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란의 시대 - 고성훈 외
3. 대규모 무장을 갖춘 도적들-임꺽정과 장길산
조선시대 도적의 대명사 임꺽정
대도 임꺽정 탄생의 시대상
임꺽정의 활동은 1559년(명종 14) 3월부터 그가 처형당한 1562년(명종 17) 1월까지 3년 이상 황해도를 중심으로 지속되었다. 그의 활동은 그 기세가 엄청나서 가히 반란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이처럼 임꺽정 일당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당시의 정치 기강 문란과 군정의 해이로 인한 농촌사회의 피폐, 자영농민의 몰락해가는 시대적 배경 때문에 가능했다.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6세기(중종-명종-선조대)에 들어서면서 서울의 도시화가 진전되고 훈척이나 지주세력들의 성장이 가속화되었다. 그들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하여 기존의 경제활동이 미미했던 지역을 개발하고 수탈하려는 욕구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 정치, 군사적인 이유로 경제활동이 통제되었던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새롭고 주목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이 지역에 쌀 거래를 금지하고 소금의 생산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16세기부터 그것이 허락되자 훈척 세력들은 이 지역의 개간과 이권을 독점하여 수탈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이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해변의 이생지(개펄이 모여 평야가 된 땅)는 백성들이 농사를 지어먹고 사는 땅이었는데, 권세 있는 훈척 가문들이 이를 모두 빼앗아 점거하였으므로 백성들의 고통과 원망이 심화되었다. 당시에는 수령들의 가렴주구도 심하였다. 중앙의 훈척 고관들은 부패하여 뇌물 받기를 좋아하였므로, 지방의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신들에게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관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출세의 길마저 막혀버리기 때문이었다. 특히 윤원형과 심통원은 외척의 명문 거족으로서 권력을 전횡하고 있었다. 그들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데 못하는 짓이 없었다. 조정에 이와 같은 대도가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하급 관리와 수령들도 덩달아 휩쓸려 이익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저마다 남에게 뒤질세라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빴기 때문에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곤궁하여졌다. 이렇게 훈척 세력들의 횡포와 수령들의 포악함이 백성들의 살과 뼈를 깎고 기름과 피를 말리게 되자, 백성들은 호소할 곳도 없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기가 어려워 도적이 되게 마련이었다.
임꺽정에 호응한 세력들
임꺽정이 양주의 백정 출신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머지 사람들의 출신 배경은 잘 알 수가 없으나, 각양각색의 하층민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백정을 비롯해 상인, 장인(수공업자), 노비, 아전, 역리 등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 있었다. 백정이란 고려시대 천민이었던 재인이나 화척의 후예로서 주로 도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자들이었다. 이들은 사회적 차별로 인해 일반 백성들과 쉽게 어울려 생활하지 못하고 집단적인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도적의 무리를 이루기가 쉬웠다. 임꺽정은 누이동생의 남편이었던 박장명과 함께 황해도 지방에서 백정의 무리를 모아 집단을 이루었다. 임꺽정의 패에는 일부 상인들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장사를 하였기 때문에 세상물정에 밝았고, 이익이 될 만한 것을 잘 알고 있어 임꺽정 패에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한번은 봉산군수 윤지숙이 부임하는 길에 임진강 나루에서 배를 타려고 하는데, 10여 명의 장사꾼들이 물건을 지고 달려와 배에 오르는 것이었다. 윤지숙은 노하여 그들을 잡아다 벌을 주려 하였다. 장사꾼들이 짐을 푸는 것을 보니 모두 활과 창, 칼 등 무기였다. 그들이 바로 임꺽정 일당들이었던 것이다. 임꺽정 일당은 10여 명 안팎으로 모여 활동하면서 일부는 상인들의 행장을 하고 다녔다. 이들은 교통의 발달과 장시의 확장을 배경으로 보부상으로 변장하고 장사도 하면서 도적질을 하였다. 그러나 임꺽정 집단 내부에 전업적인 상인이 많았던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전문적인 상인이라기보다는 개성이나 서울의 상인들과 연계되어 훔친 물건들, 즉 장물을 파는 역할을 맡았던 것 같다. 이들은 당시의 상업 유통로를 중심으로 도적활동을 하면서, 상인으로 가장하고 노획물을 팔았을 것이다. 이들은 반농반상이었으나, 상인보다 오히려 농민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임꺽정의 무리에는 수공업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일당이었던 서림이 잡혀 문초를 당할 때 "평산 남면 마산리에 사는 대장장이 이춘동의 집에 모여서 신임 봉산군수 이흠례를 죽이기로 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면, 대장장이와 같은 수공업자들도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공업자들이 집단적으로 참여한 것 같지는 않다.
