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성과 가린여흘
땅이름
용비어천가는 세종 임금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새 글자의 실용 가능성을 실험함과 동시에 조선 왕조의 개국을 정당화하고자 정인지·최항 등에게 일러 편찬하도록 한 노래다. 이 노래에는 조선 왕조를 열기까지의 6대조 역사가 기록됐는데, 그 가운데 땅이름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사가 많이 남아 있다.
제9장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도적을 토벌하실새 사방의 제후들이 모이더니 성스러운 덕화가 오래되어 서방 오랑캐도 또 모이니, 의를 내세워 군사를 거느릴새 천리 인민이 모이더니 성스러운 덕화가 기프셔서 북쪽 오랑캐들이 또 모이니”라는 노래는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관련된 노래다.
이 노래에는 위화도에서 돌아오는 군대가 지나간 땅이름이 나타나는데, 회군하는 군사들이 안주, 자주, 이성(흙성), 평양, 중화군, 기탄(가린여흘)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매우 빠른 속도로 진군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이성(泥城)은 ‘흙성’, 기탄(岐灘)은 ‘가린여흘’이라는 한글로 표기하였다. 이처럼 용비어천가 곳곳에는 토박이말과 한자어의 대응관계를 한글을 사용하여 나타낸 경우가 많다.
‘가린여흘’을 ‘기탄’으로 옮긴 것은 ‘가린’이 ‘가르다’에 해당하는 ‘가ㄹㆍ다’에서 비롯된 말이므로 둘 이상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임을 짐작게 한다. 이처럼 ‘가린’이 들어가는 땅이름은 ‘가늘다’는 뜻을 지닌 경우와 ‘가르다’의 뜻을 지닌 경우가 있다. ‘강’을 뜻하는 ‘가ㄹㆍㅁ’이 ‘가르다’와 관련이 있음은 널리 알려진 것과 같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차별②
언어예절
사람이 생기면서 말이 생기고 말이 생기면서 차별이 생겼다. 사물의 특징과 속성을 들추어 이름을 짓고 구분하는 게 말이다.
어미아비, 암수, 사람과 짐승, 하늘과 땅, 쉬움과 어려움, 위아래, 잘남과 못남, 빠르고 느리고 …처럼 다름의 분별이 말의 본디 요소다. 분별이 차별을 낳는다. 그러니 이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은 말을 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비유나 온갖 수사법도 사물을 다르게 새롭게 낯설게 다루는 한 방편이다. 흔히 차별 용어를 쓰지 말라고 할 때 이러한 말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두드러지게 멸시하거나 차별하는 말 또는 표현을 삼가라는 얘기다. 그러나 말이란 서로 맞물리고 쓰이는 영역이 겹치는 까닭에 두부모 자르듯 칼질하기는 어렵다.
두드러지는 문제가 사람 차별이다. 성차별 문제는 말을 바꿔 성평등·양성평등을 외칠 만큼 뿌리가 깊다. 제도·법을 손질해야 할 정도이며, 여기에 이끌리는 의식·용어·말투들이 무척 다양하다. 사람들의 ‘말실수’는 주로 여기서 비롯된다.
젊은이·늙은이, 신분, 학벌, 생김새, 있고 없음과 관련된 말들과 표현들도 이에 못지않다. 종교·학벌·가문·지역·직업, 성한 사람과 성하지 못한 사람에 관련된 독특한 말도 문젯거리다. 인종 차별은 피부색과 생김새에다 말까지 달라 차별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다. 집안 곧 문벌, 학문·학벌, 종통 따위에서는 적통·정통이냐 방계냐 이단이냐로 나눈다.
사회·제도에서 사람 차별은 없애야 마땅하지만, 말의 다양성까지 부정하기는 어렵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사스 임신부
얼마 전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ㆍ사스)에 감염된 뒤 항생제 치료를 거부하며 아기를 낳자마자 사망한 30대 홍콩 여인의 기사가 심금을 울렸다. 이 산모는 사스에 감염돼 병원에 입원한 뒤에도 줄곧 뱃속의 태아를 위해 항생제 치료를 거부해 왔다는 것이다. '임산부가 항생제를 복용하거나 담배를 피우면 태아에게 해롭다' '홀몸도 아닌데 너무 무리하지 마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데 '임산부'나 '홀몸'은 이 예문에선 적절한 말이 아니다.
임산부(妊産婦)는 '임부'와 '산부'를 모두 이르는 말이다. '아기 밴 여자'와 '아기를 갓 낳은 여자'를 통틀어 '임산부'라고 한다. 임신부(妊娠婦)는 말 그대로 '아기를 밴 여자'만을 의미한다. 맨 위 예문에 나오는 '사스 임산부'도 '임부' 또는 '임신부'로 써야 더 적확한 표현이다. 담뱃갑에 적힌 '흡연은 임산부와 청소년의 건강에 해롭다'는 경고문도 '임산부'를 '임신부'로 바꿔 쓴 지 이미 오래다.
'홀몸'은 부모형제가 없는 고아이거나,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홀아비, 홀어미'도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사고로 아내를 잃고 홀몸이 되었다'처럼 쓰인다. 홀몸과 헷갈리는 말로 홑몸이 있다.
'홑몸'은 딸린 사람이 없는 혼자의 몸이나 결혼한 사람으로서 아직 아이를 배지 않은 몸이다. '홑몸도 아닌데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홑몸도 아니니 몸조심하거라' (배려가 깃들어 있는 말) 등으로 쓴다.
권인섭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