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란의 시대 - 고성훈 외
조선시대 민중운동, 어떻게 일어났나?
사회변동과 민중운동
우리 역사에서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이어 여전히 중세사회로 불리거나 간혹 근세사회로 일컫기도 한다. '중세사회'라는 고려시대의 사회구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던 조선사회는 체제의 여러 분야에서 모순에 빠졌고, 이는 급기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전란을 불러왔다. 그 이후 조선후기의 사회는 서서히 새로운 사회구조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사회, 특히 조선후기의 사회는 중세사회로서의 제반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는 중세의 봉건적인 특성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구조인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조선사회, 특히 조선후기 사회의 본질은 사회변동의 촉진으로 말미암은 중세사회 해체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회경제적으로 볼 때 농업생산력의 향상은 조선전기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조선후기에 들어와 이모작과 이앙법의 실시 등으로 농업생산력은 빠르게 진전되어갔다. 이에 따라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였고 신분제의 변화도 촉진되었다. 정치적으로는 권력집단 내부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당쟁 또는 붕당정치의 양상이 나타났다. 영조, 정조 때에는 탕평정치가 행해졌고 일시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고는 하나, 정파간의 대립과 갈등은 오히려 강화되어 세도정치로 이어졌다.
사상 내지는 학문적으로 조선사회는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지배이념으로 채택한 사회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성리학의 지배이념은 정형화, 고착화되어갔다. 이에 따라 사회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을 새로운 사상적 조류가 요구되었다. '실학'은 그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대표적 사상체계라 할 것이다. 이밖에도 불교의 미륵신앙이나 (정감록) 사상과 같은 전래의 종교, 사상이 이른바 민중사상으로서 민중운동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이러한 체제변동 속에서 민중운동은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그것은 중세의 봉건체제를 해체시키는 방향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민중운동은 크게 보면 중세의 봉건적 사회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민중들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민중운동은 흔히 역사의 여러 분야, 이를테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 등의 변화과정과 그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진정한 민중운동의 의미는 사회의 각 분야가 발전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조선시대에 일어났던 민중운동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민중운동의 유형 - 민란과 변란의 틀
우리는 지금까지 조선시대 내지는 한국근대의 민중운동에 대하여 1811년의 홍경래란, 1862의 임술민란, 그리고 1894의 동학농민전쟁이라는 이른바 3대 민중운동의 틀 속에서 이해하여 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사실 홍경래란과 임술민란의 반봉건성, 동학농민전쟁의 반봉건과 반외세의 성격을 고려할 때, 이들 3대 민중운동은 각각의 사건마다 우리 역사에서 하나의 획을 그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서 중세 봉건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근대국가로 옮겨가려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민중들의 동력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이들 3대 민중운동에 대해 보다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 3대 민중운동이 조선시대 민중운동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사실 우리는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하여 수많은 크고 작은 민중운동이 일어났던 사실을 알고 있다. 이제 3대 민중운동은 물론 그밖의 많은 민중운동들에 대해서도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특히 3대 민중운동이 일어나기 이전의 민중운동들에 대해서는 그 윤곽조차 드러나지 않은 경우도 없지 않은 실정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발생한 민중운동들을 그 기능이나 성격별로 나누어 정리하고 이를 총체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매우 뜻있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민중운동이란 민중이 주체가 되어 사회 전반의 인적, 제도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실천적 행동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시대의 민중운동은 그 성격과 기능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제 조선시대에 일어났던 수많은 민중운동을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여 정리해보기로 한다. 조선시대의 민중운동은 여러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크게는 민란과 변란이라는 틀로 나누어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민란 - 삶을 위한 경제투쟁으로서의 농민항쟁