그 다음은 아전들을 들 수 있다. 임꺽정 일당을 쉽게 체포할 수 없었던 것은 경기로부터 황해도에 이르기까지 각 고을의 아전들이 그들과 은밀히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관아에서 그들을 잡으려고 하면 그 기밀이 먼저 누설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아전들은 관청의 서리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교통로를 따라 배치되어 있었던 역리들이었을 것이다. 경기와 황해도 지역은 중국과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인마의 왕래가 끊일 사이가 없는 분주한 교통요지였다. 여기에서 종사하는 역리들은 신분에서 차별대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과중한 부담 때문에 경제적인 곤란을 겪으면서 누적되었던 불만들이 임꺽정에게 동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임꺽정 난이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던 것은 이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무리 속에는 군사들도 있었다. 명종 16년 9월에 임꺽정을 잡았다고 하여 추국해보니, 해주 군사 윤희정이었다. 그가 언제부터 임꺽정의 난에 가담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진압군으로 파견되었을 때 불만을 품고 임꺽정의 무리에 참여한 것 같다. 군사로 차출되어 도적의 진압에 동원된 백성들이 몰래 빠져나와 도적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임꺽정 난에 가장 많이 참여한 자들은 토지로부터 쫓겨난 일반 농민들이었다. "모이면 도적이 되고 흩어지면 농민이 되어 출몰이 일정하지 않아 잡을 수가 없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관군의 공격이 있으면 백성들의 사이로 흩어져 일반민들과 구별할 수 없었다. 이것은 백성들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농민들은 직접 간접으로 이 난에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황해도에서는 갈대밭이 집중적으로 개간되어 권문세가나 내수사의 농장으로 편입되었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노역에 동원되고 땅을 빼앗겨 살 곳을 잃고 유랑하다가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 도적은 대개 토지로부터 이탈된 농민과 도망한 노비들이었다. 따라서 이 저항은 광범위하게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들의 도움을 받아 관군을 격파하곤 하였다. 그것은 일반민들이 품고 있던 불만을 임꺽정이 해소시켜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임꺽정의 난에 참가한 계층에는 백정을 중심으로 상인, 장인, 향리, 역리, 군사 및 일반인들이 섞여 있었으나, 이들도 기본적으로는 농민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임꺽정의 활동을 적극 지지한 것은 토지를 빼앗기거나 공납을 비롯한 각종 착취에 시달렸으므로, 지배층에 대해 다 같이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꺽정의 난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이것을 확인할만한 통계 자료는 없다. 이들은 모였다 흩어지면 반드시 각자 행동하고, 민가가 조밀한 곳에서 붙어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명종실록)에 의하면 부분적으로 파악된 수이지만, 그들의 두령급은 8-9개의 조직으로 나뉘어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도적들은 대개 몇 개의 소조로 나뉘어 활동하면서 가끔씩 하나로 뭉쳐 연결되고 있었다. 즉, 도적들은 한 무리로 집단적으로 몰려다니기보다는 조를 나누어 흩어져 활동하다가 본거지에 모여 논의하고, 다시 흩어져 활동하는 형태를 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관군의 공격이 있을 때에는 크게 모여 대응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관군이 서흥에서 군사를 집결시켰을 때, 이에 대응해 싸운 임꺽정 집단의 수는 60여 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직접 관군과 싸우지 않고 뒤에서 지원하거나 몰래 도적활동에 동조한 자들까지 합치면 그 세력은 훨씬 컸을 것이다.
