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 사랑 3 - 개화와 세계화
개화라는 용어가 유행하던 시가가 있었다. 고유 한복을 벗어 던지고 개화복인 양복으로 갈아 입었으며, 그 위에 개화모와 개화경까지 곁들여 모양을 내곤 했다. 호주머니를 개화주머니라 부르고 멀쩡한 지팡이도 짧게 하여 개화장이라 부르며 이를 휘두르고 다녔다. 당시 좀 배운 사람이라면 저마다 개화인임을 자처하며 개화꾼이라는 이웃의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개화의 말뜻을 되새겨 보고 이 용어의 사용이 타당한지를 생각해 본다. 사전에 따르면 개화란 "사람이 깨고 지식이 발달하여 사상, 풍속, 문화 등이 진보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개화기 이전, 말하자면 서구 문화가 유입되기 전까지 우리 민족은 깨지도 못했고 지식도 발달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원시, 야만의 미개국이었다는 말이 된다. 반만년 문화 민족에게 그런 용어를 써도 좋은지 모르겠다. 물론 일제 식민통치의 정책적 소산이겠지만 그보다 당시 풍조가 거의 맹목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 용어의 타당성을 고려해 볼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다. 조선조를 "이씨왕조"라 고치고 초등학교(소학교)를 "국민학교"라 칭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제가 의도적으로 개화란 용어를 썼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들 스스로가 이 시기를 개화기라 부른다면, 이는 분명 자기부정이며 또다른 사대사상의 발로라 생각된다. 모화라 하여 중국을 섬겼던 데서 새로이 서구 열강 쪽으로 그 대상을 바꾼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계화를 부르짖는 최근의 형세를 보면 구한말 개화를 외치던 그때와 매우 흡사한 점이 있다. 국어 교육을 강조하기에 앞서 영어의 조기 교육을 주장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영어의 공용어화에 열을 올린다. 더욱 놀라운 일은 영어의 공용어 채택을 완강히 거부하던 인사들까지 일본이 선수를 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태도를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개화기라는 용어를 전환기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한 지금도 우리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고 생각한다. 언어 현실로 말한다면 한자어 시대에서 영어시대로 바뀐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이런 가정의 질문도 가능하다. 장차 미국의 시대가 가고 중국이나 일본의 시대가 온다면 그때는 우리의 공용어를 또다시 중국어나 일본어로 전환해야 할 것인가라는. 최근 언어 현실에서 영어의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어떤 이는 일상어에서도 고유도 대신 영어를 쓰는 것이 언어 분야의 세계화라 규정하고 현 수준을 감안하여 이 분야에서만은 상당한 진척을 보였다고 자위할는지 모른다. 속된말대로 호박에 줄친다고 수박이 되는 건 아니다. 몇몇 용어를 그대로 흉내낸다고 하여 언어의 세계화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세계화를 이루려면 우리말을 철저히 교육시킨뒤에 그 바탕 위에서 외국어 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 영어의 공용화가 거론되더라도 그것은 상거래를 비롯한 일부 특정 분야에만 국한시켜야 한다. 영어에 능통한 사람이 많이 나오더라도 일상어에서만은 우리말을 애용해야 할 것이다. 또다른 전환기를 맞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우리말을 갈고 닦아 이를 애용하는 길밖에 없다. 적절한 용어가 없다면 새로 만들어야 하고, 이전에 사용했던 말이 있으면 이를 되살려 써야 한다. 또 이왕 쓰고 있는 말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고쳐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탁마하지 않으면 좋은 보석을 얻을수 없듯이 언어도 갈고 닦지 않으면 아름다운 말을 가질수 없는 것이다.
한두 가지 예를 들어 우리말을 갈고 닦는 방법을 생각해본다. 아파트 현관문에 밖을 내다볼수 있는 작은 구멍을 가리키는 적절한 우리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영어로 "더치 홀(dutch hole)"이라 부르는 이 구멍을 그저 "문구멍"이라든지 "빠꼼이"라 부를수도 없다. 그렇다고 우리와는 아무 감정도 없는 화란인(dutch-man)을 나쁘게 말할 이유는 더더구나 없다. 이 점잖치 못한 구멍을 일러 "솔옹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소나무에 박힌 옹이는 예로부터 뒷간 같은 은밀한 곳에서 몰래 밖을 훔쳐보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이 옹이 구멍은 인위적으로 뚫은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어서 더 호감이 느껴진다. 널리 쓰이는 말이지만 "이쑤시개"도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다. "쑤시다"는 말 자체가 찌르다, 아프다, 버르집다와 같이 좋지 않은 뜻을 가졌다. 그렇다고 치아 청소기, 이빨 소제기라면 너무 길고 거창하니 그렇다면 좀 더 짧고 단순하게 "말끔이"라면 어떨까? 일본말 "요지"는 그것이 본래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그것의 재료가 버드나무가 아닌 플라스틱일지라도 이름은 언제나 요지일 것이다. 앞서 말한 솔옹이도 같은 경우다. 아파트의 현관문이 목재가 아닌 철제로 변한다 해도 거기에 뚫린 구멍은 언제나 "솔옹이 구멍"으로 남아 있으면 족하다. 한자어나 외래어만이 꼭 새롭고 멋진 말은 아닐것이니, 이처럼 우리말도 다듬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아름다운 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예비
북녘말
“그저 지금 있는 로력만 가지고도 우리가 짜고든다면 많은 예비를 찾을수 있다.”(조선말대사전)
“우명표는 반신반의하면서 다음말을 재촉했다. “좋소! 아주 좋은 의견이요. 더 할수 있는 예비를 내놓으시오.””(장편소설·백양나무)
예비(豫備)는 남북에서 두루 쓰는 말인데, 한자 뜻 그대로 ‘미리 갖춤’이다. 그런데 북녘에서는 다른 뜻으로도 쓴다. 위의 예문에 쓰인 ‘예비’는 ‘가능성이나 능력’을 뜻한다. <조선말대사전>에서는 “재생산과정에 쓰이지 않고 있거나 효과적으로 쓰지 못하고있는 생산요소로서 생산을 늘이는데 동원리용할수 있는 가능성이나 능력”이라 풀이했다. ‘예비를 찾는다’고 하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능력이나 가능성을 찾는다’는 뜻이다. ‘예비를 내놓으라’는 것은 ‘아직 드러내지 못한 능력을 발휘하라’는 뜻이다. ‘예비 자금, 예비 시험’ 등에 쓰인 ‘예비’는 ‘갖춰 놓은 것 또는 그런 준비’의 뜻이어서 좀 차이가 있다.
