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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405 호
단기 4341. 4. 10 (음력 3. 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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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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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공모
2007년 『완득이』를 제1회 수상작으로 선정한 창비청소년문학상을 공모합니다. 진정한 청소년문학의 활성화를 위해 제정된 이 공모에 미등단 예비작가와 기성작가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모 바랍니다.
- 모집부문 청소년을 대상독자로 한 미발표 장편소설
- 마감 2008년 9월 30일
- 분량 200자 원고지 700매 내외
- 시상 원고료 2,000만원과 유럽 문화예술 탐방 기회 제공
- 응모자격 신인 및 기성작가 제한 없음
- 발표 2008년 11월 15일 본사 홈페이지(입상자에게는 개별 통지)
- 보낼곳 413-756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파주출판도시 513-11 (주)창비 어린이청소년출판부
- 기타
1. 수상작은 단행본으로 출간합니다. 2. 출간후 고료를 웃도는 인세(정가의 10%)가 발생할 경우 초과분의 인세를 지급합니다. 3. 유럽 문화예술 탐방은 국제도서전 참관 및 유럽의 청소년문학 도서관 관람 등을 포함합니다. 4. 응모시 겉봉에 ‘청소년문학상 응모작’이라고 밝히고, 원고에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꼭 써주십시오. 5. 응모한 원고는 반환하지 않으며,우편접수만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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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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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무엇에 빠져들었다 하면 감기처럼 나을 때가되어야만 끝나는 법. / E.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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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글터 → 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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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의 풍토성
주술적 용어 2 - 고마워하고 비는 기원의 말
성경에 이르기를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종교의 유무에 관계없이 누구나 평생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좋은 가르침이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처음 이 구절을 우리말로 옮길 때 순수한 고유어로 번역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매사라면 몰라도 범사라면 지금도 생소하기 이를 데 없고, "감사"나 "기도"라는 말 역시 한자말이기 때문이다. 일상어에서 "고맙습니다"와 "감사합니다"가 공존한다. 언젠가 학생들을 상대로 두 어사의 빈도수를 조사했더니 한자말 감사합니다가 약간 우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감사합니다는 사용자가 주로 중, 장년층이고 점잖은 자리에서 사용된다는 것인데, 이는 한자말이 더 점잖고 고상하다고 느끼는 일반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사의를 표해야 할 자리에서 어떤 사람은 급한 나머지 "곰사합니다"라고 했다던가. 감사와 고맙다가 뒤섞인 한한합작어인 셈인데, 어떻든 두 말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의 의미가 더 좋을까 생각해 보자. 우리가 고유어 고맙다의 어원을 안다면 이 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고맙습니다는 영어의 "댕큐(Thank you)"와는 격을 달리 한다. 왜냐하면 고맙다는 사의의 대상이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인간 이상의 어떤 위대한 존재에 대한 외경의 표현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고맙다의 어원 "고마"는 신 또는 신령을 지칭하는 말이며, 동사 "고마하다"는 공경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고마 경, 고마 건, 고마 흠이라 훈한 자전이 이를 대변한다. 또 고맙습니다의 기원형이 " 업습니다"이며 이 " 업다"를 신령스럽다 또는 신령의 은혜를 입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고맙습니다는 단순히 어떤 상대에 대한 사의가 아니라 "할렐루야"와 같은 신에 대한 찬미로 볼 수 있다. 영어로 말한다면 어느 누구에게나 어느 상황에서나 입버릇처럼 내뱉는 "Thank you"가 아니라 "Thank God"또는 "God bless you"쯤에 해당된다고 할까. 따라서 우리말 "고맙습니다"는 결코 격이 낮고 가볍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도(또는 기원)"에 대한 고유어도 마찬가지다. "빌다"나 "바라다"가 기원에 대한 고유어인데, 그저 빌어먹고 공짜나 바라는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도 두 말의 본뜻을 이해함으로써 좋지 않은 인식을 깨끗이 씻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우리 천씨 장손 수명 장수케 해 주시고..." 