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의 풍토성
명절, 절후 용어 1 - 어정 칠월 동동 팔월
"어정 칠월 동동 팔월"은 절후와 관련된 우리말 속담이다. 농가에서 7월은 하는 일 없이 어정거리기만 하고 대신 8월이면 갑자기 바빠져 동동거리기에 이런 말이 생겼다. 동동 팔월을 때로 "건들 팔월"이라고도 하는데, 8월은 농사일로 바쁘긴 해도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건들바람처럼 그렇게 훌쩍 가버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릿고개"의 말뜻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게다. 묵은 곡식은 바닥이 나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음력 4~5월, 세상에서 가장 넘기 어렵다는 이 보릿고개를 "깐깐 오월"이라 부르기도 한다. 춥고 배고프고, 그래서 기억하기조차 싫은 춘궁기지만 그래도 보릿고개라는 이름만은 참으로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절후에 대한 인식이나 명칭은 이처럼 농사일과 결부되어 있다. 고달픈 삶이었지만 조상들은 그 속에서도 여유와 멋을 잃지 않았고,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는 과정에서 섬세한 계절감은 느끼고 살았다. 이른 봄 쌀랑한 추위를 일컫는 "꽃샘"이라는 말이 그 좋은 예가 된다.한겨울 추위보다 더 고약한 봄추위에 어떻게 이처럼 멋진 말을 붙일 생각을 했을까 싶다.
꽃이 피기 전 새싹을 시샘하는 "잎샘 바람"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 유명도에서 꽃샘 바람이나 꽃샘 추위에 미치지 못한다. 아름다움의 상징인 꽃은 일기 용어 여기저기에서 얼굴을 내민다. "바람꽃"이라는 말이 있다. 먼 산에 구름이 끼듯 하늘을 덮는 뿌연 기운을 이름이다. 눈부신 설경을 일러 "눈꽃"이라 하고, 수증기가 서려 차창에 엉긴 무늬를 가리켜 "서릿꽃"이라 추어준다. 뿐인가, 무지개를 보는 한국인의 시각 역시 별난 데가 있다. 무지개는 물의 지게, 즉 물로 된 문을 뜻한다. 불어의 "아르켄시엘"은 하늘의 아치라는 뜻으로 단순한 시각적 표현에 불과하고, 영어의 레인보우"는 비의 활(궁)이라는 뜻으로 다분히 전투적인 냄새를 풍긴다. 무력에 의해 침략이나 일삼던 그들의 눈에는 무지개마저 공격용 활로 보였던 모양이다. 우리말 무지개는 그것이 물로 된 문만이 아니라 용궁이나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뜻하기에 이 말 속에는 우리의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이른 봄 먼 산에서 꿈결처럼 아롱거리는 "아지랑이"라는 말처럼 무지개도 그 본뜻을 곰곰이 되씹어 보면 참으로 아지랑이처럼 시적이다.
비(우)의 이름은 더욱 다양하고 섬세하다. 는개, 이슬비, 가랑비, 보슬비 등에서 보듯 비도 내리는 철이나 양에 따라 독특한 이름은 가진다. 이 가운데 "는개"는 안개보다는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가장 적게 내리는 비를 이름이다. "는개 속을 거닐며 옷 젖는 줄 몰랐다."는 표현이 어느 소설에 나오지만 요즘 사람들이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는지 모르겠다. 모심기 철에 때마침 오는 단비를 "모종비"라 하고, 볕이 든 틈새를 이용하여 잠깐 뿌리는 얄미운 비를 "여우비"라 한다. "심술비"라는 것도 그렇지만 억수로 퍼붓는 "작달비", 장대처럼 쏟아 붓는 "장대비"란 이름도 여우비만큼이나 재미있다.
요즘 "썰렁하다"는 말이 여러경우에 쓰인다. 저희들끼리 웃겨 좋고 별 반응이 없으면 "썰렁하다"면서 객쩍은 웃음을 짓는다. 의도하는 대로 분위기가 잡히지 않았다는 얘긴데, 어떻든 이는 날씨 묘사가 일반적인 분위기 쪽으로 의미 영역을 넓힌 것이다. 산산하다, 선선하다, 살랑거리다, 설렁대다, 산뜻하다, 쌀랑하다, 으스스하다, 오싹하다 등의 형용사도 비단 날씨 묘사만으로 쓰이지 않는다.
