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편운 시 백일장
조병화 시 축제에서 장차 우리 시단을 이끌어 나갈 새로운 시인을 찾습니다.
날 짜_ 2008년 5월 9일(금)
장 소_ 경기도 안성시 조병화문학관
참가자격_ 미 등단 신인
참가방법_ 아래 그림을 누르시면 페이지가 이동합니다. 이동한 페이지 상단에 첨부된 신청서를 다운받아 작품 2편과 함께 4월 18일(금) 까지 우편이나 이메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과거 발표되지 않은 순수 창작물을 대상으로 하며 주제는 자유입니다.
예심통과자는 E-mail로 개별 통보해 드리며 5월 9일 열리는 백일장에 참가할 자격을 갖습니다. 영예의 수상자에게는 상금과 상장이 수여되며 장원수상작은 2008 『꿈』가을호에 게재합니다.
예심작품 보내실 곳_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02-1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E-mail poetcho@naver.com (문의 02-762-0658)
주 최_ 조병화문학관, 안성시
후 원_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학관협회, 경기문협, 안성예총, 안성문협
시상 내역 장원 1명: 상금 50만원 및 상장 차상 1명: 상금 30만원 및 상장 차하 1명: 상금 20만원 및 상장 장려 5명: 상품 및 상장
* 대학 참가자는 해당 학교에 출석 인정 공문을 보내드립니다.
http://www.poetch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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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음료수 용어 2 - 차 한잔의 여유와 향기
다반사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항다반사, 즉 매일같이 차를 마시듯 밥을 먹듯 늘 반복되는 예사로운 일을 지칭한다. 중국인게게는 차를 마시는 일이 밥을 먹는 일보다 우선했던 것 같다. 인간의 죽음을 일컬어 우리가 "밥 숟갈 놓았다."고 표현한다면 중국인들은 "찻잔을 놓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다방에서 차를 마신다"에서 보듯 차는 "다"와 "차"로 읽힌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차의 한자음은 중국 남북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가운데 한 갈래가 서양으로 들어가 지금의 "티(tea)"가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자 차는 풀(초)와 나무(목)을 사람(인)이 달여 마신다는 뜻을 나타낸다. 불교 설화에 따르면 선의 비조인 달마가 정진을 위해 자신의 눈썹을 밀어 버렸는데 거기서 차나무가 생겨났다는 것이다.따라서 차는 명상을 지속하게 하여 모든 정념을 극복하고 깨달음의 본질을 암시하는 초월의 경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차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중국에서 차가 유행하던 당나라 초엽에 해당하며 지금부터 1천3백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울 선조들이 차맛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흥덕왕 때 대렴이 당에서 차종을 가져와 왕명에 따라 이를 지리산에 심은 이후부터라고 한다. 따라서 차라고 하면 당연히 녹차를 지칭한다. 다방은 물론 다실, 자정은 본래 녹차를 즐기던 장소였다. 고려 때 불교의 성행에 따라 궁중에 다방이라는 관청을 두었고, 차를 재배하여 조정에 바치는 다촌이라는 마을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여기에 일반인들도 차를 즐기게 되었으니 다화회라는 친목단체나 다연이라는 연회까지 두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차생활이 한때 서구화의 물결에 따라 "차 한 잔 하십시다."고 하면 으레 다방이나 까페에서 커피나 홍차와 같은 서구식 조제차를 마시자는 것으로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초에 조상께 올리는 "차례"에서도 녹차 대신 술잔을 올리다 보니 주례로 변질되었고, 흔히 다도라 하면 일본 고유의 것인 양 잘못 인식하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에는 커피에 중독되었던 사람들이 점차 우리 녹차를 찾게 되었다. "차 한 잔 합시다"라고 할 때의 차가 바로 본래의 녹차를 지칭하기에 이른 것이다. 녹차가 상품화되고 일인용 다기를 비롯한 생활 다기가 양산됨에 따라 차생활이 우리 곁으로 다가온 느낌이다. 한때 "지푸라기 삶은 물"같다던 그 차맛도 몇 번 반복해서 마시다 보니 그 본래의 맛에 접근하게 되었다. 진정한 차맛이란 어떤 것일까? 중국의 석학 임어당은 "생활의 발견"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장황하게 언급하고 있다.