필자의 생일날, 할머니께서 정화수가 놓인 상 앞에서 두 손을 싹싹 소리 나게 빌면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드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옛 사람들은 생일뿐만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이처럼 천지신명께 빌면서 살아 왔다. 키에르케고르도 기도는 인간의 호흡이라 말한 바 있지만 우리네처럼 한평생 손발이 닳도록 빌면서 살아 온 민족도 드물 것 같다. 빌다란 말에는 어떤 일이 성사되기를 바란다는 뜻 외에도 잘못에 대한 용서, 없는 것을 채워 달라는 구걸, 돌려 주기로 하고 차용해 오는 일 따위가 모두 포함된다. 빌면서 사는 삶이었기에 이처럼 "비다", "빌다"라는 말의 용례가 다양해졌는지 모르겠다. 또한 빌다라는 어사만큼 종교적 색채가 짙은 말도 없을 듯하다. 전지전능한 신에게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신의 힘을 빌려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곧 은총을 바라는 것도 바로 비는 일에 속한다. 그렇다면 "비다", "비우다"의 본뜻은 신을 향한 인간의 무소유, 무능, 무력에 대한 진실한 고백에 다름 아니다. "마음을 비운다"라는 말이 있다. 무심의 경지를 이름인데, 여기서 마음이란 쓸데없는 인간의 욕심일 것이다. 불교에서도 색즉시공이라 하여 눈에 보이는 현상계는 모두 빈 것이라고 가르친다. 공이나 무, 부연한다면 인간이 가진 그 하찮으 것들을 포기하고 절대자에게 매달렸을 때, 비로소 구우너을 얻을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바라다"라는 말은 단순히 원하다, 기대하다를 뜻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바라보다"와 같은 말로서 의지하다, 곁따르다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다. "바라다니다"가 "곁따라 다니다"는 뜻이므로 "사랑은 바라다니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바라본다면 어디를 바라보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이 신을 향하여 자기가 원하는 바를 구하고, 신을 알고 그와 똑같이 닮기를 바라는 것이다. "알음"이란 인간 관계에서 형성되는 친분뿐 아니라 신령의 보호와 보람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앞으로는 정초에 이런 덕담을 나누기로 하자.
"그대에게 늘 알음이 있기를 바라오, 언제나 고맙습니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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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책을 읽으며 언뜻 생각이 났다. 언젠가 칼럼으로 '감사합니다' 와 '고맙습니다' 에 대한 의미를 쓴 적이 있다. 감사(感謝)는 중국어발음으로 '시에시에' 로 발음된다. 흔히 중국영화에서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우리말에는 주술적인 - 신에게 마음을 전하는 - 용어들이 많다. 그것을 미신이나 사이비종교처럼 취급 한다면 당신은 아무런 말도 뱉지 못할 것이다. 지난 시절 어머니들이 정화수 떠놓고 빌던 용어들처럼 한결같은 정성이 담긴 말이 어데 있겠는가. 한자를 완전히 없애고 한글로만 살아가기에 버거움이 있다. 그러나 더 좋은 뜻과 아름다운 우리말이 있다면 당연히 바꿔써야 맞다.
- 윤영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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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추
보랏빛 길쭉한 꽃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을 동네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다른 풀꽃들에 견주어 잎이 길고 두터우며 시원시원하게 생겼다. ‘비비추’는 ‘비비 틀면서 나는 풀’이라는 뜻으로 여겨진다. ‘비비’는 물체를 맞대어 문지른다는 뜻의 움직씨 ‘비비다’에서 온, 꼬이거나 뒤틀린 모양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는 살짝 뒤틀리듯이 올라오는 비비추의 잎 모양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추’는 곰취 등 나물이름에 나타나는 ‘취’의 변형으로, 비비추의 옛 이름은 ‘비비취’다. 이때 ‘취/추’는 ‘채’(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배추가 ‘백채’(白菜·바이차이), 상추가 ‘생채’(生菜·셩차이)에서 변형된 것이라는 얘기다.
비비추는 중국이 원산지인 옥잠화와 혼동되기도 한다. ‘옥잠화’(玉簪花)는 말 그대로 옥비녀꽃이라는 말인데, 꽃 피기 전 모습으로 말미암아 붙은 이름이다. 비비추도 옥잠화와 닮아서 한자말은 ‘장병옥잠’(長柄玉簪)이다. 곧, 긴자루 옥비녀란 뜻인데, 옥잠화하고는 다른 종이다. 비비추는 보라색 꽃이 피고, 옥잠화는 흰꽃이 피며, 비비추 잎이 조금 더 길쭉하다.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 산림과학원 제공
버들과 땅이름
땅이름에 나무를 뜻하는 말이 들어 있는 경우는 비교적 많다. 나무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잣나무’와 ‘소나무’다. 잣바우덕·잣방산·잣밭등·잣밭골·잣고개 등은 ‘잣’을 고유어로 나타낸 것이며, 백촌리·백곡·백성동 등은 ‘잣’의 한자어 ‘백’(柏)을 쓴 것이다. 소나무와 관련된 땅이름도 비교적 많다. ‘솔고개·솔모루’ 등이 그것이며, ‘송악’(松嶽)에도 소나무를 뜻하는 한자 ‘송’(松)이 들어 있다.
