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포리스트 카터
내 이름은 작은나무
아빠가 세상을 뜨신 지 일년 만에 엄마도 돌아가셨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이때 내 나이 다섯 살이었다. 나중에 할머니에게 듣기로는 엄마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고아가 된 나를 놓고 친척들 사이에서 꽤 시끌벅적한 말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 가족들이 그때까지 살던 통나무집은 언덕 중턱에 있었다. 친척들은 작은 개울이 흐르는 그 뒤뜰에 머리를 맞대고 서서, 내가 어디로 가는 게 좋을지 열심히 입방아를 찧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안되는 재산이긴 하지만, 그 와중에도 페인트칠이 된 침대와 탁자, 의자 따위를 나누어 가지면서 말이다. 할아버지는 친척들 틈에서 벗어나 뜰 구석에 묵묵히서 계셨다. 할머니도 할아버지 뒤에 가만히 서 계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체로키족(미국 남동부의 애팔래치아 산맥 남쪽 끝에 살면서 농경과 수렵생활을 한 수렵 인디언. 1838~1939년에 오클라호마주로 강제이주당했지만, 산속으로 숨거나 달아난 사람들도 있어서, 지금은 멀리 떨어진 두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작은 나무는 본래의 고향인 테네시주에 머무른 그룹의 자손에 속한다-옮긴이)의 피가 반 섞인 혼혈이고 할머니는 순수 체로키족이시다. 할아버지는 거의 2미터가 다 될 정도로 키가 커서 사람들 사이에 서면 머리 하나가 삐죽 솟았다. 거기다 할머니는 땅만 내려다보고 계셨지만 할아버지는 사람들 머리 너머로 계속 내 얼굴을 쳐다보고 계셨다고 한다. 큼지막한 모자를 쓰시고, 교회 갈 때나 장례식 때만 입는 검은 양복을 입으신 채 말이다. 나는 한발한발 뜰을 가로질러 할아버지에게로 다가가 그 긴 다리에 매달렸다. 친척들이 떼놓으려 해도 부둥켜안은 손의 힘을 풀지 않았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울지도 않고 고함도 지르지 않고, 오직 할아버지 다리만 꼭 부둥켜안고 있었다고 한다. 친척들은 떼내려 하고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 하면서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고 있노라니, 할아버지가 가만히 몸을 굽혀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어놓으시고는, “그냥 내버려둬.” 라고 하셨다. 그러자 친척들이 일제히 내 몸에서 손을 뗐다. 할아버지는 좀체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어쩌다 한마디 하시면 누구도 그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는 게 할머니의 설명이셨다. 그날 오후 늦게 할아버지와 할머니, 나, 세사람은 언덕을 내려와 마을로 이어지는 큰길로 나왔다. 한겨울이라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내 옷가지를 싼 보따리를 어깨에 짊어진 할아버지가 길섶을 따라 앞서 걸으셨다. 나는 얼마 안 가 할아버지를 따라잡으려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 뒤에서 따라오시던 할머니도 자주 치마를 들어올리면서 잰걸음으로 걷고 계셨다. 마을에 들어서고 나서도 우리의 이런 행진은 그대로 이어져, 할아버지는 여전히 저만큼 앞서 걸으셨다. 할아버지를 간신히 따라잡은 것은 버스 정류장에 들어서고 나서였다. 우리는 한참 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할머니는 버스가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버스 앞쪽에 걸린 행선지 표지판을 일일이 읽어보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누구보다도 글자를 잘 읽는다고 하셨다. 과연 할머니는 우리가 탈 버스를 족집게처럼 정확하게 집어내셨다. 어느새 주변에는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버스에 올라탈 때까지 기다렸다. 그건 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버스에 발을 올려놓는 바로 그 순간부터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제일 먼저 올라타시고, 그 다음에 나, 할머니는 차문 바로 안쪽 제일 낮은 승강구 계단에 서 계셨다. 할아버지가 바지 앞주머니에서 물림쇠가 달린 지갑을 꺼내 버스 요금을 내려 했다.
