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어당 에세이선
방황과 고뇌의 언덕
호연지기
나는 소동파의 황주쾌재정의 '일점호연기 쾌재천리풍'을 좋아한다. 무슨 까닭인지는 잘 몰라도 이 두 구절은 중산(손문)선생의 기백과 그 일생 동안의 소위를 여실히 나타낸 말인 줄 안다.
우리가 사람을 논할 때 성패만으로 속단해 말할 수는 없다. 칠금맹획은 제갈공명의 성공이요, 육출기산은 그의 실패이다. 실패는 실패지만 그 기백은 그냥 천고에 빛나며 인간에 유전되어 후인이 흠모하는 바가 되는 것이다. 정치적 생활로 보면 공자는 실패자이나 대사구(법무장관)가 되었다. 후에 제후의 여악사를 먹이는 책임을 져 오던바 노나라 임금이 3일간이나 조회에 나오지 않음을 보고 임금이 여자를 좋아하는 줄 알고 이에 임금의 부족을 느끼고 대뜸 노나라를 떠나서 14년 동안이나 있었다. 이것과 공자의 위대성은 별개의 문제이다. 진나라에서 양식이 떨어졌으나 공자는 현가를 그치지 않았으니 이로 보아 공자의 기백을 알 수 있다. 안습재가 말하기를, "시기에 적응하여 시련을 극복하며 잘 가누어 나갔다."라고 한 것처럼 공자의 가장 자랑스런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손중산은 성공한 사람이다. 입덕, 입공, 입언 세 가지는 모두 불후로 유전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 이 세대 사람이나 후대 사람들은 전대에서 유전되어 온 것을 받지 않은 자가 없다. 신해혁명은 내 나이 열 여섯 살되던 해로, 아무리 버린 사람이라 해도 선생으로 따라갈 사람이 없었건만, 늙은 원세개는 임금으로 자칭하고 장훈복벽하며 단씨가 집정하고 군벌이 연이어 일어나고 진형명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시국의 혼란함을 당시 나이 어렸던 눈으로도 환히 알 수 있었다. 북벌의 소원을 다 이루지 못한 채 중산선생은 우리를 버리고 세상을 떠났다. 얼 듯 보기에는 제갈량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그의 학문 사상은 규모가 아직도 남아서 후세 사람의 모범이 된다. 이런 점에서 볼 것 같으면 중산선생은 중국의 1백년 내의 제1인자다. 한 점의 호연지기가 천리풍을 일으켜 우리 앞에 불러 보낸다. 말하자면 세상을 떠난 지 이처럼 오래지 않으나 가까이 사는 듯 느껴짐이 대단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은 역시 어쩔 수 없었다(연이무유호이, 즉(칙)역무유호이)!"라고 한 것은 불가능을 말함이다. 어떤 이는 몸이 여산에 있으나 여산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한다. 내가 아는 중산선생의 기백은 바로 이같은 호연지기에 있는 줄 안다. 그는 호연지기를 잘 길렀기 때문에 백절불굴하며 몸소 실천하기를 죽을 때까지 했다. 시국이 어수선할 때면 일종의 영기를 발휘하여 일진천풍을 일으켜 천리를 불어가게 한 듯하여 크고 강함에 이르고, 호연지기를 길러도 해로운 일없이 그 기가 천지간에 찼다고 했다. 중산선생은 한 점의 호연지기를 잘 이용했기 때문에 이같은 공을 세운 것[건수]이다. 맹자가 말한 언지의 첫째는 동기요, 기의 첫째는 동지로서, "지는 기의 수요, 기는 체의 충(지, 기지수 기, 체지충야)"이라고 했다. 이 지와 기의 상호작용이 있기 때문에 무외의 정신이 있게 되는 것이다. 부귀는 음할 수 없으며, 빈천은 이 할 수 없으며, 위무는 굴할 수 없다고 함은 모두 중산선생이 이와 같은 양기의 공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한 점에서 보아도 백년내의 중국의 제1인자라고 부르기에 너무나도 충분하다.
처어칠의 영문
"술집 문이 닫힐 때면 나는 떠난다(I leave when the pub closes.)"
