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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84 호
단기 4341. 3. 17 (음력 2. 1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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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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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시정 고용안전 휴먼스토리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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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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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법이 발달되고 나서 사람들은 필요한 것보다두 배나 더 많은 음식을 먹는다. / 벤저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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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글터 → 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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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요람기의 용어 어화둥둥 금자둥아, 얼싸둥둥 은자둥아
왕후장상이라도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난다. "태어난다"는 말 자체가 모체의 "태"에서 세상으로 나왔다는 뜻이다. 태어난 날, 곧 생일을 달리 일컬어 "귀 빠진 날"이라 말하기도 한다. 모체에서 분리될 때 태아의 귀가 보이면 출산이 완료된 것이나 다름 없으므로 정확한 출생 시간은 바로 귀가 빠진 그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귀 빠진 날에 대해 "코 생긴 날"을 생일로 삼자는 의견도 있다. 인간이 생겨난 날, 곧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최초로 형체가 만들어진 때(잉태)를 지칭한 것인데, 흔히 말하는 비조라는 말은 여기서 비록된 것이다. 또한 생일을 "고고성일"이라고도 하는데 말하자면 고고지성을 울린 날이라는 뜻이다. 고고성은 앞서 말한 대로 아기가 세상에 나오면서 "응애"하고 우는 첫 울음을 말하는데, 이는 자신의 출현을 알리는 최초의 인간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갓 태어난 아이는 "배내짓"이라 하는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행위를 보인다. 이를테면 자면서도 방긋 웃는다거나 눈이나 코, 입을 찡긋거리는 등의 행위를 말한다. 여기서 "배내"란 말은 "배 안에 있을 때부터"라는 뜻이다. 예컨대 태어나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누는 똥을 배내똥이라 한다. 이 밖에도 배냇병신, 배냇니, 배냇머리, 배내옷 등은 여기서 파생된 말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태어나 처음 싸는 똥뿐만 아니라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누는 똥도 역시 배내똥이라 부른다는 사실이다. 용어가 같을 뿐 아니라 그것의 성분도 이와 비슷하다고 하니 세상만사가 시작과 끝, 곧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말이 과연 옳은가 보다.
갓난쟁이가 입술을 털며 투투거리는"투레질"도 일종의 배냇짓에 속한다. 투레질뿐 아니라 입으로 풀무질처럼 바람을 불어대는 "풀무질"이나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죄암질(쥐엄질)", 시도 때도 없이 오줌을 싸대는 "쉬야질", 잠들기 전이나 깬 후에 부리는 "잠투세"등도 역시 배냇짓의 일종이다. 성장하면서 아이는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불리운다. "얼뚱아기"란 말도 그런 것인데, 둥둥 얼러 주고 싶은 재롱스런 아기를 두고 이름이다. 아무리 밉둥을 피워도 세상의 모든 아기는 부모들에게 "이쁘둥이"일 수 밖에 없다. 만세를 부르듯 두 팔을 벌리고 새근새근 나비잠을 자는 모습이며, 팔다리를 휘저으며 "당싯거릴"때도 기쁘기 한량없다. 뿐인가, 문짓문짓 배를 바닥에 문지르고 기어가며 "배밀")하는 모습도, "아우타는 짓"이라 하여 먹을 것만 찾는 "밥빼기"를 할 때도, 공연히 트집을 잡아 "아망그릴"때도 그 모든 행위가 부모들에게는 오로지 귀엽고 사랑스러울 뿐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런 자식을 두고 부모들은 여러 방법으로 얼러준다. "가동질"이 그렇고 "부라질"이나 "시장질"이 모두 아이를 얼러 주는 방식을 이르는 말이다. 아이의 겨드랑이를 치켜들고 오르내리면 아이는 다리를 오므렸다 폈다 하기를 반복하는데, 이런 동작을 가동질이라 한다. 부라질은 아이를 곧추 세워 좌우로 흔들며 두 다리를 번갈아 오르내리게 하는 동작이며, 두 손을 잡고 앞뒤로 밀고 당기는 동작을 시장질이라 한다. 이때 "부라부라" 또는 "시장시장"이란 말을 반복하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생겼다. 아이가 도담도담 잘 자라 옴포동이처럼 토실토실 살이 오르면 부모는 더욱 자식 키우는 재미를 느낀다. 새순처럼 너무 연약하기에 더욱 귀엽고 앙징스럽고,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거기에 알맞은 말을 만들어 사용한다. 젖먹이가 일어나서 처음 떼놓는 걸음마를 "밟다"라 하고, 뒤뚱뒤뚱 어설픈 걸음발이 앙증스러워 "조작거리다", "자칫거리다" 또는 "아칫거리다"라는 표현을 쓴다.
