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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417 호
단기 4341. 4. 25 (음력 3. 2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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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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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해양문학상 공모요강
해양문화재단과 (사)한국문인협회는 해양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 제2회 해양문학상 수상작을 공모합니다. 역량 있는 신인 작가 및 기성작가 여러분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접수 : 2008년 8월 1일부터 31일까지
◆받는 곳 : (110-780) 서울시 종로구 인의동 28-9 인의빌딩 901 (재)해양문화재단사무국 해양문학상 담당자 앞 ( 겉봉투에 응모 부문과 작품 편수를 기입)
◆ 발표 : 당선자는 2008년 9월 25일 개별통지 및 해양문화재단(www.ocf.or.kr), 국토해양 부(www.momaf.go.kr), 한국문인협회(www.ikwa.org) 홈페이지에 게시
◆공모 부문 및 상금(원고 량은 200자 원고지 기준) ※ 바다를 배경으로 하거나 주제인 작품이어야 함
▶ 공모부문 편수 / 원고량 소설(중편) 120~300장 내외 희곡 100장 내외 시 5편 이상 동시 5편 이상 동화 20장 내외
▶ 상 금 대상 1,000만원 최우수상 500만원 우수상 300만원 장려상 200만원 가작 100만원
※ 응모요령은 해양문화재단 홈페이지(www.ocf.or.kr)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문의 ☏ : (02)741-5278/9 / fax : (02)3673-3312
주최 : (재)해양문화재단 후원 : 국토해양부, (사)한국문인협회, (사)한국선주협회, (재)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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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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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의 교육 내용에 지나치게 간섭한 대가는 부모보다 우둔한 자손이 생겨나는 것. / 프랭크 A.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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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글터 → 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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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모어에 대한 인식 3 - 언어와 민족, 그리고 문화
세계화를 지상의 화두로 삼는 현금에 이르러 영어 학습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영어에 능통해야만 남보다 앞설수 있고, 나아가 국제사회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러한 추세에 편승하여 영어를 국가 공용어로 삼자는 주장도 심심찮게 제기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려되는 점은 우리말을 더 천시하게 되고, 또 영어가 한국어보다 훨씬 우수한 언어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 주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영어 사용권 국가들이 대부분 강대국이므로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어는 우리보다 못한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의 언어보다 우수하다고 말할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여 결코 그렇지 않다. 언어학자들은 한 지역의 문화의 발전도는 언어구조의 추상성이나 복잡성의 정도와는 아무 상관 관계가 없다고 지적한다. 미개인들의 언어도 고도 문명사회의 언어만큼 얼마든지 추상적이고 복잡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문명사회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내용이라면 미개 사회의 언어로도 표현될 수 있고, 미개 사회의 언어로 표현 할수 없는 것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문명 사회의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얘기다. 어떤 황홀한 정경을 보았을 때 아프리카 시인은 서구의 보통 사람보다 얼마든지 더 멋진 표현을 할 수 있다. 이들 언어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언중이 많아서 그것이 적은 언어보다 문법이 더 정제되었거나 전문적인 학술용어가 많을수 있다는 것뿐이다. 이런 외형적인 차이만으로 언어의 수준이 높고 낮음을 평가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지구상에 현존하는 모든 언어의 차이는 그 언어가 쓰이는 지역의 기후나 풍토 등과 같은 지리적 여건이나 언어 사용자들의 생활 풍습등 문화적인 차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열대 내륙지역의 언어에서 눈, 얼음, 바다, 조개 따위의 어휘가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눈(설)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우리말의 눈은 중국어의 설, 영어의 snow와 같이 하나의 어휘만을 가진다. 그런데 눈 속에서 생활하는 이누크족(흔히 에스키모라 부름)의 말에는 내리는 눈, 쌓인 눈, 집을 짓는 데 쓰이는 눈 등 몇 개의 어휘가 공존하여 쓰인다고 한다. 그들의 생활 환경에서 눈이 그만큼 중요하기에 다른 언어보다 개념이 더 세분화된 결과이다. 우리말에서는 모, 벼, 쌀, 밥등으로 세분화하여 구분되는 어휘가 영어에서는 rice라는 한 단어로 표현된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와 빵을 주식으로 하는 서구인의 식문화차이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그렇다고 하여 영어는 추상능력이 있는 언어이고, 우리말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할수 있는가?
