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르기
언어예절
돌려 말하거나 날을 누그러뜨려 하는 말법들(완곡어법·헤지)을 ‘에두르기’라 싸잡는다. 이는 껄끄런 말을 부드럽게, 아닌 걸 긴 것처럼 베풀거나 말꼬리를 흐리는 등으로 그 얼안이 넓어진다. 말글로 먹고 사는 이, 판단·분석·주장을 전문으로 하는 법조인·학자·정치인 두루 그 애호가들이다.
선거 유세 쪽은 에두르기가 좀 덜하다. “여러분께서 저를 ○○○으로 뽑아주신다면 …/ 제가 된다면 …”을 깔고 있으니 굳이 에둘러 말할 게 없다. 거짓일지언정 믿음과 확신을 주자면 에두를 짬이 없는 까닭이다.
에두르기에 종사하는 말과 말투는 갖가지다. 입음꼴, 인용, 겹부정, 갖은 비유, 도움토들이 대표선수다. 딱히 한정하기는 어려우나 두드러진 표지들을 들추면 “-적(的), -성(性), 보여진다, 여겨진다, 생각된다, 생각에 따라서는, 하나의, 일종의, -ㄹ 수, -겠-, 이른바, 가능성, 어쩌면, -ㄹ 것이다, -고 하겠다, 아마도, 거의, 주로, 크게, 비교적, 그리, 다소, 적잖다, 지나치지 않다, 무시할 수 없어 보인다, 곤란하다, 무리가 있다, 필요성이 제기된다, 필요로 한다, 우려가 있다, 하고도 남는다, 알려져 있다, 판단되어진다, 듯하다, 성싶다 ….” 재미있는 것은 외래말투가 많다는 점이다.
에두르기는 잘만 쓰면 상대에게 겸손·공손·헤아림으로 다가가는 방편이 된다. 문제는 버릇으로 막 쓴다는 현실이고, 비겁·부정직·무책임을 드러내는 말투로 떨어질 위험이 높으며, 결국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 군말이나 다리아랫소리가 되게 한다는 점이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소행·애무
북녘말
남북이 같은 말을 비슷한 뜻으로 쓰고 있지만, 그 느낌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는 말이 있다. 이런 말은 대화할 때 특히 주의해야 한다. 생소한 말을 듣게 된다면 그 뜻을 문맥에서 짐작하거나 뜻을 물어보아 확인할 수 있지만, 말에서 풍기는 느낌에 차이가 있다면 묻기도 곤란하고,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북녘말 ‘소행’과 ‘애무’에 그런 차이가 있다.
“전날에, 렬녀의 소행을 찬양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세우는 붉은 문.”(조선말대사전) “백락신이란 자의 소행을 보면 전수이 날도독놈의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1)
남녘에서는 소행(所行)을 부정적인 일에 쓰기 때문에 ‘열녀의 소행’을 기념하기보다는 ‘열녀의 행적’을 기념하여 열녀문을 세운다. 북녘에서는 ‘소행’을 긍정적인 일, 부정적인 일에 두루 쓰기 때문에 ‘어여쁜 소행, 아름다운 소행, 기특한 소행’이 가능하다. 남녘에서 이런 표현을 쓴다면 비꼬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전수이’는 ‘전적으로’의 뜻이다.
“황소는 광섭의 지극한 애무에 반겨 어쩌지 못하듯 꼬리를 휘두르고 영각을 치기도 하였다.”(조선말대사전) “지쳤던 아이는 어머니의 다정한 애무에 그만 솔곤히 잠이 들었다.”(조선말대사전)
남녘에서 ‘애무’는 주로 ‘이성간의 사랑 표현’으로 쓰이지만, 북녘에서는 글자뜻 그래로 ‘쓰다듬다, 어루만지다’처럼 포괄적으로 쓰인다. 단순히 ‘사랑하고 귀여워하며 어루만지는 것’이어서 황소를 애무하기도, 어머니가 아이를 애무하기도 한다.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
또 늦었어!
'따르르릉. 아이쿠, 벌써 아홉시잖아. 또 지각이다. 어제 1차만 마시고 버스를 탔어야 했는데. 그 녀석이 자꾸 좋은 데가 있다고 구스르는 바람에…. 저번엔 아파서 병원에 들렸다 회사에 가겠다고 둘러댔는데 이번엔 뭐라고 하지? 할 수 없지 뭐. 싹싹 빈 다음 과장 비위를 거슬릴 만한 일은 나중에 처리하는 거야.'
여러분은 지각 안 하시겠죠? 오늘은 지각대장 김대리를 따라가 봅시다. 그의 친구는 굉장한 술꾼입니다. 항상 한잔 더 하자고 친구들을 꾑니다. 이렇게 그럴듯한 말로 유혹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가 '구슬리다'입니다. 김대리는 이걸 '구스르다'로 잘못 알고 있네요. 그 녀석이 '구스르는 바람에'가 아니라 '구슬리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된 거지요.
여러분은 지각하면 어떤 핑계를 대시나요? 병원 얘기는 꺼내지 마세요. 몸 약한 건 자랑이 아니니까요. 지나는 길에 잠깐 거치는 것은 '들르다'입니다. 그걸 김대리는 '들리다'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병원에는 '들렸다'가 아니라 '들렀다' 가는 것입니다.
거스르다는 '-을 거스르다'의 형태로, 거슬리다는 '-에 거슬리다'의 형태로 사용됩니다. 김대리가 업무 중 졸게 되면 당연히 과장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겠지요? 지각한 주제에 상사의 눈에 거슬릴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막강한 알코올의 힘을 그가 어찌 이길 수 있겠습니까.
나른한 봄, 내일을 위해 일찍 집에 들어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