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포리스트 카터
“당신을 사랑해, 보니 비”
돌이켜보면 할아버지와 나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던 것 같다. 물론 할아버지는 산이나 사냥, 날씨를 비롯한 몇몇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단어라든가 책 같은 것들이 문제가 될 때면 할아버지와 나는 모든 판단을 할머니에게 맡겨버렸다. 그러면 할머니는 그때마다 명쾌한 결론을 내려주곤 하셨다. 웬 부인이 길을 물어본 경우만 해도 그랬다. 할아버지와 나는 개척촌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손에 든 짐이 꽤 무거운 편이었다. 책이 하도 많아서 둘이서 나눠들고 오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책이 너무 많다고 투덜대셨다. 도서관 사서가 갈 때마다 너무 많은 책을 내놓은 바람에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뒤엉켜서 뒤죽박죽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지난 한달 내내 할아버지는 알렉산더 대왕이 대륙회의(1774년 북미의 13개 주 영국 식민지가 본국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한 합의체. 1776년 미국 독립선언을 발표했다-옮긴이)에서 대은행가 편을 들어 제퍼슨씨를 깍아내리려 했다고 우기셨다. 할머니가 알렉산더 대왕은 그 시대의 정치가가 아니며, 사실 그 당시에는 살아 있지도 않았다고 설명해주었지만, 할아버지는 조금도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알렉산더 대왕에 대해 쓴 책을 다시 한번 빌려보기로 했다. 그 책을 보면 할머니 말이 사실로 드러나리란 건 할아버지도 잘 알고 계셨다. 나 역시 책에서 알게 된 것 중에서 할머니가 틀리는 일은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사실 우리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할머니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책이 너무 많은게 혼란의 원인이라며 우울해하셨다. 나 역시 그 생각에 동감이었다. 어쨌든 그날 나는 석유통과 함께 세익스피어씨의 책 한권과 사전을 양손에 나눠들었고, 할아버지는 나머지 책들과 커피 한 통을 들고 가셨다. 커피는 할머니가 좋아하셨다. 그래서 할아버지 생각에도 그랬지만 내 생각에도, 한달 내리 할머니 속을 썩인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문제도, 할머니가 커피 한잔만 마시고 나면 멋지게 해결될것 같았다. 으레 그렇듯이 개척촌에서 이어진 길을 할아버지는 앞장서고 나는 그 뒤에서 걷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검은색 승용차 한대가 우리 옆으로 다가오더니 멈춰섰다.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큰 차였다. 차안에는 여자 두 사람과 남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차는 문짝 속으로 똑바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유리창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전에는 한번도 그런 걸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 역시 그랬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그 여자가 손잡이를 돌려 유리를 완전히 내릴 때까지 뚫어져라 그것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중에 할아버지는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문 사이에 가는 틈이 있어서 그 틈으로 유리가 들어가게 되어 있더라고 알려주셨다. 나는 키가 작아서 그것까지는 볼 수 없었다. 손가락에 반지를 몇개씩 낀 그 부인은 멋진 옷을 입고 귀에는 커다란 귀걸이를 달고 있었다.
“채터누가(테네시주 동남부에 있는 도시-옮긴이)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그 여자는 이렇게 물었다. 자동차 모터가 덜덜거리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커피통을 바닥에 내려놓고 책들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그 위에다 잘 놓았다. 나는 나대로 석유통을 내려놓았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왔을 때, 나름의 예의를 표하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새겨들으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아버지가 누누이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 어쨋든 그렇게 하고 난 후, 할아버지는 부인을 바라보면서 모자를 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게 비위를 건드렸는지 그 여자는 할아버지에게 고함을 버럭 질렀다.
“내가 물었잖아요? 채터누가로 가는 길이 어디냐니까? 당신 귀머거리예요?” “아닙니다. 부인. 오늘은 귀도 잘 들리고 몸 상태도 아주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부인은 어떠십니까?”