임꺽정의 활동지역과 활동내용
임꺽정은 황해도를 중심으로 경기, 강원, 평안, 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황해도는 사신이 왕래하는 길목이었으므로 농민들의 부담이 타도에 비해 무거웠다. 북쪽 국경으로의 수비군 파견과 조정에 진상을 바치는 번거로움은 황해도의 2대 민폐였다. 이러한 과중한 부담은 임꺽정의 난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해도의 많은 땅이 훈척들의 농장으로 들어가고, 갈대밭이 내수사에 몰수되어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유랑하고 있었다. 또 황해도에는 도살업으로 살아가는 백정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도살업의 발생지로 알려져온 봉산이 임꺽정 난의 본거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명종 8년 이래로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은 흉작으로 매우 심각한 상태에 빠졌다. 연이은 흉년과 여러 가지 조세부담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는 농가들은 농우를 팔아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평안도 지방의 농우들은 대개 황해도 지방으로 팔려가고 있었다. 평안도 지방의 소가 황해도에 집중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백정들의 일이 많아지고, 그 세력기반이 확대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황해도에서의 농민저항은 이전부터 산백정이나 도적들의 활동을 통하여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명종 12년 4월에는 황해도 일원에 걸쳐서 도적떼가 번성하였다. 그 가운데 특히 서흥, 우봉, 토산, 신계현과 강원도의 이천현이 더욱 심하여, 주민들이 견디지 못하고 흩어지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었다. 특히 봉산은 도살업이 흥한 지역일 뿐만 아니라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서흥에는 용천역과 신흥역이 있었고, 봉산에는 검수역과, 동선역, 소곶역, 관산역 등이 있었다. 임꺽정 집단이 거점으로 삼았던 지역은 백정들이 많이 사는 지역과 역참지대라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역참은 교통로로서 공물이 운송되는 노선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기 때문에 도적들이 활동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이들은 역로를 중간거점으로 하여 약탈한 장물을 운반하여 개성 등지에서 처리하였다. 요컨대 이 난의 지역적 특징은 백정의 본거지요, 갈대밭이 많은 지역이었다. 그것은 봉산, 서흥, 평산, 안성, 개성, 장단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간선도로에 연해 있었다. 특히 봉산에서 문화, 재령, 해주 및 구월산 지역에서 임꺽정 일당의 활동이 많았다. 그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황해도 주요지역 및 황해도와 인접한 경기도 북부지역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활동을 보면, 10월부터 4월까지의 농한기를 주로 이용하고 있다. 농번기에는 농사를 짓고 추수가 끝난 후, 조세를 걷어 수송하는 시기에 약탈을 노렸던 것 같다. 그들은 추수 후 공물의 약탈을 집중적으로 노렸으며, 약탈한 물건을 개성부나 서울 등지에 운반하여 판매하고, 그곳에 소굴을 마련해두기도 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조정의 관원이나 감사의 일가라고 사칭하면서 조정의 허실을 정탐하기도 하였다.
임꺽정 일당은 약탈, 살인, 방화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교통로를 장악하여 길 가는 나그네를 털었고, 성 밑으로 몰려들어 주민들을 살해하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주민들은 보복이 두려워 감히 고발하지 못하고, 관리들은 체포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민가에 불을 지르고 소나 말을 약탈하였으며, 반항하는 사람이 있으면 공개적으로 잔혹하게 사지를 찢어 죽여 백성들에게 공포심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들은 명화적으로 살인, 약탈을 하다가 대낮에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관아의 옥문을 부수고 형리들을 죽이기도 하였다. 또 때로는 양반으로 가장하고 관청에 출입하였고, 약탈한 물건을 타 지역에서 판매하는 등 대담한 활동을 벌였다. 