눈에 띄는 '자리 매김'이란 말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매기다'는 차례·값·등수 따위를 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리 매김'은 '자리를 정한다'는 뜻이겠죠? 예를 들면 '사투리를 어떻게 자리 매김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다'라는 문장은 '사투리의 자리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향토색을 나타내는 중요한 자산으로 볼 것인가, 단지 비표준어로 치부할 것인가'하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리 매김'이란 말을 널리 쓰게 되면서 조금 어색한 문장도 종종 보게 됩니다.
''엽기'라는 단어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미 하나의 문화로 자리 매김했다.'
이 문장을 줄여서 다시 써 보면 ' '엽기'라는 단어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매겼다'가 될 텐데 '-를'에 해당하는 말이 빠져 어색합니다. 이 경우는 '자리 매김했다'보다는 '자리 매겨졌다'나 '자리 잡았다'로 쓰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손예진은 중국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 '클래식'을 통해 한류 스타로 자리 매김했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자리잡았다'로 바꾸는 게 낫습니다. 사람이 적절한 자리를 찾지 못하면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듯이, 단어 역시 있을 자리를 잘 찾아야 뜻이 살아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눈꼽, 눈쌀, 등살
나는 이 집에 눈꼽만큼의 미련도 없다./ 모두들 그의 행동에 눈쌀을 찌푸렸다./ 내 친구는 부인의 등살에 시달려 바싹 야위었다.
위 세 예문에서 틀린 낱말이 하나씩 있다. '눈꼽, 눈쌀, 등살'이 바로 그것이다. 이 낱말들은 흔히 이렇게 쓰기 쉽지만 '눈곱, 눈살, 등쌀'로 써야 옳다. '눈곱'은 '눈에서 나오는 진득진득한 액 또는 그것이 말라붙은 것, 아주 적거나 작은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뜻하는데 '눈'과 '곱'이 결합해 만들어진 말이다. '곱'은 옛말에서 '기름(膏·곱 고)'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현재도 '곱'은 '눈곱'의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한글 맞춤법은 둘 이상의 단어가 어울리거나 접두사가 붙어서 이루어진 말은 각각 그 원형을 밝혀 적도록 돼 있으므로 소리가 [눈꼽]으로 나더라도 '눈곱'으로 적어야 한다.
'눈살'도 '눈'과 '살'이 결합해 이뤄진 말이다. 따라서 소리는 [눈쌀]로 나지만 '눈살'로 적는다. 여기서 '살'은 '구김살, 주름살, 이맛살'에서 보듯 '주름이나 구김으로 생기는 금'을 말한다.
그러나 '등쌀'은 두 개의 단어가 결합된 형태가 아니라 '몹시 귀찮게 구는 짓'을 뜻하는 하나의 단어이므로 그대로 '등쌀'로 적어야 한다. '등살'이라고 쓰게 되면 '등'과 '살'이라는 단어가 결합해 '등에 있는 근육'이란 뜻이 된다.
이 경우엔 [등쌀]로 발음되지만 '눈곱, 눈살'같이 '등살'로 표기한다.
즐겁다, 기쁘다
'가을 단풍이 곱다. 산마다 사람들로 가득 차고, 그 모습을 전하느라 헬기까지 분주하다. 그런가 하면 사회 한쪽에선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목표를 두고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우왕좌왕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모든 것이 평온을 되찾아 즐겁고 기쁜 일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위 글에 나오는 '즐거운 것'과 '기쁜것'은 어떻게 다른가? 둘 다 '기분이 좋다'는 것을 표현한 느낌은 드는데 '어떻게 다르지?'하는 대목에 이르면 시원스러운 답변이 나오지 않는다. 이들은 뜻 차이가 매우 미묘해 구별하기 어렵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구별해 쓸 수 있다.
'즐겁다'는 어떤 활동과 관련해 감각적으로 느낌이 좋은 것을 뜻하는 말로 판단보다는 경험의 측면이 강조된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뛰어 노는 가을 운동회, 단풍과 푸른 하늘이 고운 가을 소풍, 낯선 풍경·낯선 사람과 만나는 설렘이 가득한 주말 여행,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점심식사 등은 '기쁘다'보다는 '즐겁다'가 어울린다. 이들은 모두 감각과 관련이 있다. '기쁘다'는 어떤 사실에 대해 심리적·정신적으로 느낌이 좋은 것을 뜻하는 말로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의 심정을 나타낸다. 자식이 대학 입시에 합격했을 때, 이산가족이 수십년 만에 만났을 때, 잃어버린 물건을 찾았을 때 느끼는 감정은 '즐겁다'보다는 '기쁘다'가 어울린다. 이들은 감각보다는 정신적인 면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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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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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종교와 죽음 - 베르나르 포르
생명력을 지닌 불상
유골이나 미이라에 대한 신앙은 불상을 향한 불교예식안에 집중된다. 불상 역시 미이라, 유골, 유골함(산무덤)과 똑같이 생명력을 갖고 있는 '영광스러운 육체'이다. 불상에 생명력을 주는 의식은, 붓다의 눈에 눈동자를 적거나 주문으로 생기를 부어넣는 등 여러 방법으로 행해진다. 불상 안에 유골을 집어넣는 것도 이런 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불상은 스투파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유골함이다. 그런가 하면 기능상으로는 미이라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7세기와 10세기 사이의 중국이나 그 이후 일본의 불교사를 살펴보면, 미이라를 불상으로, 불상을 미이라로 변환시킨 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다. 불교의 한 스승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지 말고 매장했다가 3년 후에 장례식을 치러달라는 지시를 남긴다면, 이는 분명히 스승과 제자들 모두,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그 시신이 저절로 미이라가 되어 있길 기대한다는 뜻이다. 때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고인의 사후 명성과 그 종파의 번영은 확실한 보장을 받게 된다. 미이라를 모신 사원은 순식간에 순례의 중심지가 되며, 미이라의 주술적인 능력에서 오는 은총을 조금이라도 받으려고 도처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큰 덕을 보는 것은 사원이다. 관광이나 포교의 차원에서 수많은 혜택과 기증이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이라가 되길 기대한 스승과 제자들에게 항상 이렇듯 좋은 결과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3년이 지나 무덤을 열었을 때, 부패했거나 부로안전한 미이라가 되어 전시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스승의 불완전한 영적 능력을 보충하기 위해 손질을 가하려는 유혹이 커진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8세기부터 미이라에 래커 칠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연적으로 미이라화함으로써 영적 능력이 일단 증명된 고인의 미이라를 보존하기 위해 래커 칠을 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싶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요구를 단 하나의 미이라로 채워주기에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래커 칠을 함으로써 미이라는 불상처럼 보여 단순히 래커 칠을 한 불상과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사람들은 죽은 자를 화장하고 난 뒤에 생긴 재와 점토를 섞어 불상을 제작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은 매우 경제적인 해결책이었다. 진품인 미이라는 아니었지만, 단순한 전시물 이상인 고인의 분신을 가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단 한 번의 화장에서 나온 재와 뼛조각들을 이용해 여러 개의 불상을 만들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 해결책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래커칠을 한 미이라와 불상을 구분할 수 없게 되자, 미이라가 굳이 필요치 않게 된 것이다. 그러자 더 경제적인 방법이 등장했는데, 고인의 형상대로 아예 목상을 만들어 그안에 고인의 재를 집어넣는 것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불상은 기능적인 관점에서 볼 때, 미이라화한 고인의 육신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 주로 사용된 것이 바로 이 방법이다. 일본에서는, 예를 들어 선종 스승들의 조상들에서 볼 수 있는 소위 '리얼리즘'은 미술사가들에게 종종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 리얼리즘에는 전혀 예술적 의도가 담기지 않았으며, 문제의 불상의 고인의 분신, 즉 미이라처럼 여겨진다는 사실과만 관계를 갖는다.
