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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07 호
단기 4341. 10. 7 (음력 9. 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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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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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비룡소 황금도깨비상
1992년 제정되어 국내 어린이 책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고 발전을 도모해온 '황금도깨비상'이 제15회를 맞이하였습니다. 역량 있는 작가들을 발굴해 온 '황금도깨비상' 작품 모집에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을 기대합니다.
모집 부문 그림책, 장편동화, 논픽션
응모 자격 신인 및 기성 작가. (논픽션 부문은 어린이 책 기획단체 등 제한 없음)
시상 내용
그림책 부문 글/그림 부문 - 상패와 부상 1,000만 원(선인세 500만 원/ 창작지원금 500만 원) - 특전 볼로냐 도서전 참관
글 부문 - 상패와 부상 300만 원(선인세 150만 원/ 창작지원금 150만 원)
장편동화 부문 - 상패와 부상 1,000만 원(선인세 500만 원/ 창작지원금 500만 원) - 특전 볼로냐 도서전 참관
논픽션 부문 - 상패와 부상 1,000만 원(선인세 500만 원/ 창작지원금 500만 원) - 특전 볼로냐 도서전 참관
시상 인원 그림책, 장편동화, 논픽션 각 부문 1명
응모 마감 : 2008년 10월 20일까지
당선작 발표 2008년 12월 10일, 비룡소 홈페이지 및 개별 통보
각 부문별 응모 요령
그림책 부문 글/그림 부문 : 글과 그림 1편 이상 1) A4로 출력한 그림책 원고 2) 채색이 끝난 완성된 그림 5컷 이상 3) 가제본(구성을 알 수 있도록 글과 그림을 앉힌 그림책 더미 제작)
글 부문: 5편 이상 1) A4로 출력한 원고 (분량: 한 편당 그림책 한 권 분량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길이. 내용: 순수 창작으로 소재와 주제는 자유) 2)그림책 콘티 (형식: 그림책의 흐름을 잘 알아볼 수 있도록 페이지 구성을 해서 글을 정리한 것.)
장편동화 부문 200자 원고지 500매 안팎. 원고는 워드 프로세서로 작성하며, 장편동화는 디스켓과 인쇄물, 줄거리 요약물을 함께 첨부해야 합니다.
논픽션 부문 내용 -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 과학, 음악, 미술 등을 좀 더 쉽고 재미있고 참신하게 소개하는 원고. - 교양 있는 시민으로 성장하려면 꼭 알아야 할 철학, 문학, 문화, 예술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 원고. - 우리 조상의 지혜가 엿볼 수 있으며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 수 있는 원고. - 전 세계의 의복, 요리, 신화 등을 통해 전 세계 문화의 다양성과 고유성을 깨우칠 수 있는 원고. -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어린이 및 청소년에게 역할 모델이 되어 줄 수 있는 흥미로운 인물 에 관한 원고.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간 인물에 관한 원고. - 수학과 과학을 소재로 그림책이나 동화 형식으로 꾸민 원고. - 현장 학습과 연계하여 우리 주변에서 쉽게 과학을 배울 수 있는 원고. - 식물과 동물의 생태, 여러 가지 자연 현상 등 과학 및 수학의 기본 원리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원고. - 기타 어린이 논픽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창의적이고 참신한 원고.
형식 원고의 분량은 제한이 없으나 단행본으로 출간이 가능해야 합니다. 원고의 형식은 사진이나, 그림동화, 동화책, 만화 등 자유롭고 창의적인 형식 모두 가능합니다. 시리즈일 경우 기획서를 함께 제출해야 합니다.
* 세 부문 모두
- 원고는 워드 프로세서로 작성해야 합니다. - 비룡소 홈페이지에서 응모지원서를 다운로드 받아 원고와 함께 우송해야 합니다. (반드시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기재해야 합니다.) - 응모작 발송 겉봉투에 ‘황금도깨비상 응모작’ 및 응모하는 부문도 명기해야 합니다.
기타
- 당선작은 이듬해 출간됩니다. - 인세가 순수창작지원금을 제외한 나머지 상금을 상회할 때, 해당 시점부터 판매 부수에 대한 인세를 지급합니다. - 응모작이 이미 발표된 작품이거나, 다른 문학상을 수상한 경험이 있거나, 표절 등의 부당한 작품일 때에는 당선을 취소합니다. - 응모작은 심사가 끝나고 당선작이 발표된 후, 원화는 돌려 드립니다. 원화 훼손 우려로, 본인을 증명할 수 있는 신분증을 가져오시면 원화를 돌려 드리겠습니다. - 장편동화 부문, 논픽션 부문 응모작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접수처 및 문의 (135-887)서울 강남구 신사동 506 강남출판문화센터 4층 비룡소 편집부 황금도깨비상 담당자 앞 ☎02-3443-4318,4319 / 팩스: 02-3442-4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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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안중근의사 의거기념 글짓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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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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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실패작은 죽은 걸작보다 낫다.(버나드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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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글터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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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
고장말
‘-레’는 앞에 연결된 말이 주어임을 나타내는데, 주로 평안도·제주도에서 쓰인다. ‘-레’는 모음으로 끝나는 말 뒤에서만 쓰인다는 점에서 표준어 ‘-가’에 대응되는 고장말이다. “조금 있으느꺼니 남자레 꼴을 한짐 지구 와서 하루밤만 자구 가갔다구 했디.” “십 넌 두구 한번두 씻딜 않구 지냈으느꺼니 그 냄새레 어떻갔소.”(<한국구전설화> 평북편·임석재) ‘-레’는 주어임을 강조하여 나타내는 토 ‘-(이)라서’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라서>라>래>레)
평안 지역에서 ‘-가’ 대신 ‘-레’가 쓰인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지만, 제주 지역에서 ‘-레’가 쓰인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내레 앙 갑니다”(<한국구비문학대계> 제주편) ‘-레’가 평안 지역의 전형적인 말투로 인식되는 것은 제주 쪽보다 사용빈도가 훨씬 높기 때문이다. 두 지역 두루 ‘-레’가 ‘-래’로 실현되기도 하는데, 실제 말투에서 ‘-레’와 ‘-래’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레’의 또다른 형태는 ‘-라’인데, ‘-라’는 평안도와 가까운 황해 북부와 충남 태안·보령 등지에서 사용된다. “그 무이라(무가) 맛이 달디?” 다만, 충남 서해안 쪽에서는 자음 뒤에서 ‘-이라’가 쓰인다. “웬 일잉가아 허구 다아 볼 거 보구서 신방을 들어가 보닝깨, 아 워떤 눔이라 신부를 칼루 찔러서 방이 피가 잔뜩 있단 말여.”(위 책 충남편)
‘-라’ 또한 제주의 ‘-레’처럼 사용빈도가 높지 않은 고장말이다.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세리머니
월드컵을 치르면서 우리나라의 축구 수준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선수들의 능력이 향상됐고, 해외 경기를 중계하는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멋진 축구전용 경기장도 많이 생겼습니다.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전용 경기장에서 관중은 날카로운 돌파와 육탄저지, 그리고 그림 같은 득점 장면을 보며 환호합니다. 득점한 선수들이 기쁨에 넘쳐 보여주는 갖가지 몸짓 또한 경기장을 찾은 사람들과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반지에 입을 맞추는 안정환 선수, 속옷에 글을 적어 보여주는 이천수 선수가 있는가 하면 득점을 탄생에 비유하듯 아기 어르는 흉내를 내는 선수들도 있습니다.
