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종교와 죽음 - 베르나르 포르
미이라의 기능
이집트가 '미이라의 나라'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리라. 하지만 미이라는 이집트가 아닌 다른 여러 문화권에서도 발견된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마 미국의 남서부, 알래스카, 알류산 열도, 페루 등지와 같은 아메리카 대륙의 미이라이다.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미이라를 만들었다는 증거가 적지 않다. 이탈리아에 있는 팔레르모의 카푸치노회 수도원 지하동굴의 미이라들은 이미 잘 알려진 예이며,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성 미셸 탑에서 발견된 미이라들도 테오필 고티에Theophile Gautier, 구스타프 플로베르 Gustave Flaubert, 빅도르 위고 Victor Hugo 같은 유명한 19세기 작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 바 있다. 미이라는 말할 수 없이 매혹해 오는 힘이 있기 때문에, 스페인의 테룰 Terul 에서 발견된 연인들의 완벽하게 보존된 미이라처럼, 혹은 시에나의 성 도미니크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공개되어 있는 성녀 카테리나의 미이라 머리처럼, 때로 경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미이라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과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 두 가지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시체에 유약을 바르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특히 이집트 미이라의 경우가 그렇다. 두 번째 경우는, 우연한 환경에 환경이나 적절한 자연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1991년에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발견된 '얼음 속의 남자'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매우 건조한 사막기후가 완벽하게 시체를 보전하여 준 덕에, 중앙아시아의 타림 분지에서도 자연 미이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보르도 지방에서 나온 미이라들도 이 범주에 속하는데, 1789년 혁명 때에 처형당해 공동묘지에 버려졌던 시체들이 토양이 지닌 화학적 성질에 의해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었다. 인도에서는 육체의 불멸성을 믿는 신앙과 유골숭배가 존재했는데도 불구하고, 미이라를 만들지 않았던 것 같다. 반대로 중국과 일본에서는 많은 미이라가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불자들의 미이라였다. 비록 그 수는 이집트 미이라와 비교되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들 미이라에 대해 학자들의 관심이 부쩍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에 일본의 북부 지방에서 상당수의 미이라가 발견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살을 지닌 시신' 혹은 '육체를 입고 있는 붓다'라 불리는 불교의 미이라들은 어떤 점에서 다른 미이라들과 구분 될 수 있을까? 우선 불자들의 미이라는 정확히 말해 인공적이라거나 자연적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자발적' 미이라라 해야 할 것이다. 주로 고행승들이었던 이들의 시신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에서까지 부처가 설파했던 중도를 따르려고 했는지, 미이라가 되는 일에서도 자연과 인공의 중간 방법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미이라는 이미 언급했던 인도 고행자들의 경우처럼 고의적 행위의 결과이다. 미이라가 되겠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스스로 고행에 뛰어들었던 이들은(여자들은 제외되었던 듯하다), "사라지지 않고 죽는 자, 그는 불멸성을 얻는다."라고 한 노자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할 것처럼, 살아 있는 상태에서 죽음의 문을 넘으려 했던 자들이다. 속세 사람들의 미이라(왕족의 미이라도 포함된다)와는 달리, 불자들의 미이라는 영혼 아니면 적어도 하나의 현존을 내포한다. 한편 이들은 한결같이 모두 성인인데, 그들의 성스러움을 말해 주는 가장 명백한 증거는 그들이 시신은 부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체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이루어지는 이 미이라는 고행자들의 몸에 붓다의 덕이 온전히 스며들어, 썩을 육체가 '영광의 몸'으로 탈바꿈할 수 있음을 증명해준다. 더욱이 이 미이라들은 한결같이 모두 불상이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미이라에 래커를 칠했는데, 그렇게 되면 미이라와 실제 불상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아무튼 이리하여 중국에서는 6세기부터 미이라가 숭배의 대상이 된다. 이 미이라들을 통해 산자와 죽은 자들 사이에 단절되지 않는 교류가 형성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강우를, 일본에서는 질병의 치유를 빈다.