“차표는 어디 있는 거요?”
운전사가 어찌나 크게 고함을 질렀던지,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한꺼번에 우리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지금 차비를 내려는 참이라고 말씀하셨다. 할머니가 내 어깨너머로 “어디로 가는지 말해요.”하고 속삭이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시킨대로 운전사에게 말했다. 운전사가 얼마를 내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동전 하나하나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돈을 세어나갔다. 차안의 불빛이 워낙 흐렸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운전사가 손님들에게 얼굴을 돌리더니, 오른손을 들어 보이고는 “하여간 못 말려!”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승객들도 모두 따라 웃었다. 사람들이 웃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우리가 차표가 없다고 해서 크게 악의를 품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버스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웬 아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그 아주머니는 많이 아픈 것 같았다. 눈언저리는 온통 푸르죽죽한 멍이 들었고, 입가에는 시뻘겋게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우리가 곁을 지나치려 하자 아주머니는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가 금방 도로 떼면서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아, 아야 ... 푸우 !”
하지만 웃는 걸 보니 아픈 건 금새 사라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따라 웃었다. 아줌마 옆에 앉았던 아저씨도 자기 넓적다리를 손바닥으로 두들기면서 웃어댔다. 그 아저씨는 굵고 번쩍거리는 넥타이핀을 꽂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부가 부자이고, 필요하면 언제라도 의사에게 치료받을 수 있는 사람들인 걸 알았다. 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 앉았다. 할머니가 손을 뻗어 할아버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할아버지도 내 무릎 위로 손을 뻗어 할머니 손을 가만히 잡았다. 편안하고 따뜻한 기분이 내 몸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그래서인지 나는 금방 잠이 들었다. 버스에서 자갈길로 내려섰을 때는 밤이 한창 이슥해서였다. 할아버지가 다시 걷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 뒤를 따랐다. 유리가 쨍 하고 깨질 것처럼 공기가 차가웠다. 둥그런 수박을 반으로 쪼개놓은 듯한 달이 얼굴을 내밀고, 저 멀리 구부러져 돌아간 곳까지 우리 앞길을 은빛으로 비춰주었다. 자갈길을 벗어나, 가운데로는 풀이 자라고 양옆으로 마차의 바퀴자국이 선명한 흙길로 들어서자 산이 바로 내 옆에 와 있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이때 우리는 시커먼 산그림자 속에 들어가 있었다. 반달은 높은 산등성이 바로 위에 높다랗게 걸려 있어서, 올려다보려면 머리를 완전히 뒤로 젖혀야 했다. 나는 시커멓게 덮쳐누르는 듯한 산의 무게에 몸을 떨었다. 할머니가 내 뒤에서 소리쳤다.
“웨일즈, 얘가 지친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널따란 모자 그늘에 가려 있었다.
“뭔가를 잃어버렸을 때는 녹초가 될 정도로 지치는 게 좋아.”
할아버지는 이렇게 한마디 하시고는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따라잡기가 훨씬 쉬웠다. 할아버지가 걷는 속도를 늦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도 지쳤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더 걸어가자 바퀴자국이 난 널찍한 길도 끝나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산길로 들어섰다. 언뜻 생각으로는 우리가 산을 짓밟으면서 앞으로 나갈 것 같았는데, 실제로 걸어보니 산이 손을 벌려 온 몸으로 감싸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발자국소리가 조금씩 울리기 시작했다. 주위에 뭔가 꿈틀거리는 것들이 있었다. 만물이 다시 살아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은 휘파람소리와 숨소리들이 나무들 사이에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춥지는 않았다. 길옆에서는 달랑거리는 소리와 깐닥거리는 소리, 술렁이는 소리들이 뒤섞여 흘러갔다. 바위 위를 굴러내려오면서 멈추는 곳마다 여울을 만들고, 다시 굴러 내려가는 시냇물 소리였다. 이제 우리는 깊은 계곡 속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느새 반달은 맞은편 산등성이 뒤에 숨은 채 뿌연 은빛만을 하늘 가득히 토해내고 있었다. 덕분에 계곡에는 회색빛 아치 같은 것이 드리워져 우리 모습을 희미하게 밝혀주었다. 할머니가 뒤에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인디언 노래였다. 굳이 가사를 붙여 부르지 않아도 어떤 노래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듣고 있노라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길고도 구슬픈듯한 울음소리가 오열하는 듯한 긴 여운을 남기고 울려퍼지면서 산속으로 도로 사라져갔다. 할아버지가 쿡!하고 웃으셨다.