그러면 먼저 민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민란은 흔히 농민들의 반봉건 투쟁이나 하층민들의 폭력투쟁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근래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민란=농민항쟁'이라는 등식으로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것은 '민란'이라는 용어가 갖는 시대적 한계, 즉 봉건체제의 산물이라는 점이 충분히 고려되었을 것이다. 농민들의 저항은 여러 형태로 일어났다. 소극적으로는 등소와 호소 같은, 일면 합법적인 방법에서부터, 산에 올라가 지배층이나 수령의 비리를 큰 소리로 고발하기도 하고, 밤에 횃불을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일부 농민들이 무리를 지어 관청에 몰려가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내걸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기물을 부수는 등의 행패를 부리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적극적이고 진정한 의미의 민란, 즉 농민항쟁의 정수는 '농민봉기'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 대규모의 농민봉기를 수반한 진정한 의미의 농민항쟁이 폭발한 것은 19세기 중엽이 들어서의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민란의 정형을 1862년에 경상도 진주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농민항쟁의 예에서 찾을 수 있겠다. 이때의 농민항쟁은 전국에 걸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진행과정상 거의 비슷한 경로를 밟고 있다.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을 견디다 못한 일부의 농민들은 뜻을 모아 현실문제에 대처하기로 한다. 이들은 먼저 집회 날짜와 장소를 정한 다음 고을의 모든 농민들에게 연락을 취한다. 집회에 참석한 농민들은 관아에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기로 하고, 그 임무를 수행할 우두머리를 포함한 대표단을 뽑는다. 대표단은 자신들의 절실한 요구조건을 관아에 전달한다. 이때 관아에서는 대체적으로 농민 대표단의 요구를 받아들일 뜻을 내비친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고, 다시금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한다. 이제 농민들에게는 봉기 이외의 방법은 없다. 농민들은 곧바로 집집마다 연락을 취하고 농기구나 몽둥이 등으로 무장하여 관아로 쳐들어간다.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참여를 거부하거나 비협조적인 집에는 벌금을 물리는 등의 강제적 수단이 가해지기도 한다. 또한 관아로 진격할 때는 평소 특별하게 농민들을 수탈하는 아전들이나 지주, 고리대금업자들의 집에 돌을 던지거나 심하면 불을 지르기도 한다. 관아를 점령한 농민들은 평소 자신들을 괴롭히던 아전들을 구타하거나 살해하는 경우까지 있으며, 수령에게는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경우는 별로 없으나, 심한 말로 모욕을 주거나 때로는 가마 따위에 태워 고을 경계 밖으로 내치기도 한다. 이처럼 관아를 점령한 농민들은 군사력과 행정력을 장악한 상태에서 충분한 시위 끝에 자신들의 요구사항들을 관철시키려 하며, 관에서는 그 요구사항을 받아들이는 내용의 협정문서인 완문을 작성하여 발표한다.
이상은 민란유형의 항쟁, 즉 농민항쟁에 보이는 일반적 진행과정이다. 이러한 틀은 비록 1862년의 농민항쟁에서뿐만 아니라, 이후 고종 때의 숱한 민란들, 이를테면 동학농민전쟁 무렵에 일어났던 여러 민란에서도 다르지 않다. 1898년과 1901년에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농민항쟁은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방성칠의 난'으로도 불리는 '1898년 제주도농민항쟁'은 동학농민전쟁 이후 육지로부터 방성칠 등 남학당이 제주도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가혹하고도 부당한 조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도에 통문을 돌려 봉기를 촉구하였고, 이에 제주도민들은 곧바로 봉기하여 제주관아를 점령하였다. 1862년 농민항쟁 때 제주관아를 점령한 이래 처음이며, 이는 제주도민들의 반봉건 항쟁의 상징이었다. 이로부터 3년 후에 이재수가 이끄는 농민군이 다시 제주관아를 점령하였다. '이재수의 난'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농민항쟁은 제주도가 갖고 있던 경제적 모순과 갈등이 여전한 가운데 외래종교인 천주교가 유입되어 제주도민들과 갈등이 고조되면서 일어났다. 전도적으로 봉기한 농민들은 반봉건과 반외세의 기치 아래 제주관아를 점령하였다. 이에 우리 정부에서는 외세를 의식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여 봉기군을 해산시켰으며, 프랑스에서는 군함까지 파견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주도민들의 봉기는 막을 내렸으나, 반봉건, 반외세를 외쳤던 제주도민들의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민란에 대한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민란은 몇 가지 점에서 뚜렷한 특성을 가진다. 먼저 민란의 주체는 농민이다. 