개별 언어들이 수준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이들 언어사이의 번역상의 문제점을 생각해보아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완벽한 번역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문학 작품, 특히 상징성이 짙은 운문(시)의 경우에서 쉽게 발견된다.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를 우리말로 옮기거나 김소월의 시를 영어로 옮겼을 때는 그 느낌이 전혀 다를 것이다. 어휘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이를테면 비젼(vision), 멜랑콜리(melanncholy), 델리커시(delicacy) 같은 외국어를 우리말로 정확히 옮기기에 부적잘한 것들도 얼마든지 있다. 맛이 달짝지근하다, 시금털털하다도 그렇지만 시원섭섭하다, 삼삼하다에 이르면 더 난감해지지 않겠는가.
언어는 또한 어느 특정한 종족과 불가분리의 연관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어는 한국인만이 할 수 있고 중국어는 중국인 만이 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문제는 모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인데, 이를테면 미국에 사는 흑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왔지만 그들은 영어를 모국어로 삼는다. 이는 서양 선교사의 아이들이 한국에서 자라면서 한국인과 똑같은 우리말을 잘할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언어와 종족사이에 필연성이 없는 것처럼 어떤 특정한 언어와 특정한 문화 사이에도 불가분리의 연관성은 없다. 언어가 다르면 문화가 반드시 다르다든가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회는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앞서 번역에 대한 문제를 언급했지만 완전한 번역이 존재할수 없는 이유는 한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에 있는 어휘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에 없거나, 또 있다 하더라도 그 개념이 한결 같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특정언어와 종족과의 관계 또는 특정 언어와 문화와의 관계, 문화의 발전도와 언어 수준의 차이, 언어와 사고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등을 언급해왔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우리는 개별 언어의 특수성, 언어와 언어 사이의 차이점을 과대 평가하고 그것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에 전세계의 언어가 공유하고 있는 언어의 보편적 특질에 대해서는 깊게 이해하지 못했다. 개별 언어에 대한 이해는 언어 일반의 보편적 특질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여야 하고, 또 개별 언어에 관한 연구는 일반 언어의 보편적 특질을 이해하는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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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삶은 알림으로 시작해 알림으로 끝나는 것 같다. 겪고 깨닫고 이룬 바나 행사 따위를 서로 알려야 할 일이 많다는 얘기다. 풀이말의 명사형은 자주 써 굳어진 말이 아니면 국어사전에 올리지 않는데, ‘알림’ 정도면 많이 쓰기도 하려니와 숱한 관련어들을 싸안고도 남는다.
알림의 주된 연장이 말글이다. 전날처럼 일부 계층에서 ‘문자’를 틀어쥐고 ‘알림’을 주도했던 시절을 겪고도 아직 우리가 임자로서 제 말글을 가다듬고 부려쓰는 자세는 한참 모자란다.
알림 가운데 편지·청첩·부고·사고(社告)·공고·공시·벽보·정보·방·예고·광고·전단·포스터·펼침막·팻말·시위 …들은 형식과 갈래가 익은 편이고, 방송·신문·잡지·전화·인터넷 …들은 발달된 ‘알림 도구’라 하겠다. 이들로써 무엇을 알아보고 알리기가 편해졌다.
알림은 학문이나 사업 쪽으로 번져가기도 한다. 소통·커뮤니케이션을 내걸거나 광고·홍보·정보를 내걸어 폭넓은 영역을 꾸린 지 오래다. 그 바탕에서는 돈·조직의 힘이 작용한다. 예컨대 상당수 기업·상품의 홍보·광고 언어는 표기와 내용에서 두루 혼란의 극단을 보이면서 반복적이고 폭력적으로 사람들을 자극한다. ‘알 권리’를 내세우지만 일부 언론 언어의 반복된 왜곡은 광고 언어와 함께 사람들의 혼과 심성을 깨뜨리고 비트는 정도다.
‘알림’을 빙자한 풍속·양식 깨뜨리기엔 ‘법’으로 맞서야 효과적이겠으나, 윤리·예의·도덕의 잣대나 판단이 매섭다면 발붙이기가 어려울 터이다. 성·인종·지역 차별 언어를 반성하는 움직임이 이런 쪽으로도 번졌으면 한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설둥하다
“오지두 말아요. 매번 와서는 공연히 마음만 설둥하게 맹글어 놓고 가시면서 ….” (장편소설 <지리산>)
‘맹글다’는 ‘만들다’다. ‘설둥하다’는 어떤 뜻일까? 문맥으로는 ‘설레다’ 정도로 이해되는데 ‘설레다’와 ‘설둥하다’는 어떻게 다를까?
