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란의 시대 - 고성훈 외
2. 임진왜란 와중에 일어난 변란 - 송유진과 이몽학의 난
임진왜란과 시대상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은 임진왜란 도중에 일어난 반란이었다. 이 두 난은 임진왜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먼저 그 배경이 되었던 임진왜란 당시의 급박한 상황과 민중의 참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어떤 측면에서 왜군의 침입으로 야기되었던 임진왜란이야말로 조선시대 최대의 변란이었다. 이러한 미증유의 국난을 당한 당시 조정의 모습은 어떠하였던가? 왕과 신하들은 자신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하여 수도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이것이 전란 기간 내내 백성들이 조정을 불신하고 원망하는 구실이 되었다. 조정에 대한 불신은 백성들의 저항운동으로 나타났다. 궁궐과 종묘를 불태운 것은 왜군이 아니라 서울 시민들이었다. 또 전국 도처에서 텅 빈 관아를 습격하거나 난동을 부리고 관물을 훔쳐가는 일도 많았다. 그들 중에서 본격적으로 조선왕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면서 혁명을 도모하였던 것이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이었다. 일본은 조선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선조 25년(1592) 4월 14일에 28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침략하였다. 선발대 1만 7천 명은 700여 척의 군선을 타고 4월 13일에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부산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죽음으로 항전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었고 그들도 장렬히 전사하였다. 적은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여 김해, 밀양 등을 함락시켰다. 조선은 2백여 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냈으므로 관리들과 백성들은 왜적이 침입한다는 풍문만 듣고도 놀라 달아났다. 급보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정예병을 이끌고 상주에 내려가 왜적을 막도록 하였으나, 이일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고 패하여 혼자 달아났다. 조정은 다시 여진정벌에 공이 많은 신립을 삼도순변사로 삼아 왜적을 막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군사 요충지인 조령을 포기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항전하다가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충주 패전의 보고에 접한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파천하자는 말을 꺼냈지만, 대신과 중신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부당함을 진언하였다. 그들은 종묘와 궁궐이 있는 경성을 고수하면서 외부의 원군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우승지 신잡은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선조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수찬 박동현도 "전하께서 일단 도성을 나가시면, 인심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연을 멘 인부도 길모퉁이에 연을 버려둔 채 달아날 것입니다"하고 민심이 극도로 나빠진 상황을 말하였다. 선조는 "내가 여기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파천은 결정된 사실이었다. 6, 25사변 때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사수한다고 방송하면서, 정부는 이미 대전으로 천도했던 사실과 흡사하다. 4월 그믐날 선조는 평안도 쪽으로 피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호위하던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고 궁문엔 자물쇠도 채워지지 않았다.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마저 끊어졌다. 밤이 깊어 선조는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타고 돈의문을 나가고 왕비는 걸어서 인화문을 나왔다. 밤은 칠흑같이 어둡고 비까지 내려 지척을 분변할 수 없었는데, 도승지 이항복이 촛불을 잡고 앞을 인도하는 형편이었다. 선조의 행차가 지나가려 할 즈음 도성 안이 성난 백성들이 먼저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훔쳐갔다. 이윽고 선조가 떠나자 난민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다. 이 두 곳의 관서를 먼저 불태운 것은 공사 노비의 장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성이 창고도 크게 노략질하였고, 모두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다. 잔류 부대장격인 유도대장이 몇 사람의 목을 베어 군중을 경계시켰으나, 난민이 떼를 지어 일어나서 금지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에 선조의 행차가 모래재를 넘었다. 계속해서 많은 비가 내려 일행이 비를 맞으며 벽제역에 이르러 벽제관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급하게 임명되었던 동궁(광해군)은 반찬도 없었다. 병조판서 김응남이 흙탕물 속을 분주히 뛰어다녔으나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따라왔던 많은 관리 중 다수는 도로 서울로 들어가 가족을 데리고 피난하기 바빴기 때문에 왕을 수행하는 관리는 백여 병도 되지 않았다. 선조의 행차는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다달았다. 밤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도선장을 밝혀줄 등불도 없었다. 마침 근처에 있던 빈 정자에 불을 질러 길을 밝힐 수 있었다. 파주 목사와 장단 부사가 임시로 주방을 마련하여 임금의 수라를 준비하였으나, 호위하던 군사들이 갑자기 난입하여 음식을 빼앗아 먹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선조가 굶게 되자, 장단 부사는 두려워 도망치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에 선조가 동파관을 출발하면서, 대신들을 불러 괴로운 듯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부르짖었다. "이산해야, 유성룡아!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속에 있는 대로 털어놓고 말하라"하니, 여러 신하들이 엎드려 눈물만 흘리면서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결국 도승지 이항복이 의주가 좋다고 건의하여 그곳으로 가기로 정하였다. 의주로 가는 도중에 선조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입국 허가를 요청하였고, 조정을 둘로 갈랐다. 젊고 건장한 신하들은 자기를 따르게 하여 의주로 달아나고, 늙고 쇠약한 신하들은 세자인 광해군을 따르게 하여 전선에 투입하였다. 이를 분조라고 불렀다. 명나라에서는 선조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왕의 행차는 의주에 머무르고 말았다. 