그리하여 선종의 스승인 이큐 선사의 불상마다 '생명력을 주기 위해' 머리와 얼굴에 머리카락과 수염을 심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른 상들과 마찬가지로 유리로 만든 눈동자를 박아 넣었다. 제단 위를 비추는 어슴푸레한 빛 속에 반짝이는 눈동자는 불상이 흡사 '살아 있는듯한' 느낌을 갖게 하므로, 그 앞에 서면 마치 미이라 앞에 선 듯 오싹해진다. 실제로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서구적 의미에서의 초상화가 아니고, 분신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조상들은 살아 있으며, 기이한 힘을 소유했다고 간주된다. 그런데 이 힘은 정확히 말해, 의식을 통해 행하진 '점안식'과 불상 내부에 들어 있어 생명을 부여하는, 고인의 잔재물에서 비롯된다.
결과적으로, 신들이나 붓다가 불상 안에 존재하게 되는 것은 불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의식을 통해 가능해지는 셈이다. 이렇게 불어넣어진 생명력은 단순한 불상에 '힘'을 부여하여 '영적인 불상'으로 변화시킨다. 그러나 '점안'을 비롯한 다양한 의식에 의해 실현되는 이 '생명불어넣기'는 약간 모순된 양상을 보여준다. 특히 밀교에서는 불상의 봉헌이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뜻하는데, 이는 봉헌식을 통해서 불상이 삼매에 빠져들어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때 '생명력이 정지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 불상의 삼매는 곧 미이라의 삼매를 생각하게 한다. '생명력이 정지되어 있는 상태'는 그것이 죽음으로 여겨진든(미이라의 경우) 탄생으로 여겨지든(불상의 경우) 간에, 집단을 쇄신시킬 수 있는 힘을 축적한다. 그리하여 미이라를 본떠 만든 불상 역시 삶과 죽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중간매체가 되는 것이다.
선종에서는 고인이된 스승의 초상화가 '불법의 본질적인 형상'으로 여겨진다. 중국의 전통적 장례식에서 사용되는 초상화와 여러 변에서 유사한 불교 성자의 초상화는 육신을 대신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분신의모습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은 분명코, 고인이 아직 관 속에 누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대신하여 초사오하가 장례식의 대상(그보다 주체)이 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것은 바로 이 초상화를 위해서이다. 이는 왕의 장례식 때 '관 속에 누워 있는 시신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진행되는 장례식이, 실물 같은 고인의 초상화에 집중되고 있는 것'과 마찬갖이다. 로마의 황제들이나 기독교 국가의 왕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과 똑같이, 선종(Chan/Zen)지도자들의 육체도 썩어 없어지는 물리적 육체와 썩지 않는 사회적 육체로 분리되어 인식되었던 것 같다.
이처럼 초상화는, 죽은 스승이 화장이나 미이라화를 통해 정화된 육체(사리, 또는 실물 같은 미이라)로 나타나게 될 때까지 그의사회적 육체를 지탱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렇게 하여 정화된 육체는 '집단에 소속된' 조상 가운데 한 명으로 환생의 근거가 된다. 불교의 장례식은 인간의 육체가 죽을 수밖에 없으면서도 불멸성을 지니고,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확증해 준다. 정확히 말해서 불교의 장례식은, 유한하고 개인적인 육체를 불멸하는 사회적인 육체로 변환하거나 혹은 전자에 있던 생명력을 후자로 보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유골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의식을 위한 불멸의 육체를 강조한다는 데 있다. 불상은 살아 있는 자들과 고인(붓다) 사이, 혹은 산 자와 그의 불멸하는 본성 사이에 있는 중간 매체이기도 한다.캄보디아에 있는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볼 수 있는 붓다왕의 형상도 이렇게 설명된다. 왕은 신격화된 자신의 형상을 중간매체로 하여 신과 관계를 맺는다. 왕의 상을 붓다의 모습으로 표현함으로써 그를 붓다로 만드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7세기에 쇼토쿠 태자는 자신을 붓다의 모습으로 표현케 한다. 여기서 굳이 교만의 흔적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불교 의식과 불상의 능력에 대한 믿음의 표징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다. 이 능력에 의해 산 자는 다소 마술적으로 자존자 속에서 하나가 되어 투영된다. 마찬가지로 스리랑카의 왕들도 붓다의 유골을 붓다 자신으로 여기는 동시에 그들 자신 유골의 마술적인 분신으로 여겼다. 심지어 왕좌에 자기들 대신 유골을 모셔놓기도 할 정도이다. 불상이나 유골과 마찬가지로 스투파 역시 붓다와 왕 자신을 대신한다. 그러나 평민들은 자신의 형상을 붓다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사후의 유골을 중간 매체로 삼아 투영하는 방식을 택해야 했다. 그래서 붓다의 상 안에다 자신에게 속해있던 물건, 말하자면 자신의 분신이 될 만한 유품을 안치했다. 죽은 자의 분신인 유품은 마술적으로 붓다와 동일시됨으로서, 이로움을 가져다 주는 힘을 얻어낸다. 이 힘은 역시 마술적으로 사자의 생전에, 혹은 죽은 뒤에 그 유품의 소유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간혹 불상 속에서 골동품이 발견되는 것은 십중팔구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불상, 무덤, 그리고 유골 등은 신성한 에너지의 '변환기들'인 셈이다.
