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포리스트 카터
산꼭대기에서의 하룻밤
할아버지와 나는 인디언식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사람들이 나더러 너무 단순하다는 말들을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할아버지가 `말`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던 것들을 떠올렸다. `단순한`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단순하다는 것은 좋은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단순하기 때문에 내가 언제나 잘해낼 것이라고 하셨다... 실제로도 그랬다. 예를 들면 어느 날, 도회지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 산을 찾아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할아버지는 반이 스코틀랜드계 혈통이었지만 자신을 인디언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예는 다른 사람들한테서도 찾을 수 있다. 저 위대한 붉은 독수리와 빌 웨더포드, 멕질버리 황제, 맥킨토시 같은 사람들이 모두 그랬다. 그들은 인디언들이 그러하듯이 자신들을 자연에 내맡겼다. 자연을 정복하거나 이용하려 들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인디언이라고 생각하길 좋아했고, 그 마음은 갈수록 커져서 마침내는 자신들을 백인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다. 인디언은 뭔가 팔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그것을 백인의 발 곁에 놓는다. 백인이 전혀 갖고 싶어하지 않으면 인디언은 그 물건을 집어들고 말없이 가버린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백인들은 그것을 `인디언 선물`이라고 부른다. 주었다가 도로 가져가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인디언이 누군가에게 선물을 줄 때는 아무 형식도 차리지 않고 그저 상대방의 눈에 띄는 곳에 선물을 놓아두고 그냥 가버린다. 인디언은 우의의 표시로 손바닥을 펴서 들어올려 보인다. 아무 무기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할아버지의 눈에는 충분히 이치에 맞는 이 행위가 백인들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비치곤 했다. 백인들은 악수로 같은 뜻을 표현하지만, 악수라는 것은 감칠 듯이 다정한 말을 입에 올리면서도 친구라고 하는 상대가 혹시라도 소매 속에 총을 숨기고 있을까봐 그것을 떨어뜨리기 위해 흔들어대는 행위라는 게 할아버지의 주장이셨다. 할아버지는 악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단 친구라고 생각한 상대를 의심하며 소매에서 뭔가를 떨어뜨리려는 사람이 좋게 보일 리 없었던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인사법이 생겨난 것이라고 할아버지는 생각하셨다. 그것은 상대방의 말에 대한 철저한 불신을 뜻했다. 나도 그 의견에 동감이었다.
인디언을 만나면 백인이 how!라고 말하고 키득거리는 것에 대해서, 할아버지는 이백년 전에 일어났던 일들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셨다. 그 당시 인디언이 백인을 만나면 백인들은 언제나 how(어떤가?)라고 묻는 것으로 시작했다. 기분이 어떤가? 라든가, 당신부족들은 어떤가? 지내기는 어떤가? 혹은 당신이 있은 곳의 사냥감은 어떤가?...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백인이 좋아하는 화제가 how로 시작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인디언들은 백인을 만났을 때 예의를 갖추려면 how라고만 말하고, 그 버르장머리없는 백인들이 직성이 풀릴 때까지 how라고 말하도록 내버려두면 된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인디언들이 how라고 말하는 것을 비웃는 사람들은 예의바르고 사려깊게 행동하려는 인디언을 비웃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날, 할아버지와 내가 물건을 짊어지고 사거리 상점으로 나갔을 때, 주인인 젠킨슨씨는 도회지에서 두 사람이 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 사람들이 체터누가에서 왔으며, 기다란 검은 승용차를 몰고 왔다고 했다. 또 젠킨슨씨는 그 두 사람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할아버지는 큰 모자 그늘 밑에서 젠킨슨씨를 쳐다보았다.
“세무관리요?” “아니오. 관리가 아니고 위스키 판매업을 하는 사람이라더군요. 당신이 훌륭한 위스키를 만든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하면서 커다란 증류기를 제공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니 그 사람들과 손잡고 일하면 당신은 큰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요.”
할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할머니에게 줄 커피와 설탕을 샀다. 나는 여느때처럼 나뭇단을 가져다준 보답으로 젠킨슨씨에게서 오래된 사탕을 받았다. 젠킨슨씨는 할아버지의 대답을 듣고 싶어서 안절부절 못했다. 하지만 그는 할아버지를 잘 아는 터라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 사람들은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어요.”