“저건 모드라는 놈이야.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니까 귀로 어떻게 해보려는 거지.”
잠시 후 우리는 여러 마리의 개들에게 둘러싸였다. 개들은 할아버지 주위에서 낑낑거리기도 하고, 처음 보는 내 냄새를 맡으려고 킁킁거리기도 햇다. 모드가 짖는 소리가 또 들렸다. 이번에는 아주 가까웠다. 할아버지가 “그만 해! 모두.”하고 소리지르자, 그 소리 임자가 누군지 알아챈 모드는 쏜살같이 달려와 우리에게 뛰어들었다. 그리 넓지 않은 개울 위에 걸쳐진 통나무다리를 건너고 나니 조그만 오두막집이 있었다. 그 집은 산을 등지고 서 있었는데 앞쪽으로는 기다란 베란다가 시원스럽게 뻗어 있었고, 뒤쪽으로는 커다란 나무들이 서 있었다. 오두막집 가운데로는 약간 폭이 있는 마루가 있었고, 그 양옆으로 방들이 있었다. 마루 양끝은 그대로 바깥으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을 마루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산사람들은 `개통로`라 불렀다. 개들이 주로 그곳으로 들락거렸기 때문이다. 이 마루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부엌 겸 식당 겸 거실로 쓰는 커다란 방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침실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쓰는 침실이었다. 남은 하나를 내 방으로 쓰기로 했다. 히코리 나무로 만든 테두리에다 사슴 가죽을 잘 묶어서 만든 침대는 부드럽게 쿨렁거렸다. 침대에 누우니 열린 창문으로 개울가에 서 있는 나무들이 희미한 빛속에서 귀신처럼 시커멓게 보였다. 울컥 엄마 생각이 나고, 낯선 곳에 와 있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때 누군가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침대 옆 마룻바닥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널따른 치마자락을 마루에 펼치고, 흰머리가 많이 섞인 땋은 머리를 어깨에서 무릎으로 늘어뜨리고 앉아 계셨다. 할머니도 나처럼 창 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이윽고 할머니가 낮고 부드러운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숲도, 가지를 스치는 바람도, 이젠 모두 그가 온 걸 알지. 아버지 산이 노래불러 맞아준다네. 아무도 작은 나무를 무서워하지 않아. 작은 나무가 착한 걸 아니까. 모두가 소리 높여 노래하지. “작은 나무는 외톨이가 아니야.” 장난꾸러기 라이나도 졸졸졸졸 물소리 울리며 즐겁게 춤추며 산을 내려간다네. “내 노래 들어봐요. 우리 형제가 찾아왔어요. 작은 나무는 우리 형제, 작은 나무가 여기 있어요.”
어린 사슴 우스디도 메추라기 미네리도 까마귀 가그까지 노래부르네. “작은 나무는 상냥하고, 강하고, 용감하다네. 작은 나무는 절대 외톨이가 아니야.”
