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족에게 고함 - 봉우 권태훈
3. 구도자의 자세
도(道)
도라는 것은 곧 길을 말함이다. 하늘에는 하늘의 도가 있고, 땅에는 땅의 도가 있으며, 사람에게는 사람의 도가 있어서 서로 변할 수 없는 것이 도요, 그 도가 비록 천도나 지도나 인도의 분별은 있을지언정 시작과 끝의 이치가 동일하고 그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동일한 것이다. 만약 이 원칙에서 터럭만큼이라도 변함이 있다면 이는 도의 원리를 위반한 것이요, 그 위반한 것을 도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천, 지, 인이 다같이 이 도의 원리대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요, 어느 한가지라도 자유로 변함이 없다. 천도나 지도를 본받아서 인도가 된 것이니, 천도나 지도는 대자연을 그대로 걸어오는 것이다. 항상 변함이 없이 오되, 인도는 대자연을 그대로 걷는 것이 아니라 그 대자연을 본받는 관계로, 질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천도나 지도와 동일하게 걸어갈 자질이 충분하나, 행하는 것이 천도를 따르지 않고 엉뚱한 길로 가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도 가리지 못할 일이다. 천도와 지도는 우주의 대자연으로 옛날과 지금이 마찬가지이나 인도만은 과거와 현재의 차이도 있고 동서의 차이도 있어서 서로 같지 않다. 현재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무슨 길인가, 천도나 지도와 동일한 원칙인가 아닌가를 대조해 보고, 그 원칙에서 위반된 일이라면 이것은 인도의 정상적 이치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그 왜곡됨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천도는 밝음으로 음양을 나누고, 춘하추동으로 사시를 정하고, 남극과 북극으로 천축을 정했다. 지도는 밤과 낮으로 음양을 나누고, 수화목금토로 오행을 정하고, 남극과 북극으로 지축을 정했다. 인도는 남과 여로 음양을 나누고, 효제충신으로 오륜을 정하고 생사로 인축을 정했다. 양은 고요한즉 온전해지고, 움직인즉 곧아지며, 음은 고요한 즉 열리고 움직인즉 닫힌다. 음양의 움직임과 정지됨으로 만물이 비로소 생기니, 물과 불의 기운이 서로 부딪치어 씨가 나오고, 씨는 이루어져서 둥글어진다. 흙을 얻어 길러서 사물이 비로소 생기니, 만물의 씨의 밖을 싸고 있는 것이 흙이요, 한을 싸고 있는 것은 금이다. 안을 싸고 있는 것이 둘로 나뉘어져 음과 양이 되고, 안의 윤기 있는 것이 물이요, 씨는 나무요, 두 개의 씨가 서로 합한 것이 불이다. 이 씨가 다시 흙을 얻어 불과 물이 서로 서로 부딪치어 따뜻한 기운이 생긴 후에 비로소 씨눈이 자라서 겉을 싸고 있는 껍질을 터치며 싹이 생겨 나오는 것이니 세상 사람은 항상 봄에 만물이 생겨남을 이야기하지만, 그 생김이란 이미 씨가 처음 날 때 있었던 것이고, 봄에 비로소 싹이 나오는 것이지 그것이 생명의 시초는 아닌 것이다.