젠킨슨씨가 말했다. 할아버지는 치즈를 약간 샀다... 나는 치즈를 좋아했기 때문에 기분이 무척 좋았다. 우리는 가게 밖으로 나왔지만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빠른 속도로 걸으셨다. 덩굴열매 딸 틈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사탕도 할아버지 뒤에서 종종걸음을 치며 따라가는 동안에 먹어야 했다. 집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도회지에서 온 남자들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나에게는 이렇게 부탁했다.
“작은 나무야, 너는 여기에 있거라. 나는 증류기가 있는 곳에 가서 나뭇가지를 더 덮어놓으마. 그 사람들이 오거든 내가 알 수 있게 신호를 하도록 하고.”
할아버지는 골짜기 길로 올라가셨다. 나는 앞 베란다에 앉아서 도회지 사람들이 오는지 망을 보았다. 할아버지의 모습이 나무숲 사이로 채 사라지기도 전에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할머니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할머니와 나는 `개통로`에 서서 그들이 산길을 올라와 통나무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할머니는 내 뒤쪽에 서 계셨다. 두 사람을 정치가만큼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뚱뚱한 남자는 엷은 자주색 양복에 흰 넥타이를 하고 있었고, 마른 사람은 흰 양복에 광택이 나는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둘 다 가느다란 짚으로 엮은 도시풍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곧장 베란다 앞까지 왔지만 계단으로 올라오지는 않았다. 뚱뚱한 남자는 땀을 많이 흘리는 편이었다. 그가 할머니를 쳐다보면서 소리쳤다.
“이 집 영강님을 만났으면 합니다.”
그는 몸 어딘가가 안 좋은 사람 같았다. 숨소리가 거칠었고 눈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불룩한 살덩어리에 묻혀서 가늘게 찢어져 보였다. 할머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아무 말이 없자, 뚱뚱한 남자는 말라깽이 동료를 돌아보며 말했다.
“슬리크(교활하다는 뜻-옮긴이), 저 인디언 할멈은 영어를 모르는 모양이야."
뭔가 켕기는 사람처럼 슬리크씨가 자기 어깨너머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높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할망구를 윽박질러봐. 나는 이런 곳이 마음에 안 들어, 천크(땅딸보라는 뜻-옮긴이). 산속에 너무 깊이 들어왔잖아.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어.”
슬리크씨의 코밑에는 콧수염이 달려 있었다.
“입 닥쳐!”
천크씨는 모자를 뒤로 젖혔다. 그의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한올도 없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는 내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이애는 혼혈인데, 영어를 할 수 있을지 몰라. 얘, 꼬마야, 영어 할 줄 아니?" “그런 것 같아요.” 내 대답을 듣고 천크씨가 슬리크씨를 돌아보았다. “자네, 들었나... 할 수 있대.”
처음에는 서로 마주보며 겸연쩍은 웃음을 흘리던 그들은 얼마 안 가 큰 소리로 키들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할머니는 집 뒤쪽으로 가서 블루보이를 풀었다. 블루보이는 할아버지를 찾아서 계곡으로 쏜살같이 뛰어올라갔다.
“아빠는 어디 있니, 꼬마야?” 천크씨가 다시 물었다.
나는 그에게 아빠를 기억하지 못하며, 여기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천크씨는 그럼 할아버지는 어디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집 뒤쪽의 산길을 가리켰다. 천크씨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1달러짜리 은화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우리를 할아버지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면 이 돈을 주마, 꼬마야”
그의 손가락에는 커다란 반지가 여러 개 끼어져 있었다. 나는 그가 부자여서 1달러쯤 은 얼마든지 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나는 그것을 받아서 주머니 속에 넣었다. 나도 셈을 할 줄 안다. 이 1달러를 할아버지와 나누더라도 기독교에게 사기당한 50센트를 고스란히 되찾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산길을 올라갔다. 그렇지만 걷기 시작하자 증류기 있는 곳으로 그들을 데려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산꼭대기 가는 길로 그들을 데려갔다. 산 위로 올라가면서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천크씨와 슬리크씨는 기분이 꽤 좋은 것 같았다. 그들은 윗도리를 벗고 내 뒤에 한참 처져서 따라왔다. 두 사람 다 허리에 총을 차고 있었다. 슬리크씨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꼬마야, 아빠에 대한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나는 걸음을 멈추고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런 넌 사생아인가 보구나. 그렇지, 꼬마야?”
