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란의 시대 - 고성훈 외
1. 조선초기 최대의 반란 - 이시애의 난
이시애의 난이란?
1467년(세조13년) 5월 10일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1467)의 난은 조선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큰 규모의 반란이었다. 이 난에는 이시애를 중심으로 반란군 약 2만여 명, 조정의 토벌군 약 5만여 명이 동원되었고, 약 4개월 동안 한반도의 북부 일대를 진동시켰다. 이 난은 유향소를 중심으로 결집되었던 토호층들이 이시애의 선동에 따라 일으킨 것이며, 여기에 농민들이 호응하여 큰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반란군은 10여 일 이내에 함경도의 남부 7개 읍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지방관들을 살해하고, 홍원 이북 2만 명의 군민들을 결집하여 대규모의 반란 주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먼저 관군 약 3만여 명을 파견하여 일시에 진압코자 하였다. 그러나 반군의 위세와 교묘한 작전으로 고전을 거듭하다가 4개월 여를 지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몇 차례의 대전투를 치른 후인 8월 12일 이시애 일당을 처형함으로써 간신히 난을 진압할 수 있었다.
이 반란의 핵심 세력은 이시애와 이명효 등 함경도 각 지방 토호들이었고, 그들의 지배 아래 있던 예속민들과 일반 농민들이 호응하였다. 그러나 반란세력이 호응을 기대하였던 여진족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함경도 일대에는 토착 세력들의 향촌 지배력이 강하였고, 여진족 마을들과 인접하여 중앙중부의 통치권 행사에 많은 장애가 있었다. 그러나 이 난의 진압을 계기로 유력 토착세력이 거의 소멸되어 이후 조선왕조의 이 지방에 대한 통치에 안정을 가져오게 되었다.
중앙의 통제와 높아진 토호들의 불만
이시애 난을 바라보는 일부의 시각에 의하면, 이는 함경도 지방 농민들이 봉건지배와 가혹한 수취체제에 대항하여 일으킨 봉기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흔히 함경도 농민들의 과도한 조세 부담과 지배층의 착취론에 근거하고 있다. 즉 1465-1466년에 시행된 양전 사업과 호패법으로 전세가 가중되고 군역이 확대되면서 양민들의 부담이 증가하였다는 것이다. 또 중앙에 바치는 공납의 부담이 커지면서 농민들에 대한 착취가 심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여기에다 신세포와 여진족을 위한 뒤치다꺼리의 부담 등, 다른 지방에 없는 부담까지도 더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부담과 수탈은 세조의 권력 찬탈과정에서 자행된 비리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세조의 반대파 숙청과정에서 일어난 살인과 적몰을 속죄하기 위해 사찰을 창건하고 도첩을 실시하며 사원에 수세지를 할양하는 등, 불교를 지원하는 데 따르는 부담을 양민에게 전가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난의 발생이나 전개 과정을 보면, 어느 곳에도 농민들의 봉기나 자발적인 참여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당시 함경도 농민들의 부담이란 것은 다른 지역의 농민들에 비하여 특별히 과중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주된 재정적 기반은 항상 전라도와 경상도 그리고 충청도, 즉 삼남지방에 있었으며, 그만큼 수탈도 이 지역에서 더 많이 행해졌다. 신세포와 같은 것이 강원도에도 있었던 것이며, 이런 종류의 잡부금은 다른 지역에서도 언제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함경도 농민들에 대한 조정의 수취나 부담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특별히 과중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이것이 그들을 자발적으로 봉기하게 한 요인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시애 난은 어디까지나 이 지역의 토호들이 결탁하여 일으킨 것이며, 그 원인은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이 지방 토호들의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과 반감에 있었다. 함경도 지방은 고려시대 이래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잘 미치지 않았다. 