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 사랑 4 - 신토불이와 토사구팽
신토불이라는 말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외국 농산물의 전면 수입과 함께 달라진 게 있다면 이 낯선 구호의 출현이 아닌가 한다. 북한의 김일성 부자에 대한 선전 구호에는 못 미치겠지만 어떻든 같은 제목의 대중 가요까지 유행하다 보니 이제는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이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신토불이는 몸과 흙이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곧 우리 몸에는 우리 농산물이 제일이라는 뜻일텐데, 이 대단한 유행어는 국어 사전에도 등재된 바가 없다. 쉬운 우리말을 두고 굳이 이렇게 어려운 한자숙어를 써야 할 이유가 있는지 묻고 싶다. 사람들은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게 되고, 또 남이 모르는 말을 구사함으로써 은연중에 으스대고자 하는 심성이 있다. 좋게 말하면 변화의 추구, 즉 통상어의 진부성을 탈피하려는 일반적인 추세요, 나쁘게 말하면 유식한 척하려는 일종의 자기 과시라 할까. "하자"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 경우도 이와 다름이 없다. 하자는 공히 옥의 티, 곧 흠집을 뜻하는 한자로서 여간 어려운 용어가 아니다. "하자 담보" 또는 "하자 있는 의사 표시" 등에서처럼 어려운 말을 써야 그 권위를 인정받는(?) 법률 용어에서나 쓰이는 말이 어찌하여 생활 용어로 정착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전셋집 계약은 물론 문방구에서 볼펜 하나를 사도 이제는 "하자"라는 말을 들먹이곤 한다.
어느 구 정치인이 남긴 토사구팽이라는 숙어도 결코 쉬운 말은 아니다. 구워 삶는다는 팽자도 정확히 쓰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든가, 필요 없으면 헌신짝처럼 내팽개침을 당한다든가, 어떻든 쉬운 말로 썼으면 좋겠다. 그렇게 어려운 말을 썼다 하여 유식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선거철 유세장은 말할 것도 없고 의정 단상에서도 우리 정치인들이 내뱉는 말은 그리 수준 높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퇴역하는 일부 정객은 가끔 묘한 말을 남기곤 한다. 마치 선문답과도 같은 아리송한 말을 남기는 게 무슨 유행럼 되었다. 언젠가 어떤 피의자가 법정에서 남긴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멋져 보여서 그랬을까? 노견이라는 말도 그런 예에 속한다. 얼마 전까지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갓길 곳곳에 한글로 쓴 "노견 주행금지" 또는 "노견주의"란 경고판을 볼 수 있었다. 고유어 길섶에 해당하는 이 말은 한자어에서도 노변이나 노방이란 말은 있어도 노견이란 말은 찾아볼수 없다. 교통 표지판 가운데 "사고다발 지점"도 이와 유사한 사례다. "다발"이란 무슨 똣인가? 다발이란 무다발이니 꽃다발이니 하여 한묶음을 뜻하는 말이니 이 지점에서는 사고가 다발로 났다는 이야긴가? 게다가 그 표지판에는 보기에도 으스스한 해골바가지까지 그려놨다. 운전자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이라지만 그림을 본 운전자가 오히려 겁에 질려 사고를 다발로 내지 않을까 걱정된다. 다발은 노견은 마찬가지로 어설픈 신조어에 지나지 않는다. 노견을 길섶이나 갓길이라는 쉬운 우리말로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사고다발 지점은 그저 "사고 많은 곳", "위험 지역" 또는 "운전조심"이라는 경고만으로 충분하다. 길이 갑자기 좁아지는 지역을 병목 지점이라 하고 그로 인해 혼잡해지는 현상을 병목 현상이라 한다. 교통 표지판이라는게 보는 사람 누구나가 쉽게 알 수 있는 말이면 족하지않은가.