임꺽정 일당의 잔혹상은 실록에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적들이 곧 아비를 놓아주고 아들(신고자)을 결박하여 촌가에 데리고 가서 밥을 짓게 하고, 빙 둘러앉아 배를 갈라 죽인 뒤에 떠나갔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들의 보복행위는 매우 잔혹하였다. 이렇게 잔혹한 활동에 대해 황해도의 관찰사들도 보복이 두려워 함부로 체포하지 못하였다. 관찰사 신희복은 부모의 무덤과 농장이 평산에 있었으므로, 그들의 보복을 염려하여 절제사에게 명령해 체포하도록 독촉하지 않다가 해임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관리를 사칭하며 수령들을 낭패시키거나 관권에 도전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한때 금부도사의 복장으로 변장하고 봉산군수 박응천을 살해하기 위해 객관을 습격한 적도 있었고, 영접사신의 관군을 살해한 뒤에 그 마패를 관아의 문에 걸어놓고 고발하지 못하도록 위협하기도 하였다. 임꺽정 일당은 동료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관아를 습격해 옥을 부수기도 하였다. 그들은 서흥부에 갇혀 있는 처자 및 죄수들을 옥을 부수고 탈취하였고, 임꺽정의 부인을 구출하기 위해 서울의 전옥서를 공격하는 등 대담한 작전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임꺽정 일당을 토벌하라
임꺽정 일당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조정에서 본격적인 대책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1559년(명종14) 3월부터였다. 조정에서는 황해도의 적세가 흉포하여 사람을 약탈, 살해할뿐 아니라, 심지어 대낮에도 관청을 습격하여 수령의 나졸을 사살하며, 서울에서 가까운 지역까지 출몰하자 이를 중대 사태로 간주하고 토벌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에서는 황해도 수령들에게 30-40명의 용맹스런 장정을 뽑아 기동타격대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또 도적의 출몰을 신고하는 양민들에게는 군직을 주고, 노비 등 천인인 경우에는 신분을 해방시켜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령으로 적의 우두머리를 체포하면 당상관으로 승진시키는 등 포상을 걸었다. 그런 한편 도적들에 대한 선무공작도 병행하였다. 그들 중에서 가난에 쪼들리거나 부역을 피하기 위해서 도적이 된 자들이 회개하고 자수하면 이전의 범죄를 불문에 부친다고 약속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방문에 써서 황해도의 큰 기이나 깊은 산 속의 사찰에도 게시하여 주민들의 협조를 얻도록 하였다. 그러나 방문 게시의 효과는 없었고, 임꺽정 일당의 활동은 더욱 거세었다. 이시기에 황해도의 관찰사들은 임꺽정을 체포하지 못한 문책으로 석 달이 멀다하고 해임되는 경우가 많았다. 1559년(명종 14)에 신희복이 해임당하고 그 후임으로 이탁이 임명되었지만, 그도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정유로 교체되었고, 정유도 3개월만에 김덕룡으로 바뀌었는데, 그 역시 9개월 만에 김주로 대체되었다. 임꺽정 토벌의 책임자가 이렇게 자주 교체되었으므로, 토벌작전도 효과적으로 추진되기는 어려웠다. 조정에서는 지방 수령들만으로는 도적을 막을 수 없었으므로 종2품의 고위직 무신 두 명을 뽑아 순경사의 직책을 주고, 황해도와 강원도에 내려보냈다. 황해도에는 이사증이, 강원도에는 김세한이 순경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군사를 동원한 순경사의 파견은 역로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백성들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고, 도적의 토벌에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이와 같이 민폐만 끼칠 뿐 도적 체포의 실효가 없자 조정에서는 순경사 대신 토포사 남치근과 순검사 백유검을 파견하여 도적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도적의 세력은 점점 강성해져 그 무리가 서울에까지 많이 숨어들었다. 이 때문에 도성의 모든 문을 닫고 각방 거리의 의심나는 곳을 빠짐없이 수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도적에 대비한 도성의 경비 조목은 다음과 같이 마련하였다.
1. 도적을 잡는 기간 동안은 도성의 문들은 인정 전에 닫고, 날이 밝은 후에 열되, 병조에서 자주 살펴서 근무자가 나오지 않은 경우에는 수문장 5명 등을 엄히 다스릴 것. 2. 인정 후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는 아무도 통행할 수 없다는 것을 우선 공고하고, 5부에 명하여 각방에 알린 뒤에 시행할 것. 3. 대궐문을 열고 닫는 것은 평상시의 규정을 바꾸어, 일이 없는 날에는 날이 샌 후에 열고 해가 지면 닫을 것. 4. 도성 각문의 수문장은 성실하고 재간있고 용맹스러운 무신으로 임명하며, 황당인의 출입을 항시 살필 것.
