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의 풍토성
몸짓 언어 1 - 눈으로 하는 말
눈은 마음의 창이다. 이 창을 통하여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내 안의 속마음을 내보이기도 한다. 눈은 분명 외계의 사물을 보는 것 이상으로 내밀한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창구가 된다. 눈짓을 보내고, 남의 눈치를 살피고, 눈인사를 나누고, 눈웃음을 치고... 비록 소리는 없으나 눈은 또 하나의 훌륭한 언어 기관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여인은 입보다 눈으로 더 많은 말을 한다."고 어느 작가는 말한다. 한국 여인의 눈가에 내비친 그 은밀한 속뜻을 알아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박두진 시인은 "아내를 위한 자장가"에서 그런 여인의 눈을 이렇게 그린다.
수림으로 둘리운 잔잔한 수면 하늘 먼 옛날로의 옛날로의 푸른 네 두 눈은 생각하는 호수
안이나 목과 같은 한자말도 있지만 우리말 "눈"의 의미 범주에는 미치지 못한다. 인간은 신의 눈에서 비롯되었다는, 옛날 이집트의 신화도 있지만 눈은 그대로 인간의 생명을 상징한다. "눈을 뜨다, 눈이 시퍼렇다"하면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뜻하고 "눈을 감다, 눈에 흙이 들어간다"라고 하면 생명의 종식을 의미한다. 눈은 또한 애정을 표시하는 또다른 창구가 된다. 중국인들도 연인을 일러 "눈에 든 사람", 곧 안중인이라 한다. 우리말에서도 "눈에 들었다"는 말로 사랑은 시작되고, 이어 눈길을 주고 받고, 눈을 맞추는 과정을 거치면 이내 "눈맞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때로 "제 눈에 안경"이라고 눈이 삐어 사랑에 눈이 멀 수도 있다. 이럴 땐 그 대상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면서 눈을 뒤집거나 눈에 쌍심지나 불을 켜고 맹목으로 덤비기도 한다. 만남 뒤의 헤어짐에서도 그 애틋한 여운은 눈에서 떠나지 않는다. "눈에 어리고", "눈에 밟힌다"는 말은 그 애틋한 심정의 표현이다. 승부가 아주 미세한 바둑판의 싸움을 가리켜 "눈 터지듯 계가 바둑"이라 하고, 누군가 애타게 기다릴 때는 "눈이 빠진다"고 엄살을 떨기도 한다.
애정 표현에만 눈이 관계하는 것은 아니다. 짧은 순간이라면 "눈 깜짝할 사이"요, 곤란한 일은 "눈 딱 감고"묵인해 주기도 한다. 눈을 뜨고도 글을 읽지 못하면 "까막눈"이요, 욕심을 내서 눈여겨 보면 "눈독 들인다"고 한다. 피곤할 때 잠시 "눈을 붙일 수"도 있고, 눈 밖에 나서 보기에 거북하면 "눈꼴이 사납다"고 고개를 돌린다. 어떤 화려한 정경을 두고 "눈부시다"고 하고, 한두 번만 보고도 곧잘 해낼 수 있는 재주를 일러 "눈썰미가 있다(좋다)"고 한다.
눈의 생김새, 곧 눈의 맵시를 줄여 "눈매"라 일컫는다. 눈매는 고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대체로 좋지 않을 때 그에 합당한 이름을 붙인다. 마늘모눈, 가자미눈, 도끼눈, 나비눈, 고리눈 등이 그런 예인데 이들은 대개 불평, 불만, 경멸, 무시 따위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때 쓰는 말이다. 그런데 나비눈이라고 할 때의 나비는 곤충이 아니라 고양이를 귀엽게 부르는 이름이다. 도끼눈의 도끼 역시 나무를 찍는 도끼(부)가 아니라 토끼가 변한 말이다. 고양이나 토끼의 그 동그란 눈을 닮았기에 붙인 이름인데, 우리는 그 본래의 뜻을 잘못 알고 사용하는 듯하다. "놀란 토끼"라는 말이 있듯이 토끼의 눈이나 고양이의 눈은 크게 뜨고는 있지만 기실은 매우 부르덥고 선량한 모습이다. 그런데 토끼눈의 경우 토끼가 도끼로 바뀌는 바람에 그만 험악한 의미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적 무서운 눈매는 고리눈일 것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비가 그런 눈을 가졌다는데, 어떤 눈인고 하면 눈을 부릅뜨면 흰 자위가 빙글빙글 동자를 굴리는 듯한 그런 험상궂은 눈이다.