그러나 ‘송악’의 ‘송’이 ‘소나무’에서 유래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며, ‘괴산’(槐山)에 들어 있는 ‘괴’도 한자의 본뜻인 ‘홰나무’에서 온 말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땅이름의 유래를 확인하려면, 그런 이름이 붙은 까닭을 짐작할 만한 충분한 단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버들’와 관련된 이름을 찾는 일도 쉽지 않다. 버드나무는 우리나라 각지에 분포하며, 민요나 옛시조에도 자주 등장하는 나무인데도 그와 관련된 땅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한 추론 가운데 하나는 ‘버드나무’가 산스크리트어에서 왔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이재집>에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버들가지를 ‘비탁가지’라고 하였다고 풀이한 바 있다. 평양을 ‘유경’(柳京)이라 한 것과 충남 해미의 개심사 들머리 ‘버드실’처럼 일부 땅이름에 ‘버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라는 정감 어린 시조에도 나오는 버드나무가 땅이름에 덜 쓰이는 까닭은 땅이름의 발달 과정에서 외래어가 덜 쓰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호두과자
피자·햄버거·스파게티·테이크아웃 세대와 달리 늘 주전부리에 목말라 하며 지낸 때도 있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을 갈 때면 천안역 부근에서 항상 호두과자가 등장했다. 지금은 고속도로휴게소나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도심 외곽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만 어렸을 적에 맛봤던 호두과자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호도'와 '호두'는 어떤 게 맞을까. 우리말에는 양성모음은 양성모음끼리, 음성모음은 음성모음끼리 어울리는 모음조화 규칙이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원칙이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이에 따라 발음·의미가 비슷한 말이 여럿 생겨났다. '호도(胡桃)와 호두' '-동이(-童이)와 둥이' '장고(杖鼓)와 장구' '주초(柱礎)와 주추' 등이 그 예다. 이런 경우 혼란을 막기 위해 어느 한 말을 표준어로 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호두, 쌍둥이, 장구, 주춧돌'이 한자어인 본디말을 제치고 표준어가 된 것이다.
순우리말인 '오똑이→오뚝이','깡총깡총→깡충깡충'등도 같은 사례다. 호두는 정월 대보름날 밤에 깨물어 먹는 부럼으로도 사용되는데 부럼을 깨물면 한 해 동안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우리 고유의 풍습이 점차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깝다.
권인섭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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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유골
"재수가 없으려면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식으로 "모처럼 호의로 생긴 것이 그나마도 마가 들어 득이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흔히들 황희 정승을 쳐들지만 그가 청백하고 어렵게 지냈다는 얘기가 하도 많으니까 실재 인물에 덧붙여서 그럴싸하게 얘기한 데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겠고, 실지로 있을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하여간 어떤 재상이 몹시 곤궁하게 지낸다는 얘기를 듣고 임금이 특명으로 어느 날 하루 서울 사대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건을 몽땅 사서 그 대신에게 주라고 분부하였더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아침부터 비가 내려서 인적이 딱 그쳐 버렸다. 꼭 하나 서대문인가로 계란 세 꾸러미를 가지고 들어오는 이가 있어 그것이 그 재상의 몫으로 돌아갔는데 이것이 사고다. 계란마다 뼈가 들어 있어서 그나마도 하나 먹어 보지도 못했다는 얘기다. 몇몇 기록에도 나오는데 주인공을 물론 밝힌 곳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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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흰소를 타고 간 화가
이중섭은 1916 년, 평남 평원군에서 이창희씨의 5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그는 8세 때 종로 보통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화가 김병기, 소설가 황순원, 희곡 작가 오영진 등과는 모두 그때 동문수학하던 사이였습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중섭은 오산보고에 입학하면서 그림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풍족한 생활 속에서 미술에 정진하기 위한 유학길에 오르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평탄함에서 파란만장한 길목으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경제국 미술학교에서 서양학과에 입학한 중섭은 운명의 여인인 마사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수줍음을 잘 타고 내성적인 중섭을 대신하여 홍하구라는 친구가 마사꼬에게 그의 사랑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마침내 타올랐지만 처음부터 순탄하지 못하고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마사꼬의 부모들이 식민지 국민인 조선 청년을 좋게 볼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갈수록 일본에 불리해지자 마사꼬는 부모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 이중섭과 함께 있기 위해 무조건 현해탄을 건넌 것입니다. 