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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83 호
단기 4341. 3. 16 (음력 2. 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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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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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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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게을리한 의무야말로 나중에 무섭고 두려운 대상이 된다. / 촌시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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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글터 → 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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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임신, 출산 용어 삼신 할머니는 노여움을 푸소서
"앉아서 천리 보고 서서 만리 보는 삼신 할머니, 섭섭한 일일랑 제발 무릎 밑에 접어 두고 이 어린 것 치들고 받들어서 먹고 자고 놀고 오로지 남의 눈에 꽃이 되고 잎이 되게 하소서. 입을 복과 먹을 복을 갖춰 주시고 짧은 명은 길게, 긴 명은 쟁반 위에 서리서리 얹어 주시고 명일랑은 동방삭을 닮고 복일랑은 석승을 닮게 점지하여 주소서."
어린 시절 아시 볼 때(동생을 맞을 때) 필자의 할머니께서는 방 윗목에 삼신메를 차려 놓고 손바닥을 싹싹 소리 나게 비비면서 이처럼 "삼신풀이"라는 주문을 외우셨다. 삼신 할머니는 예로부터 임신과 출산을 주재하는 신으로 경외의 대상이었다. 산모에게 해산 기미가 보일 즈음이면 모든 가정에서는 애오라지 이 삼신 할머니에게 매달린다. 정화수 한 그릇과 흰 쌀밥, 한 그릇 또는 세 그릇의 미역국을 올린 삼신상이 차려진다. 이 때 산모가 며느리일 때는 안방 윗목에, 해산을 위해 친정에 온 딸일 경우에는 대개 방문 가에 차리는 것이 상례였다. 삼신상은 출산일뿐만 아니라 해산 후 첫 이렛날과 두 이렛날, 삼칠일이라 부르는 세 이렛날에서 일곱 이렛날까지 차려지고, 그때마다 이와 유사한 주문이 외워진다. 이 기원은 아이가 자라 일곱 살이 되어 칠성신에게 인계될 때까지 지속된다. 이런 정성은 아이의 성장은 물론 산모의 잉태와 출산, 그리고 그 이후 젖이 모자라 "젖 비는"일에서 "개암든다"는 산후 후더침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오로지 삼신 할머니의 손에 달렸다고 믿는 데서 비롯된다.
잉태를 고유어로 "몸가지다" 또는 "아이 선다"고 한다. 아기를 가진 산모는 "입덧"이라는 첫 시련기를 거치면 배가 점점 불러지면서 둥덩산 같은 "배재기"에 이르게 되고, 이때쯤이면 아기가 맷속에서 놀기 시작하는 자위뜸을 감지하게 된다. 이런 과정 모두가 어느 하나 힘들지 않을까마는 아무래도 그 절정은 출산 순간이 될 것이다. 막달에 이르러 아이가 "비릊는" 과정에서 문잡아 산문이 열리고, 이윽고 핏덩이의 귀가 빠지는 순간이야말로 뼈마디가 녹아 내리는 고통의 정점이라고 한다. 세상에 나온 새 아기의 첫 울음, 이른바 고고성은 그래서 환상의 소리라 할 만하다. 아이에게는 최초의 언어이자 모체에서부터 분리된 독립 선언일 것이며, 산모에게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마지막 안간힘이며 새 생명 탄생의 선언적 환호가 될 것이다.
삼신이라는 말은 "살다"에서 유래하여 사람이나 삷, 또는 숨과도 말뿌리를 같이한다. 고고성은 바로 인간의 호흡기 개통식이므로 그때부터 시작된 숨쉬기가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고유어 "삼신"을 한자어 삼신이나 산신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삼신은 태고적 우리나라를 세웠다는 세 신, 곧 환인,환웅,환검(단군)을 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지상으로 내려와 곰처녀와 관계를 맺어 단군을 낳았다는, 그 단군신화를 기조로 하여 삼신 할머니를 한민족 생성의 국조 신화와 연결시키려는 것이다. 특히 "삼신의 손"이라는 말에서 한민족이 세 신의 자손이라는 의미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의식은 후일 아이를 낳는다는 모성적 의미가 확대되고, 무속신화와 민속신앙으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삼신 할머니가 생명 창조를 점지하는 신령으로 변신하여 추앙 받게 되었다는 이론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현대의 젊은 엄마들은 이런 삼신 할머니의 존재에 별로 의미를 두지 않는 듯하다. 입덧이 나면 남편이나 부모들을 채근하고, 몸에 이상이 느껴지면 언제든지 병원을 찾아가 의사에게 몸을 맡긴다. 젖이 모자라도 젖비는 일이 없어지고, 출산 날짜는 물론 심하면 신의 영역이라는 아들, 딸의 성별까지 선택하여 낳을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고유 권한을 빼앗긴 삼신 할머니가 노여워할 수밖에. 현대인들은 금줄에 무엇을 다는지도 잘 모른다.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출산 풍습들, 이를테면 산모는 상주나 상가에 다녀온 사람과 대면하지 말아야 하며, 집안에 빨래를 널지 않고, 질그릇을 다루지 않으며, 고기를 굽거나 먹지도 않는다는 따위의 금기 사항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진 만큼 이런 풍습은 몰라도 좋고 또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 번 양보하더라도 태아의 성감별이나 아기를 지우는 따위의 삼신 할머니의 고유 영역만은 제발 침범하지 말아야겠다. 최근 산아 제한법마저 철폐되고 태아의 성감별을 엄격히 규제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그러나 남아선호사상이나 성을 쾌락의 도구로 삼는 한 이런 조처만으로 삼신 할머니의 노여움이 풀릴 것 같지는 않다. 생명의 신비, 그 신의 영역만은 더 이상 넘보지 말았으면 한다. 삼신 할머니의 노여움이 풀릴 때까지. |
새끼
욕이란 형식에서는 망측하고, 내용으로는 악감정을 담고 있다. 망측하기만 하면 상소리고, 악감정만 담았으면 저주·경멸·조롱이 된다. 저주라 해도 그 표현 형태가 단정해서는 욕이 될 수 없고, 상소리를 늘어놔도 정이 담겼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욕이 아니다.