일반적으로 민란은 지주와 전호의 대립과 갈등을 기본동력으로 삼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민란을 간략히 도식화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참여층이 다양하다는 이야기이다. 몰락 양반이 초기의 민란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제쳐두고라도, 부농, 자작농, 소작농들이 참여하였고, 특히 1862년의 진주민란에서는 이른바 초군(나무꾼)이 주력을 이루었다. 이것은 농민들도 경제적, 신분적으로 여러 계층으로 갈라져 있었지만, 관리들의 수탈로 말미암아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농민이라면 누구든지 민란에 참여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민란은 기본적으로 경제투쟁이다. 우리는 흔히 민란을 전정, 군정, 환곡의 삼정 문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세금을 둘러싼 관과 민의 갈등이 그만큼 심각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나아가 민란의 발생은 경제적 요소들이 정치나 다른 어떠한 요인들보다 크게 작용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민란은 국가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부, 목, 군, 현 등 최소의 행정단위를 무대로 일어난다. 이때의 지방관은 사또, 원님 등으로 불리며, 한 고을의 행정과 사법, 때로는 군사권까지 장악한다. 물론 조세권도 가진다. 농민들에게는 가히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투쟁의 범주도 이 대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요컨대 지역간의 연대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는 것이다. 국가적인 저항이 아니라 지역 내에서의 저항인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민란이 지닌 한계이기도 하다. 저항의 강도는 관아를 점거할 때까지는 거세게 밀어붙이나, 관과의 협약과 동시에 해산하는 1회성 투쟁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울러 부호나 아전들은 구타하거나 심하면 살해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고을 수령에 대해서는 말로 모욕을 주거나 고을 경계 밖으로 내치는 경우는 있지만, 직접 신체상의 해를 입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는 농민들 사이에서도 수령은 왕명을 받았기 때문에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성리학적 사고방식이 은연중에 깔려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편 민란에 대한 정부의 조처는 근본적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임시방편적이었다. 정부에서는 민란이 발생하면 농민들을 무마하기 위해 선무사를,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안핵사를 파견하였다. 또한 농민들의 지탄을 받는 지방관을 교체하는 유화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민란이 격화되었을 경우에는 해당 지방의 수령들에게 선참 후계를 허락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조처가 토지문제나 조세문제 등 농민들이 제기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중세사회에서 민란, 즉 농민항쟁이 민중운동이 본령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민란도 당시에 일어난 민중운동을 대표하는 것임은 당연하다. 그것은 농민들의 높은 참여 열기, 경제적 수탈에 대한 생존을 위한 경제투쟁으로서의 성격이 반봉건을 지향하고 있다는 면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변란 -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투쟁
민란과 더불어 조선시대 민중항쟁을 대표하는 것은 변란이다. 변란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적인 사태 내지는 소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변란의 의미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그것은 변란이 민중운동을 뜻하는 용어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이제 변란이 민중운동으로서 지니고 있는 의미를 간단하게 서술하기로 한다. 민란이 농민의 경제투쟁으로서의 성격을 지녔다면, 변란은 민중의 정치투쟁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므로 변란은 흔히 체제저항적 성향을 지닌 인물들이 주도하고, 혈연이나 친분 등과 같은 개인적 이해관계에 기초하여 추진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상주의적 이념을 담고 있는 정감록 등 민중사상에 기초하여 중앙권력의 쟁취를 목표로 삼는다. 변란의 지닌 특징과 성격을 민란과 비교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민란의 주체가 농민인 데 반하여 변란의 주체는 이른바 유랑 지식인으로서, 향촌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 지역 저 지역을 떠도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정치적으로도 몰락한 자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아이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치는 훈장이나 묘자리를 잡아주는 지관 또는 환자들에게 의술을 베푸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다.