바람의 이름 또한 다채롭기 그지없다. 어촌이나 농가에서 동서남북 방위에 맞춰 불어 주는 샛바람, 하늬바람, 갈바람, 마파람, 된바람, 높새바람 이외에도 계절 감각과 관련된 이름은 얼마든지 있다. 이른 봄 살 속으로 파고들어 소름이 돋는 "소소리바람", 뒤에서 부는 "꽁무니바람", 이리저리 제멋대로 불어오는 "왜바람", 문풍지에 뚫린 바늘구멍에서 새어 드는 "황소바람", 못자리를 만들 무렵 실없이 부는 "피죽바람"등도 재미있는 바람 이름이다. 피죽바람은 그 무렵에 이 바람이 불면 피죽도 얻어 먹기 어렵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반면 "솔개그늘" 이라는 멋진 구름 이름도 있다. 흐릿한 구름의 그림자로서 대게 음력 2월 스무날에 날씨가 흐리면 풍년이 든다 하여 소리개(솔개) 그림자만한 구름만 끼어도 농가에서는 이를 크게 반겼다.
계절이나 절후에 대한 우리말은 이처럼 단순하고 소박하다. 표현은 직설적이고 준말이 대부분이나 그 속에 묘한 감칠맛이 있다. 구름이 서서히 물러가 날씨가 개는 현상을 일러 "벗개다"라 하고, 추위가 가시면 날씨가 "눅다" 또는 "눅지다"라고 한다. "나무말미"란 말도 본디말을 찾아야 그 뜻을 알 수 있다. 이는 긴 장마 끝에 잠깐 날씨가 개어 젖은 나무를 말릴 만한 틈새를 지칭하는 말이다. 또한 "자욱하다"와 "자오록하다"의 의미상의 차이를 안다면 우리말의 섬세한 감각미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연기나 안개가 끼어 잔뜩 흐린 상태를 자욱하다고 하고, 흐릿하면서 주변이 쥐죽은 듯 고요한 상태를 자오록하다고 표현한다. "풋머리"나 "찬바람머리"도 참 운치 있는 말이다. 맏물이나 햇것이 나오는 철을 풋머리라 하고 늦가을에 싸늘한 냉기가 감돌 때를 찬바람머리라 한다.
먼동이 튼 뒤 서녘 하늘에 남은 달, 곧 "지새는 달"이라는 표현은 자못 시적이다. 어느 소설에 "해미를 뚫고 햇귀가 떠오른다."는 구절이 나온다. 바다를 덮은 짙은 안개를 "해미"라 하고 해가 막 솟을 때 처음 발하는 빛은 "햇귀"라 함을 안다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느끼게 될 것이다. |
무너미·목넘이
황순원의 소설 <목넘이 마을의 개>는 한 마을에 흘러들어 온 신둥이(흰둥이)의 강인한 삶을 통하여 온갖 고난을 이겨내는 우리 겨레를 상징한 소설로 알려졌다. 소설 속의 ‘목 넘이 마을’은 사방 산으로 둘러싸여 어느 곳이든 ‘목’을 넘어야 갈 수 있는 마을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이야기 배경이 평안도 어느 마을로 설정돼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황순원이 평안도 대동 출생이니 그곳 어디쯤에 있는 땅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목 넘이 마을’처럼 ‘넘다’라는 말이 들어간 땅이름도 비교적 흔히 찾을 수 있다. 중세어에서 ‘넘다’는 ‘남다’와 함께 쓰였다. 두 말이 모두 ‘넘는다, 지나치다. 남다’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었다. 예를 들어 “백년이 하마 반이 남으니”라는 말은 “백년이 벌써 반이나 지나가니”라는 뜻이며, <석보상절>에서는 한자어 ‘과’(過)를 ‘넘다’로 풀이한 바 있다. 이는 중세어에서 ‘넘다’와 ‘남다’가 넘나들며 쓰였음을 뜻한다. 이 말이 차츰 분화하여 ‘남다’와 ‘넘다’가 전혀 다른 뜻의 말이 되었다.