어른 사이에 친구끼리 주고받는 말을 들어보면, 욕을 즐긴다는 걸 알 수 있다. 욕을 통해 친근감을 느끼고, 욕에다 정을 싣고, 욕에 실려 오는 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말은 욕이라는 형식에 담긴 상소리 객담이다. 그러나 이런 유쾌한 객담도 대상과 공간이 제한된다. 상대가 친구여서 그런 것이고 허물없는 자리여서 그럴 수 있다.
악감정을 담은 ‘새끼’라는 말이 있다. 욕으로 쓰이는 말이다. 가까운 친구끼리 만나 흉허물 없이 ‘이 새끼, 저 새끼’ 하는 것은 악감정이 없기에 형식적인 욕일 뿐이지만, 거기에 악감정이 더해지면 심한 욕이 된다. 우리 고유한 욕으로서의 호칭은 ‘새끼’가 아니라 ‘자식’이었다. “이 자식아!, 이 나쁜 자식아!”라고 했다. ‘새끼’는 동물에다 쓰는 말이었다. 한자로도 다르다. 자식은 ‘子’, 새끼는 ‘仔’다. 돼지새끼를 한자로 쓰면 ‘仔豚’이지 ‘子豚’이 아니다.
할머니들이 손자를 ‘아이고, 내 새끼’라고 하는 것은 정을 듬뿍 담아서 하는 말이다. 심지어는 ‘내 강아지’라고도 한다. 따라서 흉허물 없는 친구끼리 또는 할머니가 손자, 손녀를 ‘새끼’라고 부르는 것은 ‘욕’이라는 그릇에 ‘정’이라는 내용을 담은 말이다.
우재욱/우리말 순화인
매발톱꽃
풀꽃이름은 보통 예쁘고 순한데, ‘매발톱’ 같은 겁나는 이름도 있다. ‘매발톱’의 존재는 1990년대 초 한-중 수교 이후 백두산 생태를 관찰한 식물 애호가들 덕분에 널리 알려졌다. ‘매발톱꽃’이라는 이름은 꽃잎 뒤쪽에 있는 ‘꽃뿔’이라고 하는 꿀주머니가 매발톱처럼 생긴 것에 말미암은 것이다. 하늘과 맞닿은 높은 곳에 피어 ‘하늘매발톱’, 산골짝에 피어 ‘산매발톱/ 골짝발톱’, 한자말로 ‘누두채’(漏斗菜)라고도 한다. 풀꽃이 아닌 ‘매발톱나무’는 다른 종류인데, 줄기에 날카롭고 긴 가시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오늘날 매를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마는 동물과 식물이 하나로 이어졌던 옛사람들의 통합적 자연을 그 이름에서 본다. 매발톱이 오므리며 꽃으로 내려앉고, 꽃은 발톱을 세우며 힘차게 날아오르는 모습 ….
매발톱의 뾰족한 꽃뿔을 보면서 ‘무얼 잡으려고 허공을 움켜쥔 채 / 내려놓을 줄 모르느냐 / 그렇게 손톱 발톱을 치켜세운다고 / 잡혀지는 허공이더냐’는 글(김승기 시 ‘매발톱’) 구절을 되새겨 본다. 한때는 허공마저 움켜잡자는 치열한 삶이었으나 결국은 손발톱 매섭게 세운 일의 무의미를 깨닫게 되는 삶이 매발톱처럼 두렵다.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삿갓봉과 관악산
삿갓처럼 생긴 봉우리는 보통 ‘삿갓봉’이라 불린다. 우리나라 갓은 신분을 나타내는 도구로 쓰였다. 신분이 높은 이는 ‘감투’를 썼으며, 별감이나 서리, 또는 광대들은 ‘초립’을 썼다. 또한 떠돌이는 ‘패랭이’를, 군졸들은 ‘전립’을 썼다. 경기 여주의 삿갓봉은 스님이나 유랑인들이 쓰는 넓은 모양의 삿갓을 닮은 봉우리다. 또한 경북 문경의 옛이름이 ‘관문현’(冠文縣)인데, ‘고사갈이’(高思曷伊)라고도 하였다.
