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종교와 죽음 - 베르나르 포르
사후세계
죽은자들의 나라
사후세계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은 신석기 시대(대략 기원전 8000년에서 2000년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음을 고고학계의 발굴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태고의 시대에는 아직 죽음이 평등화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승에서의 불평등했던 삶이 사후 세계에서 수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장된다고 보았다. 동시대 이집트인과 조금 닮았으나 그리스인과는 다르게, 고대 중국인들은 죽음이란 것을 이승과의 철저한 단절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죽음은 인간 존재의 종말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잉태였다. 이 세상에서 복된 삶을 누렸던 이는 저 세상에서도 복을 누리게 되며, 이 땅에서 노예였던 이는 사후세계에서도 여전히 노예의 신분은 갖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기원전 16세기에서 11세기까지 존재했던 은나라 사람들의 무덤 속에서, 훼손된 노예들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어떤 무덤에서는 참수형을 당한 호위병과 노예 등 수백 명에 달하는 희생자들의 유골이 나오기도 했다. 권세 있는 귀족을 매장할 때는 생전에 그를 수행했던 사람들과 동물 등, 수많은 생명체를 함께 매장했던 것이다. 희쟁자들은 주로 전쟁포로였는데, 참수형을 내린 뒤에 매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국인들은 기원전 1000년부터, 천상 황제가 존재하며 귀족들의 영혼이 모여 천제의 궁정을 이룬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승에 사는 동안 귀족계급에 속했던 자들만이 천상 법정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밝고 섬세한 영적 실체인 혼을 소유하는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하늘나라로 가기까지의 길은 쉬운 길이 아니어서, 기원전 3세기의 한 시인은 영혼들이 여정에서 겪는 수많은 위험을 묘사해 놓고 았다. 한편 그 시대에는 중국 국경게 자리잡고 있다고 믿어졌던, 불사신들이 사는 극락의 고장에 관한 수 많은 신화들이 탄생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의 중국에선 죽음이란 산둥반도 동쪽에 있는 신성한 산인 태산 밑에 위치한다고 믿어졌던 지하세계 감옥에 갇히는 것을 의미했다. 이 산은 곧 지옥의 명부로 자리잡아 이곳에 산 자와 죽은 자의 명단이 보관되었으며, 이곳 관리들이 인간의 수명을 주관했다. 일본에서는 대부분 눈먼 여자들인 영매들이 오소르 산(공포의 산이라는 뜻), 다데야마 산, 혹은 아사마 산과 같이 저승의 문이라고 믿어지는 산에서 죽은 자들과 교통하기도 했다. 태고 시대부터 산은 죽은 자나 죽어 가는 이를 갖다버리는 장소였기 때문에 산이 혼령들의 거처라는 믿음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산은 또한 신의 몸이며, 또한 신 자체이다. 그래서 쌀과 재물의 신인 이나리 신은 동시에 산과 논, 물의 신인 동시에, 조상의 혼령들의 발현이기도 하다.
윤회
윤회의 개념은 인도의 베다교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바가다드기타에서 크리슈나 신은 아르주나에게 이렇게 선언한다 : "인간들이 낡은 옷을 벗어던지고 다른 새 옷을 입는 것처럼, 환생한 영혼도 낡은 육신을 벗고, 새로운 다른 육신 속으로 옮겨간다." 여러 문화권, 특히 중국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전생(혹은 환생)과 인도의 윤회는 그 개념에 차이가 있다. 전자는 죽은 자가 같은 집안에, 보통 자신의 손자 안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씨족적, 혹은 가문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환생의 개념은 인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인도에서의 윤회는 사람들이 벗어나려고 무진 애를 쓰는 끈질긴 순환구조로 인식된다. 인도의 윤회는 초기 불교의 전통 속에서 확고한 사실로 받아들여졌으며, 삶과 죽음의 순환을 일컫는 '삼사라'라는 용어로 지칭되었다. 삼사라가 무엇이냐고 묻는 인도-그리스의 왕 밀린다에게 현자 나가스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한 존재는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에서 죽습니다. 그 후에는 다른 곳에서 태어나서 다시 그곳에서 죽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삼사라입니다." 그러나 좀더 자세한 대답을 원했던 왕은 다시 묻는다. "나가스나여! 그렇다면 다시 태어난 자는 이전의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나가스나의 대답은 이랬다. "같은 사람도 다른 사람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개체와 우주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법칙인 다르마의 사슬은 계속 됩니다.하나의 존재가 사라짐과 동시에 다른 존재가 나타나는 것이지요." 밀린다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영혼은 존재하는가?" "절대진리의 눈으로 보면, 영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가스나여! 이 육신에서 다른 육신으로 옮겨가는 존재란 없단 말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뒤에 태어나는 자는 먼저 있었던 자의 죄로부터 해방되는가?"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다면, 그것은 그 죄로부터 해방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남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전에 존재했던 자의 죄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는 뜻이지요."