나는 그럴 거라고 대답했다. 아직 사전에서 B까지 진도가 나가지 않아 `사생아(bastard)`라는 말의 뜻을 알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두 사람은 너무 심하게 웃는 바람에 기침까지 했다. 나도 덩달아 웃었다. 두 사람 다 무척 쾌활한 사람들인 것 같았다. 천크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기랄, 이곳은 온통 짐승투성이구먼.”
나는 산에는 짐승들이 무척 많다. 들고양이, 산돼지... 게다가 할아버지와 나는 언젠가 곰을 본 적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슬리크씨는 우리가 곰을 본 게 최근의 일인지 알고 싶어했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 보지는 않았지만 남긴 발자국을 보았다고 대답했다. 나는 곰 발자국이 남아 있는 미루나무를 가리켰다.
“아, 저 나무에 발자국이 있어요.”
천크씨는 갑자기 뱀에게 습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옆으로 홱 물러섰다. 그 바람에 그는 슬리크씨와 부딪쳤고, 슬리크씨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슬리크씨는 화가 났다.
“망할 놈의 자식, 천크! 산비탈로 굴러떨어질 뻔했잖아! 네가 저기서 날 넘어뜨리면...”
슬리크씨가 저 아래쪽 계곡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목을 쑥 빼고 나란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아래쪽에 실처럼 가는 시냇물이 보였다.
“하느님 맙소사! 도대체 얼마나 올라온 거야? 젠장, 떨어지면 뼈도 못추리겠군.”
나는 천크씨에게 우리가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꽤 높을 거라고 말했다. 비록 그전에는 높다는 생각 같은 건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높이 올라갈수록 천크씨와 슬리크씨의 기침도 심해졌다. 그들은 점점 더 뒤처졌다. 한번은 그들을 찾으러 도로 내려가보니 그들은 흰참나무 아래에서 큰대자로 뻗어 누워 있었다. 흰참나무의 뿌리 근처에는 독담쟁이가 자라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한가운데에 누워 있었다. 독담쟁이는 눈으로 보기에는 예쁘고 깨끗한 녹색 이파리들이이지만, 그 위에서 잠을 자는 일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온몸이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부어오르고, 따끔거리며 아픈 증세가 몇개월씩 계속된다. 나는 그들에게 독담쟁이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어쨌든 엎질러진 물이라 굳이 이야기를 해서 그들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은 몸이 안 좋은 것 같았다. 내가 내려가자 슬리크씨가 머리를 들었다.
“사생아 꼬마, 잘 들어. 도대체 얼마를 더 가야 하냐?”
천크씨는 얼굴을 들지도 않고 눈을 감은 채로 독담쟁이 한가운데 그대로 누워 있었다. 나는 이제 다 왔다고 대답했다. 나는 아까부터 계속 궁리를 했다. `할머니는 내가 산꼭대기로 온 걸 아시니까 할아버지를 뒤따라 보내실 것이다. 그러니까 산꼭대기에 도착하면 슬리크씨와 천크씨에게 할아버지가 곧 오실 테니까 앉아서 잠깐 기다리자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얼마 안 있어 오실 거야. 틀림없이 그럴 거야.` 나는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것이며, 어쨌든 그들은 할아버지에게 데려다준 셈이니까 1달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슬리크씨가 천크씨를 부축하여 독담쟁이 있는 곳에서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은 비틀거리면서 내 뒤를 따라왔다. 둘 다 윗도리는 독담쟁이 위에 벗어던져두고 왔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집어가면 되니까 괜찮다고 천크씨는 말했다. 내가 산꼭대기에 도착한 것은 두 사람보다 훨씬 먼저였다. 지금 온 길은 산의 능선을 누비고 다니던 체로키들이 낸 산길들 중의 하나인데, 반대쪽으로 내려가면 얼마 안 가 길이 갈라지고, 다시 내려가다보면 또 몇 갈래로 갈라지기를 반복했다. 할아버지는 산속까지 그물망처럼 엮어 있는 길을 모두 합치면 오백리는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산꼭대기 바로 밑, 길이 갈라지는 지점의 덤불 아래에 앉았다. 한쪽은 산꼭대기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또 다른 한쪽은 산의 반대편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는 길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기다리다가 천크씨와 슬리크씨가 도착하면, 할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그곳에 앉아 기다리자고 말할 작정이었다. 두 사람이 산꼭대기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뚱뚱한 천크씨는 슬리크씨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심하게 절뚝거리면서 걸어왔다. 발을 다친 것 같았다. 천크씨는 슬리크씨를 보고 사생아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까는 슬리크씨가 자신도 사생아라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천크씨는 애초에 산골 촌놈한테 일을 맡기겠다는 발상을 한 게 슬리크씨가 아니냐고 따졌다. 슬리크씨도 지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인디언 영감을 찾자고 한 건 너 아니었냐, 이 후레자식아!”
