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에 대한 반성
우리말의 애매성 - 너무나 인간적인 언어
한국어에는 주어나 목적어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단수, 복수의 구분이나 성의 구분,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 구분도 그리 철저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애매한 표현에 대하여 한국인들은 별로 불편이나 곤란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대화 현장에서 이런 불투명성을 고도로 발달한 우리의 눈치, 코치가 보완해 주기 때문일까? "시원섭섭하다"라는 말이 그 사람이 떠나서 후련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몹시 아쉽다는 표현인지 분명치 않다. 시큼달큼, 들락날락, 붉으락푸르락, 오락가락 등의 표현도 비빔밥처럼 맛(의미)의 본뜻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우리말의 "예, 아니오"의 답변을 비롯하여 "그래요"라든가 "그렇지 뭐"라는 긍정적 의사 표시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꺼림칙한 구석이 있다. "집에 갈래?" 라는 물음과 "집에 안갈래?" 라는 물음이 실제에 있어 동의어일 수 있다. 이처럼 물음 자체가 애매한 만큼 답변 또한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마는..." , "그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마는..." , "백번 지당한 말씀이지만..." , "좋기야 좋지만..." 이런 답변에는 말미에 붙는 "-마는(만)"에 무게의 중심이 놓인다 우리말에서 "글쎄요, 생각 좀 해봅시다"라면서 수염을 쓰다듬거나 콧등을 어루만진다면 이는 분명 거절을 뜻한다.
오랜 세월 농경 문화에 길들여져 온 우리는 이웃과의 화합을 고려하여 거절이나 반대의 뜻을 직설적으로 내뱉지 않는다. 남의 불행에 대해서도 "참 안됐습니다만 그만하길 다행입니다." 라고 위로한다. "불행중 다행"이라든가 "그만하면 됐다"는 표현도 비슷한 유형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지우고 싶은 사건, 곧 12, 12 사태의 해석도 이런 유형이 아닐까. 이 사건이 하필이면 왜 12월 12일에 발생했는지 모르겠다. 태생부터 시비거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숫자 십이와 동음인 시비는 옳고 그름만을 지칭하지 않고 그 잘잘못을 따지는 다툼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쓰인다. 특히 "시비"라는 말의 중첩어인 "시시비비"는 가타부타나 왈가왈부, 시야비야와 함께 시비가 지속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12, 12사태의 규정으로 말하면 초기 "불가피한"사태에서부터 출발하여 "군사 쿠데타적 사건"을 거쳐 최종적으로 군사반란이라는 엄청난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쿠데타에 붙는 "적"이라는 꼬리표와 반란이라는 용어다. 그 반란이란 것이 한 때 기소 유예 판정을 받았기에 그것이 반란이 아니냐는 또다른 시비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우리말에 끼어든 한자어 가운데 이 "적"만큼 활용도가 높은 글자도 드물 듯 하다. 이 애매한 용어가 그만큼 우리 정서에 맞아떨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떻든 이 말은 모호한 입장이나 불완전한 식견을 도배질하는 데 단골로 사용된다. "그는 인간적이다"라는 말은 가능해도 "그는 사람적이다"는 말은 불가능하듯이 "적"은 반드시 한자어 뒤에만 붙는다. 그런데 쿠데타라는 서구어(불어)에도 이 접미어를 붙일수 있는지 의문이다. 뿐인가, "귀족적"이라고 하면 실지 귀족은 아니면서 겉으로 귀족 행세를 하는 사람을 빗댄 말이다. 그렇다면 쿠데타적 사건을 실제 쿠데타는 아니면서 이와 유사한, 또는 이에 준하는 사건이라고 해석해야 할까? "글쎄요..." 라면서 콧등이나 쓰다듬으며 고개가 갸웃거려질 대목이다. 굳이 말한다면 적은 영어의 틱(-tic)에 해당하므로 쿠데타적이 아니라 "쿠데타틱"이라 해야 어울리지 않을까? 