이와 같은 선조의 비겁한 행동과 조치는 관리들과 백성들의 비난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상소를 올려 선조가 세자에게 양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말로만 양위할 것처럼 하고 끝내 물러나지 않았다. 왕의 권위는 완전히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송유진과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게 된 첫 번째 원인은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은 조선시대를 전, 후기 둘로 나누는 분수령이 될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왜군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왕이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파천함으로 말미암아 정부의 권위와 통제력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천안의 송유진이 난을 일으킨 것을 필두로, 각지에서 백성들이 반란을 꾀하였다. 둘째로는 국가 재정의 궁핍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만으로는 왜군을 막기 어려워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게 되었고 명나라의 원병들이 오게 되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탄난 형편에 많은 의병과 명군에게 군량미를 공급하고, 말먹이를 대는 일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왜군에게 약탈당하고 국가에 수탈당하여 끼니를 이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면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기근이 극도에 이르러 심지어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서도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길가에 쓰러져 있는 굶어죽은 시체에 완전히 붙어 있는 살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산 사람을 도살하여 내장과 골수까지 꺼내 먹었다."
기근이 얼마나 심했으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식인종화되는 사태까지 발생했겠는가? 셋째로는 신분 질서의 혼란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국가에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전란을 막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왜군을 잡아오는 자에게는 서얼이나 양인, 노비를 막론하고 전공에 따라 파격적으로 신분 상승과 해방을 약속하였다. 또 국가에서는 부족한 군량미를 충당하기 위하여 납속(곡식 기부)을 받고 노비는 상민으로, 상민은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주었다. 그러므로 노비나 백성들은 신분 해방이나 상승의 호기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백성들의 바람을 쉽게 성취시켜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송유진이나 이몽학과 같은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호언장담으로 백성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송유진의 난
정권 장악을 기도하다
임진왜란 중에는 크고 작은 반란사건들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그 가운데 선조 26년(1953)에 일어난 송유진의 난과, 29년(1596)에 일어난 이몽학의 난이 가장 두드러진다. 왜란 초기의 산발적인 소요는 신분해방을 위해 일어났다고는 해도, 전란을 틈탄 우발적인 사건이었으며 비조직적인 행동이었다. 또 이러한 행위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던 적의 세력권 안에 있었던 사건이었고, 직접 왕정의 전복을 겨냥한 반란은 아니었다. 그러나 송유진, 이몽학의 난은 그 규모나 조직면에서 양상이 판이했다. 이 두 반란은 왜군이 화의를 조건으로 이미 남쪽으로 철수하여 국가의 통치권이 미치던 충청도 지역에서 일어났다. 반란의 주모자들도 정면으로 왕권을 타도하고 새 나라를 수립하여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송유진은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오직 군량과 기계를 모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몽학은 "나라를 태평하게 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임란 초기 감사 수령들의 수탈과 혹사에 불만을 품었던 민중들의 폭동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왜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바라만 보다가 흩어지는 관원과 장수들을 증오하였던 것이다. 송유진의 난은 당초 선조 27년(1954) 정월 대보름에 일당을 이끌고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충청도 일대를 주무대로 한 이 반란음모는 본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다른 지역에까지도 상당한 동조세력을 갖고 있었다. 반란이 발각되기 전에 송유진 일당의 포진상황을 보면 1진은 청계산에, 1진은 지리산에, 1진은 속리산에, 1진은 광덕산에 포진하는 등 여러 산골짜기에 분포된 자가 2천여 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진술은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여러 지역에 그들의 동조자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송유진과 같이 거사를 계획하다가 배반하여 그를 체포하는 데 앞장섰던 홍우는 선조의 문초에서 "유진의 흉칙한 정상으로는 그 군사가 10명이면 1백명이라 하고, 1백 명이면 1천명이라고 일컫습니다"라고 진술하였다. 이러한 과정에도 불구하고 당시 지방관들의 보고 내용을 보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란세력들이 서로 연계되기 전에 발각되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충청도 조도어사 강첨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반란군들 중에는 양반과 무관들도 섞여 있었으며, 이들이 반란에 주도적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천안에서는 무기를 관리하던 관원이 송유진 일당에 사로잡히기도 하였고, 본 고을 사람 중에서도 자진하여 적중에 들어가는 자도 있었다. 중앙 정부는 천안의 군기감관 송망기 등이 반군에게 사로잡힌 사건을 중시하여, 선전관을 급히 파견하여 송망기의 거처를 탐지하는 한편, 병사 변양준과 순변사 이일 등에 명하여 비밀리에 탐문토록 하였다. 송유진은 충청도 천안과 직산 사이를 왕래하면서 서울의 수비가 허술함을 알았고, 의병장을 사칭하여 반란세력을 규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때 지리산, 속리산, 청계산 등지에 은신하고 있는 그들 일당의 수가 2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들은 군량미와 무기를 수집하여 양을 많이 비축하였다. 그들은 먼저 각처의 반란세력과 약속하고 군사를 움직여 아산, 평택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명기를 탈취하였고, 그 뒤 서울에 침입하기 위해 언제 먼저 전주에 밀서를 보내 국가 전복을 꾀하였다.
