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생사용어 - 삶과 죽음의 언어
숨지다, 숨이 끊어지다는 말이 죽음을 상징하듯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숨을 쉬고 있음을 뜻한다. 태초에 하느님이 흙으로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빚으시고 코에 숨을 불어넣음으로써 새 생명을 창조하셨다지 않는가. 사람은 젊거나 건강할 때는 배로 숨을 쉬고 나이가 들어 허약해지면 그 숨이 점차 가슴으로 올라오고 최종적으로 목에까지 차 오르면 생의 종말을 맞는다. 임종하는 이의 숨결을 보노라면 인간의 생명을 왜 "목숨"이라 부르게 되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숨쉬기가 지속되는 기간을 일러 "살아 있다"고 한다. 산다는 말의 "살-"은 본래부터 움직임을 뜻하는 동사로서 어떤 동작이 반복됨을 나타내는 말이다. 삶과 죽음은 동사인 "살다"와 "죽다"의 명사형이다. 인간의 생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어서 이처럼 처음부터 동사로만 존재했던 것 같다. "사람이 살림살이를 산다"는 말 속에는 "살-"이 네 번 반복된다. 삶이란 말도 그렇지만 움직임을 뜻하는 "살-"은 이처럼 많은 파생어를 만들고 있다. 삶과 죽음은 윤회성사라 하여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보기에 따라 이 둘은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 두 말에서 느끼는 정서나 어감부터 차이가 느껴진다. "살다"라는 말은 우선 "ㅏ"라는 양성모음에 "ㄹ"과 같이 흐르는(구르는) 듯한 소리받침(류음)을 가졌다. 바람이 솔솔 불고, 물이 졸졸 흐르며, 돌이 돌돌 구르는, 말하자면 항상 유전하여 영원히 지속되는 생동감이 느껴지는 그런 음상이다. 반면 "죽다"라는 말은 어떠한가. "ㅜ"라는 어둡고 무거운 음성모음에 닫히고 막히는 소리인 폐쇄음 받침이 우선 숨통을 틀어막는 듯한 느낌이다. 말하자면 오로지 적막과 부패만이 존재하는 정지 상태를 나타낸다고 할까. 생의 단절을 뜻하는, 이런 죽음의 언어를 우리는 어떻게 수용하고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놀랍게도 우리 민족은 삶보다 죽음을 앞세운다. 생사란 한자말을 우리는 "죽사리"라 하고, 목숨을 걸고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할 때도 '죽기 아니면 살기"라 하여 죽음을 앞세운다. 삶보다 죽음을 앞세울 만큼 한국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그 해답은 우리말에서 죽음이 진짜 사멸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죽고 못산다"는 말의 속뜻을 생각해 보자. 이는 "좋아 죽겠다"와 마찬가지로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뜻이 아닌가. "죽자 사자"라는 말이나 "죽여준다"는 속어도 마찬가지이다. 어린 조카를 보고 "너 죽어!"라면서 무서운 표정을 짓더라도 아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니 말이다.
