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의 풍토성
명절, 절후 용어 3 - 외래 명절과 고유 명절
어느 해인가 정월 대보름과 "발렌타인데이"가 겹친 때가 있었다. 그때 모 신문에서 "부럼과 초콜릿의 한판 승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승부는 단순히 두 상품의 판매 경쟁을 넘어서서 고유 명절과 외래 명절의 한판 대결이기도 했다. 두 상품의 판매 경쟁은 아쉽게도 초콜릿의 압승으로 끝났다. 전통 민속이 상업적인 외래 풍물에 백기를 들고 만 것인데, 이를 두고 필자는 초콜릿을 팔아 주는 행위가 민족의 혼을 파는 일이라면서 분개했다. 사랑 고백을위한 것이라지만 초콜릿 같은 서양 식품이 건강에도 좋은 고유 식품을 몰아낸 일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발렌타인데이가 본래 장삿속에서 유래한 행사가 아닐진대 어쩌다가 "연인의 날"로 둔갑하여 이 땅에서도 값비싼 수입 추콜릿을 먹어야 한단 말인가. 외신에 따르면 멀리 있는 연인을 위해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 간접적으로 키스 체험을 느끼게 하는, 이른바 "사이버 키싱"이라는 상품도 개발되었다고 한다. 서양풍이라면 덮어놓고 맹종하고 보는 우리네 풍조로는 이 사이버 키싱도 조만간 파급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더욱이 발렌타인데이의 상술은 초콜릿만으로 그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한 달 후인 3월에는 "화이트데이"라는 이름으로 사탕을 내놓고 어린 고객들의 주머니를 노린다. 내세우는 구실은 그럴 듯하다. 앞서 여자친구가 준 초콜릿 선물에 남성이 사탕으로 답례한다는 그럴듯한 얘기다. 뿐만 아니라 한술 더 떠서 4월에는 "엿데이"라는 괴상한 날을 만들자는 제안도 있다. 말하자면 메아리 없는 사랑 고백에 대해 "에라, 엿이나 먹어라!"하며 바람맞은 자가 보복을(?) 가한다는 것인데, 어떻든 스토리까지 갖춘 명절 상술도 이 정도에 이르면 가히 경지에 들었다고 할까.
우리 민족에게 연인의 날이 있다면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경칩이 되어야 마땅하다. 음력으로는 2월중이지만 양력으로는 3월 5일경으로 화이트데이와 근접한 무렵에 해당된다. 예로부터 경칩일은 사랑을 나누는 날이었다. 이 날 해가 저물면 동네 처녀, 총각들이 동구 앞 은행나무 주변을 맴돌면서 서로의 속마음을 표시하곤 했다. 다 아는 대로 은행나무는 암수가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 그야말로 격조 높은 사랑의 나무다. 은행나무의 열매, 곧 은행알은 예사로운 열매가 아니다. 나무 주위를 돌며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였던 이들이 함께 은행알을 나눠 먹었다면 이는 사랑이 결실을 맺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제 경칩을 우리 고유의 연인의 날로 정하고 초콜릿이나 사탕 대신 잘 구운 은행알을 나눠 먹게 하면 어떨까? 이렇게 하는 것이 어줍잖은 외래 풍조를 배격하고 우리 것을 찾는 지름길이라 생각되기에 하는 말이다.
세밑이나 성릉 맞는 풍속도 마찬가지다. 한 해의 밤을 마지막으로 지운다는 섣달 그믐밤을 제야 또는 제석이라 한다. 이 섣달 그믐 곧 세밑(본래는 설밑 또는 설아래)을 각종 "세시기"에서는 신일이라 적고 있다. 신일이란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인데, 이런 뜻 깊은 날을 요즘처럼 해외 여행이나 풍치 좋은 유원지에서 흥청거릴 일은 아니라고 본다. 세밑, 곧 신일은 새해라는 시간 질서에 맞추기 위한 준비 기간에 해당한다. 예전에는 실제로 외양간을 치우기도 하고 부뚜막을 손질하기도 하며 밭에 해묵은 거름을 퍼내는 등 집안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또한 묵은 세배를 올리고 해지킴(수세)라 하여 집안 곳곳에 불을 밝히고 첫닭이 울 때까지 밤을 새우곤 했다. 특히 마당을 쓸어 티끌을 모아 모닥불을 피우는 것은 모든 잡귀를 물리치고 새해를 맞는다는 신앙적 의식이 깃들인 행사였다. 조상들이 맞은 이런 신일과는 달리 현대인들은 그믐날 공연한 일로 바쁜 시간을 보낸다. 한 해를 마무리 짓고 묵은 해를 보낸다는 송년회라면 그런대로 괜찮다. 뭐가 그리 잊어야 할 일이 많은지 망년회라는 이름으로 술자리를 펼치고 술기운으로 흥청망청 헤매기 일쑤다. 얼마 전까지 성탄을 전후한 세밑은 마치 지구의 종말이라도 온 듯 그야말로 광란의 밤이었다. 지난 시간도 소중한 법인데, 그렇게 깡그리 잊는다고 좋은 일만은 아닐 게다.