‘설둥하다’는 “얼굴을 본 둥 만 둥 그냥 지나간다”에 쓰인 ‘둥’이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둥’은 ‘어떠한 것 같다’의 뜻이다. ‘둥’이 결합된 말로는 ‘미끈둥하다·매끈둥하다·부둥하다’, 북녘말 ‘실둥하다’ 등이 있다. 실둥하다는 ‘조금 마음에 들지 아니한 듯하다’는 뜻으로 ‘싫다’와 관련이 있다.
‘설둥하다’의 나머지 뜻은 ‘설다’에서 온다. ‘설다’는 ‘밥이 설다’처럼 ‘제대로 익지 않다’, ‘잠이 설다’처럼 ‘(잠이) 넉넉하지 않거나 깊이 들지 않다’, ‘귀에 설다’처럼 ‘익숙하지 않다’ 등으로 쓰인다. 각 의미를 뭉뚱그리면, ‘제대로 되지 않고 모자라는 상황’이라 하겠다. <조선말대사전>에는 ‘글이 설다’처럼 ‘미숙하다’, ‘말이 설다’처럼 ‘이치에 맞지 않다’, ‘사람이 설다’처럼 ‘수양이 모자라다’ 등의 뜻이 더 있는데, 역시 ‘무언가 모자라는 상황’에 포함할 수 있겠다.
‘설둥하다’는 ‘설다’와 ‘둥’이 결합했으므로, ‘제대로 되지 않고 무언가 모자라는 듯하다’ 정도의 뜻으로 볼 수 있겠다. ‘마음을 설둥하게 만들다’는 마음을 전하기는 하는데 무언가 어설프고 부족하게 전달되어 모자란 듯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결국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것이라 하겠다.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
칠칠한 맞춤법
다음 대화에서 틀린 부분을 찾아 보세요.
'왜 그렇게 안절부절해?' '칠칠맞게 중요한 서류를 잃어 버렸어.' '그러게 뭐랬어. 적당히 마시라고 했지.' '내가 주책이지. 젊은 여자에게 혹해서.'
틀린 데가 없다고요. 아니요. 세 군데나 맞춤법에 어긋난답니다. 바루어 볼까요.
첫째, '안절부절해'는 잘못된 표현입니다.'초조하고 불안해 어찌할 바를 모르다'는 뜻으론 '안절부절못하다'라고 써야 합니다.(표준어 규정 제25항). 다만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다'처럼 부사로는 쓸 수 있습니다.
둘째, '칠칠맞게'는 '칠칠맞지 못하게'로 바루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일 처리가 반듯하고 야무지지 못하면 '그 사람 참 칠칠치 못하다'고 합니다.'칠칠하다'와 이의 속된 표현인 '칠칠맞다'는 이처럼 원말보다 '않다, 못하다' 등의 부정어와 주로 어울려 쓰입니다. 따라서 위 대화에서처럼 중요한 서류를 잃어 버린 사람이 칠칠맞을(반듯하고 야무질) 수는 없겠죠.
셋째, 예쁜 여자 때문에 평상심을 잃었다면, 그래서 일을 망쳤다면….'줏대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겠죠. 표준어 규정은 그런 의미에선 '주책이다'를 버리고 '주책없다'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을 떨다, 부리다'의 형태로는 쓰입니다.
김승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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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목궤
이조 말엽 홍만종은 그의 저서 '순오지'에 상당히 많은 민속 자료를 수록하고 있는데 거기 이런 얘기가 있다. 어느 촌 영감이 딸을 사랑하는 나머지 사위를 고르는데 노목으로 궤를 만들어 쌀 쉰 닷말을 넣고 누구든 그 안에 든 것을 알아 맞혀야 사위를 삼겠다고 하였다. 물론 여러 사람이 뒤통수를 치고 들어간 뒤의 일이다. 그렇게도 시집가고 싶었든지 딸년이 몰래 장삿꾼 총각에게 이 내용을 귀띔해 주고 취재 보도록 권했다.