이때 이중섭은 원산에 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연락을 받고 극적인 해후를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해방이 되자 두 사람은 결혼해서 원산에 신혼의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마사꼬는 결혼하면서 이남덕이란 새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중섭이 즐겨 그린 소재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들인 물고기, 나비, 곤충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재들은 공산치하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소재는 부르조아 성향을 드러낸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시인, 화가 , 작가들은 그 무렵 하나둘 월남했으나 이중섭은 그런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 6.25가 터졌습니다. 그러자 이중섭도 처자를 거느리고 부산으로 내려가게 됐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그는 단칸방에서 지내며 막노동을 하다가 선배의 주선으로 해군 종군 화가단에 가입하였고 거기서 나온 배급으로 연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일본인들을 본국으로 귀환시켜 준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이 같이 동행해 일본으로 갈 것을 설득했으나 중섭은 듣지 않습니다. 결국 부인과 자식들만 귀환선에 오르게 됩니다. 중섭은 뒤따라간다고 했지만 여비를 벌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부둣가 다방에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이별한 아내와의 해후를 갈망하는 이중섭은 그의 말처럼 살아갈 힘도 재주도 없이 끊임없이 그림만 그렸습니다. 판잣집 골방에서, 부두에서 막일하다 쉬면서도,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한없이 그림만 그려나갔습니다. 이중섭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유화, 수채화, 데생 등 2백여점, 은지화 약 3백여 점을 남겨 현대 한국미술사에 찬란한 한 페이지를 남기게 됩니다. 드디어 이중섭은 꿈에도 그리던 아내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때가 헤어진 후 3 년이 지난 1953 년 1월이었습니다. 약 2주일간의 짧은 만남을 끝으로 그는 다시는 그리운 처자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만난 아내는 중섭의 친구였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여 생활이 몹시 어려웠습니다. 그는 더 이상 그것을 지켜볼 수 없다면서 귀국한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그는 여러 방면으로 돈을 마련했으나 그때마다 주위사람에게 사기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생활에 쪼들리면서도 돈에 대해서는 전혀 애착이 없었습니다. 열심히 그림을 그려 판 돈도 친구들이나 지인들의 술값으로 날리기 일쑤였으니 그에게는 일본으로 건너갈 여비조차 모아지지 않았습니다. 일본행은 거의 절망에 가까웠고 그는 나날이 좌절감과 자학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하자 식음거부증세를 나타냈습니다.
"내가 이 밥을 먹으면 나 때문에 한 끼를 굶는 사람이 생길 것 아냐? 그러니 어떻게 먹겠나?"
그는 온종일 방안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간장염으로 적십자병원에서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그의 영혼은 그리운 아내와 자식들에게 자유롭게 날아갔을 것입니다. 험난한 세파와 사람들의 배신 속에서도 예술적 품성을 지켜 나갔던 이중섭은 이렇게 우리들 앞에서 한많은 세상을 마친 것입니다.
* 이중섭(1916~1956)
평양 출생.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처났다. 동경문학학원 재학 중 일본 자유미협전에 입상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들어갔다. 그의 작품 성향은 포비슴(Fauvisme, 야수파)의 영항을 받았으며 향토적이고 개성적인 것으로서 우리나리에 서구 근대화 화풍을 도입하는 데 공헌했다. 그는 1956 년 간장염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활짝 피워 보지도 못한 채 유명을 달리했다. 주요 작품에는 소, 흰소 등이 있다.
[흰소 - 이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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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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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이 아름답다 - 신경림
저분이 선생님이시다. 삼촌의 외경어린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그 사랑방은 주춧돌도 집터도 남아 있지 않다. 모란과 작약이 있던 마당에 칙칙한 개망초가 어지럽게 피어 스산하다.
그는 모시 중의 차림이다. 어느새 그보다도 나이가 많아진 내가 그 앞에 앉아 있다. 선생은 평양을 가보았소? 개성을 가보았소? 그것이 당신이 꿈꾸던 아름다운 세상이었소? 나는 묻고, 그는 대답이 없다. 먼 산만 보고 있다.
그 안채도 우물도 간 곳이 없다. 울 너머로 내다보던 살구나무도 없다. 묵밭에 개망초만 스산하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묵밭은 허옇게 빛이 바랜다. 산도 하늘도 허옇게 바랜다. 그의 뜻을 따라 목숨을 버린 젊은이들의 넋이 허옇게 바랜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그 집은 재생된다.
사랑방과 대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던 우물과 그 앞의 살구나무가 되살아나고, 집 뒤로 늘어섰던 대추나무들이 되살아난다. 그는 모시 중의 차림이다. 개망초와 젊은 넋들이 묵밭을 허옇게 덮고 있지만,
그 집이 아름답다. 그가 이룬 것이 없어 아름답고 그의 꿈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더욱 아름답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아름답고 아무것도 남길 것이 없어 아름답다. 그 집이 아름답다, 구름처럼 가벼워서 아름답다. 내 젊은 날의 꿈처럼 허망해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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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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