두 사람은 소리소리 지르면서 내 앞을 지나쳐갔다. 나는 그들에게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할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말을 하고 있을 때 끼여들어선 안된다고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늘상 받아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대로 곧장 산 반대쪽으로 나 있는 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이 나무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곳은 양쪽 산 사이에 끼인 험한 골짜기로 들어서는 길이었다. 나는 그냥 이곳에서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다지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블루보이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내 자취를 냄새 맡으면서 꼬리를 흔들고 올라오는 블루보이를 보았다. 문득 쏙독새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쏙독새 소리 같은데... 하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그렇게 어두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게 할아버지의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나도 쏙독새 소리로 응답했다. 거의 비슷하게 흉내를 냈지 싶다. 늦은 오후 햇살을 비스듬하게 받으며 나무 사이를 빠져나오는 할아버지의 그림자가 보였다. 할아버지는 길을 따라온 것이 아니었다.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원할 때면 언제든지 이렇게 미끄러지듯 걸을 수 있었다. 드디어 할아버지가 내 앞에 나타났다.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나는 슬리크씨와 천크씨가 산 아래쪽으로 내려갔다는 것과, 또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에 그들이 떠들어대던 말들을 생각나는 대로 전부 이야기했다. 할아버지는 뭐라고 우물거리셨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으셨다. 대신 할아버지는 눈썹을 있는 대로 찡그리셨다. 할머니가 자루에 음식을 담아서 보내주어 우리는 삼나무 밑에 않아서 그것들을 먹었다. 높은 산 위에서 먹는 옥수수빵과 밀가루를 묻혀 요리한 메기는 정말 맛이 기가 막혔다. 우리는 그것들을 깨끗이 먹어치웠다. 나는 주머니에서 1달러짜리 은화를 꺼내서 할아버지에게 보여드렸다. 내가 일을 잘해냈다고 천크씨가 판단하면 내 몫이 될 수 있는 돈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잔돈으로 바꾸면 둘이서 절반씩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천크씨를 만나러 여기에 왔으니 내 할 일을 다한 것이라고 하시며, 1달러는 통째로 내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젠킨슨씨 가게에서 보았던 빨갛고 파란 무늬의 그 상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내가 그 사탕상자가 1달러는 넘지 않을 것 같다고 하자, 할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셨다. 저 멀리 아래쪽에서 외침소리가 들렸다. 벼랑길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천크씨와 슬리크씨 일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사방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산자락에서 쏙독새와 산새들이 울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일어서서 양손을 입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야아아아... 호오오오...”
할아버지는 아래쪽을 향해 쥐어짜듯이 길게 소리를 질렀다. 맞은편 산에 부딪친 그 소리는 마치 할아버지가 그쪽으로 건너가기라도 한 것처럼 또렷하게 되돌아왔다. 다시 벼랑 있는 곳에 가서 부딪친 그 소리는 계곡 아래로 굴러 내려가면서 점점 약해졌다. 메아리가 이렇게 번져가면 첫소리가 어디서 왔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다. 그런데 메아리가 거의 사라졌을 때 우리는 산 아래쪽 벼랑에서 울리는 세 발의 총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도 이곳저곳에서 메아리를 만들어내며 사라져갔다.