인간 생명의 시초도 역시 그러하니, 어머니 탯속의 열 달이 바로 그런 이치여서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 생명의 시초가 있음은 아닌 것이다. 그러하므로 오행의 순서도 수→목→화→토→금이 옳고 사계절 역시 동→춘→하→추가 옳으며 방위도 북→동→남→서가 옳다. 이것이 천도나 지도의 순서요, 인도도 역시 이 순서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이 도를 말한 것이 동양철학의 역이라는 것이다. 하도는 상천하지에 해와 달이 동서로 운행하여 밤과 낮이 되고 이 밤낮이 쌓여 춘하추동의 사서가 이루어짐을 말하고, 해와 달의 밝음을 제일 먼저 받아서 움직인 곳이 동북방이며 백성을 가르친 곳이 동북이라 '제출호진(성인은 진방에서 나온다)' 이라고 하였다. 동남은 그 혜택을 받아서 려하였다고 하고, 서남은 또한 그 풍속의 가르침이 제우손(손방에서 가지런해짐)이라 하였다. 그리고 서북은 지형적으로 배와 같으나 마지막에 광명 하리라고 하였다. 이것이 하도가 우주의 역사를 천도나 지도로 보아서 미리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 다음 낙서는 후천적으로 보니 북방이 물의 근원이요, 남방이 불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았고, 서북방을 보니 천축인 북극이 있고, 서북을 중심으로 중요한 별들이 모두 있다고 말하였다. 서남으로 보니 광대하기 한이 없는 대지가 있어서 이 대지가 중후하나 명려하고 웅휘하여 서남의 중후혼탁과는 아주 관이하다 하였다. 동남을 보니 끝없는 큰 바다에 해와 달의 호흡을 따라 움직이는 기체가 항상 쉼없는 바람이 된다는 말씀이요, 동방을 보니 어둔 밤에 사방이 모두 고요하다가 햇빛이 처음 비추이매 만물이 모두 움직이고, 이 양의 기운이 쌓여 있는 음의 기운과 서로 부딪치어 천둥과 우뢰가 되어 만물의 웅크리고 있는 상태를 깨뜨리어 정기로 변화하게 한다는 말씀이다.
서방을 보니 대지 중의 저장된 물이 출구가 없어서 대양이 되어 정양하는 청정한 물의 본성을 갖게 한다는 말씀이요, 그 다음은 아무리 보아도 중앙은 토가 아니면 안 되겠는데 이 토는 양토를 말함이고 그 양토가 지구를 지배할 중심이더라는 말씀을 옛 성인께서 해놓으신 것이다. 낙서 역시 천도와 지도를 보시고 인도도 이러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도 천도지후를 본받아서 머리가 하늘이 되고, 배가 땅이 되고, 얼굴의 이목구비발로 하늘의 오행을 본받고, 또 얼굴 위의 일곱 구멍으로 북두칠성을 대응하고, 뱃속의 오장육부로 땅의 오행을 본받았다. 이것은 사람이 천도나 지도에 응해서 생겼으며 그리하여 사람의 몸 또한 작은 천지라는 것이다. 사람이 천지의 기를 받아서 이 세상에 나고, 생로병사함은 천지 자연의 이치이나, 살아 행하는 일이 이 천도나 지도에서 볼 수 없는 행동을 한다면 이는 천지이기의 온전한기운을 받지 못하고 그 편벽된 기운만을 받은 것으로 자처하는 것이다. 사람이나 초목금수나 생로병사는 다 같고 생양수장도 같으며, 식물은 식물대로 번식욕이 있고, 동물은 동물대로 번식욕이 있는 것이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동물도 약육강식하고 인간에게도 약육강식의 원리가 횡행한다. 무엇으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것인가. 식물이나 동물은 천지의 대자연 속에서 되어 가는 대로 가다가 모두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 불변의 원리이나, 인생은 천도나 지도를 본받아서 될 수 있으면 그 장점을 본받고 단점을 버리며 음양이기가 동화되어, 앞서 간 성인을 계승하여 뒷사람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므로 사람이라 하는 것이다. 고로 인간이 초목금수와 다름을 가르치고, 옛사람의 걷던 길이 황폐해지면 고치며 또한 좋은 길터가 있으면 천도나 지도를 본받아서 다시 개척하는 것이 인간된 의무요, 책임이라 하겠다.