갓의 유래를 성호 이익은 ‘고깔’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한 바 있다. 고깔은 뾰족함을 뜻하는 ‘곶’에 모자를 뜻하는 ‘갈’이 붙어 된 말로 알려졌다. 고깔은 불교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중에는 무당·풍물꾼·나장·급창들도 이를 썼다. 그런데 실학자 이덕무는 고깔과 갓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고깔과 갓은 전혀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갓’은 단지 비를 피하고자 푸나무로 만든 도구였는데, 그것이 점점 높아지고 넓어져 여러 가지 형태로 변했다고 하였다.
이처럼 ‘갓’의 쓰임이 변하면서 땅이름에도 새 의미가 덧붙기도 한다. 그 중 하나가 ‘관악산’이다. 풍수를 따르는 이들은 ‘관악산’에 ‘갓’이 들었으니, 그 기슭에 국립대학이 들어서고, 또 남쪽으로는 정부 청사가 설 수 있다는 말을 즐겨 한다. 그런데 이덕무는 “갓이 너무 크면 항우라도 짜부라지고, 갓이 망가지면 학자라도 망신스럽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벼슬아치·학자님들 두루 새겨들을 말일 듯하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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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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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육림
물 대신에 술에 담긴 못과 나무 대신에 마른 고기가 우거진 숲.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은 고대 중국에 있어서의 폭군 음주의 전형. 두 제황은 한 가지로 재지와 무용을 지녔으면서도 매희라는 요녀, 달기라는 독부에게 홀려 주색의 향락으로 자신과 함께 나라를 망쳤다. 두 제왕은 총애하는 여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제왕으로서의 온갖 권력과 부력을 탕진했던 것이니 대충 아래와 같다.
하나라의 걸왕은 자신이 무찌른 유시씨의 나라에서 공물로 보내어진 매희에게 홀려 보석과 상아로 가꾸어진 호탕한 궁전을 짓고 그녀의 소원대로 국내에서 3천여 명의 미소녀를 모아 5색으로 수놓인 옷으로 단장케하고 눈부신 춤과 음악으로 날을 보내었다. 또한 매희의 제안에 따라 궁원의 일각에다 커다란 못을 팠다. 그 밑 바닥에는 새하얀 자갈돌을 깔고 물 대신 향기로운 술을 충만케 했으며 못 둘레에는 고기로 언덕을 만들고 나무 대신에 마른 고기의 숲을 꾸몄다. 왕은 매희와 함께 술의 못에 배를 띄우고 못 둘레에서는 3천 명의 미소녀가 가락에 맞추어서 춤을 추다가 북소리가 울리면 못으로 뛰어와서 술을 마시고 또한 우거진 마른 고기를 먹는 양을 바라보며 즐겼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니 국고는 탕진되고 민심은 이탈하여 멸망의 날이 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은나라의 주왕 역시 유소씨의 나라에서 바쳐진 달기에게 흘렸거니와 그녀는 희대의 미모에다 음분함을 겸한 독부였다. 주왕은 그녀의 끝없는 욕망을 채워주기 위하여 호탕한 궁전을 짓고 주지 육림을 마련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 미주의 못가에서는 실오라기 한 안 걸친 남녀들이 좇으니 쫓기우느니 하며 춤추면 황홀한 심사로 그것을 바라보는 달기의 볼에 음란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러한 광연이 백 스무날 동안이나 주야로 계속되니 그 광태를 조심스레 충고하는 신하도 이었으나 그들은 도리어 황제를 비방하다는 명목으로 잔인하게 죽이는 형벌을 당하였다. 기름을 바른 구리 기둥에서 불더미 속으로 미끄러져 죽는 희생자의 모습까지가 잔인한 달기의 음욕을 부채질해 주는 것이었다.
주왕은 마침내 주나라 무왕의 혁명으로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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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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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이상의 충돌
이상주의의 품 안에서 관념의 우유만을 마시며 자라나는 꿈들이 있다. 턱없이 순수하고 턱없이 결벽한 그 꿈들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에 현실과의 충돌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오탁(汚濁)과 접촉이 없으므로 더없이 맑고 푸르긴 하겠으나, 그 푸르름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깊은 산중의 독야청청이 인간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반면에 현실주의의 모진 훈육만을 받으며 자라나는 꿈들도 있다. 매순간 현실의 국면에서 눈을 뗄 수 없으므로 야무지게 철이 들긴 하겠으나, 현실에 과도하게 짓눌린 꿈은 본래의 그 푸른 빛을 잃어버리고 저 어둡고 탁한 회색의 현실을 닮아버리고 만다.
