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어당 에세이선
방황과 고뇌의 언덕
동양의 인도주의
공자가 죽은 후 수세기 동안에 중국의 전 역사를 통해서, 공자 및 공자주의가 위대한 명성을 지속해 온 것은 다음 세 가지 요인에다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공자류의 생각하는 방법이 중국적인 사상 방법에 의하여 내재에 호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둘째, 다른 제 학파가 역사적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에 반하여 공자주의자들은 거대한 역사적 지식을 축적할 뿐더러, 사실상 그것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역사적 학문의 체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중미와 명성을 갖고 있다는 것. 셋째, 명확하게 공자 자신의 개성 및 명성의 매력과 그의 학식보다도 항상 그의 개성에 있어서의 영향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위대한 교사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라든지 아시지의 성 프란시스이다. 그들은 특별 취급할 만한 저작이 없는데도 그 시대에 큰 종적을 남겼고 후세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공자의 매력은 소크라테스의 매력과 매우 흡사하다.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애정과 존경을 획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개성과 사상의 힘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시경>을 편찬한 것은 사실이다. 그가 <춘추> 가운데 기록한 연대기식에 보면 수다한 사건의 골조를 기록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교의의 위대한 전통은 결국 그의 제자들과 후세의 신봉자들에 의하여 쌓아진 것이었다. 각종의 경서 중에는 공자의 개성의 성격 묘사가 대부분 존재하여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일단을 우리들은 '중화'에 관한 제3장 끝에서 맛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제자 안회도 역시 그의 말에 대하여 극히 칭찬하며, 무엇인가 위대하고 신비한 것에 그를 비교했다.
"그를 우러러보면 실로 높게 보이고, 이것에 구멍을 뚫어 보려면 참으로 단단하다고 생각된다. 앞에 있는가고 생각하면 금방 뒤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공자의 성격적 특징을 가장 훌륭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기록이다. 즉 그는,
"온화하였으나 엄숙했다. 위엄이 있었으나 가열하지는 않았다. 정중하면서도 전혀 기겸하지는 않았다."
공자의 자평은 더한층 훌륭하다. 어떤 때 어느 왕이 공자의 제자 중의 한 사람에게 스승인 공자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그의 문하생은 대답할 수 없어서 돌아와서 공자에게 이 일을 여쭈었더니,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너는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어떤 사실에 열중하면 먹는 것을 잊어 버리고, 즐거울 때는 일체의 걱정을 잊어 버리고, 노령이 닥쳐오는 것을 개의치 않는 인간이라고."
이러한 서술 가운데는 무엇인가 생활의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 즉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는 열의와 적극적이고 불굴하는 욕구 이런 것이 간취된다. 그는 누차 자기는 '성인'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면학과 교육에 대하여 권태를 느끼지 않았음을 자인했다. 공자의 적극적인 욕구의 예증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의 제자의 한 사람이 어떤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는데 거기에 문지기가,
"너는 어디서부터 왔느냐."고 물었다. 이에 자로가 대답하기를, "공자가 있는 데서 왔소."라고 하였다. 문지기가 하는 말이, "그 사람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더욱더 그것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 말이냐?"라고 하였다.
공자에게는 높은 도덕적 이상주의에 대한 사명의 자각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 전부가 그로 하여금 자신을 갖게 했던 것이다. 공자의 개인적 성격의 매력은 제자들과의 대화의 방법 속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의 품격이 좋은 데 있는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언설 가운데는 유우머러스한 교사가 재담을 섞어 가면서 가르친다. 여유있는 강의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되는 것이 많다. 이런 관점에서 읽어보면 그가 때때로 토로한 하찮은 말이 참으로 훌륭한 명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극히 우발적인 말을 좋아한다. 어떤 날 그는 2, 3인의 극히 가까운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몇 사람에게 내가 무엇인가 숨긴 일이 있는가? 아니, 나는 너희들에게 하나도 숨긴 일이 없다. 내가 너희들과 같이 하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다. 이것이 나다."
다른 예로는-자공은 남을 비평하기를 좋아했다. 거기서 공자는 애칭하여 자공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야, 너는 대단히 말이 많구나. 내게는 그렇게까지 쉴 새는 없다."
다른 예를 들자면―, 공자는 말했다.
"배부르게 음식물을 먹고 마음을 비우고 하루를 사는 사람은 참으로 훌륭하다. 어떻게 하여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장기라도 두는 것이 어떨까 하고 생각한다. 그 편이 역시 더 낫겠다고 생각된다."
