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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481 호
단기 4341. 8. 4 (음력 7. 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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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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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문예작품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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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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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웃은 사람은 잊혀져도 같이 운 사람의 이름은못 잊는 법. / 아랍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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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글터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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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어라우!
고장말
“아니요. 쪼깨 아플라고 혀서 칙간에 갔어라우.”
소설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들몰댁 큰아들이 변소에서 나오며 내뱉는 말이다. ‘-라우’는 전라도 사람들이 듣는 사람에게 존대 뜻을 나타낼 때 말 끝에 붙여 쓰는 고장말이다. 표준어에서 존대 보조사 ‘-요’와 쓰임이 비슷하다.
“선상니임, 선상니임, 손님 오셨어라우.”, “애기씨는 암만해도 내일은 못 가실 것맹이여라우.”
그러나 “남말허고 앉았네.” “언저역(엊저녁) 본께 못쓰겄데”와 같이 ‘-네’와 ‘-데’로 끝나는 말 끝에는 붙여 쓰지 못한다는 점에서 표준말 쪽 ‘-요’와 좀 다르다.
‘-라우’는 ‘-(이)라 허우(-이라 하오)’와 같은 말에서 ‘-허’가 떨어져 나간 ‘-(이)라우’가 굳어져서 생겨난 말인 것으로 보인다.
“머 땀시 넘 제사에 배 놔라, 감 놔라 허우?” “고런 맘 묵을 사람이 아니란 것을 믿기 땀세 두 번씩이나 알은 체럴 했는디 몰라라 허우.”
나이가 지긋한 어른이 처음 보는 젊은 사람에게 반말을 쓰기도 그렇고 존댓말을 쓰기도 뭣할 때나, 나이 차이는 있지만 아주 절친한 사람들 끼리는 ‘-라우’ 대신에 ‘-라’를 쓰기도 한다. 이때 ‘-라’는 반말도 존댓말도 아니다. “아이고메, 이러나저러나 논 뺏기기는 매일반인디, 고런 것 알아 워디 쓰게라.”, “정 사장네 굿을 헐랑갑제라?”
“-잉”(워메, 들몰댁! 살아왔소잉)과 마찬가지로 ‘-라우’는 그 말을 쓰는 순간 전라도 사람임을 드러내고 마는 표지다.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삭부리
사람이름
숙종 7년(1681년), 기병(騎兵)의 보인(保人)인 허협이 한글로 쓴 글을 가지고 승정원에 와 역모가 있다고 발고했다. 평안병사를 지냈던 이간이 이남과 함께 반역을 꾀할 때 감사 유하익과 순변사 정유악이 끼었는데, 문서가 그때 일을 알고 있던 양국정에게서 나온 것이라 하였다. 양국정을 문초하니 이간이 이남에게 편지를 보낼 때 이를 은밀히 숨겼으나 이간에게 신임을 받은 삭부리(朔夫里)가 몰래 본 것이었다고 했다.
사내이름으로 자주 보이는 ‘삭부리’는 어디서 나온 말일까? 조선 후기로 오면서 성 상징이 이름으로 쓰인 것이 자주 보인다. 그 가운데 개부리/개불이·괴불이·말불이·쇠불이/쇼부리 …들이 있는데 낱낱 개·괴/고이(고양이)·말·소 따위와 잇닿아 있다. 이로 보면 삭부리는 삵과 잇닿은 듯도 하다.
영조 6년(1730년), 궁방의 화약을 훔치려 한 禾古伊·周老味·介助之(화고이·주노미·개조지) 등을 국문하였다. 禾古伊는 실록에 禾塊(화괴)로도 적으며, <승정원일기>에는 雄猫(웅묘)와 禾介(화개)로도 나온다. 禾古伊는 ‘수고이’(수고양이)이다. 이익 선생댁 호구단자에서는 ‘수리놈이’를 愁里男(수리남)으로 적다가 나중에 禾里男(화리남)으로도 적었다. 禾(화)는 ‘벼 화, 쉬 화’인데, 자주 ‘수’를 적을 때 쓰인다.
