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포리스트 카터
과거를 알아둬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에게 지난 일들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하셨다. 두분은,
“지난 일을 모르면 앞일도 잘 해낼 수 없다. 자기 종족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면 어디로 가야 될지도 모르는 법,”
이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이 때문에 두 분은 나에게 옛날 일들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주셨다. 정부군이 들어온 이야기며, 체로키족이 비옥한 골짜기에서 농사짓던 이야기, 생명들이 싹트는 봄이 되면 열리는 짝짓기 잔치 이야기와, 수사슴과 암사슴, 수탉과 암탉이 발정나서 새끼를 갖게 되는 이야기... 또 호박이 무르익고 감이 발갛게 익고 옥수수가 여물어가는 늦가을 무렵이면 열리던 추수감사제 이야기와 자연의 이치에 따를 것을 맹세한 후에야 벌어졌던 겨울사냥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그중에서 정부군이 인디언들을 강제이주시킨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날 정부군 병사들이 찾아와 종잇조각 하나를 내보이며 서명을 하라고 했다. 새로운 백인 개척민들에게 체로키족의 토지가 아닌 곳에 정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서류라고 하면서, 체로키들이 거기에 서명을 하자, 이번에는 더 많은 정부군 병사들이 대검을 꽂은 총으로 무장을 하고 찾아왔다. 병사들 말로는 그 종이에 적힌 내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 종이에는 체로키들이 자기들의 골짜기와 집과 산을 포기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체로키들은 저 멀리 해지는 곳으로 가야 했다. 그 곳에 가면 체로키들이 살도록 정부에서 선처해준 땅, 하지만 백인들은 눈곱 만치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황량한 땅이 있었다. 병사들은 그 드넓은 골짜기를 총으로 빙 둘러쌌다. 밤이 되면 빙 돌아 피워놓은 모닥불이 총을 대신했다. 병사들은 체로키들을 그 원 속으로 밀어 넣었다. 다른 산과 골짜기에 살고 있던 체로키들까지 끌려와 우리 속에 든 소 돼지처럼 계속 그 원 안으로 밀어넣어졌다. 이런 상태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 체로키들을 거의 다 잡아들였다고 생각한 그들은 마차와 노새를 가져와, 체로키들에게 해가 지는 그곳까지 타고 가도 좋다고 했다. 체로키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차를 타지 않았다. 덕분에 체로키들은 무언가를 지킬 수 있었다. 그것은 볼 수도 입을 수도 먹을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지켰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갔다. 정부군 병사들은 체로키들의 앞과 뒤, 양옆에서 말을 타고 걸어갔다. 체로키 남자들은 똑바로 앞만 쳐다보고 걸었다. 땅을 내려다보지도 않았고 병사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남자들 뒤를 따라 걷던 여자들과 아이들도 병사들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기나긴 행렬의 맨 뒤쪽에는 아무 쓸모 없는 텅 빈 마차가 덜그럭거리며 따라왔다. 체로키는 자신들의 영혼을 마차에 팔지 않았다. 땅도 집도 모두 빼앗겼지만, 체로키들은 마차가 자신들의 영혼을 빼앗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백인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갈 때면 백인들은 양옆으로 늘어서서 체로키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처음에 백인들은 덜그럭거리는 빈 마차들을 뒤에 달고 가는 체로키들을 보고 멍청하다고 비웃었다. 체로키들은 웃는 사람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백인들도 입을 다물었다. 이제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향 산에서 멀어져가자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가기 시작했다. 비록 체로키의 혼은 죽지도 약해지지도 않았지만, 어린아이와 노인들과 병자들이 그 까마득한 여행길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처음에는 병사들도 행렬을 멈추고 죽은 사람을 묻을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 수는 순식간에 몇백 몇천으로 불어나, 결국 전체의 삼분의 일이 넘는 체로키들이 행진중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3일에 한번씩만 매장할 시간을 주겠노라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마치고 체로키들에게서 손을 떼고 싶은 게 병사들의 심정이었다. 병사들은 죽은 사람들을 수레에 싣고 가라고 했지만, 체로키들은 시신을 수레에 누이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안고 걸었다. 아직 아기인 죽은 여동생을 안고 가던 조그만 남자아이는 밤이 되면 죽은 동생 옆에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면 그 아이는 다시 여동생을 안고 걸었다. 남편은 죽은 아내를, 아들은 죽은 부모를, 어미는 죽은 자식을 안은 채 하염없이 걸었다. 병사들이나 행렬 양옆에 서서 자신들이 지나가는 걸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리는 일도 없었다. 길가에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 중 몇몇이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체로키들은 울지 않았다. 