송유진의 체포와 사건의 마무리
조정에서는 송유진이 전주에 밀서를 보낸 같은 날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포고문을 지방에 선포하였다.
1. 수령이 사려가 깊고 담력이 있는 자를 가려서 반란세력에 침투시켜 적의 동태를 자세히 살필 것. 2. 충청도에 장수 한 사람을 고정 배치시켜 반적을 체포하고 토벌하는 일을 일임할 것. 3. 반적 중에 귀순하는 자는 죄를 면해주고, 반적의 두목을 체포하거나 목을 베는 사람은 후히 포상한다.
충청병사 변양걸은 송유진 등이 반도를 규합하여 무기, 군량을 갖추어 서울을 침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를 인솔하여 온양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주모자의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송유진 일당의 거사가 사전에 실패하게 된 것은 진천에 사는 무사 김응룡의 계책 때문이었다. 그는 조카뻘 되는 홍각이 반란 주모자이 심복이 되어 종사관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홍각을 직산의 자기 집으로 끌어들여 위협하는 한편, 이해타산을 따지며 그를 설득시켰다. 그리하여 반도들의 실상을 파악한 후 홍각으로 하여금 송유진을 꾀어내게 하였다. 송유진은 홍각의 거짓 초청에 응하여 부하 수십 명을 데리고 함께 왔다. 김응룡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역사 홍우 등과 함께 송유진 일당을 포박하는 데 성공하였다. 선조는 송유진 등의 체포 소식을 들었으나 안심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송유진이 스스로 판서라고 사칭한 때문에, 그 위에 괴수가 있으리라고 우려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선조는 서울의 각 성문을 철저히 지키게 하는 한편 한강의 경비를 엄격히 하게 하였다. 또 남산 위에는 장수와 병졸들로 대오를 짜서 주야로 망을 보게 하였다. 송유진 일당을 체포했다고 하여 반란세력에 대한 방비가 해이해지는 것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또 병조에 명하여 장사들을 모아 부대를 편성시켜 대기시켰고, 조경을 포수대장으로 삼았다. 이와는 별도로 금군대장을 두어 함께 입직시키게 하고, 좌우영에 있는 화기, 화약, 궁시, 검창 등을 모두 대궐 안 군기시로 들여놓아 방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또한 용산창에는 용맹한 군사를 배치하여 항시 계엄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영의정 유성룡과 병조판서 이덕형으로 하여금 대궐 안에서 숙직토록 하고, 모든 일을 수시로 변통하여 대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송유진의 반란음모 이외에는 더 이상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체포된 송유진의 송치 문제를 두고 조정의 중신들간에 구구한 논쟁이 있었다. 현지에서 처단할 것인가 아니면 서울로 압송하여 국문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많은 논란 끝에 송유진을 서울로 압송하기로 하고, 선전관, 금군, 도사 등을 보내어 뱃길을 이용하여 10여 일 만에 서울로 압송하였다. 그리하여 대궐 뜰에서 국문이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대신과 양사의 장관만이 참석토록 하였는데, 송유진 일당과 무관한 사람들의 억울한 옥사를 막기 위하여 전일 송유진 일당으로 자수하여 송유진을 포박하는 데 공을 세운 직산의 홍응기와 부장 송난생 등 7인을 입회하도록 하였다. 정월 24일 국문이 시작되자, 송유진은 처음 진술할 때 자신이 괴수가 아니고 적괴는 바로 이산겸이라고 둘러대었다. 그 자신은 훙근에게 의탁하여 아동들을 모아 훈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고 발뺌하였다. 그러나 주모자 격인 김천수, 오원종, 유춘복 등을 국문한 결과, 괴수는 송유진과 오원종으로 밝혀졌다. 수원에 살았던 오원종은 침을 잘 놓는 한의사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과 접촉하면서 그들을 포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월 15일 반란을 일으켜서 서울로 침범하기로 결의하였다고 한다.