"마음과 손이 함께 한가로울 때, 시를 읽고 피곤함을 느꼈을 때, 머릿속이 뒤숭숭할 때,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휴일에 집에서 쉬고 있을 때, 거문고를 뜯고 그림을 감상할 때, 명창정궤를 행할 때, 미모의 벗이나 날씬한 애첩이 곁에 있을 때, 벗들을 방문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하늘이 맑고 산들바람이 불어올 때, 가벼운 소나기가 내릴 때, 여름날 연못이 한눈에 내려와 볼 수 있는 누가 위, 조그만 소재에서 향을 피우면서 연회가 끝나고 손님이 돌아간 뒤, 사람 사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절간 같은 곳에서 차를 마실 일이다."
흔히 혼나 차를 마시면 이속이라 하고 둘이 마시면 한적이라고 했다. 차는 한적한 절간 같은 곳에서 홀로 마시는 것이 제격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 생활이 어디 그런가. 오늘의 삶이 "홀로서기"가 아닌 "마주보기"에 있는 만큼 홀로 즐기는 맛보다 이를 둘이 나눌 때 맛은 배가 될 것이다. 진정 차맛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누구와 더불어 마시느냐에 따라 맛도 달라질 것이다. 차맛에 대해서도 임어당은 "최상의 차에서 바랄 수 있는 향기는 어린애의 살결에서 풍기는 것과 같은 델리케이트한 향기"라 했다. "다경"에 이르기를 "심야산곡의 간 칸 집에 앉아 샘물로 차를 달일 때 송뢰와 같은 소리가 들리며, 이 때 피어오르는 연기 즉 다애를 맡을 때의 그 맛은 속인으로서는 도저히 가까이해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차생활의 이상향을 그렸을 뿐으로 차를 마시는 곳이 꼭 심야산곡의 절간이 아니어도 좋고, 그 곁에 미모의 벗이나 날씬한 애첩이 없어도 좋을 터이다. 그저 흉허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나 아내, 또는 가족과 더불어 하루 일을 되새겨 보거나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도 얼마든지 차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다정한 이웃과 나누는 차 속에는 따뜻한 인정이 스며 있기에 그 차맛은 고려 왕실의 어용차라고 하는 유차의 맛에 못잖을 게 분명하다. |
오누이
요즘 들어 오누이만 둔 집안이 많다. 오누이를 바꾸면 누나동생이다. 우리말에서 피붙이를 부르는 말이 가지런한데, 그 중에서 어긋나는 데가 두엇 있다. 본디 언니·아우로 계집사내를 가리지 않고 썼으나 근래 들어 ‘언니’는 여형제끼리 쓰는 말이 되었다. 대신 이 자리를 형(兄)이 차지했는데, 이 또한 사내계집을 가리지 않는다. 피붙이 사이에는 ‘님’자를 붙여 쓰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데, 형님·누님이 어긋난다. 아우 대신 ‘동생’을 만들어 쓴다.
‘언니’의 어린이말로 ‘엉가’가 있다. 언니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는 건 어린이말 ‘엉가’가 남녀 형제를 가리지 않고 썼던 데서도 알 수 있다. ‘형’을 일컫는 사투리로 ‘세이·성·성님·힝아 …’ 들이 있다. “힝아 힝아 시집살이 어떻더노/ 성님 성님 사촌성님 시집살이 어떻더노”(시집살이 노래)
오누이 또는 형제로 걸리는 사람끼리 부르는 말들도 꽤 복잡하다. 아주머님·형수님(형의 아내)↔도련님·아지뱀(시동생), 제수·계수씨(남동생 아내↔아주버님(시아주버니), 자형(누나 남편)↔처남, 매부·○서방(누이 남편)↔처남, 새언니·형님(오라비 아내)↔올케(시누), 형부(언니 남편)↔처제 ….