흔히 이러한 몸짓을 '골 세리머니'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 영어 단어는 이런 경우에 쓰기에는 좀 거창합니다. 영화 '하얀전쟁'의 원작 영어 소설을 쓴 안정효씨의 글을 빌리면 '골 세리머니라는 어휘를 붙여주려면 골 앞에 차려 자세로 줄지어 서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그동안 경기장에서 순직한 모든 축구인에 대한 1분간의 묵념을 거쳐 체육헌장을 낭송하는 정도가 돼야 제격'이랍니다. 득점했다고 이런 의식을 치르는 선수는 없겠지요? 이 경우 세리머니는 '득점 뒤풀이' '골 뒤풀이' 정도로 바꿀 수 있습니다. 참고로 득점 후 환호의 몸짓을 영어로 표현할 때는 '셀리브레이션(celebration)'이란 단어를 쓴답니다.
갓달이
사람이름
세종 7년(1425년), 남해바다 갈이섬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왜인을 잡아 공을 세운 이들에 대해 경상우도 수군처치사가 병조에 보고하였다. 2등 공을 세운 염간(鹽干) 황복이·김갓달 등 열세 사람에게 대마도 정벌 때처럼 공적패를 주고 살아있는 동안 부역을 안 지게 해 달라고 병조에서 임금께 아뢰었다.
몸은 양인이면서 낮은 일을 하는 이들(신량역천)에 한(干)과 자이(尺→장이)가 있었다. 염간은 염한(鹽漢)으로도 적으며 ‘소금한’이다. 왕실이나 절의 땅을 부치는 전호를 곳한(處干)이라 부르며 나중에는 소작농이 되었다. ‘한’에는 ‘어부한·두부한’도 있다. 절에 땔나무를 대는 사람을 불목하니라고 하는데 이런 흐름의 조각을 보여준다.
조선 때 ‘한’과 ‘자이’가 천한 직업이라는 인상을 씻어주고자 이들을 ‘보충군’에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전문직종 사람을 ‘꾼’(軍)으로 부르게 되었다. 꾼은 요즘 말에서 ‘어떤 일을 전문·습관적으로 하는 사람, 어떤 일 때문에 모인 사람’을 뜻한다. 나무꾼·노름꾼·사기꾼·사냥꾼·일꾼 등 꾼이 쓰인 말은 셀 수 없이 많다.
밑말 ‘갓’이 든 사내이름에 갓놈이·갓동이·갓박이(까빡이)·갓쇠가 있고, 계집이름에 갓개·갓금이·갓비도 있다. 갓은 머리에 쓰는 갓, 갓김치를 담글 때 쓰는 밑감, 갓길은 가장자리 길이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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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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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종교와 죽음 - 베르나르 포르 삶을 지속하려는 끈질긴 욕망
다수는 불멸이다. 그것은 다수가 죽음이기 때문이다. - J.L크레티앙
도교의 불사론
신체를 완벽하게 유지하지 못하고 훼손시키는 데 대한 중국인들의 혐오감이 얼마나 큰지 이해한다면, 불교의 삭발이나 화장 습관에 대해 유교가 왜 그토록 완강하게 비판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들이 신체보호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할 뿐 아니라, 또 그 점에 매우 뛰어났다는 사실이, 1972년 마왕퇴에서 발견된 무덤에서 증명되었다. 무덤의 주인은 기원전 168년경에 죽은 젊은 여자였는데, 시신이 어찌나 잘 보존되어 있었던지 학자들이 죽음의 원인과 마지막 식사 메뉴까지도 알아냈을 정도이다. 중국에서는 과학적 연구를 위해, 혹은 돈을 벌려는 욕심에서 무덤을 파헤쳤다가, 방부제를 사용하여 완벽하게 보존된 시체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 신화적 인물이라 할 만한 노자가 썼다고 하는 도교의 밀독서인 도덕경에는 불사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듯한 수많은 구절들이 기록되어 있다. 도교 신봉자들은 도와 하나 되는 것이 불사로 이르는 첩경이라 믿는다. 그들은 '기를 키우는' 훈련을 통해 죽음을 피하고자 했는데, 그 훈련은 신체 중 '생명을 해체시키는' 요소들을 썩지 않는 요소들로 대치하기 위한 것이다.
'시신에서의 해탈'은 육체와 정신의 동시적 변환을 상상할 수 없었던 도교 신자들의 열등한 유형의 해탈이다. 그들은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더 완벽한 육체를 얻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벗어야 한다. 이런 식의 해탈을 정신의 신격화로 볼 수는 없다. 재생하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육체일 뿐이다. 또한 주로 남성들로 구성된 도교 신자들의 비법 가운데는, 절제된 성교를 통하여 대립된 원리인 음과 양, 정과 기의 일치에 이른다는 성적 기교를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양기를 빼앗기지도 않도록 주의하면서 여성 파트너의 음기를 빼앗아 오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신화적인 인물인 황제는 1,200명의 처녀와 그러한 성교를 나눈 후에 불사의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도와 티베트에 퍼졌던 탄트라교(밀교)에서처럼 때때로 신비스런 대향연으로 이어졌던 이 기술들은 도교의 일부 스승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정액을 배설하지 않고 모아둠으로써 정기를 회복할 수 있다면, 환관들은 불사하리라고 그들은 반박했던 것이다.
불교에서의 불사론 - 열반
고대 인도인들은 조상들의 왕궁에서 부활한 사자들은 불사한다고 믿었다. 힌두교에서, 제관은 제사를 통해, 그리고 속세를 포기한 자는 브라만과 연합함으로써 불사신이 된다고 믿는다. 브라만은 만물 불멸의 원리이자 우주정신을 뜻하는데, 개인의 영혼(아트만)은 브라만의 한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 역시 더 나은 현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이 현실을 우주정신이라 정의하지는 않는다. 붓다는 열반에 도달함으로써 죽음과 욕망의 신인 마라를 이길 수 있었다. 현자 나가스나의 말에 따르면, 열반은 '욕망의 소멸, 증오의 소멸, 환각의 소멸'이 이루어지는 세계, 혹은 '불생, 불변, 부조, 무형'의 세계이다. 나가스나는 만일, "불생이 없다면, (중략) 생과, 변, 조, 형으로부터의 도피도 없을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무엇이라 딱히 규정지어 설명할 수 없는 열반을 '해탈'이라고 정의하기로 한다면, 이 해탈의 속성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견해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 서양의 일부 불교학자들은 그 해탈이 완전한 소멸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불교는 허무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좀더 신주한 다른 학자들은 불교의 교리에서 불가지론의 철학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붓다는 해탈의 속성에 대해 언급하길 피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주장 모두, 불교 신자들이 무엇 때문에 열반을 지복한 곳으로 보며 붓다가 죽음을 정복했다고 말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붓다가 죽음을 정복했다고 말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붓다가 자신의 지난 생을 환기할 때 우리는 그의 말을 진지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붓다가 그 시대의 인간이었지, 합리주의와 실증주의로 빚어진 서양의 철학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어버린다. 비록 붓다는 자신이 속했던 어떤 역사적 조건에도 한정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불교 자체가 종교 철학 체계인 인상, 사상과 정신의 역사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떤 경전에서는 열반을 완전한 소멸이라 분명히 규정짓고 있지만, 전통에 따른 지배적인 견해는 열반에서 불사의 개념을 본다. 인도의 불교는 수많은 생의 종국에 가서야 최종적인 해탈을 기대한다. 그 과정에서 '한 존재'는 우선 인간의 형태로 태어나 불교로 개종하고, 마침내 열반이라는 목표에 이르기까지 덕행들을 조금씩 축적해 간다. 중국과 일본의 불교에서는, 이승에서도 깨달음이 가능하며, 각자는 '육신을 그대로 지닌 채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개념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방식에도 불구하고, 일반 신자들은 여전히 너무 어렵다고 판단한 목표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불교계명을 준수하고 여러 의식을 행한 데 대한 보상으로 이승에서 복을 얻고, 다음 생에 좋은 환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아미타불 사상이 가르치는 '쉬운 길'에서는, 아미타불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만으로도 정토에 태어나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사후방책
이제까지 우리가 검토해 온 개념들과 장례 의식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항구적인 특징을 갖는다. 거기에는, '인간은 결코 죽지 않으며, 따라서 죽음은 하나의 변형일 따름이라는 확신(적어도 그러기를 바리는 소망)'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죽는다는 것은 공허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은 상태로 '존재하는 것', 다른 곳에서 다른 방법으로이긴 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자는 '부재'하는 만큼, '현존'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무덤과 유골함 속에 깃든 사자들의 이런 '현존'이 위패와 불상에 생명을 부여하며 가시적 세계와 불가시적 세계의 접촉을 가능케 한다. 그것은 따로 우리를 당황하게 하며 불안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산 자들에게 이로운 것으로 드러난다.