박명욱, <꿈의 색깔: 미로의 '이것이 내 꿈들의 색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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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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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1960∼ ), ‘수묵 산수’
가창 오리떼 수십만 마리가 겨울 영암호 수면을 박차고 새까만 점들로 날아올라선 한바탕 군무를 즐기시는가 싶더니
가만, 저희들끼리 붓이 되어 거대한 몸 붓이 되어 저무는 하늘을 배경으로 뭔가를 그리고 있는 것 아니신가 정중동의 느린 필치로 한 점 수묵 산수를 치는 것 아니신가.
제대로 구도를 잡으려는지 그렸다간 지우고를 반복하다 一郡의 細筆로 음영까지를 더하자 듬직하고 잘 생긴 山 하나 이윽고 완성되는가 싶더니
아서라, 화룡점정! 기다렸다는 듯 보름달이 능선 위로 떠올라 환하게 낙관을 찍는 것이 아니신가.
보시게나, 가창 오리떼의 군무가 이룩한 자연산 걸작 고즈넉한 남도의 수묵 산수 한 점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저 아름다운 수묵의 조화를 보라! 저거야말로 자연의 장엄이 아닌가. 수십만 마리가 수면을 박차고 올라 새까만 점으로 군무를 즐기는 동 안 누구 하나 부딪쳐 다치지 않는다. 한 마리 한 마리가 모여 붓이 되어 산수를 치는 장관이라니! 사이가 만든 조화이자 장엄이다. 개인 과 사회의 관계도 모름지기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관계의 미학이란 사이의 미학이기도 하다. 사이가 무화될 때 관계는 때로 서로가 서로 에게 억압일 수 있으니 말이다.
이재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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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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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는 지혜로 이긴다 - 이필연
방연은 이 나무 밑에서 죽을지어다
춘추전국시대 위나라는 조나라와 결탁하여 힘없는 한나라를 공격했다. 위험을 느낀 한나라는 황급히 사절을 보내 제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제선왕은 당장 전기를 원수로, 손빈을 사령으로 임명하고 한나라를 지원키로 했다. 36계에서 '위위구조'처럼 전기와 손빈은 군사를 거느리고 직접 한나라로 달려가지 않고 오히려 반대 방향에 있는 위나라 고을 경성을 향해 달려갔다. 위나라장군 방연이 이 소식을 듣고 흥분을 참지 못했다.
"흥! 내가 예측한 그대로구만. 손빈이 또 그 수법을 쓰는데 이번엔 어림없지. 꼭 본때를 보여주고 말 거야."
방연은 군대를 돌려세워 제나라 군의 뒤를 추격했다. 그런데 방연의 행동을 이쪽 손빈은 벌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예의 관찰하고 있었다. 손빈이 전기에게 말했다.
"전번에 '위위구조'에서 방연이 커다란 실패를 보았기 때문에 이번엔 그가 또다시 그런 속임수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하오." "당신이 생각하기엔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전기가 손빈에게 되물어 왔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 군사는 용감하고 제나라의 군사는 보잘 것 없다고 말해왔소. 그러니 방연은 자연히 제나라 군사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을 것이오. 이번에 우리 군사는 이 점을 이용해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있소. 우리 군사를 일부러 약하고 겁쟁이로 가장시켜 방연을 속이는 것이오." "방연을 어떻게 속인단 말이오?" "군사가 밥을 지어먹은 솥 흔적 말이오. 솥의 흔적이 얼마이면 그 군사의 숫자를 계산할 수 있잖겠소? 위나라 영토에 일단 들어선 후, 첫날에는 10 만 개의 흔적을 남겨놓고, 이튿날에는 5 만개, 사흘째엔 3 만개로 점차 줄인단 말이오."
손빈이 자신의 전략을 설명하자 전기는 두말없이 찬동해 실시했다. 마침내 위나라 땅에 들어선 후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줄곧 사흘을 추격해온 방연은 추격하면서 정말 솥의 흔적을 관찰했다. 그는 매우 오만한 태도로 좌우를 둘러보며 거드름을 피웠다.
"내가 말하잖았는가? 제나라 군사는 담이 약해 전쟁을 두려워한다구. 솥 흔적을 보면 알 수가 있잖은가. 우리나라에 들어선 첫날에는 10 만개이고, 사흘날에는 3 만개밖에 되질 않잖아. 이건 병사들이 절반 넘어 도망친 것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손빈을 당장 붙잡기라도 한 듯이 방연의 마음은 사뭇 흐뭇하기만 하여 보병들을 천천히 뒤따라오라 하고는 전차를 지휘하여 바싹 추격해나갔다. 이날, 제나라 군은 마홍이란 곳에 도착했는데 여기는 산세가 험하고 숲이 우거져 있어 군사적 요충지였다. 손빈이 계산해 보니 이날 밤이면 방연의 군사가 여기까지 당도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군사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길가에 해묵은 나무의 한쪽 껍질을 벗기게 한 후 친필로 이렇게 써놓았다.
"방연은 이 나무 밑에서 죽을지어다."
손빈은 그렇게 써놓고 군사 1 만여 명을 길 양쪽에 매복시킨 후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이 나무 밑에 횃불이 나타나면 일제히 사격하라!"