1999년 12월 31일, 1천년대의 마지막 밤 광화문 네거리에서의 행사 역시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남들처럼 우리도 꼭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화려한 굿판을 벌여야만 했을까 묻고 싶다. 그것도 시민이 배제된 유명인사들만의 행사를 말이다. "밀레니엄"이라는 용어 사용부터 좀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새천년"이란 쉬운 말도 있고 또 조금만 성의를 보인다면 "즈믄 해"라는 멋진 고유어를 찾아 쓸 수도 있다. 즈믄이란 천을 뜻하는 옛말로서 고려가요를 비롯한 옛 문헌에 즈믄 해, 즈믄둥이라는 말이 쉽게 발견된다. 서기를 연호로 삼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라 어쩔 수 없다지만 새 천년을 맞는 행사만은 우리 식에 따랐어야 했다. 정말 새 천년에는 초콜릿보다는 은행알을 나눠 먹고, 쾌락의 밤을 지새기보다는 근신의 밤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
해오라기난초
풀꽃이나 이를 박은 사진을 보면, 탄성이 절로 날 때가 있다. 사람이 만든 어떤 예술품도 신의 수준을 절대 따라가지 못하나니, 어쩜 이렇게 생길 수가! 할 정도로 빛깔·모양이 멋지고 신기한 것 중에 ‘해오라기난초’가 있다. 활짝 핀 모습이 날개를 펴고 나는 해오라기를 닮았다. ‘해오라비난초’라고도 하는데, ‘해오라비’는 ‘해오라기’의 경상도 고장말이다. ‘해오라기’의 ‘해’는 ‘희다’와 통한다. 이는 ‘풀’에서 ‘푸르다’가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해’에서 ‘희다’가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라기’는 해오라기가 ‘해오리’로도 불린 것을 보면, ‘오리’와 연관된 말일 수 있겠다. ‘해오라기’를 백로(白鷺)로 일컫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백로·해오라기·왜가리는 다르다. 백로는 이 셋을 통틀어 이르며, 흔히 까마귀와 맞견주는 백로가 실은 중백로인데, 이 꽃은 해오라기보다는 중백로를 닮았다. 날아가는 해오라기보다 꽃이름이 더 멋진데, 실제로 그 모습까지 금방이라도 꽃대에서 날아오를 듯한 까닭이다. “해오라비조는 곁에서/ 물뱀의 새끼를 업고 나는 꿈을 꾸었다”는 백석의 시 ‘늙은 갈대의 독백’처럼 동물과 식물이 소통하는 자연의 어울림을 여기서 본다.