사실 이런 때 상대방 안부를 물어보는 것은 예의가 아닌가! 할아버지가 한 일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부인은 할아버지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것처럼 행동했다. 우리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 여자가 그랬던 건 우리 때문이 아니라 차안에 탄 다른 사람들이 다른 일로 키득거리며 그 여자를 놀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여자는 더 큰 소리로 악을 썼다.
“도대체 우리한테 채터누가로 가는 길을 가르쳐줄 거예요, 말 거예요?” “아 물론 가르쳐드립죠.” “자, 그럼 말해봐요!”
그 여자가 다시 명령조로 고함을 질렀다.
“에 뭣보다도 방향을 잘못 잡았어요. 동쪽으로 가고 있잖아요. 그곳은 서쪽으로 가야 하거든요. 하지만 똑바로 서쪽은 아니니까 방향을 조금만 더 북쪽으로 틀면 되겠군요. 저 멀리 큰 산이 보이지요? 저 산허리를 돌아서 쭉 가면... 채터누가에 도착하게 됩니다.”
말을 끝낸 할아버지는 다시 모자를 들어 보였다. 그런 다음 우리는 허리를 굽혀 짐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창문 밖으로 머리를 쑥 내밀더니 악을 쓰듯 고함을 질렀다.
“우리한테 가르쳐준 길이 진짜로 맞아요?”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서 굽혔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예? 서쪽으로 가는 길은 저 길인데요, 부인. 약간 북쪽으로 꺾어져야 한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당신들 두 사람 말이지. 외지인들 아냐?”
그 여자가 갑자기 반말로 따지듯이 물었다. 그 말에 할아버지가 그 여자쪽을 향해 다시 몸을 돌렸다. 나도 그랬다. 전에는 한번도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보기에는 할아버지도 그런 것 같았다. 잠시 그 여자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낮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그럴거요”
그 큰 차는 붕 하고 가버렸다. 차 방향도 바꾸지 않고 오던 그대로 동쪽으로 가버렷다. 틀린 길로 간 것이다. 할아버지는 머리를 흔들면서, 당신이 칠십여 년을 살면서 이런저런 미친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저 여자는 그 중에서도 유별나다고 하셨다. 내가 할아버지에게 그 여자가 정치가일지도 모른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여자 정치가가 있다는 말은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다. 정치가의 마누라일지는 모르겠지만.”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다시 바퀴자국을 밟으면서 걷기 시작했다. 개척촌에서 돌아올 때면 나는 언제나 할아버지에게 물어볼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해내곤 했다. 내가 말을 걸면 할아버지는 항상 걸음을 멈추셨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걸 잘 새겨들으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할아버지를 따라잡곤 했다. 그즈음의 나는 얼마 안 있으면 만 여섯 살이 될 나이였는데도 나이에 비해 몸집이 작았다. 머리꼭지가 할아버지 엉덩이뼈에 간신히 닿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할아버지 뒤를 따라가려면 거의 항상 종종걸음으로 달리다시피 걸어야 했다. 그래도 꽤 힘들게 종종걸음을 치는 판인데도 할아버지와의 사이가 꽤 벌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거의 고함을 지르다시피 하여 할아버지를 불러세웠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채터누가에 가보셨어요?” “아니.”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추고 내 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거의 갈 뻔했던 적은 한번 있었지.”
드디어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잡아 석유통을 잠시 길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
“지금부터 한 20년 전쯤 됐을 거야. 아니, 30년 전이던가. 하여간 에녹이라는 할아버지 삼촌이 있었어. 막내삼촌이었지. 그 삼촌은 꽤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술에 취하면 온 천지를 헤매고 다니는 버릇이 있었어. 술에 취하면 머리속이 엉망진창으로 엉클어졌던 것 같아. 에녹 삼촌이 술에 취해서 산속 깊숙이 사라져 버리는 일은 전에도 자주 있었지. 그런데 이번에는 3주가 지나도, 4주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거야. 행상들을 통해 여기저기 수소문해봤더니 삼촌이 채터누가의 감옥에 있다는 말이 들려오지 않겠어? 그래서 내가 가서 데려오려고 집을 막 나서려던 참인데, 삼촌이 집안으로 불쑥 들어서지 않겠니?”