할머니는 노래를 부르면서 몸을 천천히 앞뒤로 흔드었다. 그러자 나도 바람이 재잘거리고, 시냇물 라이나가 내 이야기를 노래부르며 형제들에게 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노래 속의 작은 나무(저자 포리스트 카터의 인디언 이름-옮긴이)가 바로 나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산 형제들이 날 좋아하고 나하고 같이 있고 싶어하는 걸 보니 기뻤다. 그래서 나는 울지도 않고 편안하게 잠들었다.
자연의 이치
난로에서 옹이 많은 소나무 땔감이 타닥타닥 기름 튀기는 소리를 내며 타는 동안, 가냘픈 몸집의 할머니가 저녁마다 흔들의자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면서 모카신(바닥이 평평하고 부드러운 인디언 신발-옮긴이) 한 켤레를 만드는 데는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할머니는 먼저 갈고리칼로 사슴가죽을 찢어서 끈을 만든 다음, 빙 돌아가며 테두리를 꿰맸다. 이렇게 해서 구두가 완성되자 이번에는 그것을 물에 담갔다. 이 젖은 구두를 신고 방안을 왔다갔다하면서 구두를 말리는 일은 내 몫이었다. 이렇게 말리면 신발이 발에 딱 맞아 공기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그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멜빵바지를 입고 잠바 단추를 잠그고 난 나는, 드디어 모카신 속에 가만히 발을 집어넣었다. 주위는 아직 어둡고 추웠다. 나뭇가지를 뒤흔드는 아침 바람조차 불지 않는 이른 시각이었다. 할아버지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 산꼭대기까지 데리고 가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깨워주겠다`고는 하시지 않았다. “남자란 아침이 되면 모름지기 제힘으로 일어나야 하는 거야” 할아버지는 조금도 웃지 않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신 후 여러 가지 시끄러운 소리를 내셨다. 내 방 벽에 쿵 하고 부딪치기도 하고, 유난스레 큰 소리로 할머니에게 말을 걸기도 하셨다. 사실 나는 그 소리 때문에 눈을 뜬 것이다. 덕분에 한발 먼저 밖으로 나간 나는 개들과 함께 어둠속에 서서 할아버지를 기다릴 수 있었다.
“아니, 벌써 나와 있었구나!” 할아버지는 정말 놀랍다는 얼굴로 말했고, “예, 할아버지.”
내 목소리에는 뿌듯한 자랑이 묻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우리 둘레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개들에게 손가락을 내밀고 “너희들은 그냥 있거라.”라고 지시했다. 개들은 꼬리를 사리면서도 졸라대듯이 코를 끙끙거렸다. 모드는 컹컹 짖기까지 했다. 그그렇지만 어느 개도 우리를 따라오지는 않았다. 모두들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빈터를 빠져 나가는 우리를 실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도 시냇가 둑길을 따라 만들어진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올라가본 적은 있었다. 꼬불꼬불 구부러진 그 길을 따라 더듬어 가다보면, 꽤 널찍한 풀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할아버지는 그곳에 마구간을 지어 노새와 소를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그쪽 길로 가지 않고, 곧장 오른쪽으로 꺽어지더니 산허리를 돌아 올라가기 시작하셨다. 이 길은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 그렇듯이 꽤 가파른 경사를 이루면서 위로 이어져 있었다. 나는 급한 경사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종종걸음으로 할아버지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그전과는 뭔가 다른 게 느껴졌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어머니인 대지, 모노라(MON-O-LAH)가 내 모카신을 통해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여기서는 볼록 튀어나오거나 밀쳐올라오고, 저기서는 기우뚱하거나 움푹 들어간 그녀의 존재가 내 몸으로 전해져왔다...그리고 혈관처럼 그녀의 몸 전체에 퍼져 있는 뿌리들과, 그녀 몸 깊숙이 흐르는 수맥의 생명력들도 어찌나 친절하고 부드러운지 그녀의 가슴 위에서 내 몸이 통통 뛰는 것 같았다. 모두가 할머니가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차가운 공기 탓에 내 입김은 뿜어져나올 때마다 작은 구름을 이루었다. 저 멀리 아래쪽에 개울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벌거벗은 나뭇가지 아래로 이빨처럼 자라난 고드름들에서는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더 높이 올라가니 길바닥에도 얼음이 깔려 있었다. 이제 어둠은 사라지고 새벽 회색빛이 사방을 뒤덮었다. 할아버지가 멈춰서서 길섶 쪽을 가리켰다.