또한 어느 때 공자가 제자 한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을 바보로 취급하는 것같이 말했다. 그 문하생은 매우 당황했다. 하니까, 공자는 실제로는 찬성의 뜻을 암시하면서, 다만 그를 깨닫게 한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공자는 매우 양기있는 노인이었다. 배우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그가 누구이든지 가리지 않았다. 공자가 덕이 있고 정중하였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예수가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한 성서 중에 있는 이야기와 비슷한 것이다. 어떤 마을에 행실이 좋지 못한 도배들이 날뛰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 중의 몇몇 사람이 공자를 만나러 왔다. 문하생들은 공자가 그들과 만난 일에 대하여 놀랐다고 하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왜 그렇게 그들을 싫어하는가? 내게 있어서 관계되는 일은 다만 그들이 왜 찾아왔는가에 있는 것이지, 그들이 돌아가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순수한 심지를 가지고 나에게 가까이 왔을 때 나는 그 순수한 심지를 존경한다. 반드시 그 사람이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데 나의 보증이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공자는 오로지 고상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참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노래를 부를 수도 있었고, 정중하게 춤을 출 수도 있었으나, 예수가 유대인의 학자들을 증오한 것과 마찬가지로 '참인간'의 증오와 경멸로써 미워할 줄도 멸시할 줄도 알았다. 이 세상에는 정진정명의 증오를 가지지 않은 위인은 한 사람도 없다. 공자도 크게 거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논어> 가운데는 면매의 실례가 너댓가지나 기록되어 있다. 위선자라는 인간처럼 공자가 미워하는 인간 등급은 없었다. 공자는 그들을 <덕의 도둑놈>이라고 불렀다. 어느 때 그런 종류의 인간인 유비가 공자를 만나려고 했다. 공자는 없다 하라고 했다. 그러나 유비가 대문을 나서자마자 공자는 현악기를 잡고, 그에게 듣게 하기 위하여 노래를 부름으로써 실제로는 자신이 집에 있다는 것을 알렸다.
<논어>중에서 이런 한 구절은 공자의 평론가들에게 곤란을 준다. 그들은 공자는 성인이요, 인간은 아니며 항상 정중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정통파적 비평은 당연히 공자의 인간성을 몰각하지 않는 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논어>의 다른 한 구절(<맹자>에도 기재되어 있다)도 역시 평론가들을 당황하게 했다. 양화라고 하는 타락한 관리가 공자에게 돼지족을 선사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사이였으므로 양화는 공자가 집에 없을 때 의례적으로 돼지족을 공자의 집에 보내왔고, 공자는 일부러 양화가 없을 때 인사하러 갔다. 당시의 위정자에 관해서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여 공자는 말했다.
"오, 그 무리들은 쌀자루이다(즉 쌀을 담을 때만 필요할 뿐이다)."
또 어머니가 죽었는데 노래를 불렀다는 것으로 유명한 어떤 이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소년시절에 너무 무법자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한 가지도 이루어 놓지 못했다. 지금 노년이 되어서 너는 죽음과 항거하고 있다. 너는 도둑놈이다."
그러면서 공자는 막대기로 그에게 경을 쳤다. 실제로 공자는 매우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생에 충실했다. 정감과 예술적인 취미로 유쾌한 삶을 살았다. 그는 참으로 인간다운 생을 보냈다. 왜냐하면 그는 깊은 감동성과 비상하게 예민한 취미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애제자가 죽었을 때 공자는 몹시 울었다. 왜 그렇게까지 슬프게 우느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대답하기를,
"이 사람이 죽었을 때 몹시 울지 않고 내가 대체 누구를 위해서 울겠느냐."라고 했다.
그의 섬세한 민감성과 눈물을 잘 흘리는 성질은 가끔 친지의 장례식에서 볼 수 있다. 그가 집안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의 우는 것에 동요되어 자신도 역시 울고 말았다. 밖에 나가서 그는 제자에게 명령하여 말[마]에 딸리는 준비의 일부를 공물로서 바치게 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것을 나의 정식 공물로 하여 가지고 가라. 나는 아무 의미 없이 울었던 일에 대하여 화가났다."
공자는 노래를 부르고 악기(거문고[금], 비파[슬] 및 풍유[훈])를 타고, 반주음악이 있는 시가의 책을 편찬했다. 이 공자라는 사람은 예술가였다. 대개 지적한 바와 같이, 예절과 음악의 애호가였다. 그의 감독교회파적인 기질의 예증으로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회랑과 신탁및 그것과 함께 하는 일체의 의식에 대하여 공자처럼 존경의 염을 품지 아니한 예수와는 격렬하게 대조되는 것이 있다. 예수는 안식일에 웅덩이에 빠진 암양을 구해 냈다. 공자가 이런 행위에 찬성했을 것인지 또는 반대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제자 자공이 동제에 공물로 바칠 양을 폐하자고 제언했을 때 공자는 대답했다.
"사야, 너는 양을 사랑하지만 나는 예절을 사랑한다."
여하간에 그는 동물에 대하여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구사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들은 그는 어떤 사람이 그런 과실을 일으킨 것인가에 대해 물었으나, '말[마]의 안위에 대하여는 물어보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집에 있는 예술가는,
"사람을 교육하려면 시에서 시작하고 바른 행실에 의하여 굳세게 만들며, 음악에 의하여 완성한다."라고 말하게 했다.
