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에 대한 반성
허망한 언사들 2 - 구호가 없는 사회
"레미콘에 물을 타면(가수) 부실 공사 원인 된다" 최근 도로를 질주하는 레미콘 트럭에 적혀있는 표어다. 별로 새로울 것도, 또 일반인들이 알아서 소용될 것도 없는 이런 문구를 붙이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또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당사자들만 명심하고 평소에 잘 지키면 될 일이 아니던가. 금년처럼 "부실 공사 추방"을 소리 높여 외쳐댄 적도 없었다. 공사 현장 어딜가도 "추방 원년"이라는 표지판을 설치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성수 대교나 삼풍 백화점 붕괴는 지난 일이라고 접어 두더라도 경부 고속철도 공사가 어떻고 인천공항 공사가 어떻게 하는 소문이 들릴 때마다 이런 구호가 새삼 허망하게만 느껴진다. 지금도 간혹 영업용 택시에서 "친절히 모시겠습니다"라는 표어를 볼 수 있다. 언뜻 보면 그럴싸한 말 같지만 되씹어보면 고약한 구석이 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택시가 손님을 친절히 모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동안 손님을 어떻게 모셨기에 이런 표어를 붙이게 되었을까.
자가용 승용차에도 이와 유사한 스티커를 붙인 적이 있다. 이른바 "내 탓이요"라는 다소 특이한 구호가 그것인 바, 어떤 종교 단체가 벌이는 사회운동 차원의 표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스티커를 붙인 차량이 마구 교통위반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그래, 그렇게 달리다가 사고라도 나면 그건 분명 네 탓이다 이놈아!" 하고 욕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초보 운전자가 붙이는 스티커 문안도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간혹 "당신도 한때 초보였다"라든가 "형님들 좀 봐 주시오"라는 다분히 시비조의 문구를 붙인 차량을 보게 되는데, 이런 문구가 무슨 효과가 있을까? "긁어부스럼"이라는 말처럼 다른 차량의 협조는커녕 반감을 사서 오히려 곤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북한의 평양 거리에 나붙은 "우리는 행복해요"라는 대형 간판을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그들이 실제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면 모르지만 들려오는 이야기가 한결같이 굶어 죽고, 탈북자가 속출한다는 우울한 소식이고 보면 "행복하다"는 표어가 더 허망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궁극적 목표가 행복이겠지만 우리는 대체로 "행복하다"는 직설적 표현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행복이란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지는 것, 곧 천운이라 생각한다. 행복이란 곧 위험한 것이라는 인식, 다시 말하면 행복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궂은 일이 뒤따른다는 호사다마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아이고, 내 복에 무슨..." 행복이 깨지는 순간 으레 이런 체념 섞인 독백이 터져 나오는 것도 그런 인식 때문이다. "지놈이 복에 겨워서..." ,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똥 싸는 놈" 복이란 이처럼 멀리 있는 것이라고 믿기에 이를 자기 것인 양 즐기는 이들에게 위와 같이 비아냥도 서슴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아임 해피(I am happy)"를 연발하는 서구인들을 보며 우리는 적잖은 거부감을 느낀다. 행복이란 추구의 대상이지 도달할수 있는 목표가 아니기에 마치 그것에 도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남에게 행복을 빌어 줄 때도 행복이라는 말 대신에 대게 행운이란 말을 쓴다. 행복이란 말은 너무 거창하게 느껴지기에 편지글 말미에서도 "행복을 빕니다"가 아닌 "행운을 빕니다" 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표현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아빠 사랑합니다, 엄마 사랑해요"는 최근 어디서나 들을수 있는 흔해빠진 인사말이다. 어린자식이 엄마, 아빠의 볼에 입을 맞추며 이런 말을 했다면 그런 대로 귀여운 맛이나 있다. 그러나 어른들 세계에서 그랬다면 아무래도 어색할 것이다. 한국인에게 사랑 표현은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아이 러브 유"는 어디까지나 서구인의 입에 발린 상투어요, 우리네 부모님들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평생을 해로했다. 눈빛이나 표정 따위의 몸짓 언어로, 아니면 화롯불같은 은근한 마음 하나로 이혼하지 않고 평생을 같이 살아 온 것이다. 부모 자식같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하자. "엄마 날 사랑하셔요?" , "그럼, 난 너를 무척이나 사랑한단다. 이만큼씩이나..." 어떤가? 혹시 의붓어미와 의 사이에서 생소한 애정을 확인하려는 대화라 생각되지 않는가? 소설에서 이런 장면이 나온다면 이는 분명 우리 정서와는 거리가 먼 외국 작품을 번역한 것이리라.