“총이야! 놈들이 총성으로 대답하고 있어.” 할아버지가 다시 한번 고함을 질렀다. “야아아아... 호오오오...” 나도 뒤따라 외쳤다.
우리 두 사람의 외침소리로 메아리들은 서로 뒤엉켜 튀어 오르며 춤을 추었다. 다시 세 발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와 나는 계속 고함을 질렀다.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는 건 무척 재미있는 일이다. 총소리는 우리들이 소리칠 때마다 답을 보내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총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우리도 더불어 외치는 걸 그만두었다.
“총알이 떨어졌구나.”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주변은 완전히 어두어졌다. 할아버지는 기지개를 켜고 나서 하품을 했다.
“작은 나무야, 저 사람들을 도와주러 굳이 이 밤에 저 아래까지 달려 내려갈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그냥 놔둬도 괜찮을 거다. 내일 아침에 도와주러 가도록 하자꾸나.”
나 역시 그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와 나는 삼나무 아래에 어린 가지들을 깔고 그 위에서 잠을 잤다. 봄이나 여름에 산에서 야영을 할 때는 어린 가지들 위에서 자는 것이 제일 좋다. 그렇지 않으면 빨간 진드기들에게 온통 빨아 먹히고 만다. 빨간 진드기는 워낙 작아서 맨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몇 백만 마리나 되는 놈들이 풀잎마다 덤불마다 새까맣게 깔려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사람에게 들러붙어서 살 속으로 파고들기 때문에 온몸에 좁쌀 같은 발진이 돋곤 한다. 빨간 진드기가 유달리 극성을 부리는 해가 있다. 올해가 바로 그런 해였다. 산 속에는 나무진드기라는 또 다른 진드기 종류도 있었다. 할아버지와 나, 그리고 불루보이는 어린 가지로 만든 침대에 기어올라갔다. 불루보이는 몸을 구부리고 내 옆에 누웠다. 차가운 밤 기온 속에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가지들은 부드럽게 쿨렁거렸다. 나는 졸음이 몰려와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나는 머리밑에 깍지를 끼고 똑바로 누워서 달이 뜨는 것을 바라보았다. 둥그렇고 노란 달이 저 먼산 위로 미끄러지듯이 올라왔다. 오늘 밤에는 30리 앞까지도 볼 수 있겠다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분무기로 뿌려놓은 듯한 달빛 속에서 산들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솟아 있었고,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골짜기들은 진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 멀리 우리 발밑에서는 안개가 띠를 이루며 떠다녔다... 안개들은 골짜기들을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산자락을 뱀처럼 휘감기도 했다. 조그만 안개띠 하나가 돛단배처럼 산허리를 돌아나오더니 또 다른 안개띠와 부딪쳤다. 두 줄기 안개는 서로 함께 어우러지며 뒤섞이더니 이번에는 산골짜기 위로 휘휘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바로 옆에 있는 느릅나무 꼭대기에 앵무새가 자리를 잡고 앉아 노래를 불렀다. 산 저 뒤쪽에서는 들고양이들이 짝짓기하는 소리도 들렷다. 그놈들은 미친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짝짓기를 하면 아주 기분이 좋기 때문에 들고양이들도 저런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다고 할아버지가 설명해주셨다. 나는 매일 밤 산꼭대기에서 잤으면 좋겠다고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할아버지 자신도 그렇다고 하셨다. 바로 아래쪽에서 올빼미가 새된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그런데 짐승의 소리가 아닌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저 멀리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할아버지는 천크씨와 슬리크씨의 소리라고 하셨다. 그들이 조용히 하지 않으면 산허리에 사는 새들과 짐승들이 무척 괴로울 거라고 하시면서. 나는 달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우리는 첫새벽에 눈을 떴다. 높은 산 위에서 바라본 새벽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멋진 것이었다. 할아버지와 나, 블루보이까지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늘은 밝은 회색빛을 띠고 있었고. 숲에서는 새들이 일어나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푸득거리고 날아다니며 수선을 떨었다.
“봐라!”