그래 얻었다는 사위가 천치라 장인이 이 자를 쫓을 양으로 다시 장에 가 소를 고르랬더니 "노목궤 쉰 닷말은 들겠군!"하여 웃음거리가 되고 세상에서 변통성없는 사람을 노목궤라 한다고 실려 있다.
못난 사위와 깜찍한 며느리 얘기는 전국적으로 무수히 많다. 그것은 밖의 사회에서 들어온 자에 대해 자기네 풍습에 익숙지 못한 것을 웃음거리로 삼았던 한 예라 보겠다. 그리고 이 얘기의 구조는 하나 들은 얘기로 다른 데도 적용시키려는 우직함을 과장하려는데서 온 한 유형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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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온통 하얀 감나무
한 청년이 집을 떠났습니다. 농사 짓는 일이 고달프고 아버지의 간섭이 싫고 어머니의 잔소리가 짜증나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습니다. 서울에 와 보니 모든 것이 신비롭기만 했습니다. 높은 건물과 물결치는 듯한 자동차의 행렬, 휘황찬란한 불빛, 잘 입고 늘씬한 서울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반겨 주는 듯하였습니다. '고향을 떠나오길 잘했어, 서울은 참 멋있는 곳이야!' 청년은 의기양양하게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가지고 온 돈을 마구 썼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돈이 떨어지자 먹을 곳, 잘 곳, 쉴 곳이 없어지고 배고프고 춥고 초라해졌습니다. 숨막힐 것 같은 외로움과 불안이 엄습해 왔습니다. '아, 서울이란 살 곳이 못 되는구나.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고향으로 돌아가면 부모님이 계시고 친구와 산천이......'
부모님과 친구와 산천이 한꺼번에 그리워졌습니다. 어서 빨리 그들 곁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결코 그를 용서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의 잘못이 너무 커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만일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면 집앞의 감나무에 하얀 수건 한 장을 걸어 두십시오. 제가 기차를 타고 지나가다 그것을 보게 되면 부모님이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알고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기차가 고향에 가까워 오자 청년의 가슴은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얀 수건 한 장이 감나무에 걸려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집앞 감나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감나무에는 하얀 수건뿐 아니라 하얀 옷가지와 솜, 종이 등 집안에 있는 모든 하얀 물건들이 감나무를 온통 뒤덮고 있었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내려갈 뿐이고 올라오는 법이 없다. 즉 사랑이란 내리사랑으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을 능가한다. (C. A. 엘베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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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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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한 마리 키우세요? - 손현숙
고대 이집트에서는 고양이를 이승과 저승, 길을 잇는 사자로 생각했다. 그래서 피라밋의 맨 윗방에 우상처럼 모셔놓았다. 그 고양이 왼쪽 귀에 금귀고리 매달고 있다. 왜 한 쪽 귀에만 반지처럼 귀고리를 걸었을까……. 누구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라는데.
길모퉁이 어디쯤에서 고양이 한 마리와 눈이 맞았다. 여자 말고는 아무것도 아닌, 그 여자 툇마루에 앉아 농담처럼 저 세상 기웃거리고 있었다. 마치 오래 굶주려 먹이를 노리던 고양이처럼 여자는 남자를 잡아챈다. 길 위에서 삶이 끝나버린 그 남자, 등이 굽어 그림자 뭉툭하다.
여자가 먼저 꼬리친다.고양이처럼 사뿐 뛰어올라 남자 목을 챙, 감는다. 그 남자 작정한 듯 힘껏 받아 안았을 때, 여자는 금세 눈치 챘던 거다.그가 별의 기운을 타고 태어난, 길의 화신이라는 것을. 맨살이 맨살집 속에서 평안하듯 배와 배가 만나 둥글어지는 세상 보았던 거다.
잠깐, 아주 잠깐만 남자의 가슴에 몰래 새들기 시작했다. 남자가 다시 길에 미쳐, 꽃향기에 환장해 방을 뛰쳐나갈 때 까지만.
그 여자 길 걷는 연습한다. 왔던 길로 돌아가는 연습.그러나 남자의 이름 부르지 않는다. 피라밋 속의 고양이처럼 입 꼭 다문 채 한쪽 귀에 금귀고리 매달았다. 성감이 빨간 그 여자, 꼼짝도 않고 툇마루에서 해를 넘는데. 이승에서 바라보는 해 참, 붉고 환장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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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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