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암협회, 제5회 ‘암’희망 수기 공모
'암(癌)중모색-희망' 캠페인 일환…4월14일~5월10일
대한암학회가 '행복한 영웅을 찾습니다'라는 주제로 암 환자가 병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에 대한 수기를 공모한다.
올해는 암 환자 중심의 수기가 아닌 암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의 수기로 공모전의 형식을 바꿨다. 추천 대상자는 암 투병 중 힘이 되어준 가족, 친구, 의료진 모두가 포함되며, 암을 극복한 환자 본인도 추천 가능하다.
대한암학회는 7일 오는 14일부터 5월10일(토)까지 제5회 '암 희망 수기 공모전 - 행복한 영웅을 찾습니다'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암 희망수기 공모전은 대한암학회의 '암중모색-희망' 캠페인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올해로 5회째를 맞는다.
수기 공모는 대한암협회(www.kcscancer.org) 또는 한국아스트라제네카(www.astrazeneca.co.kr)의 홈페이지에서 수기 공모 신청서를 다운로드 받은 후 수기를 작성해 접수하면 된다.
수기를 접수한 모든 참가자에게는 오는 5월29일 펼쳐지는 필라델피아 필하모닉 4중주의 ‘희망 자선 연주회’ 티켓을 제공할 예정이다.
접수된 수기는 심사를 거쳐, 아스트라제네카 암 희망상 대상 1팀, 우수상 2팀이 선정된다. 아스트라제네카 암 희망상 대상은 200만원의 상금이, 추천된 영웅에게는 100만원의 상금이 수여된다. 우수상은 2팀을 선정할 예정이다. 수기 공모와 관련된 궁금증은 전화(02-6915-3067)로 문의하면 된다.
안윤옥 대한암협회 회장은 "암을 이겨낸 환자는 물론, 가족, 의료진 모두 암 극복이라는 희망을 몸소 보여준 진정한 영웅"이라며 "이번 수기 공모전을 통해 소개되는 행복한 영웅의 이야기가 우리나라 사회 곳곳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길 바란다"고 공모전의 의의를 밝혔다.
한편, '암(癌)중모색-희망 대국민 캠페인'은 암 예방 및 조기검진사업, 암 치료 등의 이해 증진을 위해 2003년 시작됐다. 2005년부터 대한암협회 주최, 한국아스트라제네카 후원으로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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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의 풍토성
농경 생활 용어 3 - 사계의 고유 이름
"철 그른 남동풍"이라는 속담이 있다. 버스 떠난 뒤 손 드는 식으로 때를 놓친 경우를 이름이다. 무슨 일이든지 때가 있게 마련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지칭하는 우리말 "철"은 한자어 "절"에서 유래하였다. 절은 계절의 의미로도 쓰이지만 "철들다(철나다)"에서 보듯 사리를 분별하는 힘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세상일에는 저마다 꼭 필요한 시기가 있음을 알려 준다고나 할까.
1년 사계를 보는 시각은 저마다 또는 사는 지역 풍토에 따라 다르다. 폴란드 속담에는 봄은 처녀, 여름은 어머니, 가을은 미망인, 겨울은 계모라 부른다고 한다. 어느 영시에는 "4월은 내 애인의 얼굴 위에 있고, 7월은 그녀의 눈 속에 깃들여 있네. 그녀의 가슴 속에 우렁이 있고, 그녀의 마음 속에 냉랭한 12월이 있네."라면서 계절의 감각을 여인의 신체 부위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먼 옛날 이 땅에 정착한 우리 조상들은 오랜 세월 농사를 지으며 살아 왔기에 계절은 농사일과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봄을 나타내는 한자 "춘"은 봄 햇살을 받은 뽕나무 새순이 뾰족이 머리는 내민 날의 형상이다. 영어의 "spring"은 돌 틈에서 퐁퐁 솟는 옹달샘이나 겨울잠에서 갓 깨어난 개구리가 스프링(용수철)처럼 튀어나간다는 뜻이다. 절기로 말한다면 봄비 내리는 우수와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얼음이 깨져 나가는 소리에 놀란다는 경칩이 바로 이 춘이나 spring에 해당될 것이다.