‘불알·불거웃’ 들에서 보듯이 예부터 성 상징은 ‘불’이라 한 듯하다. 사내이름에 감불이·돌부리·살부리·외불이·억불이·육부리도 있고, ‘곰부리’라는 계집이름도 보인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바캉스, 다이어트
겹겹이 밀려오는 파도와 시원한 계곡이 그리운 여름 휴가철이 다가왔다. 휴가를 프랑스어로 바캉스(vacance)라 하는데 영어의 베이케이션(vacation)에 해당한다. 프랑스인, 그중에도 파리 사람들이 휴가를 극성스럽게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때문인지 우리도 어느새 바캉스란 말을 쓰게 됐다. 벌써 신문·잡지 지면엔 '바캉스 특집' '바캉스 특선 여행' '바캉스 대비 다이어트' 등 휴가 관련 기사와 광고들이 즐비하다. 대부분 여름휴가 대신 바캉스란 말을 쓰고 있지만 사실 이 단어는 4계절 어느 때나 떠나고 즐기는 단순 휴가를 뜻하므로 딱히 여름에만 사용해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바캉스란 말보다 여름휴가·피서(避暑) 또는 해수욕 등 우리말로 적당히 바꿔 쓰는 게 좋겠다.
'바캉스 대비 다이어트' 기사나 광고는 운동기구·미용용품 등을 이용해 체중을 줄이고 몸매를 가꾸는 내용들이다. 해수욕장이나 수영장에서 아름다운 몸매를 뽐내고 싶은 여성들에겐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통틀어 다이어트로 부르는 건 잘못이다. 다이어트(diet)는 식이요법이다. 운동기구·미용용품으로 다이어트를 한다면 이런 것들을 먹는다는 얘기가 된다. 식이요법에 의한 체중조절만 다이어트다.
휴가를 기대하고 준비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주변에 널려 있는 외래어의 오·남용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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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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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
2. 용기와 결심에 대하여
만약 인류에게 가장 유용한 충고를 하나만 해주도록 부탁을 받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삶을 살다가 문젯거리와 부딪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문젯거리가 생겼을 때는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면 된다.
" 난 너 보다 더 커. 네가 나를 이길 수 없어."
- 앤 랜더슨 -
내리막 길을 올라가며
벼랑 끝으로 오세요. 싫어요. 떨어질 거예요.
벼랑 끝으로 오세요. 싫어요 떨어질 거예요.
그들은 벼랑 끝까지 갔다. 그가 밀었고, 그들은 날았다.
- 길람 아폴리네어 -
나는 볼더 시에 위치한 콜로라도 주립 대학을 아무 문제없이 다니고 있는 자신만만한 열여덟 살짜리 소녀다. 하지만 5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무척 수줍어하는 내성적인 소유의 소유자였다. 그 때만 해도 십대 소녀로서 그 이상 부끄러워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핑핑 도는 안경을 쓴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부모님이 얼마 전에 이혼을 했기 때문이었을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알 수 가 없었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육상부에 가입하려고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가 내 차례가 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내 꼴을 보고 누가 웃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학교가 끝나면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그래서 <길리건의 섬> 시리즈 재방송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외우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봄이 되었을 때 왼쪽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엔 좀 삐었나보다고 생각하고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통증은 점점 더 심해갔다. 친구네 집에 자러 갔을 땐 다리가 하도 아파서 뒤로 젖혀지는 의자에 밤새 앉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아빠는 나를 소아과로 데려갔고 거기서 엑스레이를 찍었다. 그리고 의사가 아빠를 상담실로 불렀다. 나는 옆방에 있었지만 벽을 통해서 의사의 말이 들려왔다. "아직 확실히는 모르지만... ." 의사가 말했다. "운동을 하다 다쳤을 수도 있고 ... 아니면 종양일 수도 있습니다. 로젤 이모가 종양에 걸렸었다. 하지만 수술을 받고 나았다. 그래서 나도 간단한 수술을 받으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엑스레이를 더 찍으러 엄마와 함께 종합 병원에 갔을 때 엄마 친구인 페기 헨슨 아줌마가 따라왔다. 나는 페기 아줌마를 어린 아기 였을 때부터 알았기 때문에 나에겐 이모나 다름없었다. 