“여기가 야생 칠면조가 다니는 길이야, 한번 보련?”
나는 쪼그리고 앉아서 그 작은 발자국들을 보았다. 그것은 가운데 동그란 자국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간 줄무늬 모양이었다.
“이제 덫을 놓아볼까.”
길을 따라가던 할아버지는 얼마 안 가 그리 깊지 않은 구덩이를 찾아냈다. 우리는 먼저 구덩이 위에 수북이 쌓인 나뭇잎부터 치웠다. 그러고 나자 할아버지는 긴 칼을 끄집어내서 눅눅한 땅을 파들어가기 시작했다. 파낸 흙은 낙엽들 사이에 뿌렸다. 가장자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구덩이가 깊어지자 할아버지는 나를 구덩이에서 끌어올렸다. 우리는 나뭇가지를 끌고 와서 그 구덩이에 걸쳐놓고, 그 위에 나뭇잎 한무더기를 뿌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할아버지는 그 긴 칼로 야생 칠면조가 다니는 길에서 구덩이로 비스듬히 이어지는 작은 도랑을 파더니, 주머니에서 붉은 인디언 옥수수 알갱이들을 꺼내 도랑을 따라 쭉 뿌려나갔다. 구덩이 속에도 옥수수 한웅큼을 던져넣었다.
“자, 이제 가자.”
할아버지는 다시 숲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서리가 내린 것처럼 땅에서 솟아오른 얇은 얼음들이 발밑에서 부서졌다. 맞은편 산이 휠씬 가까워졌다. 그럴수록 골짜기는 가늘고 길게 갈라져서 저기 까마득히 발 아래로 멀어졌다. 그 갈라진 바닥에는 칼날 같은 시냇물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길에서 벗어나 낙엽 위에 주저앉았다. 그때 마침 아침 해님이 산꼭대기로 머리를 내밀어 계곡 전체에 첫 햇살을 비추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주머니에서 건빵과 사슴고기를 꺼냈다. 우리는 산을 바라보며 아침식사를 했다. 산꼭대기에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반짝이는 빛들이 하늘 위로 솟구쳤고, 얼음에 덮인 나뭇가지들은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거렸다. 아침 햇살은 물결처럼 아래로 내려가면서 밤의 그림자들을 천천히 벗겨가고 있었다. 정찰을 맡은 까마귀 한 마리가 하늘을 날면서 날카롭게 깍깍 세 번 울었다. 아마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알리는 신호였으리라. 이제 산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천천히 하품을 하고 있었다. 하품으로 토해낸 미세한 수증기들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해가 나무에서 죽음의 갑옷인 얼음을 서서히 벗겨감에 따라, 산 전체에서 살랑거리고 소곤거리는 소리들이 되살아났다. 할아버지도 나처럼 눈을 모으로 귀를 기울이고 계셨다. 아침 바람이 나무 사이에서 낮은 휘파람소리를 일으키는 것에 맞추어 산의 소리도 점점 커져갔다.
“산이 깨어나고 있어.”
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할아버지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래요, 할아버지, 정말 산이 깨어나고 있어요.”