이 대문에 이 지방의 토호들은 이성계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지방민들을 그들의 사적 예속민으로 지배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 중앙의 통제가 적은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국하는 과정에서 여진족과 함께 중요한 군사력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왕조가 개창된 이후에는 퉁두란 등 극소수의 인물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공로에 상응하는 정치, 사회적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권이 점차 안정되어가면서 그들에 대한 통제와 압박은 심해지게 되었다. 특히 세조 때 전국적인 왕권의 확장과 중앙집권 정책이 시행되면서 이 지방의 토호들이 느끼는 위기의식은 커지게 되었다. 종전까지는 함경도 각 고을의 수령들을 이 지방의 명사들 중에서 선임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조가 집권한 이후로, 특히 1453년 함길도도절제사 이징옥의 난이 일어난 이후에는 지방관들을 점차 중앙에서 파견하게 되었다. 이시애 자신도 회령절제사(부사)로 있다가 해임된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토호들의 불만은 커지게 되었고, 남도 출신 지방관들과 은연중 반목이 일어나게 되었다. 정부는 초기에 일경수세법을 시행하고 군역의 배정을 적게 하여 가능한 한 함경도인들을 자극하지 않고 회유하려는 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부터는 점차 중앙집권적 통치 의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455년에는 삼남지방에 대한 전면적인 양전사업이 시행되고, 1465-1466년에는 함경도에도 양전사업과 호패법이 시행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 지역에 군역이 확장되고, 생산이 감소하면서 농민들이 견디지 못하고 유랑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함경도의 농민들은 사실상 그 대부분이 토호들의 예속민들이었으므로, 토호들의 사회 경제적 불안과 불만은 커지게 되었다. 토호들의 예속민들은 종전에는 군역과 부역에서 제외되었으나, 호패법의 실시로 인해 각종 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는 토호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토호들에게 국가부담을 급격하게 늘이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예속민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케 하는 것이었다. 호패법의 시행에 의한 군액의 증가는 농민들의 부담을 증대시키기도 하였지만, 이들에 대한 토호들의 지배력을 상실케 함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이 무렵 오랫동안 이성계 일가가 함경도에 가지고 있던 방대한 예속민들은 본궁(이성계의 생가를 개조한 사당) 노비로 개편되었고, 후에는 내수사에 속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들과 군 지휘관들은 토호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많아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 때문에 토호들의 아지트였던 유향소를 중심으로 중앙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이 형성되고 반정부 음모가 진행되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여진인들의 동조를 기대하기도 하였다.
함경도 지방에는 조선초기부터 중앙정부에 대해 일정한 저항 내지 군사적 봉기의 전통이 있었다. 고려말 함흥의 토호였던 이성계가 발호하여 고려를 타도하고 새 왕조를 개창한 한 것은 군사적 성공의 가장 모범적인 선례가 된 것이었다. 그것을 위시하여 1402(태종2)에는 안변부사 조사의 등의 난의 일으켜 상당히 위세를 올린 적이 있었으며, 1453년에는 함길도도절제사 이징옥이 난을 일으켰다가 패한 적도 있었다. 이징옥의 난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저항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난은 함경도인들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군사적 행동에 대한 선례가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함경도를 휩쓸다