어려운 한자어를 좋아하는 부류로 법조인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날 법조인들이 누리는 특권이나 권위가 높은 탓인지 이들은 법률 용어도 어려운 한자어만 사용한다. 우선 법조인을 일컫는 "율사"라는 호칭부터가 애매하기 짝이 없다. 율이 율법이나 학자에 적용된다면 율사나 율사가 될 것이요, 음률에 정통한 가객이라면 율객이라 칭할 것이다. 법조계에 종사한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스승이나 학자는 아니다. 이들은 또한 조선조 형률의 실무자였던 율객도 아니며 자장 율사와 같은 고승도, 유태교의 바리새인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죄와 벌 또는 원고와 피고 사이를 적절히 조절하는 조율사란 말인가?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다. "상기 부녀자는 유아를 척추 상반부에 적재하고 도로를 무단 횡단하다가..." 어린애를 등에 업은 아낙네가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사건의 전말을 경찰 조서에서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물론 과장된 이야기겠지만 지금의 법률 용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벌과금, 범칙금, 벌금, 과태료, 과료등의 차이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그것부터 궁금하다.
아리송한 말이 유행어로 쓰이기는 영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가씨도 아니고 아주머니도 아닌, 처녀처럼 보이는 신세대 주부를 일러 "미시"라 한다. 그런데 "미시"라는 신조 영어는 일시적인 유행어라쳐도 앞서 언급한 신토불이만큼은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이 우리 땅에서 나는 우리 농산물을 권장하는 구호라면 당연히 이 땅에서 생성된 토박이말이어야 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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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시취
풀꽃이름
‘각시취’는 양지 바른 가을 들판에 자라는 국화과 풀꽃이다. 신부의 상징색이 붉은 계열이다 보니, 짙은 분홍·자주·보랏빛 예쁜 꽃을 보고 각시를 붙였나 보다. 흔히 ‘각시’는 ‘각시수련·각시붓꽃·각시원추리’ 등의 쓰임을 볼 때 작고 연약하고 예쁜 풀꽃에 붙이는데, 각시취는 키도 크고 튼튼해 보이는 점이 좀 다르다.
‘각시’는 아내의 다른 말로서 주로 갓 시집 온 새색시를 이른다. 이는 옛말 ‘가시’에서 ‘갓시>갇시>각시’로 바뀐 것이다. 흔히 우리말 퀴즈에도 자주 나오는 ‘가시버시’를 국어사전들에서 대부분 ‘신랑신부’의 낮춤말로 풀이했는데, ‘버시’는 ‘벗+이’로 ‘각시를 벗 삼아’ 정다운 부부 모습을 가리키는 어찌씨로 보는 견해도 있다.
‘취’는 나물을 뜻하는데, ‘채’(菜)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린 순은 봄에 나물로 해 먹는다. 잎에 털이 있어서 ‘참솜나물’이라고도 한다.
‘우렁각시’는 있어도 ‘우렁신랑’이 없는 현실은 새색시한테도 상당한 기대가 깃들어 있음을 본다. 힘든 티 내지 않으면서 살림도 잘 하고, 애도 잘 기르고, 돈도 잘 버는(효도도 잘 하는) 우렁각시는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의 바람인 모양이다.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패수와 열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보면, 광개토왕 4년 8월에 왕이 패수(浿水)에서 백제와 크게 싸워 이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패수’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 선덕왕 때에 한산주에 ‘패강진’(浿江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황해도 평산에 ‘패강진’이 있었다고도 한다. 또한 패수를 열수(列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열’(列)은 ‘벌림’을 뜻하는 말이므로 거센소리가 되기 이전의 ‘패수’와 같은 말이다. 양주동은 <고가연구>에서 ‘패수’의 ‘배’를 ‘밝음’을 뜻하는 ‘ㅂ·ㄺ’으로 풀이한 바 있다. 이 풀이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으나 ‘패수’의 ‘패’나 ‘열수’의 ‘벌’은 모두 땅이름에 쓰이는 ‘벌’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다만 ‘벌’은 넓은 들을 뜻하며, 강을 낀 넓은 벌판은 사람이 모여 살기에 적합한 땅이 된다.