로맨틱이란 말은 있어도 "로맨스적"이란 말은 없기 때문이다. 한자말 "적"이나 영어의 "틱"에 해당하는 우리말에 "척하다"의 "척"이나 티를 낸다는 "티"가 있다. 그런데 "티, 틱, 적, 척"등은 묘하게도 언어의 국경을 초월하여 의미 뿐 아니라 어형까지도 닮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한자어 적이 우리말에 들어와 이처럼 마구 쓰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말은 좋게 말하여 완곡 어법이 발달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완곡 어법이란 일종의 회색적 표현법으로 본의를 흐려 놓는다는 점에서 결코 좋은 표현법은 못된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분명히 밝히기는 꺼리는,이러한 언어의 자폐증은 불투명한 표현을 낳는다. "예스냐 노우냐" 또는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하는 결단은 서양인의 것이고 우리는 어디까지나 "글쎄요, 생각 좀 해봅시다."식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견지할 뿐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한국어는 "너무나 인간적인 언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최근 우리 사회가 흑백 논리로 소란스러운 것도 이런 관습이나 고유 정서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인간적인 것까지는 좋으나 "너무나" 인간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현대와 같은 산업화, 정보화 사회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런 인간적인 표현법은 "글쎄요, 생각 좀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다. |
|
궂긴소식
언어예절
시대 따라 장례 풍속이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늘 죽음은 하늘이 꺼지고, 한 세상이 저무는 일과 같다. 황망하여 궂긴소식 곧 죽음을 알리는 일조차 상주 아닌 호상 이름으로 내는 게 보통이다. 전날엔 부고장 꽂이를 사랑청에 두고 집안에 들이지 않았으나, 요즘은 부고장 대신 휴대전화나 전자우편으로 한시에 알리는 시절이 됐다.
부고는 알림 중에서도 육하원칙 따라 뼈대만 간추리는 대표적인 알림글이다. 인사말이나 격식이 따로 없다. 세상 버린 이 이름을 앞세워 ‘타계’ 사유와 일시를 보이면서 이를 삼가 알린다고 쓴다. 그 뒤 유족 이름과 관계·직함을 붙이고 빈소와 발인 날짜·시각, 연락처와 호상 이름을 밝히는 정도다. 신문 부고란에는 이보다 더 간략히 간추리기도 하고, 아무개의 부친·모친상 …으로 시작하기도 한다.
초상은 경황 없이 치르기 마련이어서 인사할 여유가 없으므로, 나중에 틈을 여투어 친지들에게 인사 편지를 보내는 게 도리다. 문상을 놓친 이도 있을 터이다.
부고는 부음·휘음·애계·흉문 …처럼 일컬음도 갖가지다. 사람 따라 죽음을 타계·별세·작고·서거·운명·하세 …로 달리 말하기도 하고, 종교 따라 선종·입적·열반·승천·소천 …들로 쓰기도 한다.
그 무엇보다 ‘돌아가시다, 세상 버리다, 가시다 …’들이 어울린다. 흔히 쓰는 ‘사망하다, 죽다’는 야박한 느낌을 주므로 사건·사고를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언론에서도 쓰기에 걸맞지 않다. 예컨대 “20명이 사망하고(죽고) 30명이 부상했다”보다는 “스무 명이 숨지고 서른 명이 다쳤다”가 자연스럽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갑작힘
북녘말
“큰 고기가 물렸다고 덤비면서 갑작힘을 주면 물고기는 낚시끝에 찢긴 제코를 남겨놓고 도망친다우.”(장편소설 <참대는 불에 타도>)
갑작힘은 ‘갑자기 쓰는 힘’이다. ‘갑작’은 ‘갑작스럽다’에서 확인되는데, ‘갑작’에 대한 남북의 견해가 다르다. 남녘에서는 어근으로 보고, 북녘에서는 부사로 본다. 부사 ‘갑자기’의 준말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의 어근은 자립하지 못하는 어근을 말한다. 어근을 ‘자립 어근’과 ‘비자립 어근’으로 나눌 수 있고, 여기서는 ‘비자립 어근’을 가리킨다.