순경사와 마찬가지로 토포사도 군대를 거느리고 오래 머무르자 군대와 백성들이 고달파서 원망하는 소리가 높았다. 그 사이에 임꺽정은 비록 잡지 못했지만 그들 무리 중에 두령급은 거의 섬멸하였으므로 토포사의 철수가 강력히 제기되었다. 특히 토포사 남치근은 평소 엄하고 포악한 장수로서, 도적을 잡는다고 마구 양민들을 살륙하였으므로 백성들의 원한과 고통이 극에 달하여 철수 주장이 계속되었다. 그러한 차에 남치근의 군관인 곽순수와 홍언성 등이 임꺽정을 서흥에서 사로잡았다. 임꺽정은 관군에 쫓겨 어느 촌가에 있었는데, 관군들의 포위망이 좁혀들어 도저히 탈출할 수 없게 되자 한 노파를 위협하여 "도적이야" 하고 외치며 달아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무기를 지니고 그 노파의 뒤를 쫓아갔다. 관군이 도착하자 그는 도적이 이미 도망하였다고 속였다. 관군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서 임꺽정은 재빨리 말 한 필을 빼앗아 타고 군중에 섞였다가 도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옛 부하였던 서림이 그를 알아보고 귀띔하여 임꺽정을 체포할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즉시 선전관과 금부낭청 및 포도군관 등을 보내어 잡아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록에는 그 후에 그를 문초한 기사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임꺽정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관군이 입은 피해도 컸다. 임꺽정은 국가의 권위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고, 수령을 죽이거나 죽이려고 계획하였다. 이들의 표적이 된 수령들은 어떤 인물들이었을까? 먼저 봉산군수 이흠례를 들 수 있다. 임꺽정의 무리는 명종 15년 11월에 새로 부임한 봉산군수 이흠례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흠례는 신계현령으로 있을 때 임꺽정 일당을 많이 체포하였기 때문에, 그를 살해하면 그들의 위신을 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후환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흠례의 살해 계획을 세우기 위하여 대장장이 이춘동의 집에 모였으나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또 소탕하러 온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을 쏘아 죽였다. 그 역시 임꺽정 일당을 추적하여 체포하는 데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임꺽정이 매우 미워하였던 것이다. 이억근은 당시 군사 20여 명만 거느리고 새벽에 적의 소굴로 들어갔다. 그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일곱 대의 화살을 맞은 채 죽었다. 또 부장 연천령도 살해되었다. 그는 선전관 정수익과 이흠례 및 금교찰방 강여와 함께 5백여 군사를 거느리고 임꺽정을 체포하러 구월산으로 들어갔다가 사살되고 역마까자 빼앗겼다. 봉산군수 박응천은 일 처리에 빈틈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꺼려하였다. 이들은 참령 아래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박응천을 잡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그들은 의금부 도사인 금오랑으로 변장하고 관인 유숙처인 객관에 몰려가 "군수는 나와서 영을 받으라"고 외쳤다. 박응천은 이를 미리 알고 군인들을 모아 잡으려 했으나 그들은 눈치를 채고 도망치고 말았다. 이외에도 부자나 부유한 상인들이 그들의 습격 대상이 되었고, 무고한 백성들도 많이 희생당했다. 그리고 황해도 각 지방의 백성들 가운데 도적을 고발했다가 죽임을 당한 자들도 있었다.
임꺽정 활동의 성격과 영향
임꺽정의 활동은 반란으로 부를 만큼 당시로는 가장 크고 오래 지속된 민중들의 저항이었다. 국왕이나 조정의 관리들은 이것을 매우 위급하고 중대한 사건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 '반란'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먼저 당시 왕과 집권 관료들이 이 사건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명종 14년 3월 임꺽정의 활동이 처음 조정에 보고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크게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대신들은 도적들을 모조리 잡아죽여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명종 15년 11월 평산 어수동에서 관군들이 크게 패전하고 부장 연천령이 살해당하자 상황이 심각함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명종은 국위를 손상시키고 기강을 훼손한 한심한 노릇이라고 탄식하였다. 왕은 임꺽정 일당에 대하여 "이들은 좀도둑에 비할 바가 아니니 진실로 특별히 조치를 더해야 한다"고 하면서 임꺽정 집단을 "보통 도적과는 다르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국왕과 관료들은 이들을 "반역질하는 악독한 도적"으로 지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임꺽정 일당을 체제도전적이 집단으로까지 느꼈던 것 같다. 임꺽정의 세력이 점치 확대대고 치열해지자, 명종은 마침내 임꺽정 일당을 '적국'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두려워하였다. 