누구도 죽음을 면할 수 없듯이 죽음이라는 말도 늘 우리 가까이 있다. 죽음이 두려운 만큼 억지로 가까이 두는지도 모를 일이다. 불가능한 일을 일러 "죽었다 깨도"못한다고 한다. "죽은 목숨, 죽을 상, 죽을 고생, 죽어 지내다, 죽는 소리"등등의 극단적인 표현도 기껏해야 기를 펴지 못한다는, 엄살이 반쯤 섞인 죽는 소리일 뿐이다. 우리말에서 죽음이 진정한 사멸이 아니라는 것은 사물에 대한 표현에서도 잘 들어난다. "시계가 죽었다, 돌던 팽이가 죽었다, 타던 불이 죽었다"면 단순히 사물의 죽음이요, '풀이 죽었다, 사기가 죽었다, 끝말이 죽었다"고 하면 이는 기분이나 감정의 죽음이다. 어찌 고귀한 인간에게 이처럼 감히 죽었다는 말을 함부로 쓸 수가 있을까? 인간 생명의 종식은 우리말에서 좀더 은유적이고 철학적으로 표현된다.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에 의해 이승을 떠날 따름이다. 숨을 거두고 눈을 감는 것은 세상으로 가기 위한 새로운 몸짓일 분으로 "돌아가시다"라는 죽음의 표현이 이를 잘 대변해 준다. 영어의 "go"나 "gone"과는 의미나 격이 다르다. 우리말에서 돌아가심은 인간 본래의 고향으로 귀의함을 뜻하므로 영어의 "리턴(return)"에 해당한다고 할까. 이처럼 인간의 죽음을 종교적 차원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말에도 죽음을 "가다"로 표현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골로 가다, 고택골 가다, 북망산 가다, 망우리 가다"등이 그런 예인데, 이런 속어도 영어의 "go"보다는 훨씬 나아 보인다. "골"은 시신을 담는 나무 관을 이르고, 고택골이나 북망산, 망우리는 공동묘지의 대명사로 쓰인다. "골로 가다"라는 말은 "칠성판지다"와 같이 관 속에 들어가 무덤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이다.
죽음에 관한 저속한 표현으로 "올림대를 놓다"거나 "사자밥 떠 놓았다"라는 은어도 있다. 사자밥은 저승사자를 대접하기 위해 떠 놓는 세 그릇의 밥을 말하고, 올림대는 심메마니(산삼을 캐는 사람)의 은어로서 숟가락을 지칭한다. 이 말은 흔히 말하는 "밥 숟갈 놓았다"는 속언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죽음에 대한 표현은 대체로 사망, 별세, 기세, 운명, 타계, 작고, 서거, 유명을 달리하다 등등 한자말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어떻든 이들은 한결 점잖은 표현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무래도 고유어 "돌아가심"보다는 못한 것 같다. 저승은 누구나 한 번은 가야 할, 인간의 고향, 단지 먼저 간다는 것뿐 그렇게 슬퍼할 일만은 아닐 것이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죽도록 사랑하며 멋지게 살겠습니다."
인간의 삶이 윤회를 거듭하는 것으로 믿는다면 죽음은 단지 이런 한 순간의 삶을 더 멋지고 알차게 꾸려 가기 위해 순간순간 결의를 다지는 언어일 따름이다. |
임·님
임·님은 예부터 썩 높은 이나 귀한 이를 이를 때 쓴 말이다. 임금의 ‘임’이나 사랑하는 ‘임’이 그렇고, 뒷가지로 쓰는 ‘님’도 그렇다. 임금님이라면 맏높은 말에 다시 ‘님’을 붙여 지극히 높인다. 하느님·선생님·각시님·아드님·따님·서방님·손님·도련님·마님·샌님…들은 ‘님’이 아예 들러붙어 쓰이는 말들이다. 이 밖에도 ‘님’은 인격이 있는 지칭어에 붙어 높여 부르는 말을 만든다.
어버이를 높여 부르는 말은 무엇인가? 흔히 말하는 가친·부친·춘부장·선친·선대인, 모친·자당·자친·선대부인·선비 …처럼 살아 계시거나 돌아가신 어버이를 자신 또는 남이 가려가며 일컫는 높임말이 있는데, 이런 말들은 구별하기도 쉽잖고, 또 부르는 말이 아니라 모두 일컫는 말일 뿐이다.
옛시조나 글을 보면 아버님·어머님이 보이는데, 이 역시 글말이어서 실제로 어버이를 부를 때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대체로 자신의 아버지·어머니는 달리 높여 부르지는 않고, 남의 어버이를 높여 아버님·어머님이라 부른다. 예컨대 시집 온 며느리가 시가 부모를, 또 사위가 장인·장모를 부를 때는 ‘님’자를 붙여 불러야 자연스럽다. 할머님·할아버님·아주버님·아재뱀들도 주로 시집 온 며느리 쪽에서 쓰는 말이다.