자식이 똘똘이가 아니여도 좋고 지독한 똥싸개라도 아무 상관없다. 세상 부모들에게 모든 자식은 공히 "어화둥둥 금자둥이며, 얼싸둥둥 은자둥이"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아이들도 손뼉을 짝짝 맞추는 "짝짜꿍"에서 도리도리"도리질"이나 곤지곤지 잼잼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이쁜짓"을 연출한다. 부모들도 이들을 손 위에 곤두곤두 "곤두세우기"나 따로따로 혼자 "따로 서기"를 시키며 즐거워 마지않는다. 그러나 아기가 언제나 귀여운 것만은 아닌가 보다. 때로 "곽쥐"나 "먼지털음"을 할 때도 있다. 곽쥐란 아이가 쭐래둥이여서 간혹 칭얼거리며 보챌 때 이를 위협하여 달래는 방식을 이름이요, 어쩔 수 없이 한 대 쥐어박는 경우를 "먼지털음"이라 한다. 어린 것에게 어디 때릴데가 있겠는가. 엄포용으로 기껏해야 옷에 묻은 먼지나 털어준다는 뜻으로 이런 예쁜 말을 지어냈으니 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자식이 귀할수록 매는 아끼지 말라는 충고도 있다. 너무 오냐오냐하고 키우면 응석 받이에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될 수도 있다. "지지다"하고 소리치면서 만져서는 안 될 것은 못 만지게 하고, "애비다"라며 해서는 안 될 일은 못하게 해야 한다. 아이들이 크는 과정에서 으레 치러야 할 역질 따위를 "제구실"이라 이른 것을 보면 옛 어버이들은 이런 점에서 매우 현명했던 것 같다. 어렵고 힘들지만 이런 과정을 이겨내야만 사람으로서 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때로는 따끔한 매가 진정한 의미의 사랑 표현일 수 있다는 얘기다. |
촌수
갈라져 나온 곁쪽(방계)과 피마디를 따질 때 쓰는 말이 촌수다. 직계 위아래는 촌수 아닌 대수로 따진다. 방계는 애초 한집안이었다가 딴살림을 차려 새 집안을 이룬다. 가야·백제·신라·고구려가 맞서던 서기 500년대에 산 어른을 시조로 모신 집안이라면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아 50대 남짓에다, 그 아들이 여럿이라면 지금까지 갈라진 촌수가 100촌 안팎일 것으로 볼 수 있다. 지어미와 지아비는 무촌이고, 아비와 아들딸 또는 어미와 아들딸 사이가 1촌, 형제자매 사이가 2촌이다.
가까운 촌수라면 ‘삼·사·오·육·칠·팔·구·십’촌 정도인데, 두루 걸림말이 있다. 그 씨앗은 종(從·때론 당)이고, ‘재(再)·삼(三)·사(四)’를 앞에, ‘조(祖)·숙(叔)·형·제 …’를 뒤에 두어 관계를 구분한다. ‘종’ 앞에 ‘고(姑)·외(外)·이(姨)’를 둔 말이 고종·외종 들이다.
요즘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촌수말을 부름말이나 걸림말로 쓰는 사람이 적잖다. 특히 ‘삼촌’을 부름말로, ‘사촌’을 걸림말로 쓰는 경향이 그렇다. 아저씨나 친근하게 아재·외아재(외숙)로, ○○아버지(백·숙), 형님·아우( 종형·종제)로 할 것을 촌수로 부르고 일컫는 사람을 어른들은 난 데 없고 본 데 없다고 했다. ‘ 삼촌!’이란다면 ‘세 치야!, 세 마디야!’가 되고, 그 촌수에 드는 이만도 종조·백·숙·조카 등 위아래로 여럿인 까닭이다. ‘사촌’도 ‘종형제/동당형제, 내종/고종·외종·이종’처럼 걸림말을 갖추고 있으나 쉬운말은 아닌 게 문제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따발/따발총
6월25일이다. 최근 남북관계가 많이 좋아졌고 교류도 활발하지만, 57년 전 이날을 생각하면 우리는 겨레의 아픔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따발총’이 쓰였다. 따발총은 총알을 연속으로 발사할 수 있는 소련제 기관 단총이다.