변란을 이끌어가는 주체들은 정감록 같은 민간사상 내지는 민중사상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정당화활 뿐만 아니라, 이러한 민중사상들 유포하여 민중들을 끌어들인다. 이러한 사실은 민란이 특정한 이념이나 사상적 배경을 전제로 하지 않았던 것과 크게 다른 점이라고 하겠다. 민란이 한 지역을 무대로 발생하였다면, 변란은 여러 지역을 넘나들며 때로는 전국을 무대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민란의 목표가 고을 수령을 대상으로 일정한 경제적 조건을 얻어내는 것이었다면, 변란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민란은 통문을 돌리며 공개적으로 봉기를 준비하고 추진하는 데 비해, 변란은 주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비선조직으로 움직인다. 아울러 민란이 단기간에 걸친 준비로 봉기에까지 이르는 데 비해, 변란은 보통 몇 년에 걸친 준비기간을 거치며 동조세력을 모으는 등, 보다 치밀하게 추진한다. 이를테면 정조 때 문인방과 이경래가 변란을 일으켰는데, 이들은 약 10년 전부터 변란을 생각하고 있었다. 고종 때 유명한 봉기꾼들인 최봉주와 장혁진이나 이필제 등도 십수 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끈질기게 변란을 기도했다. 이와 같은 변란은 크게 거사를 모의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무산된 '작변'과 실제 거사를 일으킨 '병란'으로 나누기도 한다.
거사모의 단계의 변란, 즉 작변은 조선시대에 일어난 변란의 보편적인 경우이다. 특히 18세기까지는 변란=거사모의 단계의 저항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정도로 변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숙종 때 미륵신앙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아 일어났던 거사모의가 대표적 사례이다. 이 사건은 경기도 양주를 중심으로 하여 강원도와 황해도 일대까지 무대로, 승려, 지관, 무녀 등이 주체가 되어 민간사상, 즉 '미륵불이 강림할 것'이라는 내용을 유포하는 방법으로 동조세력을 포섭하고 서울까지 잠입하여 궁궐을 점령하려 했던 경우이다. 앞에서 설정한 변란의 틀에 정확히 들어맞는 사례이다. 우리가 정치적 안정기였다고 평가하는 영조와 정조 때에도 거사모의 단계의 변란이 자주 일어났다. 더욱이 이 무렵에는 이후 변란을 사상적으로 합리화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정감록)과 같은 예언서들이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정조 때 이경래와 문인방이 정감록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 서울 공격을 기도했던 사건이 대표적이다. 더욱이 정조 때는 (한글판 정감록)까지 나돌았다. 그런데 이러한 거사모의 단계의 변란은 흔히 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의 유언비어라고 할 수 있는 요언이나, 체제를 비방하는 내용의 대자보인 괘서를 동반하기도 한다. 물론 요언이나 괘서 저항은 단독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이 경우, 즉 요언단계의 저항이나 괘서 단계의 저항까지를 변란의 범주에 포함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 봉기에 성공한 경우, 즉 병란에 대해 알아보자. 이때 병란은 단순히 봉기에 성공한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약하나마 새로운 사회의 구현에 대한 명분과 전망이 들어 있는 체제저항운동이라는 전제가 따라야 한다. 19세기 이전에 봉기에 성공한 경우, 즉 병란이 일어난 사례는 매우 드물다. 영조 때 일어났던 '무신란' 정도가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라고 할 것이다. 무신란은 정치집단 내부의 권력투쟁으로서의 성격이 매우 짙다. 그러나 여기에는 변산반도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녹림당이나 노비 세력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로 볼 때, 무신란의 민중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는 변란이 봉기에까지 성공한 경우가 종종 생기기 시작한다. 우선 널리 알려진 홍경래란도 변란으로서의 성격을 일부 갖고 있다. 사건을 주도한 홍경래나 우군칙이 몰락한 지식인의 대표적 직업인 지관으로 생업을 삼았던 점, 10여 년 가까이 거사를 준비해온 사실, 격문에 보이는 정씨 성인, 홍의도, 철기 10만 등 점감록을 연상시키는 표현들, 거사의 목표가 중앙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홍경래란이 변란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음은 명백하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봉기로까지 발전한 변란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광양란과 이필제란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광양란은 의술을 익히고, 지관으로서의 능력도 지니고 있던 민회행이 영남과 호남을 떠돌며 거사를 준비하다 1869년 3월에 광양관아를 습격한 사건이다. 광양란이 변란으로서의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 무렵에는 많은 변란이 일어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부분이 거사모의 단계에서 그치고 있던 상황에서 광양란은 봉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 주모자 민회행은 봉기하기 20년 전부터 변란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광양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도 장흥에서 변란을 기도한 바 있었다. 그는 모름지기 '직업적 봉기꾼'이었던 것이다. 이필제란은 19세기 변란의 진수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동학교도로 자처하는 이필제는 1869년부터 1871년까지 진천, 진주, 영해, 문경에서 잇다라 변란을 기도하였으며, 이 가운데 영해란은 봉기로까지 이어졌다. 더욱이 봉기가 이루어진 영해란의 추진과정에서 이필제는 교조신원운동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동학교도들의 협력을 받았으며, 참여를 거부하던 최시형을 설득과 회유, 협박 끝에 끌어들였다. 이 과정에서 이필제는 '직업적 봉기꾼'으로서의 진면목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필제를 19세기 중, 후반에 변란을 기도했던 많은 직업적 봉기꾼들 가운데서도 가장 전형적 인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민란과 변란의 결합