어떤 표정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마음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체로키들은 마차에 타지 않았던 것처럼 울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이 행렬을 눈물의 여로라 부른다. 체로키들이 울었기 때문이 아니다. 낭만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또 그 행렬을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슬픔을 표현해주기 때문에, 그들은 이 행렬을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죽음의 행진은 절대 낭만적일 수 없다. 과연 누가 어미의 팔에 안긴 채 뻣뻣하게 죽어 있는 아기. 어미가 걸어가는 동안 감가지 않은 눈으로 흔들거리는 하늘을 노려보고 있는 아기를 소재로 시를 지을 수 있겠는가? 과연 누가 밤이 되면 아내의 주검을 내려놓고 온밤 내내 그 옆에 누워 있다가 아침이 되면 일어나 그 주검을 옮겨가야 하는 남편과, 장남에게 막내의 시신을 안고 가라고 말해야 하는 아버지... 그리고 쳐다보지도... 말하지도... 울지도... 고향산을 떠올리지도 않는 이들을 소재로 노래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절대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행렬을 눈물의 여로라 불렀다.(1838~1839년에 걸쳐 1만 3천여 명 정도의 체로키들이 차례로 오클라호마의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1,300킬로미터의 행진중에 추위와 음식부족, 병, 사고 등으로 무려 4,000여 명 정도의 체로키들이 죽었다고 한다-옮긴이) 체로키들 모두가 그 행렬에 끌려간 것은 아니었다. 산길에 익숙한 일부 체로키들은 깊숙한 계곡이나 먼 산등성이 쪽으로 달아났다. 이들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끊임없이 옮겨다니면서 살았다. 이들은 덫을 놓아서 짐승을 잡곤 했는데, 군대가 그곳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덫을 놓아둔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때도 많았다. 또 이들은 땅에서 부드러운 뿌리들을 캐내거나, 도토리를 빻아 가루로 만들거나, 개간지에서 기른 얼마 안되는 작물을 거두거나, 나무의 속껍질을 벗겨내어 끼니를 때웠다. 가끔씩 차가운 개울물 속에서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는 일도 있었지만, 이때도 변함없이 이들의 움직임은 그림자처럼 조용했다. 그래서 설사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도 잠깐 바람처럼 휙 지나가는 느낌 외에는 그들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사실 그들은 자취를 남기는 법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동료들끼리는 잘 찾아냈다. 우리 증조할아버지의 가족들도 모두 산에서 자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토지나 재산을 탐내지 않았다. 다른 체로키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이 원했던 것도 오로지 산속에서의 자유로운 생활뿐이었다.
증조할아버지가 증조할머니를 만난 이야기는 할머니가 해주셨다. 어느 날 증조할아버지는 계곡 둑 위에서 아주 희미한 흔적 하나를 찾아냈다. 그것을 본 증조할아버지는 집으로 가서 사슴 뒷다리를 가져와, 흔적이 있던 자리에 놔두었다. 총과 칼도 그 옆에 함께 두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다시 가보니 사슴 뒷다리는 온데간데없고, 총과 칼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게다가 그 옆에는 기다란 인디언 칼 한 자루와 도끼까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증조할아버지는 그것들을 그대로 놔둔 채 집에 가서 옥수수를 가져왔다. 할아버지는 옥수수 자루를 무기 옆에 놓고 오랫동안 서서 기다렸다. 오후 늦게 그들이 조용히 다가왔다. 나무 사이를 걸어오다가 잠시 멈추어 주위를 살핀 다음 다시 앞으로 걷는 식으로 하면서 말이다. 증조할아버지가 손을 내밀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남자, 여자, 아이들까지 모두 합쳐 열두 식구나 되는 그 집 사람들도 하나같이 손을 내밀며 걸어왔다. 마침내 그들의 손과 증조할아버지의 손이 맞닿았다. 할머니 말로는 서로 손이 맞닿기까지 꽤 먼 거리였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손을 내밀고서 걸었다고 한다. 얼마 안 있어 키가 훌쩍 자란 증조할아버지는 그 집안의 막내딸과 결혼했다. 두 분은 히코리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함께 붙들고 혼인서약을 한 다음, 그 지팡이를 평생 동안 집안에 잘 모셔두었다. 증조할머니는 찌르레기의 붉은 깃털을 항상 머리에 꽂고 다녔기 때문에 붉은 날개라고 불렸다. 버드나무처럼 날씬했던 증조할머니는 저녁이 되면 항상 노래를 불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증조할아버지의 말년 모습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셨다. 증조할아버지는 남북전쟁(1861~1865년, 노예제의 존속을 둘러싸고 북부와 남부 사이에서 일어난 내전. 체로키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들은 남부연합에 가담하여 북부의 연방과 싸웠다. 남부의 패배로 인디언들은 이전의 조약상의 권리들을 많이 잃었다-옮긴이)의 용사였다. 증조할아버지는 존 헌트 모건 장군이 이끄는 남부군 특공대에 가담하여, 보이지 않는 머나먼 곳에 앉아 자신의 종족과 집을 위협하는, 얼굴없는 유령, `연방군`(북군을 말한다-옮긴이)에 대항하여 싸웠다. 