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족에게 고함 - 봉우 권태훈
2. 백두산족에게 고함
백두산족에게 고함
1. 백두산족은 누구인가?
백두산은 일찍이 온 겨레의 첫 조상이 되시는 단군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어 교화의 터를 잡으신 성스러운 산으로서 지나온 역사 동안 우리 민족의 삶의 주된 무대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겨레의 마음속에서 잊혀져가고 말았다. 백두산에 대한 망각은 바로 우리 민족 주체의 유무에 따라 부침해왔다. 우리 배달민족이 대륙 한복판에서 당당한 삶을 누려가고 있을 때 백두산은 강성한 겨레의 성산으로서 받들어졌으며 통일된 국민의식의 상징으로서 자리했으나, 국력이 쇠하여 반도 이남에서 주된 삶을 이끌어가던 시대에는 이름마저 남이 부르는 장백산으로 둔갑하는 지경으로, 지도상에 백두산이 어디에 백두산이 어디에 표시되든 무관한 우리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삼천리 반도 내에서, 그것도 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려버린 지 반세기가 되어 가는 지금 우리들에게 백두산은 과연 어떠한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러한 물음이 내포한 분단된 삶의 허탈감이 있기에 백두산은 더욱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 찢기워진 삶의 봉합을 위해, 분단된 민족의 통일을 위해 백두산은 오늘도 남과 북의, 만주의, 시베리아의, 중앙아시아의, 미국의, 일본의, 세계의 모든 단군의 자손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백두산의 회복은 잃어버린 우리 민족주체의 회복이요, 민족사와 문화의 회복이며 통일된 민족국가로의 회복이기도 하다. 백두산족이라고 이름하였을 때 이것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이룩되어진 고대 문화권의 창시자이자 담당자였던 우리 겨레, 즉 단군의 자손으로서 일관된 역사와 문화를 계승해가며 살아가는 우리 한민족을 나타낸다 하겠다. 우리 백두산 겨레가 나아가는 길은 단순히 고대의 찬란했던 문화를 되새기자는 복고적 감상에서 발단하는 것이 아니며, 21세기를 앞두고 있는 첨단과학 기술문명시대의 온갖 문제와 모순들을 안으로 풀어 나가며, 아울러 민족의 대립과 분열을 화합과 통일로서 해결해 나가는 겨레의 활로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백두산은 우리 모두가 나아갈 정신적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영산으로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2. 황백전환기와 정신문명의 도래
황백전환기라 함은 바로 백산대운이 열릴 시기를 말한다. 백인들이 주축이 되어온 서구문명의 선구적 역할은 이제 한 세대 안에 끝나고, 황인종-특히 한국, 인도, 중국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계적 문명권이 열리고 있다. 이것은 얼핏 지극히 인종주의적 발상에 사로잡힌 편견같이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20세기 과학물질문명의 핵심은 사실 백인을 다수인종으로 하는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 주도한 것이었고 앞으로 21세기 과학기술문명의 핵은 거의 피부가 누런 사람들 속에서 창출되어질 것임을 암시한 것에 불과하다. 확실한 것은 전환의 시대는 오고 있으며 그 조짐은 이미 몇십 년 전부터 천문에, 역학에, 추수에, 원상에 드러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이 황백전환기가 바로 정신문명이 도래하는 백산대운으로 이어지는 것이라 하겠다. 백산대운이라 함은 곧 백두산족의 큰 운명을 이르는 말로서 삼천 년만에 찾아온 역사적 순환인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새 문명의 전환은 세계적인 대성현이 출현하시되, 그 성인의 도력으로가 아니라, 인간적인 기술개발이라든지, 살상 파괴적 병기를 억제할 수 있는 평화적 무기의 발명 등, 새로운 물질문명의 건설로서 나아가 진정한 평화세계를 이룩함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와 같이 위대한 정신문명의 발조에 관한 옛 성인들의 표현을 들자면, 우리의 성조 단군께서 4286년에 보통 사람으로 오신다는 것과, 대순이 4243년에 보통 사람으로 오신다는 것과, 석가모니불이 삼천 년 후에 용화세계가 된다는 것과, 문왕의 선후천 변괘론이 있고, 예수의 이천 년 후 부활론이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이시기에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대립이 없어지고 조화되어 지상천국이니, 극락세계이니, 장춘세계이니, 태평건곤이니의 창설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평화세계 건설은, 우리 백두산족이 먼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자는 홍익인간 이념을 기반으로 삼는 대동책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을 하나하나 성취해 나갈 때 가능하다. 이러한 이상은 결코 허황한 몽상가의 허튼 소리가 아니라, 지나간 인류역사의 어두운 질곡에 대한 물극필반의 원리로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3. 단학수련의 시대적 요청