이시애는 길주의 토착 지배층으로서 검교문하부사의 직함을 가졌던 이원경의 손자이며, 함길도 첨절제사를 지낸 인화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대대로 길주에서 살아온 토호로서, 그 일족이 함경도 일대에 널리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도 처음에는 북방민 회유 정책에 따라 중용되었다. 1451년(문종1) 호군이 되었고, 1458년에는 경흥진 병마절제사를 거쳐 첨지중부부사 겸 판회령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세조의 즉위 이후 함경도 토호들에 대한 특혜의 축소와 통제책으로 불안과 불만에 차 있었다. 그는 1467년 모친상을 당하여 칩거하던 중 아우 시합과 매부 이명효 등과 함께 반란을 꾀하였다. 그들은 5월 10일 거사하기 이전에 함경도 전역의 유향소를 통하여 동조세력을 조직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공작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각 고을 토호들에게 통지하여 지방관들과 남부지방에서 파견되거나 여행 온 사람들을 처치하고 봉기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들이 유포한 유언비어는 대체로 "경성 후라도에 충청도 병선이 나타나 여진과 함께 하여 함경도를 공격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평안도 황해도의 병사를 보내어 설한령과 철령을 넘어 쳐들어와 함경도 사람을 다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전 공작을 한 다음, 1467년 5월 10일 이시애 등은 길주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함경도절도사 강효문과 길주 목사 설정신, 판관, 북평사 그리고 부령부사 김익수 등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함경도 전역의 백성들에게 이시애가 세조의 명을 받들어, 중앙관료들과 결탁한 반신들을 척결하였고, 자신이 왕명으로 신임 함경도절도사에 임명되었다고 거짓 선전하고 궐기를 요청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정에 사람을 보내어 본도 절도사 강효문이 한명회, 권남, 신숙주 등과 결탁하여 진장들과 함께 반역을 일으키자 이시애가 그들을 처형한 의거라고 보고하였다. 또한 별도로 사람들을 시켜 함경도 백성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와언이 분분하므로, 본도인으로 수령을 삼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유향소의 토호들과 농민들이 대거 호응하여 성세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10여 일 이내에 남부 7개 읍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지방관들을 제거하고 홍원 이북 2만 명의 군민들이 결집되었다. 그들은 서울이나 삼남 지방에서 온 외지인들을 다수 살해하기도 하였다.
함경도 지방의 농민들은 일상적으로 무기를 사용해온 사람들이었으므로, 반군은 단번에 무시할 수 없는 전투력을 갖춘 군사 집단이 되었다. 난의 초기에는 조정이나 함경도인들이나 이 난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반란의 주창자가 강효문인지 이시애인지 혼동하기도 하였다. 함경도민들도 대부분 난이 중반에 이르기까지는 이시애가 세조의 특명을 받은 관군 지휘관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강효문과 내통한 것인지, 이시애와 내통한 것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였으나 그들을 엄중하게 감금하였다. 이러한 교묘한 기만작전은 이시애 일당에게 대규모 반군의 동원을 가능케 하였고, 초동 진압의 기회를 놓치게 하였다. 결국 5월 17일에야 조정에서는 토벌군을 편성하였다. 왕족인 18세의 구성군 이준을 4도병마도통사에, 호조판서 조석문을 부총사에, 허종을 함경도절도사에, 강순, 어유소, 남이 등을 토벌대장에 임명하여 18일에 2만여 명의 관군을 출정시켰다. 그와 동시에 조정에서는 단천 사람 최윤손을 보내어 반군들을 달래고자 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조정의 기밀을 반군에게 상세히 전달하여 낭패를 빚기도 하였다. 반군은 단천 북청 홍원으로 남하하면서 지방관들을 죽이고 세력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함흥을 점령하고 관찰사 신면을 죽이는 한편, 체찰사 윤자운을 사로잡으면서 기세를 올렸다. 