송유진은 나라가 위태하고 어지러운 시기를 틈타 관원들의 인신과 공문을 위조하여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였다. 그리고 무기와 군량을 탈취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꾀하고 여러 곳에 반군을 결성하였다. 그는 오원종이 "서울이 허술하여 임금이 있는 곳은 모두 울타리로 둘러쳤으므로, 2백 명의 군졸만으로도 해볼 수가 있다"는 말을 믿고 서울을 침범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는 오원종과 함께 통유문을 돌리고 군대명부를 작성하고, 유춘복을 돌격대장으로 삼았다. 그들은 평상시 자기들끼리 말할 때는 백동은 황동이라 부르고, 대동은 소동이라고 부르는 등, 암호나 중국어를 사용하여 비밀조직을 확대해나가다가 체포 처형되었다. 이 난에 연루되어 처형된 사람은 송유진을 비롯하여 오원종, 김천수, 유춘복, 김언상, 송만복, 이추, 김영 등 16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능지처참당하였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가 1명, 추국을 받다가 사망한 자가 1명으로 모두 18명이었다. 그들의 가재, 전답, 잡물 등은 그를 체포하는 데 공을 세운 홍응기 등에게 분배되었다. 그밖에 이 난에 연루되어 추국을 받은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들 중에는 송유진 일당에게 속아서 빠져든 의병장, 현직 관원, 양반 등 광범한 인물들이 체포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산겸, 여대로, 노일개, 조원, 신응희, 김달효, 조희진 등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석방되었으나, 이산겸만은 반란의 동모자라는 죄명을 입고 끝내 구제되지 못하였다. 이산겸은 충청도 보령 사람으로 이지함의 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조헌의 휘하에서 종사하였다. 조헌이 금산싸움에서 전사하자 흩어진 병졸들을 수습하여 평택, 진위 등지에서 싸웠고, 건의대장 심수경의 지휘를 받았다. 그는 여러 지역으로 의병을 이끌고 다녔으나 그리 큰 전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그는 한때 의병을 해산시키고 본가로 돌아간 적도 있었으나, 송유진 일당에게 연루되어 잡혀올 때는 소수의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도에 있을 때였다. 이산겸이 적괴라는 말은 송유진과 그의 일당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이산겸이 구속되자 그 영향이 중앙정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부수찬 정엽은 군졸과 군량미를 수집하러 지방에 있을 때 의병장 이산겸을 도와주었다는 이유 때문에 벼슬길에 지장을 받게 되었다. 신곡과 신기일 등은 이산겸의 장인, 처남 사이로 추국에 말려들었다. 이산겸이 반란에 가담했는지의 여부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적괴라는 진술을 끝까지 부인하였고, 송유진 일당을 잡아들이게 한 홍응기, 홍각 등도 이산겸과 대질한 결과 그 사실을 부인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듯싶다.
한편 송유진 일당 체포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많은 포상을 받았다. 적정을 고발한 직산 좌수 임달신, 송유진 등 10명을 체포한 홍응개, 홍난생, 홍우, 신계축, 홍찬, 김응추, 홍각 등에게는 차등 있게 관직과 상이 주어졌다. 그밖에도 충청병사 변양걸이 반적 체포에 공이 크다 하여 승진시켰고, 국문을 담당했던 신하들도 모두 포상하였다. 그런데 홍각은 같은 해 12월에 다시 송유진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삭탈관직되고 노비와 전택은 몰수되었으며, 추국을 받다가 매에 못 견디어 죽었다.
이몽학의 난
이몽학은 어떤 인물인가?
필자는 어린 시절에 충남 부여 홍산에서 자랐다. 그곳에는 이몽학에 관한 전설과 유적이 많이 나아 있다. '이몽학 오뉘이의 힘겨루기' 전설이나, '이몽학의 용마 이야기', '이몽학이 축지법을 사용했다'는 전설 등이 그것이다. 홍산에는 여기저기에 패어 있는 연못이 많은데, 이것이 모두 이몽학이 반역했다가 역적으로 몰리자, 그와 일가 친척의 집이 모두 파가저택(역적의 집터를 헐고 그곳을 파서 연못을 만드는 것)당한 유적들이라고 하였다. 이몽학은 1596년(선조 29)에 충청도 홍산에서 군사를 모아 난을 일으켰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의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현재에도 그곳 사람들이 자세히 알지 못하며, 또 그 내용을 조금 아는 촌로들도 좀처럼 일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반역!" 역적으로 몰린다는 것은 온 동네가 시공을 초월하여 벌벌 떨 만큼 끔찍한 일인 것이다. 필자는 어렸을 때 이몽학의 전설을 들으면서 그를 영웅시하고 마음으로 동경하였다. 필자가 들었던 이몽학 오뉘이의 힘겨루기 전설은 다음과 같다.