우주의 인류로 태어난 이상 이 우주를 상대하고 이 우주의 총기관이 되는 길을 개척하며, 수리해서 이 길을 걷고자 하는 뒷사람의 편리를 도모함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대도를 걷게 되는 것이요, 그 뒷사람도 그 대도로 오게 되는 것이다. 이 옛사람의 길이 황폐하여 길이 어딘지 모르게 된 것은 비록 우주의 자연이라 할지라도 이 길이 황폐해진 것을 알면서 수축이나 개척을 등한시한 사람에게 그 책임이 있다. 이 인도는 해와 달의 황도나 적도와 같이 변할 수 없는 큰길인데 우주가 생긴 후에 그 길을 걸어온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 그 길이 황폐해졌다는 것이다. 옛사람의 길을 가 본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 "이 길을 가자니 산길도 있고 물길도 있으며 평탄한 길, 험한 길이 다 있다" 고만 했으나 다시 돌아서서 이 길이 황폐해졌으니 내가 다시 개척하고 수리해서 후세 사람들이 천존지비하고 해와 달이 밝은 줄 알 듯이 알기 쉽게 표시도 해놓고, 노정기도 분명히 해놓고, 이 길을 걸어 보면 그 다음이 어떠하다는 것도 상세히 해놓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우주인들이 아무리 험한 길을 걸었더라도 자기 자신만 알고 갔을 뿐, 이 길이 험하니 뒷사람이 걷기 힘들겠노라고 다시 개척하며 쉽게 걷도록 해주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다. 이같이 힘든 길을 걸어 보고 '내가 걸어 보니 이렇다'고 말씀해 놓으신 것이 성경현전이다. 그러나 이 길을 가기 극히 곤란하니 다시 이렇게 개척하여 속히 가도록 하라고 하신 말씀은 못 보았다. 고금을 통하고 동서를 막론하여 성인들이 이 길 걷기에다 곤란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옛 성인의 말씀에 "이번 대운에는 이 길을 잘 개척해서 그 후에 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오기 쉽게 하리라"는 예언과 묵시가 있다.
우리가 마침 이 때에 났으니 누가 이 옛사람의 길을 새로 개척할 것인가 알고자 하며, 이 길을 크게 개척할 사람이 우리 백두산족이라는것도 역시 천도나 지도에 응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요, 백두산족을 귀하게 여겨 그런 것은 아니다. 지역도 우리 지역이요, 인종도 우리 인종이요, 시기도 때마침 이 때에 우리가 태어나 이 길의 개척함을 볼 수 있을 것인가. 혹 만에 하나라도 이 개척하는 일판에 부역군이라도 될 것인가. 이 붓을 들고서 한편으로는 다행히 여기며 또한편으로는 불행히 여기는 것이다. 다행이라 함은 지역적, 인종적, 시기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요, 불행이라 함은 아무리 유리한 조건이 있더라도 내 자신의 소양이 없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몇 세기 전이나 후에 태어났더라도 이런 정신적 고통은 없을 것이요, 또 인종이 다른 민족이었다면 우리가 이것을 고대할 필요도 없고, 지역이 아주 타지역이라면 혹 우주에 이런 일꾼이 오려니 할 정도이지 무슨 바람이 있을 것인가. 지역이나 종족이나 시기가 모두 갖추어졌으나, 사람이 소양이 없어서 이 길 개척의 일꾼은 고사하고 누가 일꾼이 될지조차 묘연하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리요. 어떻든 우리가 보기에는 틀림없는 일이다. 공자의 대동이라는 도나 석가모니불의 용화라는 도나 순의 중화라는 도나 예수의 부활이라는 도가 모두 같은 의미의 도이다. 우리가 걷고 있는 바로 이 길이다. 이 길이 경으로 위로 아무데로 가든지 공통된 길이라는 것이다. 이 길을 개척해서 우주에 공헌하여 오늘 이후로 우주 인류의 걸을 길을 편리하게 하여 준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 도라는 제목을 쓰다가 말이 길어지는 것을 걷잡지 못하였다. 차후로 천도나 지도의 자연성과 인도의 부자연함을 시간만 있다면 내 소견대로 상세하게 기록해볼까 한다. 이 다음 나올 길을 개척할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는 다음 일이 시작한 후에 알 것이요, 이 길이 머지않아 개척되리라는 것을 내가 미리 확언해 둔다.
내가 항상 말하는 백산운화라는 것은 이 길의 개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길을 개척할 인물들이 벌써 삼육성중의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 출세하였다는 조짐을 본 지 오래라는 말이다. 장마비가 끝난 뒤에 계곡물이 푸르러지듯이, 현재의 양대 탁류가 서로 부딪치어 한바탕의 폭우가 그친 후에 동쪽 하늘에 한점 붉은 해가 비치는 때가 바로 이 길이 광명하게 개척될때라는 것이다. 옛사람의 길이나 현세인의 길이나 별다른 것이 없으나 옛 길은 동서남북에서 각자가 걷던 길이요, 장래 나올 길은 온 우주의 통로라는 것을 또한 확언해 둔다, "때로다, 때로다, 다시 오지 않을 때로다" 라고 외친 최수운도 이것을 의미하였던 것이라 본다. 다가올 오만 년 끝없는 대도가 우리 지역에서 발단된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