관군은 철원에서 10여 일간 지체하면서 철령을 넘지 못하고 관망하고 있었다. 이에 세조는 강순에게 평안도 병사 3천 명을 더 주어 영흥으로, 병조판서 박중선에게는 황해도 군사 500명을 주어 문천으로 진격하게 하고, 어유소에게는 서울 군사 1천 명을 추가 지원하였다. 그들은 5월 15일 회양으로 진출하여 해산 권유문을 반포하고, 반군 지휘자들의 체포에 현상금을 걸였다. 6월 1일에 윤자운이 도망해오자 구성군은 철령을 넘어 안변에 들어가고, 관군은 함흥에서 관망하며 차유령을 방어하고 있었다. 또 허종은 영흥으로 들어가 포위망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동안 이시애군은 간간이 출몰하여 관군의 동태를 시험하고 있었다. 한때는 이시합의 군대 2400명이 홍원에서 관군과 정면 충돌하였다가 축출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시합이 종성 사람 차운혁에게 사로잡히기도 하였으나 계교를 써서 탈주하였다. 6월 중순에 관군이 함흥에 진입하게 되자, 세조는 비로소 이시애와 난의 정체를 명확히 파악하고 신숙주 등을 석방하였다. 또한 삼남에서 군사를 징발해 추가로 파병하고 친정을 호언하면서 독전하였다. 이시애 일당은 난의 중도에서 조정과 타협을 기대하였으나, 오히려 강경하게 치닫는 진압책에 크게 당황하게 되었다. 그들은 결국 함흥에서 물러나 북청에 주둔하면서 시일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격전과 패주
6월 19일에 이시합과 이명효 등은 2만 명을 거느리고 북청읍으로 진출하였다가 여울고개로 퇴각하고, 이시애는 북청 두어소에 주둔하면서 관군을 유인하였다. 이에 관군은 6월 22일 북청으로 진출하여 목책과 녹각(사슴뿔 모양의 목제 장애물)을 설치하고, 참호를 파며 대비하였다. 6월 24일 밤에 이시애군은 3중으로 포위공격을 단행하여 10여 차례나 공격하였으나, 관군의 용이한 작전으로 실패하고 휴전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관군과 반군은 동시에 북청에서 퇴각하였다. 이후 이시애는 이명효를 시켜 홍원 서쪽 신익평에 주둔하여 관군의 진출을 막고, 이시합은 미어령을 넘어 2진을 형성하는 한편, 자신은 회령 이북인들을 이끌고 대문령을 넘어 열녀문평에 주둔하면서 관군의 자멸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군은 북청에서 후퇴하여 1, 2, 3진으로 나누어 장기전에 대비하게 되었다. 약 1개월간의 교착상태에서 이명효군은 북청에 재진입하였고, 이시애는 이성 방면에 주둔하면서, 마운령 단천 마천령에 부루를 쌓고 방어작전을 폈다. 7월 22일이 되자 관군이 먼저 석장령 방어선에 진입하고, 1진은 함관령을 넘어 홍원읍에 진출하였다. 그들은 25일 한밤중에 산개령과 종개령의 반군을 치고 넘어 북청으로 재진입하였다. 이에 이명효의 반군은 북청에서 퇴각하여 동쪽 만령으로 진을 이동하게 되었다. 만령은 15리의 장진으로서 남으로 동해, 북으로 태산을 등진 천험의 요새였다. 이곳이 마지막 결전장이 되었다. 이때 반군의 수는 많이 줄어 5천여 명이 이곳에서 웅거하고 있었다. 8월 4일 관군은 이원 거산역에 진출하여 목책을 치고 반군과 대치하였다. 며칠 후 그들은 만령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역로길 중봉, 큰길 종봉, 바닷가 동쪽 고개, 북산 아래로 5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이시애는 중봉에 2천 명을 3중으로 배치하여 결전을 지휘하였다. 관군은 험난한 지형과 반군의 완강한 저항에 봉착하여 고전하였으나, 어유소군이 해안에 면한 동봉으로 몰래 진격하여 이시애군의 좌측 허를 찔러 방어선을 통과하였다. 이로써 반군은 대량의 희상자를 내고 동으로 퇴각하였다.
관군은 8월 1일 이성으로 추격하였고, 이시애 등은 마운령을 넘어 단천 쪽으로 달아났다. 관군은 계속 추격하여, 8월 8일 마운령을 넘어 영제원에 포진하면서, 반군과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이에 이시애는 몰래 단천으로 도망하였다가, 여진 지역으로 가기 위해 길주를 거쳐 경성으로 달아났다. 이때까지도 거의 부하들 중에는 그를 조정에서 임명한 절도사로 착각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성의 건가퇴에서 이시애 등은 관군의 계략에 빠져 체포되었다. 즉 허종 휘하에서 종군하던 경성인 허유례가 거짓 항복하는 체하고 적진에 들어가, 이시애의 부하인 이주, 황생 등을 설득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들이 이시애와 이시합 등을 납치하여 관군에 넘겨주었다. 그들은 8월 12일 처형되고, 반군은 완전히 해산하였다. 달수로 4개월만에 겨우 진압된 것이다. 난의 진압에 참가하였던 구성군 등 41명은 전공에 따라 포상을 받고 공신에 책봉되었다. 이를 적개공신이라고 한다.