"이몽학은 홀어머니와 누이 세 식구가 살았다. 이몽학은 힘이 장사였으나, 지혜는 누이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누이는 이몽학이 자기의 힘센 것만 믿고 언제나 거만한 점을 늘 걱정하였다. 반면 이몽학은 어떻게 하면 자기가 누이의 지혜를 누를 수 있을까 궁금하였다. 그들은 종종 힘과 지혜 겨루기 내기를 하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누이는 목숨을 건 내기를 하였다. 이몽학은 나막신을 신고 일주일 걸리는 서울 나들이를 하루 만에 다녀오고, 그 사이에 누이는 10리 성을 쌓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 내기에서 지는 사람은 목을 베기로 한 살벌한 시합이었다. 드디어 운명의 시합은 시작되었다. 해가 거의 질 무렵 누이는 쉽게 성을 완성하고 막 성문을 매달려는 참이었다. 옆에서 이를 구경하던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남매가 늘 경쟁 상대였기 때문에 이 시합에서 지는 사람은 틀림없이 죽을 터였다. 어머니는 아들보다는 딸이 죽은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재빨리 팥죽 한 동이를 쑤어서 딸에게 먹으라고 권하였다. 딸은 어머니의 의도를 빤히 알았지만 어머니의 뜻대로 팥죽을 받아먹었다. 뜨거운 팥죽을 식혀서 조금 먹으려는데 이몽학이 들이닥쳤다. 이몽학은 누이가 성을 다 완성하지 못했음을 확인한 후 비정하게도 누이의 목을 쳐서 그 자리에서 죽였다. 지금도 은산에 가면 그의 누이가 다 먹지도 못하고 버렸다는 팥죽땅이 있다."
위 전설에서 볼 수 있듯이 이몽학은 힘이 세고 고집도 세었지만, 지혜는 모자랐던 것 같다. 누이는 이 점을 늘 걱정하고 마지막 목숨을 건 시합에서 이겨서 동생의 기를 꺾고 반역을 사전에 막아보려고 시도했던 것 같다. 아니면 이몽학의 재능을 아끼고 사랑하는 현지인들의 아쉬움에서 지어낸 전설인지도 모른다.
거사를 일으키다
이몽학은 왕족인 전주이씨의 서자로서, 임란시 충청도에서 종군할 때 조련장관이 되었다. 그는 홍산 무량사에 머물면서 뒷날 반군의 선봉장이 된 한현 등과 친교를 맺었다. 이몽학은 힘이 장사였지만 지혜가 모자라 한현의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는 꾀가 많고 세상일에 밝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기효신서)의 속오법을 가지고 군사를 배치하고 기량을 훈련시켰다. 한현은 권인룡, 김시약 등과 함께 모두 서인으로 응모하여 함께 선봉장이라 호칭하였다. 그들은 어사 이시발에 소속되어 충청도의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민심이 이반하여 백성들이 탄식과 원망으로 차 있고, 크고 작은 고을의 방비가 모두 허술함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틈을 타서 난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때 한현은 마침 부친상을 당하여 홍주에 있다가, 우선 이몽학을 시켜 거사하도록 하고 자신은 내포에서 서로 호응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몽학은 무량사의 굴 속에서 중들과 함께 깃발과 무기를 만들었다. 충청도에는 흔히 동갑회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 동갑회란 노소와 귀천을 막론하고 동갑마다 깃발을 세우고 그 갑년을 써놓으면 무리들은 각자 그 동갑을 찾아 모여들어 술을 마시며 즐기는 친목 모임이다. 이몽학 등은 그들 패거리를 시켜 계를 만든다고 선전하고 사람들을 동네 어귀 들판으로 모이게 했다. 그리고 이들을 선동하여 자신을 따르게 하였다. 이몽학은 이와 같이 무량사에서 군대를 모은 후 출병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마치 대장군처럼 깃발을 세우고 의자에 앉아 뿔피리를 불고 북을 치면서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동갑 모임 중에서 미리 정한 장정이 나와 칼을 뽑아 들고 무리를 선동하였다. 이몽학은 그들에게 "이번에 일으킨 의거는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이다. 거역하는 자는 죽음을 당할 것이고 순종하는 자는 상을 받으리라"고 일장 연설을 하셨다. 무리들은 모두들 좋다고 환호하면서 그를 따랐다. 사람마다 스스로 고관대작이 될 것으로 여기고, 성불이 세상에 나왔다고 추앙하였다.