우리말 "봄"의 어원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따뜻한 온기가 다가온다 하여 "불(화)+옴(래)"의 결합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봄의 어원은 이처럼 생동하는 자연 현상을 단순히 "본다(견)"는 관점에서 찾아야 한다. 따뜻한 봄 햇살을 받아 초목에 새 생명의 싹이 움트는 경이를 인간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봄을 일러 "새봄"이라고 한다. 계절의 첫머리에는 모두 "새"가 붙을 법한데, 새여름이니 새가을, 새겨울이란 말은 들을 수가 없고 오직 봄만을 새봄(신춘)이라 일컫는 것이다. 뽕나무 새순이 돋는 날의 춘, 샘물이 퐁퐁 솟는다는 spring, 또 따뜻함(불)이 다가온다는 "불+옴" 어원설 들은 모두 지엽적인 자연 현상을 묘사한 데 지나지 않는다. 반면 우리말 봄(견)은 사람이 주체가 되어 그 현상을 관조하는, 그야말로 인간 중심의 호칭법이라 할 수 있으니 그런 점에서 의미상 한 차원 높다고 할까.
여름은 온갖 초목이 열매를 맺는 계절이다. 여름(실)과 녀름(하)을 고문헌에는 구분하여 적었으나 기실은 한 뿌리에서 나온 말로서 의미분화를 일으킨 결과이다. 열매가 열리는 경이는 흘린 땀의 보담인 동시에 대자연의 순리에 따른, 그 결실의 내면을 "열어(개) 보이는"일이기도 하다. 여름은 사람들이 옷을 벗어 몸뚱아리를 열어 보이고 대문이나 창문도 활짝 열어 놓는 개방의 시기다. 이런 의미에서 여름(하)은 열음(개)과 통할 수 있고, 여는 일은 맺는 일과 통할 수 있다. 여름을 영어에서는 "summer"라 한다. 가장 화려한 시기, 곧 한창 때를 지칭하는 말이다. 오곡백과가 강렬한 햇빛을 받아 왕성한 생명력을 구가하는 여름 한철은 사람으로 치면 혈기방장한 20~30대의 청년기라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이처럼 치열하게 생명의 불꽃을 태웠기에 릴케는 "가을날"이라는 시에서 "지난 여름은 위대했다"고 읊고 있다.
가을은 여름 내내 가꾸어 온 땀의 결실을 거둬들이는 시기다. 추수를 고유어로 가실한다 또는 가슬한다고 하는데, 이는 거둬들인다는 뜻에 다름아니다. 영어의 "autumn" 또는 "harvest"와 마찬가지로 가슬(실)이란 무엇을 "끓을, 벨"이라는 관형어가 그대로 계절을 지칭하는 명사로 굳어진 어형이다. 흔히 가을을 슬픈 계절로 규정한다. 영어의 fall이나 한자말의 조락에서 보듯 이 계절명은 생명의 소진에서 오는 허무감을 강하게 내비친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윤회설을 믿은 탓인지 그런 비애의 흔적은 남기지 않았다. 말하자면 생명이 다하여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서구인들이 눈물지을 때 우리는 결실과 수확의 기쁨을 노래했던 것이다. 가슬이 가을로 굳어진 것처럼 겨슬(겨실)은 겨울로 굳어진다. "겨슬"은 단순히 "있다"의 존대어일 뿐으로 본말은 겨시다(계시다)가 된다. 여기서 "겨"는 존재(거 또는 재)를, "시"는 존칭을 나타낸다. 바깥 사람에 대해 늘 집안에 계시는 여성을 일러 겨집(계집)이라 하지 않는가. 겨울은 집에 계시면서 편안히 휴식하는 계절이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추수한 곡식을 곳간 속에 갈무리해 놓고 그것을 먹으면서 한겨울의 동면기를 즐기는 것이다. 자연이 쉬는 만큼 인간도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라 할까.
