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모어에 대한 인식 2 - 낮은 목소리, 짧은 표현
한국인은 본래 웅변보다는 침묵에 더 가치를 두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우리의 언어 의식은 의사 표시에 그대로 드러난다. 즉 소리내서 말하기보다 그저 기침이나 눈빛으로, 또는 안면이나 온몸으로 넌지시 드러내는 표정언어, 몸짓언어에 더 능통해 보인다. 우리 선조들은 글로는 자기 표현에 능숙하면서도 말로 하라면 공연히 거드름을 피우거나 심하면 꿀먹은 벙어리처럼 말문을 닫는 경우가 예사였다. 사람을 평할 때도 말수가 적은 사람을 가리켜 점잖고 으젓하고 무게 있다고 말한다. 반면 말 잘하는 사람이라면 대게 약장수나 전도사, 변호사나 정치꾼 정도로 생각한다. 자고로 선비라면 입에서 냄새가 날 정도로 입을 굳게 다물고 지내면서 어쩌다가 잔기침이나 수염을 쓰다듬는 정도의 자기 표현이 고작인, 과묵한 사람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이런 한국 선비의 눈에는 쉴새없이 조잘대는 서구인들의 모습은 가볍다 못해 경망스럽게 보일 것이다. 외국 영화를 볼 때마다 스크린에 비치는 대화 장면이 우리와는 크게 다름을 느낀다. 그들의 대화에는 남녀노소의 구분도 없을뿐더러 대화 당사자의 얼굴은 불안스러울 정도로 근접되어 있다. 말의 속도도 빠를 뿐 아니라 입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손짓, 발짓 은 물론 어깻짓까지 동원된다. 우리네 같으면 "어디서 누구에게 감히 말대꾸냐!" 하는 호통과 함께 따귀라도 한 대 얻어맞았을 법한 장면들이 쉴새없이 펼쳐진다.
서양의 TV프로 중에 대화나 토론 위주의 "토크쇼 (talk show)"가 단연 인기라고 들었다. 인터뷰를 요청하는 식으로 마이크를 들이대면 "그런 일은 나와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손부터 내젓거나, 반대로 한 번 마이크를 잡았다 하면 내 놓을줄 모르는 우리네의 태도와는 사정이 판이하다. 이런 프로에 얼굴이 내비쳐지고 무슨 말이든 발설되면 그것 자체가 점잖치 못한 짓, 속된 말로 하면 "쪽팔리는" 행위로 간주되는 모양이다. 말하자면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는 서양 속담이 오히려 우리의 언어 의식을 그대로 대변한 것으로 여겨진다.
식사 형태에서도 이런 언어 의식은 그대로 반영된다. 한국인에게 식사 시간은 어디까지나 먹는 시간이지 대화하는 시간은 아니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식사하는 장소부터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독상 위주의 밥상은 가계 서열에 따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배열된다. 게다가 식사중에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엄한 규율 때문에 모든 구성원들은 마치 싸우기라도 한 것처럼 오로지 저작운동에만 몰두한다. 서구인이 우리의 이런 식사 풍경을 엿본다면 아마도 침묵속에서 되새김질하는 소를 연상할지도 모른다. 우리 조상들은 식사중의 대화는 경박한 짓이며 이는 복을 쫓는 행위로 치부했던 것 같다. 어쩌다 어른이 무언가를 지시하면 아랫 사람은 그저 "네"라는 짧은 대답만 허용될 뿐 그 하명에 어떤 이의도 용납되지 않는다. 비약인지 모르겠으나 예로부터 한국인에게 만성위장병 환가자 많은 것도 이런 식사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온가족이 상하구별 없는 원탁에 둘러 앉아 이건 밥을 먹는 건지 말 시합(speech contest)이라도 하는 건지 모를, 그런 서양인들의 식사 풍경을 우리 조상들이 보셨다면 뭐라 말씀하셨을까?
우리에게 토론은 곧 언쟁의 뜻으로 잘못 인식되었다.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는 것 자체를 윗사람들은 말대꾸 내지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로 받아들였다. 한국의 민주화가 늦어진 이유도 이와 같은 미숙한 대화술, 토론술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서구화의 영향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요즘은 놀랍게 달라지고 있다. 개인은 개인대로, 집단은 집단대로 저마다 목청을 높여 자신의 입장을 항변하기에 열을 올린다. 반장 선거에 나선 초등학교 어린이도 똑똑 부러질 정도로 자기 소견을 발표한다. 쭈뼛거리며 멋쩍게 뒤통수나 긁던 지난 날의 어린이와는 판이한 모습이다. 거리에서 교통 사고가 나도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다. 논리나 정당성은 뒷전으로 밀리고 되든 안되든 소리부터 크게 질러 놓고 보자는 심보들이다.