“핏줄로 계산되는 친당·척당 사람에게는 ‘님’을 붙여서 부름말로 사용할 수 없다”(려증동)는 해석도 있고, 표준화법 쪽에서도 자기 어버이를 비롯한 친척을 부를 때 ‘님’을 붙여 부르지 않는 것을 자연스런 화법으로 여긴다. 다만 편지글 등 간접적으로 격식을 차리는 글말에서 ‘어버이’에 ‘님’을 붙여 쓰는 정도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수표
현금 대신 쓰는 수표(手票)의 기원은 13세기 유럽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32년께 일본 수표법이 준용된 ‘조선민사령’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거래할 때 수표와 비슷한 ‘어음’이 널리 쓰였다. 조선 때 상평통보가 널리 쓰였는데, 무겁고 부피가 크다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서 개성 상인들은 종이에 금액, 날짜, 채무자 이름 등을 적고, 엽전 대신 사용했다. 이것이 지금의 어음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북녘에서도 ‘수표’를 사용할까? 북녘에서도 ‘수표’를 쓰는데 그 뜻이 다르다. 북녘말 ‘수표’(手票)는 ‘서명’ 또는 ‘사인’(sign)을 말한다.
“금컵 수상자에게서 기념으로 수표를 요구하다.”(우리말글쓰기 연관어대사전)
북녘에서는 수표를 서명·사인의 뜻으로만 쓰기에 보기로 든 글은 오해의 소지가 없다. 하지만 남녘말 ‘수표’로 해석하면 완전히 다른 뜻이 된다. 북녘말 ‘수표’는〈조선말사전〉(1961)에서도 확인되므로 그 이전부터 쓰이던 말로 보이는데, 남녘 사전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서명’은 북녘에서도 쓰이고, ‘사인’은 ‘싸인’으로 적는다.
한편, 예전에 쓰던 서명 방식으로 ‘수결’(手決)이 있다. ‘수결’은 ‘서명·사인·수표’와 달리 이름이 드러나는 방식이 아닌 기호처럼 쓰였다. 이는 조선 말 개항 이후 도장에 그 자리를 내줬다가 요즘의 서명(사인)으로 이어진다. 남북 두루 수표(돈)와 어음을 어음으로 통합하고, ‘사인·싸인, 수표’ 대신으로 ‘서명’으로 통일해 쓰는 건 어떨까?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
쐐기풀
‘쐐기’는 풀, 벌레, 물건 이름으로 두루 쓰인다. ‘쐐기풀’은 주로 숲 가장자리에 많이 자라서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면 흔히 따끔하게 스쳐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잎이 톱니 모양에다 포기 전체에 가시털이 나 있다. 가시에는 개미산(포름산)이 들어 있어 찔리면 쐐기한테 쏘인 것처럼 아프다. 그런데 독은 독을 이기는 법인지, 쐐기풀은 뱀독 해독제로도 쓰였다. ‘쐐기풀’은 모양과 감각이 두루 반영된 이름이다. ‘쐐기벌레’는 쐐기나방 애벌레로, 몸에 뾰족한 독침이 있어 따갑게 쏘기에 붙여진 이름일 터이다.
‘쐐기’는 물건을 고정시키거나 쪼갤 때 쓰는 쐐기(V)꼴 물건이다. 세계 글자 역사에서는 대체로 현존하는 최고의 문자로 기원전 4000년께 썼다는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를 든다. 진흙판에 글자를 새기기 때문에 쐐기같이 뾰족한 도구로, 진흙이 일어나지 않게 쐐기 모양으로 쓸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제일 훌륭한 신랑감은 의사도 판사도 아닌 ‘필경사’였다고 한다. 글자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지식과 권력의 최상층부인 시대도 있었는데, 최근 20년 사이 없어진 직업이 ‘필경사’와 ‘타자수’라는 얘기는 흥미롭다. ‘서예’는 말 그대로 미술 영역이 되었다.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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