명종 16년에 들어서자 임꺽정의 저항이 해주에서 평산에 이르는 지역을 비롯해서 개성, 장단, 서울, 평양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명종은 임꺽정을 국사범으로 의식하고 체제도전적 문제로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임꺽정 일당이 국가전복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에 대응하는 조정으로서는 국가적인 위기로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임꺽정 일당이 대부대로 전열을 갖추고 관군을 향해 정면으로 공격해온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당시 국왕과 관료들은 이들의 활동과 공격이 거세어지자 일종의 전쟁사태로까지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보위적인 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여 대응했던 것이다. 임꺽정 일당은 봉건지배체제에 완전히 복속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체제 전반을 부정하고 나선 것도 아니었다. 비록 그들의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임꺽정의 무리는 군도의 성격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군도란 농민들이 자기들의 생활기반을 벗어나서 무리를 지어 싸우는 형태의 집단을 말한다. 군도 형태는 국가적 지배체제로부터 이탈했다는 점에서 소극적 저항이었고, 또 집단적인 무장항쟁을 했다는 점에서는 적극적 저항이었지만, 대변혁을 이루기는 어려웠다. 임꺽정의 활동은 조선시대 민중저항의 초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농민저항과 도적활동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임꺽정의 저항은 군도의 형태를 빌린 농민저항의 한 현상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군도 형태는 중세사회에서의 민중저항의 한 현상으로 파악되는 것이고, 당시 관료들의 관점 역시 '모이면 도적, 흩어지면 백성'이라 한 것으로 보아 농민저항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꺽정의 난은 비록 도적의 활동 형태로 나타났지만, 그 기본적인 성격은 중세사회 민중저항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저항은 16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 격화된 사회경제적 모순을 민중에게 전가시키는 지배층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훈구파 정권 말기에 만연했던 권세가나 내수사이 농장과 사유지 확대에 대한 저항이었다. 당시 기록에도 "도적이 생기는 것은 도적질하기 좋아해서가 아니라, 배고픔과 추위가 절박해서 부득이 도적이 되어 연명하려는 자가 많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천민층의 저항의식의 발로인만큼 봉건적인 지배질서에 저항한 운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특히 교통로, 국가수취 운반로, 상업의 유통망 등을 집중적으로 노린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반란의 성격을 지닌 임꺽정의 활동은 하나의 민중적 저항의 한 모델이 되어 이후 군도의 형태를 띤 백성들의 저항운동에 지침이 되었다. 그 영향은 조선후기 장길산의 활동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출귀몰한 장길산의 활동
소빙기의 자연재해와 도적의 발생
동, 서양학계를 막론하고 17세기 사회를 이해하는 주요 단서로 소빙기의 기후 환경을 들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소빙기의 실제는 조선왕조실록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1670(현종11)의 대기근과 1695(숙종 21)부터 1699(숙종 25)까지의 대기근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 시기에는 서리, 우박, 눈, 한파를 비롯하여 각종 냉해, 한발 혹은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가 집중되었고, 연속적인 흉년으로 민중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1695년(숙종 21) 4월에 나라 전체에 큰 가뭄이 들었다. 거센 바람이 연이어 불고 서리가 여러 번 내려 보리와 밀이 여물지 않았으며, 파종 시기를 놓쳐 큰 흉년이 들었다. 그 해 가을에는 곡식을 추수할 계절이 되었는데도 곡식이 없어 떠돌아다나며 걸식하는 자가 길에 가득하였다. 다음해 봄이 오기도 전에 살아남을 사람이 별로 없는 참혹한 지경이었다. 이렇게 되자 평안도의 굶주린 백성 이어둔은 실성하여 사람의 고기를 먹었다. 또 용천부에서는 금춘과 예합이 양녀였던 기생을 짓눌러 죽이고 그 고기를 먹었다. 이억금은 초장을 파내어 시체의 옷을 벗겨 입고 그 고기를 먹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백성들의 굶주림이 날로 더해가자 조정에서는 서울과 각 고을에 진휼소를 설치하여 기민들을 구제하였다. 이곳을 찾아 먹으러 오는 자가 날로 늘어나 서울은 1만 명이 넘었고, 팔도에서 각각 수만 명이었다. 영남에서 올라온 보고는 기민이 56만여 명이라고 하였다. 굶어죽은 사람들을 합치면 수만 명이 되었다. 이렇게 자연재해가 겹치자 가을에는 물가가 150% 정도 앙등했고, 이듬해 보리 고개 철에는 600%로 폭등하였다.