따발총에서 ‘따발’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일부 남녘 사전에서는 따발총과 비슷한 말로 ‘다발총’(多發銃)을 들기도 하는데 ‘따발’과 ‘다발’(多發)은 관련이 없다. 따발총이 처음 실린 남녘 사전은 1961년 12월 발행된 〈국어 대사전〉(이희승 편)이다. 최신 낱말을 상당히 빨리 실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일이라고 하겠다. 북녘 사전에서는 62년 10월 발행된 〈조선말 사전〉(5)에서 확인된다.
‘따발’은 ‘똬리, 또아리’의 함경도 방언이다. 따발총에는 총알을 길게 연결한 꾸러미를 넣을 수 있도록 둥글납작한 탄창이 달려 있는데, 그 모양이 ‘똬리, 또아리’와 닮았다고 해서 따발총이라는 별명을 붙인 것이다. 따발총이라는 말은 한걸음 더 나아가 ‘말을 빨리 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말하는 것을 입에서 말을 발사하는 것으로 보면, 그 속도가 빠르고 연속적이라는 점에서 따발총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똬리와 또아리는 ‘물동이와 같은 물건을 머리에 일 때, 머리에 얹는 물건’, ‘구렁이가 몸통을 둥글게 빙빙 틀어 놓은 모양’을 뜻한다. 현재 ‘똬리’는 표준어로, ‘또아리’는 비표준어로 치는데, 발음으로 잘 구별되지 않고 둘 다 널리 쓰인다는 점에서 재고할 여지가 있다.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방송 진행자들이 습관적으로 ‘-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쓰고 있다. ‘-도록’은 동사나 형용사의 줄기에 붙어서 동작이나 상태가 어디에 이르러 미침을 뜻하는 연결어미다. 애국가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은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는 상태에 미침을 뜻한다. 때로는 의식적으로 끌어가는 방향·목표를 나타내기도 한다.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해라”와 같이 쓰는 경우다.
그렇다면 방송 진행자들이 습관적으로 쓰는 ‘전화를 걸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따위의 말투는 대체 어떤 뜻으로 썼는지 알 수가 없다. 공연히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말 속에 집어넣어서 의미도 불분명하고 간결성도 떨어지게 하고 있다.
‘-도록 하다’는 상대방이나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게 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자기가 스스로 하는 행위에 이런 표현을 쓰면 어법에 어긋난 말이 된다. 그냥 “전화를 걸어 보겠습니다”,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보겠습니다”라고 하면 전혀 모자람이 없는 깔끔한 표현이 되는데, 공연히 ‘-도록 하다’라는 말이 들어가는 바람에 문법적으로 이상하고, 느낌이 너저분하고, 의미가 모호한 표현이 되고 만다.
방송 진행자의 말투는 삽시간에 전체 언어 대중으로 확산된다. 그것이 정보화 시대를 끌어가는 대중 매체의 가공할 위력이다.
우재욱/우리말 순화인
별꽃
길가나 꽃밭에 흔히 피는 꽃 중에 ‘별꽃’이 있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작은 꽃인데, 영어로도 ‘병아리풀’(chickweed) 정도의 미미한 이름이다. 꽃잎이 다섯 장인데, 한 장이 두 갈래로 깊이 갈라져 있어 마치 열 장처럼 보여서 반짝이는 별 같다. 그리고 그 하얀 작은 꽃들이 마치 자그마한 별들이 땅에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에 ‘별꽃’이라 부른다. 개별꽃도 있고, 왕별꽃도 있고, 애기별꽃도 있지만 그냥 ‘별꽃’이 가장 별을 닮았다.
‘이름 모를 풀’은 있어도 ‘이름 없는 풀’은 없다고 하는데, 풀꽃이름 중에는 ‘해’(해바라기)도 있고, ‘달’(달맞이꽃)도 있고, ‘별’(별꽃)도 있으니, 참으로 우주적(?)이다. 그러나 우리만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니다. 해바라기를 ‘sunflower/향일규(向日葵)’, 달맞이꽃을 ‘sundrops’라 부르고, 별꽃의 학명이 라틴어 별(stellaria)에서 유래한 것은 인류 공통의 인지구조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풀꽃이름은 비록 짧지만, 인류 공통의 인지구조가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을 같은 원형인 우리의 ‘콩쥐 팥쥐’와 서양의 ‘신데렐라’에서 볼 수 있다.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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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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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가
백이 숙제 두 형제가 의를 지켜 수양산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어먹다 죽은 수절.
백이와 숙제는 고죽군의 아들이었는데 고죽군은 백이의 아우 숙제에게 대를 물러 주려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제가 대를 잇는 건 예의가 아니라 하여 형 백이에게 양보하려 하였다. 하나 백이는 그것이 아버지의 유지에 어긋난다하여 사양하다 못해 고국을 떠나 버렸다. 그러자 숙제도 뒤를 이어 고국을 떠났다.