매우 특별한 사자들
1993년 7월 2일자 <르몽드>지에는 '강제로 화장당한 종교 지도자'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짧은 기사가 실렸다. :
지난 6월 29일 화요일, 수백 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000명의 경찰은 55일 전에 죽은, 브라만교의 한 스승의 시신을 강제로 빼앗았다. 추종자들은 그거 최면 상태에 들어가 있을 뿐, 죽지 않았다고 확신하면서 시신의 화장을 거부하고 있었다.
경찰과 추종자들의 충돌은 그의 시신이 있는 캘커타 근교의 외딴 오두막에서 오두막에서 발생했다. (타쿠르 발라크 브라마카리라 불리는 이 스승은 전세계에 걸쳐 9,000만 명의 신도를 둔 산탄 달이라는 종파에 속해 있다.) 그의 시신은 추종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신선한 방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법률에는 사망 후 24시간 안에 시체를 매장하거나 화장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에, 결국 이 시신은 경찰의 감시 아래 갠지스 강가에서 수요일 화장되었다. 경찰력을 동원하면서까지 무력으로 대치하려 했던 것은 광신적인 종파의 위험한 사고방식을 두려워한 까닭이었을까? 그러나 이 종파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무시 못할 정도라는 점과 그들 중에 '인도의 저명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만 감안하더라도, 이를 단순히 광신적인 집단의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함부로 몰아붙일 수만은 없다. 죽은 후에도 육체가 살 수 있다는 믿음은 인도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 매우 넓게 퍼져 있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미 앞에서 아고리들의 경우를 이야기한 바 있다. 탄트라파의 요가 수행자들인 이들은 죽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그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 오면, 곧바로 '생명력이 정지된 상태'에 들어간다. 제자들은 스승의 육체를 명상의 자세로 앉힌 후에 무덤(무덤 역시 사마디라 부른다) 속에 안치한다. 고행승인 스승은 죽음을 정복하는 죽음의 입문식을 치른 자들이다. 그들의 육체는 썩지 않는다고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저절로 미이라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영혼이 인간계와 천상계, 지하계의 세 세계를 떠돌면서 자유자재로 변형하는 동안, 영혼을 떠받쳐 주는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사마디라는 용어는 단순히 명상에 의해 야기되는 영적인 집중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자발적인 미이라화를 칭할 때 '사마디 상태에 들어간다'고 말하는데, 이 표현은 중국과 일본의 불교에서도 발견된다. 그들로 하여금 이같은 폭력적인 행위를 자진하여 행함으로써 자발적인 죽음을 택하도록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과 동기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분신 제작'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한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만족하고자 한다. 이것은 쉽게 썩어 없어지는 육체에 신성을 부여하거나, 혹은 대체할 수 있는 하나 또는 여러 육체를 만들어 냄으로써 죽음을 피하려는 생각이다. 전자의 경우 육체는 이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두 구성요소 중 하나(서양에서 말하는 영혼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는 죽지 않는다고 믿어진다. 후자의 경우에서는 으레 육체의 기관이 아닌 분신이나 초상화를 만들어낸다. 이처럼 육체를 신성시하는 일이 극단으로 치닫으면 모순되게도 두 유형의 종교적 자살에 이르는데, 그 하나는 단식에 따른 영양실조와 자발적인 미이라화에 의한 자살이며,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육신을 불사르는 자살이다.
이같은 개념들을 당연시하는 사고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의 불교에서 발전해 온 유골과 유골함, 혹은 스투파 숭배로 이야기 방향을 돌려야 한다. 장례의식들을 밑받침해 주는 이론은 불상숭배나 명상 속에서도 발견된다. 아니, 어쩌면 이런 종교의식 자체를 '죽음 전'에 행하는 장례의식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불자가 명상을 하면서 '삼매 상태'에 들어가는 것은 더 높은 차원에서 태어나기 위해 이 세상에서 상징적으로 죽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독실한 불교 신자들이 불상을 숭배할 때 그들은 그 안에 자신을 투영하며, 그것을 통해 조상들과 신들에 자신을 동일화시킨다. 최근 수십여 년 동안 중국에서는 한 고인에 대해 수없이 많은 글들이 쏟아져나왔는데, 그 고인은 다름아닌 '위대한 지도자' 마오쩌뚱을 말한다. 그의 모순적인 운명을 설명해 주는 것은 마르크스 사상이 아니라, 바로 이 매우 오래된 '분신' 개념이다. 마오쩌뚱이 1976년에 죽은 이래로 그의 시신은 수백만 명의 추앙자들에게 공개되어 숭배받아왔다. 유물론을 기초로 하는 공산주의 국가의 수장으로서, 스탈린 개인 숭배를 피하기 위해 50년대에 당의 모든 동지들을 화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의 시체에 부패 방지 유약이 발라지고, 군중의 숭배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보다 좀더 잔인한 모순이 있었으니, 마오쩌뚱의 시체를 썩지 않게하여 그의 사상의 불멸성을 상징하고자 했던 당의 의도에 따라 모든 냉동 기술이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신 앞에 줄을 이룬 수많은 숭배자들의 눈앞에 부패의 흔적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다는 점이다. 상징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중국에서 이런 부패의 징조는, 유약을 바른 시체의 해체 과정뿐 아니라 노인정치 체제의 해체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셈이 되었다.
1989년에 자유의 여신을 구경하기 위해 군중이 모여들었던 곳이 바로 마오쩌뚱의 기념관이 세워져 있는 천안문이었다는 사실도 역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저우언라이 수상은 마오쩌뚱이 죽기 몇 달 전에 사망하면서,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도록 단단히 일렀다. 그러나 그의 정적들 편에서 볼 때는 이것이 자신들에 대한 마지막 모욕일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청을 따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어쩌면 저우라이는 이 점에 있어서 마오쩌뚱보다 더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암으로 죽어가고 있던 1976년에 그는 자신의 시신이 훼손당하는 일이 생길까봐 고심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일들을 홍위병들이 서슴지 않고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제국시대의 중국에서처럼 공산주의 중국에서도 적에게 복수하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시신을 훼손하는 일이었다. 체제의 변화를 넘어 살아남는 전통적 사고 방식의 영원성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해 주는 예는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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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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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 편지 11 / 고정희
어제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끄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미움을 지워내고 희망을 지워내고 매일 밤 그이 문에 당도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러나 그이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거나 무심한 무덤 가의 잡풀 같은 열쇠 구멍 사이로 나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리고 그리다 돌아서면 그뿐, 문안에는 그가 잠들어 있고 문밖에는 내가 서 있으므로 말없는 어둠이 걸어나와 싸리꽃 울타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어디선가 모든 길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처음으로 하늘에게 술 한잔 권했습니다 하늘이 내게도 술 한잔 권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때 하늘에서 술비가 내렸습니다 술비 술술 내려 강물 이루니 아뿔사, 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아마 내일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아마 모레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열리지 않는 것은 문이 아니니 닫힌 문으로 나는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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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한국사 |
우리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 이이화
제2부 우리 민족의 뿌리
2. 구석기시대, 인간사회의 첫 출발
곧선사람들은 왜 동굴에서 살았을까
어느 추운날 오후였다. 너댓 명의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동굴 속에 둘러앉아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동굴 안에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지만 안쪽에 자리잡은 화덕에서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화덕 밑에는 자갈을 깔아놓았고 옆에도 원을 그린 듯이 돌을 벌려놓아서 불이 바깥쪽으로 번지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던 한 여자가 마른 참나뭇가지와 솔가지를 화덕에 올려놓았다. 불은 탁탁 소리를 내며 연신 가는 연기를 피워올렸고 굴 안을 덥혀주었다. 갑자기 동굴 바깥이 시끌벅적해졌다. 한 어린이가 얼른 일어나 뛰어나가자 나머지 사람들도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갔다. 서너 명의 사내들이 사슴 한 마리를 긴 막대에 매달고 으쓱대며 돌아왔다. 사내들은 능숙한 솜씨로 사슴 가죽을 멋겨내고 머리통과 다리를 떼어냈다. 떼어낸 부위를 긴 막대에 매달아 바깥에 피워놓은 화덕 위에 올려놓고 구웠다. 남자들의 손에는 돌로 된 주먹도끼와 찍개 따위가 쥐어져 있었다. 이 도구들은 내리치거나 때려내서 만든 것이다. 내리쳐서 만든 주먹도끼는 한번 내리친 뒤에 더 이상 다듬지 않았거나 한두 군데 더 때려내서 만든 것이다. 때려내서 만든 찍개는 돌덩어리의 한두 곳을 더 때려내 날을 세웠다.