이 반란에서 이시애군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병력의 열세를 들 수 있다. 한 지역의 반군은 전국적 규모의 관군에 끝까지 대항하기 어려웠다. 반군은 다른 사례에서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짧은 기간에 대량 모집되었고, 그들은 또한 무기의 사용에 숙달된 전사들이었으나, 많았을 때가 2만여 명 가량이었다. 이에 비하여 관군은 출정 때부터 2만여 명의 규모였고, 점차 증강되어 마지막에는 거의 5만여 명에 육박하였다. 또한 10만여 명의 예비 병력이 강원도에서 대기하고 있을 정도로 우세하였던 것이다. 두 번째의 실패 원인은, 무엇보다도 반란의 명분이 정대하고 뚜렷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교사회에서는 도덕적 명분이나 대의가 표방되지 않으면 큰일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이시애 일당이 내세운 것은 남부지방 관료들의 책동에 의한 함경도인들의 말살과 편파적 착취라는 지역감정의 고취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왕에 충성한다는 기묘한 이중 구호를 가지고 지방민들을 기만하였다. 반란의 초기부터 교묘하게 적용하였던 선동과 현란한 기만술은 초동 단계에서는 성공하였지만, 기초적인 명분과 성실성을 상실함으로서 실패를 초래하였다. 셋째, 반군 지도부의 주축이 되었던 토호층과 농민층 군사들 사이에 공통적인 이념이나 공감대가 적었던 것도 하나의 실패 원인이 되었다. 토호들의 봉기는 점차 상실되어가던 그들의 기득권 쟁취를 위한 것이었고, 농민들이 이에 호응한 것은 과중한 수탈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농민 자신들이 토호들에게 예속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의 지휘에 따라 동원되기는 하였으나, 궁극적인 목표나 이해관계는 상반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또 조정의 착취나 농민들의 부담도 그들의 불만을 폭발시킬 만큼 극대화되지는 않았다. 사실 농민층으로서는 당시까지도 봉기를 일으킬 만큼 모순이 극대화되어 있지는 않았고, 이 때문에 확고한 이념이나 구호가 성숙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토호층과 농민층의 유대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넷째, 반군 지휘자들의 무능에 의한 작전 실패나 도덕적 해이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다양한 전술을 개발하지 못하였고, 중요한 작전에서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시애 등은 조정과 향민들에 대한 이중적 태도와 기만적인 선동을 일삼는 한편, 애첩인 기생을 대동하고 다니는 등 도덕적 해이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반란의 궁극적인 실패 원인이 된 것이다.
함경도에서 혹심한 반란을 겪은 세조는 이 지역에 대한 통제책을 강화하는 한편 무마책도 아울러 시행하였다. 조정에서는 잔류 병력을 각 고을에 주둔시켜 이시애 잔당을 수색하여 처벌하는 한편, 함경도의 무기를 평안도와 서울로 옮겨 후환에 대비하였다. 세조는 중앙집권 정책을 가속화하여 북도의 유향소를 폐지하고, 함길도를 남도와 북도로 나누어 관찰사와 병사 1인씩을 증파하여 중앙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길주는 길성현으로 강등되었다. 조정에서는 함경도인들을 무마하기 위하여 존무사를 파견하여 민정을 시찰하고, 전세와 부역, 진상, 공물, 신세포 등을 면제하였다. 이러한 조정의 통제책과 무마책은 대체로 성공하여 이후 이 지방에서는 더 이상 대규모의 소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글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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