할아버지는 그때 일이 떠오르는지 잠시 말을 중단하고 웃기 시작했다.
“그래, 맨발에다가 걸친 거라곤 헐렁헐렁한 바지 하나뿐이었어. 그것도 흘러내리지 않게 한손으로 부여잡고 있어야 했으니... 너구리한테 쥐어뜯기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상처투성이였고... 나중에 들어보니까 줄곧 산속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는 거야.”
할아버지가 다시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이야기는 또 한번 끊어졌다. 덕분에 나는 석유통 위에 앉아서 느긋하게 다리를 쉴 수 있었다.
“에녹 삼촌 말로는 얼마나 취했던지 자기가 어떻게 채터누가까지 갔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나더라는 거야. 그런데 깨어보니 웬 방안 침대 위에 누워 있더래. 자기 양옆으로 여자 두명이 함께 누워 있고 말이야. 후닥닥 침대에서 내려와 그 여자들한테서 달아나려는데, 갑자기 문이 쾅하고 열리더니 웬 덩치 큰 사내가 뛰쳐들어와 미친 듯이 화를 내더라는 거야. 여자 한 명은 자기 마누라고, 다른 한명은 자기 여동생이라고 하면서 말이야. 그랬으니 어쨌거나 에녹 삼촌은 그 자리에서 그 집 식구를 전부 만나본게 아닌가 싶어.” “에녹 삼촌 말로는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일어나서 그 남자한테 돈을 좀 집어주라고 고함을 지르고, 남자는 또 남자대로 계속 소리를 지르고 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더군. 그 와중에도 에녹 삼촌은 바지를 찾으려고 바닥을 이리저리 기어다녔대. 돈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주머니에 칼이 들어 있다는 건 알고 있었거든. 그 덩치 큰 사내놈이 뭔 일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하도 풀세게 날뛰니까 말이야.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바지가 안 보이는 거야. 어디다 벗어뒀는지 생판 기억도 나지 않고 말이야. 그러니 다른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었겠어? 창문을 넘어서 달아나는 수밖에. 그런데 그게 문제였던 거야. 그 창문은 이층방 창문이었거든. 거기다 길바닥은 자갈과 돌멩이투성이였으니 살갗이 많이 까졌지.” “삼촌은 실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상태였는데, 보니까 손에 커튼 쪼가리가 쥐여 있더래. 뛰어내릴 때 붙잡았다가 찢어진 거였겠지. 그걸 허리에 두르고는 어두워질 때까지 숨어 있으려 했는데 적당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지 뭐냐. 그래서 길 한복판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다행히 사람들이 몰려서 있는 곳에 끼여들긴 했는데, 이 사람들이 또 예의라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어서 다시 다른 쪽으로 달아나려고 했지. 그런데 그때 그만, 경찰이 와서 감옥으로 끌고 가더라는 거야.”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 사람들이 바지하고 윗도리하고 신발을 줬는데, 너무 커서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는구나. 그러고는 거리청소를 하라고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내몰더래. 에녹 삼촌 말로는 열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청소하는 걸로는 평생 가도 깨끗해질 것 같지 않은 거리로 말이야. 청소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사람들이 거리에다 쓰레기를 버려대는 판이었으니. 이러다간 죽을 때까지 가도 일이 끝나지 않겠다고 생각한 삼촌은 결국 내빼기로 작정을 했지. 그렇게 작정을 하고 나서 얼마 안됐을 대, 기회다 싶은 순간이 왔어. 삼촌은 잽싸게 빗자루를 집어던지고 달렸지. 웬 남자가 뒤에서 셔츠를 잡아당겼지만 뿌리치고, 신발도 벗어던지고. 하지만 바지만은 꼭 붙잡고 죽을둥살둥 달렸다더군.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걸 확인한 삼촌은 숲속에 가만히 숨어서 어두워질 때를 기다렸어. 별이 뜨면 집으로 오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해서 몇개나 되는 산을 넘어 집까지 오는 데 꼬박 3주가 걸렸다더구나. 돼지처럼 도토리하고 호두 열매만 주워먹으면서 말이야. 혼쭐이 난 에녹 삼촌은 그 다음부터는 절대 술을 안 마셨지..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도회지 근처에는 두번 다시 가지 않았어. 암! 그러고 나도 채터누가에는 절대로 가지 않았단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나도 채터누가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날 밤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때, 갑자기 할머니에게 물어볼 것이 생각났다. 정말이지 나는 별생각 없이 물어보았다.