둘의 차이는 쓰임에서도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예비는 주로 명사 앞에 쓰이는데, ‘예비 자금’처럼 홀로 쓰이거나 ‘예비적’이란 형식으로 쓰인다. 또 ‘예비로 무엇을 하다’처럼 ‘예비로’ 식으로 쓰이거나 ‘예비를 하다, 예비나 하다’와 같이 ‘하다’ 앞에 쓰인다.
반면, 북녘말 ‘예비’는 ‘~를 찾다, ~를 얻어내다, ~를 동원하다, ~를 마련하다, ~를 짜내다, ~를 내다, ~를 마련하다, ~를 탐구하다, ~가 나오다’ 등과 같이 더 자유롭게 쓰인다.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
터물·더믈
사람이름
세종 3년(1423년), 김가물·김사안·김내거(金加勿·金沙安·金乃巨) 등 남녀 다섯이 요동에서 도망쳐 왔다. 본디 강계 사람으로, 요동으로 달아나 동녕위(東寧衛) 군대에 들어갔다가 고향이 그리워 도망 온 사람들이었다. 임금은 이들이 비록 우리 사람이나 중국 군대에 이름을 올렸으므로, 구실아치와 함께 그들을 요동으로 보냈다. 이름 표기에서 加勿(가물)은 ‘더믈’을, 高時加勿(고시가물)은 ‘고시더믈’을 적는다.
<용비어천가>에 夾溫猛哥帖木兒(협온맹가첩목아)·賽因帖木兒(새인첩목아)·兀魯帖木兒(올로첩목아)·高時帖木兒(고시첩목아) 따위 사람이름이 ‘갸온멍거터물·사인터물·우로터믈·고시더믈’로 적혀 있다. 帖木兒(첩목아)를 적는 ‘터물·터믈·더믈’ 가운데 앞서 본 바와 같이 ‘더믈’은 우리나라 말로 바뀐 것이고 ‘터물’은 몽골말 소릿값, ‘터믈’은 그 중간 꼴이다.
‘터물’은 몽골 사람 이름에 자주 쓰이는 밑말로, 쇠를 뜻한다. 그 자취는 야인과 우리나라 사람이름에 남아 있다. ‘부허’(不花)는 ‘부개·보개’로, ‘오부카/오부허’는 ‘어부개’로, ‘노하이’는 ‘노개’, ‘코이시터물’은 ‘고시더믈’로도 자리잡았다. 그 밖에 ‘바얀, 바두/바두리/바토/바토이, 사안/사얀, 돌치, 보라/보로, 야수개’ 따위 이름이 쓰였다. ‘돌치’는 티베트말로 도르찌(다이아몬드), 보로는 볼로르(수정)다. 몽골 사람 이름에는 지금도 티베트말이 자주 쓰인다. 이렇듯 사람이름에는 이웃과의 역사 관계에서 함께 쓰는 이름들이 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이런 영향은 자취를 감춘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육개장
매일 점심을 사 먹어야 하는 직장인들은 식사 시간이 되면 어디에서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이다. 조금 늦으면 식당 앞에서 줄 서기 일쑤고, 종업원들에게서 제대로 대접받기도 어렵다.
즐겨 먹는 음식 중에 '육개장'이 있는데 메뉴판엔 '육계장'이라 적혀 있는 곳이 많다. '육개장'을 알기 위해선 '개장'부터 따져 봐야 한다. '개장'은 개고기를 고아 끓인 국인 '개장국'의 준말이다. 예부터 삼복 때 몸을 보하기 위해 이 '개장'을 즐겼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남아 있는 습속이다. '사철탕'이라고도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요즘은 일년 내내 먹는다고 봐야 한다. 토란·깻잎·대파 등 갖은 양념을 넣어 얼큰하게 끓이는데, 이런 요리 방식으로 쇠고기를 넣어 끓인 것이 '육개장'이다. '개장'에 쇠고기를 뜻하는 '육(肉)'이 붙어 '육개장'이란 단어가 생겨난 것이다.
주로 사대부 집안에서 '개장' 대신 '육개장'을 끓여 먹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 요리 방식으로 쇠고기가 아닌 닭고기를 넣어 끓이는 경우다. 이때도 '개장'이란 어원을 살려 '닭개장'이라고 해야 한다. 닭을 뜻하는 '계(鷄)'자를 넣어 '육계장'이라고 쓰는 것은 '개장'이 어원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계장'은 없다.
오늘 점심은 무엇으로 할까. 개장·육개장·닭개장, 어떤 것이 좋을까.
배상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