간호사가 엑스레이 사진을 가져왔다. "여기 보여요" 사진 속의 하얀 부분을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이것 때문에 다리가 아픈 거예요." 얼마 후 남자 의사가 들어와서 챙 박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의사는 내 다리를 꾹꾹 눌러보고 차트를 잠시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아드리엔" 그가 말했다. "종양에 걸렸기 때문에 다리가 아팠던 거란다. 종양이 네 몸으로 퍼지면 상당히 위험할 수가 있어 죽을 수도 있지 다행히 조기 발견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퍼지지 않게 할 수 가 있단다. 하지만 화학요법을 받아야 할거고, 아마 다리를 절단해야 할지도 몰라, 좀 더 검사를 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야." 엄마가 숨을 들이마시더니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페기 아줌마는 침착한 자세로 평온을 유지한 채 앉아 있었고, 나도 그렇게 했다. '아마' 라는 단어가 내 귓가를 맴돌았다. 따라서 아닐 수 도 있다는 말로 내겐 들렸다. 따라서 아닐 수도 있다는 말로 내겐 들렸다. 그 때는 절단이라는 말이 실제로 무얼 의미하는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챙 박사가 방을 나갔다. 페기 아줌마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는 아직 울고 있었다. "아드리엔, 절단을 해도 괜찮겠어?" 아줌마가 물었다. "그럴 것 같아요." 내가 대답했다. " 안될 게 뭐 있어요?" "가족뿐만 아니라 많은 친구들이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아줌마가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에겐 하나님이 계셔. 네가 잘 이겨내도록 우리 모두가 도와주겠다. " 페기 아줌마는 강했다. 나는 아줌마를 존경했고 아줌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다음 날 뼈 사진을 찍으러 갔다. 그 다음날은 아티리오 그램(동맥에 물감을 넣어서 종양의 위치를 확인하는 검사)이었다. 24시간동안 똑바로 누워 있어야 했고, 일어나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다음엔 바로 수술실로 가서 조직 검사를 받았다. 결코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절단하는 수밖에 없다고 의사들이 말했다. 그 전에 우선 한 달 동안 화학요법을 받아야 했다. 병원에 다니며 조금씩 종양에 대해서 배웠다. 내가 걸린 종양은 화학요법과 전단으로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죽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회복한 후 5년이 지나도 재발하지 않으면 암세포가 완전히 없어졌다고 생각해도 괜찮았다. 그리고 내가 걸린 종양에 걸릴 확률은 백만 명 중 세 명이었다. 치료를 받는 동안은 결석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저녁친구 제니스가 전화를 했다. "모두들 네 얘기만 하고 있어." 그녀가 말했다. "어떤 애는 네가 대머리가 됐고 두 다리를 모두 잘랐다고 하는 거야. 어떤 애는 이제 네가 몇 주일밖에 살지 못할 거라고 했어." 전화를 받고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제니스는 몰랐다. 그때만 해도 난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이어서 사람들이나를 쳐다보거나 내 얘기를 싫었다. 페기 아줌마는 친구들과 하나님이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난 운이 좋은 아이라고 했다. 글쎄, 뒤에서 내 뒷공론이나 하는 것이 나를 도와주는 것일까. 하나님에 대해서도 나는 완전히 혼동에 빠졌다. 화학요법을 시작하고 나서는 항상 피곤하고 이팠고 이제 한달 안에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벌을 주시는 것일까?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나는 완전히 생각을 바꾸게 되었고 결국은 삶에 대한 견해 마저 달리하게 되었다. 새벽 2시였고, 나는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소파에 누워 있으면 자리가 좁아서 잘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다리가 덜 아팠다. 방안은 어두웠고 조용했으며 나는 혼자였다. 나는 또 다시 백만 명 중 단 세 명만이 이런 종양에 걸린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백만 명 중 세 명이다. 그 말은 덴버 시에 살고 있는 사람 중 단지 다섯 명만이 이런 병에 걸린다는 뜻이다. 그 생각을 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그 다섯 명 중 한 명이라는 사실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뭐랄까, 좀 특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혹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시는 게 아닐지도 몰라.' 혼자 중얼거렸다. '나를 특별히 선택하신 것은 아닐까?'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뛰었다. 