말년에 증조할아버지의 머리는 하얗게 세었다. 몸도 무척 쇠약해져 오두막집 틈새로 겨울바람이 파고들 때마다 옛 상처가 도지곤 했다. 증조할아버지의 왼쪽 팔에는 기다랗게 팬 칼자국이 있었다. 마치소 잡을 때 내려치는 도끼처럼 그렇게 억세게, 쇠칼이 할아버지의 팔뼈를 내려쳤던 것이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뼈의 통증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뼈가 욱신거리고 아파오면, 증조할아버지는 어김없이 그 상처를 만들어낸 `정부`사람들을 떠올리곤 했다. 켄터키 전투에서의 그날 밤, 소년병이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상처에 대어 피를 멈추게 하는 동안, 증조할아버지는 반 독이 넘는 물을 마셨다. 하지만 피가 멈추자 증조할아버지는 다시 말안장에 올라탔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제일 끔찍한 흉터는 발목에 있었다. 증조할아버지는 발목을 쳐다보기도 싫어하셨다. 발목뼈는 작은 탄환이 뚫고 지나가면서 완전히 으깨버리기에는 너무 크고 성가신 존재였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는 그 당시에는 부상을 당한 것도 모르셨다고 한다. 오하이오에서의 그날 밤, 한 기병대원을 휩쓸고 지나간 것은 야생마처럼 끓어오르는 뜨거운 투지였다. 티끌만큼의 두려움도 없었다. 혈관은 오로지 환희로 고동쳤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던 말이 땅을 차고 가볍게 뛰어오르자 바람이 폭풍처럼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고, 증조할아버지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거칠고 찢는 듯한, 저 반골의 인디언 고함소리가 저절로 터져나왔다.
무릎 밑이 날아갔는데도 몰랐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발목에 총을 맞는 것도 모르고 증조할아버지는 40킬로미터 정도를 더 가면서 어두운 산골짜기를 정찰했다고 한다. 임무를 마친 증조할아버지가 말에서 내리려고 발을 땅에 딛는 순간, 갑자기 다리가 퍽하고 꼬꾸라졌다. 살펴보니 구두 속이 우물물을 담은 두레박처럼 피로 가득차 출렁이고 있었다. 그제서야 증조할아버지는 발목을 다쳤다는 것을 알았다. 증조할아버지는 자주 이날 밤의 돌격을 떠올리곤 하셨다. 그때 생각을 하다보면 자신이 절름발이가 되어 지팡이를 써야 하는 데 대한 혐오감을 그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제일 심한 상처는 옆구리 부분의 내장 속에 있었다. 그곳에는 끄집어내지 못한 납탄이 들어 있었다. 그 납탄은 옥수수자루를 갉아먹는 들쥐처럼 단 한번도 멈추는 법 없이 밤낮으로 증조할아버지의 육체를 파먹어들어갔다. 드디어 그 납탄은 증조할아버지의 몸안을 완전히 갉아먹고 말았다. 이제 머지 않아 사람들은 그를 산골 오두막집의 마룻바닥에다 뉘고 도살당한 황소처럼 그의 배를 가를 것이다. 증조할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고 계셨다. 사람들은 마취제를 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산에서 빚은 술 한 사발만을 들이켜게 하고 나서, 그의 배를 갈라 고름이 가득 고인 썩은 살덩이를 끄집어낼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는 피로 흥건한 그 마루 위에서 그대로 죽어가리라. 마지막 말도 끝내 하지 못한 채. 하지만 사람들이 단말마적인 죽음의 고통 속에 있는 그의 팔다리를 붙잡고 있는 동안, 늙었지만 강건한 그의 육체는 활줄처럼 팽팽하게 굽어오를 것이며, 그의 목에서는 증오스런 정부를 향한, 열정적인 반역자의 야만스런 고함소리가 터져나올 것이다. 그는 그렇게 죽어갈 것이다. 사실 `정부`가 그를 죽이는 데는 4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19세기가 죽어가고 있었다. 피와 투쟁과 죽음의 시대였던 19세기가. 증조할아버지가 온몸으로 맞부딪쳤고 판단했던 그 세기가 죽어가고 있었다. 이제 또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의 시신을 들쳐업고 걸어갈 새로운 세기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는 과거, 오로지 체로키의 과거만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맏아들은 인디언 거주지역으로 쫓겨났으며, 둘째아들은 텍사스에서 죽고 말았다. 이제 애초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곁에 남은 사람은 붉은 날개와 막내아들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말을 탈 수 있었다. 모건 특공대 시절에는 말을 타고 다섯칸 울타리를 뛰어넘던 증조할아버지였다. 그에게는 아직도 덤불에 꼬리털을 남겨 추적당하는 일이 없도록 말꼬리를 치켜들게 한 채 달리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갈수록 고통이 심해져 예전과 달리 술로도 고통을 잠재울 수 없었다. 통나무집 마룻바닥에 사지를 큰댓자로 벌리고 드러누워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테네시산중의 한해가 저물어가던 때였다. 차가운 바람이 히코리나무와 떡갈나무의 마지막 잎새를 때려대고 있었다. 그 겨울날 오후, 증조할아버지는 막내아들인 할아버지와 함께 계곡 중간쯤에 서 계셨다. 그래도 증조할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산을 오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두 사람은 하늘을 배경으로 산등성이 위로 앙상하게 벌거벗은 채 뻣뻣하게 서 있는 나무들을 쳐다보았다. 겨울해가 어떻게 지는지 연구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너에게 남겨줄 게 별로 없구나.” 증조할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웃으셨다. “저 오두막집에서 건질 수 있는 거라고 해봐야 손을 녹이려고 불쏘시개를 뒤적거리는 정도일 테니.”