두 형제는 진작부터 주나라 문왕의 인덕을 존경했던 까닭에 서쪽인 주나라로 갔다. 하나 그들이 당도했을 때는 문왕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정세도 크게 달라져 있었다. 문왕의 대를 이는 무왕이 군사를 모아 중국의 북녘을 제압하면 은나라의 주왕을 치려 하였다. 무왕은 군중의 수레에다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있었는데 백이와 숙제는 진군하려는 무왕의 말을 양 옆에서 만류하며 아뢰었다.
"부왕의 제사도 치르시지 않고 싸움터로 나서면 어찌 효자의 길이라 하겠습니까, 또한 주왕으로 말하면 당신의 임금이시니 신하의 몸으로서 임금을 죽인다면 어찌 어질다 하겠습니까" 하나 무왕은 듣지 않았다. 은나라를 무찔러 천하를 제압하였다. 여러 곳의 군주는 주나라를 종주로 섬기는 세상이 되었으나 백이와 숙제는 무왕에게서 아무런 덕망도 찾을 길 없어 그를 섬기기를 부끄럽게 여겼다. 신의를 지켜 주나라의 곡식은 먹지 말자고 맹세한 두 사람은 멀리 민가를 떠난 수양산으로 숨어 들어가서 고사리로써 목숨을 이었다. 그들이 지은 '채미가'에는 세상을 근심하고 원망하는 회포가 보이는 바 그들은 옛날의 성왕이었던 신농, 순, 우의 세상을 그리워하며 마침내 굶어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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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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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요술을 부리는 수통
한바탕 큰 전투를 치르고 나서 부상당한 병사 한 명이 애타게 물을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 군종목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얼마의 물이 남아 있었습니다. 군종목사는 수통을 그 병사에게 건넸습니다. 병사는 무심코 그 물을 마시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소대원들의 눈이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들 또한 목이 타기는 마찬가지일 것이었습니다. 그는 목마른 것을 꾹 참고 그 수통을 소대장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소대장이 그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소대장은 그 수통을 받아들더니 입에 대고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마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부상당한 병사에게 다시 그 수통을 넘겨 주었습니다. 부상당한 병사가 물을 마시려고 보니 수통의 물은 조금도 줄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병사는 소대장의 뜻을 짐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부상당한 병사는 수통을 입에 대고 소대장처럼 꿀꺽 소리를 내며 맛있게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수통은 다음 사병에게로 전해졌습니다. 소대원들은 모두 꿀꺽꿀꺽 물을 마셨습니다. 마침내 수통은 군종목사에게로 돌아갔지만 그 수통의 물은 처음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갈증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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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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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1955~ ), '빨래하는 맨드라미'
담벼락 밑 수돗가에 앉아 맨드라미, 옷가지 빨고 있다 지난 여름 태풍 매미에 허리 꺾인 어머니, 반쯤 구부러진 몸으로 여우비 맞고 있다 도무지 세상 물정 모르는 이 집 장남, 그러려니 떠받들고 살아온 맨드라미, 텃밭이라도 매는 듯한 자세로 시든 살갗, 쪼그라든 젖가슴, 얼굴 가득 검버섯 피워 올리고 있다 톡톡 터져 오르는 큰자식의 마음, 비누질해 빨고 있다 어머니 가는 팔뚝, 깡마른 종아리, 비 젖어 후줄근해진 몸으로 이 집 장남 지저분한 아랫도리, 땅땅, 방망이 두드려 빨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손은 어떤 손일까? 칼 들면 음식이 나오고 호미 잡으면 풋것들 환하게 웃고 아이 다녀가면 씻은 듯 배앓이가 낫고 비싼 물건 앞에 서면 벌벌 떨고 경우 없는 짓 앞에서는 벌컥 화를 내다가도 하얀 손 만나면 부끄러워 저도 모르게 등 뒤로 감추는 두껍고 큰 손. 바로 어머니의 손 아닌가. 하지만 어머니 안에도 여자가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무조건 희생만을 떠올리는 것은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이재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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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는 지혜로 이긴다 - 이필연
포원
삼국시대 촉나라 황제인 유비는 인재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어느날, 그는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무술대회를 열었다. 무술대회가 열리자 두 사나이가 기풍도 당당하게 맞섰다. 한 사람은 작대기 같은 커다란 쇠몽둥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시퍼런 날이 번뜩이는 칼을 틀어 쥐었다. 그리곤 시합을 알리는 북소리에 맞춰 그들은 무기를 휘둘렀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질 않았다. 구경하는 백성들도 양편으로 갈라져 응원을 하면서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러던 중 혼신의 힘을 다해 고함을 지르면서 쇠몽둥이를 가진 자가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칼로 그것을 막아내자 '쨍그렁'하는 소리와 함께 사나이의 쇠몽둥이가 두 동강이 나면서 맥없이 땅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쇠몽둥이가 칼에 맞아 두 동강이 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다. 줄곧 높은 보좌에 앉아 구경하던 유비가 급급히 명령을 내려 시합을 중단시킨 후, 직접 그 칼을 쓴 사나이를 불렀다.
