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에 대한 반성
노름 용어 - 고스톱 왕국은 피바가지
우리네처럼 놀이를 즐기는 민족도 드물 것 같다. 전국 곳곳이 노래방이요, 가는 곳마다 고스톱판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 오락이라는 고스톱은 어려운 경제 사정 속에서도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심지어 고스톱판에 끼지 못하면 한국인이 아니라는 억지 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사실 노는 일처럼 편하고 즐거운 것도 없다. 다만 놀아도 노래나 놀이에 그쳐야지 오로지 "놀고 먹고", "놀아날" 지경에 이르면 곤란하다. 놀이 또한 여가 선용에 그쳐야지 돈과 연관되어 그 일에 얽매이는 "노름"에 이르면 더더욱 곤란하다.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서 놀이방과 노름방, 놀이꾼과 노름꾼, 놀이판과 노름판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돈이나 재물을 걸고 노는 노름에도 시대에 따라 유행이 있다. 예전에는 골패나 주사위 또는 마작이나 투전놀이 같이 기물을 이용한 놀이가 대종을 이루었으나 최근에 와서 점차 카드로 옮겨왔다. 우리나라의 카드라면 꽃그림이 그려진 화투인데, 이 화투장의 그림은 인물 중심의 서양 트럼프와는 대조가 된다. 1년 열두 달에 걸쳐 나무와 꽃이 그려진 화투장을 보면서 못내 유감스러운 그림이 있다. 유일하게 사람이 그려진 12월의 "비"가 바로 그것이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버드나무 가지에 뛰어오르는 개구리를 응시하고 있는 그림 속의 사람은 일본의 유명한 화가라고 한다. 그런데 일본 냄새를 짙게 풍기는 이 그림을 왜 바꾸지 못하는가. 꼭 그렇게 화투의 국적이 일본임을 밝혀야 하는지 그것을 묻고 싶다. 화투를 이용하는 놀이도 예전의 "나이롱 삥(뽕)"이나 "섰다"에서 "짓고 땡"으로 유행이 바뀌더니 지금은 "고스톱"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그 변화를 보면 놀이의 내용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명칭은 고유어에서 외래어로 교체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고스톱은 한때 "고도리(새 다섯 마리라는 뜻)"라는 일본어가 쓰였으나 이내 영어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뻥"이나 "뽕", "섰다"나 "짓고 땡"이란 명칭은 유치하기는 하나 그런대로 재미있는 우리말이다. "뻥이야!"라면 허풍이나 거짓말을 뜻하고 "뽕이 났다"면 비밀이 탄로났음을 나타낸다. 놀이가 진행되는 동안 호시탐탐 노렸던 어떤 수를 터뜨린다는 의미로 이런 명칭이 생겼을 것이다. "땅(또는 땡)"은 땡땡구리의 준말로 본래 두 패가 서로 같다는 뜻의 동이라는 한자음에서 유래한다. "땡잡았다"면 두 패가 같이 나왔다는 뜻으로 그 끗수의 크기에 따라 1(삥땅)에서 10(장땡)까지 이어진다. "삥땅치다", "장땡이다"는 흔히 들을수 있는 말이다. 노름 용어이기는 하나 일반어로도 어느정도 대접을 받는다. 언제부턴가 장땡 위에 38광땡까지 설정했으나 그것은 노름판의 사정이고 일상어로서는 어디까지나 장땡(최고)이 최상이다. 땡과 함께 임의로 설정한 족보 다음으로 끗수가 9인 "가보"에서부터 1인 "따라지"와 0인 "망통"에 이르기까지 끗수의 크기에 따라 노름판의 승패는 결정된다. 따라서 따라지와 망통은 노름판에서는 가장 천대받는 패지만 일반어로서는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 "꼴지에게 갈채를"이라는 책 제목도 있듯이 약자에게 보내는 연민의 정이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한국전쟁 전후 월남민을 일러 "3,8따라지"라 부른것이라든가 "따라지 산조"같은 말은 우리에게 친숙한 말로 자리 잡았다. 더욱 한심한 끗수 "망통"을 예전에는 "황"이라고 했다. 황은 골패놀이에서 짝이 맞지 않는 골패짝을 이른 말인데, 이번 놀이는 사라졌으나 그 용어만은 아직도 살아 있다. "황잡다", "황그리다"에서 "말짱황이다"라는 말을 자주 들어 보았을 터이다. 큰 낭패를 보거나 아무것도 손에 넣을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터져나오는 탄사이다.