어떤 이는 말하기를 겨울은 내면의 계절이라 했는데, 두말할 나위 없이 바깥 세상이 폐쇄되면 내부 세계는 넓어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따뜻한 정이 흐르기에 우리의 겨울은 결코 춥지 않았다. 계절명에 관한 우리말의 특징을 말한다면 서구어가 자연 중심의 직관적 사고에서 명명된 데 반해 우리 고유어는 인간 중심의 관조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외래어의 범람 속에서도 고유 계절명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우리말의 특성 때문이 아닌가 한다. |
‘고마미지’와 ‘강진’
‘고마미지’(古馬彌知)는 전남 강진의 옛 이름이다. <난중일기>에 나타나는 ‘구미’가 ‘곶’과 같은 의미를 지녔음을 밝힌 바 있듯이, ‘고마미지’는 ‘구미’의 어원에 해당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마미지’ 이외에도 ‘송미지’(松彌知), ‘무동미지’(武冬彌知)가 더 나타난다. 최남선이 서문을 쓴 <동경통지>(東京通志)>에, ‘미지’는 바다의 물굽이가 처진 읍(灣邑)을 일컫는다고 하였다. ‘송미지’는 지금의 전북 고창이며, ‘무동미지’는 비안 북부(庇安北部·전북 군산)인데 ‘단밀현’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 공양왕 때 지금의 경남 통영을 ‘고성’이라 부른 적이 있다. 이 고성의 옛이름이 ‘고자미동’(古資彌冬)이다. ‘미지’의 옛 발음이 ‘미디’였음을 고려한다면, ‘미디’와 ‘미동’은 중국 한자음을 표기하는 과정에서 달라진 형태의 말임이 틀림없다. ‘미지’는 간혹 ‘미치’로 읽히기도 하였다. <동경통지>에서는 ‘고자미동’의 ‘고자’는 ‘구지’로 바뀔 수 있으며, ‘구지’는 ‘반도’(半島)의 뜻을 갖는다고 풀이하였다.
이를 고려할 때 ‘구지’, ‘구미’, ‘미지’, ‘미치’ 등은 모두 중국 한자음이 전래되는 과정에서 우리의 토박이말 ‘곶’을 다양하게 표기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전혀 무관해 보이는 말들이 어원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음을 땅이름에서 찾아낼 수 있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일터 말
집안을 넘어서면 일터와 일자리와 일벗이 있다. 사회를 꾸리는 온갖 동아리가 여기 든다. 예나 오늘이나, 개인·경영자, 대선후보랄 것 없이 일자리 만들기를 첫손으로 꼽는데, 집안·사원·백성을 먹여 살리는 일인 까닭이다. 일자리·일터·일벗과 거래하는 이가 ‘손님’이다. 손님은 호칭·지칭 두루 쓰는 말이고, ‘고객’은 지칭일 뿐인데, 거기다 ‘님’을 붙여 부른다. ‘님’은 아무 말에나 붙어서도 그를 높이는 구실을 하는 부닥방망이와 같다.
일터 말은 비교적 쉽다. 직책·직위·이름을 부르면 되는 까닭이다. 일본 등 직책·직위만 생짜로 부르는 쪽도 있는데, 우리완 맞지 않아서 기분이 껄끄러워지고 정나미가 떨어진다. 일터에서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성명·직책·직위에 ‘님’을 붙여 부르는 게 자연스럽고 편하다. 아랫사람에겐 ‘님’자를 꺼리지만, 인색해야 할 아무 까닭이 없다. 다만 ‘성+씨’, ‘이름+직책·직위+님’은 어울리지 않는다.
같은 분야에서 나이·지위·역량 따위가 앞선 이를 ‘선배’라 부른다. 격식을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정답고 편한 느낌을 준다. ‘동지’는 이념이 실린 말로서 부를 때는 동급 이하에 쓰이며, ‘동무’(벗)는 걸림말이지만 북녘에서는 부름말로도 쓴다. 두루 주로 ‘성’과 어울린다.
