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족에게 고함 - 봉우 권태훈
2. 백두산족에게 고함
내 평생의 목적
옛사람들 같으면 육십이란 나이면 공을 이루고 은퇴하여 일없이 한가로운 몸이 되어 깊은 산중의 선비로 여생을 보내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 아직도 공을 이룬다기보다 공을 이룰 만한 사업조차 착수하지 못하고 어느덧 머리가 희어졌으며, 일상의 생활고에 얽매여 춘하추동, 더위와 추위,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쉴새 없이 분주한 몸이 되었으니 옛사람들의 지내온 일에 비하여 부끄러움이 많다. 그래도 나의 마음만은 옛적의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기대를 가지고 미래를 꿈꾸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알맹이 없는 공상이 아닌가 스스로 생각해 본 일도 있으나 아무리 생각을 반복해 보아도 내가 이념하고 있는 일이 내 마음속에서 소멸되지 않고 여전히 청결하게 싹트고 있는 것은 이것이 꿈이건 사실이건 나로서는 평생 같이 해온 둘도 없는 친구인 까닭이다. 내가 이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것은 내력의 부족이요, 그 이상의 내용이 조금이라도 옳지 못한 점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하기 때문에 나의 실력양성을 못하는 것을 후회할지언정, 내가 육십 년 긴 세월을 두고 생각하던 것을 고칠 수는 없는 일이다. 남이야 무어라고 하든 나는 이 이념으로 살고 이 이념으로 죽을 따름이라고 스스로 굳게 맹서를 하는 것이다. 이념하는 것이 무엇인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이 이 치란(혼란과 평화의 두 세계)의 끝없는 순환으로 진행되어온 세계를 늘 평화로운 상춘세계 또는 태평건곤(크게 평화로운 세계)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요, 또 우리 동야에서 먼저 이를 모범으로 보여 세계가 한가족 같이, 온 우주가 모두 평화롭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요, 옛날처럼 평화와 혼란 시기의 순환으로가 아니라 늘 평화로왔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의 실현을 위한 씨앗을 우리 백두산족이 뿌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약자가 평화를 구하는 것은 강자에 대한 애걸이요, 실현될 수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계에 군림할 정신문화를 물질문명과 부합시켜서 다른 나라 다른 민족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대발명을 해 놓고, 이 발명품을 전쟁이나 정복을 위해 악용하지 말고 세계평화의 호소에 사용할 것을 나는 백 번 천 번 부탁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불가능한 것인가를 의심할 사람도 있으나, 이것만은 절대 확실성을 가진 것이요, 내가 비록 어리석으나 우리 민족이 이러한 기본 준비는 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하는 관계로 내가 이념으로 삼고 있는 바를 변함없이 꾸준히 밀고 나아가는 것이다. 내 이념이 내 한몸에 대해서는 아무 이득이 없는 것 같으나 대아가 이루어질 때에는 소아쯤이야 자연 부수적인 문제라고 생각되므로 나는 60년간 가족을 돌보지 않고 일정한 직업도 없이 지내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내 능력을 과대평가 함은 아니다. 이런 이념을 가지고 변함없이 성패를 가리지 않고 죽기까지 나아가는 것이 내 평생의 목적일 뿐이요, 다른 일이 아무리 좋다 해도 도중에 길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쉬지 않고 나아감을 맹서하는 것이다.
우리의 종교는 무엇으로 정할까
우주에 충만한 무형의 도를 우주의 만물이 걷고 있다. 여기서 형이 있는 도 같으면,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가다가 길이 갈리는 곳에서 물어 보고 가든지 아니면 지도를 가지고 가면 별문제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형이상으로 걷는 길은 그 형에 없는 관계로 동서남북의 방향이 없고, 높고 낮음, 깊고 얕음의 지형이 없으며 크고 작음, 넓고 좁음의 구별이나 육해공로의 표시가 없으므로 맹목적으로 가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수많은 각각의 종파들이 가르침의 문을 열고 "내가 가르치는 것이 가장 옳다"고 아전인수를 하니 누가 그들의 올바름과 그름을 알 것이며 비록 올바르다 하여도 우리가 걷는 방향과 같은 방향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길의 종류는 천지개벽에서 다음 개벽까지 몇 차례를 지나도 변하지 않을 길이 있고 가다가 몇 번이고 변할 길이 있다. 대륙간에 통하는 길이 있고, 육대주 오대양의 공로가 있고, 국가간에 통하는 깃이 있으며, 한 나라에는 그 나라의 국도가 있는 것이다. 도, 군, 면, 리에 각기 모두 통로가 있으니 어느 길이 길 아니며, 어느 길로 가든지 못 갈 길이 있으리요만 내가 말하는 것은 태양의 적도와 달의 황도와 같은 불변의 길을 말하고자 함이다. 우리가 가는데 제일 공통된 길, 우리의 국도요, 외국인이 걷더라도 여전히 세계의 대통로가 되어서 가다가 빗나가는 일이 절대로 없는 그런 길을 말하는 것이다. 천 년 만 년 가더라도 통할 수 있는 길, 옛 길이라고 없어지지 않을 길을 택하자는 것이다. 오천 년 전의 상고시대에 우주 역사이래 처음으로 동방의 임금이 되신 단군 성조께서 백두산에 내려오셔서 혼원천지(하늘과 땅의 질서가 아직 서있지 않은 혼돈 상태)의 민족의 첫 임금이 되시고 "위로는 하늘을 받들고, 아래로는 땅을 내디디며, 그 가운데 사람이 존재한다." 삼일신고의 가르침을 베푸셨으니 이것은 천부경의 '일시무 무종일(하나는 없음에서 비롯했고 없음은 하나에서 그친다)이요, 일이삼 삼이일(하나이며 셋이고 셋이며 하나이다)'의 원리로서 그 본은 태양의 앙명이라고 하셨다. 혼원시대란 곧 캄캄한 밤중이라는 말이다.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때는 인간의 숙면기와 같다가 자축인시가 되어서 태양이 밝으니 상천, 하지, 중인이라, 무에서 하나가 생기고, 하나가 또 하나가 되고, 또 하나가 되어서 삼재(천, 지, 인)로 나뉘어지니 이것은 태양의 앙명에서 근본이 생긴 것이다.