단학의 기원은 백두산족의 성조이신 단군의 가르침에서 비롯한 바, 인간생명의 근원인 숨을 조절하여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고 더 나아가 본래 지니고 있던 정신의 밝음을 다시금 밝게 되찾음을 제일 목표로 삼아 그 명명함을 바탕으로 자기 주위의 세상을 이롭게 함에 힘쓰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하고 있다. 단학은 큰 길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걸을 수 있어서, 적은 것을 원하는 이에겐 적은 만큼, 큰 것을 얻기 위해 힘쓰는 이에게는 그만큼 큰 것을 제공한다. 실로 고대로부터 우리 겨레의 면면한 숨결이 고동치고 있는 고유한 정신수양 체계로서, 삼국시대의 화랑도 사상이나 국선, 조의선인제도 등은 같은 맥락이다. 또한 이 체계 안에는 지, 덕, 체의 세 가지 면을 아울러 닦을 수 있는 조상 전래의 지력개발법, 체력양성법, 덕성함양법 등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어서 누구나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능력에 맞게 선택하여 정성껏 행하기만 한다면 고유한 민족문화의 탁월한 하나의 계승자로서 사회발전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단학의 본질이 결코 현실 도피적이거나 은둔 지향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내온 역사를 보면 주체적인 민족고유사상이 외래문화 도입에 따른 사대주의의 만연으로 탄압을 받은 적이 매우 많아서 그때마다 역사의 주류로 나서지 못하고 그 밑으로 숨어 지내며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함에 바빴던 것으로 안다. 이제 역사적인 민족의 통일대업이 금세기 안으로다가온 시점에서 우리 백두산족의 민족 자주정신의 완벽한 회복을 위해서, 또한 홍익인간 이념의 현세적 실현을 이룩할 정신문명의 도래를 위해서, 민족 구성원 모두에게 민족정신의 단결을 튼튼히 해줄 단학 수련의 문호를 활짝 열면서 우리 모두 통일이라는 대동의 배를 저어 나갈 것을 천지신명에게 고하는 바이다.
대황조 봉안에 대한 사견
대황조는 우리 겨레의 가장 높은 첫 조상이 되는 분으로서 '큰 할배' 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오족은 누구나 다같이 대황조를 숭배하는 것이 당연하다. 고대에는 집집마다 단군을 모시고, 시월 상달 초사흘이 개천절인 관계로, 어느 집을 막론하고 터주(이 땅의 주인이라는 의미)에 고사지내지 않는 집이 없었다. 이 풍속이 오천 년에 가까운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것을 보면 그 당시를 추측할 수 있다. 중간에 나라에서 별별 방식으로 다 방해하였지만 우리 민족의 조상을 위하는 이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삼국통일시대부터 조선 말엽까지는 국가나 지배층에서 대황조를 모시는 경우는 없었고 오직 민간에서만 숭배하는 유풍이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신라 말엽부터 당나라를 모방하려는 바람이 불어서 자기 나라의 전래하는 역사가 말살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군님이 우리의 대황조이시며, 또 우리나라 최초의 임금이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단군시대의 연대가 중국 요순시대와 같다고 보는 것은 우리의 가장 큰 역사적 결함이다. 우리가 본 바로는 현재 단군기원보다 304년을 더한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가 올바른 단군기원이라고 확언해 둔다. 지금으로부터 사천 오백팔십구년 전에 이 동방에서 대황조께서 탄생하셔서 우리 인류를 처음으로 만물의 영장답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고, 처음으로 국가를 이루어 임금이 되셔서 가르침을 받은 무리 중에서 무수한 인물들을 책봉하시고 사방으로 파견하셔서 각 민족을 가르치도록 하셨는데, 이것이 중국에서 말하는 복희, 신농, 황제로 대칭된 우리 단군 역대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요가 처음으로 한족을 통치한 제왕이라고 확언해 둔다. 공자가 춘추시대에 나셨으나 당시 여러가지 전설을 모두 말살하실 수 없기에 오로지 중국 역대의 왕들의 치국평천하 하던 일을 말씀하시거나 기록하실 때 "중국의 문화는 요순시대에 시작되었다." 라고 하신 것을 볼지라도 오제가 모두 중국의 천하를 다스린 제왕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된다. 주역에는 복희씨가 처음으로 팔괘를 그린 일을 말씀하시고, "북동쪽의 도가 밝으므로 모든 것의 처음과 끝이 여기서 이루어진다." 라고 하시며, 또한 "임금은 동쪽에서 나온다" 라고 명시하셨다.
