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에 대한 반성
망나니 호칭 - 지존이 무상하다
얼마 전 "지존파"라는 이름의 폭력 단체가 끔찍한 일을 저질러 세상을 놀라게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보다는 그들 망나니 패거리를 불러주는 호칭이 너무 격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과, 또 이를 당연시 불러 주는 언론 매체의 무신경에 있다. 지존이 무슨 뜻인가? 그네들이 이 지존의 말뜻을 알고 조직명을 삼았는지는 모르지만 신문이나 방송에서 한결같이 지존파, 지존파하고 불러주는 통에 일반인들은 "지극히 나쁜 놈들" 정도로 알고 있지나 않는지 모르겠다. 더할 나위 없이 지극히 존귀한 분, 옛날로 치면 임금님이나 존경하는 스승 또는 조상을 공경하여 부르던 호칭이 바로 지존이 아니던가. 게다가 지존에 붙는 접미사 "파"는 또 무엇인가. "파"는 본래 물이 나뉘어 흐르는 갈래에서 유래한 한자로서 실학파니 낭만파니 보수파니 하는, 사상이나 행동을 같이하는 계통을 일컫는 용어이다. 이런 돼먹지 않은 불한당들에게 이렇게 고상한 말을 붙이다니, 그야말로 천부당만부당하다. 기껏해야 깡패라든가 패거리라고 할 때의 그 "패"나 한자어의 무리를 뜻하는 "배"라도 붙여 주면 고작이 아닐까.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무리가 어디 지존파뿐일까. 자식에게는 지존이라 할 수 있는 부모를 살해한 박 아무개, 여자 승객을 납치하여 살해한 택시 운전사, 법정 증언을 문제 삼아 잔인한 복수극을 벌인 어느 망나니 등 요즘 우리 사회는 온갖 망나니들의 행패로 어수선하다.
우리말에서 악인을 칭하는 용어는 한자어가 대부분이다. 선과 상반되는 악은 본디 모질고(불선), 더럽고(추), 나쁘기(불량) 때문에 미움(증)의 대상이 된다고 하였다. 고유어로는 "나쁜 놈" 정도가 되겠는데, "나쁘다"라는 말도 본래 악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수준이 낮다(저)는 정도로 "덜된 놈"과 비슷한 말이다. 악인에 대한 한자어 가운데 불한당은 좀 유별나다. 땀을 흘리지 않는 자, 곧 노력하지는 않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화적떼를 지칭한다. 고유어처럼 보이는 깡패, 도둑, 건달 등도 한자어에서 유래했다. "깡패"의 "깡"의 어원을 영어의 "갱(gang)"으로 보는 분도 있으나 이는 한자어 강에서 찾는 편이 옳을 듯하다. 매나니로 억지스럽다는 뜻의 "깡부리다"를 비롯하여 "깡다구, 깡그리, 깡으로" 따위의 어휘도 모두 강이 경음화한 것이다. 따라서 깡패는 깡부리는 패거리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다. 악인을 지칭하는 고유어는 앞서 말한 대로 나쁜 놈이나 못된 놈, 덜된 놈 또는 망나니나 개차반 정도가 고작이다. 용어의 가짓수도 적을 뿐더러 뜻도 한자의 악이나 영어의 bad와는 격을 달리한다. 우리는 인간을 보기를 이미 "되어 있는 존재(being)"가 아니라 장차 "되어지는 존재(becoming)"로 인식한다. 못된 놈, 덜된 놈은 인간으로서의 됨됨이를 미처 갖추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망나니는 옛날에 사형을 집행할 때 죄인의 목을 베는 짓을 업으로 삼았던 사람으로 "마구 낳은 이"의 준말이다. "마구(줄어서 "막")"는 아직 길들이지 않은 원시 그대로의 상태를 이름이니 "막국수, 막걸리, 막두부, 막소주, 막과자" 등이 그런 예이다. 또한 마구 운다, 마구 쏟다에서 보듯 앞뒤를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해댄대는 뜻도 있다. 함부로 내뱉는 말을 막말이라 하고 닥치는 대로 해내는 일을 막일, 막노동, 막벌이, 마구잡이라 한다. "함부로"라는 뜻 외에도 "막"은 "마지막"의 준말로 쓰이기도 한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마지막 상황을 "막판"이라 하고,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최악의 상태를 "막가"라 이름한다. 여기서 말하는 "막가파 언어"는 바로 그런 상태의 언어를 지칭한 것이다.
