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어당 에세이선
방황과 고뇌의 언덕
흙으로 빚은 사람
"습의의 행위와 인품은 대관원의 어느 남자보다도 강하다."
이 말은 앞에서 얘기하였다. 대관원의 남자는 어째서 그처럼 쓸모없이 모두가 흙으로 만든 것처럼 흐리멍덩한가? 가정도 그 안에 든다. 나는 이렇게 된 도리를 얘기해 보려고 한다.
나는, <홍루몽>이라는 소설 가운데서는 설과를 그래도 제일 그럴듯한 사람으로 본다. <홍루몽>의 모든 문자의 기교는 소녀의 사정을 묘사하여 사람을 매혹시키는 데에 있으리라고 본다. 이 때문에 <홍루몽>이란 소설에는 열사보다는 열녀가 많고, 열녀 가운데는 처녀가 더욱 드러났다. 때문에 이 소설 속의 인물은 <삼국지>에서와 같이 활동성있는 관우나 장비 등과 같은 인물이나, <수호지>의 무송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중국 사회의 남자는 모두 흐리멍덩한 인물로밖에 볼 수 없겠다. 우리들은 <한서>의 법망 같은 인물이나 그의 모친을 모두 절개가 굳은 사람으로 친다. 당시는 봉건사회라서 의협의 풍이 있었으므로 눈을 흘길 만큼 관원도 반중의당에서는 의협의 대상으로 보였다. 서구의 기사풍은 아주 기특해서 기사의 독특한 사랑을 연출하였는데, 죽었다가는 다시 살아나서 그들의 하는 일은 사랑하는 여자를 보호하는 식이었다. 소위 로맨스의 연애 고사는 사랑과 기협을 아울러 불러 일으켰다. 후에 대포가 생겨 성과가 없어지고 검술도 차츰 시들어져 기사의 풍은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기관총이 비록 성능이 좋아서 사람을 죽이는 데는 그만이지만 이전의 검객들처럼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용맹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의 무사도는 지금으로부터 얼마 전인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도 살아있었던 것이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점은 여기에 있다. 어떤 나라든 그 나라에는 남자든 여자든 사회상 표준적인 이상이 있게 마련이다. 이 이상은 사회환경이나 시대조류와는 전혀 다르다. 나는 이전의 속어인 <한>이란 말을 무뢰한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소위 호한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라면 신체가 건강하고 비범한 용력을 갖춘 영웅임에 틀림이 없다. 중국 역사상 악무목이나 문천상과 같은 영웅 호한도 드물다. 맹자도, 대장부라는 말은 군자라는 두 글자보다는 기쁨이 더하다고 말하였다. 단지 사회환경과 문을 중히 여기고 무를 경히 여기는 사상 때문에 이 대장부들은 점점 문과 13경의 하나인 <이아>를 익히는 서생이 되어버리고는 늘 탄식과 울음으로 세월을 보냈다. 대장부라 굽히고 펴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지만, 인권의 보장이 없기 때문에 굽히는 때가 많았고 펴는 때는 적었다. 다시 말하면 바지 가랑이 밑으로 지나는 치욕적인 굴욕을 받고도 한신과 같은 인물이 되지 못한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말이다. 법률에도 이런 사람들의 인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 한걸음 물러나 생각해 본다면 거북이가 머리를 목 속으로 움츠려도 살 수 있는 것처럼 굽히는 때가 더욱 많다.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남자들의 이상은 변한다. 36계가 제일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곧 사람이 함양만 한다면 장차 커다란 일을 해 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여자의 사상도 변한다. 절개의 미덕을 찾아 여자로서 완전한 일을 해 내려 한다. 왜냐하면 열녀, 열부는 사회의 특별한 숭배를 받기 때문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으로는 열사보다 열녀가 더욱 많다. 이런 점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홍루몽>에서 남자는 아주 쓸모가 없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자연 명조의 기풍도 환관의 위엄이 있게 되었고 신임을 얻게 되어 임금 앞에서도 누구든지 때릴 수 있었으며 환관이 때려 죽이라 하면 죽일 수도 있었으니, 대장부의 기백이야 기를 수가 없었다. 모두가 황제의 자손이지만 우리들은 부득불 <금병매>의 토호나 열신이나 아역, 주졸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당시의 사회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동포들이야 우리들의 법도가 될 수 없는데 어찌 우리 동방 정신문명의 대표일 수가 있겠는가. 참으로 부끄러운 노릇이다.