[해오라기난초]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한내와 가린내
<열녀춘향수절가>에는 암행어사 이몽룡이 전라도 초읍인 여산에서 일행을 세 갈래로 나누어 떠나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한 갈래는 진산·금산·무주·용담·진안·장수·운봉·구례로 돌아드는 서리패들의 전라 좌도고, 또 한 갈래는 용안·함열·임피·옥구·김제·만경·고부·부안·흥덕·고창·장성 등을 거치는 중방 역졸패의 우도다. 그리고 한 패는 종사들로 익산·금구·태인·정읍·순창·옥과·광주·나주·창평 등지를 거치도록 하였다. 자신은 헌 파립과 망건을 의뭉하게 차리고 삼례를 거쳐 완산 팔경을 구경하며 남원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암행어사가 거쳐 간 땅이름 가운데 “한내 쥬엽졩이, 가린내 싱금졍, 숩졍이, 공북누”가 있다. 얼핏 보기에는 쥬엽졩이, 싱금졍, 숩졍이도 땅이름처럼 보이나 이들은 ‘공북누’와 함께 정자이거나 누각임이 틀림없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 나오는 ‘한내’와 ‘가린내’다. ‘한내’는 ‘크다’의 뜻을 지닌 ‘한’에 ‘내’가 붙은 말로 ‘대천’에 해당한다. 지금의 대천은 충남 보령이므로 춘향가에 나오는 대천과는 관련이 없다. 달리 말해 ‘큰 내’를 뜻하는 ‘한내’도 보편적으로 널리 쓰인 땅이름이다.
‘가린내’는 ‘한내’와는 대립적인 뜻을 갖는 말이다. 이 말은 ‘가늘다’의 다른 형태인 ‘가ㄹ.다’(‘가루’의 어원)에 ‘내’가 붙은 말이다. 곧 ‘가는내’ 또는 ‘가ㄹ.ㄴ내’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런 뜻의 ‘가린내’는 제주도 한림읍 금악리에도 있다. 비슷한 형태로 좁고 가는 골짜기를 뜻하는 ‘가는골’도 산골 마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생물·화학무기
시사용어를 바르게 표기하자는 독자의 편지를 받았다. 요즘 이라크 전쟁 기사에 자주 나오는 '생화학무기'란 용어는 적절한 표기가 아니라며, 생물무기와 화학무기를 통틀어 말할 땐 '생물·화학무기'나 '화·생(전)무기'로 써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생화학(biochemistry)'은 생물학 용어로 '생물체의 생리적 현상을 화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환경오염 기사에 자주 나오는 생화학적 산소요구량(BOD)등에 쓰이는 말이지 '생물학+화학'을 뜻하는 합성어가 아니다. 핵무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조가 쉬워 '가난한 나라의 핵무기'라고도 불리는 생물학무기·화학무기는 하나로 묶어 표기할 때가 많다. 영어로는 어떻게 표현할까? 미국 신문에서는 일반적으로 'biological and chemical weapons''biological or chemical weapons'(생물학·화학무기)로 표기한다. 전문어(전문용어)는 학술이나 기타 전문 분야에서 특별한 의미로 쓰이는 말인데, 특별한 의미로 쓰더라도 이왕이면 조어법에 맞게 써야겠다. 잘못을 지적해준 독자에게 감사드린다.
김진선 교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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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구령 맞춰 하나 둘
미국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선생님이 아이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장선생님이 오신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황색, 붉은색, 밤색 피부의 아이들을 차례로 세웠으며 흑인 아이들을 제일 끝에 세웠습니다. 줄을 다 세워 놓고 보니 만족스럽지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을 맨 앞에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아이들을 해산시키고 다시 줄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다시 줄을 세우려고 아이들을 뒤섞어 놓았을 때 교장선생님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기도 전에 교장선생님이 오시다니, 큰일이었습니다. 이것저것 따질 틈이 없게 된 선생님은 아이들을 뒤죽박죽 있는 그대로 세웠습니다. 이윽고 교장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섰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은 흡족한 표정으로 백인 아이며, 흑인 아이들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장 선생님이 다녀가신 후 선생님은 고개를 들고 아이들을 바라봤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종전과 달리 선생님의 눈에 비친 아이들은 서로 다른 피부를 가진 아이들로 구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녀가 사랑하는 여러 어린이들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함께 어울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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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책, 다시 채석강 - 문인수(1945~ )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바다 파도 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이다.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 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책,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누군가 그리워 잠 못 이루는 밤. 파도 소리는 그리움을 더 재촉할 뿐이다. 나는 가슴에 품고 있던 '너라는 책' 한 권을 펼쳐놓고 읽는다. 그리움의 책장을 자꾸 넘겨도 정지되는 페이지! 아무리 넘겨도 그리움 때문에 책장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않는다. 눈물만 무진장 글썽여질 뿐이다. 바다가 보이는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풍경이 어쩜 이토록 생생하고 가슴 저릴 수 있을까.
정호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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