남매는 오누이를, 자매는 누나 ‘자’(姉) 누이 ‘매’(妹)로서 언니·아우를 일컫는데, 누이 남편이면 매부(妹夫), 누나 남편이면 자부(姉夫)가 적절하다. 실제로 ‘자부’는 잘 쓰지 않고 형뻘로 쳐서 ‘자형’이라 한다. 손위 누이의 남편이라며 매형을 많이 쓰는데, ‘매+형’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직통생
‘직통생’은 북녘말로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상급 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을 일컫는다. 북녘의 교육 과정은 남녘과 달라서, 중학교를 졸업하면 성인으로 본다. 중학교 이후에는 대학 진학, 군 입대, 직장 배치 등 세 갈래 길이 있다. 이 가운데 바로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이 직통생이다. 예비시험에서 전체 중학교 졸업생의 약 20%가 추천되고, 각 대학의 본시험을 통해 절반 정도만 직통생이 된다고 한다. 본시험에서 떨어지면 남학생은 군에 입대하고, 여학생은 직장에 배치된다고 한다.
북녘 중학교 졸업생은 남녘의 몇 학년에 해당할까? 남녘은 6-3-3-4 제도인데, 북녘은 4-6-4 제도다. 각 숫자는 ‘초등-중-고-대학교’ 혹은 ‘소학교-중학교-대학교’의 교육 기간을 뜻한다. 남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북녘 소학교는 남녘과 같이 여덟 살에 입학하나 4년제다. 북녘에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구분하지 않고, 중학교 6년제를 택하고 있다. 북녘은 초등 교육 과정이 남녘보다 2년 짧기 때문에 남녘 고등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나이에 중학교 졸업생이 된다. 북녘에서는 열여덟 살에 사회생활이 시작된다고 하겠다.
직통생이 대학원 교육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직통생은 군 입대를 면제받는 경우가 많으므로 대학 4년, 대학원 4년을 마치면 만 스물넷이다. 남녘 남자 대학생은 일반적으로 대학 재학 중 군대를 다녀오기 때문에, 스물여섯이나 스물일곱 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과정까지 마친다면 서른이 넘게 된다. 남녘에서는 고교 졸업자의 진학률이 80%가 넘는다고 하는데, 남북의 직통생 비율과 교육을 마치는 나이에 차이가 많다.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
괘씸죄
법률에 명시된 죄목에 ‘괘씸죄’라는 게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죄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죄가 없을 것이다.
‘괘씸죄’라는 말은 매우 재미있는 말이다. 이치와 논리와 인과관계를 꼼꼼하게 따지는 법률 요건을 가볍게 뛰어넘어 버리는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죄’라는 말에서 법 냄새가 약간 느껴지기는 하지만 법과는 거리가 먼 말이다. 어떻게든 혼내 주고 싶은데, 마땅히 적용할 죄목이 없는 이에게 적용하기 딱 좋은 말이다.
이 말은 ‘괘씸하다’라는 형용사 어근 ‘괘씸’에 ‘죄’가 붙어서 된 말이다. 그러니까 괘씸하게 생각되는 사람에게 지우는 죄다. 사람의 감정상 나쁜 사람은 용서할 수 있어도 괘씸한 사람은 용서하기 어렵다. ‘나쁘다’는 사회적 인식에 따른 객관적 서술이지만, ‘괘씸하다’는 개인의 감정에 따른 주관적 서술이다.
나쁜 사람은 사회적 공분을 사는 존재이지만, 괘씸한 사람은 어느 특정인의 속을 터지게 하는 존재다. ‘인간으로서 그럴 수가 있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네가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다. 이런 일은 보통 사람 사이에서 신의를 저버릴 때 일어난다.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야 예사롭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는 울화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어진다. 그렇다고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일도 아니다.