"지금 네가 쓴 칼을 누가 만들었나?" "포원이 만들었습니다."
사나이가 공손히 대답을 했다. 사람들은 포원이란 이름을 듣고 포원이라면 칼을 잘 만들기로 소문난 철공이라고 얘기했다. 유비는 부하를 시켜 즉시 포원을 불러와 칼을 잘 만드는 비결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포원은 촉나라 사람이었고 대대를 내려오는 철공기술을 선조로부터 전수받은 사람이었다 포원은 이미 소문난 철공으로 그가 만들어낸 농기구와 칼을 탄탄하고 편리하여 사용자들이 앞다투어 사갔다. 그러나 그가 만든 칼에도 처음엔 한 가지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빨리 무디어져 수명이 길지 못하다는 것이다. 포원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몇 년에 걸쳐 실험을 거듭하였지만 번번히 실패를 면치 못했다. 어느날, 그는 또 칼 한 자루를 만들어냈는데 실험해보니 역시 이내 무디어졌다. 그는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다시 칼을 불 속에 넣었다. 칼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 속에서 새빨간 불덩이가 되었다. 칼을 끄집어 낸 후, 포원은 망치질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 채 망연히 쳐다보기만 하였는데 마치 그 뻘건 쇳덩이에서 비결을 찾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넋을 잃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포원은 다시 손에 망치를 잡고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데 이글이글하던 칼을 이미 냉각되어 도저히 두드릴 수가 없이 탄탄해졌다. 뜻하지 않게 새로운 발견을 한 포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뻘겋게 달구어졌던 쇠가 천천히 식으면서 단단해졌으니 만일 더 빨리 식힌다면 더욱 단단해질 것이 아닌가?"
그는 다시 칼을 불속에 넣었다가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때 꺼내서 찬물에 쑥 집어넣었다.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기포가 마구 튕겨올랐다. 칼을 완전히 냉각시킨 후, 포원은 그 칼을 들어 다른 칼을 힘껏 내리찍어 보았는데 그쪽 칼은 단번에 두 동강이 났고 실험한 이 칼은 아무런 흔적도 생기지 않았다. 포원은 너무도 기뻐 칼을 몇 자루나 더 만들어서 찬물에 냉각시켰는데 모두 그처럼 강해진 칼이 되었다. 금속에 열을 올렸다가 빨리 냉각시켜 금속의 강도를 높이는 방법은 이렇게 포원에 의해서 발명되었다. 줄곧 포원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비는 환한 얼굴 표정을 지으며 당장 촉나라 군사가 사용할 칼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때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1천 8백여 년이 흐르면서도 철공들은 한결같이 그 방법으로 칼을 만들고 있다.
때리는 것이 곧 때리지 않는 것이오
송조 때 구준이란 사람이 어느날 황주에 있는 한 절을 찾아가 선이라는 스님을 찾아뵈었다. 구준은 선 스님에 대하여 항시 존경해 왔었지만 스님은 구준이 보잘 것 없는 작은 관리에 지나지 않자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말도 건네질 않았다. 잠시 후 동자승이 달려와 장군의 아들이 찾아왔다고 말하자 선 스님은 몸을 벌떡 일으켜 장삼의 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황급히 밖으로 달려나가 반기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허리를 굽신거리며 동자승에게 차를 내오라고 해서 동자승이 차를 내오자 손수 찻잔을 받쳐올리는 것이었다. 원체 성미가 불같은 구준이 옆에서 그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려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선 스님이 이처럼 권세 앞에서 들판의 갈대마냥 휘어들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절을 떠나버리고 다시는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이 그렇게 훌쩍 떠난다고 선 스님이 서운해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좀더 관망해 보기로 했다. 이윽고 한참이 지나서 장군의 아들이 돌아간 후 구준이 선 스님에게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스님은 왜 저에 대해선 그렇게 냉정하게 대하시면서 장군의 아들에겐 어찌 후대를 하시죠?" "선생은 결코 노여워하지 마시오. 선생은 출가한 우리들의 도리를 모릅니다. 이것이 곧 존경이 비존경이고, 비존경이 곧 존경함이오."