이제 아들은 산에 대해 연구라도 하는 사람처럼 산에서 눈을 떼지 않고 가만히 대답했다.
“그럴 겁니다.” “넌 다 큰 사내자식이야. 거기다 딸린 식구까지 있구. 그러니 이러쿵저러쿵 잔소리할 필요는 없을 성싶다... 다만 우리가 믿는 걸 지키려고 할 때는 한시바삐 손을 내밀어 다른 사람과 손을 잡도록 해라. 우리 시대는 갔다. 지금 오고 있는 너희들의 시대가 어떻게 될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너구리 잭도 그럴 게다. 그런데 너한테 남겨줄 것조차 없으니... 하지만 아마 산만은 언제나 변함없을 거다. 너도 누구보다 산을 좋아하니 다행이고. 우리는 자기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들이 조용히 대답했다. 마지막 햇빛이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지고 나자 살을 에는 바람이 몰아쳤다. 이제 노인은 입을 떼기조차 힘들었지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들아... 난... 너를 사랑한다(I kin ye)."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늙고 앙상한 노인의 어깨를 팔로 감쌌다. 이제 계곡에 드리워진 그늘은 한층 더 진해졌고, 양옆에서 굽어보던 산봉우리의 시커먼 윤곽선도 어둠속에 묻혀갔다. 두 사람은 그 자세 그대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증조할아버지는 지팡이로 땅을 짚으면서 계곡에서 오두막까지 걸어내려왔다. 이것이 할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와 함께 한 마지막 산책이었으며 마지막 대화였다. 나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의 무덤에 여러번 가보았다. 그 무덤들은 흰 참나무가 서 있는 높은 산등성이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가을이 되면 무덤가에는 무릎까지 쑥쑥 빠질 만큼 낙엽이 쌓였다. 그러고 나서 봄이 오면 강인한 인디언 제비꽃들이 땅을 뚫고 나와 작고 푸른 꽃을 피운다. 자신들의 시대를 격렬하고 끈질기게 살다간 영혼들을 머뭇머뭇 위로라도 하는 듯이. 히코리나무로 만든 혼인 지팡이도 군데군데 흠집이 나긴 했지만 부러지지 않은 채 그곳에 꿋꿋이 서 있었다. 그 지팡이에는 그분들이 슬플 때나 기쁠 때, 싸웠을 때마다 표시해둔 자국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그 지팡이는 그분들의 머리맡에서 두 분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지팡이에 새겨진 두 분의 이름은 워낙 작아서 무릎을 꿇고 자세히 들여다보고서야 읽을 수 있었다. 두 분의 이름은 에탄과 붉은 날개였다.
파인빌리
겨울이 되면 우리는 낙엽들을 긁어모아서 옥수수밭 고랑에다 뿌리곤 했다. 헛간을 지나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시내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옥수수밭 고랑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산비탈을 경작해서 만든 밭이었다. 경사가 꽤 급해서 할아버지는 그 밭을 `비탈길`이라 불렀다. 그다지 질좋은 옥수수가 수확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할아버지는 개의치 않고 그곳에다 씨를 뿌렸다. 그 골짜기에는 그곳말고 달리 평평한 땅이 없었다. 나는 낙엽을 긁어모아서 자루에 담는 일을 좋아했다. 가벼워서 운반하기도 쉬웠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나 세 사람은 서로 도와가면서 자루를 채우곤 했다. 할아버지는 한꺼번에 두 자루, 때로는 세 자루씩도 옮기셨다. 나도 자루 두 개를 짊어지고 낑낑대보기도 했지만 몇 걸음 못 가서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보기에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낙엽들은 땅 위에 가득 쌓인 갈색 눈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단풍나무의 노란색과 옻나무와 고무나무의 붉은색이 점점이 얼룩진 갈색 눈. 우리는 이렇게 숲을 들락거리면서 밭에다 낙엽을 뿌렸다. 또 솔잎도 뿌렸다. 땅을 산성으로 만들려면 마른 솔잎을 좀 뿌려줘야 한다는 게 할아버지의 설명이셨다. 그렇다고 너무 많이 뿌려서는 곤란하지만. 