석기들은 널려 있는 돌덩이를 두들기고 조금 손질해서 사용하는 것이어서 일정한 규격이나 형식이 없다. 이것을 뗀석기라고 부른다. 이것은 구석기시대 초기에 사용한 것들이다. 이런 도구로는 사슴의 다리와 머리를 잘라내는 데에 마무리 숙련되었을지라도 꽤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한 사람은 계속 고기를 꿴 막대를 돌렸다. 고루 익게 하려는 것이다. 고기가 다 익자 돌칼로 떼어 고루 나누어주었다. 이들 옆에는 돌을 칡넝쿨이나 동물 힘줄로 막대기에 묶은 돌도끼와 돌찍개가 놓여 있었다. 이 무기로 사슴을 잡은 것이다. 구운 고기를 뜯는 이들의 모습은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눈두덩이는 유난히 두드러졌고 턱이 앞쪽으로 길게 튀어나왔으며 눈은 둥그스름했다. 털만 좀 적을 뿐 영락없는 원숭이였다. 다만 앞선 시기의 손쓴사람보다 머리통 부피가 3분의 1가량 더 크고 키가 약간 더 클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람보다는 머리통이나 체구가 훨씬 작았다. 옷차림도 형편없었다. 추운 저녁 무렵인데도 걸친 것이라고는 겨우 아래를 가린 가죽조각뿐이었다. 여자들의 젖가슴도 덜렁거렸다.
이 시기에 남자들은 사냥, 여자들은 열매따기에 나섰다. 아이가 딸린 여자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다가 불을 지피기도 하고 먹다 남은 고기나 열매를정리하기도 한다. 밤이 되면 동굴에 모여 불을 쬐고 잡담을 늘어놓는다. 사냥을 못하거나 열매가 떨어지면 굶기 일쑤이다. 더욱이 장마가 지거나 심한 가뭄이 들면 더 큰 굶주림이 닥쳐온다. 이것이 구석기시대 초기의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구석기시대란 손쓴사람에서 곧선사람으로 이어지는 수백만 년의 기간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 시대 사람들의 생활사를 석기가 증명할 뿐이어서 '석기시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실 '초기 인간의 시대'라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이들은 도구를 만들어 씀으로써 자연의 예속에서 벗어났고, 동물의 상태에서 인간사회를 만들어나갔다. 차츰 돌을 한 방향으로 떼어내 외날찍개나 칼을 만들었고, 나아가 양쪽으로 떼어내 양쪽 날이 선 돌칼, 찍개, 자르개, 긁개 따위를 만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찍개-주먹도끼-긁개-찌르개 순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전에 단순한 차돌로 짐승을 잡거나 조금 날카로운 자연석을 공격용으로 쓰던 것과 비교해 보면 꽤 발전된 것이다. 곧선사람의 구석기문화 추적은 먹다 버린 짐승뼈, 쓰다 남긴 물건, 살림터, 그리고 이것들을 덮은 퇴적물을 분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 발굴은 8.15이후 활발해졌다. 이에 따라 많은 유적을 발굴했는데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빌딩 공사나 댐 공사, 도로 공사 덕분이었다. 맨먼저 평양시 상원군에 있는 검은모루유적이 발견되었고, 뒤이어 40여 군데가 발굴 조사되었다. 그런데도 곧선사람의 화석을 발견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은 연대 측정값으로 따져 동굴의 경우, 상원 검은모루동굴이 60만에서40만 년 전, 단양 금굴 아래층이 70만 년 전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데 유적의 경우, 한탄강가의 연천군 적곡리와 금강가의 공주시 석장리는 28만년 전으로 나타난다. 또 단양 금굴의 위층이 18만 년 전, 순천(평남)의 밀전동굴이 16만 년 전으로 나타난다. 그의 옛날 우리와 같은 문화권이었던 중국 요령성 본계현의 묘후산유적은 33만 년에서 16만 년 전 사이, 요령성 영구현 금우산유적은 31만 년에서 16만 년 전 쯤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곧선사람에서 슬기사람이 등장하기까지 구석기시대 전반에 걸친 유적이 고루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발굴된 석기들이 다른 지역의 구석기와 같은 흐름을 지니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석기들은 겉면을 떼어 낸 것이라 울퉁불퉁하면서 투박하다. 다만 쥐기에 편하도록 조금 두들겨 다듬었고 약간 날을 세웠다. 이것들로 땅을 파거나 나무나 뼈 간은 것을 찍거나 고기를 잘랐다. 그 이전과 비교하면 이 정도의 수준도 엄청난 발전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동굴에서 살았다. 이들의 살림터로 산 쪽의 동굴과 강 쪽의 한데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동굴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여러 동굴에서는 원숭이, 코뿔이, 하이에나, 코끼리 등의 동물뼈 화석이 말이나 소의 화석과 함께 섞여 나온다. 더운 기후와 삼림지대, 습기안 지대와 토원지대에 사는 동물 종류가 대부분이고, 지금 이땅에서 없어진 종류도 많다. 이것을 보면 당시의 기후가 지금보다 훨씬 더웠고 풀과 숲이 무성해서 열매나 풀뿌리가 풍부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동물화석이 많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또 이곳의 사람들이 주로 사냥으로 먹거리를 구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화석 중에 사슴이 가장 많다. 그 당시에 호랑이 같은 맹수는 쉽게 잡을 수 없었고, 소나 닭이나 개는 아직 기르지 않았다. 예전 우리나라의 사냥 대상물은 새 종류로는 꿩, 짐승으로는 멧돼지와 사슴이었다. 이는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동굴이 산 쪽에 있다는 것은 사나운 짐승을 피하기 위한 지형적 이점을 살린 것이다. 지금도 원숭이나 양들은 절벽아래에 잠자리를 마련한다. 당시에는 맹수들이 우글거렸을테고, 이런 조건 속에서 무기도 조약했으니 안전한 곳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다. 동굴은 햇볕이 잘 드는 곳도 하나의 선택 조건이었다. 일부는 큰 바위 그늘 아래를 주거지로 잡기도 하였으나 아마 비바람이 불 때나 더울 때 임시로 이용 했을 것이다. 동굴에는 습기가 잘차서 이것을 제거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래서 하루종일 불을 피웠는데 불은 집안일을 담당하는 여자의 몫이었다. 여자는 보통의 경우 사냥에 잘 나서지 않는다. 불은 추위를 막고 음식을 익히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맹수를 막는 데에도 한몫을 했다. 호랑이는 불을 무서워한다. 불을 피우는 곳은 주로 동굴의 안쪽이나 중간 지점이었다. 화덕 자리에는 자갈을 깔았다. 불이 번지는 것을 막고 또 자갈을 덥혀 온기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이때의 땔감으로는 구석기 중기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동굴에서 발견된 소나무, 참나무, 벗나무, 보리수나무, 측백나무, 주목 등 다양하다. 그런데 이중에 가장 많이 땐 것이 소나무와 참나무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한다. 우리나라 땅에서 침엽수의 대표는 소나무이고 활엽수의 대표는 참나무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참나무는 땔감으로 좋다. 모질이 단단하고 불이 잘 붙기 때문이다. 참나무숯은 연기가 적게 나고 온도가 높아 고급 연료로 이용된다. 근세 조선시대에 궁중에서는 연기를 내지 않으려고 나무를 때지 않고 참나무숯을 이용했다. 이미 동굴생활에서 참나무의 효용성을 경험으로 알아냈을 것이다.