“할머니, 외지인이란 게 뭐예요?”
할아버지가 잡수시던 손을 잠시 멈추었지만 접시에서 얼굴을 들지는 않았다. 나를 쳐다보는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할머니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 외지인이란 건 자기가 태어나지 않은 곳에 들른 사람을 말하는 거란다." “할아버지가요, 우리가 외지인일 거라고 하셨거든요.”
나는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하고 나서, 커다란 차에 타고 있던 여자가 우리더러 외지인이 아니냐고 했고, 할아버지는 그럴 거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해드렸다. 드디어 할아버지가 먹던 접시를 밀어놓으셨다.
“아니, 내 말 뜻은 우리가 그따위 길가에서 태어난 건 절대 아니니까 그 사람들한테는 우리가 외지인이란 거였다고. 어쨌든 그런 말은 안 쓰고도 충분히 잘살 수 있는 지겨운 말들 중의 하나야. 내가 늘상 그랬잖아. 지겨운 말들이 너무 많다고 말이야. (할아버지는 할머니 앞에서는 `빌어먹을`이란 말 대신에 `지겨운`이란 표현을 썼다.)”
할머니도 그 점에는 동의하셨다. 하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언어문제에 끼여들고 싶어하지 않으셨다. 예컨대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knowed`니, `throwed`니 하는 말을 쓰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 말로는 `knew`라는 건 다른 사람이 한번도 써보지 못한 새 물건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알았다`고 할때는 `knew`가 아니라 `knowed`가 맞다는 것이다(know의 과거형인 knew는 새롭다는 뜻의 new와 발음이 같다-옮긴이). 또 `threw`라는 건 문 이쪽에서 저쪽으로 지나갈 때 쓰는 말이라서 `던졌다`고 할 때는 `throwed`가 맞다는 것이다(throw의 과거형인 threw는...을 지나서란 뜻의 through와 발음이 같다-옮긴이) 세상 사람들이 쓰는 말이 줄어들면 그만큼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도 줄어들 거라는 게 할아버지의 지론이셨다. 어느땐가는 나한테만 몰래, 세상에는 으레 돼먹지 못한 멍청이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문제를 일으키는 것 말고는 아무 쓸모도 없는 말들을 만들어내는 게 바로 그 멍청이들이라고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일리 있는 말씀이었다. 할아버지는 말의 뜻보다는 소리. 즉 말투를 더 마음에 새겨들으셨다. 할아버지는 언어가 서로 다른 민족이라도 음악을 들을 때는 같은 것을 느낀다고 주장하셨다. 할머니도 할아버지와 같은 생각이셨다. 또 사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야기를 나누는게 바로 이런 식이었다. 할머니의 이름은 보니 비(bonnie bee), `예쁜 벌`이었다. 어느 늦은 밤, 할아버지가 “I kin ye. Bonnie Bee"라고 말하는 걸 들었을때, 나는 할아버지가 ”I love ye"("당신을 사랑해“-옮긴이)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말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그랬던 것이다.
또 할머니가 이야기를 하다가 “Do ye kin me. Wales?"라고 물으실 때가 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I kin ye"라고 대답하신다. 이해한다는 뜻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는 사랑과 이해는 같은 것이었다. 할머니는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사랑할 수 없고, 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는 더더욱 없다, 신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로 이해하고 계셨다. 그래서 두 분은 서로 사랑하고 계셨다. 할머니는 세월이 흐를수록 이해는 더 깊어진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보시기에 그것은 유일한 인간이 생각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들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래서 두 분은 그것을 'kin'이라고 불렀다.