주역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것이 과거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를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원리는 뚜렷한 역사적 사실과 부합된 것이다. 공자도 우리 배달족이므로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바다 건너 동쪽으로 가고 싶다" 라고 하셨다. 그리고 "우임금의 치수 사업에 주신의 공력을 잊을 수 없다" 라고 하였는데 그 주신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 중국인들은 우리들을 '신' 이니 '진' 이니 한다. 그 후에 이름이 변하여 숙신이니 여진이니 선비니 하는 것은 모두 소리를 따서 지어낸 것이요, 모두 우리 민족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한족에게 우리가 패해서 밀려나기는 주무왕시대부터이다. 그래서 한족은 광대한 토지를 차지하여서 점점 더 늘어나고 우리 족속은 여러갈래로 나뉘어져서 극히 쇠약해졌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잃지 않고 자주적으로 지냈으나, 삼국통일이 있은 후부터 우리 역사는 점점 없어지기 시작하여 벌써 천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으니 우리 대황조의 역사를 다시 볼 도리가 없게 되었다. 현재 이야기되고 있는 단군사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 현상을 증명할 어떠한 근거도 문자로 명시되어 있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중국에 가서 보면 단군의 역사가 종종 단편적인 글이나 야사에 나타나 있고, 도관이나 선서에서는 더 많이 볼 수 있다. 기자의 홍범이라는 것이 단군님에게서부터 전해져 내려온 근본 취지인 듯하고, 요순의 전수심법 역시 우리 대황조의 전수심법인가 한다.
천여 년 중단된 역사의 고고학적인 증거를 나는 지금 구하는 중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생긴 가장 큰 폐단은 우리의 대황조 숭배심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절과 관이 병행하나 우리나라에서는 관이라는 이름이 없다. 우리나라의 절에서 숭배하는 현상을 보면 부처와 제석전과 산신각과 칠성각과 독성각을 함께 숭배하는 것이 보통인데 우리는 중국의 사원에서 제석천을 동일하게 숭배하는 일은 별로 보지 못했다.. 이는 우리나라에 한한 일이다. 이 제석전이 바로 단군전이라고 본다. 시골에서도 시월 상달에 터주의 제석단지에 고사지내는 일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불전을 숭배할 장소가 없어 제석전에다 같이 모셨던 것인데, 불교는 융성하고 단군의 전래 역사는 국책상으로 소멸되던 때라 불전이 주인이 되고 주인이던 제석전이 나그네의 위치로 밀려나간 것이다. 신라 말기까지도 화랑도의 국선과 같은 풍속이 남아 있었으나 고려와 조선조에 와서는 단군 숭배사상이 아주 없어져서 국가에서는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동몽선습과 동국통감에 겨우 "신인이 태백산(백두산) 박달나무 아래 내려오사" 라고 씌어 있을 정도요, 상세한 표현은 없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조선시대 말엽에 와서 비로소 대종교의 나철선생이 총책임자가 되어 천여년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을 밝히는 성스러운 일을 시작했으나 역시 미진한 것은 수년 후 나라가 망하고 일제가 이를 허용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뜻 있는 분들은 만주로 가서 민족운동을 하였고, 대종교도 쉼없는 노력을 하였다. 을유 8.15해방에 선배 여러분이 입국한 후로 민족적 대선전을 하여 국가에서 계몽정신을 가져야 함이 당연한데 소위 주권자라는 사람들이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어서 민족의 근원이신 대황조를 숭배하기보다는 자기들이 숭배하는 대상을 국민 전체가 숭배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들이 어떻게 대황조를 숭배함으로써 민족정신을 단결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인가?
그러나 민간인으로 자기의 주된 목적이야 무엇이건 간에 항상 대황조를 모시고 민족통일사상을 고취하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크게 감사한 일이다. 대황조께서 나라를 처음 여신 시조라고 하는 것으로도 누구나 모셔야 할 것이며, 그뿐 아니라 우리 인류사에 비할 바가 없는 대성이시고 우리 배달족에게 오족을 통한 조상이시니 누구라도 모시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비록 먼 조상일지라도 모두에게 다 같은 조상이니 누구 숭배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비록 다 같은 자손이나 이 대황조를 모시었거든 욕되지 않게 하기를 빌 뿐이다. 그리고 장래에는 국가적으로 숭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대황조를 숭배하는 마음없이 모두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치 주권자들이란 근본이 없는 나무와 같다고 확언해 둔다. 입으로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린다는 말과 대황조 이념 운운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하는 일을 보면 대황조 앞에 죄인 아닌 사람이 별로 없다. 앞으로 대황조의 홍익인간 이념이 여실히 드러나기를 빌며 이만 줄인다.
단기 4285(서기1952)년 9월 28일 |