많은 붓다와 신들, 사자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우리를 주시한다. 하지만 이들이 다시 생명력을 갖고 존재 하기 위해서는 의식에 따른 중간매체가 필요하다. 그 중간 매체는 보통 유골, 스투파, 불상이며, 그뿐 아니라 각인된 물체, 바위에 새겨진 음각, 혹은 (성전 안에 기록한) 스승의 말씀도 이에 속한다. 이들 대용 신체들은 하나같이 자체의 힘을 지닌다. 아니, 그보다는 스승이 깨달았던 지고의 진리들이 이제 이러한 물체들 속에 전이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붓다 자신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초상화, 산 불상이며, 최상의 실체인 불법, 즉 다르마의 재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물체들을 기능상 붓다와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은, 불교 재례에서 본질적인 요소를 이루는 탑돌이라는 의식에서 증명된다. 탑돌이란,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살아 있는 붓다의 주위를 돌 듯이 스투파나 불상, 유골의 주위를 시계 바늘 방향으로 도는 의식을 말한다. 이것은 스투파, 불상, 유골을 이들이 나타내는 (더 정확히 말해서 이들이 '존재케 하는')우월한 실체와 동일시하려는 의식이다. '절대적인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철학을 깨달은 붓다들은 제단이라 할 수 있는 시간에 매인 육체와 동시에, 그들의 무덤이었던 단 하나의 장례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분신의 변형
일부 영지주의개념에 따라, 그리스어로 소마soma라 부르는 육체를 '영혼을 가두고 있는 무덤sema'으로 생각한다면, 대부분의 아시아 종교에서는 무덤을 또 하나의 육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불교에서는 스투파가 지닌 상징을 생각해 볼 때 이같은 등식이 더욱 분명해진다. 이미 인용한 바 있지만, 폴 뮈스의 말처럼, 무덤은 죽은 자가 거처하는 장소라기보다는 죽은 자의 몸을 대신하는 일종의 인공적인 신체, 즉 장례를 통해 이루어진 '우주적 인간;이라 볼 수 있다. 그 안에는 고인의 삶을 지속시키는 마술적인 실체가 존재한다... 생전에 그가 육신을 입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자는 무덤이라는 새로운 육신을 입는다. 건축물로 나타난 육신인 스투파는 또한 실제 인간과 같은 가치를 갖는 대체 육신이기도 하다. 이처럼 육신을 스투파와 동일시함으로써 모든 상징체계를 분류하여 정리해 볼 수 있다. 우선 밀교에서 말하는 5요소 목,금,화,수,토와 인체의 다섯 장기 사이에 등식이 성림하고 있다는 점과, 또한 다섯 명의 붓다와 다섯 방향(동,서,남,북,중앙)사이에도 역시 등식이 성립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등식에 따라 스투파를 다섯 바퀴, 혹은 다섯 등급으로 분류하면, 붓다의 신체를 중국 우주기원설의 상징 첵계 안에 대입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방향을 지닌' 이 신체를 소우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무덤(혹은 스투파)은 단지 죽은 자의 거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바로 죽은 자 자신이다. 게다가 모든 무덤은 최초의 스투파였던 붓다ㅡ이 스투파의 복사품들이다. 그리고 붓다의 스투파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단지 유골함, 기념물, 혹은 붓다의 상징일 뿐 아니라, 산 붓다 자신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마치 대수의 등식처럼 죽은 불자가 바로 붓다르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동일시 사상으로 인해 더욱 중요성을 갖게 된 장례의식은 이미 죽은 자를 깨달음을 얻은 자, 다시 말하면 붓다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개념들에 담겨 있는 본질은 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것은 아니다. 베다교의 제관은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이 벽돌을 쌓아 건축한 불의 제단 위에다 꼭두각시 육신을 올려좋고 제사를 지내면서 잠정적으로 이 육신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마찬가지로 그가 죽은 후에는 그의 무덤이 장례의 마술적인 육체가 되어, 그것에서 그의 사상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이 중국의 민간신앙에서는 위패가 죽은 자의 분신이며, '장례식의 주인공'이다. 위패는 불상과 똑같이, '점 찍는 의식'에 의해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영혼의 눈과 귀가 있다고 여겨지는 지점에 피로 점을 찍어줌으로써 눈과 귀가 있다고 여겨지는 지점에 피로 점을 찍어줌으로써 눈과 귀를 뜨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죽은 자는 생전에 자신의 육체 안에 현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위패 안에 존재한다. 중국과 인도의 장례관습은 서로 다르지만, 이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전통적 제사법과 불교의식이 융합되어 죽은 자의 분신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원후 첫 세기부터 중국에서는 '혼령이 앉는 의자'에다 죽은 자의 모습과 비슷하게 만든 꼭두각시 인형을 앉힌 후, 그 앞에 제사음식을 바쳤다. 실물 크기로 만들어진 인형은 팔다리를 움직이게 만들었기 때문에 의식 절차에 따라서 자세를 변경할 수 있었고, 계절에 따라 의복을 바꿔 입을 수도 있었다. 불교 사원에서도 역시, 관 속에 누운 죽은 자를 대신해 음식과 의복을 공양받는 것은 장례식에 쓰이는 초상화이다.