이밖에 민란과 변란적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세조 때 함경도에서 일어났던 이시애란이나, 임진왜란의 와중에 충청도에서 발생한 송유진, 이몽학의 난과 같은 경우는 앞에서 제시한 민란이나 변란의 틀로 가름하기에 적절치 못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들 반란이 중앙 정부를 상대로 한 민중의 정치, 경제투쟁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는 사실과, 정치지향적인 인물이 반란을 주도하고 여기에 농민들이 주력으로 참여했던 사실을 고려할 때, 이들 사건은 민란과 변란의 요소를 일부 지니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앞의 변란의 사례에서 언급한 홍경래란의 경우는 더욱 뚜렷하게 민란과 변란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 정부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정주성으로 퇴각하던 '반란군'에 농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후 수개월 동안의 전투를 벌였던 이른바 정주성 농성 과정에서 '반란군'의 주력이 농민들로 이루어졌으며, 그 성격을 가히 농민항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근대사 최고, 최대의 민중항쟁인 동학농민전쟁은 그 성격상 대규모 민란, 즉 농민항쟁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일부 변란으로서의 성격이 있음을 감안할 때, 동학농민전쟁은 그때까지 민중운동을 통하여 결집된 농민을 비롯한 민중들의 모든 역량을 한번에 쏟아부은 반제, 반봉건 민중, 민족 운동의 총화이다. 그 밖의 민중운동의 유형 이상에서 조선시대의 민중운동을 민란과 변란의 유형으로 나누어 그 성격과 대표적 사건들의 개요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민중운동 가운데 이러한 범주 내지는 유형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대규모의 도적들을 이끌고 있던 임꺽정이나 장길산 같은 사례, 이들에는 미치지 못하나 적지 않은 무장력으로 조직되어 있던 명화적, 그리고 비밀결사로의 검계나 살주계, 그리고 활빈당과 같은 경우이다. 16세기 중반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도적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임꺽정의 활약상은 가히 반란이었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엄청나다. 그렇다고 이를 농민이 주체인 전형적인 민란이나 또는 정치투쟁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변란으로 성격을 규정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여기에서 우리는 임꺽정 집단의 활동을 평가하기에 앞서, 백정을 비롯한 최하층의 인물들이 그 조직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는 임꺽정 집단의 활동이 신분제의 모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대담무쌍하게 관아를 습격했다는 사실은 그 활동의 반봉건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숙종 때의 대표적 도적인 장길산 집단의 활동을 평가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이들 두 집단의 활동은 신분해방 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는 선상에서 민중운동의 한 사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명화적의 활동도 민중운동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하지만 명화적이 고향을 떠나 각지를 떠돌던 유민들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음을 이해할 때, 이들의 활동도 생존투쟁 또는 경제투쟁으로서의 성격을 일부 지니고 있었다는 평가를 할 여지도 있을 것이다. 또한 명화적은 일반 도적들과는 달리 거의가 부유한 양반들의 집을 공략대상으로 삼고 있는 등, 그들의 활동에서도 미미하나마 반봉건성을 찾을 수는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반면에 검계나 살주계 등 비밀결사 운동의 경우는 신분해방 운동으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하다. 아울러 명화적 활동의 투쟁방향이 발전적으로 바뀐 활빈당의 활동을 민중운동의 일환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데에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활빈당의 활동은 반봉건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반외세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신중하면서도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글 고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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