그런데 땅이름에서는 ‘남다’의 의미를 갖는 것은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넘다’의 경우는 ‘너미’라는 형태로 자주 쓰인다. 예를 들어 ‘무너미’는 ‘둑이나 저수지에서 물이 넘어가는 곳’ 또는 ‘물 건너 마을’을 뜻한다. ‘목 넘이’의 ‘넘이’도 마찬가지다. ‘넘다’에 이름씨를 만드는 뒷가지 ‘이’가 붙어 땅이름으로 자연스럽게 쓰인 셈이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선과 청혼
청혼·혼인은 선택·모험이자 새삶을 여는 일이다. 책임이 따르면서 집안과 사회가 이를 우둔다. 조혼에다 번잡한 ‘육례’(六禮)를 찾던 시절엔 집안끼리 중신아비를 넣고서도 문서로 ‘허혼’한 일을 서로 감사하며 ‘사성’(四星)과 인사장이 오갔다. 허례허식 또는 겉치레가 아름다울 수 있는 법은, 옷과 같아서 통째로 벗어 던지면 남는 게 알몸과 다를바 없는 까닭이다.
전날 ‘선’은 사랑마당이나 울밖 먼발치에서 겉모습만 훔쳐 보는 정도였다. 임자와 어버이들이 얼굴을 맞대어 무게를 달고 허세를 부리기도 하는 게 요즘 맞선에 면접이다. 선이란 늘 보고 보이는 일이어서 설렘과 부끄러움이 함께하는데, ‘첫선’이란 말은 많은 것을 상품화한다.
그 이름이 갖가지인 만큼 중신어미(중매쟁이·중신아비·매파·여쾌·매온·뚜쟁이 …) 일은 예와 지금이 따로 없다. 디노블·앙세·듀오·커플라인 …들 낯간지러운 이름으로 선남선녀를 끌어대 성업을 이룬다니. 휴대전화·인터넷 소통이 별난데도 인연은 제대로 닿지 않는다는 얘기다.
남자가 청혼하는 말인즉 ‘같이 살자’인데, 썩 사사로운 일이어서 굳이 실체까지 들출 것은 없겠다. 하지만 사성(별넷)을 보내어 청혼하던 내림을 따른다면 그럴싸한 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 별님이 되어주오. 시키기만 하면 해도 달도 따다 드리리다!” 약간의 허풍은 양념이다.
인지가 높어져선지 사주(해·달·날·때)는 타고난다고 여기는 사람도 드물어졌고, 그 흔하던 ‘팔자 타령’도 듣기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행복’과 가까워 보이지는 않는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내 탓이오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다. 일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다른 핑계나 구실을 대 남에게 지우려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문장의 '잘되면 제 탓'은 '잘되면 제 덕'으로 고쳐 써야 한다. '탓'은 주로 부정적인 현상이 원인으로, 핑계·원망·책임전가의 뜻이 있으며, 덕(德)은 도덕적이며 너그러워 은혜를 준 대상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는 뜻이 있다. '이라크 전쟁 탓에 세계경기가 엉망이다' '선생님 덕에 저의 오늘이 있습니다' 등이 그 예다. 잘못 쓰인 예. '폭우로 경기가 연기된 탓에 오늘 경기는 활력이 있다'에서는 폭우가 결과적으로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니 '탓'이 아니라 '덕'이 돼야 한다. 헷갈리는 예. '희소성 탓에 부르는 게 값이다'는 사고파는 사람 중 어느 쪽이 하는 이야기냐에 따라 달라진다. 파는 사람에겐 희소성 '덕'에 값이 올라 이익이 되겠지만 사는 사람에겐 희소성 '탓'에 값이 올라 손해가 된다. 남의 탓만 하지 말고 자신의 덕을 쌓자. 종교계에서 주창하는 '내 탓이오' 란 구호는 표기도 바르거니와 잔잔하게 우리의 마음에 와닿는 좋은 말이다.
김준광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