할아버지 설명에 따르면, 옛날에는`친척(kinfolks)`이라는 말이 이해하는 사람, 이해를 함께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loved folks)`이란 뜻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갈수록 이기적으로 되는 바람에 이 말도 단지 혈연관계가 있는 친척을 뜻하는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본래의 말뜻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걸로... 이런 이야기 끝에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셨다.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아버지, 즉 나에게는 증조할아버지가 되시는 분에게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그분은 할아버지 집에 자주 놀러 오곤 하셨다. 그분은 나이 든 체로키족으로 너구리 잭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사실 항상 너구리처럼 심통을 부리거나 짜증을 내곤 했다. 그래서 너구리 잭의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증조할아버지가 사귀시는지 할아버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네는 일요일이 되면 어쩌다 한번씩 계곡 입구에 있는 작은 교회에 나가곤 했다. 어느 일요일, 신앙고백 시간이었다. 말하자면 주님이 자신에게 강림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차례로 일어나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시험받곤 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고백시간에 너구리 잭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몇몇이 내 등뒤에서 나를 놓고 쑤군거린다는 걸 알고 있어. 난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다구. 당신들이 뭐 땜에 그러는지도 알아. 교회 임원 모임에서 내게 찬송가 상자 열쇠를 맡긴 게 샘나서 그렇지? 좋아. 그렇다면 모두들 잘 들어,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지금 당장 나오라구. 내가 가진 걸로 해결해 줄테니.”
너구리 잭은 미친 듯이 발을 쾅쾅 구르면서 사슴가죽 셔츠를 획 젖히더니 권총 손잡이를 두들겼다. 할아버지 말로는 교회 안은 증조할아버지를 포함하여 너구리 잭 정도는 너끈히 감당할 수 있는 건장한 사내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날씨가 좀 바뀌었다고 금방 총을 뽑아들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증조할아버지가 일어나서 잭에게 말씀하셨다.
“잭, 자네가 찬송가 열쇠를 어찌나 잘 간수하는지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감탄하고 있어. 지금까지 책임을 맡은 사람 중에서 자네가 제일이래. 행여 자네 기분에 거슬리는 이상한 소문이 떠도는 일이 있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맹세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슬퍼할 걸세.”
너구리 잭은 이 이야기를 듣자 그제야 마음이 풀리는지 만족스런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제야 휴!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에게 너구리 잭이 왜 그정도 일을 가지고 흥분하는지 물어보았다. 기껏해야 찬송가 상자 열쇠가 아닌가,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그러는 너구리 잭이 도리어 웃긴다고 하면서, 그때 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애야, 너구리 잭을 비웃으면 안된다. 너도 알다시피 체로키족이 고향에서 쫓겨나 오클라호마주로 강제이주당할 때 너구리 잭은 혈기왕성한 젊은이였다. 잭은 산속으로 달아나 열심히 싸웠어. 그러는 동안에 남북전쟁이 터졌는데, 잭은 이번에는 연방군(북군을 말한다-옮긴이)을 물리치면 땅과 집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잭은 또다시 열심히 싸웠지. 그러나 결과는 둘 다 패배로 끝나고 말았어. 전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정치가들이 들어와서 우리에게 남아 있던 얼마 안되는 것들까지 뺏어가려고 했지. 너구리 잭은 또 싸웠어... 그러다가는 달아나 숨고, 또다시 나와서 싸우고... 너도 알다시피 너구리 잭은 평생 싸우는 것밖에 해온 게 없어. 이제 그놈이 갖고 있는 유일한 재산이 바로 그 찬송가 열쇠란 말이다. 너 보기에 너구리 잭이 심통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건 아마 이제 싸울 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서일 거야. 잭은 그것밖에 할줄 모르거든.”
할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너구리 잭이 너무 안돼서 울 뻔했다고 하셨다. 그 다음부터 할아버지에게는 너구리 잭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그런 게 `kin`이며,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의 대부분은 이것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셨다. 물론 할아버지는 “아, 거기다 정치가 때문에 일어나는 분쟁도 있지만,”이라고 덧붙이는 걸 잊지 않으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너구리 잭 때문에 나 역시도 울 뻔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