불교의 전통신앙에 의하면, 인간의 육신은 결코 '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유골 숭배는 '나의 부재'라는 논리나, '정통적' 불교 교리의 근본 원리라고 할 수 있는 비영속성의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스실 이 점에서는 규범이 실천되는 의식 자체를 기술하고 있다고 볼 수 없으며, 또한 불교의 이론전체라고 볼 수도 없다. 대부분의 저자들이 불교를 자신이 생각하는 교리 안에 제한하려고 하거나(교리 밖의 모두를 빗나간 저속한 신앙으로 생각하면서), 유골 숭배를 단순한 '기념물 숭배'로 해석하고자 고집하는 것은 규범과 실천의 차이점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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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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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 이정하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고 싶었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잎보다 먼저 꽃이 만발하는 목련처럼 사랑보다 먼저 아픔을 알게 했던 현실이 갈라놓은 선 이쪽 저쪽에서 들킬세라 서둘러 자리를 비켜야 했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까이서 보고 싶었고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지만 애당초 가까이 가지도 못했기에 잡을 수도 없었던, 외려 한 걸음 더 떨어져서 지켜보아야 했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음악을 듣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맨 먼저 생각나는 사람, 눈을 감을 수록 더욱 선명한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기어이 접어두고 가슴 저리게 환히 웃던, 잊을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빛은 그게 아니었던, 너무도 긴 그림자에 쓸쓸히 무너지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덮어두고 지워야 할 일이 많겠지만 내가 지칠 때까지 끊임없이 추억하다 숨을 거두기 전까지는 마지막이란 말을 절대로 입에 담고 싶지 않았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르다부르다 끝내 눈물 떨구고야 말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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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한국사 |
우리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 이이화
제2부 우리 민족의 뿌리
5. 정착농업과 벼농사
밭 갈고 씨 뿌려
세계적으로 정착농업의 시작을 1만 년 전쯤으로 보고 있다. 농업지대는 북방계와 남방계로 나누어지는데 남방계가 먼저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북방계에 속한다. 따라서 남방계보다 늦은 시기에 농사가 본격으로 시작되었고 우리 전통 농업의 중심을 이루는 벼농사는 지금부터 4천 년 전쯤에 시작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초기 곡물의 종류로 야생의 밀, 보리, 조를 꼽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초기 농업을 시작한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조와 피 따위의 알갱이가 작은 곡물만 발견되고 있다. 후기부터 재배되었다고 추정하는 쌀은 계속 탄화미가 발견되어 전파 경로를 알려주고 있다. 처음 어느 누군가가 밀이나 조가 봄에 싹이 나서 가을에 익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떨어진 알갱이에서 다시 싹이 돋는 자연법칙을 관찰했을 것이다. 이것이 먹거리가 된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 알갱이를 받아 심고 가꾸고 수확을 함으로써 농사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끊임없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 헤매는 이주민을 통해 엄청난 전파력을 가지고 펴져나갔다. 이 원시적 정착농업의 시기를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괭이나 뒤지개 등의 생산도구를 주로 사용한 시기이다. 농기구는 돌로 만든 것도 있으나 대부분 뿔로 된 것을 사용했다. 뒤지개는 사슴뿔의 뾰죽한 끝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괭이는 낫처럼 생긴 뿔의 그루 쪽을 자루로 삼고 끝 쪽을 날카롭게 세웠다. 쾡이는 짐승을 잡기 위해 덫을 놓을 때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땅을 파고 뒤지는 데 썼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지닌다.
사람들은 우선 밭을 만들어야 했다. 우거진 나무나 풀을 일일이 뽑거나 걷어내는 일은 여간 힘들지 않다. 초기에는 손쉬운 방법으로 불을 지른 뒤에 도끼로 나무를 잘라내고 괭이로 땅을 파고 나서 씨앗을 뿌렸다. 그후 점점 농사법을 터득해서 김을 매주거나 골을 파고 흙을 북돋워주었다. 추수를 할 때 곡초를 자란 채로 세워두고 낟알만 터는 경우도 있고, 곡초를 아예 뿌리째 손으로 뽑는 경우도 있고, 곡초를 자란 채로 세워두고 이삭만 따오는 경우도 있고, 곡초의 그루를 베어오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에 나무 막대기도 필요하고 낫도 필요했다. 정착농업의 후기는 낫이나 보습을 주로 사용한 시기이다. 낫 같은 농기구는 예리하게 다듬어 개선하고 쾡이는 밑을 호미처럼 넓게 만들고 보습은 돌로 만들어 자루를 고착시켜놓았다. 돌이나 뿔로 된 낫은 오늘날의 것처럼 기역자형이 아니고 평행선에 날을 세웠다. 멧돼지 송곳니로 만든 낫이 발굴되기도 하였는데 이빨이 휘어든 안쪽에 날을 세우고 자루에는 끈을 매기 위한 구멍을 뚫어놓았다. 또 맷돼지의 이빨을 세로로 쪼개고 나서 그 두드러진 측면을 갈아 예리한 날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낫이라면 잡초나 떨기나무를 후려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습은 돌보다는 나무로 많이 만들어 쓴 것으로 보인다. 보습은 땅을 갈고 이랑을 파는 따위 용도가 많았는데 청동기시대의 것은 거의 발굴되지 않은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보습은 현대에도 사용하는 농기구이다. 이를 나무로 만들어 썼다면 훨씬 만들기도 쉬웠고 가벼워서 사용하기에도 편리했을 것이다. 이때에는 또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든 칼이 등장했다. 돌이나 조개껍질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기도 하고 네모나 물고기 모양으로도 만들었다. 손잡이 쪽에는 구멍을 뚫어 끈을 맸다. 칼은 주로 곡식 이삭을 딸 때 사용하였는데 가운뎃손가락을 끈에 끼우고 엄지손가락으로 곡식 열매를 땄다. 또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갈돌과 갈판이 많이 발굴되고 있다. 이것은 맷돌과 같은 도구로 곡식의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를 내는 데 사용하였다. 갈돌은 알갱이를 마지막으로 처리하는 도구였다. 후기에 와서 농기구는 전기보다 다욱 다양해졌으며, 훨씬 예리하고 실용적으로 만들어졌다.
벼는 어디에서 처음 심었을까
이제 우리의 먹거리 가운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쌀의 유입과 재배에 대해 알아보자. 지금까지는 한반도에서 쌀을 심기 시작한 연대를 청동기시대 초기로 인정했다. 곧 3천여 년 전부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근래 이 설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새로운 유적이 여러 곳에서 발굴되었다. 일산 가와지, 김포 가현리, 강화우도, 나주 가흥리 등지에서 볍씨, 볍씨 자국, 벼과의 꽃가루가 발견되었다. 또 1995년에는 광주직할시 신창동유적지에서 최대 80센티미터에 달하는 두꺼운 벼껍질층의 존재를 확인하여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로 떠올랐다. 종래 평양, 부여, 김해의 벼유물은 모두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는데 위에서 말한 벼유물은 모두 신석기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김포 가현리에서 발굴된 고대의 쌀을 방사선 탄소측정법으로 알아본 결과 종래보다 1천년 앞서는 4천 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또 최고 7천 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이와 관련해 손보기와 임효재는 벼의 도래와 재배가 신석기시대 후기에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워 주목을 받았다. 앞으로 계속 유물이 발견되어 확실한 근거가 제시되어야겠으나 연대가 더 내려가는 수정은 없을 것이다.