북녘말에서도 용언을 꾸미는 말로 ‘갑작’을 쓰는 일은 드문 것으로 보인다. 사전에 보기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녘말에서 ‘갑작’은 주로 명사나 명사형과 결합하여 낱말을 만드는 기능을 한다. 이를 고려하면, ‘갑작’은 ‘낱말을 만드는 어근’(단어 형성 어근)일 것으로 생각된다. ‘갑작’이 결합된 말로, 갑작달리기(급출발), 갑작바람(돌풍), 갑작변이(돌연변이), 갑작부자(벼락부자), 갑작비(갑자기 내리는 비), 갑작수(갑자기 꾸며 낸 수), 갑작죽음(돌연사), 갑작출세(벼락출세) 등이 있다. 이들 낱말은 대부분 ‘다듬은 말’로, 실제 북녘말에서 정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갑작’과 ‘갑자기’가 같은 뜻이라는 사실만 알면 이들 낱말을 이해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
최근 남쪽에 ‘급인사·급유행·급칭찬’처럼 접두사 ‘급-’을 붙여 말을 만드는 걸 본다. 접두사 ‘급-’은 1음절인 낱말과 결합하거나 고유어와 결합하면 어색해지는 문제가 있으므로 ‘갑작’을 활용해 보는 것도 좋겠다.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
아이들밖에 없다
한창 꿈 많고 즐거워야 할 우리 아이들이 꿈을 잃어가고 있다. '공부 밖에' 다른 일도 많은데 부모들 극성에 학교·학원·집을 번갈아 들락거리느라 그 외의 것은 꿈도 못 꾼다. 오로지 '공부밖에' 모르는 아이보다는 게임, 운동도 잘 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데….
'밖에'라는 말은 참으로 별나다. 상황에 따라 띄어쓰기가 달라진다. 해법은 간단하다. '밖에'가 조사인지, 아닌지만 알면 된다. 조사는 항상 앞 말에 붙여 쓰기 때문이다. '밖에'가 조사일 경우는 '그것뿐'이란 뜻으로 쓰일 때인데, 반드시 뒤에 부정을 나타내는 말이 따른다.
#나에겐 너밖에 없다(너뿐이다). #천원밖에 남지 않았다(천원뿐이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뿐이다).
조사가 아닌 경우의 '밖에'는 '~외에 '의 뜻으로 쓰이며, 이때는 띄어 쓴다.
#너 밖에(외에) 여러 명이 있다. #예상 밖으로(외로) 문제가 어렵다.
참고로, 비슷한 형태의 'ㄹ(을)밖에'가 있는데 이때의 '밖에'는 용언 뒤에 붙는 (종결)어미이므로 붙여 쓴다.
#선생님께서 시키시니 할밖에. #불을 켜니 밝을밖에.
'밖에'가 붙어 굳어진 관용적인 말들도 붙여 쓴다.
#꿈밖에도 수석 합격을 했다. #뜻밖에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우리의 희망은 아이들밖에 없다. 공부만 하라고 하지 말고 아이들이 원하는 꿈을 키워주자.
한규희 기자 |
|
나무를 붙잡고 우는 여자 - 박형준
언제나 밤이 오고, 잎들의 지문이 선명해지는 밤길을 걸어간다. 지난날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는 열매의 맛이 아려온다, 꽃은 찢긴 살처럼 빛난다. 새벽 두 시에 나무를 붙잡고 우는 여자 머리 위에 얹혀진 찬 달.
------------------------------------------
굳이 묻지 마시라. 왜 울고 있느냐고 묻지 마시고, 그냥 못 본 척 지나가시라. 여자의 머리 위로 뜬 달마저 아무 말이 없다. 사랑은 저토록 사람을 처절하게 만든다. 아침은 절망의 밤이 지나야 찾아오는 법. 이 땅에 여자로 태어나 사는 일은 아직도 눈물의 고두밥을 먹고 사는 일이다.
정호승<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