망나니는 앞서 말한 대로 "마구 낳은 이"의 준말인데, 이는 아무렇게나 짜서 품질이 좋지 않은 무명, 곧 "막낳이"가 사람에게 그대로 옮겨 붙여 쓰이게 된 것이다. 자식을 되는 대로 마구 낳기만 했지 제대로 길들이고 순화시키는 교육을 등한시한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돼먹지 않은 망나니들도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됨됨이를 갖춘 인간이 될 수 있다. 나쁜 놈이라 일컫는 이들의 인품이 아직 낮기 때문에(본래말이 "낮브다") 수양으로 일정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다. 악인을 칭하는 고유어의 유래에서 보듯 비록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인간을 보는 우리 조상들의 눈은 그토록 관대하였다.
이젠 제발 더 이상 막다른 길로 내달리는,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막살하는(끝낸다는 의미의 경상도 방언)" 망나니는 없어져야겠다. "지존무상"은 그저 영화 제목일 뿐 지존은 지존 그대로 영원히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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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덕·바리데기
사람이름
<세종실록>을 보면, 배천 사람 유을미의 아내 ‘막덕’이 한배에 세 아이를 낳았기로 나라에서 쌀을 내렸다. 초계의 약비가 세 아들을 낳았는데 둘이 숨졌다. 셋을 낳았으니 쌀 열 섬을 줘야 한다. 둘은 죽고 하나만 살았으니 어째야 할지 임금과 신하들이 논의했다. 예조에서 닷 섬만 주는 것이 옳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중종실록>에도 안변 사는 쇳덩이 아내 은금, 충청도 회덕의 일비, 전라도 창평의 늦덕(芿叱德/於叱德)이 세 쌍둥이를 낳았다.
이름접미사 ‘-덕’(德)은 계집이름에 주로 쓰였는데 “가오덕·가지덕·감덕·개덕·거믈덕이·검덕이·계덕·골덕·곰덕·곱덕·곶덕·구덕·구관덕·굿덕·귀덕·금덕·긋덕·난덕·납덕·넙덕·논덕·늦덕·니덕·뎡덕·돌덕·두리덕·뚠덕·막덕·만덕·망덕·모로덕·문덕·뭉덕·믜덕·믠덕·바리덕/‘ㅂ.리덕’·반덕·발늦덕·보덕·본덕·부억덕·분덕·불덕·사덕·산덕·삼덕·사랑덕·생덕·서덕·설덕·션덕·손덕·솟덕·수덕·순덕·쉰덕·시덕·신관덕·앙덕·야랑덕·야무덕·어리덕·어목덕·언덕·엇덕·연덕·오덕·오목덕·옴덕·울덕·움덕·은덕·의덕·이른덕·인덕·일덕·자이덕·작덕·잣덕·쟈근덕·졈덕·존덕·죵덕·죽덕·진덕·쳔덕·쳥덕·큰덕·톨덕·한덕·헌덕·후리덕·흔덕·흘리덕이 …” 따위가 있다.
난덕·니덕·사랑덕·구관덕(舊官-)·신관덕(新官-)·큰덕이 따위에서 ‘-덕’은 덕택의 뜻으로 쓰였다. 죽은 사람의 넋을 저승으로 보내는 오구굿, 그 주인공 ‘바리데기’가 ‘바리덕/‘ㅂ.리덕이’’의 다른 소릿값임을 볼 때 막덕·부억덕·작덕이는 낱낱 ‘막대기·부엌데기·작대기’를 적은 것으로도 생각된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갈대
풀꽃이름
초겨울 산과 들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나 갈대를 본다. 막걸리라도 한 잔 걸치면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로 시작되는 ‘갈대의 순정’이나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하는 ‘짝사랑’ 노래를 흥얼거릴 법하다. 얼핏 보기엔 비슷하지만 정확히 구별하자면, 갈대는 젖은 땅에 살며 갈색이 돌고 푸슬푸슬한데, 억새는 마른 땅에 살며 은백색을 띠고 비교적 정갈한 모습이다.
갈대는 볏과의 풀이라서 속이 비었고, 발·삿갓·자리 따위를 엮는 데 쓴다. 윤호 등이 엮은 <구급간이방언해>(1489)에 ‘?대’로 나와 있는데, 이는 ‘‘ㄱ.ㄽ대’+ㅅ+대’의 구조이니 흔히 ‘‘ㄱ.ㄹ+ㅅ+대’ >갈’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에 나오는 노랫말은 ‘바람에 날리는 새털과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인데도, ‘갈대와 같은 여자의 마음’으로 번역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갈대’는 흔들리고 약한 풀이름의 대표격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아무리 바람에 시달려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갈대의 굳건한 습성 아닐까. 펄 벅이 한국을 ‘살아 있는 갈대’(The living reed)라고 썼듯이 ….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해라體와 하라體
학원 선생님인 독자께 e-메일을 받았습니다. 시험 문제를 낼 때 맞는 답을 '써라'라고 해야 하는지, '쓰라'라고 해야 하는지 늘 헷갈린다고요.