벼는 어디에서 처음 심었으며 우리 땅으로 어떤 경로를 거쳐 건너오게 되었을까? 1만 년 전쯤에 지구 위에서 정착농업이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아프리카에서 처음 농업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있지만 메소포타미아 평원에서 먼저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동남아시아와 중국에서도 벼재배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벼농사의 기원을 두고 중국 기원설을 비롯하여 인도 기원설, 태국을 중심으로 한 동남아 기원설, 운남(지금 중국 땅)과 아삼지방 기원설 등이 제기되었다. 그중에서 우리나 관련이 깊은 중국 기원 설을 알아보자.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원체 땅덩어리가 커서 어느 특정 지방에서 시작되었다는 기원설이 여러 갈래로 나오고 있다. 곧 운남지역 기원설, 화남지역 기원설, 양자강 하류 기원설이 논의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양자강 하류인 절강성의 나가각과 하모도에서 발굴된 유적이 크게 주목을 끌었다. 하모도유적에서 농사와 직접 관련되는 나무나 뼈로 만든 농기구, 갈아 만든 서기, 농사 시기 직후에 이루어진 무늬 있는 토기가 출토 되었기 때문이다. 나가각유적에서도 비슷한 여러 가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어 우리나라와 가까운 산동성 등지에서 쌀재배의 북상 과정을 알려주는 탄화미가 발견되었다.
인도에서 기원하여 동남아시아로 먼저 전파되었다가 남쪽의 여러 섬과 섬으로 전파되어 해류를 타고 들어왔다는 주장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이렇게 섬으로 전파되다가 한반도 남쪽에 상륙하여 본격으로 재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해 중국 도래설에 치여 별로 맥을 못쓰고 있다. 중국에서 도래했다는 주장도 다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 양자강에서 북쪽으로 계속 올라와 산동반도에 이른 다음 황해를 건너 우리나라의 중서부지방에 닿았다는 도해설이 있다. 사실 황해를 사이에 두고 산동반도는 우리나라 황해도의 벽란도나 경기도의 강화도, 충청도의 안흥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해상으로 중국과 교류할 때 이런 곳에 항구가 발달했다. 이곳에 사는 뱃사람들은 맑은 날에는 산동의 땅이 보인다고 하며 조용할 때 그곳의 닭소리가 들린다고도 한다. 또 중국의 하모도와 김포의 가현리가 서로 마주보는 지형인 것도 도해설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하모도는 그 기원설로 따져보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인 7천 년 전에 벼가 재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이라 할 수 있는 시베리아와 일본과의 교류가 고대부터 활발하였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도 바다를 통한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 산동반도 북쪽의 요동열도를 거쳐 조선(고조선)의 터전이었던 요동반도에 닿았고, 요동 일대에서 한동안 재배되다가 이어 남만주 일대로 퍼지면서 한반도로 건너왔다는 주장이다. 이와 조금 달리 산동반도에서 계속 바닷가를 따라 발해만주위와 요동지방을 거쳐 곧바로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주장도 있다. 이 경로가 육로설이다. 요동반도는 조선의 터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대에는 우리나라와 끊임없이 문화를 교류했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그러나 평양 등지에서 조, 피와 같은 한반도 농사의 기원을 알려주는 유물은 발견했으나 아직도 벼의 유적을 발굴하지못한 약점을 안고 있다. 벼 관계의 유물은 대부분 남쪽에서 발굴되고 있다. 남쪽에서 벼농사가 성행한 탓인지도 모른다.
육로설이든 도해설이든 이런 과정을 거쳐 벼는 우리나라에서 일찍부터 재배되었다. 벼재배에 알맞은 기후 조건이나 생산성이 높은 평야지대가 남쪽에 있어서 벼는 주로 남쪽지방에서 생산되었다.
잡곡에 채소까지
이렇게 농사의 초기 단계에는 잡곡이 먼저, 이어 벼가 재배 되었다. 우리는 쌀을 제외한 잡곡을 말할 때 조, 기장, 수수, 콩, 밀을 꼽는다. 조는 성숙기가 짧고 우위에 잘 견디는 곡물이라 북쪽을 중심으로 많이 재배되었다. 기장과 수수는 조보다 수확량이 떨어지기는 하나 조처럼 성숙기가 짧고 추위에도 잘 견딘다. 그래서 조, 기장, 수수는 전국적으로 재배되지만 특히 추운 북쪽지방이나 남쪽의 산림과 계곡 사이에서 많이 재배되었다. 이와 같이 환경 조건에 따라 북쪽에서는 잡곡, 남쪽에서는 벼가 중점적으로 재배되었다. 팥과 콩은 추위에도 잘 견디고 생명력이 왕성하다. 웬만한 가뭄이나 장마에도 잘 버텨낸다. 콩은 두만강 주변의 문화층에서 발굴되었는데 이를 근거로 두만강을 중심으로 재배되다가 퍼져나갔다는 주장을 낳았다. 팥도 북부지방의 집자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무, 배추 같은 채소도 이 무렵에 가꾸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채소 유물은 찾아내지 못했다. 밀은 고대 동방과 지중해 연안에서 기원하여 유럽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작물이며 중국에서도 중심 곡물로 꼽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들 나라보다 뒤에, 또는 조 따위의 잡곡보다 늦게 재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보리는 벼와 거의 같은 시기에 재배된 것으로 보인다. 보리와 밀은 물론 밭작물이지만 어느 때부터인지 벼의 보조작물로 여겼다. 유럽과 중국은 밀, 우리나라와 일본은 벼를 주로 생산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조서에서 보리, 밀, 수수, 조, 기장을 재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는 철기시대에 해당한다. 이 기록은 이 작물들이 그보다 앞선 시기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먹거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감자와 고구마는 근세조선 후기에 와서 재배되기 시작했다. 보리는 벼와 경쟁적으로 많이 심었다. 보리는 눈속에서 자랐고 벼는 이슬을 맞으며 컸다. 보리는 추위를 잘 견뎌내 산가지방으로 번졌고 벼는 더운 기운을 좋아해서 따뜻한 지대로 퍼져나갔다. 보리는 겨울과 봄에 북쪽과 산간, 벼는 여름과 가을에 중서부지방과 남쪽지방의 중심 작물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보리를 베고 나서 볍씨를 뿌렸고, 여름에는 보리를 먹으며 벼농사를 했으며 겨울에는 쌀을 먹으며 보리농사를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 농업의 기본을 이루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볍씨를 무논에 뿌리고 모내기를 했을까? 무논을 만든 것은 청동기시대 이후라고 볼 수 있으며 더욱이 모내기는 훨씬 후기에 와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볍시를 밀이나 보리처럼 밭에 그냥 뿌리고 적당히 솎거나 김을 매주었다. 불을 질러 일군 밭을 화전이라 하고 무논을 수전이라고 한다. 그런데 삼국시대에 수전이라는 두 글자를 합해 답이라는 글자를 만들어냈다. 이 글자는 무논이 이루어진 뒤에 쓰인 것이다. 지금부터 70년에서 80년 전에도 산간지방에서는 볍시를 밭에 뿌리는 경우가 많았다. 밭에 심는 볍씨도 별도로 있었다. 적어도 중국의 벼농사법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고 농사 기술이 더 무르익은 뒤에야 무논을 만들고 이어 모내기를 했을 것이다. 벼의 알갱이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조나 기장의 알갱이는 오늘날의 것도 아주 작다. 밀이나 수수는 이것들보다 약간 크고 보리와 쌀은 비슷하다. 그중에서도 콩이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또 한 줄기나 한 대에서 열리는 알갱이의 수도 곡식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의 것과 어떤 차이가 났을 것이다. 지금 생산되는 크기의 곡식은 고동안 꾸준히 개량되거나 유전공학에 의해서 변모된 것이다. 또 한 대나 한 줄기에 열리는 알갱이의 수도 늘려온 것이다. 초기 단계에 생산한 곡식은 이보다 알개이도 훨씬 작았고 단위 생산량도 적었다.