그렇지만 지겨워질 만큼 오래 힘들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는, 할아버지 표현에 따르면 `기분전환`삼아 다른 일에 한눈을 팔곤 했던 것이다. 할머니는 누런 뿌리가 눈에 띄면 파내곤 하셨다. 캐내보면 그것은 도라지거나...칼룸...사사프러스...개불알꽃의 뿌리 따위였다. 할머니는 이런 약용식물들에 대해 잘 알고 계셨다. 덕분에 할머니가 만드신 약들은 효과가 좋았다. 이런 것들이 있으면 지금까지 내가 들어본 온갖 병들을 고칠 수 있었다. 하지만 강장제 중에는 두번 다시 먹고 싶지 않을 만큼 맛이 쓴 것도 있었다. 반면에 나와 할아버지는 히코리나무와 친카핀나무, 밤나무나 때로는 검은 호두나무의 열매들을 줍곤 했다. 그것들은 우리가 애써 찾아내려 하지 않아도 마치 우연히 그런 것처럼 우리 눈이 닿는 그 자리에 떨어져 있었다. 이렇게 중간중간 가져온 것을 먹고, 나무 열매와 뿌리를 모으고, 너구리나 딱따구리 따위를 구경하다보면 나뭇잎 운반하는 일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 어스름을 등지고 골짜기를 걸어내려오는 우리 세 사람 손에는 나무열매나 뿌리 같은 것들이 한아름씩 들려 있었다.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못 듣게 낮은 소리로 욕설을 퍼부으시다가, 결국 다음부터는 절대로 그런 멍청한 일로 `기분전환`하지 않을 것이며, 나뭇잎 운반하는 일만 하겠노라고 선언하곤 하셨다. 할아버지의 이런 선언은 나한테는 꽤 심각한 걱정거리였지만, 할아버지가 실제로 그렇게 하신 적은 한번도 없었다. 드디어 우리는 낙엽과 솔잎들로 밭을 완전히 덮었다. 이 상태에서 가벼운 비라도 내려 나뭇잎들이 땅에 찰싹 달라붙고 나면, 우리는 노새인 `샘영감`에게 쟁기를 매어 땅을 갈아엎었다. 나뭇잎들이 땅 속으로 들어가 밭의 영양분이 될 수 있게 말이다. 내가 `우리`라고 한 건 할아버지가 나에게도 쟁기를 끌어보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워낙 키가 작아서 손을 머리 위로 뻗어야 쟁기 손잡이를 잡을 수 있었다. 또 쟁기를 끄는 일보다 쟁기 손잡이에 몸무게 전체를 실어 쟁기날이 땅속에 너무 깊이 박히지 않도록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을 때도 많았다. 때로는 쟁기날이 땅에 박히지 않아 밭을 가는 게 아니라 땅거죽만 긁어대는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샘영감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샘영감은 내가 쟁기날을 완전히 땅에 박고 나서 “이려!”라고 말해야 비로소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쟁기날을 땅속에 박을 때는 손잡이를 밀어올려야 했다. 이렇게 손잡이를 잡아내리고 밀어올릴 때는 손잡이를 가로지른 나무에 턱을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 나무에 한번이라도 턱을 걷어채는 날이면 머리가 띵할 정도로 따끔한 맛을 보게 된다. 할아버지는 어슬렁거리며 우리 뒤를 따라왔지만, 도와주지 않고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곤 하셨다. 샘영감을 왼쪽으로 가게 하려면 “하우!”라고 하고, 오른쪽으로 가게 하려면 “지!”라고 하면 된다. 샘영감은 그냥 내버려두면 약간 왼쪽으로 가는 버릇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지!”하고 소리를 쳐야 했다. 그런데 샘영감은 내가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계속 왼쪽으로만 갔다. 그럴 때면 할아버지가 나서서 “지! 지! 지이! 이 빌어먹을 자식아, 지이!”라고 소리를 치셨다. 그제서야 샘영감은 오른쪽으로 돌아서곤 했다. 문제는 샘영감이 할아버지의 이런 욕설을 하도 자주 들어서 그게 무슨 호령소리라도 되는 듯이 생각한다는 데 있었다. 사실 샘영감은 이 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은 다음에야 오른쪽으로 돌았다. 다시 말해 샘영감을 오른쪽으로 가게 하려면 욕설까지 포함하여 그 소리를 몽땅 다 질러야 했던 것이다. 꽤 심한 욕이었지만 쟁기를 끌려면 어쩔 수 없이 나도 그 욕설을 해야 했다. 그래도 할머니가 듣지 않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내가 소리치는 것을 할머니가 듣고 말았다. 덕분에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들으셨고, 할머니가 옆에 계시는 동안 내 쟁기질 솜씨도 줄고 말았다.