그러나 구준은 지금 선 스님이 자신의 체면을 위해 변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돌연 벽에 기대어놓은 스님의 지팡이를 집어들어 유리알처럼 번들거리는 스님의 머리를 탕탕 내리치면서 말했다.
"스님,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스님은 우리 세속의 사람들 도리를 모릅니다. 우리 세속의 사람들은 세속 사람들의 도리가 있소. 이것이 곧 때리는 것이 때리지 않는 것이며 때리지 않는 것이 곧 때리는 것이오."
선 스님은 계란만큼 퉁퉁 부어오른 머리를 싸쥐고 아무 말도 못했다.
자기 힘으로 번 돈이 아깝다
옛날 어느 한 농군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게으름뱅이었다. 부모도 귀찮게 여길 정도로 불효자이기도 했다.
"어찌됐든 귀찮아도 부모가 있어야 내가 일하지 않고 먹고 살 수가 있지."
세월은 무정하여 농군도 나이가 많아진데다 설상가상으로 병까지 겹쳤다. 어느날 농군이 부인에게 말했다.
"부지런한 사람을 찾아서 우리 재산을 넘겨주어야 하겠소. 절대로 아들에겐 주지 않을 것이오. 그는 천하의 게으름뱅이어서 재산을 물려 주었다간 얼마 가지 않아 모든 재산을 탕진해 버릴 것 아니겠소?"
그러나 부인은 그래도 자신에겐 하나뿐이 없는 자식인지라 자식편을 들었다. 농부가 말했다.
"당신은 자식이라고 자식편에 서서 말하지만 진정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재산을 그놈에게 물려 주어선 안되오. 녀석이 부지런만 하고 자기 힘으로 돈만 번다면 왜 아까운 재산을 남에게 주려고 하겠소? 만일 동전 한 닢이라도 자식놈이 제 손으로 벌기만 해도 난 재산을 자식놈에게 물려 주겠소."
이 말을 들은 부인은 곧장 아들을 찾아가 그에게 동전 한 닢을 손에 쥐어주며 간곡히 부탁을 했다.
"밖에 나가서 하루종일 지내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돌아와서 이 동전을 아버지께 드리며 네가 번 것이라고 말씀을 드려라."
아들은 시키는대로 했다. 그랬더니 농군은 아들이 벌어왔다는 동전을 받아서 불이 이글거리는 아궁이 속으로 집어던지며 말했다.
"이 돈은 네가 벌어 온 것이 아니다."
아들은 조금도 아까운 표정없이 그저 히죽히죽 웃으며 가버렸다. 부인은 당황하며 이번에는 동전 두 닢을 주며 말하였다.
"이번에는 산에 올라가서 놀다가 날이 어두워질 때 마구 뛰어 오너라. 그러면 땀이 날 테고 그 모습으로 아버지에게 네가 번 돈이라고 해라."
아들은 또 시키는대로 했다. 저녁 무렵, 온통 땀투성이가 된 아들이 아버지 앞에 불쑥 나타나 말했다.
"어휴, 힘들어! 아버지, 겨우 동전 두 닢을 벌어 왔어."
농군은 아들이 내민 동전을 받아쥐더니 여지없이 또 아궁이 속에다 던져버리면서 말했다.
"나를 속이지 못해. 이 돈은 네가 번 것이 아니야."
아들은 여전히 히죽히죽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제서야 농군의 부인은 결코 남편을 속일 수 없다는 걸 깨닫곤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얘야, 우리가 아버지를 속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네가 가서 일해라. 일해서 번 돈을 아버지한테 드려야 아버지가 믿으실 것 같다. 그렇치 않으면 이 재산 모두가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간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정말 밖으로 나가 며칠간 일을 해서 동전 몇 닢을 벌어와 아버지께 드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번에도 역시 그 동전을 아궁이 속에다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아들은 깜짝 놀라며 아궁이로 다가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동전을 꺼내려고 허둥댔다. 심지어 불에 손을 데는 것마저 그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들이 아버지 보고 말하였다.
"힘들게 일해서 겨우 동전 몇 닢을 벌었는데 아버지는 그걸 아궁이 속에다 처넣으면 어떡해요!"