세상의 끝, 아스라이 보이는 산등성이 위로 거대한 붓으로 칠해놓은 듯한 분홍빛 줄이 드넓은 하늘 전체를 가로지르며 깔려 있었다. 아침 바람이 불어와 우리 얼굴을 때렸다. 이제 그 분홍빛 띠는 빨강, 노랑, 파랑의 줄무늬로 변해갔다. 나와 할아버지는 그 색깔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침이 탄생하고 있는 중이었다. 멀리 있는 산등성이가 불이 붙은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는가 싶더니, 드디어 해가 숲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해는 발밑에 자욱이 깔린 안개바다를 넘실거리는 분홍빛 바다로 바꾸었다. 햇빛이 할아버지와 내 얼굴을 때렸다. 온 세상이 불타는 것처럼 벌게졌다. 할아버지는 항상 그래왔다고 하시면서 모자를 벗으셨다. 우리는 그 광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할아버지와 나는 같은 생각을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언젠가 이 산꼭대기로 와서 아침이 태어나는 것을 다시 한번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할아버지와 나 사이의 말없는 약속이었다. 어느새 해는 발목을 잡아당기던 산에서 벗어나 하늘 가운데 동그마니 떠 있었다. 할아버지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 기지개를 켜듯이 온몸을 쭉 뻗고 나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 우린 할 일이 있어. 네가 할 일은...”
할아버지는 머리를 긁적이시더니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네가 할 일은 뭐냐 하면, 먼저 집으로 가서 할머니에게 우리가 이곳에 좀더 있게 될 것 같다고 전하는 거다. 그리고 너와 내가 먹을 걸 요리해서 종이봉지에 담아달라고 하고, 저 도회지 사람들이 먹을 만한 건 따로 조리해서 마댓자루에 담아달라고 해라. 종이봉지와 마댓자루, 잊어버리지 않겠지?”
나는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집을 향해 걸음을 떼놓기 시작했다. 그때 할아버지가 나를 다시 불러세우면서 뭔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른것처럼 실실 웃으셨다.
“그리고 작은 나무야, 할머니가 그 두 사람 먹을 걸 조리하기 전에 그 친구들이 너에게 떠들었던 것들을 모조리 할머니에게 이야기해드려라.”
나는 그러겠노라고 하고 길을 따라 뛰어내려갔다. 불루보이가 따라왔다. 등뒤에서 할아버지가 천크씨와 슬리크씨에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야아아아아아, 호오오오오...”
나도 할아버지와 함께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렇지만 산길을 걸어내려 가는 것도 싫지는 않았다. 특히 이렇게 이른 아침 시간에는 말이다. 온갖 생물들이 하루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밖으로 나오는 시간이었다. 호두나무의 높은 가지에 너구리 두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놈들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내가 그 나무 밑을 지나자 뭐라고 말을 걸었다. 다람쥐들이 길을 가로질러 폴짝거리고 뛰어갔다. 그 옆을 지나치려니까 다람쥐들은 앞발을 모으고 일어서서 찌익찌익하고 나에게 떠들어댔다. 산길을 걸어내려오는 동안 온갖 새들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내 앞으로 날아다녔다. 앵무새 한 마리는 나와 블루보이 뒤를 한참 동안이나 따라오다가, 내 머리 위에 내려앉아서 장난을 걸었다. 앵무새들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한다. 나는 앵무새를 무척 좋아했다. 밭 있는 데까지 가자, 오두막집의 뒷문 입구에 할머니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는 새들 모습을 보고 내가 내려오는 걸 알고 계셨던 것 같았다. 사실 할머니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도 한번도 놀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가 냄새를 맡아서 알아내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종이봉지에는 할아버지와 내가 먹을 것을 담고, 천크씨와 슬리크씨가 먹을 음식은 마댓자루에 따로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할머니는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내가 먹을 걸 조리하고 난 할머니는 천크씨와 슬리크씨가 먹을 생선을 튀기기 시작했다. 그때 할아버지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그들이 떠들어대던 말들을 기억나는 대로 할머니에게 이야기해드렸다. 한창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프라이팬을 불에서 내려놓더니 대신 물을 가득 부은 냄비를 올려놓으셨다. 할머니는 천크씨와 슬리크씨가 먹을 생선을 냄비 속에 집어넣었다. 튀기지 않고 생선찜으로 만들기로 마음을 바꾸신 것 같았다. 또 할머니는 나무뿌리 가루도 냄비 속에 집어넣었다. 