그때 나는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할아버지와 내가 함께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란 걸 깨달았다. 밤의 그림자는 이제 점점 더 아래로 밀려나더니, 그리 넓지 않은 풀밭을 가로지르면서 뒷걸음질쳤다. 풀들이 무성하게 자란 그 풀밭은 햇빛을 받아 물결처럼 반짝였다. 그 풀밭은 산의 품속에 폭 안겨 있는 모양새였다. 할아버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메추라기들이 퍼덕거리고 날아다니면서 풀씨를 쪼아먹고 있었다. 다시 손을 든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얼어 붙은 듯한 푸른 하늘을 가리켰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는데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저 멀리 하늘 가장자리 쪽에서 얼룩 같은 것이 점점 커지며 다가왔다. 그림자가 자기보다 앞서가지 않도록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해서 날아오던 그 새는, 갑자기 속도를 줄이는가 싶더니 산허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스키 선수처럼 순식간에 나뭇가지 끝의 하늘 위로 날아온 그 새는 날개를 반쯤 접더니... 마치 갈색 총알처럼...아니, 그보다 더 빨리 메추라기를 향해 날아왔다. 할아버지가 쿡 하고 웃으셨다.
“저놈은 탈콘 매란다.”
메추라기들이 후두두 날아오르며 잽싸게 숲 쪽으로 달아났다. 한데 그만 한 마리가 처지고 말았다. 매는 바로 그놈에게 달려들었다. 깃털이 하늘로 흩어지고, 두 마리 새는 한데 엉켜 땅으로 떨어졌다. 매의 날카로운 부리가 메추라기를 연방 쪼아댔다. 잠시 후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 매의 발톱에는 죽은 메추라기가 쥐어 있었다. 매는 다시 산허리 쪽으로 날아가더니 아득히 사라져버렸다. 나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나보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신 걸로 봐서 말이다.
“슬퍼하지 마라, 작은 나무야, 이게 자연의 이치라는 거다. 탈콘 매는 느린 놈을 잡아갔어. 그러면 느린 놈들이 자기를 닮은 느린 새끼들을 낳지 못하거든. 또 느린 놈 알이든 빠른 놈 알이든 가리지 않고, 메추라기 알이라면 모조리 먹어치우는 땅쥐들을 주로 잡아먹는 것도 탈콘 매들이란다. 말하자면 탈콘 매는 자연의 이치대로 사는 거야. 메추라기를 도와주면서 말이다.”
할아버지가 칼로 땅을 파더니 부드러운 뿌리를 뽑아냈다. 껍질을 벗기자 겨울용으로 비축된 즙이 방울져 솟아올랐다. 그것을 반으로 잘라 두꺼운 쪽을 나에게 주신 할아버지는 다시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게 이치란 거야.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 사슴을 잡을 때도 제일 좋은 놈을 잡으려 하면 안돼. 작고 느린 놈을 골라야 남은 사슴들이 더 강해지고, 그렇게 해야 우리도 두고두고 사슴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거야. 흑표범인 파코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 너도 꼭 알아두어야 하고.”
여기까지 말한 할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꿀벌인 티비들만 자기들이 쓸 것보다 더 많은 꿀을 저장해두지... 그러니 곰한테도 뺏기고 너구리한테도 뺏기고... 우리 체로키한테 뺏기기도 하지. 그놈들은 언제나 자기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쌓아두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똑같아. 뒤룩뒤룩 살찐 사람들 말이야. 그런 사람들은 그러고도 또 남의 걸 뺏어오고 싶어하지. 그러니 전쟁이 일어나고... 그러고나면 또 길고 긴 협상이 시작되지. 조금이라도 자기 몫을 더 늘리려고 말이다. 그들은 자기가 먼저 깃발을 꽂았기 때문에 그럴 권리가 있다고 하지... 그러니 사람들은 그놈의 말과 깃발 때문에 서서히 죽어가는 셈이야... 하지만 그들도 자연의 이치를 바꿀 수는 없어.”
우리는 산길을 따라 왔던 길을 도로 내려왔다. 야생 칠면조 함정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벌써 해가 우리 머리 위에 높이 떠 있었다. 아직 함정은 보이지도 않는데, 칠면조 소리부터 들렸다. 칠면조들이 구덩이에 빠진 것이다. 제놈들도 어지간히 놀랐던지 연방 꽥꽥거리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할아버지, 입구가 꽉 막힌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머리를 숙이기만 하면 나올 텐데 왜 안 그러죠?”