불자들의 미이라가 이제까지, 그리고 여전히 우리에게 행사하는 말할 수 없는 매혹과, 또 이제까지 있어왔으며, 간혹 아직도 볼 수 있는 미이라 숭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순전히 객관적이거나 이야깃거리적인, 다시 말해 객관화하거나 사물화하는 접근방식은 넘어서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자발적인 죽음의 경험들을 단순한 기담으로 소개하면서, 자연적 미아락 된 이들의 뜻에 거슬리게 미이라에 '죽은 자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과학적인 '호기심'이라는 '이상한 친숙성'을 부여하여 방부제를 발라 보존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미이라들이 지하 납골당에서 꺼내져 호기심 많은 군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어쩌면 그들의 죽음의 비밀은 더욱 깊이 숨어버리는 지도 모른다. 미이라 숭배를 이해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미이라화를 우연의 소산으로 설명하는 것은 금물이다. 정상적으로라면 습한 기후 때문에 시체를 오래 보존할 수 없는 일본이나 베트남에서도 미이라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미이라 숭배에 담긴 생명력 자체는 단순히 '잔여물'이나 빈 조개껍질이-도겨의 불사신들의 시신이 매미나 뱀이 벗은 허물처럼 간주되었듯이- 아님을 증명해 준다. 숭배자들에게 미이라는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는 '살아 숨쉬는'존재로서, 이 세상과 열반의 충만함 속에 동시에 존재한다. 이들은 꿈 속에 나타나 사람들에게 말을 걸며, 어떤 사건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한 예로 선종Chan의 제 육조대사였던 혜능(713년 사망)이 1930년대에 한 선종 스승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미이라가 있는 광동 근처의 한 사원을 복구해 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 사원이 일본군들에 의해 폭격당할 뻔했을 때 양구긔 폭격기가 충돌한 것을, 중국인과 침략자 일본일들마저 미이라의 주술적 능려그이 효과라 보았다.
중국에서는 불자가 아닌 경우에 보통 미이라에 방부제 처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1952년에 발견된 태씨 성의 귀족 가문 여인의 2000여 년 된 미이라도 완벽한 방부제 처리 덕분에 성공적으로 보존되었음이 틀림없다. 일본에서는 12세기에 마찬가지로 방부제 처리된 것으로 보이는 후지와라 가문의 미이라 네 구를 볼 수 있다. 불교에서도 인공적으로 처리된 미이라가 발견되는 일이 확실히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으레 있는 일이라기보다는 예외적인 경우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티베트에서는 불교 귀족들인 라마승lama들의 시신이 16세기부터 소금에 절여져 미이라가 되었다. 그들의 몸은 보통 가부좌를 튼 명상의 자세로 소금이 가득 찬 상자 속에 넣어진다. 소금은 시간이 지나면서 옷감이 부패될 때 생기는 액체를 흡수하게 되는데, 이 소금이 마치 약처럼 신자들에게 귀하게 팔렸다. 미이라에게 치료 능력이 있음은 서양에서도 오래 전부터 알려져온 사실이다. '미이라'라는 단어(아랍어로는 뮤미야, '밀랍'을 의미한다)의 어원은 역청을 가리키는데, 역청은 지신에 바르고 약으로도 사용하던 물질이다. 이 역청은 활발히 거래되던 품목이었으며, 16세기에는 일본에까지 퍼져나갔다. 일본어 미라는 미이라에 바르는 물질, 즉 '몰약'을 의미하는 포루투칼어에서 왔다. 그러나 이것은 앙브롸즈 파레 Ambroise Pare가 그의 저서 <미이라 서설>에서 쓴 것과는 모순된다.
라사의 포탈라 궁에는 수많은 달라이 라마의 미리아가 안치되어 있는데, 이곳의 황금 유물들이나 스투파를 많은 방문객들이 묘사했다. 티베트에서는 미이라를 만들기 위해서, 장뇌나, 사프란, 수은과 같은 다양한 물질들을 시신의 입안에 넣고, 4,5개월 동안 매일 시체에 소금물과 향료룰 바른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드는 이 방법은 이집트에서와는 달리 내장기관을 추출하지 않는다. 이는 미이라를 만든 기원이 좀더 오래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이다. 티베트인들의 기술이 고대 중국에서 사용되던 기술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중국 전통(특히 도교의 전통)을 따르면, 내장은 생명의 에너지가 간직되어 있는 기관이므로, 그것을 들어낸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이집트에보다 중국에서 미이라가 성공적으로 만들어지는 확률이 더 적었던 까닭은 아마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국인들의 이러한 믿음을 이해하면 불상 안에 인공 내장을 만들어놓은 이유도 쉽게 납득할 수 있으리라 본다. 실제의 장기를 대신하는 인공 장기는 상징적인 차원에서 실제의 내장과 똑같은 역할을 한다. 즉 불상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4세기 이휴의 중국과 11세기 초부터 일본에서 등장했던 대부분의 불교 미이라들은, 자발적 미이라화를 위한 단식과 명상 과정 끝에 완성돼었다. 불자들이 미이라가 되기 위해서 단식과 명상에 들어가는 것은, 미이라가 되면 살아 생명력을 지니고, 은총을 바라고 그들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특별한 믿음은 미이라나 화상, 불상이 행동하는 현존을 포함하며, 이 현존은 보이지 않게 돌아다닐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집중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이것을 필자는 '현존 사상'이라 부르겠다. 중국의 미이라들, 특히 선종(Chan/Zen) 지도자들의 미이라가 바로 그러하다. 이들이 미이라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증거이자 또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불교에서는 앞으로 미륵불이 도래하리라는 메시아 신앙도 볼 수 있다. 그 때 펼쳐지는 새로운 황금 시대에는 환생한 모든 사라밍 궁극적인 해방을 얻게 된다느 ㄴ가능성도 함께 존재하는데, 여기에 다른 많은 전설들이 접목되었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카시야파에 대한 것이다. 붓다의 제자인 카시야파는 사마디 상태에서, 즉 내적 명상 속에 잠겨 미륵불이 후계자인 그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찾아올 때를 기다린다. 