미구하여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과연 방연이 마홍에 도착했다. 전에 손빈의 책략에 말려들어 참패를 당한 적이 있는 방연은 모든 신경을 칼날처럼 곤두세우곤 사방을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협곡은 아주 조용하기만 했고 풀벌레소리만이 밤의 정적을 깼다. 아무리 주위를 살펴보아도 매복의 낌새가 없는지라 그제서야 방연은 한시름을 놓고 군사를 이끌고 느릿느릿 협곡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천천히 가는데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커다란 나무에 허연 것이 나타났는데 무슨 글씨 같은 것이 씌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방연은 황급히 부하를 시켜 횃불을 켜게 하고 나무의 흰 부위를 비춰보았다. 바로 이때 방연이 그 글씨를 채 읽기도 전에 사방에서 예리한 화살이 우박처럼 날아왔다. 방연의 병사들은 수없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으며 그중에서도 다행히 살아남은 자들은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저마다 뿔뿔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방연은 그제서야 또 손빈의 계책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너무도 부끄러운 나머지 그 자리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지혜로운 재상
전설에 의하면 명조 때 엄눌이란 재상이 있었는데 그는 지혜가 남달리 뛰어났을 뿐 아니라 그때의 관리치고는 백성들의 편에 서서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다. 어느해, 그는 자신의 고향 마을에 넓다란 학당을 지어주게 되었다. 고향 마을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너무나 반가워 저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기초계획을 잡고보니 뜻밖에도 학당을 지을 부지 안에 한 채의 낡은 가옥이 들어앉아 있었다. 만일 그 집주인이 이사하길 거부한다면 학당을 지을 일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다. 그 낡은 가옥의 집주인은 두부를 만들고 담배도 파는 그런 사람이었다. 시공은 맡은 사람이 집주인을 찾아 고가로 집을 사들이겠다고 제의를 했다. 그러나 그 주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 집은 조상들이 물려준 재산이어서 우리 대에 와서 팔아버린다면 사람들이 비웃을 거요. 그러니 아무리 값을 비싸게 준다고 해도 절대 팔 수가 없어요."
시공을 맡은 사람은 하는 수 없이 이 사정을 엄눌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엄눌이 말했다.
"조급해하지 마시오. 먼저 그곳을 제외하고 다른 일부터 시작하시오."
이윽고 공사가 시작된 후, 엄눌은 또 시공을 맡은 사람에게 특별히 당부를 했다.
"절대 그 집주인을 멸시해선 안되오. 공사현장에서 수효되는 두부는 물론이고 인부들에게 나누어 줄 담배도 꼭 그 집에서 사도록 하시오. 그러되 가격은 그 집에서 부르는대로 주고 또 예약금부터 먼저 지불하시오."
엄눌 재상이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려고 그러는지 그 꿍궁이 속을 사람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수군거렸다.
"엄눌 재상은 다른 관리와 같지 않다구. 절대로 자기가 갖고 있는 권력으로 백성들을 강제로 다루지 않아." "그렇지 않아. 그까짓 두부장사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걸."
사람들의 생각은 저마다 달랐다. 하지만 사람들이 뭐라 하든 시공을 맡은 사람은 엄눌이 시킨대로 현장에서 사용되는 두부와 담배는 모조리 그 집에서 사다가 썼다. 그러자 낡은 가옥의 집주인은 매출이 엄청나게 늘자 여간 상냥하지 않은 것이다. 매일 눈코뜰새없이 분주히 서둘러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어 사람 한 명을 고용하기까지 했다. 학당을 짓는 일이 점점 구체화되어 가자 일꾼은 점점 더 늘어났고 그러자 낡은 가옥의 집주인은 다른 식품도 취급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공사현장에서 사용되는 모든 품목을 취급하게 된 것이다. 갑작스레 팔 물건을 잔뜩 사들이고 보니 그것들은 온통 집안에 꽉 들어찼고 그것도 모자라 발디딜 틈도 없었다. 가옥의 집주인은 좁은 집안 때문에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집주인 부부는 그 해결책을 궁리해보았다. 집주인이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돈을 많이 벌게 된 것은 엄눌 재상이 이곳에다 학당을 지은 덕분이 아니겠소? 애당초 우리가 이사를 갔어야 했는데......" "그러게 말예요. 괜히 우리가 부끄러워서 동네 사람 보기가 창피해요." "재상의 도량은 바다처럼 넓지 않소?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이 집을 학당에 그냥 바칩시다."
부부는 밤새 토론한 결과를 이튿날 아침 시공을 맡은 책임자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 책임자는 이 사실을 곧바로 엄눌에게 보고했다. 엄눌이 그 책임자에게 말했다.
"공짜로 그 집을 받아선 안되오. 그 근방에 집 한 채를 사서 그 사람들에게 주되 현재의 집보다 훨씬 좋은 것이어야 하오."
