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일반인 10명 중 7명은 서점들이 발표하는 베스트셀러 목록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이는 소비자시장조사 전문기업인 매경리서치 C-NEWS와 여론조사 전문기관 엠브레인이 지난달 1-15일 전국 남녀 601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4.0%)를 한 결과다.
5일 C-NEWS의 자료에 따르면 응답자의 74.4%가 "베스트셀러 목록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그 이유로는 '내 성향과 맞지 않아서'(39.6%), '특정 출판사의 마케팅 영향일 것이기 때문'(39.2%), '서점의 자의적 판단일 것이기 때문'(13.8%) 등이 꼽혔다.
책 구입처는 인터넷서점(38.3%)이나 대형서점(28.3%)이 대부분이었고 '경우마다 다르다'는 응답이 19.6% 였으며 동네서점은 6.3%에 그쳤다.
1년에 책 읽는 양은 1-3권이 28.0%로 가장 많았고, 4-6권이 23.3%, 13권 이상이 18.6% 등이었으며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응답이 3%였다.
책을 읽지 않는 이유로는 '시간이 없어서'라는 응답이 50.5%로 가장 많았으나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아서'라는 응답도 33.3%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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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의 풍토성
농경 생활 용어 1 - 북돋워 주고 헹가래치고
현대를 산업화 또는 정보화시대라 규정하지만 한국 문화 속에는 아직도 농경시대의 유습이 뿌리깊게 남아 있음을 본다. 수천 년 동안 지속된 농경 생활에서 우리의 언어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니 우리말 속에 남아 있는 이런 흔적들을 농경 용어라 이름한다. "짓다"라는 말처럼 농경 용어를 대변하는 어휘가 또 있을까. 농사만 짓는게 아니라 집도 짓고 옷도 짓고 밥도 짓는다고 한다. 의식주 전반에 걸친, 그야말로 생산과 창조의 근원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짓(작)과 집(가)이 같은 어원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짓"은 사람에게도 달라붙어 지아비, 지어미라 하여 부부의 호칭으로도 활용된다. 지아비가 노래하면 지어미는 따라 부른다는 부창부수라는 숙어도 남편과 아내가 모두 농사일에 종사한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 같다. 자연에 순응하여 식물에 열매를 맺게 하는 작업, 이 농사일을 일러 "여름짓다"라고 한다. 또한 이 일에 매달리는 농부를 "여름지슬(을)아비"이라 하여 곧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쓰인다. 농작물을 가꾸는 일만이 짓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도 짓는 일로 여겼다. "자식농사"도 그래서 생긴 말이며, 이와 관련하여 교육에 해당하는 "가르치다"란 말도 농사일과 같은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교육이란 바로 심전의 밭을 갈고(경 또는 마), 가축을 치듯(육) 정성을 다해 후세를 기르는 일이다. 거칠고 메마른 마음의 밭을 갈고 북을 돋우고 물과 거름을 주어 가꾸는 작업, 가르쳐 일깨우고 힘과 용기를 더해 준다는 "복돋우다"라는 말도 이와 다름 아니다. "북"은 초목의 뿌리를 덮고 있는 흙덩이를 이름이다. 북을 돋운다는 말은 농작물의 밑동에 흙을 긁어모아 영양분이 고루 퍼지게 하며 바람에 쓰러지는 것을 막아 주는 일이니, 자식을 키우고 이를 뒷바라지하는 일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재배라는 한자어의 배에 해당된다고 할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 용어도 모두 농사일과 결부되어 있고, 동서남북 네 방위를 주축으로 하는 바람의 이름도 농사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현대인들이 즐기는 바둑의 기원도 역시 농사짓는 일에서 찾을 수 있다. 바둑이란 "밭돌(독)", 곧 네모 반듯한 밭에다 희고 검은 돌을 번갈아 놓은 데서 유래한 말이다. 아울러 개를 부르는 보통명사 "바둑이"도 털무늬가 바둑판의 희고 검은 모습을 닮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찧고 까분다"는 말도 농사 용서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가실할(추수할) 때 거둬들인 곡식을 방아나 절구에 넣어 찧기도 하고, 키에 담아 까분다는 데서 이 말이 생겼다. 