이런 울화를 풀고자 응징을 하느냐 마느냐는 것은 나중 일로 밀쳐 두더라도, 일단 ‘괘씸죄’라는 말로 상대의 배신 행위를 곱씹어 두고 싶을 것이다.
우재욱/우리말 순화인·작가
로또 복권
'인생 역전'을 표어로 내건 로또 복권은 다른 복권들의 판매량을 형편없이 떨어뜨렸다. 로또 복권 열풍이 휘몰아치자 이를 두고 도박이냐 오락이냐 하는 논란이 일었다. 사행심을 부추긴다거나 근로 의욕을 꺾는다는 비판이 있지만 '일주일간의 꿈'같은 생활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다는 의견도 있다. 나만은 여섯 개의 숫자를 모두 '맞힐'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온 가족을 동원해 야단법석을 떨지만 월요일 아침 신문의 당첨 번호와 '맞춰'보는 순간 장밋빛 꿈은 사라지고 만다. 어쩌면 인생이 다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로 돌아가자. 우리가 흔히 잘못 쓰는 '맞히다'와 '맞추다'의 차이는 무얼까? 퀴즈나 수수께끼의 정답을 알아낼 경우엔 '맞히다'를, 어떤 것을 다른 것과 나란히 놓고 대조해 보는 경우엔 '맞추다'를 쓴다. '시간을 잘 맞춰 오너라''성격을 맞춰가며 살아야지'할 때는 '맞추다'로 잘 쓰다가도 '이게 뭔지 한번 맞춰(?)봐''과녁을 잘 맞춰(?)라'에서는 영락없이 틀린다.'뭔지 맞혀봐''과녁을 잘 맞혀라'가 바른 표기다. 자기가 산 복권이 당첨 번호를 맞혔는지 꼼꼼히 맞춰 보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다.
최성우 기자 swoochoi@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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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이방인의 애국심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은 1872 년 영국의 프린스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영국의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 지에 근무하는 기자였는데 1904 년 노, 일 전쟁이 일어나자 그 사건을 취재하기 위하여 조선에 오게 됐습니다. 베델은 조선이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어질고 순박하다는 것을 알고는 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 뜻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자기가 맡은 취재가 끝났지만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조선에 머물게 됐습니다. 그는 먼저 이름을 조선식 이름인 '배설'로 고치고, 1905 년 한, 영 합판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한편 70 평생을 오직 독립운동에 몸바쳐 온 양기탁은 일본의 감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신문을 낼 수 있는 외국인을 찾던 중 베델을 만나 신문을 만들 것을 권유했습니다. 베델은 크게 기뻐하며 이를 받아들여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사장에 취임하고, 양기탁은 총무 겸 주필을 맡았습니다. 대한일보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철저히 일본에 반대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글을 실음으로써 국민들의 가슴을 뛰게 했고 애국심을 일깨웠습니다. 또한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고종의 친서를 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실어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여러 나라 원수들에게 전달하여 일본의 강압적 침략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일본 경찰은 눈엣가시 같은 베델을 본국인 영국으로 쫓아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양기탁을 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올가미를 씌워 구속했습니다. 그러나 1908 년 베델도 일본인 배척을 선동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제도를 외국인이 방해했다는 이유로 영국 총영사관에 공소되어 재판을 받고 상하이에 3주 동안 묶여 지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해 7월, 서울에 다시 돌아온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사장직을 같은 영국인 '말함'에게 맡기고 뒷전으로 물러나 독립운동을 하다 1909 년 9월에 머나먼 이국땅에서 병을 얻어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37세,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나는 죽되 대한매일신보는 길이 살아 한국 동포를 구하기를 원하노라."
그의 시신은 평소 그를 도운 장지연, 양기탁, 정대유, 박용규 등 독립지사들의 손에 의해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훌륭하게 사는 자가 오래 사는 것이다. 우리들이 나이란 햇수와 날수와 시간수로 헤아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바르타의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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