집문제는 이렇게 해서 해결되었다. 장사꾼부부는 황송해 하면서 이내 이사를 갔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재상의 방법이 훌륭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롱박
2천년 전의 한나라 때, 어느 한 고을에 살고 있는 농부가 조롱박을 심었는데 이 농부가 심은 조롱박은 남들이 심은 것보다 여섯 배, 일곱 배나 더 컸다. 그렇다면 그 비결이 무얼까? 처음 그가 심은 조롱박은 남들이 심은 조롱박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봄이 오면 씨를 부드러운 땅 속에 뿌렸고 이어 파아란 새싹이 돋아나와 넝쿨이 우거지는가 싶으면 마침내 하얀 박꽃이 피어났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서 윤기가 반들반들한 원두색 조롱박이 탐스럽게 열렸다. 농부는 이렇게 몇 년을 반복해서 조롱박을 심었다. 그러던 어느날 농부는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해마다 이렇게 조롱박을 심는데 크게 아주 크게 할 방법이 없을까?"
이해 가을 조롱박을 딸 때, 박넝쿨이 어찌나 얼기설기 뒤엉켜 있는지 그는 도저히 어느 박이 어느 넝쿨에서 열렸는지를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그것을 유심히 관찰한 농부는 새로운 재배법을 생각해냈다. 이듬해 봄, 집뙈기만큼 되는 뜰을 파엎고 박씨 10개를 둥그렇게 원을 그려 심어놓았다. 박넝쿨이 석자 가량 자라났을 때 그것을 한데 묶어놓고 흙을 덮어놓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박넝쿨이 한데 어우러져 자라났는데 그는 그중 9개를 잘라버리고 나머지 한 개만 남겨놓았다. 이웃 사람들은 그의 행동이 의아스러워서 물었다. 농부가 대답했다.
"이렇게 해주면 10개의 박넝쿨이 땅속에서 영양분이 충분해져 커다란 박이 열릴 것이오."
그러나 사람들은 농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넝쿨은 농부의 말대로 하루가 지나기 무섭게 쑥쑥 자라났고 매일매일의 성장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넝쿨은 이내 하얀 박꽃을 피우더니 털이 보송보송한 여러 개의 조롱박이 대롱대롱 열리었다. 그러나 농부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막 열리기 시작한 조롱박 3개를 따버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더욱더 이상해서 그 연유를 물어보았다. 그가 말했다.
"넝쿨은 사람으로 비유하면 뼈와 같소. 뼈가 채 자라나기도 전에 너무 일찍 열매를 맺으면 필연코 힘이 부쳐 클 수가 없소. 이렇게 몇 개를 따버리면 나머지 남은 열매는 자연히 큰 박으로 자라날 것이요."
과연 박넝쿨은 그 어느 집의 것보다 튼튼하였고 열매도 비길 바가 못되었다. 그러자 농부는 이번엔 그 박넝쿨의 한 가운데에 구덩이를 파고 물을 가득 채운 단지를 묻어놓는 것이었다. 그가 이처럼 이상한 행동을 계속 해보이자 사람들은 그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농부가 설명하듯 말했다.
"조롱박은 가물어서도 안되고 물이 많아도 안됩니다. 물을 가득 채운 단지에 이렇게 조그만 구멍을 뚫어 놓으면 물이 천천히 새어나와 조롱박이 항상 적당하게 물을 빨아들일 수 있죠."
자신의 일에 더 나은 방법을 연구한 농부는 이렇게 해서 해마다 크고 좋은 조롱박을 딸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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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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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여백 - 박이문
1. 고향
종달새의 장례
나는 30호 정도의 작은 농촌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개를 퍽 좋아했지만 새도 대단히 좋아했다. 겨울이면 일꾼의 도움을 받아 새망을 치거나 추녀 새구멍 앞을 망으로 가리고 작대기로 추녀 짚을 쑤셔서 참새를 잡는 데 신이 났었다. 그놈들을 잡아 아궁이불에 털을 태우고 배를 갈라 소금을 뿌려서 화롯불에 구워먹는 것이 재미있었다. 내가 참새를 쫓아다닌 것은 그것을 잡아먹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는 참새라도 잡아먹어야 할 만큼 고기에 허기진 소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동물적 본능에만 사로잡힌 허기진 촌아이도 아니었다. 방울새·꾀꼬리·종달새 등 우리 마을에서 희귀한 새들을 보았을 때 그것을 잡아먹었으면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간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놈들은 털 색깔이나 생긴 모양, 우는 가락, 음성, 날거나 걷는 모양새로 내 마음을 매료시켰다. 눈이 쌓이는 겨울이면 먹을 것을 찾아 뒷동산에서 우리집 마당 앞 짚더미까지 날아와 짚에 붙어 있는 낟알을 찾아먹는 방울새의 노랗고 검은 알록진 색깔이 한없이 신기롭고 고와 보였다. 