동굴을 벗어나 강가로
우리나라 한데 유적으로 대표되는 석장리와 전곡리는 강가의 낮은 언덕이나 낮은 산에 살림터를 잡았다. 석장리유적은 바로 강가에 붙어 있고, 전고리유적 터는 낮은 산이었다(지금은 깎아내려 들판처럼 되어 있다). 이곳들은 산성 토양이어서 짐승화석은 발견되지 않으나 많은 석기들이 쏟아져나왔다. 주먹도끼, 자르개, 긁개, 찌르개, 돌망치 등과 여러 날을 지닌 석기들이다. 이중에서 짐승의 털을 벗기거나 가죽을 벗기는 데에 썼을 긁개가 반을 차지하는데 차돌과 개차돌 같은 단단한 돌을 이용해 만든 것이었다. 이는 초기 구석기의 것보다 훨씬 진보된 도구이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이 석기들을 가지고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고 조리를 하였으며, 또 다른 도구를 만드는 데에도 사용하였다. 이들은 창을 써서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았다. 창으로 사냥을 하는 것은 동굴생활에서도 있었다. 그러나 물고기를 창으로 잡는 것은 한데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먼저였을 것이다. 창을 만들려면 나무와 끈이 필요하다. 나무로 막대를 만든 때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으나 끈을 이용하는 데에는 새로운 지혜가 요구되었다. 사람들은 고기를 자르면서 힘줄이 질기다는 사실을 알아내 물건을 묶을 때 힘줄을 말려서 썼다. 산에서 풀을 뜯으면서 칡뿌리가 질기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이를 끈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더욱이 칡뿌리는 산에 널려 있었으니 손쉽게 이용했을 것이다. 강가의 살림터는 산의 동굴과는 달리 물과 물고기를 풍부하게 얻을 수 있는 생활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동굴이나 한데생활에서 어린이들은 어떻게 자랐을까? 흙굴속에 사는 작은 동물 망부수는 뱀을 잡아와 새끼와 먹이다툼을 한다. 온 식구가 시간만 나면 놀이에 열중한다. 놀이는 구성원 사이의 유대를 강화하고 혈족의 소속감을 높인다. 사자새끼는 끊임없이 장난과 놀이를 한다. 어미도 어린새끼와 함께 놀이를 벌인다. 이를 통해 무리의 생존 방법과 관습을 익히는 것이다.이는 모두 사회성의 한 표현이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1800년 남부 프랑스으 생 세랭 마을에서 숲속에서만 자란 열두 살쯤 되는 어린이를 발견했다. 이 소년은 인간사회와 단절된 채로 살아와서 동물에 가까웠다. 동물처럼 기어다녔고 옷을 입혀주어도 찢어버렸다. 이 소년은 30년 동안 인간생활에 필요한 교욱을 받았으나 겨우 몇 마디의 말만 익혔을 뿐 숫자도 셀 줄 몰랐다. 어릴적부터 인간의 의사와 행위가 소통되는 사회성을 저버린 결과였다. 적어도 구석기시대의 어린이들은 특정 구성원의 재산이었다. 그러면서 후손을 잇는 한 가족의 핏줄이었다. 크든 작든 이때의 어린이들은 무리사회에서 어른들에게 사냥을 배우고 조리 솜씨를 익히며 자연의 원리를 배웠다. 산과 들과 물에서 인간들이 어울러 함께 살아가는 사회성을 키웠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더욱 새로운 지헤를 터득하고 진화를 해나갔다.
슬기사람과 다양해진 석기
지금부터 4만 년 전쯤에 슬기사람이 나타나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슬기사람은 마지막 간빙기와 마지막 빙하기 전반에 지구에 생존한 이유이다. 슬기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일정한 장소에 묻었는데, 이때 석기와 뼈연모를 껴묻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적 조사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구석기시대 후기의 것으로 보이는 유적에서 석기를 비롯해 사람들이 쓰던 치레나 짐승뼈가 같이 발견되었다. 어떤 무덤에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묻혀 있기도 했다. 주검과 함께 부장품이 나왔다는 것은 이들이 인간의 죽음을 두고 다른 세상으로 갔다는 의식을 가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여러 사람이 함께 묻혀 있는 것은 순장이라기보다는 말무덤(여러 구의 시체를 한곳에 묻은 무덤)이었을 것이다. 이때의 장례의식이 어떠했는지 추측할 길이 없지만, 아마 시체를 묻기 전에 먼저 나무 간은 데에 걸어놓앗을 것이다. 장례가 엄숙하게 치러지는 시대에도 염병 따위 무서운 병에 걸리면 시체를 나무에 걸어놓는다. 그러면 까마귀나 까치가 뜯어먹어 뼈만 남는다. 아니면 시간이 흘러 바람에 쓸리고 말라비틀어져 뼈만 남기도 한다. 이를 풍장이라고 하여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여겼다. 슬기사람들도 이처럼 주검을 내걸고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여겼을 것이다. 인간의 의례 중에서 혼례와 함께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장례의식이 이때부터 등장했다. 이때의 살림터는 동굴보다 바닷가나 강가에서 더 많이 발전된다. 굴포리(바닷가), 석장리(강가)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이 물가에 몰려 살았다면 틀림없이 배를 이용했을 것이다. 비록 통나무배나 띠배일지라도 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고 낚시질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날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이때의 유적은 우리나라 곳곳에 골고루 분포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바로 사람의 숫자가 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특히 석기는 더욱 다양해졌다. 주먹도끼나 찍개를 여전히 사용하면서 긁개, 찌르개, 톱니날 같은 연장을 더욱 예리하게 다듬고 단단하게 만들어 썼다. 석기가 다양해진 것은 자연 조건과 생활 환경이 다른 데서 오는 문화의 지역화 현상이다.