지금은 함부로 경솔하게 군다는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이지만 본뜻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팽개친다, 평미리친다, 헹가래친다"등 이른바 "치다"류 어사들도 농사일에서 유래하였다. 팽개치다, 곧 하던 일을 중도에서 포기한다는 "팽개"는 본래 "팡개질"에서 나온 말이다. 팡개는 곡식이 여물 무렵 새를 쫓는 데 쓰이는 대토막을 이름이다. 이 대토막의 한 끝을 네 갈래로 쪼개어 작은 막대를 물려 동였다. 이것을 흙에 꽂으면 그 틈새로 흙덩이가 끼이게 마련인데, 이를 휘두르면 흙덩이가 퉁겨 나가면서 새를 쫓게 되는 것이다. 평미리치다의 평미리(레)는 됫박이나 말에 곡식을 담고 그 위를 평평하게 고를 때 사용하는 방망이를 말한다. 곡식의 분량을 잴 때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고봉이라 하여 되 또는 말에 수북이 담는 경우와 평미리쳐서 담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평미리친다는 말은 매사를 평등하게 처리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헹가래친다는 말은 항용 운동 경기에서 쓰는 말이다. 시합에서 이긴 경우 선수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높이 쳐들어 공중에 헹가래침으로써 기세를 올리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한다. 헹가래질은 본래 가래로 흙을 파기 전에 빈 가래로 손을 맞춰 보는, 일종의 예행 연습인 헛가래질에서 유래한 말이다. 사람을 들어올릴 때도 거기 참가하는 사람들의 호흡이 맞아야 하는 것처럼 가래질에도 손발을 맞추는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헹가래치는 장면을 보면서 필자는 가끔 불안감을 느낀다. 한 사람을 높이 던져 놓고 뭇사람들이 일시에 빠져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 말이다. 물론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아무튼 헹가래질을 보면 서 이들 농경 용어들을 우리릐 실생활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어린 새싹들을 가르쳐야 하고, 부정한 일은 과감히 팽개쳐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모든 여건이 평미리쳐야 한다. 여기게 곁들여 우리 사회에 헹가래칠 일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다만 모두가 합심하여 들어올린 지도자가 졸지에 추락하지 않게 자리를 지키며 끝까지 복돋워주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
이름 부르기
명함 주고받기가 만남의 의례로 굳어진 지도 제법 된 성싶다. 아는 이도 신상·연락처 변동이 있다며 명함을 준다. 이름에 하는 일, 직장·직책, 전화번호·전자우편·주소가 곁들인다. 전자명함도 유행이다. ‘이름’(성명)이 사람에 버금가는 존재가 된 셈이다. 이름은 지칭·호칭으로 두루 쓰인다. 사람을 부르는 방식에는, 성과 이름 따로 부를 때, 성명을 아울러 부를 때 등 셋이 있고, 어이·야·여보 … 따위로 부르기도 한다.
“홍길동·길동·홍, 홍길동씨·길동씨·홍씨, 홍길동 과장님·(길동 과장님)·홍 과장님, 홍길동 선생님·(길동 선생님)·홍 선생님.”
아이들 기준으로는 이름만 부르는 게 제일 자연스럽다. 부름토 ‘아/야’나 ‘이’는 이름만 떼어 부를 때 붙인다. ‘씨’를 붙여 직접 사람을 부를 때는 맞먹는 사이나 아랫사람이 아니면 어울리지 않는다. 성만으로는 부름말이 못되고, ‘씨’를 붙여도 낮잡는 느낌을 주므로 삼가야 한다. 성만 쓸 때는 직함·존칭을 넣어 불러야 한다. 성만 쓰는 방식은 서양식이다. 제3자를 일컬을 때나 글에서는 성에 씨를 붙인 말도 가끔 쓰기는 한다. 부장님·선생님은 ‘성명·성’과 어울리고 ‘이름+직함, 이름+존칭’은 어울리지 않는다.
지난 세기 이전에는 이름 대신 자(字)나 호(號), 택호를 지어 불렀다. ‘씨’(氏)는 20세기 이전에는 쓰이지 않던 혹 같은 존재로, 소리도 뜻도 재미가 없다. 이를 대체할 좋은 말이 ‘님’이다. 아무튼 평생 이름 하나로 불리는 시대가 됐으니 이름을 잘 짓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안겨오다
‘안겨오다’는 ‘안기다’와 ‘오다’가 합친 말이어서 남녘에서는 두 낱말로 보아 ‘안겨 오다’로 띄어 쓴다. 북녘에서는 ‘안겨오다’를 하나의 낱말로 보아서 사전에 싣고 있는데, ‘안기다’와 ‘오다’에서 온 뜻에서 파생된 다른 뜻으로도 쓰인다.