그러나 수렵 채취에 비교해 재배농업은 삶의 질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농업은 정착을 가속화시켰다. 신창동 유물터에서 발굴된 발화구는 신석기대 사람들이 움집에서 정착생활을 하며 곡식을 익혀 먹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물이다. 쌀과 보리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평야가 적은 우리 환경에 잘 맞는 곡식이다.쌀과 보리는 열량이 풍부하고 단위면적 수확량도 높다. 그리고 해갈이를 하지 않는 곡식이기도 하다. 우리의 선인들은 쌀과 보리를 주종으로 삼아 꾸준히 종자 개량을 거듭했고 특히 쌀문화를 기층문화로 일구어냈다. 유럽사람들은 밀을 주곡으로 했고 감자를 여러모로 요리하는 음식문화를 만들어냈다. 쌀의 원산지로 꼽히는 인도, 태국, 중국, 일본도 쌀을 많이 먹고 있으나 우리나라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쌀은 뒷날 개인이나 국가에서 재정의 기초가 되었고 부의 원천이 되었다. 가축 사육을 살펴보자. 가축도 농업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사람들은 짐승을 잡아 고기를 먹고 나서 그 털과 가죽을 여러 용도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짐승을 산 채로 비축해 두었다가 잡으면 신선한 고기를 얻게 된다는 것도 알아냈다. 이런 이야기는 평범한 것 같지만 당시 사람들로서는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용도로 짐승을 길렀을 것이다. 그러다가 차츰 고기와 털과 가죽만이 아니라 젖을 얻을 수도 있고 운반이나 농사에 부리면 효과적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넓은 초원지대가 없어서 본격적인 목축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가축은 농업에 부수되는 자리를 지켜오는 정도에 머물렀다.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개와 돼지의 뼈가 많이 발굴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개뼈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몽골 같은 목축지대에서 양이나 염소의 뼈가 많이 발굴되는 사정과는 사뭇 다른 현상이다. 그리고 4천 년 전쯤의 것으로 보이는 소뼈가 북쪽지방의 집자리와 문화층에서 발견되기도 했고 그뒤의 것으로 보이는 말뼈도 발굴되었다. 이대로라면 개, 돼지, 소,말 순서로 길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세계적으로는 초기 농경에 이어 개, 염소, 양, 소, 돼지 순으로 가축을 길렀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는 이와 약간 구분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런데 역사시대에 가장 많이 기르던 가축인 닭의 뼈가 별로 발굴되지 않고 있다. 우리 전통시대의 가축을 말, 소, 개, 닭, 돼지로 꼽고 있음을 볼 때 닭도 많이 사육했을 것이다. 이렇게 농경과 함께 가축을 기르면서 고기를 제공하는 것말고 개에게는 집 지키는 역할을 맡겼고 말과 소에게는 운반 일꾼의 임무를 지웠다. 개와 마소의 훈련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지금도 개는 물론 소도 논밭갈이 훈련을 거쳐야 제대로 일소가 된다.
가축 사육은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널리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잡곡 농사도 더욱 확대되었다. 초기 청동기시대였던 약 3천 년 전쯤의 마을과 무덤 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인구의 증가를 뜻한다. 정착농업이 새로운 삶의 수단이 됨으로써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 것이다. 이로 인해 사적 소유가 확대되고 고대국가가 성립되었으며, 역사는 정복전쟁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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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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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1. 달리는 부처 기사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
`하루만 행복해지려거든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일주일 행복해지려거든 결혼을 하라. 일 개월 정도라면 말을 사고, 일 년이라면 새집을 지어라. 그러나 일생 동안 행복해지고 싶거든 정직한 사람이 되라.`라는 어느 나라의 격언이 있다. 격언이란 수백 년 또는 수천 년을 이어 내려오면서 얻은 경험의 산물이고 보면, 이말은 정직한 삶이 곧 평생의 행복이라는 선인들의 가르침이다. `정직`이란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으로서 위대한 점은 바로 이러한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택시를 운전하는 기사분들을 자주 만나다보니 자연 그분들에게서 듣게 되는 이야기 중에 이 양심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접하게 된다. 다음은 부산에서 회사택시 영업을 하는 어느 기사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그날은 웬지 좀처럼 손님이 없어 한가한 날이었다. 시내를 몇 바퀴 돌았지만 손님은 고작 서너 사람뿐. 아직 교대 시간은 꽤 남아 있었지만 입금액을 채우려면 한참 모자라는 액수라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8월의 대낮은 뜨거운 폭염이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어 에어컨을 틀고 앉아 있어도 더운 바람만 푹푹 나오는 차 안은 마치 찜통에 들어앉은 기분이었다. `무슨 놈의 더위가 이리 징그럽노? 이건 차라리 한증막이다, 한증막.` 혼잣말로 투덜거리고 있던 중 문뜩 저 앞에서 누군가 손을 들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대충 스물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원피스 차림의 아가씨가 자신의 차를 향해 서 있는 것이었다.
“기사 아저씨, 저 짐이 좀 있는데예, 쪼매만 기다리이소.”하더니, 정성스럽게 포장을 해 꽤 값이 나가보이는 짐을 실어 달라는 것이었다. 사과 궤짝만한 무거운 짐을 트렁크에 싣고는,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저 조금 먼 거리인데... 대구 XX동까지 가실 수 있으십니꺼? 요금은 후하게 드릴 테니 걱정마시고예.”하고 시원스레 말하는 것이었다. 그쪽 방향이면 돌아올 때 빈 차로 와야 한다는 부담도 적고 기왕에 요금도 더 얹어 준다니 장거리라도 갈 만하다 싶었다. 에라 모르겠다. 시내에서 한참을 돌아도 허텅만 치는데 막힘 없이 뚫린 도로를 시원하게 달려보는 맛도 괜찮겠다 싶어 기사는 모처럼 기분까지 좋아지고 있었다.