표어나 구호의 본성이 그런 것이다. 어디선가 "우리 단결합시다!"를 외친다면 이는 분명 그 단체가 화합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구호나 표어가 없는 편이 낫겠지만 그것까지는 바랄 수 없고, 단지 있다면 그 격을 좀 높일 필요가 있다. 외국의 어느 극장에서 모자를 벗으라는 표어 대신 "노파는 모자를 써도 좋습니다"라는 문안을 썼더니 팔십이 넘은 노파가 슬그머니 모자를 벗더라는 이야기가 참고할 만하다. 아직도 뒷골목에는 "소변금지"라는 조잡한 글씨와 함께 가위 그림까지 곁들인 낙서를 볼 수 있다. 이곳은 "당신은 문화인(혹은 "신사")입니다"라는 표어를 붙이거나 아니면 깨끗한 화장실을 지어 놓는다면 그런 식의 허망한 표어는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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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레마을과 시루
땅이름
김유정이 태어난 마을 이름은 실레마을이다. 한자어로는 ‘증리’(甑里)라 하니 이는 곧 떡을 찌는 ‘시루’를 뜻한다. 김유정은 “춘천읍에서 한 이십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만 마을”로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득한 마을로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라고 묘사하였다.
땅이름 가운데는 땅의 모양에서 생겨난 것들이 많다. 실레마을이 시루를 닮은 데서 비롯된 것처럼 시루를 닮은 산을 ‘시루뫼’ 또는 ‘증봉’, ‘증산’이라고 부른다. ‘시루봉’은 분지를 이룬 마을에서는 비교적 자주 발견되며, 시루의 방언인 ‘시리’, ‘실리’, ‘실기’, ‘슬구’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시루의 겉모습이 둥긋한 데 비해 시루의 안쪽은 옴팍하게 파여 있으니, 김유정의 고향 마을처럼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실레’라 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 호밖에 못 되는 빈약한 촌” 마을인 실레마을에서 “주위가 이렇게 시적이니만치 그들의 생활도 어디인가 시적이고 어수룩하고 꾸밈이 없다”는 김유정의 <봄봄> 마을.
땅이름은 사람이 붙인 것이지만, 사람들은 다시 그 이름을 닮아가며 살아간다. 생강나무를 동백꽃이라 하고, 지주와 빚쟁이들이 무서워 제 논의 벼를 수확하지 못한 채 몰래 베어 먹어야 하는 동생을 위해 밤새 도둑을 지키는 형을 ‘만무방’(염치없이 막돼먹은 사람)이라 부르는 순박함이 실레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였음을 김유정의 작품에서 읽어낼 수 있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떡값
언어예절
사람들은 선물을 주거나 받으며 인사한다. 행사 때 꽃다발을 선사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손수 짓고 거둔 옷·베·노리개·그림·글씨에다 건어물·고깃근 …들 마음과 손길이 스민 것이면 더욱 좋다. 그렇게 오가며 만나는 사이에 정이 도타워지고 예절이 가다듬어진다. 밥이나 술대접도 그렇다. 말품도 별로 들지 않는다. 사람살이가 무심하고 마냥 명경 같아서야 무슨 재미가 나겠는가.
떡은 제사·잔치 음식이었다. 밥도 귀한데 하물며 떡이랴. 본디 설이나 추석머리 명절 쇠는 데 보태 쓰라고 일터에서 일꾼들에게 주던 돈이 떡값이다. 요즘은 ‘상여금’으로 굳어졌다. ‘삼성 떡값 받은 검찰 고위층’이라면 녹봉은 나라에서 타면서 떡값은 엉뚱한 재벌 기업한테서 받았다는 얘기니, 우선 말이 안 된다. 괜찮게 쓰던 말이 때로는 이처럼 비뚤어진다. 그 돈머리도 서민들 연봉을 넘어서니 뇌물·봉물에 가깝다. 뜻풀이를 하나 더 늘려야겠다.