석기만 쓴 것이 아니라 이제는 뼈를 여러모로 다듬어 생활용구로 사용했다. 그리하여 다음 세대에 뼈와 뿔의 문화를 전수했다. 이들은 또 몸에 치장을 하기 시작했다. 몸에 물감을 발라 아름답게 보이거나 위엄있게 보이려 했다. 물감은 식물성뿐만 아니라 광물을 돌에 빻아 갈아서 쓰기도 했다. 물감을 먼저 몸에 칠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이는 어떤 신분은 나타내기도 하고 위의를 보이려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의 하나였다. 물감을 몸에 칠하는 풍습은 오늘날까지도 일부 남아 있는 부족의 추장들에게서 볼 수 있다. 무리사회의 지도자나 그 배우자는 늘 치장을 했으며,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사람들은 얼굴이나 몸에 물감을 칠했다. 이때에 와서사람들은 꽃에도 관심을 가졌다. 무덤에 다른 부장품과 함께 꽃을 놓았던 것으로 보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꽃을 영혼이 담긴 것으로 여겨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그후 무당들이 꽃을 이용해 영혼을 부르고 또 무덤앞에 꽃을 장식하는 풍습으로 이어져왔다. 이때에는 채집에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열매를 따고 나물을 뜯고 풀뿌리를 캐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씨앗을 뿌리고 짐승을 기르는 단계직전에 채집에도 일정한 변화를 보였다. 물론 여러 식물들의 맛을 해아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떄부터 불을 생산에 이용하였다. 늦가을이나 봄에 산이나 들판에 불을 지르면 시든 풀은 타고 새풀이 자라난다.지금도 아프리카의 부족들은 새 풀을 뜯으러 몰려오는 동물들을 잡기 위해 산과 들에 불을 지른다. 산불이 나면 지표 위 40센티미터까지는 섭씨 600에서 800도, 심하면 15000도에 이르는 불길이 숲을 초토화시킨다. 그뿐 아니라 다른 식물은 물론 소나무 뿌리에 있는 인을 흡수하도록 도와주는 근균을 비롯하여 곰팡이, 버섯 따위도 없어지고 벌레와 같은 미생물도 죽는다. 생태가 파괴되어 동물도 사라진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환경 파괴의 요인을 목전의 문제 때문에 생각지 않았고, 생각해낼 지혜도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대는 말할 것도 없고 1950년대까지도 화전민들이 산불을 질렀다. 산불이 한번 지나가고 나면 고사리나 더덕이 잘 자라난다. 화전민들은 이를 노리는 것이다. 슬긴사람들은 식물의 번식 외에 짐승몰이에도 산불이나 들불이 편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구석기시대 중기의 슬기사람들은 60만여 년 이상을 동굴에서 주로 살아오며 슬기슬기사람들에게 새로운 유산을 물려주었다. 구석기시대 초기에는 외날찍개, 양날찍개, 주먹 도끼 따위 찍개류와 도끼류를 주로 사용했는데 중기에는 톱니날 석기, 긁개, 찌르개 따위 작은 연모류도 많이 만들었다.
움집을 지은 슬기슬기사람
이제 구석기시대의 마지막 단계를 풀어갈 차례이다. 4만에서 1만 년 전쯤의 모습이다. 이때의 사람들을 슬기사람과 구별하여 슬기슬기사람이라 부르는데, 생김새는 지금의 우리와 거의 같았다. 이들의 생활에서 맨먼저 나타난 변화는 집을 짓고 살았다는 점이다. 비록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끊임없이 이동을 하면서도 임시로 자고 쉴 곳을 마련해야 했다. 더욱이 이 무렵에는 지구에 엄청난 추위가 닥쳐왔다. 집터는 석장리의 경우와 같이 강가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땅을 조금 파고 지은 움집의 모습이다. 땅을 1미터 정도 파고 기둥을 지붕 쪽으로 엇비슷하게 세웠다. 움집은 대개 서까래와 대들보를 쓰지 않고 지었다. 집 둘레는 네모진 것도 있고 둥근 것도 있는데 타원형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기둥은 네개 이상 세웠고 출입문은 양쪽으로 낸 것도 있다. 방 넓이는 약 10평방미터였으며 화덕은 대개 방 가운데에 두었으나 출입문 바깥쪽에 두기도 했다. 화덕 아래에는 물론 자갈을 깔아놓았다. 넓이와 살림도구로 따져보아 너댓명이 살 만한 공간이다. 집의 뼈대는 나무와 짐승뼈로 받쳤고, 지붕은 풀과 나뭇가지로 덮었다. 땅을 파고 살림터를 만들었다는 것은 땅속이 따뜻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나무와 뼈와 풀을 이용하여 집을 지었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에 큰 진전이었다. 집을 짓게 되자 동굴은 거의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석장리에서 발견된 나무숯의 연대를 추적해본 결과 약 2만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이 집터에서 특이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곧 붉은 흙을 살림터에 뿌리거나 깔아 놓았다는 점이다. 이런현상은 한두 곳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뒤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에도 주거지가 대부분 강가의 황토지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왜 황토를 뿌렸을까? 왜 황토지대에서 살았을까? 양어장에서는 대부분 황토를 바닥에 깔아준다. 또 잉어 따위의 물고기가 상처를 입으면 황토를 갠 물로 치료하기도 한다. 그러면 물고기가 잘 낫고 잘 자란다고 한다. 자궁암에 걸린 중년여성이 온통 황토로 지은 집에 살면서 치료를 하고 황토를 탄 물을 마셨더니 나았다고 전한다. 황토를 이용한 치료법은 전래로 내려온 민간요법이다.
옛사람들은 거른 황토물은 "땅에서 나는 장물"이라는 뜻으로 지장수라 부르며 해독재로 사용했다. 황토는 입자가 미세하여 이물질 흡수력이 높고 철 성분과 산소 함량이 많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황토는 해독 작용을 하고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한다. 우리의 성인들은 토제나 산신제를 지낼 때 바닥에 황토를 깔았다. 예전 어린이들은 배가 고프면 곧잘 황토를 먹어댔다. 오늘낭 논에 개토를 할 때에도 황토를 쓴다. 황토는 구석기시대부터 생활에 이용되어왔다. 사람들은 차츰 단순히 먹고 살아가는 수준에서 자연을 어떻게 이용하고 또 극복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체득해나갔다. 물론 이들이 황토의 정확한 효용성을 알았을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이때에 와서 도구는 그전보다 몇 배나 많이 만들어 썼다. 우리나라 땅에서 발견된 것만 따져도 100여 종이 넘는다. 아직도 간석기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좀더 날카로운 돌칼을 비롯해서 밀개, 새기개, 뚜르개, 찌르개, 긁개를 널리 사용했다. 돌의 직접떼기와 간접떼기의 수법에서 발전하여 여러 번 떼어내 이용 목적에 맞도록 만들어낸 도구들이다. 그전에 단순하게 돌을 내리쳐서 석기를 만들다가 새오운 수법을 알아낸 것이다. 때리기에서는 대고 때릴 적에는 깨뜨리려는 돌에 끌과 같은 물체를 대고 때려내서 돌 모양을 모양나게 쪼갠다. 이렇게 해서 얻은 가지돌은 더 쓸모 있는 모양이 된다. 뜯기에서는 쪼개낸 가지돌은 더 쓸모 있는 모양이 된다. 뜯기에서는 쪼개낸 가지돌을 가공하는데, 단단한 물체를 눌러서 그 표면을 뜯어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형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도구를 더욱 정밀하게 만들 수 있었다.
긁개는 짐승가죽을 벗기는 데 썼고 밀개는 짐승의 털을 미는 데 썼다. 이런 도구는 물건을 자르고 다듬을 때 좀더 정교하게 쓰였다. 거기에다가 단단한 돌로 돌창을 만들고 멀리 던지는 투창기도 썼다. 1만 2천 년 전쯤의 작살도 발견되었는데 물고기를 맨손이나 그물이 아닌 도구로 잡았음을 알 수 있다. 돌창과 투창기와 작살은 초보적인 단계였으나 짐승을 손쉽게 잡을 수 있었다. 도구를 사용해 음식을 갈아서 먹기도 했다. 또 운모나 석영같은 단단한 돌을 골라 물건을 자르고 뚫고 새기는 데 사용했다. 불을 만들어내는 부싯돌도 사용했다. 사람들은 돌을 이용해 많은 도구를 만드는 지혜를 발휘했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짐승뼈와 물고기뼈, 그리고 뿔을 도구로 이용하기도 했다. 이전 시기의 유물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뼈로 만든 바늘송곳, 창던지개, 창끝찌르개 따위가 많이 나온다. 단추 모양의 뼈유물과 구멍 뚫린 뼈바늘도 있다. 작은 바늘에 구멍을 뜷는 것은 여간 정교한 솜씨가 아니어서는 불가능하다. 바늘은 옷을 지을 때와 그물을 이을 때 사용되었다. 단추 모양의 뼈유물은 뼈를 갈았다는 증거이다. 실제로 뼈와 뿔과 상아를 갈아서 만든 도구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런 것을 갈았다는 사실은 간석기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제 두들기거나 떼기에서 '갈아서' 쓰는 시대로 접어 들고 있었다.