왜 나를 선택하셨는지 그래서 그게 좋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내 다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종양을 다른 각도로 보게 되었다. 이젠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난 용기에 가득 차 있었다. 이젠 무슨 일이든 똑바로 바라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난 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게 되었다. 육상 부 테스트가 겁나서 도망나왔던 나였다. 그런데 수술이 있기 며칠 전 난 학교의 카운셀러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랄슨 선생님." 내가 말했다. " 내일 제 육 교시 수업 때 친구들과 예기를 할 수 있을까요?" 그 다음날 난 교실에 앉아서 40명 정도 넘는 학생들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오늘 너희들과 만나고 싶어한 이유는 내 병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고 싶어서야." 내가 말했다. "이제 이틀 후에 난 외쪽 무릎 위 십이 센티미터 정도에서 다리를 잘라내야 해. 그런 다음엔 화학요법을 받아야 할거야, 머리가 빠질거고 한동안은 꽤 아플거야. 하지만 가을엔 학교로 돌아올 수 있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 난 전혀 신경쓰지 않으니까." 처음엔 조용했다. 내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마침내 한 여자아이가 손을 들었다. "인조 다리를 사용할거니?" "그래." 내가 대답했다. "자른 다리는 네가 갖게 돼?" 다른 아이가 물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씩 둘씩 나중엔 우리 모두가 다 웃었다. 정말 바보같은 질문이었다. "글세,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대답했다. "내 인조 다리는 그냥 막대기 같이 생겼을 것 같애. 아마 너희들은 보고 싶어하지도 않을거야." "다른 여자애가 말했다. "우린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상관하지 않아. 다만 네가 빨리 학교로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야." 그 소리를 듣고 난 무척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도 이제는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나도 아이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그 다음엔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새 목요일이 되었다. 수술은 아침 7시였다. 내 침대 옆에 사람들이 잔뜩모였다. 리틀톤 연합 감리교에서 중등 반을 맡고 계신 쥰 목사님, T 라는 별명을 가진 병원 사회사업가 , 그리고 물론 엄마와 페기 아줌마, 복잡할 때를 피해서 아빠는 나주에 오셨다. T아줌마가 조그만 꾸러미를 꺼내서 내게 주셨다. "쟤넬 엄마가 주시는 선물이야." 쟤넬은 내 친구인데 역시 뼈 암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포장지를 풀자 조그만 갈색 곰이 나왔고 곰의 가슴엔 이런 글이 붙어있었다. '곰 인형은 사랑과 우정의 상징이야. 이 곰을 볼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너를 걱정하고 있고 모든 일이 잘 되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줘.' 처음에 페기 아줌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친구들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 페기 아줌마 말이 맞았다. 하나님과 내 가족에 대한 말도 맞았다. 수술실로 들어갈 때는 너무 긴장해서 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에서 깨어났을 때는 신기하게도 마음이 평온했다. 솔직히 안심이 되었다. 이제 제일 힘든 부분을 치러냈으므로 일상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을 만큼 기운을 되찾은 후 나는 병원에 있는 다른 아이들과 사귀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재미있던 텔레비전이 그렇게 재미없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는데 신기하게도 그런 일이 무척 쉬웠다. 사람들은 모두 내 상태가 어떤지 알고 싶어했으므로 그들이 하는 질문에 대답만 하고 있으면 되었다. 작아져서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된 헌옷처럼 부끄러움이 내 마음 안에서 사라졌다. 어린이 병원에서 전화로 상담 받는 일을 도와달라고 했을 때도 난 기꺼이 승낙했다. 건강이 웬만큼 회복되자 교회의 중등부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요일 저녁마다 모여서 배구도 하고 게임도 하며 놀았다. 첫날엔 아이들이 좀 어색해 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내가 따돌림을 받는 것같이 느낄까봐 걱정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고 한 구석에서 서서 열심히 응원을 하였다.