또 샘영감은 왼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밭고랑 끝에 가서 왼쪽으로 돌아야 할 때도 그러려고 하지를 않았다. 아마 뭔가에 부딪칠 걸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제나 오른쪽으로 돌곤 했다. 밭고랑의 한쪽 끝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건 상관이 없지만, 다른 쪽 끝에서도 그러면 한바퀴를 빙 돌아 왼쪽으로 돌려야 했는데, 그러려면 쟁기를 가시덤불이나 억센 풀들로 뒤덮인 밭고랑 밖으로 끌어내야 했다. 할아버지는 샘영감이 늙은데다 한쪽 눈까지 멀었으니 우리가 참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도 할아버지 말씀대로 참기로 했다. 하지만 두번에 한번 걸러 밭고랑 끝에 가서 한바퀴씩 돌려야 할 때, 특히나 고랑 바깥에 산딸기덤불이 수북이 자라 있을 때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한번은 쐐기풀더미 사이로 쟁기를 잡아끌던 할아버지가 발을 헛디뎌 그만 나무 그루터기 밑의 구멍에 발이 빠지고 말았다. 그때는 따뜻한 봄날이어서 말벌들이 그 구멍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말벌들이 바지에 새까맣게 달라붙은 걸 본 할아버지는 기겁을 할 듯이 놀라 고함을 지르며 개울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도 말벌들이 구멍에서 웽웽거리며 잔뜩 몰려나오는 걸 보고는 할아버지 뒤를 따라 줄행랑을 쳤다. 할아버지는 얕은 개울물에 철버덕 주저앉아 바짓가랑이를 탁탁 털면서 샘영감한테 욕을 바가지로 퍼부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참지 못하실 때도 다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샘영감은 벌집이 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곳에 가만히 서서 할아버지가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쟁기 있는 곳으로 갈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 쟁기 둘레는 새까맣게 무리지어 붕붕거리며 날아다니는 말벌들 천지였다. 할아버지와 나는 밭 한가운데로 갔다. 벌집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으로 샘영감을 끌어낼 작정이었다.
“이리 와, 샘. 자, 이리 오라니까. 착하지.”
하지만 샘영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샘은 자기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땅 위에 누인 쟁기를 끌고 걷기보다는 차라리 가만히 서 있는 게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온갖 애를 다 썼다. 욕을 퍼붓다가 급기야는 네 발로 엎드린 채 노새처럼 울기까지 했다. 내 보기에 그것은 영판 노새 울음소리였다. 샘영감도 그 소리를 듣더니 귀를 앞으로 내밀고 할아버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은 건 여전했지만 말이다. 나도 노새 소리로 울어보려 했지만 할아버지만큼은 잘되지 않았다. 이때 산등성이로 올라오는 할머니의 모습이 할아버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밭 한가운데서 네 발로 기면서 노새 소리를 흉내내는 우리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셨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이 흉내도 그만두어야 했다. 할아버지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셨다. 숲속으로 들어가 나뭇가지를 주워온 할아버지는 성냥으로 가지에 불을 붙인 다음 벌집 구멍 속에다 던져 넣었다. 나뭇가지가 타면서 매운 연기가 나자 말벌들이 쟁기 주변에서 떨어져나갔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는, 샘영감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노새인지, 아니면 가장 똑똑한 노새인지, 지금까지 몇번이나 생각해봤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노라고 하셨다. 나로서도 참으로 풀기 힘든 수수께끼였다. 그래도 나는 밭 일구는 일이 좋았다. 밭을 갈다보면 내가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밭 가는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할아버지 뒤를 따라 걷는 내 보폭이 전보다 쬐끔 더 길어진 것 같기도 했다. 또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저녁식탁에서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내 자랑을 한참씩 늘어놓곤 하셨다. 그러면 할머니도 내가 갈수록 어른스러워진다고 하면서 고래를 끄덕이셨다.
그 날도 세 식구가 저녁식탁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갑자기 개들이 머리를 치켜들고 짖어대기 시작했다. 우리도 일어나서 앞 베란다 쪽으로 나가보았다. 한 남자가 통나무 다리를 건너 우리 집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 남자는 얼굴도 잘 생긴데다 키도 거의 할아버지만큼 컸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멋진 것은 그 남자의 구두였다. 굽 높고 밝은 노란색인 그 구두는 둥글게 만 하얀 양말과 잘 어울렸다. 또 바짓자락 길이도 양말 높이와 맞춤하게 맞아떨어졌다. 하얀 셔츠 위에 짧은 검은 코트를 입고, 머리에는 작은사각형 모자를 쓴 그 남자의 손에는 기다란 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 파인 빌리, 자네구먼.” 할아버지가 인사하자 파인 빌리는 손을 흔들었다. “자, 이리 들어와서 잠시 쉬었다 가게.”
할머니의 권유를 받은 파인 빌리는 문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 그냥 지나치던 참이었어요.”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는데... 그럼 어디로 가려던 참이란 말인가? 우리 집 뒤에는 산밖에 없는데...
“잠깐 들어와서 저녁이라도 먹고 가게.”