나는 이제까지 한번도 할머니가 요리할 때 그 가루를 넣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생선은 금방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천크씨와 슬리크씨는 아주 쾌활한 사람들인 것 같다, 처음에는 내가 사생아라서 우리 모두가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슬리크씨도 사생아여서 그걸 두고 웃은 것 같다, 천크씨가 슬리크씨를 그렇게 부른 걸로 봐서 그건 확실하다고 말씀드렸다. 할머니가 나무뿌리 가루를 다시 한번 집어 냄비 속에 넣었다. 나는 1달러에 대해서도 할머니에게 이야기했다. 내 할 일을 다했으니 그 돈을 가져도 된다고 한 할아버지의 말씀도 전해드렸더니, 할머니도 같은 의견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빨갛고 파란 상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근처에 기독교도가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주의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김이 자욱이 오를 때까지 생선을 끓였다. 할머니는 눈물을 줄줄 흘렸고 코까지 연방 풀어대셨다. 할머니는 김 탓인 것 같다고 하시면서 도회지 사람들이 먹을 생선을 마댓자루에 담아주셨다. 나는 다시 산길을 올라갔다. 할머니가 개들을 모두 풀었기 때문에 개들도 나와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산꼭대기에 도착해보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휘파람을 불자 산 반대편 중턱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나도 그쪽으로 내려갔다. 그 길은 좁고 나무가 빽빽이 우거져 있었다. 한참 길을 따라 내려가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이제 두 사람이 벼랑길을 거의 다 올라왔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두 사람이 할아버지의 고함소리에 상당히 규칙적으로 대답하는 걸로 봐서 얼마 안 있으면 모습을 나타낼 것이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내 손에서 생선이 든 자루를 받아 나뭇가지에 매달았다. 길 바로 위라서 그 사람들도 금방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길을 약간 도로 올라와 작은 감나무숲에 자리를 잡은 할아버지와 나는 점심을 먹기 위해 종이 봉지를 열었다. 해는 이제 머리꼭대기 바로 위에 솟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옥수수빵과 생선을 먹는 동안 개들을 앞드려 있게 했다. 할아버지는 소리를 듣고 찾아오려면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 천크씨와 슬리크씨를 이해시키는 데 꽤 애를 먹었지만, 이제 드디어 그 사람들이 제대로 찾아오고 있다고 하셨다. 그러자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그 사람들을 잘 알지 못했더라면 틀림없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셔츠는 갈가리 찢어지고 팔과 얼굴은 찢기고 긁힌 상처투성이었다. 마치 들장미덤불 사이를 뚫고 나온 사람들 같았다. 얼굴 전체가 온통 벌겋게 부어오른 건 왜 그런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할아버지가 속삭이셨다. 그들이 그렇게 된 건 틀림없이 어제 독담쟁이 위에 드러누운 것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 탓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크씨는 한쪽 발에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휘청거리며 걸어올라왔다. 길 위에 마댓자루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본 그들은 그것을 끌렀다. 그들은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할머니가 보낸 생선을 허겁지겁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서로 상대방이 더 많이 먹었다고 하면서 다투길 그치지 않았다. 우리 앉은 자리에서는 그들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두 사람은 그늘진 길바닥에 드러누워버렸다. 나는 할아버지가 그곳으로 내려가 그들을 일으켜 세울 걸로 생각했는데 왠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우리는 그대로 앉아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들이 쉬었다 가게 잠시 놔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휴식은 얼마 가지 않아 끝이 났다. 천크씨가 벌떡 일어났다. 몸을 구부린 채 배를 움켜잡고 있는 그의 모습이 나무 사이로 보였다. 그는 길옆 풀숲으로 뛰어들더니 바지를 끌러내렸다. 쭈그리고 앉은 그의 입에서는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구 젠장! 뱃속이 다 뒤집히는 것 같구나.”