'(정답을) 고르라/골라라''(그림을) 그리라/그려라''(물음에) 답하라/답하여라''(알맞은 것끼리) 이으라/이어라' 등도 비슷한 고민거리네요.
얼굴을 맞대고 얘기할 때 상대에게 '먹으라, 마시라, 잡으라, 보라'라고 하나요? 아니지요. '먹어라, 마셔라, 잡아라, 봐라'라고 하지요. 상대를 아주 낮춰 부르는(명령하는) 이런 말투를 해라체(體)라고 합니다. 이처럼 일상 생활에서는 '동사 어간+어라/아라' 형태의 구어체 명령형을 쓰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잠깐 왼쪽의 오늘의 운세를 봐 주실래요. '60년생 자신감을 키우라. 37년생 받을 것은 포기하지 말고 받으라. 61년생 건강에 신경 쓰라. 26년생 버릴수록 행복해진다. 마음을 비우라.' 여기에서 '키우라, 받으라, 쓰라, 비우라'는 '키워라, 받아라, 써라, 비워라'라고 하는 것보다 상대를 덜 낮춘 느낌이 듭니다. 이처럼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독자에게 책·신문 등의 매체를 통해 명령의 뜻을 나타낼 때 하는 말투를 하라체라고 합니다. '동사 어간+라/으라' 형태(문어체 명령형)로 쓰입니다.
시험 문제는 여러 학생을 대상으로 한 글말(문어)입니다. 따라서 일관성 있게 '고르라, 그리라, 답하라, 쓰라, 이으라'로 써야 합니다.
김승욱 기자 kswjir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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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낙서로 남긴 좌우명
시카고의 맥비키 극장으로부터 수많은 구경꾼들이 줄을 이어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최대의 마술사인 알렉산더 허만의 공연이 끝난 것이었습니다. 신문팔이 소년 하나가 덜덜 떨며 돌아가는 군중들에게 신문을 팔고 있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코트도 입지 못하고 돌아갈 집도 없는 소년은 결국 극장 뒤의 골목길에서 팔다 남은 신문을 베고 누웠습니다. 배가 고팠습니다. 추위로 인한 떨림도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드러누운 채로 '그래 나도 마술사가 되어야지. 이제 두고봐라! 마술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면 이 극장에서 본때를 보여 주어야지.' 그는 이를 악물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로부터 20 년, 그는 정확히 그 다짐을 실현했습니다. 출연을 끝내고 극장 뒤의 골목길에 가보니 벽에 자기 이름의 머릿글자가 그대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20 년 전 자신이 새겨 놓은 것이었습니다. 40 년간 세계를 순회하며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신비를 연출한 하워드 더스틴의 생애는 그가 무대 위에서 전개하는 쇼만큼이나 아찔하고 환상적이었습니다.
더스틴은 소년 시절에 부친에게 지독하게 매를 맞고 울면서 집을 뛰쳐나갔는데, 그 후 5 년간 소식이 없자 가족들은 당연히 그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떠돌이 부랑자 신세가 되어 무임승차, 걸식, 도둑질을 하면서 10번이나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이윽고 경마의 기수가 되어, 17세 때에는 뉴욕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무일푼에 기댈 언덕도 없는 그는 어느 날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당신 속에도 정확히 한 사람의 인간이 숨어 있는 겁니다."
난생 처음 받은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는 신앙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로부터 2주일 후 부랑자 출신의 그가 차이나타운 거리에서 즉흥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의사 겸 전도사가 되기 위하여 펜실베니아 대학에 입학하기로 했습니다. 올버니에서 갈아탈 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다 시간이 남아 극장에 갔는데 마침 그곳에서 알렉산더 허만이 요술 묘기를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탈 기차는 생각하지도 않고 허만이 묵는 호텔로 찾아가 이웃방에 투숙하고 허만을 만나려고 했으나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열쇠구멍에 귀를 대보거나 복도를 서성거리기만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허만이 정거장으로 가자 그곳까지 쫓아가 결국 허만이 타고 가는 기차까지 따라 타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허만과 같이 공연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더스턴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었는데 유료관객 6백만명, 수입 2백만 달러라는 경이의 기록을 세우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더스틴의 성공 비결은 두 가지인데 그 중 하나는 자신의 개성을 관중들에게 팔아 넘기는 기술이며, 다른 하나는 관중을 마음속으로부터 깊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관객들이 아주 좋아요.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제일 좋지요. 근사한 인생이죠. 참 즐거워요!"
자신이 즐겁지 않으면 누구도 기쁘게 해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지한 사람들이란, 가끔 습관적으로 중대한 면이 없는 일이 중대한 면을 보는 사람들이다. (V. W. 브루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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