심사가 편치 않을 때 이르는 눈매의 호칭말고도 눈꼴, 눈씨, 눈살, 눈총, 눈초리, 눈깔 등의 말도 좋지 않은 상태의 표현이다. 눈의 언저리를 가리키는 눈자위, 눈두덩이, 눈퉁이도 이와 다를 게 없다. "눈퉁이가 밤탱이"라는 속어에서 보듯 얻어맞아 퉁퉁 부었다면 눈두덩이요, 건강이 좋지 않아 푹 꺼져 버렸다면 눈자위가 될 것이다. 같은 뜻이기는 하나 눈보다는 눈망울 또는 그냥 "망울"이라는 말이 더 운치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눈알을 덮는 얇은 피부를 눈시울 또는 눈까풀이라 부르는데, 눈알, 눈망울(방울)에서 보듯 눈시울과 눈까풀의 경우도 용법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눈시울이 시적인 표현이라면 껍질에서 파생된 까풀(꺼풀)은 산문적이라 할까. 붉어지거나 눈물이 흘러 적시는 경우는 눈시울이지만 졸려서 주체하기 어렵거나 성형 수술의 대상이 될 때는 눈까풀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창이자 제2의 언어기관인 눈은 늙음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기도 하다. "가선이 졌다"는 멋진 우리말이 있다. 가선이란 눈웃음을 지을 때 눈가에 잡히는 가느다란 잔주름을 이름이다. 어느 날 문득 가선이 진 아내의 옆 모습을 보면서, 또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그것을 보면서 "아, 이제 우리도 늙었구나!"라는 탄식을 토하게 되는 그런 주름살 말이다. |
찰나
급작스레 벌어진 일을 설명할 때 흔히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순식’은 아주 작은 수다. 그냥 막연히 작은 수가 아니라 10의 17제곱 분의 1이다. 얼마나 작은 수인지 잘 짐작이 되지 않는다.
“찰나의 가을, 올 유난히 짧아 겨울 일찍 온다” 일간지 기사 제목이다. 짧은 가을에다 ‘찰나’라는 말을 썼다. ‘찰나’는 ‘순식’의 100분의 1에 해당하는 작은 수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소수점 이하의 단위는 분(分)·이(厘)·모(毛)·사(絲) 정도다. 야구 선수들의 타율을 계산할 때도 이(厘)까지다.
하지만 일상 생활에 쓰이건 않건 10의 21제곱분의 1까지 단위가 매겨져 있다. 그 단위들을 차례대로 훑어보자. 분·이·모, 사 다음에 홀(忽)·미(微)·섬(纖)·사(沙)·진(塵)·애(埃)·묘(渺)·막(漠)·모호(模糊)·준순(逡巡)·수유(須臾)·순식(瞬息)·탄지(彈指)·찰나(刹那)·육덕(六德)·허공(虛空)·청정(淸淨) 순이다. 마지막 ‘청정’은 아라비아숫자로 쓰면 소수점 밑에 ‘0’이 무려 스물이나 붙고 ‘1’이 나오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작은 숫자다.
이들은 아주 짧은 시간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때는 약간 막연히 ‘눈 깜짝 할 사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수유’는 문학 작품 같은 데서 어렵잖게 만날 수 있고, ‘순식’은 ‘순식간’ 또는 ‘순간’으로 널리 쓰인다. ‘탄지’는 잘 쓰이지 않지만, ‘찰나’는 범어(Ksana)에서 온 말로서 ‘순식간’과 함께 ‘아주 짧은 시간’이라는 뜻으로 흔히 쓰인다.
우재욱/우리말 순화인·작가
분꽃
흔히 나오는 사극이나 ‘스캔들, 황진이’ 등의 영화를 보면 옛날 여인들이 어떻게 꾸미고 살았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분꽃’은 가루를 뜻하는 분(粉)과 꽃이 합친 말로, 까만 분꽃씨앗에 들어 있는 ‘가루’를 화장할 때 썼다고 붙은 이름이다. 분꽃씨 가루는 기미·주근깨·여드름을 치료하는 데 쓰기도 하였다. 마당가에 분꽃을 길러본 사람은 분꽃귀고리를 해 봤던 추억도 있으리라. 영어로는 ‘페루의 놀라움’(marvel of Peru)이나 ‘네 시’(four-o’clock) 꽃이라고 이른다. 이 이름은 분꽃의 원산지가 열대 아메리카이고, 해질 때부터 아침까지 피는 꽃임을 알게 해 준다.
비록 좁은 발코니밖에 없더라도 화분에 씨앗을 뿌리면 아침에는 나팔꽃을 볼 수 있고, 나팔꽃이 지고 나면 다시 분꽃을 볼 수 있다. 식물의 연주를 누려보는 것은 어떠실지! 실은 분꽃이나 박꽃이 피면 저녁밥 준비를 하시던 어머니들이 그 리듬에 맞추어 살았던 셈이다.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실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척박하던 시절에도 오히려 넉넉하게 화장도 하고 사랑을 꽃피우며 살았음을 까만 분꽃씨를 쪼개며 되새긴다.
장 담그셨나요?
요즘은 김치를 집에서 하지 않고 사 먹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된장·고추장은 아직은 직접 만드는 집들이 꽤 있다.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냄새 때문에 메주를 띄우기가 좀 곤란하다. 하지만 메주를 파는 곳이 흔하기 때문에 구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장을 만드는 철이다 보니 그에 관한 대화가 자주 오간다. '집에서 된장 '담으십니까'? 우리는 시골에서 부모님이 '담궈서' 보내주셔요.' '김치는요? 요즘 김치를 집에서 '담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사 먹지.' 이처럼 된장이나 김치를 만드는 것을 '담구다'나 '담다'로 잘못 표기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담그다'가 바른 말이다. '담구다'는 아예 없는 말이므로 여기서 변화한 '담궈서' '담구니' '담궜다'도 쓸 수 없다.
'담다'는 '물을 병에 담다'처럼 그릇 등의 용기에 무엇을 넣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대화에서는 '담그다'의 활용형인 '담그십니까?' '담가서' '담그는'으로 써야 한다. 된장은 단백질이 풍부하고 항산화작용을 하며 항암 성분도 들어있다고 한다. 이제껏 부모님께서 담가주신 것만 먹었는데 이젠 담그는 법을 배워야겠다.
김형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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