불교의 카르마와 윤회의 원리는, 일종의 정의 개념이 내포된 행위의 이론에 근거한다. 초기 불교 신사들은 모든 행위(카르마)마다 그에 대한 대가가 자동적으로 뒤따른다는 원리를 발전시켰다. 행위는 과일을 맺는 나무에 비교할 수 있다. 쓰든 달든 모든 열매는 조만간에 익어 떨어지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행위가 무르익으려면 하나 이상의 삶이 요구되며, 인간은 자신이 심었던 것을 거두기 위해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다. 불교는 행위의 도덕적 가치를 강조하며, 베다교 희생제사의 단순한 기술적 성격을 거부한다. 카르마의 보상원리는 분명하다. 인간에게는 반드시 행위가 따르게 마련이고 그 행위는 '수천 마리의 암소떼 사이에서도 송아지가 제 어미소를 찾아내듯' 조만간 언젠가는 행위자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어떤 행위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틀림없이 의식적으로 그 행위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일단 행위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 무엇으로도 그 행위를 돌이킬 수 없다. 행위와 그에 따른 보상, 즉 인과응보의 법칙은 엄격하게 개인적이어서, 행위에 대한 결과가 상이든 벌이든 간에 아무도 그 대가를 함께 나눌 수 없다. 이런 엄격한 개념은, 덕을 다른 사람에게 전이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대승불교 안에서는 근본적으로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승불교에서는 자신이 쌓아야 할 몫보다 더 많은 덕을 행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덕을 나눠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개념이 바로 보디사트바 숭배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보디사트바, 즉 보살이란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자비심으로 자신이 열반에 들어가는 시기를 늦추는 완전한 존재를 말한다.
한편, 이 구조의 정점인 열반에 이르는 열쇠는 보상의 논리를 넘어서는 곳에 위치한다. 구원은 단지 덕행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종교적, 세속적인 일체의 행위를 근본적으로 포기할 때에야 이룰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행위는 선하든 악하든, 환생의 사이클을 계속 연장시킨다는 점에서 모두 해롭다. 그런데 행위라는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 논리에는 한 가지 문제가 따른다. 모든 행위를 멈추고자 하는 욕망조차 일종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원하는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 논리적 궁지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간단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악행의 잘못을 깨닫고 덕행을 장려하는 일이다. 한편으로 볼 때,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원리는 윤회설을 약간 모순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죽는 순간 사라지고 마는 의식상태가 일련의 환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나'라면, 윤회란 도대체 무엇인가? 덕을 행하고 쌓는다 한들, 그 열매를 거두는 것이 '나'가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노인은 더 이상 예전의 어린아이가 아니지만 그 아이와 별개의존재가 아니듯이, 행위의 보상을 받는 현세의 존재를 그 행위를 했던 전생의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전혀 다른 존재도 아니다. 죽음의 순간에 그 사람이 어떤 의식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다음에 어떤 존재로 다시 태어날지가 결정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영혼이 전생의 존재에서 이생의 존재로 이동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한 존재는 다른 존재가 시작되는 그 순간에 멈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이론적인 답변은 결코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없다. '영혼'의 개념을 일련의 의식 상태라는 개념으로 대치한다 해도 신앙의 문제를 재검토하지 않는 한 단지 어휘를 수정한 데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환생할 경우에 항상 인간으로 태어나라는 법은 없으며, 과거의 행위에 따라서 고귀한 운명이나 (영원한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천상의 존재들인 데바, 혹은 영원토록 형제를 죽이는 전쟁을 하는 아수라들) 혹은 아귀, 동물, 지옥의 저주받은 귀신들과 같이 열등한 운명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데바들조차 언젠가는 그들이 쌓은 선행의 카르마가 고갈될 때가 오게 마련이고, 그때는 열등한 운명 속으로 떨어져야 한다. 이 모든 운명은 불교 세계를 구성하는 세 현실 가운데 가장 낮은 곳인 욕계에 속한다. 다른 두 세계는 형태를 지닌 세계와 형태가 없는 세계인데, 이곳에는 한 번 불교의 도에 들어와서 성자나 아라트가 되기로 보장된 자들만 접근할 수 있다.
