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음료수 용어 1 - 꽃 꺽어 산 놓으며 드사이다.
우리 고유의 음료수를 말한다면 단연코 숭늉과 막걸리를 빼놓을 수 없다. 숭늉처럼 우리의 민족성을 잘 드러내는 음료수도 없을 것 같다. 숭늉은 용어가 비록 한자 승랭(숭랭, 숙맹이 본말)에서 왔지만, 우리가 붙인 고유 한자어로서 고유어나 다름없이 쓰인다. 색깔이 없는 듯하면서도 사발에 따라 놓으면 마치 우리릐 피부색이나 온돌방의 장판색과도 같은 노르스름한 색이 내비친다. 색깔과 마찬가디로 맛 또한 없는 듯하면서도 깊숙히 숨어 있는 것이 숭늉이다. 오랫동안 혀 끝에 감도는 여운과도 같은 구수한 맛 말이다. 집집마다 전기 밥솥을 쓰는 요즘에는 누룽지도, 숭늉도 구할 수 없어 그 특유한 구수함을 맛볼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어느 식당에서 누룽지와 숭늉을 특별 서비스한다 하여 손님이 몰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잃어버린 맛에 대한 향수인가, 한잔의 숭늉을 통해 옛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기 위함인가. 막걸리는 창조를 뜨지 않고 걸러낸 것이기에 색깔도 맑지 않을 뿐더러 맛이 텁텁한 고유의 술이다. 한자말로는 탁주, 농주, 박주, 백주, 모주 등으로 불리나 이름 그대로 "막 거른 술"이기에 막걸리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린다. 주모를 쓰지 않고 맴쌀과 누룩에 물을 부어 그냥 발효시켜 빚은 술, 다시 말하면 인공 효소나 향료를 쓰지 않은 술이기에 어떤 한자 이름보다도 막걸리가 제격이다. 촌스럽고 투박한, 그러면서도 은근한 맛을 지닌 숭늉과 막걸리는 그 자체가 한민족의 본성을 대변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 속에 무뚝뚝한 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배어 있고 따스한 할머니의 손길이 스며 있으며, 여기에 한국인의 애환과 체취가 서려 있다고나 할까.
숭늉과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도 역시 우리식이라 할 수 있다. 누가 한국인의 스케일이 작다고 했는가? 소주는 작은 "고뿌"에 따라 홀짝이고 맥주는 글라스(컵)에 따라 마신다. 양주, 특히 포도주는 투명한 글라스에 반쯤 따라 조금씩 음미하면서 마셔야 격에 맞는다. 그런데 막걸리는 어떠한가? 서구인들이 반쯤 따른 포도주를 들고 코 끝으로 향내를 맛보며 고양이처럼 혀끝으로 햝을 때 우리는 대형 국사발에 철철 넘치는 막걸리를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단숨에 들이킨다. 수염에 묻은 막걸리를 손바닥에 훔쳐내며 숨을 몰아 쉬는 그 호방한 모습을 어찌 서구인과 비교하랴. 그런데 술잔을 기울이기 전에 우리 조상들은 뭐라고 외쳤울까 궁금하다. 건배 용어라 할까, 축배 인사말이라고 할까. 어떻든 이런 용어는 우리 술자리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전 문학에서도 "먹세 그려"라든가 "드사이다, 먹사이다, 듭세" 정도가 고작으로 이렇다 할 용례가 발견되지 않는다.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꺽어 산 놓고 무궁무진 먹세그려"
주선 송강 선생의 술 권하는 노래에서도 이처럼 "먹세"정도로 그치고 있다. 어느 구절을 보아도 술잔을 들고 경망스럽게 무언가 외쳐대는 말은 찾을 수가 없다. 꽃 꺽어 산 놓으며 조용히 술잔이나 비우고 그러다가 흥에 겨우면 시문이나 읊조리는, 그런 점잖고 격조 높으 장면밖에는 찾을 수가 없다는 얘기다. 음주 형태를 두고 서양의 자작과 중국, 러시아, 동구의 대작, 우리의 수작의 세 가지 형태로 나누기도 한다. 수작이란 말은 서로 술잔을 주고 받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경우 막걸리를 마시는 자리에서 사람수만큼 별로의 사발이 갖추어졌을 리 만무하다. 술잔이 적다 보니 동시에 술잔을 들어올릴 수 없으므로 하나의 잔으로 여러 사람이 돌려 가며 마셨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음주 형태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작이라 할 수 있으니, 홀로 자연을 벗삼아 자음자작하며 즐기던 유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수작이라는 말도 좋은 뜻으로 쓰이지 않는다. "수작 떨다, 수작 부리다"라고 하면 무슨 음모를 꾀하거나 말로써 경솔하게 구는 행동을 일컫는다. 술자리에서 술잔을 주고 받는 풍습이 언제부터 유행했는지 몰라도 지금은 잔도 많아지고, 또 위생적인 면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제 수작은 그만 부리도록 해야겠다.