이몽학은 승려와 무기들을 장군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문관과 무관 등의 높은 관직을 멋대로 나누어주니 양반 자체와 무뢰배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사전 준비를 다 마친 이몽학은 1597년(선조29조) 7월 6일 밤에 김경창, 이구, 장후재, 승려 능운, 사노 팽종 등과 함께 1000여 명의 반군을 동원하여 홍산현을 습격, 현감 윤영현을 사로잡은 데 이어 또 임천 군수 박진국도 사로잡았다. 이들은 모두 항복하여 이몽학에게 붙었으므로 이몽학은 그들을 높은 빈사로 대우했다. 그들은 다음날 잇따라 정산을 함락하니, 현감 정천경은 몸만 빠져 도주하였다. 이어 8일에는 청양을 함락하자 현감 윤승서는 도주했고, 9일에는 대흥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반란이 일어난 지 3일 후에야 충청도 순안어사 이시발은 홍산에서 일어난 변란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보고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정산 현감 정천경의 보고에, '이달 7일 승려와 속인 및 군사 등 무려 1천여 명이 홍산 땅 쌍방축에 모여 진을 치고, 바로 홍산 고을로 가서 현감을 끌어내 군법을 시행하고 인신을 가져와 바치도록 했으며 군기를 수색해냈다. 심지어는 호각을 불며 기치를 들고서 임천까지 행군하였으며, 또한 관아로 돌입하여 군수를 끌어내 목을 묶고 조목을 받들게 하여 적들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고 했습니다. 보고 듣기에 지극히 놀라운 일이므로, 사실이고 아니고 간에 보고받은 대로 긴급 보고하는 한편, 가까운 고을의 포수와 살수들을 징발하여 토벌한 계획 중에 있습니다."
이러한 보고서를 접한 조정에서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합동작전을 펴서 반군을 진압하라고 지시하였다. 조정에서는 옛날부터 황건적이나 홍두적이 당초에는 별것 아니었으나, 나중에는 점점 불어나서 천하의 환란이 된 것을 상기하면서 반란군을 조기에 일망타진하고자 하였다. 비변사에서는 반란군을 토벌하는 계책을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1. 반군들이 오랫동안 음모를 꾸미고 다른 도당들과 연합하였을 것이므로 치밀한 계획으로 대처해야 함. 2. 지난날 송유진의 난을 진압했을 때와 같이 그 도당을 이간시켜 자체 안에서 서로 도모하게 하여 체포하는 것이 용이할 것임. 3. 사람들은 상이 중하면 죽음을 무릅쓰고 공을 세우게 마련이므로, 이러한 사람을 가려 뽑아 다방면으로 계책을 마련해야 함.
이러한 건의에 대하여 선조도 그대로 시행하라고 지시하였다. 반란군은 거사 3일만에 6개 고을을 함락시켰으므로 기세가 대단하였다. 수령들은 먼저 도망치고 아전과 백성들은 반란군의 호령에 따랐다. 그들은 술과 음식을 차려서 반란군을 대접하였고 다투어 그들에게 가세하였다. 이에 인근의 백성들은 소문만 듣고도 호미를 던지고 그들에게 투항하는 자가 줄을 잇게 되었다. 그리하여 반군의 수는 한때 수만 명에 달하였다. 반란군은 "충용장 김덕경과 의병장 이덕형이 서울에서 내응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자 나라 전체가 놀라 민심이 술렁거리게 되었다. 부여 현감 허수겸 같은 자는 반란군이 경내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었다. 그는 부하들이 무기를 반군에게 반출하는 것을 알고도 막지 못하였고, 반군이 도착하자 모든 공문서를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또 서산군수 이충길은 그의 동생 3인을 반란군에게 파견하여 돕기도 하였다.