할머니는 이렇게 권하면서 파인 빌리의 팔을 잡아끌어 통나무집 계단 위로 올라서게 했다. 할아버지는 벌써 그의 기다란 가방을 받아들고 계셨다. 우리는 파인 빌리를 데리고 부엌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파인 빌리를 굉장히 좋아하신다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파인 빌리는 주머니에서 고구마 네 개를 꺼내 할머니에게 드렸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맛있는 고구마 파이로 바뀌어 식탁에 올랐다. 그중 세 조각을 파인 빌리가 먹었다. 나도 한 조각을 먹었지만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을 파인 빌리가 먹을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팬 속의 파이 한 조각을 그대로 남겨둔 채 우리는 식탁에서 일어나 불가에 자리잡았다. 파인 빌리는 잘 웃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할아버지보다 더 키가 클 것 같다고 했다. 이 말은 나를 정말 기분좋게 만들었다. 또 그는 지난번에 뵈었을 때보다 더 예뻐지신 것 같다고 하여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다.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갈수록 파인 빌리가 마음에 들었다. 비록 그가 파이를 세 조각이나 먹긴 했지만, 어차피 그건 그가 가져온 고구마로 만든 파이였다. 우리는 모두 불가에 둘러앉았다. 할머니는 흔들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지만, 할아버지는 몸을 앞으로 쭉 내민 채로 앉으셨다. 뭔가 사건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할아버지가 입을 떼셨다.
“자, 파인 빌리, 뭐 재미있는 소식 없나? 돌아다니면서 들은 것 말일세.”
파인 빌리는 등이 똑바른 책상의자의 두 다리가 위로 들려질 정도로 상체를 뒤로 쭉 뻗었다. 그 상태에서 엄지와 검지를 써서 아랫입술을 잡아당긴 그는 입담배통을 치켜들어 내민 입술 안으로 입담배를 털어넣었다. 그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입담배통을 내밀었지만, 두 분은 머리를 저으셨다. 파인 빌리는 여유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불속에다 침을 뱉는 일까지 마치고 난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음, 아무래도 내 꼴을 좀 그럴 듯하게 만들어줄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어요.”
그가 다시 한번 불에다 침을 뱉고 나더니 우리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중요한 이야기라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아마 할아버지도 그러신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파인 빌리?” 라고 물으시는 걸 보면 말이다.
파인 빌리는 다시 한번 몸을 뒤로 쭉 젖힌 채 천장의 대들보를 쳐다보았다. 그 자세로 자기 배 위에서 양손을 꽉 움켜잡고 난 그가 말을 이었다.
“틀림없이 지난 수요일이었을 거예요... 아니 아니, 화요일이었구나. 점핑 조디 무도회에서 밤새도록 춤을 춘 게 월요일 밤이었으니. 맞아요, 화요일이었어요. 그날 개척촌을 지나가는데, 아 아저씨도 아시죠? 거기 경찰 말예요. 스모크하우스 터너라고...” “암, 암, 알다마다. 나도 본 적이 있어.” 할아버지는 재촉하듯이 맞장구를 치셨다. “예, 그 사람요. 길모퉁이에 서서 그 사람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번쩍번쩍 빛이 나는 커다란 차 한 대가 길 건너편 주유소로 들어가더라구요. 스모크하우스는 못 봤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죠. 그 남자는 차에서 내리더니 조 올콤에게 기름을 가득 채워달라고 했어요. 나는 그 사람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지요. 그러자 그 사람도 주위를 둘러보는데, 그 눈이 꼭 뱀눈 같더라구요. 그 순간 뭔가 집히는 게 있었지요. 나는 속으로 `저 놈은 도회지 깡패가 틀림없어.`라고 중얼거렸죠. 그런데 말입니다. 이제부터 잘 들으세요. 그때까지 스모크하우스에게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어요. 그냥 마음 속으로 생각만 했던 거죠. 스모크하우스에게는 그냥 이렇게만 말했죠. `스모크하우스, 내가 밀고 따위나 하는 치사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자네도 알지... 하지만 도회지 깡패들은 종류가 달라. 게다가 저기 있는 저놈은 여간 수상해 보이지 않으니...” “스모크하우스는 그 친구를 뜯어보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파인 빌리. 잠깐 가보자.` 그는 길을 건너 그 남자 차가 있는 곳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갔어요.”
다시 몸을 앞으로 세워 의자에 네 다리가 모두 바닥에 닿게 한 파인 빌리는 불에다 다시 한번 침을 뱉고 난 후 잠시 불타는 통나무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깡패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듣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통나무 관찰을 마친 파인 빌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스모크하우스는 읽지도 쓰지도 못하잖아요? 나는 그런 걸 잘하니까 내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 뒤를 따라갔지요. 그 남자는 우리가 오는 걸 보고 차안으로 도로 들어가더군요. 차 있는 곳까지 걸어간 스모크하우스는 창문에다 몸을 굽히고 점잖게 물었죠. 이곳에서 뭘하고 있냐고요. 그 남자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자기는 지금 플로리다로 가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말하는 본새가 뭔가 수상하더라구요.”
그건 나한테도 수상쩍게 느껴졌다. 할아버지를 쳐다보니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스모크하우스가 그럼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으니 시카고에서 온다고 하더군요. 그쯤에서 스모크하우스는 이제 됐으니까 한시바삐 마을을 떠나라고 했지요. 그 친구도 그러겠노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사이에...”
파인 빌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돌아보며 눈짓을 했다.