불교의 낙원과 지옥
전통적인 힌두교에서는 불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낙원에 대한 설명이 매우 막연하다. 힌두교에서는 여러 낙원이 존재하며, 각각의 낙원은 힌두교의 제신 가운데 한 신의 지배를 받는다. 불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낙원(극락)은 서쪽에 있는 정토이다. 서방정토는 붓다가 되기 이전의 아미타불이 소원하여 생긴 곳이다. 아미타가 바란대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나 끝없는 지락의 장소인 이곳에 다시 태어나도록 되어 있으며, 이곳에 한 번 들어오면 다른 것으로 떨어지는 일은 절대 없다. 그런데 주의 깊게 살펴보면(이는 결코 하찮게 넘겨버릴 부분이 아니다) 여기에는 불교의 여성에 대한 차별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이보다 낮은 차우너의 낙원으로 가는 달리 이 낙원에서는 여자들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의 묘사는 극도의 잔인성만 빼면 힌두교의 지옥 모습과 거의 흡사하다. 형벌의 방마다 죽은 자들이 마치 푸주간의 고기처럼 찢겨, 불타는 기둥에 묶여있거나 얼음 연못 속에 잠겨 있다. 무릎은 으깨지고, 심장과 혀, 눈은 뽑혀나가고, 발과 손은 잘려 있다. 커다란 바위와 대들보 밑에서 으스러지기도 하고, 톱으로 썰리고, 껍질이 벗겨진 채 시궁창에 빠지기도 하며, 쥐와 메뚜기들이 살을 갉아먹고, 펄펄 끓는 가마솥에 빠지고, 독수리가 와서 온몸을 쪼아먹는가 하면, 돼지가 내장을 핥아먹고, 거름더미 속에 빠지고, 맷돌로 갈리기도 하고, 말벌, 개미, 전갈, 뱀들이 와서 쏘고 물어뜯는다. 서구에서는 지옥을 묘사한 중세적 표현이 제롬 보슈가 그린 그림에서 절정을 달하는데, 이는 불교의 상상력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들 자신 불교도였던 몽고인 침략자 타타르 족은 지옥에서 곧장 나온 악마들로 간주되었으며, 타타르란 이름은 이 악마들에게서 유래한다.
중국에서 불교의 지옥은, 환생하기 이전에 반드시 거치게 되는 장소인 일종의 연옥과 같은 장소로 바뀐다. 이미 언급했듯이, 중국인들은 산 자의 영혼이 혼과 백의 두 요소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죽은 후에 백은 인간의 육신 곁에 머물러 있는 반면, 혼은 염라대왕의 사신인 소름끼치는 모습을 한, '소의 얼굴을 한 괴물'과 '말의 머리를 한 괴물'에 이끌려 지옥을 향해, 그리고 미래의 환생을 향해 긴 여행을 시작한다. 우선 수많은 벽과 구덩이로 이루어진 염라국으로 끌려간 영혼은 그곳에서 49일에 걸치는 첫 번째 체류를 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기간이 끝나면 지상의 세계를 완전히 떠나, 지옥에 있는 열 개의 법정중 첫 번째 법정에 출두한다. 이어 열 번에 걸쳐 차례로 심판과 형벌을 받는다. 가족에 의해 대속받아 해방되지 않는 한, 영혼은 환생이전에 고통받아 정화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열번째 '지옥'을 떠나면, 망각의 물을 마신 후 서둘러(어머니의 피를 상징하는)붉은 강물 속에 뛰어든다. 그리고 그 강을 따라가 새로운 탄생을 맞이한다. 하지만 벌받을 일이 없는 사자라면, 그의 가족이 종이 모형을 형태로 만들어 그에게 보내준 집과 기타 필수품 덕택에 지옥에서도 지상에서와 비슷한 생활을 영위한다. 이 종이집은 지옥의 왕들이 살고 있는 궁전을 둘러싸고 있는 도시와 마을에 자리잡게 된다. 무시무시한 현실과 일상의 묘한 병립이라 하겠다.