정밀한 도구들은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어놓았다. 그중에서도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을 들 수 있다. 오늘날 발견된 뼈유물 가운데 털가죽옷을 입은 여인의 조각이 있다. 그전에는 치부를 가리는 정도에서 나뭇잎이나 가죽 조각을 옷으로 대용했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옷다운 옷을 입었을 것이다. 옷의 재료는 대부분 가죽이었다. 짐승을 잡은 뒤 가죽을 가공할 때 좋고 나쁜 것을 가릴 줄도 알았을 것이다. 호랑이 가죽이 따뜻하고 부드럽다든지, 사슴 가죽이 몸에 알맞는다든지, 원시사회는 평등사회였으니 이때쯤에 옷으로 신분의 차이를 나타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노인과 어린이, 남자와 여자는 구별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무렵에 만들어진 조각에서 여인의 배와 젖가슴과 엉덩이를 부각시킨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신체 구조의 특징에 관심을 보였다는 증거가 된다. 이는 옷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무렵에는 한반도에 엄청난 추위가 또 한차례 몰아닥쳤다.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서도 옷의 효용성은 크게 부각되었다. 발명은 필요의 산물이니까. 그러나 날씨가 더워도 옷을 벗지 않는 것은 문명의 산물이다. 부끄러움을 가르친 탓이다.
후빙기의 첫머리, 중석기시대
이렇게 한발 한발 걸어오면서 어느덧 후빙기의 첫머리인 1만 년 전쯤의 시기로 내려왔다. 세계적으로는 정착농업이 시작되었다. 이때를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중간으로 보아 중석기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때에 와서는 산짐승이나 들짐승의 사냥, 열매나 풀뿌리의 채취보다 물고기잡이의 비중이 더 커졌다. 강이나 냇물에 널려 있는 물고기를 잡는 것이 위험도 덜하고 손쉽기도 했다. 그때는 인구도 적어서 물고기가 차고 넘쳤다. 한번 물고기 맛을 본 사람들은 짐승고기에서 차츰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돌과 뼈를 이용한 도구를 더욱 발전시켜 물고기잡이에 열을 올렸다. 또 짐승을 잡아다 집에서 기르게 되었다. 어쩌다가 산채로 잡아온 짐승을 우리에 넣고 기르다가 필요할 때에 잡아먹어 보았다. 여간 편리하지 않았다. 인간은 모방의 천재이고 호기심으로 뭉쳐 있다. 이를 경험한 사람들은 곧 짐승을 잡아 기르고 새끼도 키웠다. 이렇게 집에서 짐승을 기르다보니 사냥 나가는 일이 적어 졌고 산짐승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이제 목축을 하게 된 것이다. 야생 곡물도 재배하기 시작했다. 산이나 들판에 자라는 보리, 밀, 조 같은 곡식을 우연히 맛보고 나서 열매나 풀뿌리보다 근기가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처음에는 주워다 먹었다. 그러다가 곡식이 일정한 시기에 싹을 틔우고 자라는 것을 본 사람들은 씨앗을 심어보았다. 놀랍게도 한 알의 씨앗에서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일정한 터전을 잡아 봄에 씨앗을 뿌리고 가을이면 거둬들이는 주기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정착농업의 시작이다. 가축 사육과 곡물 재배는 정착생활을 촉진시켰다.
사람들은 움집이나 막집에 살면서 농사일에 전념했다. 따라서 긴 세월 인류의 거주지 역할을 했던 동굴은 쓸모가 없어졌다. 이즈음 활과 화살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실을 만들고 나무를 굽힐 줄도 알고 멀리 던지는 기술도 늘어났으니 역학을 이용한 활의 발명은 필연적이었다. 활줄은 동물의 힘줄이었고 활의 재료는 나무였으며, 화살촉은 뾰족하게 다듬은 돌이었다. 이제 무기다운 무기를 만들어 쓰게 된 것이다. 이 무기로는 짐승뿐만 아니라 공중에 날아 다니는 새도 잡을 수 있었다. 활은 정착농업 이후 잉여생산물을 차지하기 위한 약탈전쟁이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정복전쟁에서 무수한 살육을 자행하는 무기가 되었다. 이 여명기에 우리 땅에 살던 사람들은 얼마나 되었을까? 청동기시대에 일어난 고조선의 터전은 지금의 요동 일대를 포함한다. 한반도와 요동지방을 합하면 프랑스의 영역과 비슷하다. 이 시기에 프랑스 인구는 약 5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 가설에 따라 우리 고대민족을 여기에 견주어보는 것도 그리 틀린 견해는 아닐 것이다. 따지고 보면 프랑스 민족과 우리 민족은 발생 시기도 비슷하다. 아프리카에서 원인들이 퍼져나갈 때 먼저 유럽과 아시아로 뻗어갔다는 학설을 믿는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또 인류의 발생설을 뒷받침하는 북경원인이나 유럽원인의 출현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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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1. 달리는 부처 기사
사랑의 동전함
택시 안에 작은 동전함이 놓여 있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된다. 주위의 불우한 이웃들을 돕기 위한 사랑의 모금함이다. 대부분 `사랑의 교통봉사대`나 어느 종교단체 기사 여러분들이 좋은 일에 스기 위해 비치한 것이리라. 그 동전함을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이 가고 1,2천원 이라도 꼭 넣게 된다. 기사분들의 따뜻한 마음이 내게로 전해오는 탓인가, 갑자기 마음이 환해지고 넉넉해진다. 비록 얼마되지는 않지만 이 작은 정성이 모여 소년.소녀 가장을 돕고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이나 불쌍한 행려자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주어서 즐겁고 받아서 기쁜 사랑인것이다.
오래 전의 일이다. 그날도 평소처럼 제소자를 만나기 위해 교도소에 가려고 막 나서던 참이었다. 그런데 행색이 초라한 할머니 한 분이 나를 찾아와 꼭 뵙기를 청하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가보았더니,
“스님, 어려운 일 하시는데 얼마나 힘이 드십니까? 이건 제가 그동안 한 푼 두 푼 조금씩 모아 놓은 것인데...,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좋은 일 하시는데 꼭 보태 쓰도록 하십시오.” 하면서 묵직한 빨간 돼지 저금통 하나를 내 두 손에 꼭 쥐어 주시는 것이다. 열어보니 그 속엔 동자승의 이마처럼 하얗고 반짝반짝 빛나는 5백 원짜리 동전이 한가득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모아둔 것이 어느새 15만 원이나 됐답니다. 밤새 생각하다가 좋은 일 하시는 스님이 쓰시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가져온 것입니다.”
그 할머니는 노점에서 사과를 파는 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는 넉넉지 않은 살림인데도 자신보다도 더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나를 찾아오신 거였다. 그분의 까칠한 손마디를 보고 있노라니 내 마음이 뭉클해졌다. 차마 그 마음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보살님의 마음을 잘 알겠습니다. 꼭 좋은 일에 쓰지요.”