이 말은 몇 해 전에 처어칠이 병석에서 위독해 누워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죽음에 대한 감상이 어떤가를 묻자, 이에 대답한 짤막한 말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비록 쉽고도 자연스러웠으나, 그 뜻은 도리어 심히 정미로우면서도 묘미를 찾게 하는 바가 있다.
옛사람 말에,
"방사가 약을 구하러 갔다는 말은 들었으나 바다에 간 동남이 돌아온 것은 보지 못했다. 약을 만든 신농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며 종적을 감춘 노자를 찾지 못해 울고 돌아왔다." 하였으니(류잠부의 시의 한 구절), 이 태도야말로 얼마나 고아하고도 초범한 일인가? 이 말의 속셈은 속에 있는 말을 툭 털어놓은 것이다. 우리 인간생활은 마치 자그마한 술집에서 두서너 친구와 밤늦게까지 거나하게 술잔을 나누며 집에 돌아갈 생각조차 잊고 지껄이는 말 같아서 참으로 이 얼마나 정취에 가득 찬 일이겠는가... 술집 문이 닫히지 않으면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중엔 술집 문이 닫히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친구들과 손을 흔들며 작별의 인사를 하고 떠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으니, 참으로 그 뜻이 얼마나 간특하면서도 시정에 차고 넘치는가. 처어칠의 영문이 훌륭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인정하는 일이다. 그가 영국 사람이기 때문에 영문은 당연히 훌륭할 것이 아니겠느냐가 아니라, 그가 쓰는 말은 적당하면서도 그 말들이 아하고 건하다는 말이다. 아와 건, 이를 어찌 쉬운 일이라고 말할 것인가. 요즈음 그는 먼저 간 친구에 대한 위안의 말을 한 일이 있다.
"Only faith in a life after death in a brighter world where dear ones will meet again-only that and the measured tramp of time can give consolation." (우리가 죽은 뒤에 더 밝은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생명이 있다는 신앙만이 -죽은 뒤에 생명과 뚜벅뚜벅 걸어가는 시간의 발자국 소리만이 우리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 "주 : 역자의 번역에 의함."
이 가운데 "measured tramp of time"이야말로 아건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말은 보통 영국 사람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처어칠은 문학 수양을 쌓은 사람이며 젊었을 때 기자생활을 했고 다채로운 글을 써 낸 사람이다. 그 자신이 하는 말에 의하면 1900년에 그가 써낸 책 수는 모세가 쓴 책의 분량에 필적한다고 했다. 그가 가장 즐겨 읽은 책은 역사책이며, 그가 은퇴한 후에 <대전사>와 <영어 제국민사>의 두 질의 대작을 내었는데 단어 수로도 줄줄이 몇 천만 어에 달하니, 이는 결코 우연한 일로만 볼 수 없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미국 대통령 중에 영문을 잘 쓰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은 상식화된 이야기다. 윌슨의 문장은 아건하다고 하는데 그는 대학총장을 지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는 군인출신이다. 그래서 곧잘 농담하는 작자들도 링컨의 <Gettys-burg Address>를 아이젠하워의 연설이라고 해서 웃겨 주는 일도 있었다. 미국의 중학이나 대학에서 영문을 소중히 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흔히, 미국 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은 중국 아가씨가 써낸 글이 온통 문법이 통하지 않는 영문이었던 것을 안다. 영국대학은 이와는 다르다. 케임브리지 대학생은 아무렇게나 편지 한 장을 써도 곧잘 문법에 맞고 글도 세련되어 있다. 이는 평상시에 늘 훈련을 해 온 까닭이다. 미국의 정객들도 영문이 시원치 않다. 연전에 스티이븐슨이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그가 어찌나 아름답고 고상한 말들을 구사했든지 많은 사람들이 보통 일이 아니라고 놀라기까지 했던 것이다.
처어칠의 대학시절의 성적은 보통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좀 떨어진 편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자기보다 총명해서 대학에 진학하려고 라틴어 문법을 배우러 가고 있었지만 자신은 영어에만 주력했다고 그는 말한 적이 있다. 이 말도 얌전한 익살이면서 그의 참뜻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그는 학교에서 영문을 훈련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나는 영국의 모든 학생으로 하여금 영문을 배우게 하고, 그 가운데 총명한 자제들로 하여금 라틴어를 배우는 것을 명예로 삼게 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이스어를 배우는 것을 특상으로 삼게 하겠다. 단 한 가지 일은 학생의 엉덩이를 때려야 하는 일인데 그것은 영문을 잘하지 못하는 학생이다. 이런 학생은 때려도 몹시 아프게 때리겠다."