광개토의 아들인 장수왕은 사천(蛇川) 들에 나아가 사냥하면서 흰노루를 잡았고, 이후 평양으로 천도한 임금이다. 장수왕이 사냥했다는 ‘사천’ 또한 ‘뱀ㄴ·ㅣ’다. ‘사천’과 ‘사수’(蛇水)는 같은 뜻이니 이 또한 ‘벌’이다. 사학자 이병도는 ‘패수’를 청천강이라고 했는데,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땅이름 ‘패강·패수·사천’ 등이 ‘벌’과 관련이 있음을 고려한다면, 패수는 ‘벌’을 낀 강을 두루 나타내는 보통명사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패수’에서 확인되는 ‘벌’의 땅이름 분포는 고조선의 영토 고증뿐만 아니라 우리 겨레의 뿌리를 찾는 데 귀중한 자료로 쓸 만한 보기라 하겠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올인
프로바둑 기사인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 드라마 '올인'이 숱한 화제를 남기며 종영됐다. 드라마 속에서 사랑의 상징으로 나왔던 오르골은 연인들 간의 선물로, 촬영지는 관광명소로 인기가 높다. 인터넷에는 '올인' '배팅'이란 말이 수없이 올라 있다. 제작진은 성공을 위한 남자들의 야심과 역동적인 승부세계를 그리려 했다지만 도박과 깡패·건달 등 조직폭력배에 대해 그릇된 환상을 품게 만들지나 않을지 걱정된다.
올인(all in)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도박에서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건다는 뜻이다. 배팅(batting)은 야구에서의 타격 등을, 베팅(betting)은 내기 등에서 거는 돈을 의미한다. 이 드라마에서 언급된 '배팅'이란 말은 전부 '베팅'으로 써야 맞다.
깡패는 미국 갱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폭력 범죄를 행하는 강도단을 일컫는 영어 갱(gang)과, 행동을 같이 하는 무리를 뜻하는 패(牌)가 합쳐진 말이다.
건달(乾達)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거나 주색잡기 등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며, 범어의 음역인 건달바(乾婆)에서 온 말이다. 원래는 음악을 담당하는 신이라는 좋은 뜻으로 쓰였다.
드라마는 '이젠 사랑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주인공 인하의 말로 마무리된다. 우리도 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값진 무엇을 찾아보자.
권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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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내 아들을 은과 바꿀 수 없어요
조선시대 숙종 때의 학자 김학성이 입신 출세하게 된 것은 가난을 고귀하게 여긴 어머니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일찍이 과부가 되어 가난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녀는 삯바느질을 하여 살림살이를 꾸려 가면서도 아들은 좋은 선생에게 보내어 공부하게 했습니다. 하루는 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처마에서 물이 밑으로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물방울이 닿는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마치 땅 밑에서 쇠그릇이 울리는 소리와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호기심에 땅을 파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땅 속에는 큰 가마가 들어 있었고 그 안에는 하얀 은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에 큰 보화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남 모르게 흙으로 다시 그것을 묻어 버렸습니다. 이튿날 어머니는 오빠에게 부탁하여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 후 두 아들은 장성하여 과거에 급제, 학문을 인정받기에 이르렀고 그제서야 고향으로 돌아온 어머니와 두 아들은 아버지의 제사를 모셨습니다. 제삿날에 어머니는 오빠에게 말했습니다.
"남편을 잃은 후 나는 이 두 아이를 맡아 기르지 못할까 봐 아침, 저녁으로 마음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이들의 학업도 진취되고 아버지의 뜻을 계승할 수도 있게 되었으니 이제 나는 이 세상을 떠나도 부끄럽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자신의 앞마당에서 발견한 은가마를 버린 사연을 덧붙여 말했습니다. 깜짝 놀란 오빠가 이유를 묻자 어머니는 다시 말했습니다.
"이유 없이 큰돈을 얻으면 반드시 의외의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고생해야 되는 것인데 어려서부터 편안하게 되면 공부에 전력을 다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돈을 낭비하는 습관만 생기고 마음이 점점 게을러져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이므로 이를 떠나는 것이 화를 떠나는 일인 줄 알아 기꺼이 가난의 길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이란 근로하면 착한 마음이 생기고, 안일하면 교만한 마음이 일어난다.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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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물 - 도종환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 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는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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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얼마나 깊은 물인가. 당신의 물에는 술잔 하나, 종이배 하나 뜨지 못하는 게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당신과 나, 이렇게 분열되고 고통스러운 게 아닌가. 부디 당신의 가슴속에는 깊은 강물이 흐르기를. 그 강물에 큰 배가 뜨고, 그 배가 바다로 흘러가기를. 그 배를 타고 모든 이들이 평화롭기를.
정호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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