이때 농군의 주름투성이 얼굴엔 비로소 환한 웃음꽃이 피어 올랐다. 농군이 흐뭇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젠 믿는다. 저 돈은 네가 노동을 해서 번 돈이 분명하다. 자신이 땀을 흘려 번 돈이라야 아낄 줄을 아는 것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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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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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여백 - 박이문
1. 고향
내 동무 삐에르 보신탕
나는 농촌에서 나서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 나는 개를 무척 좋아했고 고기를 퍽 밝혔다. 동물을 좋아하시지 않는 어머님을 졸라 이웃 동네에서 누렁이 강아지를 얻어다 며칠 동안은 방안에서 키웠다. 마침 프랑스말을 좀 배운 큰형이 동경에서 시골로 돌아와 있었다. 형은 '삐에로'라는 이국적 그것도 프랑스적 이름을 지어주었다. 나는 밤에도 잠에서 깨면 눈을 비비면서 어둠을 더듬어 방구석 쪽으로 기어가서 거기에 놓여 있는 바구니를 찾아 깊이 잠들어 있는 삐에로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곤 했다. 주둥이를 앞으로 뻗은 두 다리 속에 파묻고 잠들어 있는 그놈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따뜻하고 귀엽고, 바라보기만 해도 내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삐에로는 몇 년을 나와 더불어 놀며 자랐다. 나는 어느덧 먼 읍내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삐에로는 정력이 왕성한 장년기의 개로 컸다. 높은 자리에 서 있던 우리집 사랑채 마루 앞에 앉아 있다가 학교에서 책보를 끼고 돌아오는 어린 주인을 어느 틈에 본 삐에로는 다리가 찢어질 듯이 달려와 꼬리를 흔들며 나한테 뛰어오르곤 했고 내 얼굴, 내 손을 긴 혀를 내밀면서 열심히 핥아주곤 했다. 나도 틈만 있으면 삐에로를 껴안고 뽀뽀를 해주면서 함께 집에서 놀고, 마당에서 뛰고, 뒷동산 잔디에서 뒹굴며 장난했다. 개 삐에로와 소년 나는 어느덧 서로 뗄 수 없는 가장 가까운 동무가 되어 있었다.
어느 해 여름이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대문을 들어서니 안마당에는 우리집 일꾼과 동네의 젊은이 몇 명이 방학해서 서울서 돌아온 두 형들과 함께 웅성거리고 있었다. 올가미를 손에 든 한동네 젊은이가 안채 큰 대청마루 밑을 엎드려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의 개, 나의 동무, 삐에르가 마루 및 한구석에서 공포에 떨며 쪼그리고 숨어 있었다. 삐에르의 두 눈알의 빛이 컴컴한 마루 밑에서 유난히 무서우리만큼 빛났고 그만큼 더 슬퍼 보였다. 한국 어디에서도 그러했듯이 우리 시골에서도 여름이면 한번쯤은 더위를 이기는 데 좋다 하여 개장국(보신탕)을 먹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다. 우리집에서도 그래왔다. 이번에는 나의 둘도 없는 동무 삐에르가 보신탕으로 희생되게 된 것이다. 언제나 발랄했던 삐에르가 대청마루 구석에 숨었던 것은 인간의 이런 끔찍한 음모를 동물적 본능으로 알아차리고 피해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목전에 닥친 자신의 죽음 앞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삐에르의 모습이 한없이 무력하고 가련해 보였다. 나는 펄펄 뛰며 울었다. 내 개를, 삐에르를, 내 동무를 죽이지 말라고 조르면서 나는 우리집 일꾼의 팔에 매달려 울었다. 그러나 삐에르는 목에 어느새 걸린 올가미를 온 힘을 다해서 깽깽 울면서 뿌리치려고 버티었지만 일꾼들에 의해 강제로 질질 마루 밑 밖으로 끌려나왔다. 내가 울면서 따라갔지만, 얼마 후 동네 앞 냇가에서 목숨을 잃은 채 통째로 불에 그슬려진 삐에르의 모습은 끔찍하고도 흉해 보였다. 뜨거운 여름 해가 진 다음 시원한 바람이 땀을 말려주는 바로 그날 저녁 안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저녁상을 둘러싼 우리집 온 식구가 함께 보신을 실컷 했다. 그리고 남달리 고기를 밝히던 어린아이였던 나는 누구보다도 맛있게 삐에르-보신탕을 포식했다.
보신탕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60년 가까운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날 저녁이 생생하게 생각난다. 큰 뚝배기 속에 보신탕으로 변해 말없이 있던 삐에르 그리고 그것을 맛있게 먹었던 어린 촌놈, 나의 자화상을 상상해 보면 그럴 때마다 나는 혼자서 부끄럽고, 쓸쓸하고, 한없이 착잡해지는 마음과 함께 속마저 거북해진다.