왜 이럴까? 공자는 인을 얘기하였다. 나의 생각으로는 이 인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사람의 본성을 말하는 것이며, 인자라고 하는 것은 인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고 본다. 이 말은 나의 우둔한 의견일지 모른다. 영어로는 맨후드(manhood)라고 번역될 것이다. <논어>의 인은 약간 모호한 데가 있는 것같다. 이와 명과 인은 공자가 자주 쓰기를 저어한 말들이다. 평상시에도 공자는 어떤 사람에게도 인하다는 말은 거의 쓰지 않았다. 윤문자는 충성스럽기는 하지만 인하지는 못하다고 하였고, 진문자에게는 청빈하기는 하지만 인하지는 못하다고 하였다. 그 외에 관중과 자산도 현인이기는 하지만 인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하였고, 백이, 숙제(백이숙제)는 비록 옛 현인이기는 하지만 수양산에서 굶어 죽음으로써 인을 구하다가 인을 얻었다고 공자는 말하였다.
이 인은 절개에 가깝고 명예에 가깝다. 분명히 말한다면 여기서 인은 인애로서 해석될 수가 없고, 이상적인 사람, 또는 사람의 이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나는 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하나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성이고, 다른 하나는 인애의 인을 가리킨 것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의미는 서로 연관이 있어서 영어에서도 인자를 똑같이 '휴우먼(human), 휴우머니(humane), 휴우머니테어리언(humanitarian)'이란 여러 가지 뜻으로 밝혀 낸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란 인자의 존심을 갖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의 이상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인자란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명덕을 충분히 발휘한 안전한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명덕을 밝히려 하는 것은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귀한 본성이라는 점이요, 항상 움직이다가 물욕에 가려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던 본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을 알 수 있겠다. 때문에 군자는 죽을 때까지 인을 위반하는 일이 없으며, 안회도 석달 동안은 인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얘기해 나간다면 인에는 약간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인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만들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요원하지는 않다고 본다. 인은 요원한가? 내가 인하고자 한다면 인은 저절로 온다. 이와 같이 얘기해 보면 인은 또 별로 어렵지 않고, 단지 사람이 본디의 인성만 잃지 않는다면 인하다고 일컬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필부필부는 항상 몸을 바치면서까지 인을 이루는 대사업을 하려고 한다. 이와 같이 인이라는 것은 마땅히 있어야 할 기질로서 또, 잃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얘기되어야 하겠다. 공자가 말하기를,
"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을 수 없어 책임은 무겁고 도는 멀다." 하였고, 또, "삼군의 대장을 빼앗을 수는 있지만 필부의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
하였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든 자기 자신을 이루고 있는 기질을 보존하고 있음을 뜻한다. 자산과 제헌은 은혜를 베풀고 낭비하지 않았지만 기질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현자라고 해도 반드시 인자라고는 볼 수 없겠다. 공자는, 홀로 도시락밥을 먹고 표주박으로 물을 떠마시며 누추한 곳에서 거처하는 안회를 칭찬하면서,
"보통 사람은 사람의 본성을 남김없이 발휘하거나 지켜서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센 이가 드물어 인의 지경에 도달한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였다. 대개 공자가 인을 가끔 얘기하기는 하지만, 그의 마음 가운데에는 어떻게 해야 비로소 이룩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잘 알고 있었으리라. 바꾸어 말하면 어떻게 해야만 호한이 될 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호한이 많지 않음을 늘 서글프게 생각하여 왔을 것이다. 나는 미국의 링컨이 여기에 아주 합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영문에서, "그는 건실한 남자다"라는 말을 읽었는데 이 말은 진정한 남자의 기백이 있음을 찬미한 말일 뿐 아니라, 이 세상에는 그렇게 기백이 있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없음을 한탄한 말이기도 하겠다. 후에 맹자는 대장부라는 말을 사용하여 더욱더 발휘시켰다. 나는 응백작이나 고련과 같은 사람을 맹자가 말한 대장부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화예부인이 이유가 있어 한 조우크다. 나는 이 향군을 숭배한다. 왜 숭배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