참새는 이쁘지도 않고 우는 목소리도 곱지 않으며 성미도 고약하다. 참새는 사람들과 가장 가까이 그리고 많이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가장 길들지 않고 멀리 떨어져 산다. 참새는 아무도 키울 수 없다. 성미가 고약해서 새장에 넣어두면 결코 먹이를 입에 대지도 않고 끊임없이 새장 살에 푸다닥 몸을 박으면서 밖으로만 나가려다 끝내는 죽고 만다. 참새보다 크기가 작고 우는 목소리도 연약한 방울새는 보통 산속에만 살기 때문에 사람과는 거의 접촉이 없으며 그 수도 훨씬 적다. 그러면서도 방울새는 참새보다 더 가깝게 더 곱게 느껴지고, 우리의 마음을 더 끈다. 방울새의 마음은 단순하면서도 화려한 그의 털 색깔이나 조용하면서도 초롱초롱한 그의 울음 소리만큼이나 곱고 매력적이어서 쉽게 우리와 가까워지고 친숙해진다. 나는 어느 한겨울에 일꾼을 졸라 만든 새 탑새기로 방울새를 잡았다. 놀란 그놈을 손바닥에 쥐었을 때 생명의 생동감을 맛보았다. 그리고 안방 구석에 칸을 막아놓고 서속 알을 구해다 먹이를 주고는 작은 부리로 그 서속 알을 콕콕 찍어먹는 모습을 보면서 한없이 즐거워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 불행하게도 그 새가 병들어서인지 외로워서인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어린 내가 느낀 허탈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이처럼 나는 방울새를 좋아했지만, 종달새는 더 좋아했다. 종달새는 방울새보다 낯설고, 그 모습 또한 덜 우아하고 덜 아기자기하며 그 울음 소리도 덜 곱다. 그러나 보리밭 위 하늘 높이 한없이 푸르고 한없이 넓은 공간을 선회하는 종달새의 나는 모습은 한없이 시원하며, 엷은 잿빛날개 및 가슴의 흰색이 유난히 점잖고 우아하다. 나는 그러한 종달새가 좋아 그놈을 예쁜 새장에 넣어 내 곁에 두고 키워보고 싶었다. 그러나 종달새는 참새는 물론 방울새와도 달리 그 수가 적고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서 살기 때문에 잡기는커녕 보기도 쉽지 않다. 이미 무한히 푸르고 넓은 자유를 마음껏 경험한 어미 종달새가 좁은 새장에 갇혀 참고 살수는 없다. 어미 종달새는 잡더라도 키울 수 없다. 키울 수 있는 것은 아직 세상에 길들지 않은 새끼만이다. 새끼를 잡으려면 새둥지를 찾아야 한다. 종달새는 보리밭 고랑에 집을 짓는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책보를 등에 멘 채 나는 동네 아이들과 뒷동산 언덕바지 보리밭을 누비다가 마침내 거의 다 커서 날아갈 만한 새끼 한 마리가 입을 벌리고 있는 종달새 둥지를 찾아냈다.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종달새 새끼를 내 손안에 넣었을 때 느꼈던, 보드랍고 따뜻한 털로 덮인 작은 가슴 및 고동하는 심장의 맥박과 생동하는 감미로운 감촉이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는 시간만 나면 메뚜기·잠자리를 잡아 노란 입을 쩍 벌리는 그 어린 종달새를 열심히 키웠다. 새장 살 사이로 먹이를 넣어주면 발딱 벌려 제치는 아직은 노랑빛인 큰 부리의 모습은 미학적으로도 고왔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눈을 비비며 그 종달새 새끼가 잘 잤나 확인하려고 나는 먼저 대청마루 끝에 가서 추녀 끝에 매달려 있는 새장을 들여다보곤 했다. 흰 가슴을 내밀고 자리를 깡충깡충 옮겨 날아앉는 그 새를 보고서야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이러는 동안 나는 종달새에 더 정을 느끼고 날이 갈수록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느 날 아침 종달새는 새장 안의 가지에 앉아 있지 않고 바닥에 떨어져 죽어 있었다. 병이 들었던 것일까? 자유를 잃은 삶보다는 죽음을 택해 자살했던 것일까? 알고 보니 지난밤 쥐새끼한테 물렸던 것이었다. 고약한 쥐새끼! 나쁜 놈 같은 쥐새끼라고! 어린 나는 분노했다. 그러면서 새 한 마리의 죽음 앞에서 나는 무한한 허탈감 그리고 슬픔과 아울러 한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나는 이러한 나의 심정을 달래기 위새 그리고 나 때문에 자유를 잃고 살다 죽은 종달새의 명복을 빌기 위새 장례를 잘 치러주기로 했다. 나는 죽은 종달새를 헌 옷을 찢어 싸고, 염을 했다. 그 당시 어린 내가 막연히 들어 알고 있던 대로 새의 몸뚱이를 일곱 번 짚으로 묶어 집 뒤 장독대 옆, 복숭아나무 밑에 땅을 파서 묻고 소복하게 묘를 만든 다음 접시에 냉수를 떠놓고 작별의 술로 대신했다. 종달새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그 다음날부터 얼마 동안 아침이면 새의 무덤 앞에 머리를 숙이고 절을 했다. 아무 이해타산 없이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다. 이같이 끌리는 마음을 넓은 의미에서 애정이라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애정의 대상을 가까이 하고, 그것을 아끼고, 끝내는 소유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동물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닐뿐더러 인간을 위한 도구도 아니다.