할아버지는 배를 깔고 엎드린 채 구덩이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는 커다란 칠면조 한 마리를 끄집어냈다. 끈으로 그놈 발을 묶고 난 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보며 씽긋 웃으셨다.
“칠면조란 놈들도 사람하고 닮은 데가 있어. 이것 봐라. 뭐든지 다 알고 있는 듯이 하면서, 자기 주위에 뭐가 있는지 내려다보려고는 하지 않아. 항상 머리를 너무 꼿꼿하게 쳐들고 있는 바람에 아무것도 못 배우는 거지.” “그 버스 운전사처럼요?”
나는 할아버지를 몰아세우던 그 버스 운전사를 잊을 수가 없었다.
“버스 운전사?”
의아한 얼굴로 되묻던 할아버지는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구덩이 속에 머리를 넣어서 또 다른 칠면조를 꺼내는 동안에도 할아버지는 웃음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래, 그 버스 운전사처럼. 그 사람도 지금 이 칠면조처럼 꽥꽥거려댔으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작은 나무야, 그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이 짊어져야 할 짐이란다. 우리한테는 아무 문제도 없으니까 신경쓸 필요 없단다.”
할아버지는 다리를 묶은 칠면조들을 땅바닥에 늘어놓았다. 모두 여섯 마리였다. 그놈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할아버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이는 대충 다 비슷한 것 같다... 부리 두께를 보면 나이를 알 수 있거든. 우린 세 마리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작은 나무야, 네가 골라보렴.”
나는 그놈들 주위를 빙 돌다가 땅에 털썩 주저앉아서 한놈 한놈 자세히 관찰했다. 그러다가 일어나서 다시 그 둘레를 한바퀴 돌았다. 신중해야 했다. 결국 나는 손과 무릎으로 땅바닥을 짚고 칠면조들 사이를 기어다니면서 비교를 하고 나서야 그중에서 가장 작은 세 놈을 집어낼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머지 세 마리의 다리에 묶인 끈을 풀어주었다. 풀려난 놈들은 날개를 파닥거리면서 저 아래쪽 산허리로 달아나 버렸다. 남은 세 마리 중 두 마리를 어깨에 짊어진 할아버지가 다른 한 마리를 가리켰다.
“저놈은 네가 가져갈 수 있지?” “예, 할아버지.”
대답은 했지만 과연 내가 잘해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뼈가 두드러진 할아버지 얼굴에 장난스런 웃음이 서서히 번져갔다.
“네 이름이 작은 나무가 아니었더라면... 작은 매라고 했을 게야.”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산길을 내려왔다. 칠면조가 무거웠지만 어깨를 누르는 무게조차 기분 좋게 느껴졌다. 해는 벌써 저편 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길가 나뭇가지들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 덕분에 앞길은 황금빛 줄무늬로 어른거렸다. 이렇게 늦은 겨울 오후가 되면 바람도 자게 마련이다. 앞서 가던 할아버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이 영원히 계속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가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렸다! 나도 그 이치란 걸 배운 것이다!
지는 겨울해 받으며 산길을 걷다보면, 길 위에 난 발자국 따라 걷다보면, 오두막집으로 이어지지. 야생 칠면조 다니는 길로. 이게 바로 체로키의 천국이라네.
산꼭대기로 눈 들어 아침의 탄생 지켜보렴.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는 바람의 노래 들어보렴. 대지인 모노라에서 생명이 솟는 걸 느껴보렴. 그럼 체로키의 이치를 알게 될 거야.
새벽이 올 때마다 삶 속에 죽음 있고, 죽음 속에 생명 있음을 알게 되리니. 모노라의 지혜를 배우면 체로키의 영혼을 느낄 수 있을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