“그때의 오수동의 모습이 이 총각에게서 그대로 안겨오는것이다.”(갑오농민전쟁 1) “보고를 들으니 전면모가 뚜렷이 안겨오다.”(우리말글쓰기 연관어대사전)
‘오수동의 모습이 안겨온다’는 것은 오수동으로 착각할 만큼 총각의 모습이 오수동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안겨온다’는 표현은 ‘이 총각을 보고 오수동의 모습을 떠올렸다’거나 ‘이 총각이 오수동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오수동을 떠올린 느낌’이 강하면서도 감각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안겨온다’는 것은 총각의 모습에서 오수동의 모습이 떠오른 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에게 안기어 오는 것처럼, 인상적이면서도 뚜렷하게 연상되었다고 생각된다.
‘전면모’(全面貌)는 ‘전체의 모습이나 상태’를 말한다. ‘전면모가 안겨온다’는 것은 ‘잘 이해된다’는 뜻이다. “울창한 숲이 그림처럼 안겨온다”와 같이 어떤 풍경이 안겨온다면, ‘한눈에 환히 보이는 것’이다. “진한 감동이 마음에 안겨온다”와 같이 심적인 느낌이 안겨온다면, ‘마음속 깊이 느껴지는 것’이다. “찬바람이 안겨온다”와 같이 ‘바람이나 비, 냄새’ 등이 안겨온다면 ‘흠뻑 느껴지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
맞춤법 비켜가기
검사들과 법(法)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2003년 3월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가리킴). 법은 지키려고 만든 건데 일반인이나 법조인 모두 잘 모르는 법이 하나 있다. 우리말 맞춤법이다. 왜. 너무 어려우니까. '법 없이 살 사람'이란 말이 요즘에도 칭찬일까. 요령 없다는 얘기나 듣는 건 아닌지.
맞춤법 지식 없이도 살 요령을 몇 가지 배워 보자. 며느리를 찾는 어머니에게 아들이 말한다. '①오이소박이 담그느라 ②한창 바쁘거든요. ③기다려 주십시오.' 말하기는 쉽지만 이처럼 표기법에 맞게 쓰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요령을 부려 보자. ①오이소배기는 틀린 말이다. 오이에 소를 박았다고 생각하자. '박다'의 뜻이 살아 있는 붙박이·점박이·차돌박이가 그런 예들이다. 한 살박이는 나이가 박거나 박히는 게 아니므로 한 살배기로 써야 한다. ②한참인지 한창인지 헷갈리는 경우다. 아래 예처럼 '~'자리에 '한참 동안'을 넣어 보자. 말이 안되면 한창으로 써야 한다. '공사가 ~인 아파트, 벚꽃이 ~이다'(한창), '~ 기다리다, ~을 걸어가다'(한참) ③'주십시요'가 아니라 '주십시오'다. 말 끝에 '요 ' '-오'가 올 경우 '요'나 '-오'를 생략해 보라. '바쁘거든(요)'처럼 빼버려도 말이 되면 '요'가 맞다. '주십시-'는 말이 안되므로 '오'로 써야 한다.
김승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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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한 걸음 진보하기 위해서
1992 년 8월 25일 낮 12시 30분, 서울대학 병원에서는 여느 때와는 다른 감동의 집도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입을 굳게 다물고 눈물을 삼키며 비장한 각오로 집도하고 있는 교수들은 고인의 뜻에 따라 안구를 떼내어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고, 암세포가 퍼진 것으로 밝혀진 간, 폐, 심장 등의 장기들은 병리학 교실의 연구자료로 쓰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의과대학에 시체를 기증키로 했으니 불의의 사망시 대학병원쪽에 연락 바람'이라는 내용의 유언서를 신분증과 함께 가지고 다닌 서울대 이광호 교수는 이 날 오전 10시 급성 신장암으로 운명했습니다. 그래서 고인의 뜻에 따라, 장남이 자리한 가운데, 후학들을 위하여 몸을 바치고 있는 살신성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해부학 발전에 몸바쳐 오다 최근 의과대학 해부실험용 시체의 공급이 급격히 줄어들어 실습에 차질을 빚게 되자 지난 1월 서울 지역 9개 의과대학 해부학과 교수 34 명과 함께 시신을 해부용으로 내놓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로 인한 이 날의 숭고한 집도는 허준이 '동의보감'에서 의술 발전을 위해 남긴 스승의 시신을 눈물과 함께 해부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에게 참 삶의 고귀한 가치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기증 의사를 듣고 사체를 손상시키는 것은 우리의 전통에 어긋날 뿐 아니라,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욕심이 들어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평생을 바쳐온 의학계의 발전에 죽어서까지 이바지하겠다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막내따님의 너무나도 소박하고 애틋한 이야기가 마치 가까운 이웃에서 들리는 듯합니다만, 죽어서까지 남을 위하고, 죽어서까지 할 일을 하는 이들의 용기와 귀한 생각을 우리는 얼마나 닮아가고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분들에게 영원히 갚기 힘든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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