일터에서 이제 ‘미스·미스터’는 우스개가 된 듯하고, 오히려 집안말 아씨·언니·형이 어울릴 때가 있다. ‘씨·군·양’은 ‘하게체’ 상대를 부를 때 어울린다. 호칭은 부르고 듣기에 편하면 된다. 지나치거나 모자라면 껄끄럽게 되고, 껄끄러우면 뜻이 잘 통하지 않는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점쟁이
로또 복권 덕분에 점(占)집이 때아닌 호황이라고 한다. 복권의 구입 날짜, 시간 문의에서부터 아예 행운의 숫자 여섯 개를 찍어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런 용한 점쟁이나 역술가가 있는지 모르지만, 설사 그 번호를 안다고 해도 발설하면 천기누설(天機漏洩)이 아닐까.
'점쟁이'처럼 '-쟁이'나 '-장이'가 나오면 어떤 걸로 써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흔히 '-장이'를 '-쟁이'로 발음하게 되는 것은 뒷글자 '이'의 영향을 받아 비슷하게 소리나는 현상으로, 이를 'ㅣ 모음 역행동화'라고 한다. '-장이'보다 '-쟁이' 발음이 편한 이유다. 하지만 '-장이'와 '-쟁이'는 쓰임새가 명확히 구분된다.
기술자에게는 '-장이', 그 외에는 '-쟁이'를 쓴다. 간판장이·대장장이·미장이·도배장이·땜장이 등이 모두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다. 개구쟁이·거짓말쟁이·겁쟁이·멋쟁이·뚜쟁이·월급쟁이 등은 성질·습관·행동 또는 직업을 나타내는 단어들이다. '점쟁이'는 기술자로 볼 수 없으므로 '쟁이'로 쓴다. '관상쟁이'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점쟁이를 찾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지만, 그 수가 늘었다면 그만큼 현실이 어렵다는 얘기가 아닐까.
배상복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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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2차대전 중에 열대 밀림 한복판에 있던 일본군의 포로수용소에는 늘 짙은 어둠이 가득했습니다. 전기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지독한 무더위와 살인적인 배고픔 때문에 포로들의 얼굴에는 이미 검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식량이 거의 공급되지 않았던 수용소에서 쥐를 잡아먹었다면 큰 행운이라고 부러움을 받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수용소 안에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인으로 가방 깊숙한 곳에 양초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절친한 단 한 명의 포로에게 그 양초가 가장 위급할 때 중요한 식량이 될 것이라면서 이같은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친구에게도 꼭 나눠주리라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 고백을 들은 포로는 그 뒤부터 혹 친구가 양초를 혼자 다 먹어 버리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밤마다 가방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날 한 포로가 서글픈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어느새 크리스마스를 맞게 됐군. 내년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보낼 수 있었으면...."
그러나 배고픔에 지친 포로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밤, 양초가 든 가방을 괴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던 그 포로는 친구가 부시시 일어나 조심스럽게 가방 속에서 양초를 꺼내들자 친구가 자기 혼자만 양초를 먹으려는 줄 알고 놀라서 숨을 죽이고 지켜봤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양초를 꺼내 판자 위에 올려 놓고 숨겨 놓았던 성냥으로 불을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오두막 안이 환해졌습니다. 포로들은 작고 약한 불빛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에서 깨어난 뒤 하나둘 촛불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촛불은 포로들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습니다. 그때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은 없습니다."
촛불은 활활 타올라 점점 커져서 포로들의 마음까지 비추는 듯했습니다.
"우리 내년 크리스마스는 반드시 집에서 보내자구."
누군가 또 이렇게 말하자 포로들은 환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 뒤, 서로의 소원을 얘기했습니다. 그 날 그렇게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던 포로들은 아무도 배가 고픈 줄을 몰랐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갖지만, 희망은 언제나 실망과 맞붙어 있는 것이어서 실망하게 되면 풀이 죽고 만다. 희망을 질러 나아가고, 잃지 않게 하는 것은 굳센 용기뿐이다. (양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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