이몽학은 짧은 기간에 6개 군현을 점령하자 용기백배하여 "곧장 서울로 향한다"고 큰소리쳤다. 그래서 부근에서 제일 큰 고을인 홍주목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원래 이몽학의 모사였던 한현은 서얼 출신으로서 영악스럽고 꾀가 많았다. 그는 이몽학에게 "승승장구하는 바람을 타고 곧장 서울로 침공하는 것이 상책이요. 주위의 성곽 없는 약한 고을을 공격하는 것이 중책이요, 견고한 홍주를 진격하는 것이 하책이라"고 건의한 적이 있었다. 당시 한현은 초상을 당하여 홍주로 가고 없었는데, 이몽학은 그의 계책을 따르지 않고 곧장 홍주를 공격하다가 대패하게 되었다. 홍주성을 지키던 목사 홍가신은 일찍부터 명망이 높았으며, 행실이 청렴결백한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 있었다. 그는 홍주 목사에 제수되자 정성을 다해 방어전략을 수립하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래서 왜적이 홍주성에 쳐들어오자 단번에 무찔러 흩어지게 함으로써 충청도 지역을 안전하게 지켜낸 적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반란군의 침입을 당한 홍주 목사 홍가신은 민병을 모으는 한편, 그곳에 사는 무장 임득의, 박명현과 전 병사 신경행 등을 불러 성을 지킬 대비책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우선 성 밖에 연이어 있는 민간 초가집들을 불화살을 쏘아 모두 태워버렸다. 그대로 놓아두면 적들이 비를 피하고 밥을 해먹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때 홍주목 인근의 남포 현감 박도선은 변란 소문을 듣고 충청수사 최호에게 급히 알려 수군을 동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수사 최호는 수군은 육지에서 싸우는 병사가 아니라고 난색을 표했다. 박동선은 큰 소리로 "지금이 정말 어느 때인데 수군과 육군의 다른 점을 따지는가"고 윽박지른 끝에, 드디어 수영에 있는 군병을 모두 동원하여 홍주목을 후원하였다. 또 보령 현감 황응성도 군사를 소집하여 함께 홍주성에 합세하였다.
홍주성은 이들 원병을 얻자 크게 사기가 오르게 되었다. 그들은 밤이 되자 성가퀴에 횃불을 벌려 세워 성 안팎을 환히 밝히고 군사력을 과시하였다. 반군들은 관군의 증원군이 속속 도착하여 기세를 올리자, 성을 함락시킬 수 없음을 알고 어둠을 타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이몽학은 "한현이 오게 되면 목사의 머리를 베어서 깃대에 매달아놓겠다"고 큰소리치면서도, 이튿날에는 군대를 이끌고 덕산 길로 후퇴하였다. 그러면서 "장차 김덕령, 홍계남의 군대와 함께 합류하여 곧장 서울로 쳐들어가겠다"고 떠벌였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비로소 그의 말을 불신하기 시작하였고, 도중에서 도망치는 자가 속출하였다. 이 틈을 노려 박명현, 최호 등이 바짝 반군을 추격하여 압박을 가하였다. 또 전주 판관의 부하였던 윤성이 적진에 돌진하여 "적장의 목을 베어 오는 자는 화를 면하고 상을 받을 것이다"고 선무공작을 폈다. 연속적인 패배로 반란군은 더이상 이몽학의 말을 믿지 않고, 각자 자기들의 살 길만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중 김경창, 임억명, 태근 등 3인이 배신하여 이몽학의 막사로 난입해 누워 있던 그의 목과 사지를 베어 관군에게 헌납하였다. 그러자 반란군은 일시에 흩어졌다. 머리와 수족이 잘린 이몽학의 시체는 서울로 압송되어, 종로 철물전 앞에 3일 동안 효수된 후 사방으로 보내 전시되었다. 한현은 반군의 실패 기미를 미리 알고 몰래 면천군으로 도망쳤다가 면천 군수 이원에게 잡혀서 옥에 갇혔다. 그는 결국 능지처사당하였는데, 심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끌어넣었다. 당시 쟁쟁한 의병장이었던 김덕령, 곽재우, 고언백, 홍계남 등을 모두 끌고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조사 결과 대부분 무고였기 때문에 불문에 부쳤는데, 김덕령만이 잡혀가 심한 고문 끝에 죽었다.
한현의 아들 한의연은 역시 당고개에서 교수형당했으며, 이몽학의 삼촌인 이익, 김양호의 삼촌인 김환생, 한현의 조카 한호연 등은 모두 삼수와 갑산 지역으로 귀양갔다. 이몽학이 살던 집은 파가저택되었고, 그가 살던 홍산현은 혁파되고 말았다. 이 때 능지처사당한 사람이 33명이었으며, 서울로 송치된 자는 1백여 명이었다. 처형된 자들의 가족은 모두 법에 따라 연좌시키고, 가산을 몰수당하였다. 반란군을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던 수령들도 탄핵을 다하였다. 부여 현감 허수연은 역적들이 지경을 범하지도 않았는데도, 제 스스로 먼저 겁을 내어 그의 하인들이 반군들에게 무기를 실어보내는 데도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반군들이 쳐들어와 문서를 펴놓고 읽을 적에도 그대로 듣고 있다가 마치 애걸하는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처벌을 받았다. 임천 군수였던 박진국과 홍산 현감이었던 윤영현 등은 뚜렷한 처벌 조항이 없었지만, 수령으로서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반군에게 협조한 죄목으로 치죄하게 되었다. 홍산의 역모에 관련되어 체포된 반란군의 수는 너무나 많아 일일이 서울로 잡아오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조정에서는 도원수 권율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그가 현지에 머무르면서 반군의 가담 정도에 따라 처벌하도록 하였다.