반대로, 요절한 이들은 법정에 설 수 없으며, 굶주린 채 계속 이승을 떠돌아다녀야 한다. 음력 7월에 망자들을 위한 구원의식을 행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영혼들을 위해서이다. 굶주린 영혼이라는 개념은 고통의 내면화라 간주할 때 하나의 진보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이 저주받은 영혼들은 지하 감옥의 죄수가 아니며, 또한 지옥에 인접한 도시의 주민도 아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이승에서 살고 있으나 다만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이 겪는 형벌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탄탈로스가 겪은 형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참여할 수 없는 지상의 즐거움을 끊임없이 눈으로 보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고통은 바로 육체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면, 무엇이든 삼킬 수 있을 만큼 배가 고픈데 입이 바늘구멍만큼 작아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카르마로 인해 만지는 것은 모두 불이나 분뇨로 변해버리고 만다. 그들이 지옥의 끔찍한 고문 도구나 악마들로부터는 벗어났다고 하지만, 모순되게도 이들이 받는 형벌은 고전적인 지옥의 형벌보다 더 잔인하다.
심판과 구원자들
7세기 이래 중국에서는 윤회라는 불교 원리가 도교와 다른 민간신앙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불교 신자들처럼 도교 신자들에게도 신이란 이 땅에 있는 동안 덕행을 쌓은 덕분에 신의자격을 획득한 인간들이다. 도교의 위계질서에 의하면, 민간신앙에 나오는 소신들은 불사하는 신들보다 열등하다. 그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지옥에 들어가는 것을 면할 수 있었으며,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불사의 신들 범주에 들어갈 수도 있다. 불교에 등장하는 데바들은, 인간이었지만, 덕행을 쌓아 천상낙원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자들이다. 하지만 정토와는 달리 이 낙원에서의 생활은 영원하지 않다. 데바들과는 달리 중국이 만신전의 신들은 시간이 지나면 보통 천상의 위계질서에서 지위가 올라간다. 중국인들은 신의 지위를, 그 다음 세대가 물려받아 임무를 완수할 수 잇는 무엇으로 보았다. 한 예로 6세기에 한 청렴한 고위 관리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지위가 오른 전 왕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여 지옥에서 곧 야마 왕이 되었다고 믿었다. 지옥의 심판관들은 모두 이 세상에 있을 때 청렴한 관리를 지냈던 실제 인물들로서 중국인들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이름과 사망 날짜를 알고 있다.
이런 심판관들 앞에서 사자는 지장보살이라는 수호신의 힘을 빌게 된다. 일반적으로 지장보살은 삭발한 머리에, 손에는 순례자의 지팡이를 들고 있는 젊은 승려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지장은 지옥의 왕들과 매우 돈독한 우호관계를 맺고 있으며, 지옥의 왕들은 그의 명령을 따른다. 중국에서는 그가 태어난 날인 음력 6월 24일이 기념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날을 망자들의 축일, 좀더 자세히 말해, 어린 나이에 죽은 아이들의 축일로 기념하다가 오늘날에는 모든 어린이를 위한 축일이 되었다. 사람이 죽은 지 100일째 되는 날에 중국에서는 '지옥문 파괴'의식을 치르는데 이때 등장하는 인물도 바로 지장보살이다. 승려들은 지장의 이름을 부른 후 향을 피우며 기도문을 외운다. 그리고 나서 지옥을 파괴하는 성스러운 독경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죽은 자의 영혼을 부른다. 그러면 영혼은 지장의 인도를 받아 정토에서 다시 태어난다. 이때 대나무와 종이로 작은 상자를 만들어 지옥을 상징하는데, 그 안에는 종이로 만든 여러 모형이 들어있다. 독경 마지막에 지장보살 차림을 한 승려가 지팡이로 상자를 부숨으로써 저주받은 자의 영혼이 해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