“저 짐은 뭐가 들었길래 그리 무겁습니까? 귀중한 거 아닙니까, 아가씨?” “맞아예. 지가 결혼 날짜가 얼마 안 남았는데예, 신랑 될 남자가 지한테 선물로 준 아주 비싼 물건 아입니꺼?”
그녀는 활짝 웃으며 자랑스럽게 떠벌였다. 자신과 결혼하기로 한 남자가 상당한 부잣집 아들인데다 학벌도 좋고 게다가 얼굴도 잘 생겼다는 등... 기사 아저씨도 젊었을 적엔 제법 잘 생겼다는 소리를 들었겠다, 하며 공연히 추켜세우는 그녀의 수다가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 아가씨도 꽤 있는 집 규수 같아 보이는 게, 말이 좀 많기는 해도 붙임성이 있어서 시집을 가면 귀여움을 바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택시는 대구 시내로 접어들고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자 다 왔습니다.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아가씨.” 미터기의 요금은 5만 원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조금 망설이는 태도로, “기사 아저씨, 지가예 깜빡 잊고 지갑을 두고왔나 보네예. 쪼매만 여기 게이시소. 빨리 집에 가서 가져다 드릴 테니께.”라며 자신의 집이 저쪽이라고 가리키는 것이었다.
짐도 뒤 트렁크에 있겠다. 잠시만 기다리면 요금을 가져오겠지, 하고 당연하게 생각한 그는 `그러마.`하고 선선히 대답했다. 부리나케 앞을 가로질러 그녀가 뛰어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잠깐만 기다리라던 그녀는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30분이 되어서야 아차! 그는 자신이 속은 것을 깨달았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하늘이 노랗게 보인 것은 그깟 돈 몇 만원 보다는 어리디 어린 여자한테 자신이 당했다는 허탈감 때문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트렁크의 문을 열어본 그는 또 한번 기가 차서 입을 벌린 채 꼼짝을 하지 못했다. 화려하게 포장된, 그 아가씨가 버리고 간 짐속에는 커다란 돌 두 개가 그를 향해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개인택시 기사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그날도 여느때처럼 손님을 기다리는데 저만치서 어린 여자 아이가 차를 세우는 것이 보였다.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아저씨, XX아파트까지 데려다 주세요. 무심히 백미러로 바라보니, 열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중학생 같았다. 어느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자 그 아이는 앞쪽을 가리키면서, “아저씨, 저기가 우리 집이에요. 그런데 잠깐만 기다려 주실래요? 엄마한테서 돈을 타가지고 나올게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 “차비가 없는 모양이구나. 그럼 내 여기 있을 테니 빨리 갔다오렴.”
그러자 아이는 재빠르게 아파트 현관문을 향해 뛰어간 뒤 이내 사라졌다. 그는 잠시 쉴 겸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었다. 그런데 집으로 뛰어간 아이는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아이만 믿고 아파트 호수를 물어보지 않은 채 내리게 한 자신의 어리석음이 후회가 됐다. 요금은 3천원 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이에게 속았다는 괘씸함이 가슴을 끓어오르게 했다. `할 수 없지. 잊어버리는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한 그는 차를 돌려 그 곳을 나왔다. 그러나 나오면서 생각해보니 저 아기가 자라 어떤 사람이 될지 무척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옛말에도 `세 살 적 버릇이 여든 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기 자신도 자식을 키우고 있는 입장이었다. 만나서 따끔하게 혼을 내고선 다음부터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잘 타일러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다음날 아침, 등교 시간에 맞춰 그 아파트 앞에 차를 대고 아이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사과 상자에 넣은 돌멩이를 귀한 물건이라고 속인 뒤 택시 요금을 내지 않고 달아난 젊은 여자는 돈 5만 원에, 집 앞에서 달아난 어린 여중생은 3천 원의 돈 때문에 자신의 양심을 버리고 남의 마음까지 아프게 한 셈이다. 돈이 없으면 버스를 타면 될 일이다. 조금 편하자고 거짓을 행하며 무임승차를 하는 것이 진정 편한 것일까? 뿌린 대로 거두는 법. 순간의 안위를 추구하는 것이 언젠가는 마음의 짐으로 남아 평생을 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남을 속인다는 것은 죄이며 더구나 자신의 양심까지 속인다는 것은 더 무서운 죄이다. 무슨 일이든 처음이 어렵듯이 한번 나븐 일을 하게 되면 두번째, 세번째 죄를 짓는 것은 더 쉬워지는 법이다. 위에서 당한 택시 기사들도 이제는 점차 남을 믿는다는 것이 어려워지고 우선 의심부터 하게 될 것이다. 비단 택시 요금뿐만이 아니다. 때로는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영업용 택시 안에 함부로 휴지를 버리는 사람, 심지어 자신의 집에서 가져온 쓰레기봉투를 슬쩍 버리고 내리는 어느 아주머니... 이 모두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이자 자신의 양심을 버리는 행동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정치,경제 현실의 부도덕 비양심을 개탄하는 소리가 높다. 받아서는 안 될 검은돈을 받은 비양심적인 정치인들이 속속 구속되고 심지어 대통령의 아들마저 검찰에 구속되는 현실이다. 얼마 전, 어느 30대 가장이 대낮에 도심 한복판에서 `돈을 밝히는 정치인들, 내 돈이나 주워가라!`라고 외치며 3백 7십여만 원의 돈을 뿌린 충격적인 일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는 단칸 셋방에서 처자식을 거느리고 사는 중소 건설업체 노동자였다. 경찰에 구속된 그는,
“노동자는 단돈 몇 푼을 벌기 위해 피땀을 흘리는데 정치인들은 부정하게 건설업체로부터 돈을 뜯어가고 있는 세상이 아니가. 국회로 보내 주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심부름꾼이 되겠다던 정치인들이, 당선되고 나면 양심도 없이 사기꾼, 도둑놈이 되어 이 나라를 망쳐 놓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개탄스러워 어쩔 수 없이 이같은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소.”