노름판의 특수 용어가 일반화된 것 가운데 "살"이라는 말이 있다. 노름판에서 한판에 거는 일정액의 몫에 덧태우는 금액을 살이라 한다. "살을 댄다" 또는 "살을 자른다"는 말이 그것인데, 여기서 살을 두 곱, 세 곱으로 대는, 이른바 "곱살을 대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일에 공연히 끼여드는 "꼽싸리 끼는" 사람과 공짜만 좋아하는 "꼽싸리꾼"도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고스톱판의 재미는 뭐니뭐니 해도 상대가 설사를 했거나 ("쌌다"고도함), "바가지를 썼을 때" 또는 "따블, 따따블"이라 하여 이중 삼중의 벌금을 과중시켜 이른바 "대형 참사"가 벌어졌을 때이다. "바가지(줄여서"박")쓰다"는 옛날 개화기 이후에 크게 유행했던 십인계라는 노름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놀이는 1에서 10까지 숫자가 적힌 바가지를 엎어 놓고 물주가 어떤 수를 대면 그 수가 적힌 바가지에 돈을 댄 사람이 못 맞힌 사람의 돈을 모두 가지고 손님이 못 맞힐때는 물주가 이를 가지는 그런 게임이다. 바가지 중에도 가장 흔한 바가지가 피바가지(피박)일거다. 남들은 알곡을 거둘 때 자신은 껍데기에 불가한 피(본래 말은 돌피)도 제대로 수확하지 못한 데 대한 벌칙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피는 "피보다"의 "피(혈)"가 아니라 돌피의 피임을 알아야 한다. 노름판이 워낙 살벌한 곳이다 보니 "광박, 됫박, 싸다, 트다, 싹쓸이"등 그 용어인들 점잖을 리 만무하다. 게다가 "나가레, 쇼당, 고도리" 따위의 용어는 아무리 노름판이지만 재고해 봐야 할 것들이다.
유희로서의 놀이는 단지 그것으로 끝나야 한다. 놀이가 노름으로 이어질때는 그야말로 피바가지를 쓰거나 피(혈)를 볼 수 밖에 없다. 고스톱 왕국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칭은 이제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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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사랑
북녘말
‘갑작’이 결합된 낱말은 북녘의 ‘말다듬기 사업’의 영향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조선말사전>(1960), <현대조선말사전>(1968)에는 ‘갑작스럽다·갑작스레’ 외에 ‘갑작바람·갑작병’만 있는데, 70년대에 남녘 사전에도 반영됐다. ‘갑작스럽다·갑작스레’는 남북이 같이 쓰는 말이다.
1975년에 나온 <새우리말 큰사전>(신기철·신용철)에서 ‘갑작바람·갑작병’ 외에 ‘갑작사랑’을 실었다. 여기서는 ‘갑자기 하는 사랑’이라는 뜻풀이, 속담 ‘갑작사랑 영 이별’과 그 뜻풀이만 싣고 있다. 이후 <우리말큰사전>(1991), <조선말대사전>(1992)에서도 추가된 내용 없이 다루었다. ‘갑작’이 결합된 낱말 가운데 남녘에서 사전에 추가하여 북녘 사전에 수용된 말은 ‘갑작사랑’이 유일하다.
북녘에서 만든 새말은 80년대 이후 사전에 반영되었다. <현대조선말사전> 2판(1981)에서는 ‘갑작달리기·갑작바람·갑작변이·갑작변이설·갑작병·갑작부자·갑작수·갑작죽음·갑작흐름·갑작끓기’가 추가되었고, <조선말대사전>(1992)에서는 ‘갑작변이고정·갑작변이종·갑작변이유발·갑작비·갑작사랑·갑작졸부·갑작출세’가 추가되고, <조선말대사전> 증보판(2006)에서는 ‘갑작벼락·갑작변이률·갑작변이체·갑작변이육종·갑작푸닥거리·갑작힘’이 추가되었다. ‘갑작’이 ‘갑자기’와 같은 뜻이라는 것만 알면, 각 낱말의 뜻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북녘 사전에 지속적으로 낱말이 추가되는 것을 보면, ‘갑작’의 조어력이 꽤 센 것으로 보인다.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
금덩이·은덩이
사람이름
금성대군은 수양대군의 동생으로 단종 복위 운동을 하다 나중에 사약을 받은 이다. 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갓동(加叱同)은 충주에 속한 종이 되어 세 아들을 뒀는데, 金叱丁·鐵丁·銀丁(금질정·철정·은정)이라고 한다.