완전히 건강을 되찾은 다음엔 나도 운동에 참여했다. 인조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기 때문에 한 다리로 균형 잡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다시 생각할 틈도 없이 인조 다리를 벗어버리고 소리쳤다. " 나도 할거야!" 아이들은 배구를 멈추고 나를 바라보다가, 내가 인조 다리를 벗어 던지고 한 다리로 뛰어 들어오자 모두들 웃으며 응원해 주었다. 그 해 늦여름 난 <스카이 하이 호프>라는 암 환자를 위한 캠프에 참여해서 암벽 타기부터 말타기까지 모든 스포츠를 다 해보았다. 나에게 스포츠 는 이제 새로운 도전이었으며 특히 스키가 그랬다. 어린이 병원에서 일하는 릭 레이크스트러 씨가 스키 한 짝과 아우트리거( 끝에 조그만 스키가 달린 스키 스톡 )를 가지고 스키 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연습 코스를 처음으로 내려가며 나는 이거야말로 나를 위한 스포츠라고 생각했다.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난 학교 플랙스쿼드 팀에 참가했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고, 수영부 에도 가입했다. 중학교 이 학년 때 육상부 테스트에 갔다가 그냥 돌아온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공평하게 테스트도 받아보지 않고 포기해 버리다니 그래서 이번에는 너무 느리고 달리기가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덕분에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엔 우승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포츠는 역시 스키다. 어느 날 나는 재수 좋게 미국 대표 장애인 스키팀 선수인 폴 드빌로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장애인 선수들을 위한 윈터파크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트레이닝을 받게 되었다. 폴이 나의 코치가 되겠다고 자청했다. 나로선 최대의 도전이었다. 매 순간이 스릴 만점이었다. 내년엔 국가 대표 선수가 될 것이다.
이제 보십시오! 내가 나갑니다! 스키 리프트를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눈 덮인 산을 올라갈 때면 생각해본다. 내가 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스키는 타지 않았을 것이다. 수영도, 자전거 타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병에 걸린 것이 즐겁지는 않았다. 지금 다시 해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무엇이든 이겨내고 가장 좋은 결과를 얻도록 가족과 친구들과 하나님이 도와 주셨다. 나에겐 눈곱만큼도 없던 용기를 암 때문에 갖게 되었다. 두 다리를 가지고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한 다리로 해낼 수 있는 용기를...
- 아드리엔 리베라 -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윈스턴 처칠 경은 영어 과목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어서 중학교 2 학년을 마치는데 3년이 걸렸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옥스퍼드 대학이 처칠 경에게 졸업 연설을 부탁한 것을 생각해 보면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처칠 경은 평소에 아끼는 소품들을 가지고 도착했다. 그는 어디를 가든 시가와 지팡이와 실크 모자를 가지고 다녔다. 처칠 경이 연설대에 올라서자 관중들은 일어서서 감사의 박수를 보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위엄을 갖고 처칠 경은 그를 선만하는 관중들에게 조용히 하도록 신호를 보낸 후 자신만만하게 섰다. 시가를 입에서 빼어 실크 모자와 함께 연설대 위에 놓고, 처칠은 기다리는 관중들을 둘러보았다.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가 소리쳤다. 목소리에 권위가 넘쳤다. 몇 초가 지났다. 그는 뒤꿈치를 들며 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의 말은 천둥이 되어 관중들의 귀를 쳤다. 처칠이 손을 뻗어 실크 모자와 시가를 집는 동안 관중석은 귀가 멍멍할 정도로 조용했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며 처칠은 연설대를 떠났다. 졸업연설이 끝났던 것이다.