난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선조는 비변사의 건의대로 민심을 추스리기 위하여 승지 유희서를 보내 반군의 협박에 의해 협력한 사람은 죄를 다스리지 않겠다는 뜻을 선포하여 나머지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데 힘썼다. 민심을 위무하기 위하여 반란 지역을 다녀온 유희서가 보고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그가 부여와 임천 등 고을을 순회하며 백성들을 모아 놓고 조정의 선의를 전달하며 염려하지 말고 각기 생업에 전념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모두들 "역적의 변이 난 뒤부터 감사, 병사, 수사의 군관들이 역접을 잡는다는 핑계로 마을에 돌입하여 남자들을 무조건 결박해 가므로 모두 두려워서 산골짜기로 숨게 되었다. 집에 있는 재물은 역적의 장물이라고 닥치는 대로 모두 거두어가므로 동리가 쓸쓸해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반란을 겪은 고을이 얼마나 황폐하게 되는지 알 수 있다. 백성들은 또한 관원들이 말을 징발하는 폐단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그 동안 죄인의 송치나 선전관 등의 연락을 위하여 도로 연변의 마을들은 민폐가 많았다. 그들은 적당들이 거의 모두 잡혔으므로 도시와 선전관을 요란하게 자주 내려보내지 않는다면 좋겠다고 하소연하였다.
대사령을 내리고 공신을 봉하다.
난을 진압한 후 선조는 대사령을 내려 민심을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답답하게도 끔찍한 왜란을 당하여 큰 원수를 갚지 못하고 큰 치욕을 씻지 못하였다. 비록 너희들 신민의 위에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슬프고 답답한 심회가 마치 곤궁한 사람이 의지할 데 없는 것과 같았다. 이번 역적들의 변란은 이 어려운 때에 일어나니, 그 까닭은 진실로 내가 나라를 잘못 다스린 탓이다. 마음이 아프고 얼굴이 부끄러워 진실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너희들 신민들은 골수와 고혈이 이미 모두 빠져버렸는데 세금은 더욱 높아갔고, 근력은 이미 지쳤는데도 징역은 더욱 급해갔다. 충청도와 전라도는 형편이 조금 낫다고 하나, 부역의 고통이 더욱 심하였고, 형벌을 사용함이 지나치고 혹독하였다. 백성들이 역적들의 간사한 말에 쉽게 빠져든 것이 어찌 그들의 본성이겠는가. 종범은 너그럽게 다스린다는 방침에 특별히 진념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선처하지 못하여 옥석구분의 화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거듭 백성들에게 죄를 얻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슬프다. 앞으로는 일 하나 행동 하나에도 백성을 편하게 하는 방향으로 힘쓸 것이다. 백성에게 근심이나 해를 끼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부역이 가볍고 조세가 줄어들어 정치는 안정되고 백성은 편안해져서 융성한 정치로 함께 나아가게 하겠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공신들을 대대적으로 봉하였는데, 이몽학의 난의 토벌자도 모두 공신으로 봉하였다.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 왕을 호위한 관원들은 호성공신으로 봉하였고, 왜적을 토벌한 여러 장군들과 군량을 주청하러 간 사신들은 선무공신으로 삼았고, 이몽학의 난을 토벌한 관원들은 청난공신으로 봉하였다. 이들을 임란 3공신이라고 부른다. 공신은 모두 3등급으로 나누고 차등 있게 공신의 봉호를 내렸다.
이몽학의 난을 토벌한 관원들도 호성공신이나 선무공신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중에도 청난공신은 1등에 홍가신, 2등에 박명현, 최호, 3등에 신경행, 임득의 등 모두 5인이었다. 이몽학의 난에 두목급을 체포하여 전공을 세운 사람들도 후한 상을 받았다. 그중에서 홍산 복병장 이수담은 능운을 잡았고, 홍주의 생원 이익빈은 팽종을 잡았다. 전 군수 이형남과 군공정 박모르금 및 청용관 김효남 등은 모천지를 잡았고, 전 판관 이용침은 정붕을 잡았다. 정산의 교생 김경서는 장후재를 잡았고, 전 현감 한덕수는 이구를 잡았고, 김경복은 강봉을 잡았다.
글 이상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