1699년(숙종 25)에 완성한 호구통계를 살펴보면, 전국의 호구수는 129만 3083호이고, 인구는 577만 2300 명이었다. 이를 6년 전인 1693년(숙종 19)와 견주어보면 호구수는 25만 3391호가 감소되었고, 인구수는 141만 6274 명이 줄어들었다. 1695년(숙종 21) 이후 기근과 유행병이 참혹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엄청나게 인구가 격감된 것이다. 당시 인구의 25%-33% 정도가 자연재해로 희생된 것이다. 숙종은 온갖 노력을 다하여 백성들을 진휼하려고 노력하면서, "혹시라도 도적질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지만, 도적은 전국에서 벌떼같이 일어났다. 백성들은 굶주림과 추위가 겹쳐 도둑이 될 수밖에 없었고, 전국적으로 도둑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없어 길에는 나그네가 거의 끊어질 지경이었다. 심지어 서울의 경복궁 신무문 밖에서도 대낮에 사람을 죽이고 의복을 약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좌의정 유상운은 전국적으로 도적이 성하므로 토포사를 죽산에 더 설치하고, 강원도 토포사도 한 곳을 더 설치하자고 하였다. 영의정 남구만은 "황해도의 도적 피해가 타지방보다 심한데도 토포사가 없으니, 수령 중에서 토포사 몇 사람을 차출함이 마땅하다"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토포사만으로는 도적을 다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신고체제를 강화하고 신고자에 대한 포상을 대폭 늘려서 도적을 잡고자 하였다. 병조에서는 도적을 잡는 사람들에 대한 포상절목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에 따르면 도적 5, 6명 이상을 잡은 평민과 한량은 권관에 제수하고, 무과 출신은 만호에 제수하며, 전직 조관은 그 자격과 명망에 따라 상당한 벼슬을 주고, 도적 중에서 자수한 자는 죽음을 면해주고 후한 상을 준다고 정하였다. 그후 조정에서는 포상규정을 고쳐 도적패 중에서 스스로 그 도당을 고발한 자들은 1-2명일 경우 고발한 자는 죄를 면하고 은 50냥을 주며, 3-4명을 고발한 자는 죄를 면제하고 명예직과 은 50냥을 주며, 5-6명을 고발한 자는 죄를 면제하고 명예직과 은 75냥을 주며, 7-8명을 고발한 자는 죄를 면제하고 명예직과 은 1백 냥을 주며, 10명 이상을 고발한 자는 죄를 면제하고 명예직과 150냥을 준다고 선포하였다.
장길산의 활동과 체포 작전
장길산은 광대 출신으로서, 광대놀이를 잘하고 용맹스러웠으므로 쉽게 사람들을 불러모을 수가 있었다. 그는 처음에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는데, 조정에서는 1686년(숙종 12)에 특별히 신엽을 황해감사로 삼아 체포하게 하였다. 신엽은 그의 도당 한 명을 잡아 장길산의 은신처를 알아내어 체포하려 하였으나, 그들은이 사실을 염탐하고 모두 달아나 실패하였다. 장길산은 1692년(숙종 18) 평안남도 양덕 부근에서 활동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포도청의 장교를 파견하여 체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그의 행방은 묘연하였으나, 함경도 두만강 입구에 있는 서수라에서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1695년(숙종 21)에는 명화적 수십 명이 기를 세우고 총을 쏘며 철원 읍의 인가에 돌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으나, 부사 황진문이 겁을 먹고 체포하지 못하였다. 이 명화적이 장길산 부대라는 확증은 없지만, 수십 명이 부대를 이루고 철원부사가 겁을 먹고 출동하여 잡지 못한 도적의 규모로 볼 때 장길산 일당이었을 것이다. 1697년(숙종 23)에 역적 모의의 고변이 있었는데, 이영창이라는 자가 금강산에 있는 승려 운부 및 장길산과 손을 잡고 거사를 도모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장길산은 서수라나 벽동 등지에서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마상으로 위장하여 무기를 뺏는 등 활동이 활발하였다. 숙종은 아연 긴장하여 장길산을 체포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극적 장길산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로 왕래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체포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교활함을 알 만하다. 지금 이영창의 초사를 관찰하니 더욱 통탄스럽다. 여러 도에 은밀히 신칙하여 있는 곳을 상세히 정탐하게 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도록 하라."
조정에서는 여러 도에다 은밀히 밀지를 내려 감사와 장수들이 별도 방략을 세워 장길산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또 비변사에서는 은밀히 군대와 포도청에 명령하여 장길산을 잡으면 후한 상과 높은 벼슬을 아끼지 않겠다고 독려하였다. 그러나 경기도 지평에서 토포관이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장길산은 끝내 체포되지 않았다. 임꺽정은 체포되었는데, 장길산은 왜 잡히지 않았을까? 시대상과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성호 이익은 조선시대의 3대 도적으로 홍길동, 임꺽정 그리고 장길산을 들었다.
글 이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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