- <연설가의 원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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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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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 이덕규(1961~ )
꼬리지느러미가 푸르르 떨린다
그가 열심히 헤엄쳐 가는 쪽으로 지상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그 꼬리 뒤로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사라져 가는
초고속 후폭풍의 뒤통수가 보인다
그 배후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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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보였다면, 누가 풍향계를 궁리했으랴. 바람은 보이지 않아서 바람이다. 불어오는 곳을 알 수 없어서 바람이다. 풍향계는 바람을 보기 위해, 아니 바람을 보여주기 위해 오직 바람에 집중한다. 바람이 약하다고 무시하거나, 너무 강하다고 얼굴을 돌린다면, 풍향계가 아니다. 풍향계는 언제나 바람과 정면한다. 바람과 눈싸움을 한다. 그럴 때, 풍향계는 시인이다. 그런데, 풍향계의 머리만 바라보는 사람들아, 보아라. 꼬리가 있느니, 후폭풍이 있느니, 배후가 있느니, 보아라. 보려 하면 능히 볼 수 있느니.
<이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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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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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탄천과 동방삭 - 수청과 탄천
이승에서 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명계를 다스리는 염라대왕을 두려워 하지 않을수 없다. "염라 대왕이 문 밖에서 기다린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누구나 때가 되면 염라대왕의 소환을 거역할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 저승에 살면서 18명의 장관과 8만명의 옥졸을 거느리고 있는, 게다가 명석하기 이를데 없는 대왕이 어쩌다 실수할 적도 있었던 모양이다. 저승으로의 소환자 명단에서 그만 한 사람의 이름을 빠뜨리고 만 것이다. 말하자면 염라대왕의 리스트에서 빠진 대신 "쉰들러의 리스트"에 오른, 이 억세게 재수 좋은 사나이를 후세인들은 동방삭이라 부른다. 그의 이름 앞에 반드시 삼천갑자라는 수식어가 무슨 아호처럼 붙는걸 보면 사람들이 그를 한없이 부러워 하는 모양이다. 삼천갑자가 도대체 얼마나 긴 세월인지 한번 계산해보기로 하자. 한 갑자가 60년이니까 60 곱하기 3,000은 18만, 그렇다면 이승에서 그가 누린 나이가 무려 18만년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원래 영약하기 이를 데 없는 동방삭이 인간 사회에서 그토록 오래 살다 보니 세상 만사 모르는 것이 없게 되고 나중에는 명계의 일까지 꿰뚫어 보게 된 것 같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염라대왕은 노발대발하여 당장 그 놈을 잡아들이라고 엄명을 내린다. 그러나 인간의 잔꾀로 무장한 그 도사를 어떻게 잡아올 것인가?