金叱丁을 金丁이라고만 썼다면 ‘-丁’은 어김없이 한자이름 돌림이다. 金叱丁으로 적은 것은 이두표기임을 가리킨다. 丁은 본디 ‘뎡’이란 소릿값을 지녔으나 이름접미사로 쓰일 때는 ‘덩’을 적는다. 갓동의 세 아들은 금떵이·쇠덩이·은덩이로 읽힌다. 이름 표기에서 金(쇠 금)은 ‘쇠’ 또는 ‘금’을 적고, 鐵(쇠 철)이 ‘쇠’ 또는 ‘텰’을 적으므로 金叱丁는 쇠덩이가 아닌 ‘금떵이’임이 분명하다.
‘-덩이’(丁·貞·加應)가 붙은 사내이름에 ‘그믐덩이·귿덩이·금덩이/금떵이·돌덩이·두덩이·만덩이·모덩이·벽덩이·블덩이·쇠덩이·수덩이·은덩이·일덩이·큰덩이·한덩이·후덩이’ 따위가 있으며, ‘금덩이·돌덩이·옥덩이·움덩이·흙덩이’는 계집이름으로 쓰인다. ‘덩이’는 작게 뭉쳐 된 것을 일컫고, 한 덩이, 두 덩이 따위 세는 말로도 쓰인다. 접미사로 쓰일 때는 밑말의 성질을 가진 사람의 뜻을 나타내며, 고집덩이(고집쟁이), 원수덩이 따위가 있다. 이름접미사 ‘-덩이’는 세 가지 뜻 모두로 쓰인다.
단단하다고 ‘돌덩이’, 몸에 열이 많아 ‘블덩이’로 지었을 법하다. 두덩은 눈두덩에도 쓰이는데, ‘그믐덩이’는 뭘까? 그믐은 달이 없는 캄캄한 밤이다. 금·은을 아울렀거나 얼굴빛을 보고 지은 말일까? ‘흙덩이’는 屹加應(흘가응), 土塊(토괴)로 적었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벌개미취
풀꽃이름
꽃값이 비싸다 싸다 얘기하지만, 어버이날이나 졸업식날 등 특별한 날을 빼고는 한결같다. 여름에는 싸지만 금방 피었다 시들고, 겨울에는 비싸지만 오래 볼 수 있으니 결국 시간당 누리는 꽃값은 같다. 엊그제 외국인 학생들의 한국어 과정 수료식을 마치고 국화꽃다발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 중에 보니 ‘벌개미취’도 들어 있다. 우연으로 그랬겠지만 서양식 꽃말이 ‘그대를 잊지 않으리!’라니 고맙다.
‘벌개미취’에서 ‘벌’은 ‘넓은 벌 동쪽 끝으로~’에 나오는 그 벌이다. ‘벌노랑이/ 벌씀바귀’처럼 들판에 나는 풀꽃 이름에 붙인다. ‘개미’는 꽃잎 하나 하나가 개미를 닮은 듯하고, ‘취’는 어린잎을 나물로 먹기애 붙었다. ‘벌개미취’는 사는 데, 생긴 모양, 쓰임이 두루 어울린 이름이다.
미국 도시이름 ‘시애틀’은 본디 원주민 추장 이름이었다고 한다. ‘합법적’으로 헐값에 땅을 팔라는 그쪽 대통령의 제안에 시애틀 추장은 “우리가 어떻게 공기와 시냇물을 소유할 수 있으며,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사고 판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했다. 더욱이 ‘들꽃은 우리 누이고, 말과 독수리는 우리 형제’라고 했다니, 시애틀 추장이 보기에 벌판에 있는 꽃을 꺾어 파는 일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일까.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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