동물원을 만든 것은 동물을 위해서가 아니다. 동물의 아름다움을 존중해서가 아니다. 단지 인간을 위해서이다. 그곳은 동물의 보호지가 아니라 감옥이다. 그것은 인간의 호기심, 교육, 그리고 오락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동물의 자유를 박탈하고 철창에 가두어둔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너무나 잔인하다. 법을 어기거나 죄를 졌다면 어떠한 인간이라도 자유를 빼앗기고 감옥에 갇혀 마땅하다. 그러나 동물원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물들이 지은 죄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아름답다거나 희귀하다거나 늠름하다거나 하는 사실뿐이다. 동물원을 없애 철창에 갇힌 모든 새들, 모든 원숭이들, 모든 야수들을 해방시키자. 철창 속에 수많은 동물들을 가두어놓고 즐거움을 느끼는 인간은 너무나 잔인한 동물이다. 동물원에 갇힌 동물을 해방시켜 준다면 인간은 그만큼 덜 동물적이 될 수 있다.
새장에 들어 있는 새들을 볼 때마다 그리고 동물원을 보게 될 때마다 나는 나한테 잡혀 새장에서 살다 죽은 종달새의 죽음과 그의 장례를 치렀던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르고 그때마다 이 세상의 모든 동물원과 새장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굳힌다.
부끄러운 자랑
어릴 적 일들이 엊그제 일만 같은데 나는 어느덧 백발이 됐다. 언제나 젊다고 믿었지만 나는 어느덧 환갑을 훨씬 넘겼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간 날들의 기억을 되돌아보는 일이 자주 있다. 삶을 정리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리라. 이런 일도 문득 생각난다.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시골 소학교 아이들은 공부 이외에도 학교에서 교정을 비로 쓸거나, 교실을 걸레로 닦고, 변소의 인분을 퍼서 치우거나 밭을 일구고, 벼도 심고, 돼지도 기르고 닭도 키워야 했다. 우리 반은 닭장을 보살피는 일을 맡게 되었고, 반장이었던 나는 그 책임을 져야 했다. 4학년 초가을 어느 날 오후였다고 기억된다. 학업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학교 뒷마당에 있는 닭장을 한번 더 챙겨보려고 거기에 갔다가 무척 당황했다. 큰 수탉 한 마리가 약간 비틀거리며 땅바닥에 쓰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모습을 보니 병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선생님을 찾아 이 일을 알리고 지시를 받으려고 했지만 그날 따라 선생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속히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닭이 죽기 전에 얼른 팔아버리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선생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닭장에 들어가서 당시의 내게는 작지 않은 크기의 그 수탉을 두 팔로 껴안고 밖으로 나와 나를 따라왔던 아이와 함께 읍내로 뛰어 갔다. 그날은 마침 장날이어서 여느 때면 한적했던 읍내거리가 장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우리는 장터 길바닥에 닭장들을 벌여놓고 있는 곳으로 대뜸 달려갔다. 닭장수와 흥정을 하고 쉽게 좋은 값으로 그 닭을 팔 수 있었다. 닭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우리는 닭 값을 들고 학교에 돌아와 곧장 교무실을 찾아갔다. 마침 교장 선생님을 혼자 계셨다. 나 혼자 주춤주춤 교장 선생님 앞으로 갔다. 혹시 허가도 없이 내 멋대로 한 일을 꾸지람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본인이었던 교장 선생님은 나의 설명을 들으시고 닭값을 손에 받아쥐시더니 야단은커녕 신통하다는 표정으로 "영리하구나! 너 참 영리하다!"라고 칭찬을 퍼부어주셨다. 안심한 후 내가 한 일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기분이 좋았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정말 잘했구나! 난 과연 머리가 좋구나! 거의 60년 전 일이다.
그러나 지금 내 생각은 전혀 다르다. 그때 내가 한 일은 잘한 것이 아니라 큰 잘못이었다. 그때 칭찬을 받고 느꼈던 자부심은 부끄러움이어야 된다. 어린 내가 한 짓은 순수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나는 순수하지는 않았다. 나는 영리한 것이 아니라 교활한 아이에 불과했다. 나는 별생각없이 닭장수를 속였던 것이다. 그 일이 머릿속에 되돌아 기억날 때마다 나는 쓰디쓴 미소를 짓는다.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산시산(뫼 산, 옳을 시, 뫼 산) 수시산(물 수, 옳을 시 ,뫼 산)/ 산불이산(뫼 산, 아니 불, 옳을 시, 뫼 산) 수불이수(물 수, 아니 불, 옳을 시, 물 수)." 즉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내용의 유명한 사행(넉 사, 다닐 행) 선시(봉선 선, 때 시)의 첫 두 행의 깊은 의미를 새삼 알 수 있을 것 같다. 한 낱말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사실, 사건, 행위, 그리고 한 인간의 삶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보면 상황과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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