경기도 성남 땅 어디메 살고 있다는 막연한 정보만을 가지고 온, 최 판관을 비롯한 베테랑 저승 사자들도 동방삭을 찾아내기에 진땀을 흘린다. 궁리 끝에 내 놓은 계책이 유인 작전, 저승사자 일행은 숯골에 이르러 숯을 몇 가마 얻어다가 이것을 시냇물에 빠는 시늉을 해 보인다. 숯골은 지금의 성남시 태평동과 수진동 일대인데, 옛날에는 숯 굽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숯이 너무 검어서 희게 하기 위해 숯을 물에 빤다고 떠벌리면서 며칠간 같은 짓을 반복해 보인다. 이런 엉뚱한 행동을 본 행인들은 한결같이 "숯을 희게 하다니 별 미친놈들 다 보겠네."라는 반응이다. 그러기를 여러날, 드디어 노리던 물고기가 계략에 걸려 들었다.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숯을 물에 빠는 미친놈은 처음 보겠네."라는 탄식과 함께 혀를 끌끌 차는 노인이 등장했다. "바로 이놈이다!" 그 순간 저승사자들은 번개같이 그 노인을 덮쳤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오로지 그 한마디로 동방삭은 황천객이 되고 말았는데, 18만 년의 생애가 단 한번의 실수로 허망하게 종말을 고한 것이다. 그가 저승사자에게 끌려간 뒤 후세인들은 이 시내를 숯내 또는 한자말로 탄천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그런 전설이다.
지명이 숯내이다 보니 이런 재미있는 전설도 묻어 들게 되었겠지만 아무렴 이처럼 맑은 물에 탄천이라는 검은 이름이 어울리기나 하는가? 어떤 이는 이 지역에 홍수가 나면 피해가 막심하기에 한탄스런 시내, 곧 탄천이 되었다고도 말한다. 한탄의 탄천이든 숯골의 탄천이든 아무튼 맑은 시내의 이름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탄천은 경기도 용인에서 발원하여 판교와 분당을 거쳐 서울에 이르러 한강의 품 안으로 흘러드는 한강의 제1지류이다. 서울 시민들은 이 탄천을 생각하기를 전에 운전면허 시험장이 있던 곳, 잠실 운동장에 경기가 있을 때면 주차장으로 이용되는 곳으로 알거나 그보다는 시커먼 폐수가 흐르는 샛강정도로 알고 있을지 모른다. 이름조차 탄천이다 보니 그럴만도 하다. 그러나 탄천의 물이 본래 검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맑고 푸른 물이 흐르던 큰 시내였음은 발원지의 마을 이름이 수청동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수청동의 전래지명은 "물푸레골"로 물이 푸른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런 고운 이름이 "검은 내"로 변질된 것은 고유지명을 한역화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어쩔수 없는 결과라 생각된다.
옛 지도를 보면 이 시내를 험천이라 하여 우리말로 "검내"라 부른다고 적고 있다. 한자 험은 검과 통하는 글자로서 현 발음대로 하면 "험"이 아니라 "검"으로 읽힌다. 그런데 이 "검"을 다시 소급하면 "거마" 또는 "고마"가 되어 옛날에는 "고마내" 정도로 불리었으리라 짐작된다. 고마는 크다는 뜻 외에도 방위상 뒤편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팔꿈치, 뒤꿈치라고 할때의 꿈(곰)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고마내, 곰내는 마을 앞으로 흐르는 시내가 아니라 마을 뒤로(북쪽으로) 흐르는 시내란 뜻이다. 여기서 마을이란 한신주, 곧 지금의 광주 일 것으로 짐작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탄천은 광주의 남쪽에 있으며, 이 내는 북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고 언급하고 있다.
고을 뒤로 흐르는 곰내, 검내는 뒷날 검은 내로 오인되어 탄천이 되었으니 흑천이라 부르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어쨌든 탄천이라는 이름은 잘못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동방삭이 저승으로 압송된 지도 벌써 삼천갑자 정도로 세월이 흘렀고, 또 저승사자가 숯을 구입했다던 숯골도 이제 도시의 한가운데가 되고 말았다. 최근 분당에 신도시가 형성되면서 탄천 주변도 말끔히 단장되어 멋진 시민의 휴식처로 거듭나게 되었다. 필자는 집에서 가까운 이 탄천의 물길을 내려다 보면서 수청이라는 발원지의 이름에 걸맞게 좀더 푸르고 맑은 물이 흐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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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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