"I would make boys all learn English and then I would let the clever ones learn Latin as an honor and Greek as a treat. But the only thing I would whip them for is not knowing English. I would whip them hard for that."
처어칠은 일생 동안 영국 의회에서 말재간을 닦아 왔다. 의회 논쟁에서 임기응변으로, 빨리 묻는 사람에겐 빨리 대답해야만 했었다. 한 번은 어느 의원 하나가 처어칠의 문법이 틀렸다고 비꼬아 말했다. 말하자면 교과서적 문법 규칙에 어긋났으니, 즉 전치사가 센텐스의 끝에 가서 놓여서는 아니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반박해 말하기를,
"This is the most monstrous thing up with which I have to put." 이라고 말하자, 만장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문법상으로는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렇게 쓰지 않기 때문이다. 전치사가 끝에 와서 붙은 것은 안되는 일이지만 실제상으로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때가 있는 것이다. 처어칠의 이같은 말이 결국 웃음거리가 되고 만 것은 영문으로는 결코 이같이 말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전치사와 동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마치 글자 하나를 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인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look up to, look down upon"[추앙,멸시]와 같은 것이다. 'put up with'의 뜻은 참는다는 뜻인데 이것을 떼어 놓는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이렇게 되면 이 글의 마지막 두 글자는 반드시 up with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임기응변이란 천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그 어투가 글의 재간에 있기보다 솔직담백하게 말하는 데서 그 뜻이 더 잘 전달되어지는 것이다. 이전에 독음통일회에서 오치휘와 왕조의 논쟁이 벌어진 일이 있다. 왕조가 오치휘선생을 향하여, '왕바당'(일종의 욕설)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오치휘선생은 일어나서, 웃으며 은근히 하는 말이, "왕조 형이여! 저의 성은 결코 왕씨가 아니오!"했으니 이것이 바로 임기응변의 본보기이다.
영국의 한 귀족원 의원이 좌파 노동당 의원을 향해 묻기를,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대 부친은 수의라는데요." 이 말의 뜻은 그 출신이 보잘것없는 천민이라는 것을 비웃는 것이다. 좌파 의원은 곧 일어나서 대답했다. "그럼요! 당신은 병을 앓았던가요?"
생각해 보면 우리 중국의 백화는 글로는 온통 엉터리이다. 워쩐러어(아진락(요, 악) : 나는 참으로 기쁘다)의 러어(락)자는 진정 백화인데 백화로 글을 쓰는 작가들은 워쩐쾌러어(아진쾌락)라고 쓰는데 이렇게 되면 벌써 운치가 상실되어 버리고 만다. 이를 또다시 고쳐 워쩐위쾌(아진유쾌: 나는 참으로 유쾌하다)라고 고쳐 쓰고 있으니 이야말로 글도 제대로 안되고 말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백화는 아건한 것이다. 백화를 제대로 구사해야만 올바른 글을 써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백화문학은 40여 년이라고 말하지만, 오늘에 이르도록 우아한 백화문을 써낸 사람들로는 시인 서지마와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될지! 지마의 백화문은 원곡과 송사에서 힘입은 바 많았고 번잡한 것을 버리고 정화한 것을 채용한 후 오늘의 백화문과 고문을 한가마 속에 넣어 녹여서 아순하게 만들었다. 솔직한 것을 피하거나 속된 것을 꺼리지도 않고 자연에 접근하였으며, 그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을 본 듯하고 메아리가 울리듯 했으니 백화에는 억양고저가 어울려야 진정한 백화문이 되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아순'이라고, 말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본문의 제1구를 생각해 보건대 오늘의 백화 작가들은 감히 입을 열어,
"술집 문 닫힐 때면 나는 떠난다." 는 말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대개는 그럴싸하게 흐뭇해서, "이 술집 창문을 장차 닫으려 할 시간이 되면 나는 장차 이 장소를 떠나려고 할 것이다." 라고 써 놓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