촌지·촌심도 실체는 돈봉투일 때가 많고, 뒷돈에다 역시 돈머리를 헤아리기 어려운 검은돈·비자금도 있다. ‘돈’이 말을 만들고 바꾸는 셈이다. 봉사료·거마비·접대비·중개료는 공인된 경비로 친다. 갖가지 거래에서 채택비·사례비·보상금은 랜딩비·리베이트란 말로 성행하고, 끼리끼리 짬짜미가 따른다. 그래도 김장값·술값·떡값 …들은 먹거리에서 비롯된 말들어서, 실물로 대신하면 선물은 될 터이다.
사람들은 에두르거나 비유하여 실체를 숨기기를 즐기고, 지칭하는 낱말도 그렇게 쓰일 때가 많다. 말을 하는 데서 썩 효과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자칫 진실을 가리는 폐단이 있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읍니다""-습니다"
주변에서 '-읍니다'가 맞는지, '-습니다'가 맞는지 물어 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우리말 바루기'에 관심을 보여 주시는 독자들의 e-메일에서도 '-읍니다'란 표현이 자주 눈에 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습니다'가 맞다. 1988년 어문 규범을 개정(시행은 89년 3월)하면서 '-읍니다'의 표기를 '-습니다'로 바꿨다. '-읍니다'로 적고 '-슴니다('습니다'의 발음)'로 읽는 불일치를 바로잡기 위해 '습니다'로 바꾼 것이다. 즉 '먹읍니다''있읍니다' 등으로 적던 것을 '먹습니다''있습니다' 등으로 표기하도록 했다.
그러나 명사형 어미 '-음'이 붙어 있는 '있음''없음' 등은 종전과 같이 그대로 표기하므로 '-음''-슴'에 대한 혼란도 생겼다. '-습니다'에 익숙한 학생이나 젊은이들의 경우 '-음'을 '있슴''없슴' 등으로 쓰는 예가 종종 있다.
90년대 이전에 교육을 마친 40대 이상 세대들은 표준어 규정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수십년간 손에 배고 눈에 익은 '-읍니다'를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바뀐 규정을 일반인도 충분히 숙지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계도하는 정부 당국의 노력이 부족했던 데에도 원인이 있다.
명사형은 '-음', 서술형은 '-습니다'라고 기억하면 된다. '-읍니다'는 이제 아련한 추억 속으로 묻어 두어야 한다.
배상복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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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참을 실천하는 사람
도산 안창호는 1878 년 대동강변에서 태어나 1938 년 병원에서 죽음을 맞을 때까지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친 사람입니다. 그는 국민의 마음과 생각을 높이는 데 앞장섰으며 흥사단을 조직하여 힘을 길렀고, 임시정부에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도산은 '참'의 사람이었습니다.
'아아,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내 평생에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하리라.'
도산은 스스로 이렇게 탄식할 정도로 거짓을 미워했으며 이 거짓이 우리나라를 망친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산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우리 2천만이 다같이 사랑하기를 공부하자.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민족이 되자. 오직 사랑하자.'
그의 동지애는 유별하였습니다. 동지에 대해서는 물질과 사랑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 반신불수가 된 동지를 위해 운하 공사장에서 수개월 동안 인부로 일하여 약값과 치료비를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웃음을 좋아했습니다. 저마다 좋은 마음으로 웃는 얼굴을 가지는 것이 그가 그리는 새 민족의 모습이었습니다.
도산은 '겸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았으며 오만한 마음이나 권위주의적인 태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언변과 통솔력과 덕성이 뛰어난 인격자였지만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늘 뒤에서 묵묵히 직분을 다하고 명예와 공은 남에게 돌리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는 1919 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노동총판으로서 일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대통령 대리 후보자로 추천되었습니다. 도산은 그 자리를 끝내 사양했지만 결국 대통령 대리로 선정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잠시라도 대통령 대리의 명목을 띠고는 몸이 떨려서 시무할 수가 없소.'
스스로를 능력이 없고 인격이 모자라는 사람으로 격하하며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송구스럽고 민망하여 몸이 떨려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국민이 내일에의 신념을 갖지 않으면 발전은 있을 수 없다. There can be no progress if people have no faith in tomorrow. (J. F.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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