그러나 카시야파에게는 경쟁자들이 나타났다. 7세기에 중국인 순례자 주앙창은 코탄이라는 장소에서, 미륵불을 기다리기 위해 이미 삼매에 들어가 사람들로부터 경배받고 있던 한 성자의 미이라를 자신이 보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카시야파의 가장 유력한 라이벌로 유명한 자는 역시 구카이이다(구카이는 민간 신앙에서는 사후에 얻은 코보 데시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신곤파의 창시자였던 그는 9세기 초에 고야 산에서 사마디 상태에 들어갔다고 한다. 일본의 북부 지방에서 바견된 에도시데(17C-19C) 미이라의 주인공들은 바로 이 전설적인 모델의 뒤를 따르려 했던 일본 승려들이다. 일본에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죽음을 눈앞에 둔 구카이는 자신이 삼매 상태에 들어갔다가 미륵불이 도래할 때 깨어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한다. 관례에 따라 49일이 지난 뒤에 제자들이 관을 열었을 때 그의 시신은 '마치 산 사람'같았다. 그 후 70년이 지나, 한 덕망 높은 고승이 황제의 명령을 받고 고야 산에 올라가 그의 능을 열어보았는데, 그의 미이라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상태였다. 고승은 구카이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옷을 새로 갈아입힌 후에 능의 문을 닫고 산을 내려왔다. 그 이후로는 능의 문이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에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9세기에 쓰여진 한 문서에 구카이의 시체가 화장되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불교사에서최초의 미이라로 기록된 것은 1103년에 죽은 조가라는 죽은 승려의 미이라이다. 그리고 현재 가자 오래 보존되고 있는 미이라는 14세기 신곤파의 스승이었던, 고시호인의 미이라이다.
10세기 중국의 한 불교 경전에 의하면, 성인은 죽을 때 일정치 않은 수의 유골롸 육신의 부위들을 남기는데, 붓다는 육신 전체가 유골을 이루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붓다의 육신은 썩지 않고 자연적으로 미이라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미이라가 된 불자들은 모두 붓다로 간주된다. 그러나 불교 신자가 아니며 '우연히' 미이라가 된 경우들은 고려되지 않고 있다. 7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는 특히 선종Chan안에 '자연적인' 미이라의 수가 많아졌다. 그 진행 과정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성인의 향기를 풍기는' 지도자가 죽어서 매장할 때, 제자들은 스승을 앉은 자세 그대로 커다란 항아리 속에 안치한다. 그리고 3년 후에무덤을 열고 시체를 꺼낸다. 그러면 스승의 신체는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을 띤다. 머리카락과 손톱은 꾸준히 자라고 있었고, 살도 여전히 부드럽다. 이때 사람들은 '산 고인'을 만나는 것이다. 간혹 불경한 자들이 무덤을 파헤쳤을 때 이렇듯 살아있는 듯한 모습을 보면 충격을 받아 무덤 파는 일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산 고인'의 신체에는 래커가 칠해지고 비단옷이 입혀져, 마침내 신자들 앞에 공개되어 경배를 받는다. 이런 미이라들은 충격적인 인상을 주거나 영기를 발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손에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가장 유명한 경우는,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선종Chan 의 육조대사 혜능의 미이라가 겪었던 수난일 것이다.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한 한국인이 그의 머리를 훔쳐가려 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그 한국인의 시도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고 하는데, 한국에서 들을 수 있는 말은 그와 달라 지금도 한국의 한 절에서 '육조대사 혜능의 머리를 모셔놓은 능'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양측 모두 그 귀중한 유골에서 비롯된 기적을 자랑하고 있는 실정이니 우리로서는 과연 어떤 전승이 옳은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누구의 말이 옳든 그것은 중요지 않다. 다만 기독교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도굴 행위와 마찬가지로 , 여기서도 유골의 기적적인 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이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무덤을 파헤치는 행위가 항상 믿음이라는 경건한 동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전해지기는, 중국의 문화혁명 때에 혜능의 무덤이 홍위병에 의해 다시 파헤쳐졌다고 한다. 홍위병이란 그로부터 10년 뒤에 방부제 처리된 마오쩌둥의 시체 앞에 줄을 이루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미이라가 되어 육체의 죽음을 정복하겠다는 의지는, 언뜻 보면 불교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19세기에 일본의 한 인류학자는 일본 북부에 있는 '불가사의 중 하나인 고시 호인의 미이라를 묘사하며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미이라화라는 개념 자체가, 만물의 비지속성을 설파한 석가모니의 교리에 반대되는데 그의 미이라를 찬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후에 나타나는 육체의 변형이 고인의 영적인 변형을 반영한다는 생각은 아주 일찍부터 있어왔던 듯하다. 대중적인 전통에 따르면, 시신이 해체되는 데 필요한 기간이 최소한 49일이라고 하는데, 그 기간 동안에 '중간상태의 존재'로 명부와 연옥을 여행하며 협상을 벌인다고 한다. 그리하여 매장시에 불순한 살이 해체되거나 화장, 미이라화를 통해 결국 썩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면 죽은 자의 영혼은 불멸의 상태, 즉 열반에 이르렀음을 암시한다고 받아들인다.