라며 정치인들을 싸잡아 비난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그의 행동에 대해 시민들은 오히려 공감한다는 격려 전화가 빗발치듯 몰렸다는 후문이 들렸다. 이 사회의 도덕성과 정의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예이다. 부처님은, `만약 사람의 마음이 정직하면 금과 같이 귀중하다.`라고 “제법집요경”에서 말씀하였다. 모든 것이 순환된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불신하게 되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지! 당장 눈앞의 이익을 챙기는 데는 속임수가 이길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리 길게 가지 못한다. 하루하루의 삶이 우리의 긴 인생을 만드는 것이다. 오늘 하루를 정직하게 살다보면,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우리도 후회없고 행복한 인생이라는 기쁜 바다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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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꽃삽 - 이해인
첫째 묶음 : 고독을 위한 의자
책과의 여행
가장 고요할 때 가장 외로울 때 내 영혼이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책을 연다 밤하늘에서 별을 찾듯 책을 연다 보석상자의 뚜껑을 열 듯 조심스러이 책을 연다
가장 기쁠 때 내 영혼이 누군가의 선물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책을 연다 나와 같이 그 기쁨을 노래할 영혼의 친구들을 나의 행복을 미리 노래하고 간 나의 친구들을 거기서 만난다 아,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주택들 아, 가장 높은 정신의 성들 그리고 가장 거룩한 영혼의 무덤들 그들의 일생은 거기에 묻혀 있다 나의 슬픔과 나의 괴롬과 나의 희망을 노래하여 주는 내 친구들의 썩지 않는 영혼을 나는 거기서 만난다 그리고 힘주어 손을 잡는다
고 김현승 시인의 <책>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좋은 책을 만날 때마다 나는 이 아름다운 시를 떠올리곤 하는데 아직 읽어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여기에 소개한다.
수없이 되풀이해 읽어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고전인 <성서>와 <논어>, 작가를 직접 만난 후, 그 인품의 향기에 끌려 더 즐겨 읽게 된 피천득의 <수필>, 법정 스님의 머리글이 너무 아름다워 더 자주 읽게 된 <어린왕자>와 톨스토이의 <인생론> 등 내게도 개인으로 소유하고 있는 책들이 몇권 있긴 하지만 요즘은 좋은 책들을 나만의 소유로 묶어두기보다는 더 많은 이들이 볼 수 있도록 '여행'을 떠나보내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진정 책과의 여행이 없었다면 어린 시절부터 나는 몹시 우울하고 메마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막 끝나고 난 후의 1950년대, 국민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녀의 마음을 달래준 것은 안데르센과 더불어 국내의 여러 작가들의 아름다운 동화들이었고, 5, 6학년 땐 언니, 오빠가 구독하는 <학원>이란 잡지를 참 열심히도 읽었다.
중학교에 들어가 문예반 일을 하면서 작문선생님의 지도로 여러 아름다운 시들을 접할 수 있었고, 친구들과는 으레 시집들을 생일 선물로 주고받곤 했다. 한용운, 김소월, 윤동주, 서정주, 신석정, 유치환, 노천명, 김남조 그리고 '청록파'의 박목월, 박두진, 조치훈 시인들의 시들을 애송하며 편지에도 자주 인용하곤 했는데, 내가 어른이 되어 그 중의 몇분을 직접 만났을 땐 설레이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아라/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하는 푸슈킨의 시구나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라'고 하는 신석정의 시구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되는 윤동주의 <서시>와 더불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산 너머 저쪽 더욱 멀리 행복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나는 그를 찾아 남 따라 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되돌아왔네' 하는 칼붓세의 시는 현실에 충실해야 할 삶의 지혜에 눈을 뜨게 했다. 졸리는 오후 수업시간이면 신지식의 <하얀 길><감이 익을 무렵>등의 고운 단편들을 읽어주던 영어선생님도 잊을 수 없고 그 영향으로 난 막연히 작가를 꿈꾸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책을 대여해 주는 동네책방에 가서 얼마나 많은 책을 빌려다 읽었는지 장편소설들은 그때 다 빌려 읽은 셈이다. 지금 생각하며 좀 건방지지만 외국소설과 시는 번역이 썩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로 국내작품들을 더 많이 읽은 것 같다.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순결한 사랑의 주인공들을 아끼고, 이광수의 <사랑>, 김래성의 <애인>, 심훈의 <상록수>, 정비석의 <산유화>등을 아직 어린 나이에 읽었다. <산유화>에 나오는 삼청공원이 마침 우리집 근처여서 나는 곧잘 친구들과 그곳에 오르며 소설에 나오는 김소월의 시들을 낭송하곤 했다.
여고에 들어가서 백일장에 입상하는 등 조금씩 인정을 받기 시작하자 나는 틈틈이 시작을 하며, 독서에 몰두했다. 은근히 나를 좋아했던 먼 친척뻘의 오빠가 갈피마다에 꽃잎을 끼워선물로 준 단테의 <신곡>을 뜻도 잘 모르면서 읽었고, 타고르, 릴케, 헤세의 시에 맛들이기 시작했으며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과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등에 도취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인류사에 빛나는 위인들이나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야말로 '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잠을 설치며 방황하고 고민하기도 했다.
수녀원에 들어와서 몇 년 간 나는 <성서>나 <그리스도를 본받음>등의 신심서적 외엔 거의 읽지 않고 있다가 1970년대 필리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며 셰익스피어의 희, 비극, 호머의 서사시들, 영시들을 알뜰히 탐독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때 많은 것을 가르쳐준 델프라도 교수는 학식과 덕망과 미모가 빼어난 여성이었는데 지금도 그는 '네가 우리반에 있었을 때의 문학수업 시간을 잊을 수 없다'며 편지를 보내오곤 한다. 그의 지도로 나는 <에밀리 디킨슨과 김소월의 자연시 비교 연구>란 제목의 논문을 쓰게 되었는데 자신의 삶만큼이나 특이한 에밀리 디킨슨의 시들에 깊이 매료되었다.
바쁜 일정 중에도 종종 후배들에게 교양문학을 강의하는 지금의 내게 어린 시절부터 많이 읽어둔 책과, 책을 통한 인생체험들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규칙적인 수도생활을 하다 보면 책 읽을 틈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짬짬이 떠나는 책과의 여행은 늘 계속될 것이다. 좋은 것을 선택할수록 책은 배신을 모르는 충실하고 미더운 동반자가 되어준다. 살아 있는 동안 좋은 책과의 여행을 계속하려면 깊이 고독할 줄도 알아야 한다. 책이 있는 한 나의 삶은 결코 메마르지 않을 것이며 책과의 여행에서 얻은 체험을 이웃과도 나눌 수 있는 순례자일 때 나의 삶은 더욱 풍요롭게 빛날 것이다.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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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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