말하는 데도 무슨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는 모양이다. 어린이가 말문이 트일 때처럼 그렇게 봇물 터지듯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토해놓는다. 말 못하고 살아 온 백성이 그동안 맺힌 한을 한꺼번에 풀어 내려는 형세다. "말 못하고 죽은 귀신은 없다"고 하고,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라는 속담에 부응이라도 하듯 요즘 세상은 "나도 말 좀 하고 삽시다"의 풍조가 도래한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자유뒤에는 반드시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법, 무심코 내뱉은 말에 무서운 책임과 제약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말은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람의 말을 일컬어 믿음이라 하지 않았던가. 우리도 이제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한다. 다만 말하기 전에 한걸음 물러나 그 말을 되새겨 보는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 조상들이 고수해 온 침묵의 언어가 단지 침묵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태도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조리있게 표현하는, 말하기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자세와 훈련을 통해 낮은 목소리, 짧은 표현이 큰 목소리, 긴 표현을 이기게 될 것이다. |
나비나물
풀꽃 이름을 지을 때 그 모양이나 습성이 닮았을 때 흔히 동물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데, 보통 동물 이름이 붙을 경우 ‘닭/범/꿩/노루’ 등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거나 친근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붙는다. 곤충 이름 중에서는 ‘파리/모기’ 등을 붙이지만 모양을 본딴 것은 아닌데, 나비는 하늘거리는 모양이 예뻐서 ‘풍접초’(風蝶草)처럼 한자말 이름에도 자주 붙는다.
‘나비나물’은 봄·여름에 산과 들에 나는 어린잎을 나물로 해 먹는다. 여름·가을에 붉은자주색 꽃이 피는데, 봉오리가 벌어졌을 때 두 장씩 마주 나는 꽃잎이 나비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꽃에 꿀이 많아서 나비나물이라는 이름이 무색지 않다. 한약이름으로도 ‘왜두채’(歪頭菜)라 하여 현기증 등을 치료하고, 피로를 없애는 등 몸이 허한 사람의 기력을 회복하게 하는 효능을 지닌 귀한 산나물이다.
잎이 큰 ‘큰나비나물’, 크기가 작은 ‘애기나비나물’, 잎이 좁고 긴 ‘긴잎나비나물’, 광양만으로 흘러드는 백운산 골짜기에서 자라는, 한국 특산 푸른자주색 ‘광양나비나물’ 등의 종류가 있다. 나비나물은 동물 이름으로 식물을 일컬은 예쁘고도 달콤한 이름이다.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위례성과 아리수
백제시대 서울은 ‘위례성’이라 불렸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서는 온조 임금이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위례’는 때로 ‘욱리’(郁里), ‘아리’(阿利)로 불렸다. 이로부터 한강이 ‘욱리’ 또는 ‘아리’로 불리기도 하였다.
양주동은 <고가연구>에서 ‘아리’, ‘욱리’를 ‘하늘’의 고어인 ‘한 ㅂ·ㄹ’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우리말에서 ‘ㅂ’은 입술가벼운소리[ㅸ]를 거쳐 탈락하는 경우가 많으니 ‘한ㅂ·ㄹ’이 ‘한ㅇ·ㄹ’ 곧 ‘하늘’로 변화하는 과정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늘’의 ‘한’은 ‘큰 것’을 뜻하는 말로 한강의 ‘한’도 그 뜻이 같다.
‘아리’가 ‘ㅂ·ㄹ’에서 비롯된 말이었을 가능성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의 다른 이름에서도 확인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국내성의 다른 이름으로 ‘위나암성’ 또는 ‘불이성’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불이’는 ‘ㅂ·ㄹ’을 소리대로 표기한 것이며, ‘위나암’은 ‘위례’와 같은 꼴의 말이다. ‘ㅂ·ㄹ’은 ‘ㅇ·ㄹ’ 을 거쳐 ‘아리’, ‘위례’, ‘어리’, ‘오리’ 등의 다양한 땅이름으로 남는다. 호태왕비의 ‘어리성, 오리성, 야리성’이나 황해 봉산의 ‘오리포’, 그리고 ‘압록강’ 등도 이 말과 관련이 있다. ‘어리성’이나 ‘오리포’, ‘압록강’ 등이 ‘아리’에 한자말 ‘성’, ‘포’, ‘강’ 등이 붙은 말임을 고려한다면, ‘아리수’는 ‘아리’에 물을 뜻하는 ‘수’가 붙은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아리수’가 서울의 수돗물 이름으로 되살아 난 것도 재미있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피난과 피란
한 독자께서 '피난'과 '피란' 또는 '피난민'과 '피란민'을 어떻게 구분해 쓰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한자 의미상 피난(避難)은 재난을 피해 옮겨 가는 것이고, 피란(避亂)은 난리를 피해 옮겨 가는 것입니다. '피난'은 뜻밖에 일어난 재앙·고난 또는 지진·홍수 등 천재지변을 당해 옮겨 가는 것을 뜻합니다. '피란'은 주로 전쟁이나 병란(兵亂)을 피해 옮겨 갈 때 쓰이지만, 분쟁·재해·작은 소동 등으로 인한 것일 때도 쓰입니다. 하지만 전쟁도 하나의 재앙으로 본다면 두 단어의 구분은 모호하고 어렵게 됩니다. 실제로 이라크전 난민을 '피난민'이라 적는 언론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을 선택, 통괄해 쓴다면 풍부한 우리말의 사용을 스스로 제약하는 결과를 낳고, 구분하지 않고 쓴다면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에 전쟁에는 '피란', 그외 천재지변 등에는 '피난'으로 구별해 쓰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따라서 이라크전에서와 같이 전쟁을 피해 옮겨 가는 사람들을 '피란민'이라 적고, 지진·홍수 등 자연재해와 박해·곤궁 등을 피해 옮겨 가는 사람들은 '피난민'으로 구분해 표기합니다.
김진선 교열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