잔을 들어 부딪치며 소리를 지르는 주법은 어디까지나 서양인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우리의 술잔인 사발은 한 손으로 들어 다른 사람의 것과 부딪칠 수 있는 그런 그릇이 못 된다. 일본의 술잔은 우리 것보다 작긴 해도 그들의 "간빠이(건배)"라는 풍습은 서양의 "브라보(bravo)" 풍습이 유입된 이후의 일이라는 게 통설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우리에게는 손윗사람 앞에서 맞술을 들거나 술잔을 들어 쨍 하고 부딪치는 행위가 애초부터 동방예의지국의 주법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인이 되어 술을 배울 때도 무릎을 꿇은 자세로 잔을 받고 마실 때도 상체를 돌리는, 그런 엄격한 주법을 배워 왔다. 어려운 분 앞에서 어찌 "브라보, 쨍!"이니 "위하여, 쨍!"과 같은 경솔한 행동을 보일 수 있겠는가 말이다. 브라보에 해당하는 우리 고유의 용어가 없음을 서운하게 여겨 "위하여!"와 같이 밑도 끝도 없는 새 말을 만들거나, 그것도 아니면 중국이나 일본의 "건배"를 수입하여 그들을 흉내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식대로 그저 "듭시다, 드십시오"라고 점잖게 권하면 "네, 드시죠."하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면 그만이다. 우리가 마시는 한잔의 숭늉, 한잔의 술은 그것이 정이요 추억이요 예절일 따름이다. |
방조하다
“선장의 사업을 방조하며 배의 항행 보장을 맡아 수행하는 기술자격을 가진 일군.”(조선말대사전)
여기서 설명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항해사’다. “항해사가 선장의 사업을 방조한다”고 하면, ‘선장이 나쁜 일을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방조(幇助)는 ‘도울 방’, ‘도울 조’이므로 ‘돕는다’는 뜻이지만, 남녘에서는 ‘나쁜 일을 돕는 상황’에 ‘방조하다’를 쓴다. 북녘에서는 부정적인 뜻 없이 한자 뜻 그대로 쓴다.
‘방조하다’에서 차이가 생긴 것은 남녘의 쓰임 변화 때문인데, 그 시기는 1950년대로 보인다. 50년에 나온 <큰사전>(한글학회) 풀이와 61년에 나온 <국어대사전>(민중서관)의 풀이에 차이가 난다. <국어대사전>에서는 ‘방조’를 ‘어떠한 일을 거들어서 도와줌. 흔히 나쁜 일의 뒤를 돕는 경우에 씀’이라고 풀이하였다. 이후 남녘의 각종 국어사전에서 ‘나쁜 일과 관련이 있다’는 풀이는 하지 않았지만, 그 예문에서 부정적인 쓰임을 보여주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긍정적인 쓰임이 없다고 보았다.
‘방조하다’가 부정적인 일에 쓰이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법률 영향으로 보인다. ‘남의 범죄 수행에 편의를 주는 모든 행위’(형법)란 뜻이 국어사전 풀이에 적용됨으로써 널리 쓰이게 되고, 낱말 쓰임이 바뀌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방조’(傍助)는 ‘곁에서 도와줌’의 뜻이다. 북녘에서는 ‘방조’(傍助)를 쓰지 않는데, ‘방조’(幇助)가 본디 뜻을 유지하면서 이를 대신하는 것 같다.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
무궁화
지난 7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높이 7.5미터나 나가는 무궁화나무가 강원도 홍천에서 발견되었다. 국립산림과학원 쪽은 나무 나이를 100년 정도로 추정한다.
‘무궁화’는 ‘목근화’(木槿花)라고도 한다. 한자 어휘집〈역어유해〉(1690)에는 ‘木槿花 무긴화/뭏긴화 ○ 무궁화’로 올렸는데, 목근화의 당시 중국음 [무긴화](현재는 무진화)와 비슷한 소리인 ‘무궁’(無窮)이란 한자를 만나면서 ‘무궁화’로 명명된 것으로 본다. 먼저 핀 꽃이 떨어지면 새로운 꽃이 이어 100일쯤이나 거듭 피고 지는 성질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고조선 때도 이 땅에 무궁화나무가 무척 많았다는 역사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오랜 옛적부터 우리나라에 자생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영원무궁이라는 겨레의 바람과도 잘 맞는 까닭에 국기가 제정되면서 국기봉을 무궁화 꽃봉오리로 정했고, 나라꽃이 됐으며, 정부의 표장으로도 삼는다.
기차 이름에서 새마을·무궁화·통일호란 등급이 거꾸로 된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고속철도가 나오면서 통일호는 사라졌다. 좋은 호텔이 무궁화 개수로 표시되고, 그 꽃이 장교 계급장 바탕으로 쓰이는 등 그 상징성이 곳곳에 살아 있다.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명량·울돌목
울돌목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친 싸움터로 이름 높다. 울돌목은 말 그대로 ‘울다’와 ‘돌다’에 땅이름을 나타내는 ‘목’이 합친 이름이다. 이처럼 땅이름에서도 일상적으로 널리 쓰이는 바탕 말이 많다. 왜군의 재침이 있던 정유년, 이순신의 <정유일기> 9월16일치에는 “갑오일 날씨 맑음. 아침 일찍 망을 보던 군사가 무려 이백여 척의 적선이 명량으로 곧바로 들어와 결진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는 기록이 들어 있다.
‘명량’(鳴梁)은 ‘울돌목’의 한자 표기다. ‘명’(鳴)이 ‘울다’에 해당하고, ‘량’(梁)은 ‘징검다리’ 또는 ‘다리’의 뜻을 가진 한자다. ‘울돌목’이 ‘명량’으로 바뀐 까닭은 ‘목’과 ‘량’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목’이란 통로 가운데 다른 곳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좁은 부분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신체의 일부인 목이나 길에서 좁아지는 부분을 나타낼 때도 이 말을 쓴다. ‘울돌목’과는 달리 ‘명량’에는 ‘돌다’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다. 그렇지만 토박이말 땅이름에서는 ‘돌다’를 갖고 있는 땅이름이 매우 많다. 시골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도랑’은 ‘돌다’에 뒷가지를 만드는 ‘앙’이 붙어 만들어진 말이다.
‘울돌목’과 ‘명량’을 견주어 보았을 때, 토박이말로 이루어진 ‘울돌목’이 한자어로 이루어진 ‘명량’보다 지형과 지세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명량해전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이 울돌목이라는 땅이름 하나만으로도 실감 있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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