“그 사이에 나는 차 뒤쪽으로 가서 차 번호판을 읽어보았지요. 그러고는 스모크하우스를 옆으로 끌고 가서 말했어요. `제 입으로 시카고에서 왔다고 했잖아? 그런데 번호판은 일리노이주 거야.` 그러자 스모크하우스는 꿀 만난 파리처럼 되어서 그놈을 닦달을 한 거지요... `넌 시카고에서 왔다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일리노이주 번호판을 달고 있어?`라고요. 그 깡패는 뒷덜미가 꽉 잡혔지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더라구요. 새빨간 거짓말이 드러나면 누구나 그러잖아요? 입에 발린 말로 스모크하우스를 구슬렸지만 제놈 뜻대로 넘어갈 스모크하우스가 아니지요.” 파인 빌리는 이제 자기 이야기에 흥분하고 있었다. “스모크하우스는 그놈을 유치장에 처넣었어요. 철저하게 조사해야겠다고요. 거액의 보상금을 받게 될지도 모른대요. 그러면 나한테 반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놈 옷 입은 걸로 봐서는 나나 스모크하우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보상금을 받을지도 몰라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정말 그럴 것 같다고 맞장구를 치셨다. 할아버지는 자신도 도회지 깡패라면 참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나도 그랬을 것 같았다. 우리 모두 파인 빌리는 이미 부자가 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느꼈다. 하지만 파인 빌리는 그 정도 가지고 그렇게 잘난 척 하지 않았다. 그는 보상금이 그다지 큰 액수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 바구니 안에 자기가 가진 달걀을 몽땅 집어넣거나, 알에서 병아리가 깨기도 전에 닭의 머릿수를 세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건 현명한 일이었다. 파인 빌리는 그 일이 그르칠 경우를 대비해서 다른 일도 준비해놓고 있었다. `붉은 독수리` 담배 회사에서 500달러의 상금을 내걸고 감상문을 모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500달러라면 한 사람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이다. 파인 빌리는 응모엽서를 이미 구해놓고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자기가 왜 붉은 독수리표 입담배를 좋아하는지 적어넣는 것뿐인데, 파인 빌리는 엽서에다 적기 전에 정말로 골똘히 생각하여, 드디어 생각해낼 수 있는 최고의 답을 찾아냈다고 했다. 파인 빌리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대부분의 응모자들은 붉은 독수리표 입담배의 품질이 좋다고 추어줄 것이다. 물론 자기도 그렇게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기는 붉은 독수리표 입담배가 지금까지 자기가 씹어본 담배 중에서 가장 좋은 입담배라는 이야기를 적고 나서, 자기가 살아있는 한 붉은 독수리표말고는 다른 어떤 입담배도 씹지 않겠다는 것을 덧붙이겠다, 사람은 머리를 쓸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엽서를 붉은 독수리사의 높으신 양반이 본다면, 파인 빌리는 앞으로 남은 여생 동안 자기네 회사의 입담배만 씹을 테니까 상금을 주더라도 결국 본전을 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냥 붉은 독수리표 입담배가 좋다고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상금을 준다면 눈뜨고 돈 잃는 꼴이 아니겠는가?
또 파인 빌리는, 그런 높으신 양반들은 절대 자기 돈으로 도박을 하는 일이 없다. 그 사람들이 부자인 것도 다 그 때문이다. 그러니까 붉은 독수리사의 상금은 이미 자기 주머니 속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할아버지도 그 상금은 틀림없이 파인 빌리의 것이 될 것이라고 맞장구치셨다. 파인 빌리는 문 밖으로 가서 씹던 입담배를 퉤하고 뱉었다. 다시 식탁 옆으로 돌아온 그는 남아 있던 고구마 파이 한 조각을 집어먹었다. 아직도 내가 그걸 먹고 싶은 마음이야 가시지 않았지만 파인 빌리는 부자라서 그걸 먹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기분나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로 만든 술병을 꺼내오셨다. 파인 빌리는 두 잔인지 석 잔인지를 마셨고 할아버지는 한잔만 드셨다. 할머니는 기침 때문에 감기 시럽약을 꺼내와 드셨다. 할아버지의 부탁을 받은 파인 빌리는 긴 가방에서 바이올린과 활을 꺼내 <붉은 날개>를 켜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발로 박자를 맞추었다. 그의 연주 솜씨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거기다 노래솜씨도.
아름다운 붉은 날개 위에 비치는 저 달빛이여, 바람은 한숨짓고 밤새는 슬피우네. 저 머나먼 별빛 아래 붉은 날개의 용기는 잠들고, 그녀의 마음은 슬피 울며 날아가네.
할머니는 바이올린 소리를 듣다 어느 틈엔가 마룻바닥에 누워 잠이 든 나를 침대로 옮겨놓으셨다. 그날 밤 나는 파인 빌리가 우리 오두막으로 찾아오는 꿈을 꾸었다. 그는 이미 부자가 되어 있었는데, 어깨에 무거운 자루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 자루 안에는 고구마가 가득 들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