그 저금통을 받아들자 마음이 편해졌다. 어려운 생활 가운데서도 복을 지으며 살고자 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부디 보답을 받게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가섭이란 이가 있었다. 하루는 그가 숲속에서 오랫동안 명상을 하다 돌아와보니 부처님과 제자들이 모두 보이지 않았다. 어느 부유한 장자의 집에 초대되어 간 것이었다. 뒤늦게 가섭은 그 장자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문지기가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저의 주인께서 부처님과 제자들께서 공양을 다 마치실 때까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 하셨습니다.” 문 앞에서 문지기와 다툴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가난하나 마음이 깨끗한 이의 공양을 받아 그로 하여금 공덕을 쌓게 하자.”
이렇게 생각하고 가섭은 그 장자의 집을 떠났다. 길을 가던 중 상처가 곪아 진물이 나오고, 손발이 썩어가는 어느 흉측한 문둥병 여인이 길 한모퉁이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됐다. 그 여인은 길에 앉아 동냥해온 죽 한 사발로 점심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그래! 저 여인의 시주를 받도록 하자.` 가섭은 매우 자비한 눈으로 그 여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여인이여, 그 죽을 내게 주오!` 여인은 가섭의 이같은 말에 너무나 놀랍고 황송했다. 사람들은 아무도 더럽고 추한여인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기쁜 마음으로 그 죽을 가섭의 바리때에 모두 부어 주었다. 그때 마침 파리 한 마리가 죽그룻 속에 빠졌다. 여인이 다급한 마음에 파리를 건져내려고 하다가 그만 썩어가는 손가락 하나를 댕강, 죽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여인은 `이분은 내가 불쌍해서 죽을 받기는 하겠지만 먹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섭은 눈 하나 찡그리지 않고 죽을 단번에 다 마셨다. 놀란 여인은 또 생각했다. `지금 죽을 다 마시긴 했지만 반드시 다른 맛있는 음식으로 입가심을 할 것이다.` 가섭은 여인의 마음을 읽고는 죽그릇을 내려 놓으며, `나는 이것으로 오늘 공양은 족하오. 내일 아침 식사 때까지 결코 아무것도 먹지 않을 것이오.`라고 했다. 이 말을 듣자 여인은 매우 기뻤다. “존자님! 고맙습니다.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공덕을 쌓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깨끗한 마음을 내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여인은 숨지자 마자 그 공덕의 힘으로 도솔천에 태어나게 되었다.
자신이 지은 공덕은 반드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법이다. 가난하게 살아도 자비로운 마음으로 베풀면 이생에서 받지 못하더라도 다음 생에는 꼭 복이 돌아오게 된다. 인과의 법칙이란 지은 바대로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기사분 중에 `아라아빠`가 있다. 그는 늘 봉사를 하며 살아간다. 자신도 빚이 있는 어려운 처지에 남을 위한 봉사란 실로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그는 셋방에 살면서 한 무기수를 위해 3년간 매달 3만원씩 적금을 들어 준 적이 있다. 오갈 데 없는 출소자에게 생활 기반을 마려해 주기 위해서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씨이다.
`가난하면서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있고, 부유하면서도 인색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이 행하는 보시는, 부유한 사람이 행하는 보시의 천배나 가치가 있다.`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사랑의 모금함을 달고 달리는 택시 기사분들이 좀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한량없이 기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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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첫째 묶음 : 고독을 위한 의자
고독을 위한 의자
이는 어느 날 쓴 내 일기의 한 토막이다.
같은 스물네 시간이라도 옛날에 비해 훨씬 바삐 쪼개 쓰며, 숨차고 복잡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우리들은 분주한 삶에 정신없이 떠밀려 살다보면 혼자 있는 시감의 고독과 고요를 체험하기 어려운 것 같다. 꼭 시간이 없어서도 아닐텐데 우리는 어느새 번잡한 삶에 중독이 되어 진정 홀로 있음의 고독을 갈망하거나 맛들일 겨를도 없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하루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아니면 한달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홀로 있는 시간을 우리는 일부러라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자유롭고도 창조적인 쉼의 시간을 통해서만 인간의 타성의 늪에서 빠져나와 새로워질 수 있고, 자기 자신을 재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 몇주 동안 캐나다를 여행할 때 나는 해질녘에 텅 빈 성당에서 혼자 앉아 기도하는 이들의 고즈넉한 모습도 여러 번 보았고, 공원이나 호숫가의 벤취에 조용히 혼자 앉아 있거나 산책하는 이들의 모습도 눈여겨 보았었다. 둘이 있는 모습도 다정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혼자 있는 모습 또한 멋져 보였다. 그들에게선 왠지 구도자의 고독한 향기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혼자시군요' 하고 다가가서 말을 건네면 은은한 미소와 함께 깊이 있고 진지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 줄 것만 같았다.
'수녀님, 저는 등산이나 산책을 할 때면 혼자 하는 것이 더 마음에 듭니다. 좀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라고 내게 편지를 보냈던 어느 친지의 말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다.
요즘은 나도 우리 수녀원의 넓은 정원과 동산을 자주 산책하는데, 둘이나 셋이 다닐 때도 있지만 혼자 다니는 때도 많다. 평소엔 그저 무심히 듣던 새소리나 종 소리도 더 의미 있게 들리고, 산책길에서 발견한 나뭇잎의 무늬, 꽃잎과 꽃술의 모양도 더 자세히 보이고, 심지어 내 옷에 묻은 얼룩, 마음의 얼룩도 혼자 있을 때는 더 잘 보인다. 비오는 날엔 연못에 떨어지는 빗방울 무늬, 눈 오는 날엔 바다에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고독한 산책은 얼마나 즐거운가.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빈 방에서 홀로 나를 만나는 시간 또한 행복하다. 김현승 시인의 표현대로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인 고독의 얼굴도 빈 방에선 더 가까이 보이고 , 마음 자리가 한결 밝고 투명해진다. 처음엔 듣기 거북했던 동료의 충고가 새삼 고맙게 생각되는 것도, 감정에 탐닉되지 않고 좀더 냉정한 눈으로 나 자신을 객관화시켜 볼 수 있는 것도 혼자 있을 때이다. 바람소리에 귀기울이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애틋한 헌신의 갈망을 키우는 것도, 좋은 생각을 좋은 결심으로 잘 매듭짓는 것도 혼자 있을 때이다. 일을 위한 쉼이 필요하고, 말을 위한 침묵이 필요하듯 여럿이 함께하는 삶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겐 혼자 있는 고독한 시간, 고독한 자리가 꼭 필요하다.
제자들과 함께 바쁘게 선교활동을 하시던 예수님도 어느 땐 군중들을 피해 '한적한 곳', '외딴 곳'으로 물러나 쉬셨다고 성서는 기술하고 있다.
일상생활의 분주함과 잡다한 취미 생활의 즐거움에서조차 가끔 물러나 참으로 침묵과 고독이 가능한 '외딴 곳','한적한 곳'으로 피해 갈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의 노력이 있을 때에야 우리는 내면의 깊은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피상적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던 삶과 이웃과의 관계를 좀더 새로운 깊이와 높이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숲속의 생활>을 쓴 헨리 소로우(H.Thoreau)의 글을 다시 읽어본다.
'나는 고독보다 더 사귀기 좋은 친구를 발견한 적이 없다. 우리는 대개 자신의 방에 파묻혀 있을 때보다도 밖에 나가 사람들 틈에 묻혀 있을 때 더 고독해 진다....고독은 자신과 친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공간의 마일 수에 의해 계산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교는 너무 값이 싸다. 우리는 서로 자주 만나기 때문에 서로에게 새로운 가치를 획득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만난다.... 내 집에는 의자가 세 개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우정을 위한 것이고, 셋째 것은 사교를 위한 것이다.'
우리도 이와 같이 늘상 고독을 첫 자리에 두고, 고독을 위해 비워 놓은 의자에 그를 자주 초대해서 깊이 사귀고 길들일수록 마음이 풍요로워지며 더 삶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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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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