필명의 화
나는 1952년부터 원래 이름 박인희(후박나무 박, 어질 인, 빛날 희)와는 별도로 글을 발표할 때는 언제나 박이문(후박나무 박, 다를 이, 내 이름 문)이라는 필명을 써오고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물론 본명을 썼다. 1957년 이래 이화여대 불문학과 창설과 때를 같이하여 나는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불문학과 시간표에 나타난 내 이름은 필명이 아닌 본명이었고, 학생들은 본명 박인희로만 나를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나는 장학금 유학의 기회가 생겨 일 년 동안 파리 유학의 길을 떠났다. 당시까지만 해도 프랑스 문학은 가장 화려하고, 파리 문화는 가장 우아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그곳은 모든 이들, 특히 젊은이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불문학 교수는 멋이 있을 것이며, 파리서 불문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 남자 교수는 불문학을 전공하는 여대생들에게는 더욱 그렇게만 생각되었다. 한 해가 지난 후 내가 파리에서 귀국하기 얼마 전, 이학기초에 교내 신문인 '이대학보'는 본명 '박인희' 대신 필명을 써서 "파리 유학에서 돌아올 박이문 교수가 10월부터 다시 강의를 하게 되었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했다. 몇몇 여학생들은 그 교수가 어떤지 궁금했고, 큰 기대를 갖고 그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이미 겨울이 왔다. 신문 기사대로 나는 벌써 두어 달 전부터 일 년 만에 다시 만난 학생들에게 열심히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 몇몇 학생들, 각별히 낭만적이었을 아니면 각별히 감상적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한 여학생에게는 이상하기만 한 일이었다. 멋쟁이임에 틀림없을 파리에서 오기로 된 '박이문' 교수는 온다는 때가 훨씬 지나도 나타나지 않고 일 년 전에 가르쳤던 그러나 어디를 봐도 시골뜨기 같은 '박인희' 교수만이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 여학생을 비롯한 몇몇은 몹시 궁금해졌고, 이상하게 생각되었고 약간은 초조함까지도 느끼게 되었다.
마침내 그 학생은 이렇게 된 영문을 알게 되었다. 본명인 박인희와 필명인 박이문이 바로 동인이명(한가지 동, 사람 인, 다를 이, 이름 명)이라는 것이다. 그의 실망은 컸다. 그가 상상 속에 그렇게도 믿었던 파리 유학에서 돌아온 멋쟁이 박이문은 존재하지 않고, 아무리 봐도 시골뜨기인 박인희만이 실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에 일 년 살면서 바게트, 치즈, 포도주를 얼마 동안 즐기고 왔다고 해서, 파리의 멋쟁이들 틈에서 지냈다고 해서 원래 못생긴 나의 얼굴이나 체구가 바뀌어 미남자가 될 수 있겠는가. 멋쟁이 보들레르나 우아한 베를렌의 시를 몇 줄 더 외우고, 프루스트의 귀족적 세계나 말로의 멋있는 삶의 모험을 좀더 배웠다고 해서 나의 촌스러우리만큼 털털하고 소박한 천성이 쉽게 바뀔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파리에서 돌아온 후에도 내 머리는 만화의 주인공 대그우드의 머리처럼 텁수룩하고, 구제품 시장에서 구해 걸친 양복은 파리는커녕 일본에도 가보지 못하고, 불문학은커녕 소설 한 권 읽어보지 못한 듯했다. 또한 내가 신은 양말은 늘 빵꾸가 나 있었다. 이런 사실들이 내가 학생들에게 준 실망의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알고 있다.
그러나 내 필명으로 인해 내가 학생들에게 그토록 실망을 주었다는 것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몇 달이 더 지나서 학생들과 더불어 놀던 기회에 바로 그 한 학생이 '박이문'에게 실망했던 얘기를 내게 해주었을 때, 내 잘못은 아니지만, 미남이 못 된 것을 사춘기부터 괴롭게 여겨왔던 터라 나는 약간 마음이 쓰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털어놓은 그 학생이 고마웠다. 그것은 그의 나에 대한 호감을 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육십에 가까워진 옛날의 그 학생은 지금 한 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얼마 전 35년 만에 그 제자를 다시 만나 약 40년 전에 나의 필명 때문에 있었던 그 에피소드를 함께 다시 회상하면서 이미 백발이 된 나와 할머니가 된 나의 제자는 실망과 쓰라린 쑥스러움이 아니라 즐거운 폭소를 나눌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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