슬리크씨도 휴식을 끝내고 풀숲으로 달려가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신음하고, 소리를 지리고, 땅 위를 굴러다녔다. 한참 만에 덤불에서 기어나온 두 사람은 다시 길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하지만 그다지 오래지 않아 그들은 벌떡 일어났고 풀숲으로 뛰어들어가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그들이 어찌나 시끄럽게 난리를 쳐댔던지 개들이 그르렁거리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개들을 달랬다. 내가 할아버지에게 그 사람들이 독담쟁이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 같다고 하자, 할아버지도 그런 것 같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또 독담쟁이 이파리로 밑을 닦는 것 같다고 말했더니, 할아버지도 정말 그런 것 같다고 하셨다. 한번은 풀숲으로 뛰어들어간 슬리크씨가 바지를 제때 내리지 못했다. 그 다음부터 그는 붕붕거리며 날아드는 파리 때문에 한참 동안 시달려야 했다. 이런 일이 한 시간쯤 계속되자, 그들은 길바닥으로 와서 완전히 뻗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그들이 먹은 게 그들 체질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라고 하셨다. 할아버지가 길로 내려서시더니 그들이 있는 아래쪽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팔꿈치와 무릎만으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일어선 그들이 할아버지와 내가 있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를 보는 것 같았다고 할 것이다. 눈꺼풀이 퉁퉁 부어 있어서 눈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잠깐 기다려요.” 천크씨가 비명을 질렀다. 슬리크씨도 새된 소리를 냈다. “제, 제발 거기에 있어요.”
겨우겨우 몸을 지탱하고 일어선 두 사람은 휘청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나는 다시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뒤를 돌아보니, 그들은 절뚝거리며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제 우리는 집으로 내려가도 괜찮겠다고 하셨다. 이제 그 사람들도 길을 알테니 제대로 내려올 거라고 하시면서. 할아버지와 내가 오두막집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오후가 다된 시간이었다. 우리 세 사람은 뒷문 베란다에 앉아서 천크씨와 슬리크씨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이 빈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러고도 두 시간이 더 지나서 주위가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천크씨는 나머지 한쪽 신발까지 잃어버렸는지 발끝으로 걸었다. 그런데 그들은 곧장 집으로 오지 않고 집을 피해서 빙 돌아 내려갔다. 나는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어하는 걸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마음을 바꾼 모양이었다. 할아버지에게 1달러를 가져도 괜찮을지 물어보았더니, 내 할 일을 다했으니 괜찮다, 그 사람들이 마음을 바꾼 건 내 탓이 아니라고 하셨다. 맞는 말씀이었다. 나는 오두막집을 돌아나와 그들 뒤를 따라갔다. 그 사람들은 통나무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을 향해서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잘 가세요, 천크씨. 잘 가세요, 슬리크씨. 천크씨, 1달러 고마워요.”
천크씨가 뒤를 돌아보더니 내게 주먹을 흔들었다. 그 순간 그는 통나무 다리에서 미끄러져 개울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발이 미끄러지면서 천크씨가 슬리크씨를 붙잡는 바람에 슬리크씨까지 떨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슬리크씨는 균형을 유지하면서 잽싸게 통나무다리를 건넜다. 슬리크씨가 천크씨에게 “이 매춘부 자식아!”라고 욕을 했다 간신히 개울가로 기어오른 천크씨도 채터누가로 가면,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반드시 슬리크씨를 죽이고 말겠다고 맞받았다. 나는 두 사람 사이가 어째서 그렇게 나빠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드디어 산골짜기 아래로 내려간 그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할머니가 개들을 보내 그 사람들 뒤를 쫓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지만, 할아버지는 그 사람들이 완전히 지쳐 있기 때문에 별문제 없을 거라며 괜찮다고 말리셨다. 할아버지는 그 두 사람이 그 지경이 된 건 할아버지와 내가 자신들의 위스키 장사를 도와주리라고 잘못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 사람들 덕분에 할아버지와 나는 만 이틀이나 되는 소중한 시간을 빼앗겨버렸다. 그렇지만 나한테는 1달러가 남았다. 나는 다시 한번 동업자로서 그 1달러를 기꺼이 나눌 용의가 있다고 할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했지만 할아버지는 거절하셨다. 그 1달러는 위스키 장사와는 별개로 번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할아버지는 모든 걸 고려해봤을 때 일에 비해서 그다지 나쁜 돈벌이는 아니라고 하셨다. 사실 그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