단군 성조의 이러한 가르치심이 중국에 가서 유교가 되어 "가운데에서 사망으로 흩어져 만물을 이루고, 끝에서 다시 모여 하나의 이치가 이루어진다." 라고 유정유일(오로지 하나로 사무침)로 가르치는 법이 되니 역시 천부경의 '일시일종'을 그대로 가르치심이요, 이 가르치심이 남방으로 나가서 불교가 되니 이 천부경의 '무종일'이라는 것을 그대로 가르치심이요, 허무적별이 모두 그 무자를 일컬음이다. 또 그 가르치심이 곤륜산으로 가서 선교의 명이 되니 이 명은 또한 천부경의 본 태양의 앙명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일기화삼청(하나의 기운이 세 가지 맑음으로 변화함)하고, 삼청화일기(세가지 기운이 하나의 기운으로 변화함)' 되는 원리이다. 이른바 유불선이 삼교로 나뉘었으나 그 이면에는 삼청화일기하고 일기화삼청하는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가서 그 길을 가르치는 법이 다를 뿐이지 가서 보면 두 곳이 아니요, 한 곳이라는 말이다. 그 외에 많은 길들이 있으나 모두 아전인수하는 가르침이요, 대동소이한 점이 많을 것이다. 다 말할 필요 없이 우리가 가장 걷기 쉬운 길, 오천 년이나 우리 조상들이 걸어오신 길, 알고도 걷고 모르고도 걷는 이 길을 유라고도 하고, 선이라고도 하며 불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변함없는 이 가르치심의 근본은 바로 삼일신고였다. 이 가르치심을 억지로 이름 붙여 수도라 한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생기면 장단이 생기니, 그저 우리는 도라고만 해두자. 이 가르치심을 가지고 말씀하신 이가 성조 단군이니 단군은 우리의 대황조요, 우리의 종교상 교조는 아니시다. 우리의 교조로는 일기화삼청 하고 삼청화일기하는 혼원일기(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태초의 한 기운)를 숭배하고, 이 교를 받드신 대황조는 여전히 대황조로 우리가 같이 숭배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세상에서는 대황조를 대종교의 교조로 모시나 우리는 대황조를 당시의 사람으로서 하늘의 가르침을 받드신 분이요, 우리 민족종교의 교조라면 당연한 태극, 무극, 유극의 원리인 혼원일기라고 본다. 우리의 교리는 삼일신고를 주로 하되 우리가 보고 알게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이 교는 우리만이 걷는 노정이 아니요, 우주에서 움직이는 군생만물들이 모두 걷는 대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그 가르치심은 과거만도 아니요, 현재만도 아니요, 미래만도 아닌 과거무량수겁 전에서 시작한 것이요, 미래무량 수겁에도 그 끝이 없을 대도라는 것을 거듭 이야기해 둔다.
이 교리는 문자화하지 않는 것이 종리이나, 부득이 세상 사람을 상대할 교리가 멀지 않은 장래에 세상에 나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민족종교는 이 가르침으로 정하고 종교의 믿음은당연히 자유인 것이다. 비록 믿음의 자유가 있어서 이 길 저 길로 가더라도 평탄한 길과 험난한 길이 있는 것이고, 누구나 장래에는 모두 평이한 길로 올 것이니 이 길 저 길의 차이를 말할 필요 없이 우리가 걷는 길이나 황폐하지 않도록 옛사람의 큰 도를 다시 우리의 손으로 수도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가 과거에 태어났다면 이런 대도의 갱생을 보지도 못하였을 것인데 다행히 오천 년 개벽 대운에 났고, 우리가 남쪽이나 서쪽이나 북쪽에 나지 않고 바로 이 동방, 그것도 대황조를 받듦이 있는 데서 나고, 시기적으로도 우리 마음대로 이 길을 걷더라도 왜 그 길로 가느냐고 책할 사람 없는 이 때, 이 때에 난 것만이 우리의 다행한 일이요, 우리가 이 다행한 자리에 났거든 누구든지 이 길을 다시 닦아서 우주화시키는 것이 우리가 이 땅, 이 때에 난 값이 있는 것이다. 비록 이 때에 났더라도 아무런 흔적도 없이 있다가 가면 무슨 다행한 일이라고 할 것인가. 우리가 여기서 맹세코 단결하여 이 길을 닦아 나가야 할 것이다. 이 길이 가장 큰길이라 우주에서 상대가 없는 큰길이니 이 길을 걸어 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걸어온 길이 대도라고 할 수도 있으나 이 길은 육해공을 물론하고 우주의 역사가 있는 이래로 그 크고 넓음을 측량할 수 없는 길이다. 이 길을 걸어보면 내가 목적하는 곳을 못 갈 리 없는, 성공 못할 리 없는 평탄한 길이요, 다른 길과 같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찾기 힘든 길이 아니요, 한 길로 가서 묻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길이다. 이것이 바로 대도가 아니고 무엇이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