일본의 미이라들은 대부분, 9세기 초에 구카이가 도입한 밀교의 한 종파인 슈겐도의 고행자들이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구카이는 미륵불을 기다리느라 고야 산에서 삼매 상태에 들어갔던 자이다. 그의 일부 추종자들은 그 산에 올라가서 첫 3년 동안엔 곡식만, 그 다음 2년 동안엔 야채만 먹으면서 수행에 들어갔는데, 이런 행위는 모두 스승을 모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연히 그들의 육체는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게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이 기간이 지나고 나서는 물만 마시면서 완전한 단식에 들어갔다. 이것은 영양실조로 서서히 자신을 죽여가는 일종의 자살인 셈이다. 중국에서는 불멸을 꿈꾸는 사람들이 벌써부터 이 방법을 따르고 있었다. 이는 도교 신자들 사이에 알려져 있던 장수의 비법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위에 열거한 여러 모델들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전승에 따르면, 개달음을 얻기 전의 붓다는 고행으로 초췌해져 생명을 겨우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밖에는 지니지 못했다고 하낟. 이러한 붓다의 이미지는 불자들로 하여금 미이라가 되기 위해 삼매 상태로 들어가도록 격려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해볼 수 있다. 선종의 한 경전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 "석가모니는 6년 동안의 고행으로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계속해서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지냈다. 하도 움직이지 않아서 그의 눈썹에는 거미가 집을 지었고, 머리에는 새들이 둥지를 틀었으며, 깔개에는 갈대가 자라고 있었다."
가장 최근에 미이라가 된 불자는 1954년에 타이베이에서 60세의 나이에 뇌출혈로 죽은 승려 치항이다. 제자들은 스승의 마지막 지시에 따라, 그의 신체를 커다란 항아리 속에 넣은 뒤 5년이 지나 뚜껑을 열어보았다. 몹시 여위기는 했지만 부패하지는 않은 그 신체에 제자들은 금빛 래커칠을 한 후 사리탑에 모셨다. 그러자 바로 다음 주부터 그 사리탑 앞에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치항의 경우는 그 이전에 미이라가 된 불자들의 경우와 조금 다르다. 생전의 사진을 보면 그는 제법 살이 쪄 있고, 미이라가 되기 위해 음식을 조절하거나 단식을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뇌출혈로 죽었으므로 침대 위에서 임종을 맞아야 했다. 그러므로 그의 시신에 어떤 현대적인 의학 조치가 취해졌던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보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보다 더 최근인 1976년에, 1970년 47세의 나이로 죽은 키냥이라는 승려가 미이라의 모습으로 드러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6년 동안 그의 시신을 담아두었던 항아리가, 몹시 흥분하여 기다리고 있던 군중 앞에 개봉되었을 때, 긴 손톱과 머리카락 한 올도 손상되지 않은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한다.
끝으로 8세기에 혜능 계열 선종Chan의 한 스승이었던 시투 지키안의 조금 독특한 경우를 언급해 보도록 하낟. 1911년 중국의 혁명 당시 일본의 한 치과의가 화재 속에서 구해냈던 그의 미이라는 일본으로 옮겨졌다. 그리하여 한동안 불교계에서 잊혀졌다가, 50년대에 들어 일본의 한 학자가 다시 발견하여 결국 요코하마에 있는 선종Zen 대사원에 위탁되었다. 아직 그의 미이라는 그곳에 보존되어 날마다 승려들로부터 음식을 공양받고 있지만, 호기심과 신심에 불타는 군중 앞에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다시 활발히 이록 있는 불교의 추세에 힘입어, 여러 지방당국은 본래 그 미이라가 소재해 있던 구역 내에 미이라를 모시기 위한 사리탑을 세우도록 허락하였다. 물론 일본의 불교도들이 그 미이라를 본국인 중국으로 송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힐,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에 한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