또 이런 것도 기록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듣고 마음에 들면 그는 언제나 재청했다. 그리고 자신도 답창을 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집에 있는 예술가는 먹는 것이나 입는 것에 대하여 몹시도 까다롭게 굴었다. 내가 다른 책에서 대개 지적한 바와 같이 음식물에 까다로왔다는 그것으로도 그의 아내가 도망친 원인이 아니었을까고 생각한다. 그는 제철이 아닌 음식이든지 요리법이 잘못되었든지 장유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복장 색깔의 배합에 뛰어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검정복지에는 진흙색 소양의 모피를, 흰복지에는 새하얀 소록의 모피를, 황색복지에는 여우의 모피를 배합시킨 이유를 근대의 재봉사들은 쉽게 이해할 것이다(여기서 복지는 서양 모피복의 안감에 해당된다. 중국의 모피복은 털있는 쪽이 안쪽이고 그냥 복지가 밖으로 가게 입기 때문이다). 복지에 관해서도 그는 디자이너의 취미를 가졌다. 그의 잠옷은 발이 차가와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신장보다 훨씬 더 길게 만들어졌다. 또한 그는 일할 때에 편리하도록 오른쪽 소매를 왼쪽 소매보다 짧게 하는 것을 고안했다. 그런 괴퍅한 공자의 성미가 그 아내를 도망치게 한것만은 틀림없는 일이다(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들에 있어서는 <논어>제12장에 기록되어 있음). 그의 취미의 귀족성은 누차 이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공자, 그의 아들 및 손자 3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어떻든지 처와 이혼 또는 별거했다. 학문상의 계통으로든지 공자, 그의 위대한 제자 증자, 증자의 제자 자사의 이혼의 기록은 3대 반이 지나기까지도 깨뜨려지지 않았다. 4대 되는 해에 맹자(맹자는 자사의 곁에서 배웠음)도 역시 그 처와 이혼한 것은 같은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이 경제적으로는 아무도 부유하게 살지 못했으나, 의심없이 귀족주의자가 되기 때문이다.
공자의 위대한 명성을 설명하는 특징의 한 가지는 변함이 없는 그의 학식과 호학심이었다. 공자는 자기 자신에 관해서 반복하여 이 말을 했다. 그는 자기가 "날 때부터 진리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지식과 학문의 탐구에 있어 게으름을 모르고 근면한 독서가이면서 교사였음을 자인했다. 가옥이 열 채쯤되는 작은 부락에서도 그와 같이 바르고 정직한 사람을 몇 사람 견하기는 쉬우나 그처럼 면학에 바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그도 자인했다. 그를 번민하게 하는 사실의 하나로 그는 "면학을 게을리하는 것"을 들어 말했다. 그의 어떤 말 가운데에는 학구에 대한 탄식 비슷한 것이 인정된다. 그는 고대의 종교상의 관례나 의식이나 풍습의 부활에 뜻을 두고 하조의 유습을 탐구하려고 기라는 마을로 갔다. 또한 고대의 상조의 종교적 관례를 연구하려고 송의 마을로 갔다. 그는 말했다.
"내가 하조의 종교상의 풍습을 논할 수는 있으나 기의 마을에는 충분한 입증자료가 없다. 만약 자료만 있다면 그 모습과 풍습을 명확한 증거에 기초하여 부흥시킬 수 있을 것인데..."
다시 말하면 그는 진정한 학구적인 역사가이고, 역사적 문헌 및 현존의 풍습에 고증을 들었고, 대개 소멸되어 버린 고대의 사회적 종교적 관례와 붕괴해 버린 제정일치제를 부활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하여 공자의 <오경>은 집대성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사서>와는 달라서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역사인 것이다(청의 학자 장학성의 단정). 사람들이 공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가 당대의 가장 총명한 인물이었다기보다도 오히려 당시의 뛰어난 박사나 학자에게 고대의 서적과 학문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고대의 정치제도에 관한 광범한 역사적 학문의 체계는 일부 남아 있기도 하고 또한 붕괴되어 없어져버리기도 했다. 붕괴되어 버린 제정일치제의 종교적 의식, 특히 상조에 관해서 다시금 광범한 역사적 학문의 체계가 있은 것은 우리들이 <오경>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제자가 3천이나 된다고 했는데, 그 가운데의 72인은 <시경> <서경> 및 <예악>의 이론과 실제에 정통하고 있었다. 그는 역사를 믿고 역사에 호소하는 것을 믿었다. 왜냐하면 그는 연속성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을 시작하는 세 가지 근본 요건으로 인격, 권위있는 지위, 역사에 호소하는 것, 이런 것을 들고 그 중에서 한 가지라도 결핍하면 아무도 정치제도에 성공할 수도 '신뢰를 얻기'도 어렵다는 말이 '중화'에 관한 장 중에 씌어 있는 것이다. 그 실제상의 결과는 다른 학파에는 전부가 결핍되어 있고 광범한 역사적 학문의 일대 체계가 공자학파에 의해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으로는 노자 및 묵자 학파에 대한 공자학파의 승리는 그 내면적인 철학적 가치에 기인함과 동시에 그 학문상의 명성에도 크게 기인한다고 믿고 있다.
공자학파의 교사들은 가르쳐야 할 확고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 제자들도 공부하려고 하는 확고한 무엇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즉 역사적 학문이다. 그런데 다른 학파는 단순히 저들만의 의견 즉, <박애>라든지 <자애>를 호소하는 것밖에 아무 방법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